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또 무슨 학교에 배우러 가?" 올해 고3인 딸이 순창발효학교 신청서를 작성하는 내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지청구를 한다.
귀농이나 귀촌을 결심하면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의 행동을 하고 다니는 듯하다. 땅을 알아보러 전국을 돌아다니거나 귀농에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러 다니는 것. 전자는 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40대 이상에 해당하고 후자는 40대 이하의 젊은 층에 해당한다. 나는 나이는 40대 후반이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어서 몇 년 전부터 여러 가지를 배우러 다녔다. 국가 자격증으로 목재 창호 기능사, 금속 창호 기능사를 땄고 거주하는 지역의 농업기술센터에서 1년 과정의 농업 대학을 수료했으며 식초 만들기 과정, 재활용 목공 과정 등을 들었다. 귀촌에 대비해 논술 지도자 자격도 취득했고 북아트, 체험 강사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문화재 해설, 전통 음식 체험 같은 수업도 들었다.
여러 가지 수업을 듣거나 비슷한 내용의 강좌를 다른 곳에서 또 들어보면 저도 모르게 비교를 한다. 강사의 수준, 교육장 시설, 프로그램의 수준, 후속 서비스 등의 항목에 따라 순위를 매기고 평가를 하는데, 그러다 보니 강좌마다 아쉬운 점이 조금씩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술만 배우는 강좌로는 내가 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도시에서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은 채로 시골에 내려가 그곳의 좋은 것만 곶감 빼먹듯 쏙쏙 빼 오겠다는 심보로는 제대로 된 귀농·귀촌은 절대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로 거주지를 옮긴다는 것도 결국은 하나의 생활 방식이다. 거기에 삶이 있고 진정성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고 지역과 그곳에 속한 사람들과 동화되려는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남의 옷을 빌려 입거나 남의 집에 잠깐 머무르는 어색한 동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교육, 농촌의 정신이 깃든 교육을 찾던 중에 발견한 것이 전국귀농운동본부를 통해 알게 된 순창발효학교였다.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에서 3박 4일 동안 진행되는 전통 장류 만들기 학교였다. 다른 전통 장 교육과 프로그램을 비교해보니 청국장, 조청이 포함된 것이 새로웠다. 조청은 만드는데, 보통 이틀 가까이 걸리기 때문에 조청을 교육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강사 선생님이 프로그램에 조청을 넣은 것을 어마어마하게 후회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만큼 만들기는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에게는 정말로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수강생 중에 오십견이라면서도 몇 시간을 엿기름물을 저으시던 분이 기억난다.

▲ 이경아 강사의 설명대로, 소금물 농도를 맞춰 항아리에 메주와 함께 넣은 뒤 장을 담궜다. ⓒ전국귀농운동본부
첫날 오후 순창군 귀농귀촌지원센터에 도착하자 생각보다 깨끗하고 정갈한 숙소에 감탄했다.질문이 많은 예비 수강생을 귀찮아하지도 않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최대한 도움을 주기 위해 교육 전부터 여러모로 도와주었던 순창군귀농귀촌지원센터의 이유미 선생님은 순창의 첫인상을 따스한 기억으로 만들어 주었다. 교육 시작은 순창군청 계장님이 귀농인 지원 정책과 순창 지역에 대한 안내였는데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는 정보로 가득했다.
다음 날부터 있을 실습에 필요한 이론 강의도 이어졌다. 메주·된장·청국장·고추장·조청을 만드는 방법, 주의 사항 등이 전달되었다. 빠듯한 일정이라 다음 날의 원활한 실습을 위해 재료 준비를 어느 정도 해둬야 했다. 장 담글 때 사용할 소금물을 만들기 위해 소금을 녹이고 농도를 맞추는 작업과 메주를 만들 대두를 고르고 조청을 만들 찹쌀을 물에 불려놓는 작업까지, 이론 강의에 이어 실습도 만만치 않았다. 몇몇 수강생들은 다음 날 교육에 대한 기대로 늦은 시간까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둘째 날은 메주콩과 청국장 콩을 삶는 것으로 시작했다. 총 5시간 정도를 잡아야 하는 긴 시간이므로 아침부터 부지런히 커다란 가마솥에 삶기 시작했다. 강사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다양한 체험을 할 기회를 주기 위해 두 가지의 콩을 각각 다른 품종으로 준비하셨고 익히는 방법도 하나는 삶고 하나는 쪄서 결과물을 비교해 보도록 했다. 한쪽에서는 찹쌀을 찌기 시작했다. 콩이나 찹쌀을 찌는 데 최적화된 2단 찜솥을 보면서 나를 포함해 많은 수강생이 탐을 냈다.
