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500만 명을 넘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인구는 조선 중기 현종(顯宗) 때인 1669년에 겨우 500만을 넘었다. 그러나 돌림병과 역질이 돌 때마다 인구가 크게 줄어 30년 전의 인구로 되돌아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영조(英祖) 중반기에 인구 700만을 돌파한 조선의 인구는 순조(純祖) 17년(1817)에서야 8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조선 초기인 태종(太宗) 4년(1404) 4월 25일 호조(戶曹)에서 각 도의 전답과 호구 수를 보고한 내용이 발견되었다. 이 시절에 충청도는 1만 9,561호에 인구는 4만 4,476명, 전라도는 1만 5,703호에 인구가 3만 9,151명, 경상도는 4만 8,992호에 인구는 9만8,915명, 풍해도(황해도)는 1만 4,170호에 인구는 2만 9,441명, 강원도는 1만 5,879호에 인구가 2만 9,238명, 동북면은 1만 1,311호에 인구가 2만 8,693명, 서북면은 2만 7,788호에 인구가 5만 2,872명으로 조사됐다.
연산군 9년(1503) 2월 9일에는 한성부에서 "정월부터 2월 5일까지 도성(서울) 안팎의 출생자는 120명, 사망 470명이라는 보고 자료가 발견됐다.
중종14년(1519)에는 가구수 754,146호 인구 3,745,481명으로 조사되었다.
인조 17년(1639)에는 44만 1,827호에 152만 1,165명과 효종 5년(1654) 가구수 62만 8,603호 인구 204만 7,261명으로 이는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영향 때문이다.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현종개수실록 10년(1669) 12월 29일의 기록에 의하면 한양과 지방의 호수는 134만 2,074호이고, 인구는 516만 4,524명으로 집계되었다.
현종 13년(1672) 10월 30일 실록에 의하면 호수는 117만 6,917호이고 인구는 469만 5,611명. 이 중 남자가 254만 1,552명, 여자가 215만 4,059명이었다. 3년 전에 비해 인구는 무려 46만 8,913명, 호수는 16만 5,157호나 줄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은 “신해년(1671)의 기근과 전염병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고 떠돌아다니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과연 조선시대에 전염병이 어느 정도로 맹위를 떨쳤기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다'는 표현을 썼을까. 조선시대에는 종기도 목숨을 거두어가는 시절이었으니, 전염병이라면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다.
숙종(肅宗) 44년(1718) 1월 15일 충청도 각 고을 백성들 가운데 전염병을 앓는 자가 2,140명, 사망자 642명, 함경도 각 고을에 염병(장티푸스)을 앓는 자가 4,570명, 사망자 1,243명. 숙종 45년(1719) 1월 2일 충청도에서 각 고을마다 염병을 앓는 자가 1,643명, 사망 240명(온 집안이 몰사한 경우가 4호). 평안도에서 염병을 앓는 자가 8,348명, 사망 1,380명이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당시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 피해가 더욱 컸음을 알 수 있다.
1821년(순조 21)에서 1822년 사이에 유행했던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평양에 수만 명, 서울에 13만 명으로 전국으로 따지면 수십만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정조(正祖)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823년에 전염병이 돌았던 적이 있다. 이해 전국의 사망자는 모두 12만 8천여 명이었다('정조실록' 23년 1월 13일).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천연두·장티푸스·콜레라는 3대 전염병으로 이 세 전염병은 번갈아 등장하여 대학살을 자행했다.
1859년(철종 10)에서 1860년에도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때의 사망자는 40만 명이었다. 서양 중세의 흑사병(페스트)만 무서웠던 것이 아니다. 특히 정조 23년 유행한 전염병에는 정치인들의 죽음이 눈에 띈다. 1월 7일에 김종수(金鍾秀-좌의정)가, 18일에 채제공(蔡濟恭-영의정)과 서호수(徐浩修-판서)가 죽었다. 김종수는 노론의 영수,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였고 서호수는 이 시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소론 서명응(徐命膺)의 아들이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각 당파의 거두들이 죽고, 그로부터 7개월 뒤에는 정조가 종기 때문에 죽었다.
당쟁의 지도가 일순 바뀐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질병에 의해 역사가 바뀐 것이다. 어쨌거나 전염병은 조선 후기 민간인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처럼 돌림병이 시도 때도 없이 돌았으니 인구증가율이 옆으로 게걸음을 한 것도 이해가 간다.
숙종 1년(1675) 10월 27일 실록에 의하면 '서울과 8도를 합하여 호수가 123만 4,512호이고 인구가 470만 355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42년 후인 숙종 43년(1717) 11월 14일 실록에 의하면 전국의 호수 총계는 155만 7,709호, 인구는 683만 9,771명으로 나타나 있다. 온갖 전염병과 기근, 괴질과 역질이 차례로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42년 만에 호수는 32만여 호, 인구는 213만여 명이 늘었다.
영조 8년(1732)에는 가구수 171만 3,849호에 인구 7,273,446명이었고, 영조 23년(1747) 12월 28일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서울의 호수는 3만 4153호, 인구는 18만 2,584명이며 8도의 호수는 172만 5,538호, 인구는 734만 318명(남 353만 9,107명, 여 380만 1,211명)이었다. 이때 비로소 인구가 700만을 넘게 된다.
그러나 정조 1년(1777) 실록을 보면 호수가 117만 5,371호, 인구는 723만 8,523명으로 오히려 영조 시절보다 호수는 55만, 인구는 11만 명 정도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각종 전염병이나 기근으로 인한 떼죽음의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정조 시절에도 인구증가율이 옆으로 게걸음을 계속했는데, 이때도 질병과 기근이 반복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순조 17년(1817) 12월 29일엔 전국의 호수가 163만 718호, 인구가 790만 3,167명으로 8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된다. 그러나 순조 28년(1828) 섣달 그믐날 기준 인구조사가 있었는데 가구 152만 7,608호 인구664만 4,408명(남:332만 5,221명. 여:331만 9,261명)으로 다시 가구와 인구가 줄었다.
이는 순조시대에 전국에 걸쳐 대형 화재와 홍수 그리고 전염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10년 가구수 280만 4,103호 인구 1천 331만 3,017명으로 조사되어 1천만 시대에 접어들었다.
조선시대의 인구를 전공한 학자들 의견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통계는 실록의 기사를 그대로 신봉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오늘과 같이 정교한 인구센서스를 행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 조선시대의 호구조사는 과세대상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16~ 60세까지의 장정만 계산되고 노인과 어린이, 노비와 여자들이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과세대상에서 빠지기 위해 고의로 누락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인구통계는 '공인기록'이라기보다는 '참고자료'의 성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아래는 논문중의 일부발췌입니다..
<조선시대의 인구 변동과 경제사>
Ⅰ. 서론
Ⅱ. 자료와 방법론
Ⅲ. 조선시대의 인구 증가
Ⅳ. 농업의 변화와 인구의 성장
Ⅴ. 한국사에서 인구통계학적(人口統計學的) 해석이 갖는 의미
Ⅵ. 결론
조선시대의 인구사를 연구하다 보면 인구 통계학적 측면에서 볼 때 현존하는 자료들이 매우 불확실하다는 사실에 부딪힌다. 그래서 인구의 절대적인 수치보다는 인구변화의 추이를 밝히는데 있다. 인구와 사회?경제는 서로 상호 작용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인구 이동의 방향은 인구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것이든 증가 또는 감소한 것이든 간에 특정시기의 정확한 인구 통계수치보다 중요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호구총수를 알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는 3년에 한번씩 작성된 인구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호(戶)를 단위로 작성되었으며, 모든 가구원을 호적단자(戶籍單子)에 기록했다. 호적단자의 사본은 호주(戶主)가 보관했으며, 각 군(郡)의 호적색리(戶籍色吏)에게 확인을 받았다. 이에 의거하여 호적색리는 각 호구를 호적대장(戶籍臺帳)에 기록했으며 작성된 호적대장 가운데 한 부는 군으로 한 부는 한양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러한 호적 제도는 인구 통계의 자료를 작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세(科稅)의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수천 부의 호적대장이 서울로 보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것은 매우 적다. 1850년 이전의 호적대장은 단지 244책만이 규장각도서목록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약간의 호적대장과 호적단자가 당시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주요 문서 외에서 발견되었지만, 그 수가 늘어날 것 같지는 안다. 발견된 호적대장 가운데 단지 2책만이 경상도 지방 이외의 것이다.
