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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출감일
1955년 10월 4일
대한민국 서울 서대문형무소
西大門刑務所 出監日
1955年 10月 4日
大韓民国 ソウル・西大門刑務所
True Father’s Release from Seodaemun Prison
October 4, 1955
Seodaemun Prison, Seoul, South Korea
◙ 섭리사적 현시점 ◙
1979.10.26
한국 본부교회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여 출발해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운명인데 기독교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등할 수 있는 교단을 재차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니 기독교 2세들, 기독교에서 쫓겨난 2세들을 모아 기반을 닦아 가지고 고생을 시키면서 역사적인 모든 것을 탕감 짓고, 즉 개인적인 담을 헐고, 종족적인 담을 헐고, 민족적인 담을 헐면서 기독교가 세계사적 기준을 중심 삼은 모든 것을 못 함으로써 전부 다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대치할 수 있는 영적이요, 육적인 기반에 있어서 희생의 대가를 통일교회는 치러야 돼요. (105-252~253)
摂理史的現時点
1979.10.26
韓国本部教会
キリスト教を基盤として出発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が統一教会の運命ですが、キリスト教を失ってしまったので、キリスト教に対等になることのできる教団をもう一度作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すから、キリスト教二世達、キリスト教から追い出された二世たちを集めて基盤を整えて苦労させながら、歴史的なものをすべて蕩減し、すなわち、個人的な塀を取り壊し、氏族的な塀を取り壊しながら、民族的な垣根を取り壊し、キリスト教が世界史的な基準を中心とした、すべてをできなかったことにより、すべて怨讐となったために、これに対峙することのできる霊的であり、肉的な基盤において、統一教会は犠牲の代価を払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 (105-252~253)
It was my destiny to start on the foundation of Christianity, but because Christianity rejected me, I had to establish a church that was on an equal level with Christianity. This is the Unification Church. Those who established the foundation of this church through hardships were those second generation students who were chased out by the first generation Christians. These students of the second generation had to go out and suffer and indemnify everything in history. Because Christianity could not fulfill its responsibility centering on the standard of saving the world, the Christians all became the enemies of this new church. Hence, even though the Christians were to break down the walls of the individual, family, tribe and people, the Unification Church had to offer the sacrificial price to build the spiritual and physical foundation on a par with what had been lost. (105-252~253) (October 26, 1979 The former Cheongpa-Dong Headquarters Church, Seoul, South Korea)
1955년 10월 4일 참아버님께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감하셨다.
1955年 10月4日、真のお父様は西大門刑務所から出監された。
True Father was released from Seodaemun Prison on October 4, 1955.
당시 기독교 재단 학교인 이화여자대학교를 중심으로 통일교회의 새로운 말씀이 전파되자 위기감을 느낀 기독교계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핍박을 시작했다.
当時、キリスト教財団学校であった梨花女子大学校を中心に統一教会の新たなみ言が伝播されると、危機感を感じたキリスト教界はあらゆる方法を動員して迫害を始めた。
At that time, the u11ification chu1·ch was persecuted by the Christians. When the unification church's new testimony was come up, the representative Christians: Ewha Woman's University took action against the unificationists.
그들은 80여통의 투서로 인해 1955년 7월 4일 결국 참아버님께서는 병역법 및 징발특별조치령 위반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셨다.
彼らは80通余りの投書によって1955年 7月4日、結局真のお父様は兵役法および徴発特別措置令違反の疑いで警察に連行された。
The Christian members sent the over eighty's anonymous letter to the police. It was about the unificationists. Because of this, True Father was arrested on charges of avoiding the draft and thus violating the military service law.
그러나 병역법 위반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어 10월 4일 결심공판에서 무죄가 선고되고 3개월 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하셨다.
しかし、兵役法の違反事実を認めるだけの証拠がなかったため、10月4日の結審公判で無罪が言い渡され、3ヵ月ぶりに西大門刑務所から出監された。
However, there was no any evidence of True Father's avoiding the draft and thus violating the military service law. Therefore, on October 4, 1955, True Father was found innocent and released by the Seoul District Court.
서대문형무소 수난은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사주와 부정적 여론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이 벌인 종교탄압이었다.
西大門刑務所の受難は、一部のキリスト教指導者たちの使嗾と否定的な世論を背にした、李承晩政権が行った宗教弾圧であった。
We can view that ordeal as religious persecution because the government of Syngman Rhee was incited by some Christian leaders and negative publicity.
