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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호로비츠 :
Horiwitz in Moscow(DG. 1986)
모스크바의 호로비츠
음악을 듣다가
무한 감동에 빠져든 음반은
한 둘이 아니다.
특히나 짧은 소품으로
무한 감동을 주는 음악이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의
‘꿈(Träumerei)'이 대표적이다.
이 곡은 슈만이
1838년
클라라와 결혼하고
가장 행복하던 시기에 완성한
피아노 모음집
’어린이 정경
(Kinderszennen) op.15'의
제7번 곡이다.
‘어린이 정경’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어른을 위한 童話(동화)라고
봐야 하는 음악이다.
이 곡 최고의 연주자는
20세기 전반부를 평정했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 이다.
그 날은 1986년 4월 20일
일요일 오후 4시
비내리는 모스크바였다.
호로비츠는 고향을 떠난지
60년 만에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 대강당
(볼쇼이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음향효과가 좋다고 소문난
'볼쇼이홀(Bolshoi Hall)'
3개층 1,800석에 달하는 자리는
입추의 여지가 없는
만석을 기록했고,
밖에서는 표를 구하지 못한
수 백명의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서성대고 있었다.
우선 그 연주회에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감상해 보자.
영상물에 보이는
노신사의 눈물은
엄청난 파장의 감동을 불러온
바로 그 음악이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호로비츠의 장기인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가 아니던가?
호로비츠가 러시아를 떠난 건
1927년이다.
그의 러시아 마지막 연주회는
1925년
레닌그라드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흘러 돌아돌아
1986년 4월 20일
호로비츠는
모스크바의
차이콥스키 음악원 대강당에서
60년 만에 독주회를 가졌다.
이 연주회 직후부터
실황테이프와
음반에 대한 소문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 때는
우리는 소련과 수교(1990년)
이전이라
敵性(적성)국가였다.
이런 옴니버스 혹은
버라이어티한 음반을 선택하면
너무 고심이 된다.
다루어야할 작곡가도 많고
음악도 너무 여러 가지인 까닭이다.
그렇지만 이 음반은
분명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명반임이 분명하기에
슬며시 빼는 악행(?)을
저지를 수는 없다.
이 연주 실황 비디오테이프를
본 것은 아마도
1989년을 전후한 무렵
해외 출장에서였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싱가포르 아니면
사우디 아라비아일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본 그 날의 실황은
너무나 정겹다.
1986년은
소련으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해였다.
1985년
54세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된
‘미하일 고르바초프(1931~ )’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주창한 때이다.
지금봐도 허름한 옷을 입은
할머니가 ‘표를 사려고
밤을 세웠답니다.
내 꿈이 이루어지다니...
(My dreams come true.)' 라며
활짝 웃는 모습은 정겹다.
지금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는 2류 국가이지만
그 당시 소련 국민들은
문화적으로 성숙한 시민이었다.
그들의 입성을 보면
촌티가 줄줄 흐른다.
그렇지만 저 천박한(?)
아메리칸들보다
몇 배는 성숙하고
문화를 이해하고
즐길 줄 아는 시민들이다.
지금 당장 러시아에서
관현악단을 조직해도
최고 수준의 화음을 들려준다고
할 정도이다.
여하튼,
83세에 이른 노장은
전혀 흔들림 없는 터치로
연주를 한다.
미스 터치를 잡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매우 멍청한 짓이다.
우리는 음악을 즐기면
되는 것일 뿐이다.
쓸데없는 곳에
시간 낭비하는
愚(우)를 범하지 말자.
그 날의 실황을 담은 음반이
1986년
DG에서 발매한 음반
’모스크바의 호로비츠
(Horowits in Moscow)' 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는
그 다음 날 헤드라인을
이렇게 뽑았다.
‘FOR HOROWITS IN MOSCOW,
BRAVOS AND TEARS.’
(모스크바의 호로비츠에겐
환호와 눈물만이)
이 실황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1시간 47분에 이르는 길이이다.
동영상은 호로비츠가
인터뷰 하면서
편지를 읽고 설명한다.
‘Dear, Velose!
Velose is my name.'
우리가 ’블라디미르‘로 알고 있는
호로비츠의 러시아 이름이
사실은 ’벨로제‘에 가까운
발음임을 알게 된다.