전국의 호구 총수는 1639년부터 계속 작성된 호적에서 추론된다. 지방별 호구총수는 거의 기록되지 않았으며, 1789년에 작성된 『호구총수』는 촌락을 단위로 호구를 기록하고 있다. 1637년 이전의 호구 총수는 단지 몇 년간의 기록만이 실록에 있을 뿐이다. 이 『실록』과 『호구총수』에 기록되어 있는 총계수치는 1637년 이전의 기록들은 때때로 오차가 많이 난다.
병력은 인구수에 비례합니다... ^^
아래글도 옮긴 겁니다.. 잘 이해하는 듯한 내용으로 보여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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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군대에 대해서 조금 더 보면...
조선의 군포軍布제도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그 윤곽이 잡히는데요...
아시다시피 군포란 군역면제를 위해서 내는 일종의 세금입니다...
보고서에도 나와있지만 농병일치제와 상비군과는 개념자체가 아예 다릅니다...
농병일치제 때는 군역을 진 병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국가에 이득입니다...
왜냐면 그숫자만큼 군포가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상비군제도에서는 군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국가에 손해입니다(경제적측면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상비군'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이해해야합니다....
지금이야 상비군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으니 '군대'하면 당연히 '상비군'常備軍-항상 갖춰진 군대-
를 떠올리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상비군은 당연한게 아니었습니다....
상비군이란 '군인'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즉 군인업무만 하면 먹고살 걱정없는 급료가 나온다는 것이지요...
군인을 직업으로 삼는다함은 군대활동 이외에 그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상인은 장사를 해서 돈을 벌고 농부는 농사를 해서 돈을 버는 것처럼 군인은 군사일을 하면서 돈을 법니다
그 군인월급은 누가 주느냐....바로 '국가'가 줍니다...
즉 상비군이란 국가가 대놓고 돈을 꼬라박지 않으면 키울래야 키울수가 없는 조직입니다...
생산성은 제로인데 소비만 하는 집단이지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말입니다...그렇다고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간단하게 군인들 먹여야죠 입혀야죠 재워야죠 무기들려줘야죠 훈련시켜야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돈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60만 상비군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의 숫자를 먹여살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 경제력이 없다면 60만이나 되는 인원을 먹여살릴 가망이 없죠....
즉 '국가'가 있다고 무작정 '군대' 그것도 '상비군'이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인구가 대략 천만정도로 추정되는데....그중 10만 병사를 '상비군'으로 키우자...
그것도 이전에 이미 있던 군대에 10만을 더 키우자는 것이죠...
과연 조선경제가 어떻게 될까요...더군다다 당시는 여자는 거의 노동력이 되지 않던 농경사회인데...
이것을 중세로 환원시켰을때 이런 상비군을 갖출 능력이 되는 국가는 몇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비군을 최초로 갖춘 나라가 프랑스인데...덕분에 프랑스는 유럽의 강국이자 절대왕정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끝내 상비군을 가지지 못했던 영국에서는 왕권이 크게 제한되었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옵시다....
조선은 구한말 신식군대를 키우기까지 계속 농병일치제였고...
상비군은 제 보고서에도 나와있지만 몇몇 장교들 뿐입니다...
실병력인 사병은 그냥 농부이지요....또 그 사병들이 실제 '병사'가 아닙니다...
단지 '군역'에 올라있을 뿐이지요....오늘날 입대대상자가 모두 군인이 아니듯이....
군역을 15만이나 잡은 것은 그 15만이 모두 군포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15만이 진짜 상비군이었다면 조선의 재정은 애저녁에 거덜났겠죠....
또 이 군역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 '백골징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 계속 군역에 남아있거나 군역대상이 아닌 어린아이, 여자 들도 올라와있고
이웃이 도망가면 그 이웃에 징수되는 등...행정체계가 그렇게 꽉짜여진 체제가 아니었습니다...
즉 군역이라는 것은 세금징수의 수단일뿐 군사력이나 국방력문제와는 사실 그닥 연관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군포가 부담이된 농민들이 오히려 그냥 군역을 지겠소...(군대 갈게)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자 국가가 그것을 막습니다-_- 니들 먹이고 재우고 훈련시킬 장소 마련할 수 없다면서
군에 자원입대(?)하겠다는 농민들을 뜯어말리고 억지로 군포를 내게 합니다....이것이 조선의 군역입니다....
이것은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나타나는데...
임란때 선조의 명을 받은 신립이 받은 군대는 실병력이 아닙니다....
선조가 무슨 식권마냥 쪽지하나를 달랑 줍니다...
'충청도 병사 XX명을 징병할 수 있는 권리증서'를 말이지요...
그 식권을 들고 털레털레 충청도로 내려갔더니...'우린 군포냈는데요?'라며 뻗대거나
이미 도망간 사람이 태반이었죠...그래서 억지로 잡아다가 창들리고 군복입힌 것이
당시 신립의 조선군입니다...그런 훈련안된 부대다 보니 신립이 병사들 도망가지 말라고 배수진을 친 것도
어느정도는 이해는 됩니다....(그래도 문경새재를 버리다니...-_-)
이런 시스템이기 때문에 거칠고 수렵을 잘하던 북쪽사람들, 특히 함경도 출신 병사들을
조선의 정예라고 하는겁니다...지금이야 각도어디서 모이던 훈련을 받으니까 상관없지만
당시엔 그런 훈련을 받지 못하고 가니까 남쪽 농부들보다는 드센 북쪽 포수와 나무꾼들이 주력이 될 수 밖에 없죠...
이것은 세조때 함경도 이시애의 난때 조선군에게 공포로 다가옵니다...
그 무시무시한 함경도 병사를 상대로 남쪽 병사로 막으라니까...-_-
뭐 이시애에게는 재수없게도 당시 하필이면 강순, 남이라는 명장이 관군에 속해있었다는 것이 불운이지만....
어쨌거나 이런 조선군의 상황은 그래서 진법陣法에 그렇게 목메게 만듭니다...
강한 함경도 무사를 중심으로 활은 조선인이라면 모두 기본이니...
강인한 함경도 병사를 돌격하는 갑사로 세우고 그걸 방어할 방패병 하나 엄호할 사수하나 식으로
3인 일조로 진법을 세우고 그 진법의 운용과 발전에 조선군은 대단한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것도 이런 농병일치제라는 상황때문이지요...그래서 조선군은 평지에서의 돌격이나 공격은 약한 반면
산지나 성을 끼고 하는 방어전에는 다른나라들도 인정할 정도로 대단한 효율성을 보여줍니다...
이런 각나라 군대의 특성도 농병일치제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지요...