콩이 익으면서 물이 넘치자 찬물이나 젖은 행주로 온도를 낮추어 끓어오르는 것을 조절해주었다. 할머니들이 행주 하나를 들고 가마솥 옆에서 계속 닦아주거나 바가지로 물을 끼얹던 것이 기억났다. 흘러넘치는 물에는 콩의 좋은 성분이 많이 녹아들어 있으므로 가능한 보존해주는 것이 좋다. 콩 삶은 물은 커피색처럼 진해졌고 선생님은 컵에 담아 새참이라면서 우리에게 맛보게 해주었는데 달착지근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어디서도 먹어보지 못한 새롭고도 맛있는 차였다. 삶긴 콩 색도 갈색 빛이 돌았다. 메주를 만드는 과정이 이렇게 복잡하고도 섬세한 계산을 거친다는 것을 실감하자 그동안 마구 먹어치웠던 된장국에 미안해졌다. 메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 익은 콩을 절구로 빻아서 네모 모양으로 성형해야 한다. 교육장에 마련된 돌절구로 콩을 빻을 때는 내가 달나라에 사는 토끼가 된 기분이 잠시 들기도 했다. 엄청난 양의 콩이 메주로 바뀌었을 때쯤 남자 교육생들은 콩 빻기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메주 성형은 소주로 소독한 테이블에서 이루어졌는데 성형을 한 후에도 물기 탓에 생각보다 잘 갈라져서 세심한 손길이 필요했다. 무게는 같지만, 모양은 제각각인 메주가 하나씩 완성됐다. 메주라는 이름을 붙이기 아까운 예쁜 메주들이 짚으로 만든 이불 위에 가지런히 누웠다. 나쁜 곰팡이의 번식을 막기 위해 사흘 동안 겉말림을 거쳐 1차 발효에 들어갈 것이다. 같은 시간에 진행한 메주를 묶어줄 새끼 꼬기는 뜻밖의 전문가들이 나와서 선생님과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둘째 날의 마지막 작업은 장 담그기였다. 오전에 짚으로 잘 씻어 말려놓은 메주를 항아리에 넣고 전날 준비해 놓은 소금물을 부은 후 풍미를 더해줄 살짝 볶은 마른 새우와 생선을 담은 주머니, 말린 고추, 숯을 넣었다. 맛있는 장이 되길 기대하며 뚜껑을 덮고 새끼줄로 둘러 마무리했다.

▲ 메주 성형하기와 새끼 꼬기. ⓒ전국귀농운동본부
셋째 날은 아침부터 눈비가 내려서 햇볕이 필요한 작업을 어제 마쳐둔 안도감이 우리 모두를 휩쓸었다. 오전에는 발효 이론 강의가 있었는데, 전통 장의 전수를 위해 꼭 필요한 강의였다. 장 발효에 필요한 미생물들을 분류하고 각각의 정확한 생육 조건과 활성 조건을 알려주었다. 미생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부를 했고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 기존 지식이 얼마나 엉성하고 군데군데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았다. 심지어 유익한 균의 생육 조건과 유해균의 생육 조건을 거꾸로 알고 있었다. 초보자의 경우에는 나쁜 균의 번식을 막기 위해 차라리 살균 상태로 만들고 유익한 균을 주입하는 방식도 고려해볼 만하다는 설명도 있었다. 또한, 발효의 각 단계에서 작용하는 미생물의 종류가 다르므로 그때그때 조건을 바꿔주어야 하며 발효가 된 장류의 숙성 단계에서의 보관 환경을 잘 만들어주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순창의 된장과 고추장 맛이 어떻게 뛰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침에 엷게 피어오른 안개를 보고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폐 속 깊이 들이마시면서 순창의 고추장을 만든 것은 이 대지와 하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지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으로….