이어 뉴욕州(주) 롱아일랜드에 있는
스타인웨이 앤 선즈
(Steinway & Sons,
연주가들로부터 "완벽한 피아노" 찬사
1대 가격 1억5000만~2억원 홋가)
본사에서
피아노를 트럭에 싣는다.
수취인 주소를 보면
‘마에스트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모스크바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피아노 도착,
모스크바 시내에서 관광,
인터뷰,
질녀와의 첫 만남에서
민망함에 활짝 웃는
호로비츠가 정겹다.
호로비츠 모국어도
썩 잘 구사하지 못한다.
다큐멘터리인지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보여준다.
음반과 다큐멘터리의
순서가 같지는 않다.
자, 감상은 개개인의 몫이다.
음악만 듣는 것보다
영상을 보면서 들으면
더 가깝게 여겨지는 건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이 연주회 3년 뒤
호로비츠는 타계했다.
20세기 전반부
피아노를 평정한
‘블라디미르 사모일로비치 호로비츠
(1903~1989)’는
제정 러시아의 키에프에서
태어났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론이 많았지만
지금은 키에프 출신으로
정리되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에 나오는
‘키에프의 큰 대문’이
있는 그 곳이다.
출생년도도 1903년인데
1904년으로 바꾼 이유는
군대 면제를 위해
좀 더 어려 보이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피아니스트에게
손이 중요했고
호로비츠에게도
큰 의미기 있는 부분이다.
호로비츠에 대해 평가하기는
매우 애매한 부분이 있다.
20세기 후반부를 대표하는
리히테르와 비교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20세기 전반부를 평정한
피아노의 황제로 평가할까?
우선 호로비츠는
전쟁의 중심이던
유럽을 피해 미국에 정착했다.
이는 호로비츠로서는
행운이었기도 하지만 불
행한 부분이다.
클래식 음악의 주류는
아무래도 유럽 대륙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의 활동이
미미했지만,
떠오르는 신흥 절대 강자
미국에서 주로 활약한 때문에
거품이 많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이유로
그를 貶下(폄하)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다.
호로비츠는 분명
절대적인 테크닉과
청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가졌고
커다란 피아노 음향과
티없이 맑은 서정성을 가진
당대의 비르투오조(virtuoso,
다만, 미국이라는 신흥 시장을
배경으로 하는
인기가 어느 정도의
거품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호로비츠는
유태인 아버지
사무일 호로비츠와
어머니 소피아 보딕의
4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 전기모터 회사의 기사이면서
대리점을 하고 있어서
집안이 부유했다.
호로비츠의 삼촌
‘알렉산드르 호로비츠’는
음악학자로 작곡가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
(1872~1915)’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스크리아빈은
호로비츠가
피아니스트로 대성할 것을 예견했고,
음악 외에
모든 예술에 대해서도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이게 호로비츠가
10세 때였다고 한다.
그래서 호로비츠가
스크리아빈의 작품을
즐겨 연주했고
덕분에 그의 작품은
살아남게 된다.
호로비츠는 1907년에
어머니로부터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12년 호로비츠는
‘키에프 음악원’에 진학해
블라디미르 푸찰스키,
세르게이 타르노프스키,
펠릭스 블루멘펠트를 사사한다.
특히, 펠릭스 블루멘펠트는
안톤 루빈스타인과
차이콥스키의 제자로
호로비츠에게
러시아적인 정서와
낭만주의의 法統(법통)을
제대로 전수한다.
정통적인 러시아 낭만주의의
법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작곡가를 꿈꾸던
호로비츠가
피아니스트로 급선회한 이유는
1917년 공산혁명 때문이었다.
부르주아이던
호로비츠의 집안은
몰락하고
생계를 우선 챙겨야만 했다.
호로비츠의 첫 독주회는
1920년 카리키프
(‘카르코프’로도 쓰는
우크라이나의 도시)에서 열렸다.
이후 호로비츠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러시아를 돌며
연주여행을 했는데,
당시 피폐한 경제 때문에
빵, 쵸콜렛, 버터 등으로
보수를 받기 일쑤였다.
1922~23년
호로비츠는 11개의 프로그램으로
23번의 독주회를
페트로그라드에서 가진다.