여담으로 그래서 평지에서의 돌격과 공격이 장기인 여진과 만났을때 둘의 작전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첫댓글제가 볼땐 뭔가 개념을 서로가 혼동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상비군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시는 듯.... 다만 임란무렵의 소집되었던 조선군 17만은 무조건 부정하기도 어려운것이 어느지역에 누구휘하의 얼마라는 식으로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조선같은 나라는 뭐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비군 몇십만은 뻥입니다. 그당시 조선군이 상비군이었다는 주장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일본도 조선 침략할때 농미병들 죄다 긁어 왔습니다. 그동안 그쪽 동네도 휘청거릴 정도 였으니요. 또 전장터에 상비군만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뭔가 서로 개념을 혼동하는 듯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랑 비슷하군요. 동시대에 이른바 '국민상비군'제도를 실행하고 있던 나라는 전무하죠-_-;; 서로 치고박기 바쁘던 일본조차 엄연한 주력은 '봉건적 의무'에 의해 차출된 농민병들이었고. 잡병들은 상비군이라기 보다는 돈주고 고용하는 용병의 개념이 강했지요. 병농일치에 군정 문란으로 삐꺽삐꺽 하던 상태에서도 조선의 동원력도 상당한 수준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_-ㅋ 문제는 훈련,지휘관의 부족과 17만 가량 된다지만 전국적으로 너무 분산되어있다는것;; 일본군은 목전에 닥쳤는데 시간만이 해결해줄수 있는 문제라서 낭패죠.
명군 참전을 무조건 깍아내릴수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시간들이고 돈들이고 공들여 가며 17만을 빡빡 굴리고 지휘체계를 다시 짜고 장수들을 교육시키는 대신에 메이드 인 차이나의 인스턴트 군대가 북쪽에서 떡하니 밀고 내려왔으니 말이죠;;(물론 명군의 본격적 참전이전에 이미 조선군 주도로 전황이 호전-최소한 악화되지는 않았다는- 되가고 있었다는 조선군을 위한 변호도 곁들이겠습니다^^;; )
17만 얘기 아직까지 합니까? 어느지역에 누구휘하라고 기술되어 있다는데. 기술된게 현실과 무슨 상관인가요. 대한민국 예비군들도 편제 다 되있습니다. 실제 전쟁나면 제대로 편제되서 현역같은 전투력 발휘하나요. 첨부터 병사인 사람은 없지만. 왜군과 명군은 상비군입니다. 제대로 된 편제와 제대로 된 군기를 유지한 반면. 장부상에 나온 17만은 무슨 의미가 있나요. 인구가 500만이라는데. 장부로 잡으면 50만인들 못잡겠습니까. 제대로 필요한 때 동원되주고. 지속적으로 전투에 가담해야 그게 군대지. 장부상 유령군대가 뭐가 중요합니까. 고려도 거란성종 침입때 40만 동원했지만. 실제 주력은 강조가 몰고가 몰살당한 3만병이었습니다.
지휘체계도 안서고. 근왕병이라고 수만 올라가다 2천왜군에 쫓겨 와해되는 장부상 17만 100만인들 무슨 필요가 있고. 10만 왜군이 진주성친다고 나몰라라 내빼버리는 곽재우식 소규모부대로 100만 있음 뭐하겠습니까. 정작 필요할 때 상대를 때려주고, 평상시에 존재자체로 적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비군 수만이 조선엔 절실했습니다. 지금 예비군에 민방위 합치면 한 500-600만 되나요. 리틀솔져님은 500-600만 장부상 인원를 놓고 지금 한국군 500만 하는 식입니다. 유성룡 책에 1594년 상비병 8천이라고 나옵니다. 상비병도 아니면 17만이 어디서 뭐하는 병력입니까. 엄밀히 얘기하면 농사짓는 농부들 아닙니까?
첨부터 상비군은 당연 없죠. 논산훈련소 들어가기 전과 6주 훈련받으면 확 달라지듯. 정규군대속에서 몇달 지내면 군인같아집니다. 왜군이 조선땅에 들온지가 7년입니다. 명군도 6년입니다. 이기간 동안 남의 땅에서 군대틀속에 산다면 상비군이죠. 조선만 7년간 싸우면서도 제대로된 상비군이 없었습니다. 있어봐야 최대 1만명선 밖에 동원 못하니. 자기 땅에서 싸우면서도 바닷가에 몰린 적을 못 몰아내 전쟁이 길어진 것이죠. 2천에 놀래 도망가는 수만 장부상 병력이 뭔 도움이 되나요. 제대로된 지휘관 아래 지속적으로 군대에 몸담아가며 훈련을 하면서 전투를 치루는 수만 상비군대가 조선에 있었다면. 전쟁은 훨씬 빨리 끝났을 것입니다.
어익후-_-;; 명군은 그렇다 치고 봉건의무에 따라 농한기에 병사로 싸우고 농번기에 집으로 돌아가던 일본군이 상비군이라니. (조선 꼴딱서니가 말이 아니었다는 것은 딱히 부인 않겠습니다만. 낄낄) 실제로 수많은 영주들이 조선에 병사들을 차출했다가 전세가 급박해지는 바람에 줄창 붙박이로 말뚝 박아놨다가 땅 일굴 사람도 없어서 영지경제가 엉망이 되고 임시변통으로 용병을 고용해대느라 허리가 휘었습니다만? 상비병은 그냥 군기를 유지해서 싸울수 있는 병사가 아닙니다-_- 상비군은 다음바크씨가 말한 대로 [군대에만 종사하는, 기타 경제활동과 박리된 전투집단]입니다. 주력이 모두 병농일치인 농민병이긴 일본이나 조선이나 마찬
가지에요. 기술된 편제와 현실이 뭔 상관이냐고요? 저게 허접해 보이시나봅니다? 저건 왕에게 올라가는 공문서 입니다만_-_ [전국 병력 배치 현황도 계사년 현재] 정도의 보고서에요. 저 보고서 마저 장부상의 유령군대라고 주장하신다면 정말 코믹한 발언이십니다. 그럼 도대체 조선에는 무슨 군대가 있어서 명군 참전전에 전선을 고착화 시켰고 길주에서는 호랑이 패티쉬 가토를 몰아냈죠? 또 추위때문에 전선이 고착화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하신다면 대략 난감입니다.
도대체 그당시 어느 나라에서 진정한 의미의 [상비병]을 주력을 삼을 정도로 대량 조직했는지 의문이군요. 군사훈련과 병영생활을 직업 삼아하며 월급타먹고 시간되면 퇴근하는 그런 개념의 '상비군' 말입니다. 임란당시의 아시가루들이 평상시에도 병영생활을 유지했나요? 제가 알기로는 밭갈아 먹고 장사 하는등 일상생활을 지낸걸로 알고있습니다만. (물론 사무라이는 직업군인의 개념에 근접해 있었습니다만. 이는 봉건적 의무에 기초한 서양의 기사와 비슷한 개념이었습니다. [직업군인=상비병]의 개념이라면 틀려도 한참 틀린것입니다요)
뭐 병적상 숫와 실제 동원해본 병력이 차이가 나긴 했죠. 서류상으론 30만이 조금넘었는데 실제로 절반정도 수준... 그것도 의병을 합쳐서 17만 겨우? 채웠죠. 그리고 좀오해들을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조선이 농민병이라고 해서 농사만 짓다 전쟁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군복무가 시작 되면 요즘의 우리처럼 2년동안 군에 틀어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복무 기간동안 몇개월 단위로 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나면 교대하고 끝난사람은 다시 생업에 종사하고... 그러니까 맨탕 농사만 짓다가 전쟁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군사 훈련은 다 받습니다.
물론 임란발발때는 제도가 매우 느슨해져서... 특히 용인전투 때에는 평소에 거의 훈련도 되지 않은 병력이 차출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또하나 약간 잘못들 알고 계신 부분이라면 7년내내 전쟁이 벌어진게 아닙니다. 임란은 대략 2년여 정도 정유재란은 1년여 정도.... 실재 전투가 벌어진건 2년여정도 기간 밖에 안됩니다. 임란때는 2년여기간 동안 대체로 17만 병력이 유지 되었습니다. 정유재란때 3분의 1도 안되는 수준으로 줄었는데 당시 정황을 보면 정치적인 논리가 개입된 성향도 짓습니다. 8만에 달하는 명군의 보급도 조선이 담당하게 됩니다.
