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인되어야할 성구>
1)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3:22)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3:23)
2)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3:26)
<본문 설교>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새 아침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게 사시는 성도님들은 분명, 행.복.한. 하.나.님.의. 사.람.들. 이십니다. 우리 이제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예레미야애가의 히브리 원전의 본래 제목은 제1.2.4장의 첫 단어로서 ‘슬프다’ 로 번역된 ‘에카 ’입니다. 그러나 일부 유대인 랍비들은 이 말 대신에 ‘애가’,‘조가’를 의미하는 '키노트’를 본서의 제목으로 삼았고, 70인역 (LXX )은 이를 의역하여 ‘눈물들’ 이란 뜻의 ‘트레노이’를 본서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영역성경은 ‘비탄’ , ‘애도’ 라는 뜻의 'Lamentation' 에 예레미야의 이름을 붙여 ‘The Lamentation of Jeremiah' 를 제목으로 삼았고, 한글 성경은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서는 '예레미야서'의 저자로서, 예루살렘 함락을 목도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이며, 예루살렘이 패망한 B.C. 586년 직후 기록된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대상(수신자)은 오랫동안 거듭 경고되던 예루살럼 함락이 실현된 예루살렘 멸망 직후의 본토와 각처의 유다 백성들과 여호와의 심판은 언젠가 필히 실현된다는 사실을 경계로 삼아야 할 성도들이고, 그 내용은 대살육과 약탈의 공포와 자녀를 먹어야 할 정도의 기근이 동반된 예루살렘의 패망 과정에서 선민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굴옥에 대한 비탄과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이었음을 시인하면서 이제는 선민을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구하는 소망과 간구가 격정적으로 뒤엉켜 다중 표출되는 다섯 편의 연작시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애가서의 메시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 예언 및 경고 성취의 확실성입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때로는 사자후처럼 준엄하였으며, 때로는 너무나 애절하였으나, 그 초점은 언제나 범죄에 대한 심판 경고와 회개의 촉구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돌같이 굳어버린 유다 백성들은 선지자의 이러한 메시지를 멸시하고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죄악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리 없다고 안일하게 생각하였던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예레미야가 수십년 동안이나 심판을 예언하고 멸망을 경고하였지만, 그것이 곧바로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완악함은 더욱 고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으심에도 한계가 있는 법, 결국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멸시한 유다와 예루살렘은 지금까지 계속 선포되어 온 심판 예언대로 급기야 처참하게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서에서 바벨론의 공격으로 함락된 예루살렘 거민의 기막힌 현실에 대한 애절한 참상과 심장을 찢는 듯한 탄식이 거듭하여 나오면서, 이는 하나님의 심판 예언과 경고가 그들이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호와의 심판 예언이 성취되어 참혹하게 무너진 예루살렘의 패망 현장에서 들려오는 선민의 날카로운 비명과 가슴 저미는 애가를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로 흘려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예레미야 시대에 선지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성경의 기자들이, 특히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친히 장차 죄악된 세상의 멸망을 거듭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 기자들이나 그리스도의 예언대로 영원할 것만 같은 이 세상도 반드시 종말을 맞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러한 우매한 무리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심판 예언 성취로 절규하는 예루살렘 거민의 울부짖음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하나님의 심판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정성입니다
본서를 읽으면서 놀랄 수밖에 없는 것 가운데 하나는 범죄한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나 처절하게 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참혹함은 본서 전체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슬프다’ 는 탄식으로 본서를 시작하며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다는 절규로 본서를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열국에 크던 자가 이제 과부같이 되었으며(1:1) 거룩한 도성이었던 예루살렘에는 여인들이 자신이 낳은 아이까지 먹는, 인간 세상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괴이한 일까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2:20). 하나님께서 과거 그들에게 베푸셨던 크나큰 은혜와 비교하면 이러한 심판의 비참함은 더욱 중폭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민 중에서 구별하여 친히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선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당신과 교제할 수 있는 성전까지 두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구약 구속사(救聊史)의 주요한 전개 통로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특권과 은총을 받은 민족이었던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패역을 거듭할 때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성전이 위치하였던 수도 예루살렘마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이방 군대에 의해 함락되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눈이 눈물에 상하며 창자가 끊어지며 간이 땅에 쏟아지는 것과 같은 극심한 슬픔과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2:11). 살육과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간 그 땅의 이러한 참상은 인간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정함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우신 분으로서 죄를 용납하거나 간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민과 선민의 수도로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을 심판하여 황폐하게 만드셨다면, 죄로 관영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은 얼마나 준엄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죄로 관영한 노아 시대의 세상을 물로써 심판하여 다 쓸어버리셨듯이, 이 세상 마지막 때에는 불로써 이 세상을 심판하심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정함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서 및 성경 전체에 끊임없이 제시되는 이러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의 엄정함을 기억하고, 죄를 멀리하는 사람만이 반드시 오고야 말, 최후 심판 날에 멸망에 이르지 않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셋째. 회개의 선도자요 하나님의 사랑의 보증자인 하나님의 종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서에는 예루살렘 패망과 살육의 현장에서 울려나는 경악과 비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레미야의 간곡한 호소도 발견됩니다. 놀랍게도 조국이 무너진 극심한 충격과 슬픔 가운데서도 예레미야는 거듭된 심판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그토록 자신을 박대하고 심지어 죽이고자 하였던 동족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입니다. 과거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선지자였으나 이제는 고난 당하는 동족을 대변하는 회개의 선도자요, 위대한 중보자로 변신한 것입니다.
