저녁 쯤에 장성에 들러 저녁을 먹고 근처 산에 올랐다
옛날에는 장성읍이 태백시장있는 황지동보다 헐 컸다 한다
태백시 장성동은 1933년부터 광산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장성에서 석탄이 최초로 발견 된 후 일본인에 의해 삼척개발주식회사(장성광업소 전신)가 설립되면서
석탄을 캐기 시작 하였다. 6 · 25전쟁으로 휴광하였다가 1960년에 대한석탄공사가 창립되면서
다른 탄광들 도 개발되고, 석탄채굴을 위해 광부들이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태백시는 1960, 1970년대 석탄산업의 발전에 힘입어 대규모의 인구가 유입되었고 1981년 시로 승 격하였다. 이후 1987년에는 인구수가 12만 명에 달할 정도로 석탄산업의 전성기를 보냈으 나,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지역 소득기반이 붕괴되며 지속적으로 인구가 감소 하고 있다. 현재 인구는 약 4만 6천 명으로 1987년 대비 62%가 줄어들었다
지금은 4만명이 붕괴되기 직전이다
“아리랑 아리랑 막장에 아라리요/노보리 고개 갭뿌(camp lamp) 없이 잘도 넘네
탄광촌 고개는 자물통 고개/꼭 간다 삼 년 오 년, 삼십 년이 지나고
탄굴 파서 벌어봐야 햇빛 보면 맥 못 추고/첫날부터 외상술에 퇴직금은 빚잔치
탄광촌 고개는 생지옥 고개/동발 허리 메고 나면 척추부터 내려앉네
갑 을 병방 오 년이면 이 몸부터 비쩍 말라/궁합은 묻지 마라 동발만 바짝 섰네
아리랑 아리랑 막장에 아라리요/노보리 고개 석탄 활활 잘도 넘네
탄광촌 고개는 출구 없는 미로고개/이젠 간다 봇짐 싸도 갈 길이 멀구나
빚 없으면 돈 번 게지 몸 성하면 돈 번 게지/자식보고 여기 왔지, 나 살자고 왔나
아들놈은 광부 마라 딸년도 광부 마라/사택 방은 닭장이나 꿈만큼은 대궐
열아홉 구멍마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내가 캔 괴탄 석탄 이 나라 일으켜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가 났네/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넹겨주게”는 정연수 시인이 <탄광 아리랑>이란 제목으로 쓴 시이다.
그런데 이 시를 몇몇 언론에서 ‘광부의 애환을 달래는 민요’로 소개한 때문에 창작 노래가 아닌 민요로 알려진 것이다.
(2131) 대한뉴스 제 1168호-최규하 국무총리 탄광촌 시찰 - YouTube
(2131) 장성 화광아파트! 지금은? - YouTube
탄광 개발 초기 탄광지역의 가장 큰 문제는 주택이었다.
탄광 특성상 위치가 산간 오지인데다 '검은 황금'을 찾아 전국에서 몰려온 수많은 사람으로 탄광지역은
극심한 주택난이 빚어졌다.
1950년 말 창립한 '대한석탄공사'(석공)도 1963년 정선군 신동읍에 함백사택을 건립할 때까지
일제가 지은 목조 건물을 사택으로 사용했다.
함백사택은 방 2칸짜리 2층 연립이었지만, 당시에는 보기 드문 500가구의 대단위 주택단지였다.
이후 사택 건립이 이어졌으나, 대한석탄공사는 사택에 입주하지 못한 직원에게는
보조비를 지급해야 할 정도로 공급난을 겪었다.
탄광 사택은 1973년 석유파동으로 석탄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규모로 건립되기 시작했다.
석공은 1974년 1천500가구 동시 착공을 시작으로 매년 수백 가구를 지었지만, 거의 다닥다닥 붙은 블록집이었다.
◇ "과거 최고의 직장 석공 일원이라는 자부심의 상징"
화광아파트라는 현대식 탄광 사택의 등장은 4년 후인 1978년이다.
화광아파트는 1978년 6월 30일 준공식에 석공 관계자, 기관단체장, 주민, 합창단, 밴드부, 학생 등 수백 명이
참석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석공에 근무했던 한 주민은 "1982년 입사했지만, 1985년 결혼을 하고 나서야 화광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며
"당시 화광아파트는 최고 직장이었던 석공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의 상징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역사·문화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장성동 주민들은 철거를 앞둔 지난해 10월 '화광아파트 장례축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남은 화광아파트의 흔적은 준공을 기념해 세웠던 표지석의 동판뿐이다.
김강산 태백향토문화연구소장은 31일 "역사에 남겨 기억하려면 가능한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지, 다 허물고 다시 짓는 것은 의미 없는 예산 낭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태백시는 탄광 사택을 재연해 2005년 '탄광사택촌'이라는 이름의 체험관광상품으로 선보였지만, 관광객들에게 외면받으면서 사실상 방치 상태이다.
철거직전 모습. 철거시작은 2020년 2월 21일 완료는 2020년12월 3일
장성탄광이 문을 닫게 된다
장성주민들을 위하여 관심을 가져 주세요
학교 다닐 때 지리시간에나 배웠을 장선탄광 상동중석 이란 이름들
우리 집에서 장성까지는 15분 거리
장성에 가면 맛있는 낙지덮밥집도 있고, 초록마을 부페집도 있고 꽈배기 찐빵집도 있다
학생들이 단골로 사진찍는 낭만의 다리 2중교도 명물이다
장성 이중교는 일제 강점기인 1935년 건립된 다리다.
석탄수송용 광차가 다니는 상부 다리와 사람과 차량이 통행하는 보행자용 하부 다리로 구성돼 있어 이중교로 불린다.
시간을 뒤돌아 보면 내 마음이 어느새 학생시절로 돌아간다
돌아갈 수 없지만서도
첫댓글 옛날에 황지에 잠시 있어는데 너와집 지붕 사이로 별을 보며 생활 하던 생각이 납니다 쌀밥은 생각도 못하고 찰 강냉이 밥 먹곤 하였지요.그래도 그때가 좋았는데 살아가는 정은 있었으니까
맞아요 그때는 이웃간에 정이 있었지요 잘 살수록 정이 없어져요
화려했던시절 옛추억이 아련한곳이군요 그시절 도시에도 연탄까스 사고가 다반사였는데~~~
서울에서도 연탄가스에 죽으면 신문에 크게 났었습니다
도토리님 태백으로 이사 가더니~ 태백시 홍보로 태백에 대해서 많이 배웁니다
태백 인들의 애환 역사등등 고마워요~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어서
노부리고개란 경사진 곳을 채탄하는 것으로 힘들다는 뜻이랍니다 갭뿌는 카바이트등불이랍니다 동발은 갱내 흙이 무너지지 않게 바치는 통나무입니다 갑은 오전에 을은 오후 뱡방은 야간에 갱에 들어가는 걸 가리킵니다 24시간 탄을 캡니다 전직광부에게 물어물어 알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