/무장공비 으이그.. 바다 건너온 왜군이 농번기에 일본 갔다 농한기에 와 싸웠다고요. ㅎㅎㅎ 그건 아니죠. 지나라에서는 농민이었겠죠. 그러나 한반도로 넘어온 다음에는 지휘체계속에서 24시간 전투준비하는 상비군입니다. 항상(상)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준비돼있는(비) 군대란 말입니다. 조선의병들처럼 보통때 농사짓다가 왜군이 근접하면 밤에 기습하고 다시 돌아와 농사짓는 병력도 아니고. 관군에 소집돼 큰 싸움 몇번 치루고 집으로 돌아오는 군대도 아닙니다. 그 17만이 집으로 안들어오고 왜군처럼 지휘체계속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면 7년 끌 전쟁도 아니란겁니다. 그 차이가 그렇게 이해가 안됩니까.
지난 2006년 6월 역사스페셜에서 서애 유셩룡의 1594년도 시무차자를 인용하면서 갑사, 정로위, 별시위의 수를 보인 제외하여 8천 명이라고 언급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역사스페셜에서는 이 8천 여 명이 평상시에 '상번' 하는 병력이라고 적혀있는 것은 빼먹고 이 상번하는 병력이 마치 상번과 하번을 합친 '전체' 병력인마냥 적어서 시청자들에게 다소 혼란을 주는 듯 싶군요. (실제로 역사스페셜에서는 이 '상번' 병력 8천 명을 다시 여러 번으로 나누어 평상시에는 2천 명만 근무를 선다고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시무차자 얘기가 나오길래 한 번 써봤습니다.
/리틀솔져 명군이 호의호식했다는 얘기를 하는게 아니고요. 조선 17만이 그냥 장부상 유령군대란 것입니다. 정말 이 17만이 한번씩 전투에 참전했다고 해도 상비 5만보다 나을건 없습니다. 17만이 전투에 복무한게 1년씩이라고 해도. 7년 기간을 놓고 볼때 1년에 2만5천병밖에 안됩니다. 24시간 쭉 군대의 지휘체계속에서 움직이는 정규상비군과 필요한때 모아서 썼다 집으로 돌아가는 군대랑 큰 차이가 안다니까요. 고려는 40만 동원했지만. 1-2만이 없어서 허둥대는 꼴을 보입니다. 그리고 여진방어하는 정예군 불러오지만 그 병력이 1만입니다. 실제 전쟁은 이들이 하는 것이지. 그 동원했다는 40만이 하는게 아닙니다.
저 병력이 흩어져 있어서 힘을 못 발휘한 것이고 단순히 확인된 병력입니다만??이보세요 충무공 장계에는 수군이 5만이라 되있지만 실록에 확인된 것은 2만5천정도입니다 실상 충무공 장계에 있는 병력에는 보인까지 예비군으로 참가하니까요 그리고 말입니다 용인에서 깨진 근왕군은 나중에 이치,웅치 전투에서 엄청나게 활약하고 더 나아가 행주산성에서는 거의 10배나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이깁니다만??또 경주성을 탈환한 군사들도 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못 싸우고 후퇴했었습니다만 나중에 경상도에서 활약하죠 그리고 단순히 짱박혀 있으면 상비군이라고 할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병력이 흩어져 있어서 힘을 못 발휘해요? 핵심을 꼭 찍었네요. 필요한때 쓰지 못하는 군대가 군대입니까? 때리기도 좋게 해안에 성짓고 안나오고 짱박혀 있어도. 1만명(울산), 수천명선(순천)밖에 동원 못하는 한계 그걸 지적하는 겁니다. 군적에 백만이 있으면 뭐합니까. 필요할때 쓰지 못하는 100만대군인데. 일본은 교대해도 24시간 전쟁에 임하는 병력이 십수만이라니깐요. 진주성 2차싸움때 10만이 몰려가서 때리잖아요. 행주산성, 진주성 1차싸움을 봐도 3-4만을 동원하쟎습니까. 이게 군대지. 흩어져 있는 17만이 무슨 군대입니까? 장부에서 군적이나 뛰적이지 말고 실제 전사공부좀 하세요. 뭐가 똥인지 뭐가 된장인지 헷갈리시지 말고요
평시와 전시는 다르죠. 제가 말한것은 평시에 돌아가는 시스템을 말한 것이고 임란은 엄연히 전시입니다. 지금도 만약 전쟁이 나면 현재 현역만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전시가 되면 모두 소집이 됩니다. 임란 이듬해에 집계한 것은 전시 소집병력의 총계입니다. 그당시 소집을 홰봤더니 그만한 병력이 모였다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또하나 병력이 흩어져 있었다는 부분인데 그건 일본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1군에서 9군까지 한성에서 경남까지 분산주둔되어 있었습니다. 15만이 한대 모여 있던것이 아닙니다.
훗 분명 계사년 충무공 장계에는 수군이 5만이었고 계사년 선조 실록에 나온 병력은 2만5천입니다만 충무공께서도 서류를 조작하신 겁니까??그리고 계사년은 1593년입니다 사실 저 숫자도 원래 조선수군보다 훨씬 적은 거고 갑자기 훨씬 후대 일인 칠천량해전(정확히는 춘원포에서 끝장났지만)이 나오는지?그리고 전사공부나 열심히하라는 말은 제가 하고 싶군요 가토의 경우 자기 군대 분산주둔 시켰다가 정문부에게 제대로 각개격파 당합니다 당시 류성룡은 이를 비웃었고요 이외에 일본군도 여러 요소에 병력을 분산배치하지만 점점 밀리면서 저렇게 뭉쳐졌죠
가끔 웃대나 디씨를 통해서 흘러 들어오신 분들이 보이는데. 디씨는 디씨고 쇼군카페는 쇼군 카페입니다. 특정 싸이트에서나 용납될법한 어투는 지양합시다. 특히나 자게판의 농담따먹기가 아닌 역게판의 감정싸움으로 번지기 쉬운 토론이라면 말이죠.(하지만 역게에서 가끔씩 선천적 개념결핍증 환자들을 보면 ;; 발끈해서 빈정거리는건 저도 어쩔수 없긴 하네요;;)
아래 리플로 단 선조 26년의 기사입니다. ...전략... 또 평소 영남(嶺南)에 소속된 군병이 수군(水軍) 2만여 명을 제외하고도 잡색(雜色) 군사가 4만 명이나 됩니다. 난리가 난 이후 본도의 감사(監司)를 통하여 들으니, 조량병(助粮兵)·운량병(運粮兵)·기병(騎兵)·보병(步兵)으로 초발(抄發)되어 방어에 임하고 있는 자가 22만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Skald님의 추측하신것과 비슷할겁니다. 원래 병적상으로도 조선전체 병력 30만중에서 순수전투병은 16 ~ 17만정도였다고 합니다. 물론 개념을 더확대한다면 쫑알님의 말씀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임란무렵은 워낙 경황이 없다 보니........ 그건 우리뿐만아니라 어느나라 군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전상용씨의 오류는 바로 실록입니다. 실록=성경이 아니에요. 실록=진리가 아닙니다. 실록이 상세히 맞는 부분이 많지만, 조선전기-임란때는 군졸수를 부풀려서 군자금을 염출하려고 거짓보고 올린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군=징집가능한 농부들이에요... 몇몇 전투에서 이겼다고 하나,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록실록하면서 실록에만 매달리면서 다른 말을 안들으면 안되져.. 실록만 믿다보면 뭔가가 해명이 안되는 말도 많습니다. 실록은 우수한 자료이지만, 단순히 수치만 나열한 것으로 모든 싸움이나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말이죠... 종합선물세트에요...