이 사건으로 비롯된 잘못된 소문과 사회적 비난으로 기독교 기반을 배경으로 확대되어야 할 섭리는 매우 큰 타격을 입고 통일교회는 다시 광야 노정을 거쳐야 했다.
この事件を始めとした誤った噂と社会的非難により、キリスト教基盤を背景に拡大すべき摂理は非常に大きな打撃を受け、統一教会は再び荒野路程を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The consequence of that incarceration was that the Unification Church lost the God-given opportunity to launch the worldwide providence on the foundation of Christianity in the Republic of Korea. Instead, it had to once again face a wilderness course.
그러나 참아버님과 식구들은 피어린 기도정성으로 내부 결속을 다지고 새 출발의 때를 준비했다.
しかし、真のお父様と食口たちは、血の滲む祈祷精誠により内部の結束を固め、 新たな出発の時を準備した。
However, True Father was waiting the time for the new starting by strengthen the members' solidarity. The church members also offered the prayer devotion for the new starting.
새 출발의 일환으로 참아버님 출감 이후 3일만인 10월 7일, 본부교회를 장충동에서 용산구 청파동 1가 71-3번지로 옮겼다.
新しい出発の一環として、真のお父様の出監以降、3日目となる10月7日、本部教会奨忠洞から龍山区青波洞1街71-3番地に移った。
As the part of a new starting, On October 7, 1955, right after True Father was released from Seodaemun Prison, the Unification Headquarters Church moved to 71-3, Cheongpa-dong 1-ga, Yongsan-gu, Seoul.
| 참부모님 생애노정 - 3권 통일교 창립과 섭리 재출발 제3절 서대문 형무소 수난 7.4사건 1955.7.4.~10.4. 5. 서대문 형무소 출감 1955.10.4. 무죄(無罪) 언도 석방 7·4사건이라든가 이런 사건을 중심삼고 선생님이 형무소에 출입을 하고 세상에서는 전부 다 ‘문 아무개 시대는 지나갔다’이렇게 생각했다구요. 한국 역사에 있어서 비운의 사나이로서 사라질 줄 알았던 문 아무개가 거기서 또 출발해 가지고 오늘날…. 그때 대한민국이 문 아무개를 때려잡고 밟아 치우려고 했고, 기성교회와 정부가 하나되어 별의별 짓을 다해 가지고 없애버리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공판정에서 무죄 석방을 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통일교회 역사는 시작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별의별 조사를 해봐야 아무것도 없으니 10월 4일을 중심삼고 무죄석방! 그리고 그 다음부터 또 시작하고 또 시작하고, 반대하는 것을 잘라 버리고 새로 출발하는 거라구요. 나라에서 문제시하던 점에 걸려 넘어갔다면 문제가 크다는 거예요. 10월 4일에 무죄석방을 받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 기반을 잃지 않고 영육을 중심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기독교와 나라가 반대함으로써 기반을 잃어버린 입장에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 자체, 선생님을 중심삼고 선생님 자체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물론 분립적인 입장에서 잃어버린 걸 전부 다 찾은 자리가 아닙니다. 이제 다시 찾아야 할 자리다 이거예요. 기독교가 영적 세계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에 이 영적 기반을 대신할 수 있는 기반을 선생님이 만들어야 됩니다. 기독교와 같은 기반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이것을 재편성하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이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국가적인 면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서 국가와 기독교가 하나돼 가지고 반대했던 기준을 탕감복귀해서 하나 만드느냐 하는 것이 탕감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는 조건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한 기준을 이루려니 영적 기준을 한 단계 전진하는 입장에서 닦아 나옴과 동시에 육적 기준을 짜나와야 됩니다. 영적 기반 위에 재림하는 것이 다시 기반을 닦기 위한 역사와 마찬가지인고로 그걸 일치시켜야 됩니다. 그러려면 통일교회는 수가 적지만 나라와 교회가 들이치더라도 밀려 나가서는 안 됩니다. 버티어 서서 완전히 이것을 넘어가야 됩니다. 옥중생활 극복과 승리 선생님 오는 길에 하나님이 환영하지 않았어요. 내버려둔 거예요. 협조해서는 안 되게 돼 있는 겁니다. 협조하는 날에는 기독교를 손대지 못해요. 기독교를 다시 구해 줄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그걸 아는 사람이예요. 