이 때의 경험이
후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25년 12월 8일에
호로비츠는
아르투로 슈나벨 문하에서
공부한다는 목적으로
처음 국경을 넘어
베를린으로 간다.
이어진 베를린에서
3번의 독주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1926년 호로비츠는
함부르크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대타로 투입되어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며
청중을 놀라게 한다.
이 곡은 후에
호로비츠의
전매특허 같은 곡이 되는 데,
이런 難曲(난곡)을
대타로 연주한 호로비츠는
이미 될성부른 나무였던 것이다.
한편 소비에트 정부는
1927년
제1회 쇼팽국제 콩쿠르에
호로비츠를
우크라이나 대표로 선정했다.
하지만 호로비츠는
서방에서 머물며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이 호로비츠가
고향을 떠난 계기이다.
결국 제1회 우승은
‘레프 오보린’이 차지한다.
연주하고 있는 호로비츠
1928년 1월 12일
호로비츠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토머스 비첨 卿(경)의 지휘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면서 데뷔한다.
비첨과 호로비츠 두 사람
모두의 뉴욕 데뷔 무대였다.
그는 3악장에서
비첨의 느린 템포를 무시하고
‘광야에서 휘몰아치는 토네이도’처럼
밀어 붙인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핸섬한 러시아 청년에게
뉴욕은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압도적인 음량과
완벽한 기교,
거기에 페달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명쾌한 연주라니...
이 해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도
만나게 된다.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듣고는
이 곡 해석의 권위를 넘겨준다.
이제 호로비츠는
최고 인기를 누리는
피아니스트로서
미국을 뒤흔든다.
1932년 호로비츠는
운명과도 같은
20세기 전반부를
3분할한 대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1857~1967)’를 만났다.
호로비츠의 장인인
대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1933년 호로비츠는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를 협연한다.
예민한 호로비츠가
토스카니니와는
쉽게 타협했다고 하니
이들은 인연은 남달랐나보다.
토스카니니는 호로비츠와
자신의 딸 ‘완다’의 결혼을 주선했고,
이 해 결혼해
평생을 偕老(해로)한다.
이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불어로 대화했다고 전해진다.
종교적으로 호로비츠는
유태인이고
완다는 로마 가톨릭이었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이들은 ‘소니아 토스카니니 호로비츠
(1934~1975)’ 라는
딸을 하나 두었으나
1975년 제네바에서
약물과다 복용으로 사망한다.
우발적인 사고인지
자살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호로비츠의 일생은
동성애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호로비츠는 1939년
미국에 정착해
1944년 미국시민권을 얻는다.
1930년대
호로비츠는 살인적인 일정으로
연주회를 이어간다.
그래서 지친 탓인지
호로비츠는 1936~38년까지
공백기를 가진다.
결과적으로
그는 4번의 공백기와 복귀
(1936~38,
1953~65,
1969 ~74,
1983~85)를 거듭한다.
첫 번째 공백기에
호로비츠는 자신을
끊임없이 담금질하여
완벽한 고전주의자로 거듭난다.
이 부분은 젊은 시절
러시아에서 듀오를 이루어
활발한 활동을 했던
짝궁 나탄 밀스타인의 경우를
연상시킨다.
野生馬(야생마)였던 호로비츠는
駿馬(준마)로
換骨奪胎(환골탈태)했던 것이다.
호로비츠는 결과론이지만
丈人(장인) 토스카니니의
완벽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축복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두 번째 공백기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짧게 마무리 되었다.
1965년 5월 9일
호로비츠는 기나긴
12년간의 두 번째 공백기를 깨고
뉴욕 카네기홀에서
복귀 무대를 가진다.
이 때 뉴욕은
이틀 전부터 표를 구하느라
난리가 났다고 전해진다.
1958년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미국인 ‘반 클라이번’이 우승한 이래
이 정도의 열광은 처음이었다.
이 공연실황은
레코드로 발매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겐 감동을,
피아니스트들에겐
절망을 안겨주었다.
1978년 유진 오먼디가 지휘하는
뉴욕필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녹음했다.
미국 데뷔 50주년을 기념하는
이 음반에서
호로비츠가 보여준 해석은
이제 그가 상업성을
당당히 超越(초월)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호로비츠는
1968년 9월 22일에
미디어의 마지막 寵兒(총아)
TV에 데뷔한다.