인구수에 대한 자료, 당시의 외교문서자료, 심지어 장군들이 집에 보내고 받은 편지에서도 사료를 수집하여 작성한 것이 더 맞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사정을 참작하여 종합으로 논문을 써도 시원찮은 판에, 실록딸랑 하나만 들고는 "이거봐봐 맞잖아?" 이러면 말이 안되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전사전사 하는데, 국방대학원다니는 분이 아니시면 어차피 다 아마춰에요... 그러니 그런 말은 불필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전사로 따지면 기똥차게 꿰는 분들 많아요. 허나 다 아마춰입니다. 그리고 수치의 단순대입은 오류가 많이 나올 행위랍니다.. 공무원들 탁상행정이랑 같은 거에요...
학계에서도 조선시대 인구에 대허서는 확신을 못합니다 임진왜란 이전 인구를 1000만 정도로 잡는 경우도 있고(EBS국사에 나오더군요)같은 세기에도 인구가 법정통계로는 800만이고 학계에서는 최고 1600만까지 왔다갔다합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지금 이곳 분들과 저는 실록 말고도 충무공 장계와 류성룡의 시무차자 등 여러가지 사료를 ?는데요 왜 그런 기록들은 무시하는지 모르겠군요 ㅡ.ㅡ;;(분명이 이것 외에도 쇄미록과 정만록 등도 나왔던 걸로 기억하고요)
무시 안했는데요. 병력수에서 전투병력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 안된다라는 논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참고로 인구통계가 불명확하므로 동원된 병력이외에 조세자료, 기타 자료등을 합산하여 봐야 어느정도 윤곽이 잡힙니다.. 그런데 줄기차게 실록만 들이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전에도 이야기 했었죠? 전상용씨가 군대를 갔다 왔다면 이해가 갈 겁니다. 60만 대한민국 군대가 전원 전투병이 아니에요..... 충무공 장계도 그렇습니다.. 장계내용상 군대의 숫자를 당시에 타고 다니던 선박의 정원이랑 대입시켜 보세요... 말이 안되는 수치의 군선이 나온답니다.. 이거 논문이나 보세요.에혀
좀 자료많은 도서관에 가셔서 정식으로 공부하고 낸 논문들을 보시고 오면 조선기병군단 10만이라는 이야기가 말이 안된다는 것정도는 이해가 갈 겁니다. 실록에만 철썩같이 매달리는 것을 보고 다른 사료도 보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에요.. 실록도 말입니다..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상당수의 진실과 구라가 공존하는 자료입니다. 세조실록만 봐도 답이 나옵니다. 확인되지 않은(그럴 만한 사료가 없는 사건)그런 일까지 감안하면 상당수의 오류가 나온다 이거에요.. 후세에 쪽팔리게 안비출라고 허위과장해서 올려놓은 사건도 빈번합니다. 황희정승에 대한 것이 대표적이죠...
풋 그래서 다른 기록에서도 그와 비슷한 병력 내지는 더 많은 병력이 나옵니까??그리고 말입니다 수군이라고 해서 배에만 타는 인원만 나오는줄 아십니까 수영 죄다 비워놓고 다 싸우러 떠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리고 교대 인원 같은 것도 있는데다 수군이 육전한 기록도 자주 있습니다만??역사라는 것은 원사료를 보고서 하는 거지 논문만 보고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도 대한민국 60만군대가 죄다 전투병이 아니라는 것인 알고 있습니다 기본중의 기본이니까 ㅡ.ㅡ;;;그래서 저 172400명중 비전투 관련 병과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고요 하지만 군마라고 써 있는 것과 다른 기록을 보면 저 병력도 전원 동원한 것도 아니고 비전투병력이 죄다 기록되 있지 않은 것은 알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충무공 장계 이야기를 꺼내는 거구요 그리고 현대 방식으로 인구대비 군사수 얼마 모을수 있다는 것이 과거에도 통할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때 당시는 지금과 동원 방식도 다르니까 그리고 비전투 병력중에 가끔가다 여자들도 나옵니다
말이라는 것이 100필이면 병력이 100이 아닙니다... 예비군마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말이라는 동물이 의외로 섬세해서 너무 지치게 하면 탈진해서 죽게됩니다. 그래서 수시로 말의 피로도를 봐가면서 말을 바꿔줘야 합니다. 보통 1인 기마당 2~3필 정도 필요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기마당 보인이 몇씩 붙는데 이게 또 죄다 전투병이냐..아닙니다. 물론 불리해지면 창과 칼을 들겠죠? 허나 기본적인 일은 기병의 보조입니다. 이외에 별개의 보병들이 있었고요. 따라서 10만 기병군단이라는 말은 어패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료를 원사료를 보고 제꼴리는대로 해석 내놓는 사람이 하나둘인가요??^^
따라서 원문도 보아야 하지만, 관련 논문으로 상당히 다양한 의견을 보고 자신이 직접 찾지 못하는 부분도 보아야 논문이 되는 겁니다. 논문을 자신의 생각을 쓰는 것이라고 여기나요??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한문이라는 것은 상당히 해석하기에 따라서 말 바꾸기가 쉬운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문장도 주석이 여러개가 나오곤 하죠. 더구나 고대나 중세의 사료를 지금의 데이타 보듯이 보면 안됩니다. "비류직하 수천척"이라고 하여 가보니 쫄쫄 샘물이 흘러내리는 폭포를 묘사한 구절도 많습니다. 뭐 삼국지에서 적벽에 조조가 80만 대군을 모았다는 것이 자치통감에도 있는데, 이를 믿을 사람 있나요?? 그러니 논문을 봐야 합니다....
첫댓글 제가 볼땐 뭔가 개념을 서로가 혼동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상비군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시는 듯.... 다만 임란무렵의 소집되었던 조선군 17만은 무조건 부정하기도 어려운것이 어느지역에 누구휘하의 얼마라는 식으로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조선같은 나라는 뭐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비군 몇십만은 뻥입니다. 그당시 조선군이 상비군이었다는 주장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일본도 조선 침략할때 농미병들 죄다 긁어 왔습니다. 그동안 그쪽 동네도 휘청거릴 정도 였으니요. 또 전장터에 상비군만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뭔가 서로 개념을 혼동하는 듯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랑 비슷하군요. 동시대에 이른바 '국민상비군'제도를 실행하고 있던 나라는 전무하죠-_-;; 서로 치고박기 바쁘던 일본조차 엄연한 주력은 '봉건적 의무'에 의해 차출된 농민병들이었고. 잡병들은 상비군이라기 보다는 돈주고 고용하는 용병의 개념이 강했지요. 병농일치에 군정 문란으로 삐꺽삐꺽 하던 상태에서도 조선의 동원력도 상당한 수준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_-ㅋ 문제는 훈련,지휘관의 부족과 17만 가량 된다지만 전국적으로 너무 분산되어있다는것;; 일본군은 목전에 닥쳤는데 시간만이 해결해줄수 있는 문제라서 낭패죠.
