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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2)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주제로 20 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고난주간을 한 주 앞두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가장 진한 사랑은 낭만과 즐거움으로 나타나지 않고 고난과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내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고난과 죽음으로 나타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 고난과 죽음의 사랑을 한국 땅에서 가장 진하게 나타내 보여준 사람이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요13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은 고난과 죽음으로 나타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므로 나타났고 그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서, 아니 지옥의 죽음을 향해서 묵묵히 걸어가시므로 나타났습니다. 요13장에 예수님이 등장하고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들의 시선을 요한과 베드로와 가룟 유다에게 맞추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사랑을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 ‘끝까지’란 말을 영어로는 to the last, to the end, to the very end, to the uttermost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양적으로 질적으로 마지막까지, 끝까지, 최후까지, 최고로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그 사랑의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스킬더라는 화란의 신학자는 그 고난과 죽음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내용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온 우주 안에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히 그 사랑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더듬어 살핀다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땅에 내려오신 사랑이었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지옥에까지 내려가신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He descended into hell.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입니다. 지옥에까지 내려가셔서 우리들이 받아야 할 지옥의 저주를 받으시면서 우리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들의 한 평생과 관련해서 더듬어 살핀다면, 우리들의 삶이 끝나는 세상 끝날 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베도로가 너머지고 또 너머지면서 배신해도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 까지 사랑하신 사랑이었고, 유다가 배신의 계획을 꾸미며 은 삼십에 자기를 팔았어도 그에게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시면서 사랑하신 사랑이었고,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불행한 죄수의 삶을 살았어도 그의 마지막 날까지 그와 함께 하시면서 그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비밀을 나타내 보여주신 극진한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요13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특히 요한과 베드로와 가룟 유다와 관련해서 나타난 예수님의 ‘끝까지’의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사랑은 접촉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만지시며 씻어주셨습니다. 사랑은 가까이 와서 접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찌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사46:3,4). 엘리야가 지쳐서 쓸어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그를 어루만져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게 대셨고,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져주셨고,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시고 안수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만지시며 씻어주셨고, 떡을 떼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먹여주셨고, 잔을 가지고 돌리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마시게 하여주셨습니다. 사랑은 가까이 있는 것이고 만지는 것이고 접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4,15장에서 이런 말씀을 반복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리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은 계3:20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사랑은 가까이 있는 것이고 함께 있는 것이고 접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들에게로 가까이 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있으면서 우리들을 만져주시고 접촉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고 쌍방 통행입니다. 요13장에 나타난 요한은 예수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있었습니다. 물리적으로 시공간적으로 예수님에게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가로되.” 요한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뿐이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아니 골고다 언덕 십자가 아래에서도 항상 예수님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바라”(요일1:1).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베드로는 요한처럼 예수님에게 가까이 있지 못했습니다. 조금 떨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직접 대화하는 대신 요한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대화를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요한에게] 머리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베드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뿐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후 예수님이 붙잡혀서 끌려가실 때에도 예수님 가까이 좇아가지 못하고 멀찍이 좇아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막14:54). 그리고 조금 후에는 아예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몸도 떨어져 있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를 들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유다의 마음은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딴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설교를 들으면서도 딴 생각을 하고 딴 짓을 하도록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조금 후에는 마귀가 유다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설교를 들으면서 딴 짓을 하는 사람들에게 마귀가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오셔서 제자들을 사랑하셨는데 제자들은 가지 각색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가까이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었고, 베드로는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유다는 아주 멀리 떠나 딴 생각과 딴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우리들에게 있는가 없는 가를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는 우리와 주님과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가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사랑이고 축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고백했고 야고보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새벽마다 벧엘로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 기도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최상의 방법이고 주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둘째 사랑은 목소리입니다.
사랑은 목소리와 말 소리를 주고 받는 것입니다. 라디오에서 자주 나오는 광고가 하나 있는데 그 광고에 이런 말로 되어 있습니다. “내곁에 있어줘, 네 목소리 들려줘.” 아주 멋진 광고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고 사랑은 그대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었고 제자들에게 자기의 목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주님의 목소리와 음성과 말씀이 어느 책보다 충만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라고까지 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는 세상의 빛이나 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자기의 목소리와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사랑은 목소리와 음성입니다.
그런데 목소리와 음성은 일방통행이 아니고 쌍방 통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자기의 목소리를 들려주시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씀했습니다. "네 소리를 듣게 하라"(아가2:14).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아가8:13). 요한은 예수님과 속삭였습니다. “그가[요한이]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님도 그에게 속삭였습니다.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요한에게 속삭였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니라.”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왜나햐면 요19:27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은 세상에 사는 마지막 날까지 예수님과 속삭였습니다. 계시록에는 “내가 보니” “내가 들으니” 라는 말로 가득합니다.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속삭이지 않았습니다. 직접 말을 하지 못하고 요한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요한에게] 머리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사랑이 없을 때 직접 말을 하지 못하고 간접으로 말을 합니다. 디베랴 바다가에 부활의 주님이 나타났을 때에도 요한은 직접 말을 했지만 베드로는 직접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가가 주시라 하니 베드로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물론 베드로가 말을 도무지 하지 않은 사람은 아닙니다. 큰 소리로 말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사랑의 속삭임이 아니었고, 자기를 드러내는 자기 자랑의 말들이었고,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자기 주장의 말들이었습니다. 사랑은 속삭임의 목소리이지 자기를 들어내고 주장하는 떠드는 말들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유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에게는 침묵만 있었습니다. 침묵이 때로는 금이 될 수도 있지만 저는 침묵이 불행이요 저주요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없을 때 침묵이 있을 뿐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유다에게는 말이 없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캄캄한 밤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유다가 나가니 밤이더라.”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 물론 유다도 살았을 때 말을 조금은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은 불평과 불만의 말들뿐이었습니다.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던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사랑은 떠남입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최고의 사랑은 떠남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 떠남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이중표 목사님은 이것을 별세라고 강조합니다. 사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이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눅9:31).
별세는 세상을 떠남을 의미하고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과 자신을 부인함을 의미합니다. 세상과 자신을 버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별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떠남과 별세가 제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떠난다고 말씀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16:7).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길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므로 우리의 살길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 한 가지 우리의 유익은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을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들 앞서 떠나심의 모습을 보이셨으므로 우리도 그저 예수님의 떠나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두려움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애착을 모두 벗어버리고 사명을 다한 후 주님을 따라서 우리도 세상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모했습니다. 떠남을 세상에 있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까지 고백했습니다. 사실 바로 떠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중표 목사님은 “별세의 행복”이란 제목의 책을 썼고 최근에는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란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떠남과 사랑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일치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13:36). 도마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14:5). 빌립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요14:8). 베드로와 제자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고 부정적이었습니다. 세상에 머물면서 종교적인 왕국과 정치적인 왕국을 이루고 한 자리를 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유다는 밖으로 나가서 정치적인 음모를 꾸몄습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할 수 없이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키도록 하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세상을 떠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읽은 김동리 작품인 「사반의 십자가」에 보면 유다는 정치적인 혁명을 이루는데 만 관심을 기울이다가 결국 그것이 실패하자 자살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요한은 떠남의 삶을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입을 열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5,16).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1,2).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계22:20,21).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은 가까이 있는 것, 함께 있는 것, 접촉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우리 가까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만져주시고 접촉해주셨습니다. 사랑은 목소리를 주고 받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목소리와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사랑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별세하셨고 별세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다처럼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실수를 반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처럼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처럼 주님 가까이, 주님과 함께, 주님을 만지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목소리를 주고 받으며, 주님과 속삭이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십자가와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조만간 주님처럼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행복하게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요13:1-2 / 김필곤 목사
제가 성도님들에게 아침에 보내는 [열린편지]에 지난주 금요일 “사랑하면 건강해집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랑은 건강을 주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클리블랜드의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연구팀에서 기혼남녀 만 명에게 "아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표현합니까?"라는 간단한 질문을 통하여 건강의 척도를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이 질문을 던진 결과, '예'라고 답한 사람들은 협심증 발병 위험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2배 정도 낮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사랑받으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는 배우자가 건강하게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배우자가 오래살기를 원하면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를 16년 만에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인생 최고의 행복은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예방의학 전문가인 피터 한센(Peter Hansen)박사는 현대인이 건강을 위하여 건강식품, 규칙적인 운동, 담배, 술, 과로, 과식, 수면 부족 등 해로운 습관을 버리는 것을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의 건강 관리법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창조적인 힘이 있어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지고 병균과 싸우는 자연의 힘이 배양된다는 것입니다.
