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의학이 끝나고 오늘부터 시작하는 의료법규를 자체 휴강하고 산에 가기로 했다.
중국에 다녀온 피로가 약간 남아 있긴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꿈꾸어온 산행이고, 또 진솔이와는 아직 한번도 산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의료법규는 안 들어도 지장이 없지만, PBL은 꼭 들어야 했는데 마음놓고 산에 가라고 휴강이 되었다. 역시 난 재필형에게서 바톤을 물려받은 탄탄대로 pk∼
나는 어제 짐을 꾸려 집에 가져다 놓았기에, 오늘 터미널에서 바로 만나기로 하였다.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태진이 어머니가 태진이와 진솔이를 태우고 오셨다.
산행 때마다 김치와 여러 반찬을 정성껏 준비해 주시는 고마우신 분이다.
버스에서 잠이 들어 깨어보니, 화산면이다. 황토색 흙이 많은, 고구마로 유명한 화산면이다.
바깥으로는 햇볕이 찬란하고, 비닐하우스도 정갈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번에 중국에 같이 다녀온 분 중에 옥천면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각이 난다.
지금쯤 집에 계실까?
햇볕이 너무나 좋아서인지 해남은 참 살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동계 백두대간 종주할 때, 햇볕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추워서 괴로웠는데 해가 나면 얼마나 따뜻하던지......
반대로 바람은 너무나 무서운 자연현상이다.)
땅 끝에 도착하여 하차하니, 바로 앞에 매표소가 있는데 땅끝에서 목포, 광주 방면으로 나가는 버스표와 보길도 왕복 배표를 팔고 있다.
보길도 배표를 보니 예과 2학년 때, 친구랑 둘이서 땅끝에서부터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를 목표로 도보여행할 때가 생각이 났다. 강진 도암면 주유소에 들러 쉬고 있는데, 일하는 할아버지가 보길도도 안가보고 왔냐고 다시 돌아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너무너무 유머러스한 분이셨는데, 지금도 잘 계시는지 궁금하다.
땅 끝 기념탑으로 가서, 고글로 갈아 쓰고 사진 몇방을 찍었다.
여기는 땅 끝. 하지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급한 경사를 올라 전망대에 도착, 다시 주차장쪽으로 내려갔다.
여기에는 산지에 나온 것처럼(2003. 4 mountain) 수퍼마켓이 있고, 남자화장실 옆으로 길이 나 있다. 여기가 땅 끝 산행의 시작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땅 끝 기맥 종주의 시작일 수도.
오늘 야영 목적지인 도솔암에 물이 있다지만, 알 수 없는 일이라서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물을 가지고 가기로 했다. 수퍼에서 pet에 물을 채우고, 미안해서 생수 작은 거 두통을 샀다. 아주머니가 우리들을 보시더니 무전여행 하느냐고 물으시는데, 아직도 산행객과 여행객을 구별 못하시다니...... 그만큼 땅 끝 산행하는 사람이 없나보다.
화장실 입구에는 테마파트 안내판이 있고, 화장실 옆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쭉 이어가면 저 멀리 테마파크 간판이 산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일단 저기까지 가야한다.
산지에는 잡목이 많아 긴 팔을 입고, 장갑을 끼라고 적혀 있던데, 길은 뚜렷하게 잘 나있고, 걸음을 방해할만한 요소도 전혀 없다. 1년이 지난 시점이라 많이 뚫렸나보다.
테마파크까지 능선에는 쓰레기가 많이 널려 있다. 아이스크림 쓰레기가 많은 것으로 보아, 수퍼에서 사서 먹다가 길이 있어서 싸복싸복 걸어간 행락객들의 소행으로 추정이 된다.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쓰레기를 주워왔으면 주워왔지, 버리지는 않으니까.
테마파트에 도착하니 그 앞으로 도로가 지난다. 아까 땅 끝 가면서 지난 길이다.
길을 건너서 마루금을 이어가야 한다. 그런데 길을 건너서 올라가다가 묘지가 있는 곳까지 가면 안되고 바로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로 올라가야 한다.
도로를 건너 능선에 다시 오르니, 저 멀리 바위산이 보인다. 저 곳을 목표로 가면 되니, 지도와 나침반은 꼭 없어도 되겠다.
벌써 점심때가 되어 행동식으로 간단히 요기하고 쉬었다가 다시 출발.
태진이는 계속 쥐가 나는 것이 시험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나보다.
후배 앞에서 느낀 바가 있었을 것이다.
진솔이는 처음 종주 산행에 힘들텐데도, 전혀 처지지 않고 선두인 태진이를 잘 따라온다.
어제 packing 할 때도, 하나를 가르쳐 주면 금방 깨우치는 것이 대견하다.
산행하는 도중에 오른쪽을 보아도 바다, 왼쪽을 보아도 바다, 뒤로 돌아보아도 바다이다.
해남 땅 끝 부분이 반도에서 역삼각형 모양으로 삐져나와 있어서 가능한 풍경일 것이다.
