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4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요한
6,52-59)
I have life because of the
Father, so also
the one who
feeds on me will have life because of
me.
말씀의 초대
바오로의 회심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던 사울이 신자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내려가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은 인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제1독서).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의 끝
부분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시라는 말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으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몹시 거북하게 여기며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떤 일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리저리 재 보고 나서,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의
모임에서 누가 사울을 데려오자고 했다면 아마 모두가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부르심을 받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사울은 사도 8,1에 등장합니다.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 그는 살기를 내뿜는 박해자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 신자들은 쉽게 그를 신뢰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박해자였던 그가 신앙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의심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사울을 찾아가라고 하셨을 때 하나니아스도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주님께서 “가거라.” 하시니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사울이 안수를 받을 만하다고 판단해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는 이렇게 선택되었습니다.
사도들도, 하나니아스도, 신자들의 공동체도 그를 선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을
선택하지 않았으니, 그 선택은 분명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선택과 결정 과정에서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하느님의 개입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개된
일들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깊숙이 관여하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는 처음부터 인간의
결정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선택받은
바오로는 회개하여 새사람이 된 다음,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전부이며 그분을 아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고 선언합니다(필리 3,8 참조).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리스도인은 천상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현세라는 광야의 여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여정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양육되어야 합니다. 성체를
주님의 몸으로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자기희생의 길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그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오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듯이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인생관과 가치관도 새롭게 변해야 할
것입니다.
공지사항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사실 어제 했어야 할 공지사항이었는데,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이렇게 공지합니다.
사실 어제부터 저는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교육을 받는 장소가
서울 강남에 위치하고 있어서 새벽에 집에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교육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거의 밤 9시이고요. 더군다나 제가 해야 할
과제도 있어서 새벽 묵상 글을 쓰기가 참 쉽지 않네요.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든 써서 올리지만, 내일부터 주일까지의 새벽 묵상 글은 올리지 않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교육 다 마친 월요일 새벽에 다시 뵙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지금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틈없이 하는 교육이라 쉽지는
않지만, 어제 강의를 들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 기적이 아닐까?’
솔직히 안식년 동안에 할 계획들을 쫙 세워 놓기는 했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우선적으로 공부를 무척
싫어합니다. 그러한 제가 안식년 동안 할 계획들을 다 무시하고, 지금 이렇게 제일 싫어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제 모습을 떠올리면서 인간의
생각들을 뛰어넘는 주님의 섭리에 놀라움을 갖게 됩니다. 가르쳐주시는 교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여러분은 특별한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비싼 강의료를 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이렇게 평일에 시간을
내어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보통 사람들은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교육을 받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해보니 내 삶 안에서 특별하지 않은 날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여지는 특별한 날이었지요. 그리고 그 순간에 불평불만을 던졌을 때도 있었지만, 결국은 그 순간이 가장 내게 필요한 시간이었음을 먼 훗날
깨닫게 되기도 함을 기억하게 됩니다.
부족하고 나약함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주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러한 부족함과 나약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주님을 이해하고 판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한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다는 것인지를 의아해했지요. 인간적인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 곧 가장 좋고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이해하게 되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모습은 일상의 삶 안에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서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에 움직이고 있음에 감사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때 주님을 더욱 더 가깝게 만나게 될 것이며, 일상의 삶에서 접하는 기적이 너무 많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 한 마디에 그만두고 싶던 일도 계속하게 된다.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가 끊어질
뻔한 관계를 이어 놓는다(조정민).
나는
배웠다(복자 샤를르 드 푸코)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에 달린 일.
나는 배웠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임을.
삶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곁에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함을 나는 배웠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또 나는 배웠다.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 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함을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두 사람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음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 해서
내 전부를 다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과 내가 믿는 것을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사막의 성자라는 샤를르 드 푸코 신부님의 묵상
시입니다. 사랑에 대해 성찰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줘서 올려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새로 태어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심
-이기정신부-
북아프리카
건조지대에 사는 벨벳거미는 새끼 기르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사막의 거친 환경에 적응해 살아야 하기에 어미는 먼저 먹이를 게워 새끼에게 먹인 뒤
자신의 몸을 녹여 모두 먹이로 주고 껍질만 남긴다.