앨런 룩스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이 사랑으로 봉사할 때 봉사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희열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실험해 보니까 봉사자의 90%이상이 기분이 아주 좋아지는 Helper's High(봉사자들의 희열감)를 경험했고, 봉사 후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통증과 불편함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돈이나 물건을 기부하는 것보다 웃어주고 포옹하고 악수하며 사랑으로 친밀한 정서적 교류를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훨씬 건강에 이롭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읽고 둘째 딸이 “아빠 사랑해용... 좋은 하루 보내시와용”이라고 답신을 해 왔습니다. 딸의 짧은 답신이지만 그 편지를 받으니까 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우리는 모두 사람 마음속의 사랑을 찾아 인생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남기는 것이 사랑이듯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사랑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인생 최고의 행복은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다.”라고 말했는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전제 조건입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지극히 사랑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머리로 느낄 때 비로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우리를 언제나 어느 때나 끝없이 아무런 조건없이 영원히 사랑해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추해도, 병들어도, 가난해졌을 때도, 배신했을 때도, 실패했을 때도, 죄를 지었을 때도, 돈이 없을 때도, 피해를 주었을 때도, 피해를 주었을 때도, 자존심을 상하게 할때도, 싫은 소리를 할 때도, 마음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할 때도, 큰 손해를 끼칠 때도, 원수처럼 취급할 때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실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그런 분들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람 중에 없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경우에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오늘 읽은 성경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아멘입니까? “자기 사람들을”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죄 많은 000”, “가난한 000”, “못 생긴 000”, “늙어 병든 000”,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을 하는 000”, “무식한 000”, “남 비난하기 좋아하고 허물 드러내기 좋아하는 000”, “욕심 많은 000”, “나밖에 모르는 000”, “불효하는 000”, “돈만 아는 000”, “게으른 000”, “이중적인 000”, “중독된 000”, “우울한 000”, “실패한 000”, “시험당한 000” 등을 사랑하십니다. 믿습니까?
여기서 사랑한다(아가페사스, 아가페센)는 말은 아가페적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란 헬라어에서는 이성적 사랑을 말하는 에피투미아, 감성적 사랑을 말하는 에로스, 가족간의 사랑을 말하는 스톨게, 친구의 사랑을 말하는 필레오, 헌신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 등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다만 상대방을 위하여 주는 무조건적 사랑을 말합니다. 기분이나 감정, 육체적 조건이나 정열을 뛰어넘은 초월적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사랑하는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돌아오는 보상이나 댓가가 없는데도 상관하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으로 우리를 지금까지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시고 있으면 앞으로도 영원토록 사랑해 주십니다. 믿습니까? 여기서 “끝까지(에이스 텔로스)”는 시간적 의미로 끝까지입니다. 영원토록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끝까지는 강세적인 의미로 최대한으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오늘 성경은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그냥” 끝까지 사랑하십니다(무조건적 사랑).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누구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까? “자기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예수님도 편애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편애가 아닙니다. 남편이 이 여자나 저 여자나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남편이 날마다 “나는 모든 여자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아내가 감동이 되겠습니까? 아내가 이 남자나 저 남자나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아내가 “나는 모든 남자를 사랑하다”고 말하며 나의 자류로운 사랑을 간섭하지 말라고 하면 아내가 감동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기준이 되어 내가 택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버리면 그 사랑은 끝이 나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되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택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누가 우리를 택했습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를 택했습니다. 요한일서 4:10절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기로 작정한 하나님이 먼저 사랑한 사랑입니다.
언제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했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선택을 받을 만한 어떤 조건이 있어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선택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조건을 보고 자신이 선택하여 사랑하니까 끝까지 사랑하기가 힘들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잘나고, 명예가 있고, 돈과 권력이 있고, 목적을 달성할만하고, 잘 생겨서, 건강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딸이기 때문에 그냥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랑받을 만한 자격도, 성품도, 가치도, 능력도 없지만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런 조건없이 그냥 우리를 선택하여 사랑하는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저녁에 잠을 잘 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따돌림을 당할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을 때, 실패할 때, 병들고 늙어 존재감이 점점 살아질 때, 돈없고 힘없다고 소외될 때 이 사랑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얼마나 힘이 납니까?
지금도 우리 주님은 “자기 사람”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우리를 그냥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2.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변치않는 사랑).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이 어떻게 끝까지 사랑하십니까? 사람은 끝까지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결혼식을 할 때 대부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어 때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겠다”고 서약을 합니다. 그런데 그 서약은 쉽게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자신의 조건에 따라 사랑을 포기해 버립니다. 자기 살기도 바쁜데, 자기 목숨이 중요한데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사랑할 만한 에너지가 고갈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상대가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 지속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사랑합니다. “한 사람과 살기에 지루하다고, 성격에 차이가 난다고, 무능력하다고, 병들었다고, 부모와의 동거에 따라 주지 않는다고, 낭비벽이 심하다고, 생활비를 주지 않는다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바람났다고” 사랑을 지속할 수 없다고 쉽게 사랑을 접어 버립니다. 아무리 환상적이고 열정적인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 변질되고 식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사랑은 조건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변치않는 한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까?
사랑하지 못하는 극한의 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유월절 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루가 있으면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소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남을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예수님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녁 기도하시다 잡히십니다. 밤새 주무시지도 못하고 끌려가 새벽 공회에서 심문받습니다. 채찍을 받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씨우고, 손발에 못을 박히고 9시에 십자가에 달리고 허리에 창을 찔리며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비난과 수모 가운데 오후 3시면 운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 아시면서도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12 제자 중 하나였던, 돈을 맡았던 유다가 예수님을 인신매매한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회계를 맡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래나 사람은 돈에 대하여 예민하기때문에 아무에게나 돈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유다에게 회계를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이 유다를 신뢰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유다가 돈 몇푼에 자신을 그렇게 신뢰해주고 사랑했던 예수님을 팔아먹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유월절 마지막 만찬이 행해지는 동안 마귀가 이미 시몬 가룟의 유다가 그를 넘겨 주도록 마음을 향하여 제안하여 그 유혹에 넘어간 것을 예수님은 다 아셨습니다. 아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고 돌아가실 것을 아셨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특히 유다가 자신을 판다는 것을 이미 아시고 마지막 밤,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유다에게 어떻게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교부 크리소스톰은 유다의 발을 맨처음 씻겨 주었다고 말합니다. 헌신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중에 유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뿌리 깊은 증오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도 아셨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다 부인하고 도망갈 것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을 닦아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 사람들이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을 다 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제자들을 종처럼 섬기는 사랑을 끝까지 하신 것입니다.
26절 보십시오. 유다에게 떡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종이 하는 일을 수행하십니다(4,5). 일곱가지의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② 겉옷을 벗고 ③ 수건을 가져다 ④ 허리에 두르시고 ⑤ 대야에 물을 담아 ⑥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⑦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용서와 섬김의 사랑을 끝까지 실천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물과 피는 정결케하는 도구로 나옵니다. 물로 씻는 것은 용서와 거룩을 통해 정상적 관계를 갖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속물로 주시기 까지 사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라고 하셨는데 변치 않는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한 사람을 끝까지 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죽음이 바로 앞에 있는데고 불구하고, 제자들이 배신하는데도 불구하고, 인신 매매하는 데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을 멀리 떠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면서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차원이 다르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우리는 죄인이고, 원수이며, 더러우며, 먼지이고, 재이며, 벌레이고, 안개이며, 불결하고, 불경하며, 어리석고, 비천하고, 쉽게 유혹에 무릎꿇고, 허물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에 잘 참석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끄러워 예수님을 전하지도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멀리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루 종일 돈벌이에 바쁜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살다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지만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5-39)”라고 고백합니다.
3. 우리 주님은 우리가 “사랑으로 살게 하기 위해”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왜 예수님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겠습니까?
왜 이제 12시간이 지나면 잡히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처형을 당할 것을 다 아시면서 이런 세족식과 성찬식을 하시는 것입니까?
14-15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이렇게 마지막 밤에 유언적 행위를 통해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사랑으로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를 주님이 친히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세족식을 할 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감격하며 눈문을 흘리면 나고 주님처럼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을 해야하겠다고 다짐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 22장 24절에는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쓸데없는 경쟁에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안중에 없고 자리다툼만 하던 사람들입니다. 부모의 사정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사는 자식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얼마나 주심의 사랑의 헤아리고 삽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다고 하지만 나 살기에 급급하지, 주님의 사랑을 헤아리고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배신하는 그들에게, 서로 누가 높냐고 다투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였습니까?
34절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시간적으로 다른 새 계명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새 계명입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준이 되는 사랑입니다.
3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 내 사람, 하나님 나라 백성,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받고 사는 사람인 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바로 그리스도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어떤 외적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격이며, 그 인격과의 인격적인 관계다.”라고 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이런 결론을 내릴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사랑”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에 가득 체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100번 이상 사용하면서 강조합니다.