밤새 삭은 식혜를 원래 이틀에 걸쳐서 계속 저어주어야 하는 조청은 아침부터 이론 강의를 듣는 우리를 대신해 장 만들기 강사 선생님 부부가 교대로 저어주어야 했다. 식혜 때부터 중간마다 조청 진행 상태 점검을 빙자해 우리는 끊임없이 맛보고 또 맛보았다. 점점 농도가 걸쭉해지고 단맛이 깊어지면서 드디어 조청이 완성됐다. 미리 준비해주신 떡에 찍어 먹는 조청 맛은 옛날에 할머니 몰래 꿀단지 꿀을 퍼먹다가 걸려서 엉덩이를 맞던 때의 그 꿀맛과 비슷했다. 손가락으로 쪽쪽 빨아먹는 쉰이 넘은 수강생들을 보면서 젊은 선생님은 얼마나 우스웠을지….
오후에는 고대하던 고추장을 만들었다. 찹쌀밥을 해서 엿기름물과 섞는 전통방식인 데다가 간장을 넣어 발효를 촉진하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담기로 하였다. 찹쌀로 쪄서 지은 고두밥이 잘 삭지 않아 메줏가루와 섞고 절굿공이로 빻아가면서 우리는 다시 토끼가 되었다. 고춧가루까지 섞고 나니 군데군데 밥알이 박히고 아직 메주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 모양새는 그럴싸한 고추장이 되었다.
조청을 저어주고 고추장을 만드는 사이사이 우리는 당번을 정하여 어제부터 발효를 시작한 청국장 온도를 확인했다. 발효에 최적인 28~38도 내외를 유지하기 위해 이불을 덮어주기도 하고 상자를 만들어 덮기도 했다. 첫날 온도가 낮아 청국장 발효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겨주었지만, 지극정성의 이불 공양으로 40도 내외를 회복했다. 덕분에 교육이 끝나고 돌아가는 우리 손에는 생청국장과 양념한 청국장, 두 가지 버전 청국장이 들려 있었다. 집에서 하루 정도 숙성시켜서 먹으면 된다고 했다. 깊으면서도 신선한 맛이 태어나서 먹어본 청국장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이틀이나 키운 예쁜 내 새끼가 아니던가!

마지막 날은 이론 강의를 정리하는 간단한 시험과 인근의 강천사 산책으로 마무리됐다. 궂은 날씨에도 순창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속 깊이 간직할 수 있었다. 이론 강의에서 발효의 배경 지식과 과학적 기초가 적절하게 전달되었으며 대부분의 전통 장류의 실습이 총망라된 알찬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실습에서 받아온 조청으로 멸치볶음을 만들었는데, 깊이 있는 단맛과 감칠맛이 느껴졌고 전통 천연 양념이 가진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식구들도 멸치볶음 맛에 감탄했다.
많은 사람이 귀농을 했고, 또 하려고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만족하는 사람도 있고 실패하고 다시 돌아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콘크리트와 공해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경쟁이 심한 삶이 싫어서 자연 속에서 순응하면서 노력에 따른 대가를 정직하게 누리며 사는 삶을 동경해 막연한 귀농이라면 실패할 확률은 아마도 100퍼센트에 가까울 것이다. 자연은 정직하지만, 변수가 너무 많고 예측하기도 쉽지 않다. 그리고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도시 아파트촌이든 시골 마을이든 환경에 대한 정보와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이는 어느 곳에서도 행복할 수 없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순창발효학교는 귀농에 대한 긴 생각과 사람에 대해 고민하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순창귀농귀촌지원센터와 나의 인연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의미 있는 경험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6년 6월 현재 77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바로가기 : 전국귀농운동본부 바로가기
출처 프레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