날씨가 좋아 저 멀리 섬들도 눈에 들어온다. 때로는 아주 작은 것들조차 나도 섬이라고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이 정겹다.
이제 점점 사자봉 땅 끝 전망대가 멀어져 간다.
멀어져가는 만큼 우리는 북으로 올라간 것이다.
다시 한번 산을 짤라먹는 도로를 만났다. 여기서 도로 따라 올라가면 도솔봉 정상이다.
정상부에는 군 시설이 있어서 도로 끝 지점에서 도솔암에 가려면 표식기가 있는 두 길 중 아랫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배도 고프고, 해도 수평선을 향해 점점 기울고, 빨리 오늘의 휴식지에 도착했으면 하는 바람인데, 도솔암은 도무지 나오질 않는다. 도솔봉 가까이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서 더욱 멀게 느껴진다. 결국 20분을 더 가서야 암자를 발견했다. 그것도 몰래 숨어 있어서 하마터면 지나칠뻔 했는데, 진솔이가 용케 발견했다.
암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아무도 없다.
바위 능선이라 마땅히 야영 site가 나오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암자 앞에다 텐트를 치기로 했다. 마치 미리 알고 설계라도 한 것처럼 텐트하나 칠 공간이 나온다. 한쪽으로는 암자가 바람을 막아 주고, 반대쪽으로는 인공으로 쌓은 담이, 그리고 그 사이로는 자연 바위가 바람을 막아 주어, 다시없는 야영 site이다.
만일을 대비해서 텐트를 가져간 것인데, 오늘 산행하는 내내 해풍이 세게 불어서 비박하고 싶은 생각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이런 산행 하는데 비까지 겹치면 가혹한 날씨가 될 것 같다. 비가 오지 않더라고 wind jacket을 지참하는 것이 좋겠다.
텐트를 치고, 200m 아래에 있는 용담굴 용담샘에서 물을 보충해왔다.
출발할 때 떠온 물로 저녁과 아침을 먹을 수 있긴 하지만, 내일 운행할 때 마실 물도 필요하고 넉넉하게 차도 한잔씩 마실 요량으로 떠 온 것이다. 수량은 매우 풍부했지만, 부유물이 떠 있어서 좀 거리낌이 들었는데, 수건으로 거르고 끓여 마시면 아무 일 없을 것 같았다.
저녁은 참치김치찌개이다.
밥과 찌개, 김치가 전부이지만 태진이가 해준 찌개가 끝내준다.
알고보니 어머니로부터 조미료 쓰는 비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맛있게 밥을 먹는 도중, 해가 저 멀리 섬 너머로 지려고 한다.
수평선 아래로 지면 더 멋있으련만, 바닷가에까지 와서 산 너머로 지는 일몰을 보다니......
마치 바위를 일부러 쪼갠 듯, 그 사이로 지는 일몰은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다.
일몰 보고 잠시 멈추었던 식사를 마치고, 용담샘에서 떠온 물을 끓였다.
그리고 잠시 쉬면서 북극성이며, 북두칠성을 구경했는데, 순간 별똥별이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지금껏 산행하면서 일부러 보려고 해도 안보여주더니, 전혀 기대치 않게 보게 되었다. 그래서 너무 놀란 나머지 앗! 하는 순간 이미 사라져버려 소원을 빌 수 없었다.
다음에는 미리 소원을 준비하고 하늘을 봐야겠다.
흥분을 가라 앉히고 다시 텐트로 들어와 삼겹살을 구워 먹었는데 여기에 영양수가 빠질 수 없다.
화랑으로 입가심하고 설중매로 마무리했다.
아, 술 생각하니 다시 한잔 하고 싶은 심정이다.
산행반성 하면서는 아까 빽 한것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우리는 저 멀리 바위산을 목표로 능선을 걸어가고 있는데, 잠깐 다른 방향으로 틀어 내려 돌아갈 수 있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계속 내려간다면 의심을 해보아야 하고,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빽을 해야한다고. 대개 그런 경우는 마을로 하산하는 길이라고 일러 주었다.
다행히 금방 빽을 하면 힘을 덜 소비하지만, 한참 내려갔다가 돌아오려면 대원들 사기가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표식기도 무조건 맹신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처음 가는 산에서 빽할 일이 없이 잘 찾아간다면 잘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빽을 했다고 해서 잘못되거나 모자란 산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빽을 해야할 상황에서 빽을 하지 않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산행 경험이 쌓여감에 따라 태진이의 산행 능력이 늘어가는 것 같아 든든하다.
고기를 다 먹고, 바보게임, 뻔데기 게임 등을 하다가 11시경에 잠이 들었다.
태진이는 원래 게임 잘한다고 하는데, 오늘보니 완전 구멍이다. 벌칙으로 팔굽혀펴기를 100번 가까이 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밥먹으라고 깨운다. 이 때가 다섯시 반.
별로 생각은 없지만 갈 길이 있으니 먹어둬야 한다.
어제 남겨둔 밥에다가 북어국을 끓여서 먹었다.
밥을 먹고, 텐트를 걷는 동안 밖에서 찻물을 끓였다.
