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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봉화인문학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초동
들락날락 내성장, 흥청망청 내성장
초 동 예로부터 봉화군은 산간지역에 위치하여 교통 및 통신이 뒤져 지방상업도 농산물도 화폐를 대신하여 물물교환으로 거래가 이뤄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시일(장날)이 들어서게 된다.
봉화군내 고대 시장은 현 봉화읍의 내성장과 법전면의 장동장 그리고 재산면의 재산장이 섰다. 그 후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춘양면의 서벽장과 물야면의 후평장이 서게 되고 이어 춘양장도 서게 된다. 그 중에도 내성장은 경북 북부지방에서 유명하였고 내성(봉화), 예천, 영주(영천)현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금·은의 광물과 가재용 춘양목, 마포 견직물이 집약적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또 동해안으로부터 수입되는 어패류와 소금 등이 옛날에는 울진,영덕으로부터 들여와 내성장에서 집산되었기 때문에 선질꾼(장사꾼)들의 내왕이 번성하여 "들랑날랑(들락날락) 내성장"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한다. 이 지방의 유일한 공업으로 옹기점, 무쇠점, 투구(마투)점과 유기(성기) 점 등의 공업과 가내 수직 공업을 들 수 있다. 수직업은 안방에서 부녀자들이 부업으로 하는 삼베, 무명, 명주 등 세 종류가 있어 농가에는 가가호호 베틀과 물레가 있어 연중 길쌈을 해왔다.
옹기는 춘양의 사기점 외에 내성현 북 20리의 사기점과 가이동(현 해저3리)에 독점(陶店)이 있었다. '그 외 조선팔도에 이름이 났던 내성의 놋점(유기)이 지금의 봉화읍 삼계리 신흥부락에 성행 국내 생산량의 1/3이상을 이 마을에서 생산 충당되었다. 원래 놋그릇 공장은 지금의 삼계서원 건너편에 있다가 신흥리로 옮겨갔다. 이같이 내성 유기산업의 번성은 개가 돈을 물고 다닐 정도로 아주 경기가 좋아 흥청거렸다 하여 "흥청망청 내성장"이라는 유행어를 낳기도 했다.
당시 내성장에서 울진군 북면 흥구장(부구장)을 오가는 내성,울진 행상은 지금으로부터 100 여 년 전부터 무거운 지게 짐을 지고 험준한 12령(嶺, 열 두 고개) 고갯길을 힘들게 넘나들며 장사를 했다. 봉화군과 물물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던 동해안의 울진 영덕 등을 오가는 부보상(선질꾼, 보따리상)들은 2, 7일 장인 울진장과 3, 8일 장인 흥구장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 간어물 미역 등을 구매, 쪽지게에 지고 12령을 넘어 내성으로 들어와 내성장, 춘양장, 장동장, 재산장 등에서 잡화와 약품 양곡 및 포목 등을 물물 교환하여 되돌아가곤 했다.
이렇게 내성의 큰 장에서 물품을 교환 울진으로 돌아가는데 대체로 열흘 이상이나 걸리는 고생의 길이었다. 그래서 내성장을 오가는 행상들은 '오나가나 바지게 한 평생 바지게 인생'으로 이 고갯길을 넘나드는 어려움을 가사로 엮어 부르며 시름을 달래기도 했다.
[경북 일보 경북 칼럼 9.25 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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