나를 치면서라도 기독교를 보호해 나왔고, 나를 고생시키면서도 한국의 기독교를 키워 왔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호하는 날에는 기독교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거예요. 둘을 보호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 내버려 둔 겁니다. 핍박받아 가지고 본래의 자리까지 올라와야 돼요. 그러니 선생님의 생활은 감옥에 들어가서…. 감옥이 개인기반을 닦는 종적 기반이 되었다구요. 종적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지상지옥 위에 하나님의 종적 심정권을 남기기 위해서는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이 볼 때 제일 가까운 직단거리예요. 이 자리에 들어가서 개인적으로 승리해야 돼요. 개인적으로 몸 마음을 중심삼고, 고통을 부정하는 몸뚱이와 마음의 싸움이예요. 마음을 종적 기준에 맞추고, 몸을 횡적 기준 90각도에 맞춘 생활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사랑을 해야 돼요. 그 환경의 모든 것을 자기 형제와 같이 사랑하고, 자기 가정에서 하나님이 바라던 소원을 대표할 수 있는 가정 일원과 같이 옥중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자리를 대신한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개인적 십자가의 길을 가야 돼요. 개인적으로 국가의 십자가의 환경을 극복해야 돼요. 선생님이 만 석 달 만에 나올 때에는 소장도 과장도, 거기 있던 기성교회 목사도,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통일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 알지요? 가만히 보니까 소문과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간수들과 소장까지도 나와 배웅했고, 간수들 중에는 선생님을 따라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이 가는 길 앞에는 원수가 생겨나지만 반드시 그 길은 개척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적을 두고 볼 때, 아벨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야 됩니다. 어떠한 수난의 길을 가더라도 자기 혼자 간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어떠한 자리에서 결정하느냐?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자리에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자리란 어떠한 자리냐? 하나님과 일체된 자리인데,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기쁜 자리가 아니라 가장 슬픈 자리, 가장 어려운 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고자 하는 자리,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 하나님과 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감옥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탄도 싫어하는 인간지마人間之馬들이 모인 그 세계에서도 여느 인간들이 갖는 그 이상의 희망과 소망을 가지게 되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세계 역사는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사탄세계의 참소를 받지 않는 것이요, 또 높은 자리에 올라가더라도 간섭받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세계까지 연결될 수 있는 새출발의 기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선하다는 입장에서 맞는다고 억울해하지 말라구요.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방을 대표한 축복의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생활표준이예요. 한국이 야단하고, 1955년에 형무소살이하고 별의별 짓 다 했던 역사가 있지만, 그럴수록 점점 강해지는 거예요. 들어갈 때보다도 더 무장해 가지고 나왔습니다. 감옥이지만 그것이 선생님에게는 여행을 갔다 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코오스가 다를 뿐이었지요. 그 다음에는 보따리 끈으로 크게 묶어 해결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나님도 나한테는 무자비해요. 거꾸로 처박아 놓고 거기서 나올 때까지는 가르쳐 주지도 않고 보고만 있어요. 그래 거기서 나와 가지고 또 히히 웃고 기운을 내 가지고 또 부스럭부스럭 가게 되면 ‘어디 가노? 어디 가’ 그러면서 간섭을 하지요. 하나님은 참 능란한 분이예요. 무책임한 언론의 폐해 자유당 시절 형무소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의 신문을 보면 별의별 소문이 실려있어 참 재미있습니다. 이것은 억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우리의 황금 같은 보물입니다. 