아침 날씨가 전혀 춥지 않고, 마치 좋다.
사위는 이제 제법 밝아졌다.
다행히 지나간 사람이 없어서 들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좀 걸린다.
그만큼 지나간 흔적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치워야겠지.
6시 반에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밀어내기' 하느라고 좀 늦어졌다. 50분에 출발.
떡봉에서 달마산 주봉인 불썬봉까지는 바위 능선이라고 한다.
여기서 떡봉은 약 1시간 정도 가야한다.
오늘 우리가 갈 길이 산지에는 5시간 정도 걸린다고 되어있다. 늦어지지 않는다면 12시 이전에 도착할 것이다.
예상대로, 군데군데 바위가 나오고, 대개 우회로가 나 있지만, 어떤 것은 넘어가야 한다.
어렵거나 힘든 릿지가 아니라서 오히려 그냥 걷기만 하는 종주산행의 지루함을 날려 버리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달마산 주봉이 가까워질수록 바위가 많아짐을 느낀다.
아침을 적지 않게 먹었지만, 3시간도 안되어 꺼져버렸다.
밥이 밤새 딱딱해져서 물 붓고 끓여 먹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간식도 이틀 동안 소세지 2개뿐이라서, 더더욱 배고프다.
그러고보면 사람은 참 단순한 생물이다.
들어가야할 때 넣어주지 않으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그리고 푸지게 먹고 나면 속에서 웃는 것이.
불썬봉이 손 앞에 잡힐 때,(사실 여기서 한시간은 족히 더 가야 했다) 단체 산행객을 만났다. 미황사에서 달마산 불썬봉으로 올라 도솔봉까지 간다고 했다. 도솔봉까지는 도로가 나 있어 차가 pick up 하기 좋아서일 것이다. 시간상으로도 5시간 정도 걸리니 마치 적당하고.
산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과연 좋은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
잠시 길을 잃었나 생각이 들 때 길은 바위를 따라 계속 이어지고, 드디어 불썬봉에 도착하였다. 정상부가 널찌막하고 조망도 좋아서, 여러명이 와서 쉬어가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또한 정상에는 봉화대가 있고 불썬봉이라 적힌 정상석이 있다. 원래 불선봉이었을진대, 어떤 연유로 불썬봉이 되었을지 궁금하다.
미황사에서 불썬봉까지만 왕복하는 등산객들이 제법 되었다.
우리는 땅 끝에서 이 곳까지 와서, 이제 미황사로 내려가야 하지만, 언젠가는 마루금을 계속 이어, 저 멀리 대둔산 그리고 더 나아가 땅 끝 기맥을 모두 종주해보리라.
미황사에 내려가는 길은 길 중간에 잘려진 나무 밑둥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어둡거나 흐린 날에, 또는 시력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산하는데 위험할 것 같았다.
조심하지 않으면 날이 밝은 날, 정상인도 어느 하나에는 걸려 넘어질 가능성이 커보였다.
진솔이는 원래 오른 발목이 좀 안좋은데, 내려오다가 삐끗했고, 태진이도 한 번 걸려서 넘어질 뻔 하였지만, 산이 길러준 순발력으로 극복했다.
20분 정도 내려오니 미황사 주차장이다. 원래 라면을 끓여 먹고 1시 30분에 미황사에서 나가는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불썬봉에서 만난 아저씨가--겉보기 등급은 할아버지이지만, 정력으로 보아 아저씨--강진까지 태워주신다고 해서 그 차를 타고 나가기로 했다.
한 눈에 보아도 베테랑임을 알 수 있었는데, 강진까지 오는 동안 강진의 명산을 추천해 주셨다.
1. 두륜산 약수터에서 주작산, 덕룡산 지나 중학교로 하산하는 코스
2. 석문산에서 백련사, 다산초당을 품은 만덕산 산행
3. 장흥과 경계에 있는 병영의 수인산(장흥 유치댐이 생기면 경치가 멋있을 것이라 하심)
4. 두륜산에서 투구봉(지도상에는 위봉으로 표시된 것 같음) 거쳐 주유소로 하산
완벽하게 준비해서 잘 아는 산을 가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산을 가는 것도 설레이고 재미있을 것 같다. 다음에 혹 가게 된다면 터미널 맞은편 2층에 있는 강진군 산악회에서 자문을 얻는 것도 좋겠다.
차편상 미황사를 좀더 둘러보지 못하고, 계획했던 점심을 해먹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훌륭한 야영지와 일몰, 일출, 별똥별, 맑은 날씨와 바다, 섬, 바위,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람과의 만남이 있어 즐거운 기억으로 간직될 것이다.
사람이 없는 산은 반쪽일 수 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다시 읽어보니 그 기억이 또 새로워요. ^^ 그 아저씨가 우리보고 고등학생이라고 해서 나도 그 아저씨 되게 젊어보이던데. 겉보기등급은 할아버지라니요 ㅎㅎ 그 아저씨가 이야기하실때 잠을 자버려서 죄송하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