‘Vladimir Horowitz :
a Concert at Carnegie Hall'
이라는 스페셜로
CBS로 미국 전역에 방송된
이 프로그램은
그 해 2월 1일
카네기홀에서 녹화되었다.
음반으로도 발매된 이 실황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1985년 호로비츠는
느닷없이 DG와 전속계약을 한다.
그리고, 1989년 사망시까지
녹음을 이어간다.
호로비츠는 RCA
(Radio Corporation of America)와
SONY에서
이루어진 녹음과
전혀 다른 음악을
DG에서 들려준다.
이 중에서 특기할 음반은
줄리니와 협연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23번이다.
그리고, 1986년 4월 20일
호로비츠는
고국을 떠난지 60년 만에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 대강당에서
귀국 독주회를 가졌다.
그 이전 마지막 콘서트는
1925년 레닌그라드에서 가졌었다.
아마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
이 순간 미소 양대국이 가졌던
냉전의 기류는 부질없었다.
모스크바 시민들이 보여준
뜨거운 환호와
천진난만한 호로비츠의 연주는
더 이상의 어떤 표현도
적합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 실황은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다.
이 콘서트는
‘찰스 쿠랄트’가 진행하는
CBS News Sunday Morning에
소개되었는데
쿠랄트는 모스크바 현지에서
리포트를 했다.
그 해 호로비츠는
링컨센터에서의
미국에서의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다.
이후 런던, 비엔나, 암스테르담,
함부르크를 순회 연주한다.
호로비츠의 마지막 연주회는
1987년 6월 21일
독일 함부르크 ‘뮤직할레 홀’에서
가졌다.
1988년 호로비츠는
미국 대통령 자유 메달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서
받는다.
대통령 메달 받는 호로비츠
(좌로부터 완다, 레이건, 호로비츠, 낸시)
1988년 호로비츠는
미국 대통령 자유 메달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서 받는다.
위 사진에서 보듯
호로비츠는 익살스런 미소를 띤다.
1989년 11월 5일
호로비츠는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편집하다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유언에 따라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자, 이제 음반으로 돌아가
수록된 곡을 살펴보자.
피아노 소나타 in E major,
K.380(L.23) (트랙 1)
이탈리아의 작곡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1685~1757)’의
피아노 소나타이다.
스카를라티는 바흐, 헨델과
동갑내기로
이탈리아의 나폴리 출신이다.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포트투갈과 스페인의
왕가에 봉사했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작곡가이자
음악 교사인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10명의 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인 ‘피에트로 필리포’도
음악가였다.
그는 555곡의
‘키보드 소나타’를 작곡했다.
그러니까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바이얼린의 파가니니와
쌍벽을 이루는 작곡가였다.
유명한 카스트라토 가수
‘파리넬리’의 친구가 되어준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는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병으로 생을 마쳤는데, 아
마도 전염병이었던 것 같다.
스카를라티의 작품번호는
20세기 초반 이탈리아 작곡가
‘알레산드로 롱고’가
분류한 것으로
L.(롱고)로 표기했다.
1953년 미국의 하프시코드 전문 연주자
‘랄프 커크패트릭’이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를
전부 분류하면서 지
금은 대부분 K.(커크패트릭)를 사용한다.
커크패트릭의 분류가
더 세밀하고 정확한 때문이다.
모차르트 작품에 쓰이는
K.(쾨헬)와는 다른 뜻이다.
이 곡은 호로비츠가
즐겨 연주하던
레퍼토리의 곡이다.
1754년에 작곡된 것으로 전해지는
스카를라티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기곡으로
스카를라티의 네 번째
‘베니스 음악집’에 속한 곡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대로
소나타 양식은
하이든이 완성한다.
스카를라티는 바흐시대 사람이니까
단일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곡은
교향곡처럼 4부분으로
나름대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스카를라티는 심플한 두 개의 주제를
제시한 다음,
그 주제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수법으로
그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있다.
그리고, 당대의 피아노 테크닉은
그렇게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피아노 소나타 제10번 in C major,
K.330(300h) (트랙 2, 3, 4)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56~1791)‘의 피아노 소나타이다.
자, 여기서 쓰이는 K.(쾨헬)는
앞서 스카를라티의 커크패트릭과는
전혀 다르다.
