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4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루카 21,20-28
적들에게 둘러싸인 예루살렘엔 들어가지 마라
오늘 복음도 역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산으로 달아나고 시골에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과 산이나 시골은 오늘 복음에서 반대 의미로 사용됩니다.
마지막 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땅에서는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망하기 직전 세상에서는 당연한 현상일 것입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내가 만나는 사람이 망하기 직전 예루살렘과 같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같이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을 알아보는 길은 그 사람의 감정입니다.
망하려고 하는 사람은 까무러칠 정도로 절망하고 두려워할 것인데 그것이 절망적이고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할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만약 내가 그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공유하는 감정이 두려움과 절망의 감정이라면 나는 적들에게 둘러싸인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어리석은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평화 속에 계셔야만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흔들리시기 때문입니다.
일단 내 마음의 평화를 깨는 사람이라면 만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저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상대의 감정에 휩쓸려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하게 되고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도 그렇게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적들에게 둘러싸인 사람 안에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도의 한 부부는 작은 발단, 곧 남편이 차를 마시려고 넣어둔 돈 20원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상대의 나쁜 감정 안으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일단 누군가 만나서 내 감정이 요동친다면 그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상대도 변해야 하고 나도 변할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집 놔두고 12년 동안 비닐하우스에서 산 여인’이 올라와 있습니다.
한 할머니가 다 떨어진 비닐하우스에서 12년 동안 노숙자처럼 사셨습니다.
그런데 30미터 옆에는 새로 지어진 깨끗한 자기 집이 있고 남편이 마련해 준 별채도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그 집에 들어가시기를 거부하시고 고생하고 계신 것입니다.
원인은 이렇습니다.
할머니가 지내시는 비닐하우스는 새집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는 동안 임시로 가족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런데 새집이 지어졌는데도 그곳에 계속 머물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설득해도 말을 안 듣습니다.
남편도 설득하다 지쳐서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말도 안 하고 담을 쌓고 12년 동안 살았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마음이 토라진 것은 남편이 시어머니 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2년 뒤에 새집을 짓자고 했는데 남편이 어머니의 뜻대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남편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해서 할머니가 더 난처해졌습니다.
할머니는 아기를 낳느라고 몸이 안 좋아졌는데 그것에 대해 뭐라 하는 시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남편까지 그러니 모두 싫어진 것입니다.
제작진은 남편과 이야기하여 아내가 좋아하는 것이 붉은 꽃임을 알아내고 별채를 붉은 핑크빛으로 새로 개조해서 시어머니의 기억이 나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음식을 해서 대화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렇게 별채에 들어와 본 아내는 깜짝 놀랍니다. 남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년 만에 별채에서 잠을 자 보기로 합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합니다.
저는 남편이 참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12년 동안 집에 안 들어오시고 뭐가 불만인지 말도 안 하는 아내를 지척에 두고 계속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내와 말다툼해봐야 자신의 감정만 더 상할 뿐입니다.
그때는 아직 아내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내는 미움과 원망이라는 적들에 의해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들어가면 남편도 죽습니다.
그러니 떨어져 있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제 제작진들에 의해 상담받고 아내의 적들도 조금은 약해졌고 남편도 아내의 불만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아내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만나니 아내는 이제 남편의 집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사람을 어디까지 만나야 하고 어디에서 헤어져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항상 감정을 보아야 합니다.
나의 감정이 상대의 감정 때문에 흐트러지고 상대의 감정을 따라간다면 당장 그 관계에서 나와야 합니다.
산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시골은 원망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머물며 내가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사람으로 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도우심으로 힘이 생기고 상대도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다시 시도하면 됩니다.
내가 상대를 바꿀 수 있다고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나도 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에게나 먹혀서 나의 감정, 곧 성령의 열매를 소진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성령의 불을 끄는 일입니다.
가라앉는 배에 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4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다니엘 6,12-28
루카 21,20-28
<육체를 위한 스트레칭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위한 스트레칭도 가끔씩 해줘야겠습니다!>
직장생활을 할때 담당하던 업무가 하루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도면을 보거나 그리던 일이었습니다.
그탓인지 구부정한 자세가 습관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 주변 사람들이 틈만 나면 제게 그랬습니다.
“허리를 좀 쭉 펴세요! 고개도 꼿꼿이 쳐들고!”
요즘 와서 별것 아닌것 같지만, 허리를 쭉 펴는 것, 고개를 위로 쳐드는 것이 육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에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허리는 육체의 중심이요 삶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허리를 쭉 펴줘야 신진대사도 원활해지고, 마음 자세도 당당해집니다.
고개를 위로 자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 역시, 육체적인 건강 정신적인 건강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당신의 날이 가까이 다가오면,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21장 28절)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면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하란 말씀입니다.
그날이 다가오면 육체적인 것은 조금씩 줄이고, 천상의 것들, 정신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늘려가라는 당부입니다.
그날이 가까이 오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을 갖추도록 준비하라는 권고입니다.
우리는 하루 온종일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지나칠 정도로 엉뚱한 것들,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티비 화면이나 컴퓨터 모니터에, 단 한치 눈앞의 이익이나 재미에 온 신경이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끔씩 자리를 털고 일어나 스트레칭을 해줘야겠습니다.
육체를 위한 스트레칭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위한 스트레칭도 가끔씩 해줘야겠습니다.
주일미사만으로는 부족한 듯 합니다.
가끔씩 평일 미사에도 참석해줘야겠습니다.
가끔씩 하루 피정도 가줘야겠습니다.
가끔씩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영성서적을 손에 들어야겠습니다.
가끔씩 봉사 활동도 나가줘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의 키가 쑥쑥 자라나고, 주님 오시는 날에 합당한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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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처럼>
2022. 11. 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루카 21,20-28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시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칼날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울타리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억압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해방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두려움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평화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아픔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위로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어둠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빛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절망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희망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죽임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살림이기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