정의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피땀을 흘리고, 삼천만 민족을 위해서 밤을 새우고, 피를 팔아 가면서까지 이 민족을 구하려 했던 정의의 애국자들을 그들이 멋대로 때려잡고 가두었던 것입니다. 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그들의 후손을 잡아다가 그들의 무덤을 파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죄석방되었다는 말 들어 봤어요, 여러분들? 신문(경향신문 10월 5일자)에 찾아 보면 석 줄밖에 없어요. 문총재가 그런 감투가 씌워진 것을 뚫고 나오기에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는지 알아요? 그러면 전국적인 그 인상을 무엇으로 바꿔 주느냐 이거예요. 그러니 통일교회 선전을 했댔자 전부 다 반대하고, 그 소문을 뒤집어 엎고 그러면 전부 다…. 그래 가지고 법정문제가 되고, 싸움이 벌어져 가지고 경찰서에서 문제 되게 되면 ‘통일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다’ 한다구요. 그런데 모든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경찰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대번에 ‘뭐야, 이것들! 통일교인들이 매수했다’ 이런다구요. 그러므로 그 악선전된 환경여건을 끌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권내로 몰려들었다는 거예요. 그것이 높은 급에서는 교수, 대학가로부터, 모든 교회 책임자로부터 전부 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러한 목사들이, 그런 교파가 선생님의 친척이면 친척에게 ‘당신네 친척 되는 아무개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그저 하나, 둘, 만나는 사람마다 악선전을 했다구요. 자, 그러니 설명을 해도 설명이 통하나….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뒤집어 쓰고 그것을 벗을 때까지 세월을 통해 우리가 실적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벗는 단계까지 올라오는데는 수십년의 세월이 걸리더라 이거예요. 이러니 지금까지 떠든 모든 것을 내가 뒤집어 쓰고 말없이 살아왔어요, 말없이. 나는 소화하는데 그것이 비료가 돼요. 다 역사적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대한민국이 나한테 방송국의 마이크만 맡겨서 사흘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이 민족이 창자를 쥐고 배밀이 하며 통곡할 수 있는 일이 벌어져요. 세계가 믿지 않고는 돌아갈 길이 없다고 보는 것이 문총재의 결론입니다. 제자들의 의분심 하나님이 축복할 수 있고, 세계에 복지천국을 이룰 수 있는 좋은 다이아몬드 광맥 같은 걸 다 말아먹고, 시궁창에 몰아 넣고 발길로 쑤셔 넣어 버렸습니다. 목사들이 지금까지 치고 밟고 별의별 짓을 다 했습니다. 그렇지만 통일교회 문선생 이름으로 성명 낸 것을 봤어요?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 가지고 별의별 놀음을 당하고 무죄석방이 됐습니다. 그때에 우리 간부들이 모여 가지고 ‘선생님, 이제는 분해서 못 견디겠어요’하는 거예요. 그 옛날에 유협회장은 아주 뭐 성격이 무사태평이라구요. 그런 성격이 오죽했으면 ‘이놈들, 배때기를 째자’고 독한 소리를 했겠어요? 내가 말만 하면 배때기를 째는 거라구요. 살인까지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나 ‘야,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게 아니다. 치고 충돌해서 빼앗아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감동시켜 가지고 자연굴복시켜 나오는 법도가 아니냐’ 이래 가지고 지금까지 밟고 허물고 하는 데 내가 쫓겨 다녔습니다. 그때 유협회장이랑 간부들이 성명을 내고 반기를 들어 가지고 공세하려고 했는데, ‘야!…’ 공세를 누가 할 줄 몰라요? 개인적 시대예요. 개인적 투쟁시대예요. 가정시대를 거쳐 가지고 종족, 민족시대를 거쳐 넘어가야 돼요. 말보다도 사실이 필요하고, 변명보다도 실적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결과는 삼엄한 것이요 냉정한 것입니다. 옳으면 옳은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요, 나쁘면 나쁜 것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승리는 승리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형무소에 들어갈 때는 내가 부끄럽게 들어간 게 아니라 당당하게 들어갔지만, 나올 때 ‘이놈들! 내가 힘을 갖추어 가지고 한번 보자. 전부 복수한다’이런 기도를 안 했다구요. ‘아버지여! 웃고 찾아올 수 있게 해주소서’하고 기도했다구요. 이것이 하늘이 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런 길을 가는 사람은, 하늘은 언제나 보호한다구요. 이남 출감일과 100일 기념기간 1955.7.4.~1955.10.14. 통일교인이라면 10월 4일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날입니다. 한민족이 통일교회를 없애기 위해 핍박의 깃발을 들고 나서서 몰고 또 몰고 찌르면서 죽음길로 몰아넣었던 자리에서 해방되던 날입니다. 