모차르트가 워낙 유명하니
사람들은 주로 K.라면
쾨헬을 먼저 떠올린다.
이 곡은 1783년 작곡된
인기 있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
한 곡이라 아주 빈번하게 연주된다.
곡의 규모는 아담하고
지극히 심플한 것이지만
모차르트의 뛰어난 재기가
돋보이는 곡이다.
또한, 대가와 평범한 연주자의
기량차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곡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호로비츠는 모차르트의 곡을
많이 연주하지 않아서
아주 귀중한 녹음이다.
천진난만한 음악을
노대가가 고국을 찾아
무심하게 연주하는
그런 전체적인 맥락을
잘 이해하면서 감상해 보시라.
제1악장 Allegro moderato (트랙 2)
제2악장 Andante cantabile (트랙 3)
제3악장 Allegretto (트랙 4)
전주곡(Prelude) in G major,
op.32-5 (트랙 5)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1873~1943)‘가 남긴
전주곡(Prelude)은
쇼팽처럼 모두 24곡이다.
먼저 1892년에 작곡한
그 유명한 op.3-2 가 있고,
1901~03년에 작곡된 op.23 으로 10곡,
1910년에 작곡된 op.32 13곡이다.
라흐마니노프가
말년에 회고한 바로는
교향곡이나 협주곡보다
더 힘들게 작곡했다고 말했다.
소품같은 짧은 곡이지만
한 곡 한 곡이 모두
개성이 넘치면서
사랑받는 작품들이다.
난이도는 매우 높은 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아무래도 작곡가 자신이
빼어난 테크닉을 가진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전체적으로 전주곡들이
세트를 이룬 연가곡 형식으로
연주되게 작곡을 한 것 같다.
예전에는 앵콜곡으로 많이 쓰였으나
최근에는 전곡을 연주하는
방향으로 많이 흐르고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고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
해석자의 권위를 넘겨주었다.
노대가 호로비츠가 인도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세계를 눈여겨보자.
전주곡 시리즈로는
마지막 작품이라
그 테크닉과 오묘함이
남다른 곡이니 유념해서 감상하자.
전주곡(Prelude) in G♯ minor,
op.32-12 (트랙 6)
대체로 매우 서정적인
op.23의 10곡에 비해
op.32의 13곡은
비교적 힘찬 구성이 특징이다.
그렇지만 라흐마니노프가
원숙기에 창작한 곡이라
다양한 시도가 돋보이며
그 분위기는 독특하고 미묘하다.
역으로 테크닉과 난이도가
매우 까다롭다.
연습곡(Etude) in C♯ minor,
op.2-1 (트랙 7)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스크리아빈
(1872~1915)’응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모스크바 음악원 동기인
라흐마니노프와
많이 비교가 되는 인물이다.
스크리아빈은 모스크바에서
장교출신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렇지만 겨우 한 살 때
피아니스트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이 해 아버지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터키어 교육을 마치고
그의 가족은 외교관 생활을 위해
터키로 떠난다.
결혼안 한 고모 류보프는
아마튜어 피아노 연주자였는데,
스크리아빈을 맡아 키우며
피아노를 가르쳤다.
스크리아빈은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했고,
그 동기가 라흐마니노프였다.
음악원 동기인 피아니스트
‘베라 이바노프나 이사코비치’와
결혼한 스크리아빈은
함께 유럽 연주 여행을 다녔다.
1909년 스크리아빈은
모스크바로 돌아와 정착한다.
스크리아빈은 호로비츠가
10살 때 만나보고
음악가로 대성할 것을 예견해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준다.
스크리아빈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에서
작곡가로 선회한 이유는
지나치게 연습을 하다가
손을 다쳤기 때문이다.
스크리아빈의 음악은
‘The Mystic(신비주의)’와
에로티시즘이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그의 작품은
피아노곡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관현악곡 몇 개
실내악곡 하나 등으로
많지는 않다.
‘러시아의 쇼팽’이라 불릴 정도로
피아노곡이 빼어난 작품이 많다.
실제로도 스크리아빈은
초창기 상당한 시간을
쇼팽처럼 피아노 소품 작곡에
주력하기도 했다.
어쩌면 호로비츠가
스크리아빈의 작품을
자주 연주한 덕분에
그의 피아노 작품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1915년 다소 이른 나이에
스크리아빈은 모스크바에서
파상풍으로 사망했다.