사람도 실은 환경에
적응하며 자식들을 기름에선 이와 같은 겁니다. 뗄래야 뗄 수없는 사랑의 질긴 끈이 목숨 바쳐 자식을 기르는 거지요. 영세로 새로 태어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심이 이런 사랑관계인 거고요.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5~56)”
맛있는
음식 -반영억신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그만큼 몸에 영양을 보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음식이 있다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 안에서의 준비된 영성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내가 네 밥이야!’하는‘먹힘’으로써 하늘과 소통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소통을 이루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유사성을 회복하는 방법은 고해성사입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미사 참례회수를 늘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10,41-42). 평일에도
미사참례를 위해 애쓰는 가운데 주님의 온갖 축복을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신부-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내려온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새터민,
탈북자’라고
부릅니다.
최근까지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에 내려온 사람은 30,000여명이 된다고
합니다.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은 그 이유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한이 북한 보다는 살기 좋을 거라는 기대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습니다.
‘집,
돈,
직장,
배우자’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남한이 북한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탈북자들이
늘어나면서 예전처럼 많은 혜택을 주지는 않지만 지금도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향을 하는
것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좋지 않을 때입니다.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낳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때입니다.
저도 생활하면서
핸드폰의 모델을 바꾼 적도 있습니다.
통신사를 바꾼 적도
있습니다.
노트북도 새로운
모델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으로 바꾼다는 것은 신선함도 있지만 익숙한 것을 떠나야 하는 불편함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회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
스테파노가 죽는 것을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고,
그동안 가졌던
신념과 신앙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생활이
힘들어서,
가난해서,
자유가 없어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울에게 새로운 사명을 알려주십니다.
사울은 이제
회심하여,
교회의 커다란
기둥이 됩니다.
우리의 상식과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왜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을 복음의 사도로 만드셨는지?’를 묻는 것은
지나친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온전하게 따르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그릇이 그릇을 만든
사람에게 나는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묻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해서 내어 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이
전 존재를 기꺼이 내어주시는 예수님께 ‘왜 그렇게 하시는지
묻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오늘 사람들은 서로
다투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하게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다투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들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재능을 기꺼이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의
시작이고,
영원한 생명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만남의
여정
-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
-이수철신부-
요즘
'렉시오 디비나(성독)' 수행이 널리 보급되고 있습니다.
어제
오후 피정 강의 주제 역시 렉시오 디비나였습니다.
저는
항상 세 종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를 강조합니다.
첫째가
신구약 성경, 둘째가 자연성경, 셋째가 내 삶의 성경입니다.
신구약성경이
하느님과 인간의 무수한 만남으로 이루어졌듯이
내
삶의 성경 역시 무수한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과연
우리 삶의 여정은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남의
신비, 만남의 선물, 만남의 기쁨, 만남의 행복등 만남을 예찬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무수한
만남이 내 운명을 결정하며 만남들을 통해 내 삶의 꼴도 형성되어 갑니다.
하루하루
죽을 때까지 써가야 할, 완성되지 않은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무수한
만남들을 통해 주님을 만나게 되고 삶은 더욱 깊어지고 풍요로워집니다.
사람의
신비는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고유한 삶의 성경책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만의
고유한 역사가 있는 삶의 성경책입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 없듯이 똑같은 삶의 역사, 삶의 성경도 없습니다.
하여
내 삶의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자는 타인의 삶의 성경도 소중히 여깁니다.
그
삶의 성경을 통해 부단히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제
좋아하는 '방문객(정현종)'이란 시를 나눕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아,
정말 사람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살아있는 성경이라 생각하면
사람
하나하나 소중히 환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며칠전
신문 컬럼에서 '이름을 불러주세요(이명수)'라는 글을 감동깊게 읽었고
그
일부내용을 나눕니다.
-시민
304명이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영상을 봤다.
이름만
부르는데도 10분이 넘게 걸린다.
한명의
이름만이라도 나지막이 불러주시라.
천천히
적어 주시라.