명군 참전을 무조건 깍아내릴수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시간들이고 돈들이고 공들여 가며 17만을 빡빡 굴리고 지휘체계를 다시 짜고 장수들을 교육시키는 대신에 메이드 인 차이나의 인스턴트 군대가 북쪽에서 떡하니 밀고 내려왔으니 말이죠;;(물론 명군의 본격적 참전이전에 이미 조선군 주도로 전황이 호전-최소한 악화되지는 않았다는- 되가고 있었다는 조선군을 위한 변호도 곁들이겠습니다^^;; )
17만 얘기 아직까지 합니까? 어느지역에 누구휘하라고 기술되어 있다는데. 기술된게 현실과 무슨 상관인가요. 대한민국 예비군들도 편제 다 되있습니다. 실제 전쟁나면 제대로 편제되서 현역같은 전투력 발휘하나요. 첨부터 병사인 사람은 없지만. 왜군과 명군은 상비군입니다. 제대로 된 편제와 제대로 된 군기를 유지한 반면. 장부상에 나온 17만은 무슨 의미가 있나요. 인구가 500만이라는데. 장부로 잡으면 50만인들 못잡겠습니까. 제대로 필요한 때 동원되주고. 지속적으로 전투에 가담해야 그게 군대지. 장부상 유령군대가 뭐가 중요합니까. 고려도 거란성종 침입때 40만 동원했지만. 실제 주력은 강조가 몰고가 몰살당한 3만병이었습니다.
지휘체계도 안서고. 근왕병이라고 수만 올라가다 2천왜군에 쫓겨 와해되는 장부상 17만 100만인들 무슨 필요가 있고. 10만 왜군이 진주성친다고 나몰라라 내빼버리는 곽재우식 소규모부대로 100만 있음 뭐하겠습니까. 정작 필요할 때 상대를 때려주고, 평상시에 존재자체로 적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비군 수만이 조선엔 절실했습니다. 지금 예비군에 민방위 합치면 한 500-600만 되나요. 리틀솔져님은 500-600만 장부상 인원를 놓고 지금 한국군 500만 하는 식입니다. 유성룡 책에 1594년 상비병 8천이라고 나옵니다. 상비병도 아니면 17만이 어디서 뭐하는 병력입니까. 엄밀히 얘기하면 농사짓는 농부들 아닙니까?
첨부터 상비군은 당연 없죠. 논산훈련소 들어가기 전과 6주 훈련받으면 확 달라지듯. 정규군대속에서 몇달 지내면 군인같아집니다. 왜군이 조선땅에 들온지가 7년입니다. 명군도 6년입니다. 이기간 동안 남의 땅에서 군대틀속에 산다면 상비군이죠. 조선만 7년간 싸우면서도 제대로된 상비군이 없었습니다. 있어봐야 최대 1만명선 밖에 동원 못하니. 자기 땅에서 싸우면서도 바닷가에 몰린 적을 못 몰아내 전쟁이 길어진 것이죠. 2천에 놀래 도망가는 수만 장부상 병력이 뭔 도움이 되나요. 제대로된 지휘관 아래 지속적으로 군대에 몸담아가며 훈련을 하면서 전투를 치루는 수만 상비군대가 조선에 있었다면. 전쟁은 훨씬 빨리 끝났을 것입니다.
임란때 왜군, 명군이 왜 상비군이 아닙니까. 남땅에서 군기를 유지하며 몇년을 계속해서 싸웠으면 그게 상비군이지. 조선이 없으면 없는 것이지 다 없답니까. 장부속 유령군대 17만중에 5만만 왜군처럼 상비군화 했으면 만단위 군대로 바닷가에 성짓고 살던 왜군이 어떻게 버팁니까. 인제쯤이면 왜군같은 상비병과 장부상 병력의 차이좀 알때 안됐나요. 매일매일 숙식을 같이하고 지휘계통속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현역군과 예비군무리가 어떻게 똑같겠습니까.
어익후-_-;; 명군은 그렇다 치고 봉건의무에 따라 농한기에 병사로 싸우고 농번기에 집으로 돌아가던 일본군이 상비군이라니. (조선 꼴딱서니가 말이 아니었다는 것은 딱히 부인 않겠습니다만. 낄낄) 실제로 수많은 영주들이 조선에 병사들을 차출했다가 전세가 급박해지는 바람에 줄창 붙박이로 말뚝 박아놨다가 땅 일굴 사람도 없어서 영지경제가 엉망이 되고 임시변통으로 용병을 고용해대느라 허리가 휘었습니다만? 상비병은 그냥 군기를 유지해서 싸울수 있는 병사가 아닙니다-_- 상비군은 다음바크씨가 말한 대로 [군대에만 종사하는, 기타 경제활동과 박리된 전투집단]입니다. 주력이 모두 병농일치인 농민병이긴 일본이나 조선이나 마찬
가지에요. 기술된 편제와 현실이 뭔 상관이냐고요? 저게 허접해 보이시나봅니다? 저건 왕에게 올라가는 공문서 입니다만_-_ [전국 병력 배치 현황도 계사년 현재] 정도의 보고서에요. 저 보고서 마저 장부상의 유령군대라고 주장하신다면 정말 코믹한 발언이십니다. 그럼 도대체 조선에는 무슨 군대가 있어서 명군 참전전에 전선을 고착화 시켰고 길주에서는 호랑이 패티쉬 가토를 몰아냈죠? 또 추위때문에 전선이 고착화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하신다면 대략 난감입니다.
도대체 그당시 어느 나라에서 진정한 의미의 [상비병]을 주력을 삼을 정도로 대량 조직했는지 의문이군요. 군사훈련과 병영생활을 직업 삼아하며 월급타먹고 시간되면 퇴근하는 그런 개념의 '상비군' 말입니다. 임란당시의 아시가루들이 평상시에도 병영생활을 유지했나요? 제가 알기로는 밭갈아 먹고 장사 하는등 일상생활을 지낸걸로 알고있습니다만. (물론 사무라이는 직업군인의 개념에 근접해 있었습니다만. 이는 봉건적 의무에 기초한 서양의 기사와 비슷한 개념이었습니다. [직업군인=상비병]의 개념이라면 틀려도 한참 틀린것입니다요)
바닷가에 성짓고 살던 일본군 성 튼튼하게 지으라고 시간 벌어준건 누구였더라요? 나중에 때려 부수겠다고 몰려갔다가 사천성에서 깨작살이 난건 또 누구였지 말입니다?(낄낄낄)
뭐 병적상 숫와 실제 동원해본 병력이 차이가 나긴 했죠. 서류상으론 30만이 조금넘었는데 실제로 절반정도 수준... 그것도 의병을 합쳐서 17만 겨우? 채웠죠. 그리고 좀오해들을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조선이 농민병이라고 해서 농사만 짓다 전쟁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군복무가 시작 되면 요즘의 우리처럼 2년동안 군에 틀어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복무 기간동안 몇개월 단위로 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나면 교대하고 끝난사람은 다시 생업에 종사하고... 그러니까 맨탕 농사만 짓다가 전쟁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군사 훈련은 다 받습니다.
물론 임란발발때는 제도가 매우 느슨해져서... 특히 용인전투 때에는 평소에 거의 훈련도 되지 않은 병력이 차출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또하나 약간 잘못들 알고 계신 부분이라면 7년내내 전쟁이 벌어진게 아닙니다. 임란은 대략 2년여 정도 정유재란은 1년여 정도.... 실재 전투가 벌어진건 2년여정도 기간 밖에 안됩니다. 임란때는 2년여기간 동안 대체로 17만 병력이 유지 되었습니다. 정유재란때 3분의 1도 안되는 수준으로 줄었는데 당시 정황을 보면 정치적인 논리가 개입된 성향도 짓습니다. 8만에 달하는 명군의 보급도 조선이 담당하게 됩니다.
