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①
중생을 위해 이렇게 법문해 주시는 큰스님께 감사드립니다.
한국불교가 1,600년 전 이차돈 성사의 순교를 계기로 이 땅에 들어왔고,
불교의 역사가 2,600년 되었음에도 지금은 타종교가 한국을 거의 점령할 듯 하고 있는데,
21세기인 불기 2,555년 이때에 한국불교를 국교화 한다든지,
이차돈 성사가 한국불교를 최초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서 한국불교가 국교화 된 것과 같이
불국토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그 점을 여쭙고 싶습니다.
(큰스님) : 진짜 부처님의 교법이 3,000년 만에 이제 시작되었잖아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영산불교의 위대한 사상이 이렇게〈비교종교학〉등의 여러 가지 책으로
지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20여권 나오고 있는데, 우리가 속도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산불교에서 뛰어가는 것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조절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빨리 컸지요. 크면 어떻게 되는 줄 압니까? 시기질투가 따르겠지요.
보통 시기질투가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절하고 있습니다.
조절하고 있는데, 우리 현지사는 많은 불사를 했습니다. 조용히 불사를 했습니다.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마 금년도 저기 강원도 화진포에 병자의 치유를 위해서(한국의 병, 큰 업으로 받는 병은
좀 어렵지만) 약사전(약사궁)을 짓습니다.
아마 많이 알려져 가지고 많은 신도들이 올 것입니다. 그것까지 하면 불사는 거의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부처님의 법을 펼 것입니다.
법을 펴는데 약간 속도를 낼는지 모르겠습니다. 법을 폅니다. 속도조절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통합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도 통합 할 수 있습니다.
지금〈비교종교학〉이 한 600페이지 분량으로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 영산불교의 그 위대한 깊은 사상이 세계의 모든 종교와
한국의 민족종교 모두를 포용하고도(아우르고도) 넉넉히 남습니다.
영산불교가 그렇게 위대합니다.
영산불교와 같이 깊은 철학사상이 나온 것은 2,500년, 3,000년 만에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어디를 가시다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나는 저기 서울의 어느 절에 다니는 신도인데, 어느 절에 다니시오’하고
물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물어오면 ‘나는 영산불교 현지사 다닙니다’하고
아마 그렇게 대답을 하실 거예요. 그러면 저쪽에서 그럴 거예요.
아직 현지사의 사상(철학)이 많이 보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신도들에게만 지금 법문을 하고, 아직은 책도 일반신문에 광고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인가 가게 되면 전부 광고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모른단 말입니다.
다만 ‘염불하는 절이다’라고 알아요. 염불하는 절이다 할 거예요.
염불하는 절은, 스님이 30~40년 전 조계종에 있을 때만 해도
‘염불, 계율 지키는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저건 외도다’고 했습니다.
참선을 하지 않으니까. 그래가지고 아마 여러분을 불쌍하다는 듯이
그런 눈초리로 볼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 사람한테 되물어야 되는데,
되물으려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야 된다고요.
그래서 여러분한테 이렇게 법문을 해주는 거예요. 어떻게 되묻느냐?
‘신도님! 당신이 그렇게 그 이름난 그 절을 오랫동안 다니시고 그러는데,
그러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부처님께서 이야기하는) 육도가 무엇이고,
정말로 육도윤회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오?’하고 물어봐요. 육도윤회를 하는 것이냐고.
그런 실력 갖고는 아마 거기도 대답 못할걸요. 그건 기본인데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걸 알잖아요. 우리 현지사에서는 육도가 있음을 분명히 주장하고,
육도에 윤회하는 것을 분명히 주장합니다.
또한 육도윤회를 벗어난 해탈세계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해탈세계도 아라한, 무루대아라한, 천녀, 정토대기, 극락정토, 약사정토,
불격을 갖춘 최상수보살을 넘어가서 붓다예요. 저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윤회를 벗어난 저쪽세계는 몰라요. 다만 본체(本體)를 알아요.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은 본체를 알아요. 본체 이야기밖에 하지 않아요.
모든 생각이(사유가) 끊어져버린 자리, 마음자리, 공(空)자리 밖에 이야기 안 해.
공(空)의 자리 밖에 이야기를 하지 않아. 열반의 세계를 몰라.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의 세계(니르바나의 세계)에 대해서는 지금 전혀 몰라.
그런데 윤회를 믿고 법문하는 스님은 참 고마운 스님이지요.
그러나 지금 대부분의 불교는 윤회도 인정하지 않는다니까요.
붓다 없다니까요(붓다도 없다고 한다니까요). ‘마음이 부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윤회도 마음속에서 이야기해버려요.
마음속의 상태가 이렇게 자꾸 바뀌어 지는 것, 좋아했다가 기분나빠했다가
웃었다가 울었다가 그냥 희희낙락하다가, 이것을 윤회라고 한다고요.
육도윤회를 이야기 안 해요. 지금 불교가 그렇게 되었어요. 지금 그런 절에 다니고 있어요.
그러면서 자기들 절에 폭 빠져 세뇌되어 가지고 자기네들 종단의 가르침이 최고인줄 알아. 그 가르침이 무엇인 줄도 몰라. 우리처럼 이렇게 정기적으로 법문도 하지 않아.
이 사람 불렀다가 저 사람 불렀다가 하지.
이 사람 불렀다가, 저 스님 불렀다가, 어느 학자 불렀다가, 이렇게 해주지.
그러니까 이렇게 법문하게 되면 정립이 안 됩니다.
우리 현지사는 한 분의 스님이 계속 법문하잖습니까?
지금까지 스님이 계속한 법문이 138회 일거예요.
《법화경》처럼 모든 종교 철학을 전부 회통해가지고 정리해주잖아요.
여러분들, 법문을 그렇게 많이 들었으니까 당하지 말라고. 지금은 당할 수준이 아니어.
쉽게 당할 수준이 아니어. 고맙습니다. 그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출처:2011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