그러면
세월호 지겹다는 얘기 안 나온다.
나일
수도, 내 부모형제일 수도 있는 이들이었다.
하나하나
이름을 적다가 오래 울었다.
304개의
우주가 우리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라졌다.
그게
세월호 참사다-
그렇습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우주입니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고유의 성경책입니다.
저
역시 요즘 하루 한명씩 '남자수도자장상협의회'에서 나온 공문의 명단에 따라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낯선 이름을 적고 기억하며 연미사를 봉헌하는데 아픔을 느낍니다.
오늘
이름은 '최민석'입니다.
모두가
소중한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경책이요,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한쪽의 써가야 할 성경책입니다.
오늘
1독서의 사도행전은 그대로 사도 바오로의 삶의 성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뿐
아니라 바오로 서간 모두가 바오로 삶의 성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과
만남의 생생한 증언들로 가득한 삶의 성경입니다.
오늘
주님과 바오로의 극적인 만남이 충격적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 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사흘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다 하는데
바로
사울의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의미합니다.
마침내
주님의 사람, 하나니아스를 만나 눈이 열려 다시 보게 된 사울은
며칠
후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선포하며
복음의
일꾼으로 활약합니다.
만남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예수님과의 만남,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운명이 극적으로 바뀐 사울이듯이
우리
역시 세례성사를 통해 주님을 만났고 지금은 수도생활에 몸담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삶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까요. 상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미사를 통한 생생한
주님과의 만남이 하루하루 의미충만한 삶의 원천이 되고
내
삶의 성경 내용을 풍부하게 해 줍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를 확인시켜 주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오늘도
우리 모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복된 하루가 되었습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사도
9,13)
-오상선신부-
여러분
주위엔 좋은 사람만 있지는
않지요? 평판이 않좋은
사람, 나하고는 잘 맞지
않는 사람도 가끔은 있을
겁니다.
그런데 후자의
사람들이 때론 하느님께서
요긴히 쓰실 일꾼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드러나 있고
감추어져 있을 뿐이지요.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그 후자의 사람에게
잘 해 주라고 하실 때도
있지요. 오늘 하나니아스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사울이라는 평판이
아주 못된 사람에게 가서 도와주라고
하십니다. 맘에 안내키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따로
쓰실 사람이라니 어쩝니까? 하나니아스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바오로라는
걸출한 복음의 사도를 잃을
뻔했습니다.
오늘 내 주위를
한번 돌아봅시다. 평판이 별로 좋지
않거나 내 맘에 썩 들지
않는 사람을 한번
바라봅시다. 그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의 손길을 한번 내밀어
보세요.
그가
회심하여 바오로 같은
하느님의 큰 일꾼이 될지 누가
압니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김찬선신부-
”먹어야 한다.
먹어야 산다.
너나없이 먹어야 산다.
씨름 선수가 씨름을 잘하려면 기술이 좋아야 한다.
그런데 기술이 좋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씨름 교본을 많이 보면 되나?
물론 이론을 잘 배워야겠지만
반복해서 씨름을 해야 기술이 는다.
그러나 씨름을 잘하려면 기술만 있어서는 안 된다.
힘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기술을 써먹을 수 없다.
그렇다면 힘은 어떻게 생기나?
역시 씨름을 해야 한다.
반복해서 씨름을 함으로써 힘이 생긴다.
그런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씨름연습만 하면 힘이 생길까?
옛날 먹을 것 없을 때 먹지 못하고 일을 너무 많이 해
황달이니 늑막염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을 많이 봤다.
먹기만 하고 힘을 쓰지 않으면 힘은 없고 비만이 되고,
먹지 않고 힘만 쓰면 빼빼 마르다 못해 병에 걸리듯이
먹으면서 힘을 써야 힘이 더 생기고 더 건강하게 된다.
그러므로 잘 먹어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잘하려면 사랑에도
기술이 있어야 하고 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과 힘 역시
힘들어도 사랑을 하면서 생기지만
받는 사랑 없이 주는 사랑만 하면
사랑이 고갈되어 무관심이 되거나
사랑이 미움으로 바뀐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사랑을 하되
주는 것만큼 받으려 한다.