뜻을 알고 있는 사람들, 특히 그 중에서도 뜻을 안 젊은 사람들은 땅에 엎드려 통곡을 하며 기념해야 할 의미 깊은 날입니다. 오늘은 광명의 새아침이요, 해방의 새아침이었던 10월 4일이니까 오늘 날씨가 좋은 것 같군요. 10월이라는 달은 우리 통일교회에 있어서 해방의 달이요, 축복의 달이라는 것을 역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10월 4일입니다. 사람은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날들을 지낼 적마다 선생님은 언제나 내가 목적한 바대로 이루어 나가고 있느냐, 안 이루어 나가고 있느냐를 반성하게 됩니다. 선생님이 7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100일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옥중기도를 가지고 기도하라고 그랬지요? 심정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동지가 되어주길 바라는 뜻에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동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10월 14일까지 100일을 감옥에서 복역하는 것같이 살라고 한 것은 10월 4일 서대문 형무소 출감일과 10월 14일 흥남감옥 출감일을 특별히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
| 真の御父母様の生涯路程 3 統一教会創立と摂理の再出発 第三節 西大門刑務所の受難 七・四事件、一九五五・七・四~一〇・四 五 西大門刑務所出監(一九五五・一〇・四) 無罪の言い渡しと釈放 七・四事件の事件を中心として先生が刑務所に入ったので、世間ではみな「文なにがしの時代は過ぎ去った」と、そのように思ったのです。しかし韓国の歴史において、悲運の男として消えてしまうと思った文なにがしが、そこからまた出発したのです。 その時、文なにがしをひっ捕らえて、踏みつけて片づけてしまおうと、既成教会と政府が一つになってありとあらゆることをしたのです。しかし公判廷で無罪釈放となることにより、新しい統一教会の歴史は始まったのです。 あらゆる調査をしても何も出てこないので、十月四日に無罪釈放となりました。そして、そこからまた始めたのです。反対するものは切ってしまい、新しく出発するのです。 国が問題視した点に引っ掛かって倒れたとすれば、問題が大きいというのです。しかし十月四日に無罪釈放を受けたがゆえに、その基盤を失わずに、そこから霊肉を中心とした新しい出発をす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それでは、キリスト教と国が反対することによって、基盤を失った立場にあるので、統一教会自体、どのようになるのでしょうか。もちろん分立された立場から、失ったものをすべて取り戻したのではありません。今から、再び取り戻さなければならない立場だというのです。キリスト教が霊的世界の基盤を築いたので、その霊的基盤の代わりとなり得る基盤を、先生が築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キリスト教のような基盤をもた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のです。それで再びこれを再編成するのが統一教会です。 統一教会を中心として、国家的にどのような影響を及ぼし、国家とキリスト教が一丸となって反対したことを蕩減復帰し、いかにそれらを一つにまとめるのかということが、蕩減できる基準を立てる条件となるというのです。そうした基準を成そうとすれば、霊的基準を一段階前進させた立場で築いていくと同時に、肉的基準を立て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霊的基盤の上に再臨するために、それを一致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しようとすれば、統一教会は数は少ないですが、国と教会が強く打ってきたとしても、退いてはなりません。踏ん張って立ち、完全にこれを越え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獄中生活の克服と勝利 先生が歩んでくる道において、神様は歓迎されなかったのです。見捨てておかれたのです。協助してはいけないようになっていたのです。協助してしまえば、もうキリスト教には手をつけられないのです。キリスト教を再び救う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のです。私はそれを知っていたのです。だから神様は私を打ってでもキリスト教を保護してきたし、私に苦労をさせながらでも韓国のキリスト教を育ててきたというのです。私を保護してしまえばその時点で、キリスト教を保護できないのです。それで、そのままほっておかれたのです。そして迫害を受けながら、本来の位置まで上がってこ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だから先生の生活は、監獄が個人基盤を築く、縦的基盤になったのです。地上地獄の上に、縦的な神様の愛を中心として、神様の縦的心情圏を残すためには、刑務所に入っていくのが神様から見る時、一番近い最短距離です。その立場に入っていき個人的に勝利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苦痛を否定する体と心の闘いです。 心を縦的基準に合わせ、体を横的基準の九〇度に合わせた生活圏をもた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そうしてから愛さなくてはなりません。その環境のすべてのものを、自分の兄弟のように愛し、神様が望んだ願いを代表できる家族の一員のようにして、獄中生活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それゆえに、父母の立場を代身した文先生という人は、個人的十字架の道を行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個人的に、国家の十字架の環境を克服しなくてはなりません。 先生が満三ヵ月ぶりに出てくる時には、所長も課長も、そこにいた既成教会の牧師も、「よくよく見たら、うわさとは違っていたなあ」と言ったのです。