요한1서 4장 7-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았습니다(갈3:13), 모욕과 수모를 당하고, 창에 찔리고 슬픔과 질고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달렸습니다(사53:4)
이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다시 고기잡으로 갔습니다. 그 때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결코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고기를 먹이고 예수님이 물어봅니다. 무엇을 물어 봅니까? 요한복음 21장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문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냐?”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은 아시나이다” 다시 예수님을 물어 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을 사랑하느냐?” 세 번째 물어 보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을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우리는 너무 사람의 사랑에 목말라 허우적 거리며 살지 말아야 합니다. 끝없이 부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도 행복하게 살기에는 충분합니다.
우리는 끝없는 주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주님의 이 끝없는 사람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의심을 보류하고 서로 신뢰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주 대신에 축복을, 경쟁 대신에 섬김을, 공격 때신에 격려를, 비판 대신에 감사를, 섭섭함 대신에 위로를, 탐욕 대신에 베품을, 정죄 대신에 먼저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받으면 행복해지고, 사랑하며 사람받으면 건강해집니다. 의사이며 심리학자 에멧트 팍스는 "예수 십자가 사랑으로 충만할 수 있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17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은 만큼 행복하고, 사랑한 만큼 행복합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하고, 이래도 사랑하고, 저래도 사랑하고, 갈수록 더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십자가가 없다는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상처도 받고, 사랑하면 갈등도 생기고, 사랑하면 손해도 보고, 사랑하면 수모도 당하고, 사랑하면 자존심도 상하고, 사랑하면 수치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훈장이 되고, 우리를 고결하게 하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게 하는 것들입니다. 십가가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갈로의 시 가운데 “말없이 사랑ᄒᆞ여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한 것처럼 아무 말 말고 자주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잠자코 사랑하여라.
사랑이 깊고 참된 것이도록 말없이 사랑하여라.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봉사하고 눈에 드러나지 않게 좋은 일을 하여라.
그리고 침묵하는 법을 배워라. 말없이 사랑하여라.
꾸지람을 듣더라도 변명하지 말고, 마음 상하는 이야기에는 말대꾸하지 말고,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네 마음을 사랑이 다스리는 왕국이 되도록 하여라.
그 왕국을 타인에 대한 자상한 마음으로 채우고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사람이 너를 가까이 않고 오히려 멀리 떼어버려 따돌림 받을 때,
말없이 사랑하여라.
도움을 주고 싶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여라.
오해를 받을 때 말없이 사랑하여라.
사랑이 무시당하는 것을 참으면서…
네 침묵 속에 원한이나 인내롭지 못한 마음,
또는 심한 비판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여라.
언제나 형제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도록 말없이 사랑하여라.”
내 남편, 내 아내가 제일 좋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가 제일 좋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 내 딸이 그래도 제일 좋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기 때문입니다. 내 교회가 그래도 제일 좋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사는 곳이 천국이고 사랑할 사람이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발을 씻겨주신 주님의 심정
이재철 목사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허물이 많아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찾지 않고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십니다.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셨습니다.
♣ 끝까지 사랑하신 증거 두 가지가 나옵니다.
☞ 첫째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4-6절)
이 발이 배반하고 도망갈 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누가 큰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이러한 제자들을 살랑하심을 보이기 위해 발을 씻기셨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풍습은 종이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서로 다투느라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 조차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 둘째는, 성찬식입니다. (3-4절)
저녁 먹는 중이란 목요일 저녁 최후의 만찬, 즉 성찬식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나면 많이 바뀝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해줄 수 있는 것을 행복이라 느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몸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마음이, 주님의 눈물이 점점 사라져 갈 수 있습니다.
◈ 어떻게 하면 주님의 심정을 가질 수 있을까요?
① 사람이나 또는 어떤 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에 집중하십시오.
사람이나 어떤 것에 집착하면 불행해집니다.
예수님은 사람이나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집착하면 나도, 자녀도 불행해집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에게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해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하게 됩니다.
재물에 집착하면 또한 그것으로 인해 불행해집니다.
② 지금 당장보다 미래를 책임지시는 성령님을 의뢰하십시오.
7절 말씀에 보면 내가 왜 발을 씻는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마음을 다른 곳에 빼앗겼기 때문에 아무리 얘기해도 모릅니다. 그러나 후에 이들은 알았습니다.
자녀도, 목장 식구도 지금은 부모님의 마음과, 목자님, 목녀님의 마음을 몰라도 나중에는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천방지축 제자들이 나중에는 다 세워졌습니다.
오늘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늘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두 가지를 준비해야 합니다.
㉠ 내 심령 속에 감추인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10절 말씀에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욕한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입니다. 목욕은 했더라도 매일 발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발을 씻어야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도 매일 살아가면서 죄를 짓기 때문에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내 속에 감추인 죄가 있는지 보고 자백하십시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십시오. 집을 팔아 헌금을 했지만 막상 모두 다 헌금하려고 하니 욕심이 들어가서 절반을 감추고 드렸습니다. 이 부부는 결국 혼이 떠나 죽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구원 받은 사람인 것은 확실하지만 교회를 통해 이루실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지옥 갈 죄는 짓지 못하지만 살다보면 매일 죄를 짓습니다.
내가 지은 죄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몇 백배 크므로 우리는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자백하게 하십니다.
㉡ 받을 상급을 위해 사십시오.
주님 앞에 섰을 때 받을 상급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살다가 주님 앞에 갈 때는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사람이 나를 몰라줘도 받을 상급을 생각하십시오.
기도할 때, 금식할 때, 구제할 때 사람 앞에 보이려 하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상 받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상 받읍시다.
끝까지 사랑하시다
곽선희 목사
결혼에 실패한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있어서 이 아들을 데리고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역시 원만하지 못하여 많이 구타를 당하고 많은 고생을 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또 다시 이혼을 하게 되고, 세 번째 남자와 결혼을 했으나 역시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결혼을 할 때마다 제일 처음 얻은 이 아들이 마치 큰 혹과도 같이 아주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만 느껴졌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의붓아버지를 두 번 세 번 바꾸어야 하는 그런 처지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존재로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하는 그런 고통을 느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서운 부부싸움을 보면서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세 남자에게 배신당한 이 어머니는 아들을 가르치면서 ‘사람을 믿지 말아라. 사람을 사랑하지 말아라. 세상에 사랑은 없다.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가짜다. 아무 것도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급기야 이 아이는 공격형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큰 사고를 쳐서 퇴학을 당하고 군대에 입대하여 또 큰 사고를 내어 불명예 제대를 당했습니다. 어쩌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의 사랑을 받아줄 줄을 모르고 이해할 줄도 모르고 그는 항상 부부싸움을 격하게 하고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나가는 직장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누군가를 기다리게 됩니다. 1963년 11월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그 앞을 지나갈 때에 그를 향하여 총을 쏘았습니다. 바로 이 때 제가 미국에 있었습니다. 그 엄청난 사건을 거기서 듣고 볼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이 이 같은 엄청난 사건 엄청난 비극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의사인 제임스 밥슨이라고 하는 분은 이 사실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비극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 한 아들이 저지른 역사적인 비극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밥을 먹고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먹고삽니다. 우리는 알거나 모르거나 사랑을 받고 살고 사랑을 하면서 살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이유야 어떠하든지 아이들을 호되게 나무라든가 혹은 때려보신 일이 있습니까? 두고보십시오. 사흘 후에 그 아이는 감기에 걸립니다. 어쩌면 병원에 가게 됩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왜 꾸중을 듣고 매를 맞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스럽던 어머니의 눈, 그 사랑스럽던 아버지의 눈이 무섭게 변할 때에 이 아이들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병이 듭니다. 보십시오. 그 어린아이들과 부모님 사이에는 오직 사랑,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보고 사랑을 먹고 그리고 자라고 성장하고 건강한 것입니다. 이 줄이 끊어지면 못 삽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세상의 비극이 있다면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배반하는 데에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지금 그 처지 그대로 놓고 받아들이십시오. 십자가를 쳐다보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느끼고 이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 사랑을 믿을 때에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십자가 속에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을 성경 66권은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신학공부를 하는 중에 언젠가 칼바르트의 책에서 이 한 문장을 찾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지금도 두고 두고 외우고 있습니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 너무 너무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신다고. 여러분, 사랑 받을만 해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받을만 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랑 받을만한 자가 못되는 것을 사랑해서 사랑 받을만한 자로 창조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아는 자로 사랑을 믿는 자로 사랑을 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시는 것이 구원이요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그 엄청난 사랑을 그 사랑의 속성을 드라마틱하게 상징적으로 실제상황에서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창조적 사랑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바로 실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듯이 그래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시간적으로 끝까지요 능력적으로도 끝까지요 속성적으로도 끝까지요 인간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생각하건대 열두시간도 못되어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눈 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환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강파티처럼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십니다. 얼마나 비장합니까?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가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걱정하셨습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자신은 수난을 당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불안과 그 아픔을 다 초월하고 제자를 사랑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처지와 자기 기분에 매여서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을 버리기도 합니다.
