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고창신(法古創新), 예서의 기세로 그려낸 맑은 심상
정태수(한국서예사연구소장)
도헌 최현구 작가는 37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정년퇴직을 맞이한 지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의 겹을 쌓아가고 있다.
공직에 몸담았던 시절, 늘 격무에 시달리는 부서에 놓여있던 터라 출근해서는 업무에 몰두하고 퇴근 후에는 이런저런 모임에 치여 마음 편히 붓을 잡을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다 간부 직위에 오르며 늘 가슴 한구석에 품어두었던 서예의 길로 마침내 눈을 돌리게 되었다.
퇴직을 17년 앞둔 2001년 2월, 그는 퇴근길 발걸음을 시습당서화실(원장 도암 김균진)로 향했다. 그곳에서 서법을 익히기 시작한 그는 틈이 날 때마다 문인화와 다채로운 서체를 접하며 여러 스승의 가르침을 깊이 흡수했다.
이어 퇴직을 2년 앞둔 2016년에는 개인 연구실인 ‘진천서화실’을 열었고, 지금까지 사반세기 세월에 이르는 시간을 온전히 한묵(翰墨)의 세계에 몰두해 왔다.
작가는 “그동안 서예를 정진하며 마음에 깊이 와닿은 문구들을 전통의 법도 안에서 나름대로 표현해 보았을 뿐”이라며 겸손을 내비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리숙한 듯하면서도 노련한 기운이 깊게 서려 있다. 마치 추사 김정희 선생의 말년작이 보여주듯, 서법의 정수에 깊이 들어갔다가 마침내 그 틀을 벗어나 탈법(脫法)의 경지에서 노니는 듯한 여유가 느껴진다.
그는 여러 서체 중에서도 특히 예서(隸書)에서 단단한 힘을 얻었으며, 그 기세를 다른 서체로 자연스럽게 확장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모든 서체에서 뼈대를 이루는 근본적인 힘은 예서 특유의 옹골찬 기운에서 비롯된다.
일찍이 위항(衛恒)은 『사체서세(四體書勢)』에서 예서의 필세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길고 짧은 마디가 서로 조화를 이루니, 모양은 달라도 서세(書勢)는 하나로 통한다. 붓을 들어 가볍게 움직이면 떨어져 있는 듯하나 끊어지지 않으며, 가느다란 물결과 짙은 점들이 그 사이에 한데 어우러진다.”
도헌 작가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골격이 바로 이와 같다. 필선은 가벼워 보이나 결코 기세가 끊어지지 않으며, 긴 획과 짧은 획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붓 끝이 느릿하고 중후하게 나아가기에, 그 궤적을 좇는 감상자의 호흡 또한 한없이 느긋하고 편안하게 이완된다.
다만, 행서와 초서를 펼쳐낼 때 조금 더 경쾌한 필세가 어우러진다면, 단조로운 속도감을 넘어선 완급조절의 묘미가 한층 깊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서여기인(書如其人)’, 글씨는 곧 그 사람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교양과 학식, 사상 같은 총체적 면모가 붓 끝을 통해 그대로 투영된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작가를 곁에서 지켜본 이라면 누구라도 타인을 배려하고 매사에 겸양을 실천하는 그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넉넉한 품성이 그의 글씨에 온전히 투영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지금처럼 자신의 맑은 심상을 붓 끝에 직조해 나간다면, 머지않아 서단에 자신만의 독자적인 일가(一家)를 이루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