그로인해 명군은 자국 뿐만아니라 조선으로 부터의 보급까지 합해서 삼국의 군대중 가장 호의호식하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무장공비 으이그.. 바다 건너온 왜군이 농번기에 일본 갔다 농한기에 와 싸웠다고요. ㅎㅎㅎ 그건 아니죠. 지나라에서는 농민이었겠죠. 그러나 한반도로 넘어온 다음에는 지휘체계속에서 24시간 전투준비하는 상비군입니다. 항상(상)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준비돼있는(비) 군대란 말입니다. 조선의병들처럼 보통때 농사짓다가 왜군이 근접하면 밤에 기습하고 다시 돌아와 농사짓는 병력도 아니고. 관군에 소집돼 큰 싸움 몇번 치루고 집으로 돌아오는 군대도 아닙니다. 그 17만이 집으로 안들어오고 왜군처럼 지휘체계속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면 7년 끌 전쟁도 아니란겁니다. 그 차이가 그렇게 이해가 안됩니까.
지난 2006년 6월 역사스페셜에서 서애 유셩룡의 1594년도 시무차자를 인용하면서 갑사, 정로위, 별시위의 수를 보인 제외하여 8천 명이라고 언급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역사스페셜에서는 이 8천 여 명이 평상시에 '상번' 하는 병력이라고 적혀있는 것은 빼먹고 이 상번하는 병력이 마치 상번과 하번을 합친 '전체' 병력인마냥 적어서 시청자들에게 다소 혼란을 주는 듯 싶군요. (실제로 역사스페셜에서는 이 '상번' 병력 8천 명을 다시 여러 번으로 나누어 평상시에는 2천 명만 근무를 선다고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시무차자 얘기가 나오길래 한 번 써봤습니다.
/리틀솔져 명군이 호의호식했다는 얘기를 하는게 아니고요. 조선 17만이 그냥 장부상 유령군대란 것입니다. 정말 이 17만이 한번씩 전투에 참전했다고 해도 상비 5만보다 나을건 없습니다. 17만이 전투에 복무한게 1년씩이라고 해도. 7년 기간을 놓고 볼때 1년에 2만5천병밖에 안됩니다. 24시간 쭉 군대의 지휘체계속에서 움직이는 정규상비군과 필요한때 모아서 썼다 집으로 돌아가는 군대랑 큰 차이가 안다니까요. 고려는 40만 동원했지만. 1-2만이 없어서 허둥대는 꼴을 보입니다. 그리고 여진방어하는 정예군 불러오지만 그 병력이 1만입니다. 실제 전쟁은 이들이 하는 것이지. 그 동원했다는 40만이 하는게 아닙니다.
저 병력이 흩어져 있어서 힘을 못 발휘한 것이고 단순히 확인된 병력입니다만??이보세요 충무공 장계에는 수군이 5만이라 되있지만 실록에 확인된 것은 2만5천정도입니다 실상 충무공 장계에 있는 병력에는 보인까지 예비군으로 참가하니까요 그리고 말입니다 용인에서 깨진 근왕군은 나중에 이치,웅치 전투에서 엄청나게 활약하고 더 나아가 행주산성에서는 거의 10배나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이깁니다만??또 경주성을 탈환한 군사들도 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못 싸우고 후퇴했었습니다만 나중에 경상도에서 활약하죠 그리고 단순히 짱박혀 있으면 상비군이라고 할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그리고 왜군이나 조선군이나 상황에 따라서 계속 교대가 되는 것은 한국전쟁때도 마찬가지였었습니다만(물론 모든 병력이 교대되는 것은 아니지만)그리고 임진년때 왜군도 큰 피해 입어서 사실 많이 줄어들고 나중에 정유재란 때 병력은 나중에 가서 지원 받은거고
/전상용 원균이 칠천량에서 무너지고 이순신장군 백의종군할 때 조선수군이 얼마라고 생각합니까? 0에 가깝습니다. 울돌목에서 13척 몰고 나갈때 조선수군이 5만이겠습니까? 명량해전 당시만 해도 조선수군 많아야 2천입니다. 무슨 군대가 2천에서 5만으로 확 늡니까. 님처럼 장부짝만 들고 전쟁을 쳐다보니 조선은 명나라한테 손벌리고 전쟁치뤄도 항상 17만 대군에 수군만 5만인 강대국 아닙니까?
병력이 흩어져 있어서 힘을 못 발휘해요? 핵심을 꼭 찍었네요. 필요한때 쓰지 못하는 군대가 군대입니까? 때리기도 좋게 해안에 성짓고 안나오고 짱박혀 있어도. 1만명(울산), 수천명선(순천)밖에 동원 못하는 한계 그걸 지적하는 겁니다. 군적에 백만이 있으면 뭐합니까. 필요할때 쓰지 못하는 100만대군인데. 일본은 교대해도 24시간 전쟁에 임하는 병력이 십수만이라니깐요. 진주성 2차싸움때 10만이 몰려가서 때리잖아요. 행주산성, 진주성 1차싸움을 봐도 3-4만을 동원하쟎습니까. 이게 군대지. 흩어져 있는 17만이 무슨 군대입니까? 장부에서 군적이나 뛰적이지 말고 실제 전사공부좀 하세요. 뭐가 똥인지 뭐가 된장인지 헷갈리시지 말고요
평시와 전시는 다르죠. 제가 말한것은 평시에 돌아가는 시스템을 말한 것이고 임란은 엄연히 전시입니다. 지금도 만약 전쟁이 나면 현재 현역만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전시가 되면 모두 소집이 됩니다. 임란 이듬해에 집계한 것은 전시 소집병력의 총계입니다. 그당시 소집을 홰봤더니 그만한 병력이 모였다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또하나 병력이 흩어져 있었다는 부분인데 그건 일본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1군에서 9군까지 한성에서 경남까지 분산주둔되어 있었습니다. 15만이 한대 모여 있던것이 아닙니다.
당시전투상황도 고니시의 1군이 경기일원에서 명나라 선봉군과 대치하고 있었고 함겅도 지역에선 정문부, 성윤문등이 가토의 2군과 경상도 지역에선 한효순, 김시민, 박진등 휘하의 관군들이 일본군 5 ,6, 9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쌍방이 마찬가지입니다.
훗 분명 계사년 충무공 장계에는 수군이 5만이었고 계사년 선조 실록에 나온 병력은 2만5천입니다만 충무공께서도 서류를 조작하신 겁니까??그리고 계사년은 1593년입니다 사실 저 숫자도 원래 조선수군보다 훨씬 적은 거고 갑자기 훨씬 후대 일인 칠천량해전(정확히는 춘원포에서 끝장났지만)이 나오는지?그리고 전사공부나 열심히하라는 말은 제가 하고 싶군요 가토의 경우 자기 군대 분산주둔 시켰다가 정문부에게 제대로 각개격파 당합니다 당시 류성룡은 이를 비웃었고요 이외에 일본군도 여러 요소에 병력을 분산배치하지만 점점 밀리면서 저렇게 뭉쳐졌죠
어허허허허; 항(상) 싸울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군대가 상비군이었군요. 공산주의가 관념론이라는 말이후로 최대의 개그를 들은듯 합니다.
@전략설계 실제로 17만 동원했는데 근거도 없이 유령군대 운운하는 병신이 여기있네..
뭐 벌써 10년 전 덧글이 덧글 다는것도 우습지만...