제가 어떤 때에 꼭 찾아가야 될 환자가 있었는데 이렇게 저렇게 약속을 하고도 찾아가지 못하다가 언젠가 한 번 밤 10시가 넘어서 ‘더 이래선 안되지, 아무래도 내가 저 분이 세상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가서 뵈어야겠다’ 병원을 찾아가 본 일이 있습니다. 지금 주사바늘을 온 몸에 꽂고 코에다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찾아 들어갔더니 자기가 아픈 것과 자신이 지금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바쁜 중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일 아침 또 새벽기도 나가셔야 될텐데…” 걱정하시면서 어떻게 이 어려운 걸음을 하셨느냐고 자꾸 말씀을 하십니다. 아이고 그렇지 않다고, 나야 건강한 사람인데 가던지 오던지 상관이 있느냐고 “지금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렇게 위로를 해보아도 “아닙니다. 나는 어차피 이렇게 가는 길인데, 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오늘 이 시간에 이런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며 저를 걱정해 주시더라고요. 저는 생각합니다. ‘이분이 아주 심덕이 높구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덕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병원에 가보면 자신이 좀 아프다고 해서, 자신이 아픈 것이 누구 때문에 아픈 것인가요? 좌우간 주변사람들을 다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잖아요.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고 훌륭한 일을 많이 하다가 그래도 ‘한국에 와서 이 의술을 가지고 한국 동포를 위해서 마지막 생을 보내리라’ 하고 한국에 돌아오는 의사들이 많습니다. 그 의사들이 하는 말입니다. 자, 병원에서 주사를 놓을 때나 혹은 실밥을 뽑을 때에 좀 따끔하게 아플 때가 있습니다. 의사가 미안해서 “조금 아픕니다”라고 말을 하고 시술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는 대개 미국사람의 경우에는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How are you feeling now? 어떻게 느끼십니까?”하고 물으면 대답은 언제나 준비된 대답이 있습니다. “That's O.K. Thank you,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게 대답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주사를 놓다가 잘 안 들어가고 아프던가 하면은 딱 눈을 부릅뜨고 “너 가짜 의사 아니야?” 이런다고 합니다. 간호원 의사 할 것 없이 다 욕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말도 듣지 않고. 그럴 때에 ‘이것 참, 무슨 앓는 것이 벼슬인가. 왜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구나. 내가 이런 사람 치료하려고 여기까지 왔나’ 아주 실망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느껴보십시오. 내가 아픈 건 내가 아픈 것이지 왜 주변사람들까지 못살게 굴어요. 이 수준밖에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속상하고 답답한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래, 이젠 남에게 화를 내어도 되는 것입니까? 짜증을 낼 권리가 있는 것입니까? 나는 나대로 살던 죽던 나의 길을 가는 것이고 나는 어떤 순간에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에 집착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만 생각하고 바쁘다 뭐다 하게되면 누굴 돌아보겠습니까? 내가 하는 일만 대단한 것처럼. 그 순간 사랑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을 수도 이해할 수도 할 줄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헬렌 니어링이라고 하는 분의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에서 조화로운 삶의 원칙을 아주 쉽게 풀어서 세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웬만하면 오전에는 전화를 받지 말 것, 그리고 기도하는 시간, 성경 읽는 시간 그리고 사색하는 명상의 시간을 갖도록 하라. 아무리 바빠도 좀 그러한 영적인 경건한 시간을 갖도록. 새벽부터 전화 걸고 전화 받고 이 야단하지 말고, 그건 조화롭지 못하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어떤 때에 보면 새벽기도 마치고 내려가서 잠깐 좀 기도하고 있는 그 시간에 “따르릉”하고 전화를 걸어서 별소리도 아닌 것 가지고 그러면 좀 곤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게 고마운 사람. 그리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라. 자꾸 나쁜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자신의 생각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돌리십시오. 세 번째는 돈을 벌더라도 온종일 몽땅 돈버는 데에만 쏟지 마라. 사업을 해도 사업에 미치지 말아라. 성공도 실패도 별거 아니고 다 한 사업도 끝낸 사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그래야 나도 생각할 수 있고 남을 생각할 수도 있고 남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뭐 대단한 일 하는 것처럼 죽느니 사느니, 거기에 목숨을 걸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목숨을 걸만한 일이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왜 죽기 살기로 그러십니까? 이제 여러분 아이들 대학 시험을 봅니다만 거기도 대충대충 해두십시오. 거기에 합격하면 살고 아니면 죽어라, 이거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이들이 가출을 하지요. 거기에 목숨 걸 거 없습니다. 해 보고 되면 좋고 안되면 다른 길 찾자, 그러고 말지 거기에 전적으로 하니까 아이들이 끝나자마자 자살하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됩니까?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 세상을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착하지만 이 엄청난 십자가를 앞에 놓고도 제자들을 사랑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가룟유다가 있는 것을 아시면서 제자를 사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현장에 있던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가룟유다가 자꾸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가룟유다가 배신을 합니다. 이 사람이 독사 눈을 하고 쳐다본다는 말입니다. 그 가룟유다와 예수님 사이에 눈이 마주칩니다. 이것을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만 생각하고 집착하면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를 저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가룟유다가 있는 열 두 제자를 함께 사랑하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가룟유다를 포함해서 열 두 제자를 사랑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이라고 하는 교부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발을 씻길 때에 가룟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겼다는 말입니다. 가룟유다의 발을 씻기시며 제자를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맘이 아니고는, 참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좀 더 실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가룟유다 비슷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들이고,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갑니다. 이런 사건이 다 앞에 있습니다. 다 그러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설교학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설교할 때에, 제가 이렇게 설교할 때 지금 보면 우리교회는 특별히 온 교인들이 다 이렇게 저를 쳐다봅니다. 전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다른 교회의 목사님들께서 오시고 깜짝 놀랍니다. 집중해서 쳐다보는 데 정신이 없더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 잘하는 비결은 조는 사람을 보지 말아라. 졸기만 하나요, 입을 벌리고 천장을 보면서 아주 주무십니다. 그쪽으로 눈이 가기 시작하면 설교를 할 때에 목소리가 커집니다. 그러면 설교가 그날 잘못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안 봐야 합니다. 그 쪽을 안 봐야 합니다. 설교를 잘 안 듣는 사람을 안보고 해야지 그 쪽으로 자꾸 시선이 가면 어느 사이에 목소리가 커지고 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 살면서 가능한 좋은 것만 많이 보십시오. 좋은 생각만 많이 하십시오. 긍적적으로 보십시오. 가룟유다가 분명히 앞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나머지 제자들도 시기 질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게 되었는가? 그 배경을 생각하게 되면 참 기가 막힙니다. 이 밖에서 들어올 때에는 더구나 이 잔치에 올 때에는 발을 씻어야 하는데 종이 없을 때에는 서로서로 씻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시기 질투가 나서 네가 크냐? 내가 크냐? 내가 우편에 네가 좌편에, 이러고 있을 때니 저들이 생각하기를 ‘네가 내 발을 씻겨라 그러면 내가 네 발을 씻기겠다.’ 서로 팽팽하니 맞섰습니다. 결국을 발을 못 씻고 예수님의 발도 씻어드리지 못하고 만찬을 먹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그 우락부락한 마음,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마음을 헤아리시고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떠다가 “내어놓아라” 그리고 씻기십니다. 베드로 차례에 갔을 때에 베드로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서 보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랬는데 헬라 원문대로는 “영원히 안됩니다”라는 뜻입니다. 내 발은 영원히 씻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넌 나와 상관이 없다.” 또 생각을 돌려가지고 “얼굴서부터 다 씻겨 주세요” 라고 합니다. 좌우간 극성입니다. 이거 다 정말 뜻을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까.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이러하든 저러하든 발을 씻기시며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모르나 후에는 알리라. 내가 왜 발을 씻기는지 너희는 모를 것이다.” 지금은 모른다, 모르는 대로 씻기십니다. 모른다고 책망하지 않아요. 모른다고 져버리지도 아니하십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발을 씻겨 주십니다. 그러면 그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이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사실입니다. 알아서 발을 씻기게 될 것이고 알아서 예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뒤에 알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무엇이냐? 사랑은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현실을 이해하고 사랑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아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에게 위탁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얼마나 귀중합니까?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사랑하신 것입니다.
