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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희랍어 시간>
《 희랍어 시간 》
- 한강 -
< 줄거리 >
1
침묵하는 여자
소설에선 주요한 인물이 크게 두 명이 나옵니다.
한 여자와 한 남자입니다.
(이름은 모릅니다.)
먼저 한 여자입니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말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언어에 대해
깊은 행위를 하는 아이일 뿐이었습니다.
그저 단어 하나, 음운 하나를 가만 놔두지 못해
곱씹고, 또 곱씹는 아이요.
그렇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하게 된 때에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수업 시간에 우연히 들은 불어 단어에서,
그녀는 입술의 달싹거림을 느꼈습니다.
그 이후 몇십년간 다시 말하며 살아온 그녀가,
다시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그녀는요,
자신의 엄마를 잃었고요,
자신의 아이를 뺏겼습니다.
그녀의 엄마는 반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녀의 아이는 전남편에게 양육권을 뺏겨
전남편의 집에 간지 5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침묵의 원인을 위의 일들로
설명하기엔 섣부릅니다.
그녀는 심리 치료 상담을 받으면서도
그 이유를 자명할 수 없다 생각하였기 때문이죠.
그리하여 전에도 모국어가 아닌 낯선 외국어가
침묵을 깨뜨렸듯이, 그녀는 이번에도
그리하라 믿고 희랍어 강의를 듣게 됩니다.
✷
2
눈을 잃어가는 남자
그 다음은 한 남자입니다.
그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어렸을 적부터 그리 좋진 않았습니다.
이민을 가게 된 독일에서 수술을 받으려하였지만,
그닥 성공적이진 못했습니다.
그는 약 30년 정도의 시력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독일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만나게 되죠.
병원 정원에서 따가운 햇살에 필름을 비춰 보는 소녀.
그와 그 소녀는 치기 어린 사랑을 합니다.
각자 나름대로 쌓아온 신념을, 세월을 내비치며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헤어지게 됩니다.
아니,
그는 그 소녀에게서 일방적인 거부를 받게 됩니다.
그는 그 소녀가 전혀 용납하지 못할 말을 하였고,
그는 그 소녀의 거절을 용납하지 못하였습니다.
서로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은
소녀가 그의 얼굴에 나무토막을
던짐으로 일단락났습니다.
이 일 이후 그는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앞으로 그는 희랍어 강의를 하는 강사로 살아가죠.
✷
3
희랍어 시간
그렇습니다.
이 둘은 희랍어 강의에서 만나게 됩니다.
강사와 수강생으로 말입니다.
강의를 하며 생기는 일련의 순간들은
남자가 여자에게 호기심을 갖도록 하기 충분했습니다.
남자는 그녀를 보며 전연인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전연인과 같이 청각장애가 있진 않은지 걱정합니다.
한 번, 두 번 쌓이는 시선으로부터 어느샌가
그는 그녀를 의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𒄬
앞서 말했듯 이 소설에선 찬기가 느껴집니다.
가볍지 않은 인물들의 사정이 참 버겁기에,
읽는 제가 몸살이 지레 걸릴 것 같았습니다.
소설 속의 한 여자와 한 남자처럼,
우리에게도 너나 할 것 없이 가지고 있는
각자만의 결핍이 있습니다.
결핍이라 함은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람’
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말합니다.
<희랍어 시간> 속
그녀는 말의 결핍과 자식의 결핍을,
그는 시력의 결핍과 전 연인의 결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말을 예로 들어봅시다.
누구나 자연스레 당연하게도 내뱉고 있기에
깊게 파고드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희랍어 시간>의 그녀에게 여지 없이
사라진 ‘말’은, 도무지 붙잡히지 않습니다.
결핍이란게, 가지고 있는 본인이 아니면
그 타인으로선 짐작하지 못한다는 점이 참 애석합니다.
그런 애석함이 모여, 오롯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의 어색함이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죠.
저는 그런 어색함으로 인해 <희랍어 시간> 속
남자와 그의 전연인도 서로가 그저 첫사랑의
기억으로 끝맺음 된 것이라 보았습니다.
서투른 이해는 섣부른 행동을 불러오기 마련이잖아요.