계사년에 동원현황 실록기록만 봐도 이런 이야기는 못할텐데.ㅋㅋㅋ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이시애의 난에 동원된 병사가 몇인지나 알고? 그리고 "이것이 조선의 군대입니다...즉 군역이 15만이라고 '조선이 15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 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라?? ^^정병과 봉족이 뭔지부터 알고나서 이야기합시다. <수정>
저... 죄송하지만 예의는 좀 지켜 주셨으면..........;;;;;
가끔 웃대나 디씨를 통해서 흘러 들어오신 분들이 보이는데. 디씨는 디씨고 쇼군카페는 쇼군 카페입니다. 특정 싸이트에서나 용납될법한 어투는 지양합시다. 특히나 자게판의 농담따먹기가 아닌 역게판의 감정싸움으로 번지기 쉬운 토론이라면 말이죠.(하지만 역게에서 가끔씩 선천적 개념결핍증 환자들을 보면 ;; 발끈해서 빈정거리는건 저도 어쩔수 없긴 하네요;;)
생각해보니 농병일치제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땅좁고 강하지않은 우리나라는 모든 국민들이 전투력을 가졌으면 좋겠다라는 저의 짧은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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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리플로 단 선조 26년의 기사입니다. ...전략... 또 평소 영남(嶺南)에 소속된 군병이 수군(水軍) 2만여 명을 제외하고도 잡색(雜色) 군사가 4만 명이나 됩니다. 난리가 난 이후 본도의 감사(監司)를 통하여 들으니, 조량병(助粮兵)·운량병(運粮兵)·기병(騎兵)·보병(步兵)으로 초발(抄發)되어 방어에 임하고 있는 자가 22만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Skald님의 추측하신것과 비슷할겁니다. 원래 병적상으로도 조선전체 병력 30만중에서 순수전투병은 16 ~ 17만정도였다고 합니다. 물론 개념을 더확대한다면 쫑알님의 말씀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임란무렵은 워낙 경황이 없다 보니........ 그건 우리뿐만아니라 어느나라 군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전상용씨의 오류는 바로 실록입니다. 실록=성경이 아니에요. 실록=진리가 아닙니다. 실록이 상세히 맞는 부분이 많지만, 조선전기-임란때는 군졸수를 부풀려서 군자금을 염출하려고 거짓보고 올린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군=징집가능한 농부들이에요... 몇몇 전투에서 이겼다고 하나,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록실록하면서 실록에만 매달리면서 다른 말을 안들으면 안되져.. 실록만 믿다보면 뭔가가 해명이 안되는 말도 많습니다. 실록은 우수한 자료이지만, 단순히 수치만 나열한 것으로 모든 싸움이나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말이죠... 종합선물세트에요...
인구수에 대한 자료, 당시의 외교문서자료, 심지어 장군들이 집에 보내고 받은 편지에서도 사료를 수집하여 작성한 것이 더 맞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사정을 참작하여 종합으로 논문을 써도 시원찮은 판에, 실록딸랑 하나만 들고는 "이거봐봐 맞잖아?" 이러면 말이 안되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전사전사 하는데, 국방대학원다니는 분이 아니시면 어차피 다 아마춰에요... 그러니 그런 말은 불필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전사로 따지면 기똥차게 꿰는 분들 많아요. 허나 다 아마춰입니다. 그리고 수치의 단순대입은 오류가 많이 나올 행위랍니다.. 공무원들 탁상행정이랑 같은 거에요...
학계에서도 조선시대 인구에 대허서는 확신을 못합니다 임진왜란 이전 인구를 1000만 정도로 잡는 경우도 있고(EBS국사에 나오더군요)같은 세기에도 인구가 법정통계로는 800만이고 학계에서는 최고 1600만까지 왔다갔다합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지금 이곳 분들과 저는 실록 말고도 충무공 장계와 류성룡의 시무차자 등 여러가지 사료를 ?는데요 왜 그런 기록들은 무시하는지 모르겠군요 ㅡ.ㅡ;;(분명이 이것 외에도 쇄미록과 정만록 등도 나왔던 걸로 기억하고요)
무시 안했는데요. 병력수에서 전투병력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 안된다라는 논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참고로 인구통계가 불명확하므로 동원된 병력이외에 조세자료, 기타 자료등을 합산하여 봐야 어느정도 윤곽이 잡힙니다.. 그런데 줄기차게 실록만 들이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전에도 이야기 했었죠? 전상용씨가 군대를 갔다 왔다면 이해가 갈 겁니다. 60만 대한민국 군대가 전원 전투병이 아니에요..... 충무공 장계도 그렇습니다.. 장계내용상 군대의 숫자를 당시에 타고 다니던 선박의 정원이랑 대입시켜 보세요... 말이 안되는 수치의 군선이 나온답니다.. 이거 논문이나 보세요.에혀
좀 자료많은 도서관에 가셔서 정식으로 공부하고 낸 논문들을 보시고 오면 조선기병군단 10만이라는 이야기가 말이 안된다는 것정도는 이해가 갈 겁니다. 실록에만 철썩같이 매달리는 것을 보고 다른 사료도 보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에요.. 실록도 말입니다..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상당수의 진실과 구라가 공존하는 자료입니다. 세조실록만 봐도 답이 나옵니다. 확인되지 않은(그럴 만한 사료가 없는 사건)그런 일까지 감안하면 상당수의 오류가 나온다 이거에요.. 후세에 쪽팔리게 안비출라고 허위과장해서 올려놓은 사건도 빈번합니다. 황희정승에 대한 것이 대표적이죠...
풋 그래서 다른 기록에서도 그와 비슷한 병력 내지는 더 많은 병력이 나옵니까??그리고 말입니다 수군이라고 해서 배에만 타는 인원만 나오는줄 아십니까 수영 죄다 비워놓고 다 싸우러 떠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리고 교대 인원 같은 것도 있는데다 수군이 육전한 기록도 자주 있습니다만??역사라는 것은 원사료를 보고서 하는 거지 논문만 보고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군이야기는 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논외로 하죠.
그리고 저도 대한민국 60만군대가 죄다 전투병이 아니라는 것인 알고 있습니다 기본중의 기본이니까 ㅡ.ㅡ;;;그래서 저 172400명중 비전투 관련 병과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고요 하지만 군마라고 써 있는 것과 다른 기록을 보면 저 병력도 전원 동원한 것도 아니고 비전투병력이 죄다 기록되 있지 않은 것은 알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충무공 장계 이야기를 꺼내는 거구요 그리고 현대 방식으로 인구대비 군사수 얼마 모을수 있다는 것이 과거에도 통할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때 당시는 지금과 동원 방식도 다르니까 그리고 비전투 병력중에 가끔가다 여자들도 나옵니다
말이라는 것이 100필이면 병력이 100이 아닙니다... 예비군마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말이라는 동물이 의외로 섬세해서 너무 지치게 하면 탈진해서 죽게됩니다. 그래서 수시로 말의 피로도를 봐가면서 말을 바꿔줘야 합니다. 보통 1인 기마당 2~3필 정도 필요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기마당 보인이 몇씩 붙는데 이게 또 죄다 전투병이냐..아닙니다. 물론 불리해지면 창과 칼을 들겠죠? 허나 기본적인 일은 기병의 보조입니다. 이외에 별개의 보병들이 있었고요. 따라서 10만 기병군단이라는 말은 어패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료를 원사료를 보고 제꼴리는대로 해석 내놓는 사람이 하나둘인가요??^^
따라서 원문도 보아야 하지만, 관련 논문으로 상당히 다양한 의견을 보고 자신이 직접 찾지 못하는 부분도 보아야 논문이 되는 겁니다. 논문을 자신의 생각을 쓰는 것이라고 여기나요??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한문이라는 것은 상당히 해석하기에 따라서 말 바꾸기가 쉬운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문장도 주석이 여러개가 나오곤 하죠. 더구나 고대나 중세의 사료를 지금의 데이타 보듯이 보면 안됩니다. "비류직하 수천척"이라고 하여 가보니 쫄쫄 샘물이 흘러내리는 폭포를 묘사한 구절도 많습니다. 뭐 삼국지에서 적벽에 조조가 80만 대군을 모았다는 것이 자치통감에도 있는데, 이를 믿을 사람 있나요?? 그러니 논문을 봐야 합니다....
왜 리플이 2~3달뒤에 달려있는지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