Carl R. Rogers 라고 하는 학자의 On Becoming a Person 이라고 하는 책에서 건강한 인격은 무조건적인 긍정적 관심에 기초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몇 가지 생각해 볼 만합니다. 먼저는 경험하는 것에 대하여 개방적으로 대하고 수용합니다. 일을 만날 때에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도 의미가 있으니까. 개방적으로 수용하고, 또 하나는 실존적 삶을 생각하면서 긍정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속에 깊을 뜻이 있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가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아침을 향하여 갑니다. 확실한 미래가 있고 자신만만한 신념이 있기 때문에 제자들을 사랑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확실함이 없는 사람은 휘청거리느라고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심령이 자유로워야 하고 의존적이 아니고 어디도 끌리지 않고 영적 자유를 느끼고 사명이 확실할 때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을 넘어서서 창조적인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혹 장난도 심하고 해도 우리는 그들의 먼 미래를 바라보며 장난기를 보면서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 아이가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가룟유다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십니다. 내 마음속에 가룟유다같은 못된 마음이 있는 것을 아시면 서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이 무지하고 몽매하고 어리석고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건만 그래도 사랑하십니다. 창조적으로 사랑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도 미련한 짓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 사랑하십니다. 오직 사랑만이, 이 엄청난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재창조를 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십니다. 오직 사랑 안에 구원이 있고 새로워지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항상 주는 우리를 사랑하시건만 그 사랑을 멀리하고 오해하고 불신하고 배반하면서 나 자신도 괴로움 당하고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산 이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참 사랑의 의미를 알고 사랑의 사람이 되고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웃을 보며 창조적인 사랑을 할 수 있고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은혜와 능력을 더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의 섬김
요 13:1-15 / 김태복 목사
요13:1-15)
언제나 말씀드리는 대로 교회는 가정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육신의 혈육으로 구성되었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성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공동체가 가정이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나 교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 사랑이 없는 교회는 이미 그 생명력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여러 가지 여건이 좋지 못한 가정이나 교회일지라도 사랑이 넘친다면, 모든 여건이 부요하지만 사랑이 없는 가정이나 교회보다 몇 십 배로 복된 가정이요, 교회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간, 난곡신일교회에 제직수련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아픈 교회의 모습을 보고 왔습니다. 약도를 그려준 대로 그 부근에 갔더니 길옆에 신일교회라고 쓴 큰 교회가 보여서 주차를 하고 "오늘 제직수련회의 강사입니다."라고 했더니, "잘못 오셨습니다."라고 하면서 저 골목으로 조금 더 가면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멋쩍었던지요. 과연 100미터 정도 더 가니 '난곡 신일교회'라고 쓴 이층교회가 나타납니다.
사정을 들어 보았더니 5년 전인가, 교회가 분열이 일어나 120명의 교인이 나와서 이 교회를 세웠는데, 지금은 한 200명 모인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동안 얼마나 교인들 간에 대판 싸움이 벌어지고 100미터 안 되는 곳에 새 교회를 세우고는 몇 년 전만 해도 형님 아우하면서 친형제처럼 지내던 사이가 지금은 만나도 인사도 안하고 서로 비방하는 사이요, 노회나 총회에다 진정하고 고소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아니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단의 문제 외에는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분열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교회가 분열되는 경우, 분열을 시킨 장본인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열하는 과정에서 많은 선한 일꾼들을 얼마나 실족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서운 범죄행위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 부모의 사랑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는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으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 하반절에 보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끝까지"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스 텔로스"인데.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첫째는, "완전히"라는 뜻이요, 둘째는, "생명의 끝, 혹은 죽기까지"라는 뜻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어떠한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변함 없이 사랑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더 나가서는 나를 사랑하거나 나를 배신하거나 변함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에게 서약 받을 때는 묻기를 "사는 날 동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항상 사랑하기로 서약합니까?"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랑이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런 서약대로 사는 부부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부부일까요?
어느 분이 쓴 글 중에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브를 만들었을 때 왜 하필이면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을까? 다리뼈로 만들었으면 밟는 습성이 생길 것이고, 팔뼈를 쓰면 삿대질을 잘 할 것이고, 머리뼈를 재료로 쓰면 아담의 훈장 노릇이나 하려 할 것이고, 더군다나 턱뼈 같은 것을 뽑아 쓰면 말이 많아 싸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고, 어깨뼈를 쓰면 거드럭거릴 것이고, 목뼈를 사용하면 교만할 것이니 행복한 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갈비뼈는 힛트작입니다. 그것은 팔 밑에 있으니 보호자의 뜻이 있고 심장과 가장 가까우니 사랑의 재료입니다. 갈비뼈가 나란히 줄지어 있는 것도 동고동락하며 나란이 걸어가라는 적절한 재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들이 결혼식에서 서약을 단단히 하도고 많이 깨어지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그 이유를 보면 "과거가 있다." "성격이 안 맞는다." "무능하다" 등등, 전부 조건적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기의 제자들이 자기를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앞으로 닥쳐올 십자가 사건 때, 자기를 버리고 너나 없이 도망칠 비겁쟁이들이 될 것이요, 가장 믿었던 수제자 베드로마져도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일행들의 살림을 맡았던 가룟 유다가 자기를 은 30냥에 파는 엄청난 배신행위를 할 것을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나타내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사랑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언제나 십자가 사랑이 중심이 되어야 올바른 교회가 됩니다. 교회가 십자가 사랑으로 가득찰 때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가운데서만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1서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가정 식구끼리는 식구가 대학에 불합격했거나 병들었든지, 식구가 실직자가 되거나 전과자가 되었든지 서로 아픔을 나누고 결점을 감싸줄 때, 서로 위로 받고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라는 가정도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강조한 교회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럼에도 교회가 부자나 많이 배운 자나 지위가 높은 자는 우대하고 못 배우고 가난하고 늙고 병든 자들은 업수이 여긴다면 이미 그런 교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런 풍토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어치든지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병든 자나 건강한 자나, 젊은이나 노인이나, 못 배운 자나 많이 배운 자나, 사회적으로 낮은 자나 높은 자나 관계없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나 자매, 한 식구가 되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서로의 결점을 감싸주며 덮어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힘쓰십시다. 그 때 하나님은 그런 교회 가운데서 거하시면서 강하게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요, 그런 사랑의 공동체에서 귀한 인재가 많이 배출될 것이 분명합니다.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휘트브레드 문학상을 1989년에 받은 크리스토퍼 놀란(작품: '시계의 눈 밑에서')씨는 놀랍게도 세 살 때 뇌성마비가 되므로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손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가 타자를 치는 것은 이마에 작대기를 붙이고 타자기를 두들기는 것입니다. 한 페이지를 채우기 위해서는 무려 12시간이나 걸립니다. 그야말로 그는 식구들에게 짐만 지우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런 위대한 시인이요, 소설가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는 고백하기를 "내 식구들과 주변 사람들이 나를 내 모습 그대로 받아 주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교회는 진정 십자가 사랑의 공동체가 됨으로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병든 자나 건강한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많이 배운 자,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자나 높은 자나, 젊은이나 노인이나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가 됨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은 용서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 유월절을 마지막으로 보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기 위해서 미리 준비된 다락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은 지금 착잡할 대로 착잡하셨습니다. 오늘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실 것이요, 밤이 맞도록 여기 저기 끌려 다니면 심문을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끔직한 아픔과 수치를 당하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와 함께 음식을 나누는 제자들은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자기의 아픔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십자가 사건 때에 제자들을 어떠한 모습을 다 알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다 도망치는 비겁을 보일 것이요, "다 주를 버릴지라도 죽을 지언정 나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맹세하던 베드로마져 세 번이나 자기를 모른다고 부인할 뿐 아니라, 세 번 째는 마26:74에 보면 저주의 맹세까지 하면 부인했다고 했습니다.