아니, 조금 주고 많이 받으려 하고,
받기 위해 사랑을 한다.
그러나 서로 그러하기에 서로 늘 결핍을 느낀다.
그러므로 결핍이 없는 충만한 사랑을 사랑해야 하고,
그런 사랑을 받아야지만 그 사랑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만이
결핍이 없는 충만한 사랑이다.
생명도 마찬가지다.
생명력과 활력은 주고받아야만 유지된다.
주지 않는 생명력과 활력은 죽은 것이다.
사랑은 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듯
생명도 주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다
없는 사랑을 할 수 없듯이
죽은 것은 생명을 줄 수 없고 아무런 활력도 없다.
그러나 생명력과 활력은 줘야 있게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받아야만 있게 되는 것이다.
성자께서도 성부로부터 생명을 받으셨고
죽으셨지만 성부께서 살려주셔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고, 우리는 더더욱 그러하다.
오늘 주님께서는
성부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빵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씀하신다.
살고자 한다면 먹어야 한다. 먹어야 할 것이 주님인지,
밀가루인지 그게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
-기경호신부-
우리는 때때로
공중을 떠도는 먼지처럼 마음과 영혼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모른 채 살아갈 때가 있다. 늘 물리적 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정작 내 인격 전체가
하느님과 하나되어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방황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집, 천상 고향을 향한 순례길임을 잊은 채 길들여진 애착과
고착된 습관에 매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6,56) 하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성체를
받아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제 그분은 성체가 그리스도인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지를 묘사한다. ‘있다’,
‘머물다’, ‘거처하다’는 뜻의 그리스어 ‘메네이’(μ?νει)는 영원히 변치 않을 관계, 친밀한 일치를 뜻한다. 곧,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영원히 변치 않을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먹고 마시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일치를 이루는 결속관계가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이 어떤 것인지
묵상해보자.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곧 삶의 모든 면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그분과의 ‘존재적 일치’ 곧, 깊은 친교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친히 확인해주셨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4-5)
요한복음에서
‘머무른다’는 것은 또한 ‘말씀 안에 머묾’을 의미한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7)
주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곧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한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9-13)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편안한 장소나 일시적으로 정서를 충족시켜 주는 공간이 아니라 예수님이요, 그분의 말씀이며 그분의 사랑이다. 우리도 현세적인 만족을
가져다주는 ‘공간’이 아니라 그분과의 친교를 이루고 진리를 깨달으며, 사랑의 존재가 되기 위해 주님 안에 머무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참
행복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은 언제 어디서든 주님을 갈망하고 그분의 말씀을 새겨들으며, 자신을 내놓는 사랑임을 명심했으면 한다. 마음이
허전하고 앞길이 막막할 때 오직 믿음 하나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분 안에 머물러보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이영근수사-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의 모습을
부수시고
제 안에 그믐달처럼
자신을 감추신
그 크신 사랑과
신비
그 오묘함과
놀라움
그 속에
제 가슴이 벅차
뜁니다.
뛰는 제 가슴 속
당신이 머무는
까닭입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을
내어 주시는
까닭입니다.
주님!
모든 것을
내어주어 텅
빈,
영에 날려 다니는
가벼웁고 그윽한
당신의
향기,
당신 사랑의 숨결이
되게 하소서!
아멘.
-한상우신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사랑의 현존은 가장
근본적인 주님의 살과 피로 우리와 늘 함께 합니다.
사랑의 시작은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안에 머무르는 사랑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 참된 평화입니다.
예수님안에 머물러야
예수님을 더 잘 알수 있고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살과 피의 현존
안에 머물러야 소중한 사랑을 잘 간직할 수
있습니다.
머무르는 사랑만이 서로를 위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머무르는 시간은 꼭
필요한 주님과 우리의 자연스러운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 그 자체가 가장 풍요로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맡기는 것 그
자체가 온전히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바쳤듯이 우리는 머무름을 통해 주님 사랑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머무름을 통해 우리의 생명 가장 깊은
곳에 계시는 주님의 힘을 믿는 온전한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우리는 온전해 질 수 있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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