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루카 21,29-33
나의 장례를 어떻게 미리 준비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은 마지막 심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설명하신 이 모든 일이 순차적으로 다 일어나게 된다는 뜻으로 자연의 변화를 예로 들었습니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넘으면 가을, 겨울로 간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조금 황당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2-33)
이게 무슨 뜻일까요? 지금까지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더니 한 세대 안에서 다 일어난다고 하십니다.
저도 이것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는데 지금까지 말씀하신 종말의 내용이 각자의 죽음에도 적용이 된다는 것으로밖에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제가 부임한 본당은 연령대가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장례도 많이 납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여름에 부임하고 나서 스무 분 정도는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말씀드리기 매우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많이 돌아가셨는데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한 것은
한 분밖에 안 계셨습니다.
제가 부임한 이후 코로나가 있어도 성당에서 장례가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편의상 부모의 장례미사를 빈소에서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전 아무리 그래도 평생 다니던 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하고 신자들에게 기도를 받고 가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인들도 그러한 생각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모습이 있을까요? 돌아가신 분들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리고 코로나의 영향도 크겠지만, 어쩌면 한 번도 자녀들에게 당신의 장례미사는 꼭 성당에서 하라고 자녀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리 장례미사가 번거롭기는 해도 부모가 남긴 유언을 자녀들은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냉담하는 자녀들도 성당에 나와 미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데 그 한마디 말씀을 안 하고 가신 것입니다.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무언가를 할 때 잘 되는 일이 있을까요? 시험공부를 안 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요?
연습을 전혀 안 하고 운동하면 잘 될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죽음이 쓸쓸하게 되는 이유는 준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서대로 오듯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순서대로 좋은 장례가 되게 하는 법은 무엇일까요?
몇 번 말씀을 드렸지만, 제가 본 가장 위대한 장례미사는 이태리 마체라타 교구의 톨렌티노 본당에서 한 장례미사입니다.
3개월 암 선고를 받고 3년을 사시며 돌아가신 한 자매님의 장례미사였습니다.
성당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장례미사는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3년 동안 자신의 장례미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장례식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의 지표가 됩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가 죽을 때 우리는 웃고 모든 이가 울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의 장례미사는 자녀들이 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가 없다면 자녀와 같은 사람들을 만들면 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게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힘만으로는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가 준 명령, 곧 생존의 명령을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편영화 ‘아바리야’(Avarya)는 이러한 내용입니다.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로봇과 함께 우주를 배회하는 한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지구가 멸망하자 이 노인은 자신의 로봇에게 자신이 살 지구와 가장 비슷한 행성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노인은 지쳐있습니다.
이제 지구와 같은 행성을 찾는 일을 멈추고 그만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총으로 자살합니다.
하지만 로봇은 그것까지도 계획해 놓았습니다. 주인이 죽으면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주인을 사이보그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로봇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해야 해서 주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죽어도 계속 살려냅니다.
그렇게 영원히 우주를 떠도는 신세가 됩니다.
자녀가 우리에게 받는 명령은 그저 생존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그 본성상 누군가를 위해 죽는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로봇을 자녀로 보았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받은 명령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모에게는 지옥이 됩니다.
같은 피조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을까요? 십계명의 네 번째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라는 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인데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지 않으면 사랑은 실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녀가 신앙을 잃으면 부모에게 효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부모에게 소홀히 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장례에 충실히 하려고 하지만 결국엔 본성이 드러나고 맙니다.
우리가 신앙을 잃어갈수록 노인들은 대접을 못 받습니다.
자녀가 마치 모기처럼 돈만 알고 자기 편안함만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출산율이 최저이고 노인 빈곤율이 최고입니다.
그만큼 신앙교육이 안 되었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요행은 없습니다.
내가 효도를 받고 싶다면 자녀가 신앙인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집트에서 머물던 모세의 부모는 어떻게 효도를 받게 될까요?
자녀를 주님께 바침으로써 효도를 받게 됩니다.
모세가 그 생존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 자신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저는 저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매우 이기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는 부모님께 해야 할 의무를 최대한 다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비난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은 물론이요, 부모님과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가지려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아버지 장례미사에 그렇게 많은 신자가 와서 기도해 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러한 장례를 치르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저를 사제가 되게 허락하신 때부터 예정된 것입니다.
자녀에게 효도 받고 싶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만드십시오.
이웃 사랑의 첫 번째 계명이 십계명에 나옵니다. 첫 번째 이웃이 부모입니다.
그러니 신앙을 가졌다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무가 아닌 하느님께 대한 의무입니다.
왜 이러한 상황에서도 부모들은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보다 학원에 보낼까요?
부모의 마지막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마지막 때 부모의 영광은 자녀들의 신앙의 수준에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자녀 명령 시스템을 신앙으로 바꿔주십시오.
아니면 육체적 자녀가 아니더라도 신앙의 새로운 자녀들을 탄생시키십시오.
이것이 미래 나의 장례를 준비하는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루카 21,29-33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해야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특징 중 가장 우세한 것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백성들도 잘 이해할 정도로 쉽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다양한 비유나 예화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지역의 주변 환경과 자연 현상들도 자주 활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무화과나무도 포도나무와 더불어 근동 지방의 주요 나무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잎이 돋고 지는 것을 통해 종말,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역시 시골에 살면서 주변 자연 현상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실생활에 적극 활용하는 편입니다.
개구리가 합창하면 곧 비가 오겠구나, 하며 이런저런 대비를 합니다.
아침 해무가 자욱하면 날이 낮에는 햇빛이 창창하고 덥겠구나, 생각합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은 물고기들도 불안해져 입질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애써 출조를 하지 않습니다.
폭우가 내려 흙탕물이 바다로 유입되면 아무리 물때가 좋더라도 돌게나 골뱅이들이 모래 깊이깊이 숨어버리니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징조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치밀하게 관찰하고 대비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주님의 날에 대한 준비는 소홀한 저를 향한 예수님 말씀이 날카롭습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복음 21장 29~31절)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는 표징들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 삶을 다시 한번 정리정돈해야겠습니다.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해야겠습니다.
세속적인 것은 조금씩 줄이고, 천상의 것들, 정신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늘려가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을 갖추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루 온 종일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지나칠 정도로 엉뚱한 것들,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단 한치 눈앞의 이익이나 재미에
온 신경이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로 그때입니다>
2022. 11. 25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루카 21,29-33 (무화과나무의 교훈)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때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무엇이라도
해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때가
힘차게 한걸음
내딛어야 할 때입니다
끝 모를 절망이
밀려들 때가
새로운 희망을
품어야 할 때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