아마, "만약에 내가 저 사람의 제자라면 하늘의 벼락을 맞아 죽을 것이다"라는 식이었습니다. 더 나가서는 가룟 유다가 자기를 파는 배신의 값으로 은 30냥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의 가슴은 터질 듯 싶으셨을 것입니다. 음식을 전혀 드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3년 동안 전력을 다해 키운 제자들의 그런 모습에 대단히 야단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후에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씻기기 시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더러운 발들을 하나씩 씻겨주면서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시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아직도 신앙이 어린 탓입니다. 저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특히 배신자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시면서는 피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미리 나타내신 용서의 행위였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에 자기들의 허물의 발을 정성껏 씻어 주시던 것을 기억하면서 한없이 울면서 회개했을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한 마디로 용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인간들의 삶에서 용서가 없다면 삭막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가정도 서로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덮어주고 씻어주는 곳이기에 어린 아이들이 거기에서 아름답게 자랄 수 있고, 사회에 나가서 생존경쟁을 하는 동안 당한 상한 심령과 패배의식을 안고 돌아온 가족들이 다시 치유를 받고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용서의 사랑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서로 용서하고 감싸주어야 하나님의 강한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서로 잘했니, 못했니 비판에만 능하고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조금도 용서하고 덮어주지 못하는 교회는 십자가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을 가지고 있는 한까지,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마음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미움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 사탄이 역사 하게 됨으로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년 새해를 맞으면서 여러분 속에 누구를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그것을 해결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 미움에 속박되어 살므로 영적으로 자유함이나 성장이 없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던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닐 앤더슨 목사님이 쓴 「내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란 책에 보면 '용서의 방법'이 나오는데 간단히 소개하면 (1)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의 이름과 어떤 상처였는지는 종이에 적으라고 했습니다. (2)그 목록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저는 누구의 이러이러한 죄를 용서합니다."라고 한 다음, 그 종이를 찢어 버리므로 하나님께 그 사람의 잘못을 맡기라고 했습니다. (3)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 사람도 역시 희생자였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4)더 나가서는 그가 주리고 목마르게 될 때 먹이고 마시게 해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닐 앤더슨 목사님은 자기의 간증을 했습니다. 그가 목회할 때에 어느 장로님이 그를 몹시 괴롭혔다고 합니다. 얼마나 사사건건 괴롭히는지, 예를 들면, 한번은 당회 때 자기가 여행단을 인도하여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가 즉시로 반대하기를 "나는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여행단의 인도자로서 목사님은 경비를 안 내실 것이고, 그것은 목사님에게 보너스를 주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경비를 내지 않고 가겠다고 말한 적도 없는 데 어떻게 공개적으로 그렇게 비난할 수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사사건건 반대함으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어느 날 교회를 사임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 때부터 열이 오르고 몸이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속에는 그 목사님은 그 장로님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교회를 사임하는 것은 잘못인 것을 깨닫고 그 장로님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사표를 포기하고 주일날 강단에서 설교하기 시작하는데 그날 따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지 부흥회나 다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만 끝까지 은혜를 받지 못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그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자기가 변화 받았다는 점입니다. 더 이상 괴로워하거나 그 장로님에 대한 분개심도 없었고 하나님이 강하게 붙들어 주는 목회를 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은 언제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는 자, 용서가 가득한 가정, 용서가 가득한 교회가 됨으로 하나님의 강한 역사를 체험하는 신년 새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섬기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하루종일 걸어 다녔기 때문에 발이 온통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지역은 대단히 더운 데다가 비가 자주 오지 않아서 먼지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신발은 우리가 여름에 흔히 신는 샌달 같은 것인지라 길을 다니다 보면 발이 너무 더러운 집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집 앞에는 물이 담긴 항아리가 있습니다. 제법 잘 사는 집에서는 손님이 오면 종이 나와서 발을 씻어 주고 수건으로 닦아주거나 종이 있는 손님은 그 종이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행은 더러워진 발을 씻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 일어나서 예수님의 발을 씻겨줄 줄로 기다리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고 음식을 다 먹어 가는 데도 제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일어나서 발을 씻어 줄 엄두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눅 22장을 보면 그 만찬석에서 제자들끼리 "누가 크냐?"로 서로 신경전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너무 한심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는 말씀을 수없이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곧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이요, 자기들 12명은 다 장관 자리에 앉을 것인데, 물론 영의정 자리는 수제자인 베드로가 차지할 것이지만, 우의정, 좌의정, 그 높은 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가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처지에 만약 자기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거나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준다면, 자기 스스로 낮다는 것은 자인하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서로 버티면서 무언의 파워 게임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 그래도 제일 똑똑하고 머리 회전이 빠른 자가 가룟 유다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거나, 자기가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 시장을 다니면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예수님의 때가 이미 다 끝난 것으로 판단하고 자기 실리를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살림 자금이나 헌금 들어온 것 중의 일부를 빼돌리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파는 조건으로 은 30냥까지 받아 챙기는 배신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한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다 못해 마침내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강권적으로 씻기기 시작 하셨던 것입니다.
그 발은 다만 먼지로 더러워진 것만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도 대단히 더러운 발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대사건을 앞두고 심히 고뇌하시는 스승의 아픔을 전혀 모르고 누가 높으냐로 신경전을 벌리고 있는 대부분 제자들의 무지한 발, 수제자라고 하면서도 몇 시간 후면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스승을 세 번씩 모른다고 부인할 비겁한 베드로의 발, 갖은 사랑을 다 받았음에도 돈에 대한 욕심을 벗지 못해 결국 스승까지 팔아먹는 가룟 유다의 배신의 발을 예수님을 씻겨주십니다.
아니, 제자들이 스승의 발을 씻겨 드려야 함에도 반대로 예수님이 교만하기 짝이 없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섬김의 무릎을 조아리고 계신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한 겸손의 모습, 섬김의 모습을 보이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모습을 보이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말씀하시기를 14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제자들의 도가 바로 섬김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섬김 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아직도 먼 사람입니다. 교회는 서로 발을 씻겨주는 섬기는 곳입니다. 교회를 섬김을 받으려 오는 자는 잘못된 자입니다. 물론 믿음이 어린 신자들을 그럴 수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어른이 아이를 오히려 섬깁니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시켜주고 울고 떼를 쓰면 엎어주고 달래줍니다. 가정에서 어른이 아이에게 "나를 섬기라" "밥을 해다 바쳐라"라고 한다면 그는 망령된 어른일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오래 믿은 신자들, 믿음이 강한 신자들이 믿음이 약한 어린 신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교인들 중에 허물과 죄가 나타날 때 누구든지 비난하고 책망한다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십자가 사랑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씻겨주고 싸매 주는 것입니다. 연약하여 시험이 들 때 격려하고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섬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그렇지 못하고 서로 섬김만 받으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당회장인데 왜 교회는 이처럼 대접을 소홀히 하고 있는가?" "내가 장로인데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하느냐?" "내가 부장인데, 내가 회장인데 무시하느냐?"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아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마20:26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섬기지 못하고 남의 허물을 씻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내노라 고개를 뻣뻣이 해도 낮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겸손히 낮아져 교회를 섬기고 남의 허물을 씻어주고 싸매 주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섬기는 자는 높은 자, 큰 자라고 하나님은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브라질 성자로 불리던 미국 선교사 멜랜드 부부는 브라질 깊은 산골로 들어가 선교하며 평생을 보내는 동안 이름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 곳 주민인 폴리오 인디언들이 처음에 이 선교사 부부를 그냥 '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그들을 괴롭혔던 '백인'을 부르던 증오에 찬 명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 맬랜드 부부는 의료봉사로써 주민들의 목숨을 구하며 병을 치료하는 헌신적인 생활을 하자, 어느새 '존경하는 백인'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폴리오 인디언들의 언어를 열심히 배워 10년 뒤에는 그들과 다름없이 유창한 말을 구사하게 되었고, 생활도 그들의 풍습대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선교사 부부를 '백인 인디언'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부상당한 인디언 소년의 발을 씻어 주고 있었더니 구경하던 인디언들이 "인디언의 발을 씻어 주는 백인을 보았는가? 이 사람은 하늘이 보내 준 사람이다."라고 말했으며 그 때부터 선교사 부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많은 인디언들이 하나님을 믿는 역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신년 새해 우리의 가정과 우리 교회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도록 힘쓰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식구들이나 교인들에게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십자가 사랑을 나타내며, 식구들이나 교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기를 힘쓰며, 그들의 허물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 서로 발을 씻기며
요 13:1-17 / 김명혁 목사