そして、何人かの人、が、統一教会に来るようになりました。 看守たちと所長までも出てきて見送り、看守たちの中には、先生に従って教会に来るようになった人もいます。そのように、天が行く道には怨讐が出てくるのですが、必ずその道は開拓されるというのです。このような実績をおいて考えてみれば、アベルになるためには必ず神様と一体と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いかなる受難の道を行ったとしても、自分だけ行くとは考えるなというのです。 神様は、アベルをいかなる立場で決定するのでしょうか。サタンの讒訴を受けない立場で決定するのです。それではサタンの讒訴を受けない立場とはどのような立場でしょうか。神様と一体となった立場のことですが、それがどんな立場かといえば、うれしい立場ではなく、最も悲しい立場、最も困難な立場なのです。死のうとする立場、最も悲惨な立場において、神様と一体とな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のです。それゆえ、真なる宗教は監獄から出発するのです。皆さんはそれ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サタンも嫌う人間の「魔」が集まった世界でも、普通の人間たちがもっている、それ以上の希望と願いをもつならば、そこから新しい世界の歴史は出発するのです。そのようにしてこそサタン世界の讒訴を受けないのであり、また高い場所に上がったとしても干渉を受けないのです。そこから新しい世界まで連結される新しい出発の起源が起こるのです。そこから神様と一つになるのです。 「善なる立場で打たれた」と、無念に思うなというのです。それによって、四方を代表する祝福の時が来るということ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が、先生の生活標準です。韓国が大騒ぎして、一九五五年に刑務所暮らしをした歴史がありますが、そうであればあるほど、どんどん強くなるのです。 先生は入っていく時以上に、もっと武装して出てきました。監獄に行ってきたのですが、それは先生にとっては旅行に行ってきたのと同じでした。コースが違っていただけだったのです(笑い)。その次には、ふろしきのひもを大きく結んで、解決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いました。 神様は私に対しては無慈悲です。逆さまに閑じ込めておいて、そこから出てくる時までは教えてくださりもせず、ただ見ているだけなのです。そうして、そこから出てきて、元気を取り戻し、再びがさがさ歩みだすようになると、「どこ行くの?」と言いながら干渉されるのです。神様は、本当に上手なお方です。 無責任な言論の弊害 自由党の時代に、刑務所に入って、出て来た時の新聞を見れば、もろもろのうわさが載っていて本当におもしろいのです。これは億千万のお金を出しても買うことのできない、黄金のような宝物です。正義のために、国のために血の汗を流し、三千万民族のために寝ないで夜を明かし、血を売りながらでもこの民族を救おうとした正義の愛国者を、彼らが勝手にひっ捕まえて、閉じ込めたのです。見ていなさい。今後彼らの後孫に、彼らの墓を掘らせることもあり得ます。 ところで、皆さん、無罪釈放になったという話は聞きましたか。新聞(京郷新聞十月五日付)を調べてみると、その記事は三行しかありません。文総裁があのような汚名を着せられ、それを突破してくるのに、どんなに血と涙を流したか分かりますか。 全国的なその印象を、どうやって変えるかが問題です。統一教会の宣伝をしたところでみな反対するのです。法廷問題になり、争いが起こって警察署で調べてみると、「統一教会は、そんな所ではない」ということになりました。ところが、すべての国民が悪く考えているのに、警察だけそのように考えているとなれば、直ちに、「何だ、こいつら! 統一教会員たちが買収した」となるのです。したがって、その悪宣伝に染まった環境与件を越えていくことは、不可能な圏内に追い込まれたのです。 高い階級では教授、教会責任者から、すべてそのように思っていたのです。そして、そうした牧師たちが、先生の親戚ならば親戚に、「あなたの親戚に当たる何とかは、こんな人だ」と、会う人ごとに悪宣伝をしたのです。そんなふうだから、説明しても通じますか。だから仕方なく、汚名を着て、それを脱ぐ時まで、歳月をかけて、我々が実績をもた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それで私たちがそれを取り除く段階まで上がってくるのには、数十年の歳月がかかるというのです。 こういうことなので、今まで騒がれたすべての汚名を私がすべて着て、何も言わずに生きてきました。消化するのに、それが肥料となります。すべて歴史的なものです。ですから、今後、大韓民国が私に放送局のマイクを預けて三日だけありのままの事実を話せば、この民族がはらわたをつかんではい回りながら痛哭するようになります。世界が信じることなくしては、戻る道がないと考えるのが文総裁の結論です。 弟子たちの義憤心 神様が祝福し、世界を福地天国にできる、ダイヤモンドの鉱脈のようなものをすべて取り上げ、どぶに入れて、足で引っかき回してしまいました。牧師らは殴ったり踏んづけたり、あらゆることをしました。けれども、統一教会の文先生の名前で声明が出されたのを見ましたか。 私は西大門刑務所に入り、もろもろ仕打ちを受け、無罪釈放になりました。その時、我々の幹部らが集まってきて、「先生、もう悔しくて我慢できません」と言うのです。劉協会長はとても性格がのんきな人でした。そんな性格の人が、いかほどの事情があれば、「こいつら、腹を裂いてやる」と毒、しい言葉をはいたでしょうか。私が一言言えば、腹を裂いたことでしょう。殺人まで起きた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こら、神の愛はそういうものではない。打って衝突して奪ってくるのではなく、愛で感動させ自然屈服させてくる法度ではないか」と、いさめたのです。こうして、今まで、踏まれたり、倒されたりしながら、私は追い回されてきました。 その時、劉協会長や幹部らが声明を出し、反旗を翻して攻勢をかけようとしたのですが、「こら!」といって、いさめました。個人的時代なのです。個人的闘争時代なのです。家庭時代を経て氏族、民族時代を経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言葉よりも事実が必要であり、弁解よりも実績が必要だというのです。結果は森厳なものであり、冷徹なものです。正しければ正しいものとして帰結するのであり、悪ければ悪いものとして帰結するのです。