그렇지만요, 그럼에도 이 소설의 끝에선 결핍으로
가득한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게로 다가섭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끌린 계기는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저 결핍으로 너덜너덜해진 그들에겐,
서로의 어색한 손길조차…
나쁘지 않게 느껴졌을 수도 있으니깐요.
상대에게도 결핍이 있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그런 어색함이라도
건내는 게 먹먹한 위로로 다가왔을지도 모릅니다.
𒄬
<희랍어 시간>은 한강 작가님 작품답게
짙은 감정선이 참 매력적인 소설이었습니다.
담담한 어조로, 그렇지만 강렬하고 감각적인 표현들로
황홀한 우울과 누덕한 기쁨을 그려내는 문체.
<희랍어 시간> 특유의 어스름한 분위기와
이 문체의 조합이 정말이지 좋았습니다.
그렇기에, <희랍어 시간>은
평소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즐기는 이들에게,
깊은 잔여감을 그 여운을 즐기는 이들에게 추천합니다.
또한 다소 고된 결핍에 지친 이들에게 추천합니다.
이 소설에선 어떠한 결핍도 해결되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살아갑니다.
또 다시 다른 누군가를 만나
서로의 얼굴을 맞잡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괜찮아요.
이 소설을 읽고 당신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덧붙여 한강 작가님 소설은 앞서 말했듯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표현이 독보적이기에
읽기 수월한 편은 아닙니다.
특히나 <희랍어 시간>은 유독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한 숨에 읽기엔 다소 부담스럽고,
시간적 여유를 두고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지금까지 독특한 희랍어와 누구나 가진 결핍이 맞물려
우리에게 찬란한 슬픔을 선사하는 작품,
희랍어 시간 : 네이버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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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이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낸 것일까. 전소해버린 줄 알았던 언어의 검부러기 밑에서 올라오는 참된 음절들을. 작가는 언어가 몸을 갖추기 이전에 존재하던 것들―흔적, 이미지, 감촉, 정념으로 이루어진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신생의 언어와 사멸해가는 언어가 서로 만나 몸을 비벼대는 찰나, 우리는 아득한 기원의 세계로 돌아가 그곳에 동결해둔 인간의 아픔과 희열을 발견한다. 그리고 문득 깨닫게 된다.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참된 욕망과 조우하기 위해서는 0도 근처에서 차갑게 끓어오르는 글쓰기의 언저리까지 기어이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과 탄생이 새로운 몸을 얻어 환생하는, 세속의 기적을 목격하게 된다. 이렇게 아름답게, 온전하게 몰락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소설이 우리에게 있었던가._이소연(문학평론가)
다만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한 여자의 이야기
그것이 다시 왔어.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이, 여자는 말語을 잃는다. 그것이 처음 왔던 것은 열일곱 살 겨울. 말을 잃고 살던 그녀의 입술을 다시 달싹이게 한 건 낯선 외국어였던 한 개의 불어 단어였다. 시간은 다시 흘렀다. 이혼을 하고, 아홉 살 난 아이의 양육권도 빼앗기고, 다시 그렇게 말을 잃어버린 후, 일상의 모든 것들을 다 놓을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선택한 것은 이미 저물어 죽은 언어가 된 희랍어. 그곳에서 만난 희랍어 강사와 여자는 서로의 앞에 침묵을 놓고 더듬더듬 대화한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남자의 이야기
시간이 더 흐르면……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꿈에서뿐이겠지요.
가족들을 모두 독일에 두고 십수 년 만에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 남자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볼 수 없다던 마흔이 가까워오지만 아마 일이 년쯤은 더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아카데미의 수강생 중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 여자를 주의 깊게 지켜보지만 여자의 단단한 침묵과 마주하자 두려움을 느낀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선 본 적 없는 지독한 침묵. 그리고 점점 소멸해가는 남자의 미약한 빛. 이 어스름이 완전한 밤으로 이어지는 걸까.
이 소설을 읽는 일은, 어쩌면 한 장의 사진을 오래토록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한 장의 사진 | 필립 퍼키스는, 『사진강의 노트』 제일 첫 장에서 ‘바라보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진에서 눈을 떼지 말 것, 먼저 대상의 표면에 떨어진 빛의 실체를 느낄 것. “의미는 없다. 오로지 사물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W.C. 윌리엄스의 말을 인용하며 그는 말한다.