1. 섬김과 봉사의 사람 한경직 목사님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아홉 번째 설교를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처럼 살면 좋겠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삶은 온유와 겸손의 삶이었고 섬김과 봉사의 삶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남과 이웃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지난 월요일 한경직 목사님의 장례식과 하관식이 있었는데 감동과 은혜가 넘친 예식들이었습니다. 장례식에서 방지일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한경직 목사님의 삶은 하나님이 보실 때 아가서 1:16에 표현된 대로 "나의 사랑하는 자여, 너는 어여쁘고 사랑스럽구나"(You are beautiful and truly lovely) 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삶이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관식에서 림인식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한경직 목사님은 신의주에 계실 때 김복순 이라는 어린 소녀 하나가 다리를 저는 것을 보고 그 소녀를 돌보기 위해서 보린원이라는 사랑의 집을 만들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서울에 와서는 한경직 목사님이 영락 보린원을 만드셨고 고아원, 양로원, 모자원, 맹아원, 농아원 등을 만드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약하고 부족한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한 목사님의 사모님의 성품이 별로 부드럽지 못해서 영락교회에서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님은 사모님을 극진하게 대했고 극진하게 섬겼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저의 아버님도 극진하게 대했고 극진하게 도우셨습니다. 한 목사님이 신의주 제2교회에 계실 때 저의 아버지를 부 목사님으로 초청했습니다. 일본에서 법학을 공부하시다가 갑자기 신학을 하시게 된 저의 아버지가 처음 초청을 받았을 때 목회의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설교나 심방이나 가르치는 일이 별로 시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의주 제2교회의 제직들과 장로들은 저의 아버지를 부 목사로 초청하는 일에 침묵만 하고 아무도 동의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김기범 장로란 분이 입을 열었다고 합니다. "원 목사를 청하는 것이 아니고 부 목사를 청하는 이상 이것은 원 목사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교회에도 실수 없고 덕이 될 것입니다." 그제서야 모두 김기범 장로의 의견에 따라 저의 아버지를 부 목사로 받아 들였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그 이후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일 년이 지난 후 김 목사는 열심히 교회를 받들어 유능한 설교자가 될 뿐 아니라, 원래 장자의 풍이 있는데다가 강직하고 진실하고 능력이 있어서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고 평북 교계를 이끌고 나가는 중심 인물이 되었다."(장로시무 핸드북, pp. 317-8). 한경직 목사님은 한 평생 약하고 부족한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2. 섬김과 봉사의 모델 예수님처럼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신 최고의 모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과 죄인들과 모든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섬기시되 자기의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섬기는 삶의 극치는 자기 목숨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은 섬김의 삶이 무엇인지를 실물로 가르쳐 보여 주신 장소였습니다. 섬김은 사랑에서 비롯하는데 섬김이란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는 대속의 일과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육체적 봉사의 일임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두 가지 행동을 하셨습니다. 한 가지는 떡과 포도주 즉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일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봉사의 일이었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신 행동은 종교적인 행동이었고 발을 씻겨 주신 행동은 윤리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도 우리를 섬기셨고 윤리적으로도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주님의 섬김을 받아야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섬김을 받아야 아기가 살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의 섬김을 받아야 우리는 살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섬김을 받은 제자들도 이제는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4). 영적으로도 섬기고 육체적으로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제자들도 생명을 쏟아 바치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고 그리고 몸과 물질을 바치면서 사람들을 도우라고 말씀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섬기는 일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억지로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살과 피도 먹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삶은 차츰차츰 바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은 모두 섬기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생명을 모두 쏟아 바치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살렸고 몸과 물질을 바치면서 사람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3. 주님의 분부를 따라
오늘 아침 우리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서 두 가지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한 가지는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는 일입니다. 또 한 가지는 서로 발을 씻는 일입니다. 1998년 8월 9일 주일 우리는 주일 예배 시간에 발을 씻는 일을 했습니다. 발 씻는 행위는 하나의 행위에 불과하지만 그와 같은 행위는 우리에게 영적이고 윤리적인 도전과 감동을 전해 줍니다. 1998년 8월 9일 주일 아침 아내의 발을 씻긴 권중국 장로님은 그 날의 소감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주일 낮 예배 중에 모든 성도님들 앞에서 아내의 발을 씻어 주는 세족식에 참가하라는 전화를 주일 아침 8시에 받았습니다. 얼떨결에 '예'라고 대답을 하여 놓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내가 조 집사의 발을 씻어 주는 정말 어추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 30년 동안 이런 일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을 왜 하라고 하시는지, 왜 내가 선택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의 자라 나온 배경이 전통적인 유교 가정에서 유복자의 장남으로 태어 나서 아무 거리낌 없이 성장하여 강한 자존심, 자만심, 오만한 성격이 온 몸에 배어 있는 저를 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졌습니다. 목사님이 쓰신 "영몰라 통몰라 가르쳐 줘도 몰라"라는 책에 "내 주먹을 믿으시오"라는 chapter 가 바로 저는 두고 쓰신 글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저의 교만과 독선과 아집이 하늘을 찌를 듯한 저를 하나님께서 직접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시고 오늘까지 인도하여 주셔서 이제는 다정 다감한 인자한 표정의 대명사인 KFC 할아버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주일날 아침 목사님에게 '예'라는 약속은 하여 놓았으나 교회에 안 나올 수도 없고 몇 시간 동안 참으로 난감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잘 인도하여 주시겠지 라고 생각하며 교회에 왔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순서가 세족식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조 집사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그 발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는 발바닥이 건성이어서 매우 꺼칠꺼칠한 편인데도. 이것은 조 집사의 발이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이 그렇게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그 낮아짐, 그 헌신과 봉사의 기쁨이 저의 가슴에 넘쳐 흘렀습니다.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되었던 것이 이제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족식을 통하여 저의 오만, 자만심이 겸손과 낮아짐으로 바뀌어지게 하여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몸소 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신 김 목사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 강변교회의 성도님들의 발을 씻어 줄 수 있는 그 낮아짐, 겸손, 봉사의 길이 제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제가 될 수 있도록 또한 그렇게 하도록 성도님들의 기도를 부탁 드리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예배후 집에 돌아가셔서 남자 성도님들은 부인의 발을 한번 씻어 봐 주십시요. 저의 간증이 맞는지 한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진솔하고 아름다운 간증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서 두 가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는 일과 발을 씻기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먼저 발 씻는 일을 하겠습니다. 발을 씻는 행위는 겸손과 낮아짐의 표현이고 섬김과 봉사의 상징입니다. 우리 모두 겸손과 낮아짐을 몸에 지닙시다 그리고 섬김과 봉사의 삶을 우리 생활에서 실천하십시다. "서로 발을 씻으라"는 분부는 우리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분부가 아니라 우리들을 복되게 만드시는 분부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서로 발을 씻는 것은 난처한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이고 행복한 일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여러분들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발을 씻는 행동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는 의미가 있고 서로를 섬긴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고 서로를 섬길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구원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이제 전상조 장로님 부부, 이병철 집사님 부부, 노철래씨 부부 나오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아내 발을 번저 씻고 그 다음 아내가 남편 발을 씻기기 바랍니다. 세족식을 하는 동안 우리 모두에게 성령님의 감동과 역사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혜은 양, 세족식을 하는 동안 "사랑은 언제나"를 조용히 불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 서로 발을 씻는 일을 실천하십시다. 북한 동포들의 발을 씻어야 하고 고난을 당한 사람들의 발을 씻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들의 발을 날마다 씻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도 서로서로 발을 씻어 주게 하시옵소서!"
발 씻기심의 교훈
요 13:1-17 / 변한규 목사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중 마지막 만찬석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녁식사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내용입니다. 물론 팔레스타인지방은 날씨가 건조해서 거리에 먼지가 많았고, 게다가 대개의 사람들은 샌들을 신었기 때문에 발을 씻지 아니할 수가 없었 습니다. 그러나 발 씻기신 내용에는 보다 더 신비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까? 조금 전 제자들간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요, 또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마귀가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왜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마귀가 유다 마음가운데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지저분해졌습니까? 마귀가 그 마음에 지저분한 생각을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들을 불어넣는 일이 마귀의 일입니다. 어떤 지저분한 생각들입니까? 다투는 생각입니다. 마귀의 조종을 받다가 보면 한 이불 덮고 사는 부부간에도 다툼이 생깁니다. 한 피 받은 형제끼리도 칼부림 나게 하고 한 교회에 다니는 성도끼리도 서로 다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조금 전에도 제자들이 어찌했습니까?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했습니다. 세상이 무엇입니까? 자기 발만 내미는 세상입니다. 왜 내 발을 씻기지 않느냐고 불평하고 짜증내고 고발하고 끌어 앉히는 세상입니다.
♬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 왜 다툽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형제의 더러운 발을 씻길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바울이 권면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빌 2:2) 품으라 했습니다. 또 마귀가 어떤 생각을 불어넣습니까? 거짓된 생각입니다. 세상은 마귀가 득세하면 거짓투성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존경받는 사람도 거짓말을 잘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장로도 목사도 거짓말을 밥먹듯 할 때가 있습니다. 남편도 거짓말하고 아내도 거짓말합니다. 거짓말이 너무 난무합니다. 왜 거짓이 판을 칩니까? 왜 거짓이 개선가를 부릅니까? ♬ 믿음이 이기네 ♬ 찬송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마귀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마귀가 어떤 생각을 넣습니까? 교만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주장하는 그룹의 인생들은 저마다 묘하게 교만을 부립니다. 교만을 질책하면서 교만합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교만합니다. 서로가 저 잘난 맛으로 살고 서로가 높아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까지도 자리다툼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청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 성도들 중에는 사장이 있고 과장이 있고 돈 많은 사람이 있고 권세가 대단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고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존경받는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겸손의 자리입니다.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바울이 답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교만한 마음이 달라지고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믿음밖에는 없습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합니다. ♬ 믿으면 하겠네 ♬ 이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중에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무릎을 꿇고 앉아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때 저도 있었더라면 예수님이 씻어주셨을 것입니다. 여기 발 씻기심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 먼저 자기의 발을 씻으라
말을 바꾸면 날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9). 어떤 목사님께서 이 말씀을 본문 삼고 날마다 발을 씻으십니까? 라는 주제로 설교했는데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배드릴 때마다 내 죄를 어찌할꼬 참회하는 기도를 해야 하고 또 날마다 자기의 더러운 발을 씻어야 합니다. 지금 나의 죄를 씻어주옵소서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경건한 삶이요, 거룩한 작업이요, 성업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중 한 사람도 빼지 아니하고 모두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 빠지지 아니하고 자기의 더러운 발을 씻어야 합니다. 발을 씻어야 잠자리가 편하지 않습니까? 발을 씻어야 교회 앞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먼저 내 눈 속에 들보를 빼야 하고 먼저 내 안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9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했습니다. 그때 주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 여기 목욕과 발씻는 것 무엇입니까? 목욕하는 것은 신학적 용어로 속죄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고 죄씻음 받아 의인됐다는 말입니다. 또 발 씻음이 무엇입니까? 회개를 뜻합니다. 성도는 죄씻음받은 의인들입니다. 그러나 발이 계속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내 속에 있는 옛사람 곧 죄성은 날마다 죄를 범합니다. 순간마다 죄를 범합니다. 때문에 날마다 발을 씻듯이 날마다 회개해야 하고 순간마다 내 죄를 어찌할꼬 회개해야하는 것이 성도들입니다. 여기 목욕은 원죄를 씻는 일이요, 발 씻음은 자범죄를 씻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곁에 발씻을 물동이를 놓고 계십니다. 발씻을 대야를 놓고 계십니다. 발씻을 수건을 놓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자기의 발을 씻으라는 것이니다. 또 예수님은 "다는 아니니라" 하셨는데 누구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차라리 나지 아니했더라면 좋을 뻔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12제자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본인이 가룟유다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베드로인가? 야고보인가? 혹시는 가룟유다인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찌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차례차례 발을 씻기시는 데에 자기 차례 가 되었을 때에 "주님 내 발은 절대로 씻기실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여기 상관이 없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와 교제할 수가 없다는 뜻이요, 나와 동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사 그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기 위해서입니다.