勝利は、勝利として帰結するのです。刑務所に入っていく時、私は恥ずかしいと思って入ったのではなく、堂、として入っていったのです。しかし出てくる時に「こいつら! 私が力をつけたら覚えておけ、全部復讐してやる」というような祈祷はしなかったのです。「父よ! 笑って訪ねてく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と祈祷したのです。それが、天の行く道です。そのような道を行く人は、天がいつも保護されるのです。 以南出監日と百日記念期間(一九五五 七・四~一〇・一四) 統一食口ならば、十月四日は深刻に思わなければならない日です。韓民族が統一教会をなくすために迫害の旗を掲げて現れ、追って追って突き剌して、死の道に追い詰められた立場から、解放された日です。 み旨を知っている人たち、特にその中でもみ旨を知った若い人たちは、地にひざまずき、痛哭しながら記念しなければならない意味の深い日です。 きょうは光明の新しい朝です。解放の新しい朝であった十月四日なので、きょうは天気が良いようですね。 十月という月は、我々統一教会においては解放の月であり、祝福の月であるということを歴史が証しています。きょうは十月四日です。人は歴史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のような日を過ごすたびに先生はいつも、自分の目的としたとおりに成してきているのか、そうでないのかを反省します。 先生は、「七月四日から十月十四日まで、百日祈祷をしなさい」と言いました。「先生の獄中での祈祷をもって、祈祷しなさい」と言ったのです。心情的な面で、神様の同志になることを願う意味で、そう言ったのです。神様の同志になることができる条件をつくってあげるために、そう言ったのです。 「十月十四日まで、百日間を監獄で服役するように、生活しなさい」ということは、十月四日の西大門刑務所出監日と、十月十四日の興南監獄出監日を特別に記念するためです。 |
| 참부모님 생애노정 - 3권 통일교 창립과 섭리 재출발 제3절 서대문 형무소 수난 7.4사건 1955.7.4.~10.4. 4. 서대문 형무소 생활 1955.7.13. ~ 10.4. 무고한 미결수 영어(囹圄)살이 수인번호 380번 선생님은 통일교회를 중심삼아 가지고 대한민국을 이끌고 출발하여야 했는데 감옥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약속의 시대에도 그랬는데 사실의 시대인 지금은 안 그러겠느냐 하면서 태연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언제 나가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10년을 살든, 아니면 거기에서 죽든 뜻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며 태연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도를 닦았습니다. 무슨 도를 닦느냐?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시정해 가지고 앞으로 보람있는 길을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태산이 첩첩이 가로 막았으면 굴을 뚫고 고속도로를 내서라도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떨어지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력이 남아 있을 때까지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없습니다. 그때까지는 나를 위해서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내 기력이 다했는데도 뜻앞에 내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협조하지 말라고 해도 협조하시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서도 다리를 펴고 코를 골며 잠만 잤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삼키지 못할 때는 수가 난다 이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려니 때로는 남루해야 하기도 했고, 때로는 손가락질 받아야 했습니다. 이 길을 개척하면서 가지가지 고초를 다 당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풍상을 겪어 나오셨는데 내 어이 이만한 풍상을 겪지 않으리오!’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당한 그런 사연이 많을수록 남이 갖지 못한 보화를 창고에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밥을 잘 먹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도 보리밥이든 무슨 밥이든 주는 대로 다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 가든지 단지 하나의 걱정은 내가 잘못함으로 인하여 탕감의 길에 마이너스 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서운 것이지 다른 것은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위대한 사랑의 힘이…. 그런 힘이 없었다면 통일교회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힘이 있었기에 모든 박해를 헤치고, 고독단신으로 불철주야, 만세에 없는 슬픔의 곡절을 전부 다 내 품에 녹여 가면서 새로운 세계를 위하여 개척자의 사명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멋지다면 멋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지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보람 있는 길을 가고 하는 것은 일생이라는 생을 하늘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삶의 기쁨을 알고 힘차고 보람 있는 사랑의 가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도 나에게는 감옥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의 전殿이예요. 