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군의 자랑이었던 HMS 후드 호가 2문의 38㎝(15인치) 회전포탑의 위용을 뽐내며 기동하고 있다. 책미래 제공
약한 보호 장갑 등 결함 속도 더욱 줄어
15차 사격에 치명타 폭발과 함께 사라져
여전히 약한 보호 장갑과 기계적 결함 때문에 최고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수리 작업 후 후드 호의 최고 속도는 시속 46㎞로 1920년 시험 항해 당시 최고 속도였던 시속 59㎞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하지만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후드 호는 영국 본토 함대의 전투 순양함 함단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1940년 프랑스 함락 후 후드 호는 지중해의 포슈 H 함대에 소속돼 알제리 오랑에서 프랑스 함대의 일부에 큰 타격을 가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가 수리 작업을 마친 후 스캐퍼 플로 기지에 있던 본토 함대에 다시 합류했다. 그리고 랜슬럿 홀랜드 제독의 지휘 아래 1941년 5월 22일 후드 호는 새롭게 진수된 전함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와 함께 독일의 비스마르크 전함을 상대하기 위해 기지를 떠났다. 5월 18일 비스마르크 호는 권터 뤼첸스 제독의 지휘 아래 발틱 해에 있는 기드니아 항에서 중순양함인 프린츠 오이겐 호와 함께 영국 수송전단을 공격하기 위해 출항했다.
후드 호가 8문의 38㎝(15인치) 주포와 12문의 15㎝(5.9인치) 부포로 무장하고 4만2500톤의 배수량, 그리고 54㎞의 최고 속도를 갖고 있었지만 상대해야 할 독일의 비스마르크 호는 당시 물 위에 떠다니는 가장 무시무시한 전함이었다.
영국 해군의 전함 중에서 비스마르크 호보다 빠르거나 비스마르크 호를 격침할만한 전함은 없었다. 게다가 당시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전투기의 잠재력에 대해 영국 해군은 반신반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존 토베이 제독이 총지휘를 맡고 있던 본토 함대에 항공모함을 편제시켜 후속 함단으로 대기시키고 비스마르크 호를 상대하는 함단에는 항공모함을 포함하지 않았다.
5월 24일 오전 5시 35분 덴마크 해협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노포크 호로부터 독일 함대가 그린란드의 남서쪽으로 가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영국 함대는 독일 함대를 따라잡기 위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거센 파도를 헤치며 전속력으로 기동하는 탓에 주요 거리 측정계가 먹통이 됐다. 게다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의 포격 레이더는 런던에 있는 해군성으로 적의 움직임을 보고하는 고출력 무전기 때문에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잠시 후인 오전 5시 53분 독일과 영국의 전함들은 23㎞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 사격을 개시했다. 불행하게도 후드 호는 프린츠 오이겐 호에서 발사한 포탄에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한 발의 직격탄으로 인해 영국 함대는 활용할 수 있는 화력의 절반을 잃어버렸지만 비스마르크 호는 반쪽짜리 상대와 전투를 벌일 수 있게 됐다.
후드 호와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의 첫 번째 일제 사격이 비스마르크 호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한 반면 비스마르크 호는 2, 3차 사격으로 후드 호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홀랜드 제독은 후드 호에 항구로 철수할 것을 지시했지만, 그 순간 비스마르크 호의 15차 사격이 치명타를 날렸고 후드 호는 엄청난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그 결과 1419명의 승조원 중 단 3명 만이 생존했다. 후드 호 침몰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었는 지는 지금까지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는 7차례의 타격을 받고 철수했으며 비스마르크 호 역시 2차례의 타격을 받고 연료탱크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독일의 뤼첸스 제독은 더 이상 비스마르크 호가 기함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작전을 모두 포기한 채 프랑스로 뱃머리를 돌렸지만, 하루 뒤인 5월 25일 영국 본토 함대의 공격에 의해 비스마르크 호 역시 최후를 맞고 말았다. 단 이틀 동안 한 시대를 대표한 영국과 독일의 전함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배수량 4만6680톤, 전장 262m인 영국 해군 소속의 전투 순양함 HMS(Her Majesty's Ship) 후드 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이었다. 후드 호는 1차 세계대전 종전을 몇 개월 남긴 1918년 8월 22일 진수됨에 따라 1차 대전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후드 호는 1차 대전 중 최대 해전으로 꼽히는 1916년 유틀란트 해전에서 3척의 영국 전투 순양함이 격침당하면서 그때 발견된 약점들을 보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런 보강 작업에도 1930년대 중반까지 미국이나 독일의 주력함들에 비해 보호 장갑이 더 약하다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후드 호의 재건조 계획은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웅장한 크기, 아름다운 선형이 후드 호가 갖고 있던 심각한 결점을 덮어 왔지만 1941년 1월부터 3월 사이 이뤄졌던 후드 호의 마지막 수리 작업 때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고쳐지지 못했다. ■ 편집=손병식 기자
정리=김가영 기자
자료=‘2차 세계대전 시크릿 100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