동기인 라흐마니노프는
민속선율을 과감히 사용한 반면
스크리아빈은 본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나간 점이 특징이다.
연습곡과 전주곡이 특히 유명하다.
스크리아빈의 연습곡 op.2-1은
1887년 15세에 습작으로 작곡한
3곡 중 첫 번째 곡이다.
멜로디가 가슴 저미고
진실함이 전해지는
러시아 집시음악의 특징을
잘 표현해주는 곡이다.
두 손을 위한 반복 리듬의 코드와
풍부한 하모니가 특징이다.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애절함에 귀기울여 보시라.
나만 그런가? 아! 호로비츠...
연습곡(Etude) in D♯ minor,
op.8-12 (트랙 8)
스크리아빈의 연습곡은
3개로 나누어볼 수 있다.
op.2 의 3곡은
어린 시절 습작이지만 상
당한 경지를 이루었다.
그리고 1894년에
op.8 의 12곡을,
1903년에 op.42 의 8곡을 작곡했다.
이 곡은 12곡으로 구성되었기에
쇼팽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이 곡의 격정적인 테크닉과
분위기는 그대로
스크리아빈 특유의 피아노 어법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호로비츠가 앵코르 곡으로
애용하면서 유명해진 곡이기도 하다.
노년에 이른 호로비츠에게선
예전같은 격정을 느끼긴
무리가 있지만
이 곡의 본질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
불과 2분을 조금 넘는
짧은 곡이지만
호로비츠는 썩어도 준치,
아니 그 이상인
위대한 피아니스트이다.
비엔나의 夜會(야회)-
왈츠 카프리스 제 6번
(Allegro con sprito) (트랙 9)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의
작품 ‘비엔나의 夜會(야회)’를
‘프란츠 리스트(1811~1886)’가
편곡한 작품이다.
슈베르트는 1823년
‘38곡-왈츠,
랜틀러와 에코세즈 D.145’를
작곡했는데,
12곡의 왈츠,
17곡의 랜틀러,
9곡의 에코세즈로 구성되었다.
에코세즈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춤곡이란 뜻이지만
실제로는 잉글랜드의 田園
(전원)춤곡인
두 박자의 빠른 춤곡이다.
페트라르카의 소네토 104
(Agitato assai – Adagio) :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 제2권
– ‘이탈리아’ 중에서 (트랙 10)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우리가 흔히 바이얼린에는
파가니니,
피아노에는 리스트가
入神(입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고 있다.
서양 음악사를 통해
가장 빼어난 기교를 자랑한
피아니스트이다.
바람둥이로도 알려져
프랑스의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의
애정행각은 유명하다.
그 결과로 낳은 딸
‘코지마’는 후에
리스트와 친구인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와
결혼했다.
그리고, 코지마는
바그너 사후
바그너의 악극만으로 구성되는
‘바이로이트 축제’를
본궤도에 올렸다.
리스트는 작곡에도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고,
만년에는 改過遷善(개과천선)해서
가톨릭교회 司祭(사제)로서의
삶을 살았다.
특히, 편곡에 뛰어나
수많은 작곡가의 작품을
피아노로 편곡했다.
이 작품은 1835~79년 사이에
만년에 이르러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작곡한 곡으로
모두 26곡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스위스,
제2권은 이탈리아,
제3권은 부제는 없지만
이탈리아를 주로 다루고 있다.
지금 이 곡은
제2권 이탈리아의 7곡 중에서
제5곡이다.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3곡은
원래 테너를 위한 가곡으로
1839년에 작곡되었다.
이 3곡은 14세기
이탈리아의 桂冠詩人(계관시인)
페르라르카의 소네트
(14행으로 이루어진 시)를
읽은 리스트가
감동해서 작곡했다.
특히 104번은
감각적이지만
다이내믹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로
리스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곡이다.
넘치는 열정과 우아함에
사랑의 열기마저 넘치는 명곡이다.
리스트는 이 3곡을
1858년 무렵에
피아노곡으로 편곡했다.
피아노의 초절기교를
자랑하는 리스트를
노대가 호로비츠가 인도하는
세계로 들어가 보자.
넘쳐나는 감동은 각자의 몫이리라.