사진이 찍혀지는 순간까지 그것과 함께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삶 전체를 통틀어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은 이 머무름과 반대 선상에 있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 빛, 공간, 거리 사이의 관계, 공기, 울림, 리듬, 질감, 운동의 형태, 명암… 사물 그 자체… 이들이 나중에 무엇을 의미하든 아직은 사회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성적이지도 않다. 이름을 주지도, 상표를 붙이지도, 재보지도, 좋아하지도, 증오하지도, 기억하지도, 탐하지도 마라. 그저 바라만 보아라. _필립 퍼키스, 『사진강의 노트』
비슷한 의미에서, 윌리 로니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보통 나는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기다린다. 실재가 더 생생한 진실 속에 드러나도록. 그것은 시점의 쾌락이다, 때론 고통이기도 하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 일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_윌리 로니스, 『그날들』
이렇게 오롯이 사물 그 자체(혹은 존재하는 그 자체)가 담겨진 한 장의 사진을 오래토록,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보면, 거기에선 천천히 어떤 기미들이 발견된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 『희랍어 시간』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떤 기미를 발견하고 흔적을 더듬는 일이다. 그리고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 기미와 흔적들은 어두운 암실, 정착액 속의 사진이 점점 선명하게 상을 만들어내듯 어느 순간 고대문자처럼 오래고 단단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시간과,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진 현재진행형의 시간까지를 포함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요?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을 찍는다면 그건 바로 이 순간 일어난 일입니다. 십 년 후에 당신이 그 사진을 볼 때, 순식간에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옵니다. (……) 사진은 동결된 순간이며 기억입니다. 하지만 사진은 늘 현재의 순간을 담고 있지요. 바로 사진의 마법이지요. _필립 퍼키스,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그 어떤 사진이라도, 만약 그것을 위하여 적절한 맥락이 창조된다면 그러한 ‘현재’가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사진이 좋으면 좋을수록 창조될 수 있는 그 맥락은 보다 완전한 것이 된다.
그러한 맥락은 시간 속에서 그 사진을 대신하게 되는데―그것은 불가능한 것인 그것 자체의 원래 시간이 아닌―서술되는 시간 속에서이다. 서술된 시간은 그것이 사회적 기억과 사회적 행위의 성격을 띠게 되면 역사적 시간이 된다. 짜맞추어진 서술되는 시간은 그것이 자극하고자 하는 기억의 과정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_존 버거, 『본다는 것의 의미』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암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 제대로 된 사진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빛과 어둠이다. 암실에 자연광이 새어들어가게 되면 사진은 하얗게 바래어지고, 암등의 빛이 과하게 되면 사진은 까맣게 타버린다. 그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사진이 완전히 마른 후에야, 인화가 제대로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빛과 어둠과 시간이 만들어낸 예술. 그것이 사진이라면, 『희랍어 시간』은 해서, 그래서, 한 장의 사진이며, 그것은 오로지 빛과 어둠으로만, 명암으로만 완성되는 한 장의 흑백사진이다. “오직 흑과 백 사이에 존재하는 명암 속에서 그 진실을 밝히는.”(G. I. 구지프)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되고 단단한 문자인 희랍어처럼, 빛과 어둠으로만 완성되는 흑백사진처럼, 소설은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으며 그 결이 곱고 단단하다. 목수이며 사진작가인 서영기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목수는 몸의 반응이 중요하다. 나무를 만지고 몸이 반응하며 정신적으로 집중하게 된다. 사진은 세계에 대한 내 사고의 반응이다. 대상은 달라도 반응이 반복되고 집중되면서 동일한 지점에서 둘은 경계가 없어진다.”(월간 사진, 2011.11)
한강의 경우, 그리고 이 소설 『희랍어 시간』의 경우 그것은 언어일 것이다.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감정과 고르고 또 고른 절제된 단어들. 언어로, 문장 그 자체로 세계를 보고 느끼고 표현하는.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이미 한 장의 사진과, 이 한 편의 소설과 그대로 닮아 있는.
이 소설과 함께,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존재하던 것들, 그 기미와 흔적들, 영원과도 같은 어떤 찰나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어떤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