이는 참 신앙인이 갖추어야 할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 참신앙인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간에 대하여는 미움을 사랑으로 갚는 태도를 갖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없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며, 이러한 예레미야의 태도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죄인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회개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십자가 구속 사역을 완수하신 후에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한다(히 7 :25)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의 선도자요, 하나님 사랑의 보증자인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의 헌신이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이 회복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중보가 있었기에 죄인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 오늘날 성도들도 신앙의 선진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보증자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동족을 위해 회개의 눈물을 흘리므로써, 민족의 아픔을 회복시키는 성숙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일시적 징벌에도 불구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인간은 연약하여 눈에 보이는 현실에 일희일비(-喜-悲)하며,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살육과 약탈, 방화와 겁탈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가운데서도, 장차 여호와께서 징계를 종료하시고, 이방심판을 개시하시도록 기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징계의 종료와 이방의 심판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4:21.22). 이는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절대 변치 않는다는 굳은 믿음이 예레미야에게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닥친 고난이 너무나 크며 눈에 보이는 현실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암담할지라도, 이는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일시적 징벌임을 깨달았던 겁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깨달음은 특히 세번째 애가에서 잘 드러납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3:16-32). 예레미야의 이러한 고백은 후에 현실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심판하시되, 영원히 파멸시키시지 않고, 다시 회복시키셔서 고토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 이러한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자비와 사랑은 신약 선민인 성도에게도 나타납니다. 성도는 일시적 고난을 당하나 결국 천국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확신하는 성숙한 신앙은 예레미야처럼, 비록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헤쳐나갈 힘을 가지게 하며 찬송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
다섯째. 파멸과 절망 중에도 소망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위대함을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역사 가운데 유래를 찾기 어려운 극심한 고난의 현장 가운데 있으면서도 현실에 함몰되기보다는, 그 고난의 원인이 동족의 범죄에 있다는 점을 겸허하게 시인하고, 동족의 죄를 통렬하게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보여준 더 위대한 신앙의 면모는 철혹같은 어두움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소망의 불빛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그 빛을 주시기를 소망하였다는 것입니다 . 이는 예레미야가 패망의 현장에서도 회복의 미래를 보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너머 사랑이 있음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예레미야가 가시밭과 같은 선지자의 길을 40년 넘게 묵묵하게 걸을 수 있었던 것도, 절망 중에도 소망의 빛을 비추시는 여호와를 향한 굳센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하늘의 별빛이 더욱 영롱한 것처럼, 여호와의 진노의 심판으로 인한 패망의 엄혹한 현실 가운데, 회복의 소망을 가슴에 품은 예레미야의 기도는 파멸과 절망을 소망으로 전환시키는 신앙의 위대함을 잘 보여줍니다 . 그렇기에 우리 성도들도 예레미야와 같이,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을 때 각자의 인생 여정에서, 시시때때로 질고에 직면할 때에도, 그 상황을 초극하고 더욱 원대한 소망으로 비약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로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는 절망과 패배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애가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5장 21절을 보면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같게 하옵소서’ 라는 간구는 지난 날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달라는 간구로서 한 마디로 말하면, 선민을 다시 회복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이처럼 선민이 이와 같은 회복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합니다. 즉 선민이 현재와 같은 불행을 당하게 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반역하고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간데 그 원인이 있었고, 그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떠나감으로써, 더이상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받지 못한 결과, 그들은 이방 나라의 침공을 받아 파멸에 이르게 되었던 것처럼, 그들이 다시 옛적 같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 돌이키는 과정이 선행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우리가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니 받아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선지자의 이 기도에는 자신들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이키도록 해주셔야만 자신들은 비로소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조차,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죄로 치우칠 뿐,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도 알지 못하고 돌이킬 수 있는 힘도 없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께 돌이키는데 있어서까지 우리는 절대 무능력 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의지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려는 의지도, 하나님께로 나아갈수 있는 것도, 오로지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본문인 예레미야애가의 말씀이 강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죄인의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죄인은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겸손히 응답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하셔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우리를 부르실때, 우리는 거기에 반응하는 것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기에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 있으며, 한시라도 교만할 수도, 자만할 수도 없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이 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끝내 붙들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며, 믿어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실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며,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며, 그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구원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만이 악한 길, 사망의 길로 이끄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선하고 의로운 믿음과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 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 두란노아카데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