마주르카(Mazurka) in C♯ minor,
op.30-4 (트랙 11)
폴란드 출신으로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려지는
‘프레데릭 쇼팽(1810~1849)’은
여러 가지의 피아노 음악을 작곡했다.
마주르카란
16세기부터 유행한
3박자의 폴란드 고유의 춤곡이다.
17세기에는
폴란드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8세기에는 독일로 전해진다.
이어 유럽 전역에 유행하다가
19세기에는 러시아까지 전파된다.
마주르카는 쇼팽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발전되었다.
또 다른 춤곡인
폴로네이즈가
도시에서 사는 귀족들의 춤곡이라면,
마주르카는 농민들의 소박한 춤곡이다.
폴로네이즈가 남성적이라면,
마주르카는 여성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쇼팽이 작곡한 마주르카는
모두 51곡이다.
마주르카 op.30은
4곡으로 구성되었으며
1836~7년 쇼팽의 창작력이
매우 왕성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예리한 음악 평론가이기도 했던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은
마주르카에 잠재된 폭발력을 간파해서
자신이 발행하던
‘음악신보’에
‘쇼팽의 마주르카는
花園(화원)안에 숨겨진 폭탄과 같다.’ 고
평했다.
이 곡은 op.30의 4곡 중
마지막 곡이다.
복잡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며,
약간의 우수가 밑바닥을 흐르고 있다.
마주르카(Mazurka) in F minor,
op.7-3 (트랙 12)
이 곡은 1831년에 작곡된 것으로
모두 7곡으로 구성되었다.
감상적인 노래같은
아름다운 곡조를
반주가 함께 하는 데
더 없이 아름답다.
아! 쇼팽이라니...
꿈(Träumerei)-
어린이 정경(Kinderszennen)
op.15 중에서 (트랙 13)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면서
뛰어난 음악 평론가이기도 했다.
‘어린이 정경’은 1938년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하고
가장 행복하던 시기에
어린 날을 회상하며 작곡한
어른을 위한 童話(동화)이다.
모두 13곡으로 이루어진 곡으로
‘꿈’은 7번째 곡이다.
에땅셀러(Etincelles : 불꽃)
op.36-6 (트랙 14)
독일의 유대계 작곡가이자
교육자인
‘모리츠 모츠코프스키
(1854~1925)’가 작곡한
8곡으로 구성된 피아노 독주곡
‘성격소품’의 제6번 곡이다.
모츠코프스키는
폴란드에서 출생해
드레스덴과 베를린에서
음악 공부를 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세가 기울어
폴란드에서 교사로 지냈다.
동생인 ‘알렉산더 모츠코프스키’는
베를린에서 유명한 작가이자
풍자 작가였다.
쇼팽 이후에
피아노의 전반적인 테크닉을
완벽히 이해하고 포용해
작품을 쓴 것으로 평가된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19세기 후반에
가장 존경받는 음악가였다.
19세에 피아노 연주로
베를린에서 데뷔했지만,
바이얼린 연주자로 활동했다.
그는 특히 교육자나
지휘자로 더 유명하다.
1875년부터 베를린 음악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1897년 전성기에
파리에 정착해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제자로는 지휘자
토머스 비첨 卿(경)과
피아니스트
반다 란도프스카가 있다.
스타카토의 연주법으로
깜박이는 불꽃의 주제를
표현했고,
빠르고 큰 스케일의 연주기법이
필요한 곡이다.
호로비츠가 노년에 이르러
앵코르 곡으로
즐겨 사용하면서
유명해졌다.
호로비츠는 자신이 고안한
코다를 이용해 연주를 즐겨했다.
폴카(Polka de W.R.) (트랙 15)
독일 작곡가
‘프란츠 베흐(1837~1898)’의 작품인
‘Lachtäubchen
(라허토이프첸 : 사랑스러운 젊은 애인),
Scherzpolka(세르츠폴카 : 익살스런 폴카)
in F major, Op. 303’을
라흐마니노프가
비르투오조 피아노 작품으로
편곡한 것이다.
베흐는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사람으로
노래와 살롱 음악을
주로하던 작곡가였다.
라흐마니노프 덕분에
베흐는 이름이 전해진다.
이 곡도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가
편곡한 탓에 앵코르 곡에
많이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