♬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 그러나 우리의 발을 보십시오. 어제 씻었건만 또 오늘 저녁에 씻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날마다 죄를 범한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말과 행실로 죄를 범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발 씻는 성도, 날마다 죽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말을 바꾸면 서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새성전 입당을 앞두고 우리 모두에게 주신 주님의 교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4). 예수님은 여기에서 봉사의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평등한 입장에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서로라는 단어는 수평적인 입장에서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서로의 높낮이가 없습니다. 너는 낮고, 나는 높고 아닙니다. 더 잘난 사람 없고, 더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고개를 번쩍 들 수 없는 죄인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또 하나 마음을 비우고 봉사하라입니다. 발을 씻기려면 먼저 허리를 굽혀야 하지 않습니까? 또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습니까? 대학시절에 인천 송도에서 가졌던 수련회에 동참했습니다. 그때에 정규오 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저인데 우리교회의 집사님이셨다가 목사가 되신 고 곽영수 목사님이 계십니다. 세족식을 하는 시간인데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인데 서로 마주보고 발을 씻겨주는데 마침 그 목 사님과 짝이 되어 제가 목사님의 발을 열심히 씻겨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또 한참 후에 교제를 하는데 목사님께서 내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때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는지 모릅니다. 주님 나 같은 죄인입니다. 주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발을 씻기고 씻는 순간에 주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한 적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를 버리고 봉사하라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매사에 자기자기합니다. 마음들마다 이기심으로 꽉 차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을 찬송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기심 없는 텅빈 마음이 아닙니까? 심리학자 엘리 크론은 이기주의자는 다른 사람의 필요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의 필요에만 관심이 있다 했습니다. 그리고 왜 그럴까? 덧붙이고 그는 답했습니다. 이기주의자는 자기 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뜻입니다.
자기밖에 모른 사람은 남의 인격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섬김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을 실천해야 합니다. 율법가운데 강령입니다. 남을 섬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춰야 합니다. 주님의 행하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왜 남을 섬겨야 합니까?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이 답합니다. 어떤 복입니까? 첫째는 주님이 가까이 하시는 복입니다. 예수님은 발이 더러운 사람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발을 씻고 서로의 발을 씻기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둘째는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발이 깨끗한 자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셋째는 마음의 기쁨이 생겨나는 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기쁨을 잃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경건을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에서 겪었던 일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겨우 주유소에 파킹하고 땀을 식히고 있는데 한 미국인이 목마르냐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콜라를 한 병 주었습니다.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차가 목마르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 기름이 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대담하게 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5불을 내게 주어서 기름을 넣을 수가 있었습니다. 무이자로 준 것도 아니고 공짜로 주었습니다. 지금도 그 사람의 얼굴 한 번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적 많습니다. 또 한번 친구 목사님 차를 타고 먼길 가다가 유턴을 하다 진흙탕에 바퀴가 빠졌습니다. 몸부림하고 있는데 가는 차자 멎더니 미국 사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물었습니다.
형편을 살펴보더니 자기 차에서 담요를 꺼내와서 흙탕에 깔고 이제 시동을 걸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차자 움직일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도 고맙고 미안해서 담요 값을 지불하고 싶다고 했더니 고개를 저으며 그냥 손을 흔들면서 안녕히 가세요 했습니다. 그 매너가 얼마나 깨끗합니까? 그 애정이 얼마나 따뜻합니까? 제 마음가운데에 이 친구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많이 하면서 복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주님의 발을 씻겨드리라
말을 바꾸면 주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15). 여기에서 나는 누구며, 너희는 누구입니까? 나는 선생 예수님이시오, 너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주종관계입니다. 원칙대로라면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종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원칙을 깨뜨린 기독교 정신이요, 성도들 모두가 보여야 될 믿음생활의 모습입니다. ♬ 나 이제 주님의 새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 성도는 새사람이 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방법도 새 방법이 되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의 방법, 예수님의 방법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행한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보기요, 실천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을 뜻합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행함의 종교요, 실천의 종교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모두가 자문자답해야 합니다. 나는 얼마나 행하고 있는가? 신학자 또르는 본문을 주석하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그들의 믿음을 씻기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섬기려면 이끼낀 나의 믿음을 씻어야 하고 무디어진 나의 믿음을 기경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까? 본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너희로 하여금 이렇게 하기를 원해서이다. 제자는 선생이 하는대로 본받아야 합니다.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겼으니까 응당 제자는 선생의 발을 씻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눈 씻고 바도 예수님의 발을 씻겨준 제자가 없었습니다. 물론 주여 주여 입술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입술의 종교가 아닙니다. 행함의 종교요, 실천의 종교입니다. 장로님들이 봉사를 안 한다고 소문이 난 교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 마음이 아파서 안되겠다, 제자 훈련을 해야겠다고 계곡을 찾아 산상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램에 의해서 서로의 발을 씻는 세족식을 했는데 서로가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장로님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높아졌다, 이제 낮아지자 그리고는 교회 화장실 청소는 우리가 맡자 결의까지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놀랍도록 부흥했다는 미담입니다. 도토리 키재기란 말이 있습니다. 도토리 키가 더 크면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괴테의 말입니다. 종교인가운데 교만한 자 많고 위선자가 많다고 뜻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도중에 목이 뻣뻣한 자 있습니까?
권세가 많아 권세를 자랑하고, 학력이 많아 학력을 자랑하는 성도 있습니까? 돈이 많고, 인물이 좋고, 그렇다면 얼마나 돈이 많으며, 인물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더러는 내 믿음이 제 일이야 믿음 자랑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 믿음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교만하지 마십시다. 백번을 변하십시다. 나의 재물보다 주님을 더욱 섬기십시다.
성자 프란시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길거리에서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두 팔을 벌려 가슴에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 순간 그 문둥병자가 예수님 모습으로 변했다는 신화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초라한 사람, 비루한 사람을 껴안고 발을 씻겨 줄 때에 그가 예수님 모습으로 변한다면 누가 발을 씻겨 주지 않겠습니까? 나요! 나요! 서로 자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합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니라"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작은 소자들이 있습니까? 헐벗고 굶주리고 매맞고 정처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도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요 예수님 때문에 살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자들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고 사랑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잘 섬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내가 목마르다 하시면 나의 물 컵을 드리고 주님이 내게 이삭이 필요하다 하시면 나의 이삭을 드릴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지금도 나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믿으십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남은 생애가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물은 담은 대야 앞에 세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 사람을 향해서 자기의 발을 씻겨 달라고 발을 내미는 인생입니다.
이는 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고 남을 지배하고 남을 자기의 눈 아래에 둔 사람입니다. 그러니깐 남을 깔보는 인생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자기 발을 씻을 뿐만 아니라 남의 발도 열심히 씻어 주는 인생입니다. 이는 겸손한 사람이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요, 또 봉사자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발도 씻지 아니하고 남의 발도 씻어 주지 않는 인생입니다. 이는 무정한 사람이요 믿음이 죽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자신을 향해 물어보십시다. 나는 누구인가? 두 번째 인생 곧 자기 발을 씻고 남의 발도 씻겨 주는 그리고 주님을 잘 섬기는 성도되어 복 받을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