사랑은 차원 높은 박자로서 높여 줘야 할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입감때의 수욕 선생님이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맨 처음 문에 척 들어서자마자 소장이 눈을 부릅뜨며 ‘통일교의 교주인 문 아무개가 왔구먼’하며 비웃는 듯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네가 나에게 항복하나 안 하나 두고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 서대문 형무소 소장이 기성교인이었는데, 대뜸 ‘임자가 문 아무개인가? 한 달은 구류받아 이 자식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되어 먹지 못한 사람에게 농담삼아 한마디 했습니다. ‘이 자식이 뭐야? 당신은 이런 것을 해 먹었군’하니까 가슴이 찔렸는지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식아, 가만히 있어’라고 했습니다. 이런 돼먹지 못한 사람이 선생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갈 때, 그곳의 구치과장이 처음 온 사람들을 인솔해 가서 도장을 찍게 했습니다. 그때의 그 과장을 두고 두고 잊지 못할 겁니다. 지금은 그 사람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그때 그 녀석이 나를 보고 ‘통일교회가 뭐 어떻고 어떻다 하더니 결국 이렇게 됐구만’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때 내 기분이 상당히 나빠서 시끄럽다고, 집어치우라고 해놓고 내가 여기서 나갈 때는 반드시 형사와 간수들, 소장까지도 굴복시키고 나갈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자를 언젠가는 다시 한번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옛날 예수님이 로마병정에게 붙잡혀 빌라도 법정에 나가기 전에 간수들에게 희롱을 당했듯이 선생님도 그렇게 당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그래 별의별 짓을 다 해봐라. 그렇지만 내가 이곳을 나가기 전에 소장을 굴복시킬 것이다’그런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어떤 날은 도리어 내가 기합을 주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느날 나에게 차입품이 들어왔는데 기분에 물건에 손을 댄 것 같아서 호통을 쳤습니다. 자기는 내가 모를 줄 알았지만 나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왜 손댔어? 어디에 손댔나? 무엇 무엇에 손댔어?’하며 다그쳤더니 그 후로는 나만 보면 꼼짝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인들의 감화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몇 달 있을 때, 사람들은 나를 보고 통일교회 문아무개라고 불렀습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형무소에 들어가 보면 전부다 왕자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다 잘났다는 거예요. 그러나 난 나보고 무엇이라고 불러도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들어가는 날부터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달도 있을 수 있고 두 달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두 주일쯤 지나게 되자 그들이 나를 어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일찍 소변 보러 가면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먹으로 막을 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그들 중 제일 골치거리인 사람, 모두가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을 데려다가 몇마디 같이 얘기하며 잘 타일렀습니다. 그 전에는 그렇게 골치거리인 사람인데, 문이라는 사람이 들어오더니 그 사람이 달라졌다고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서너달 지나자 그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감방의 사람들이 전부다 문아무개 말을 잘 듣는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말이 문제가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선생님도 그들을 위한 입장에 서서 대한민국을 대신해서 대통령도 가지지 못하는 심정을 가지고 현재의 한국의 운명과 미래의 한국의 운명, 그리고 이 민족이 가야 할 국민사상을 중심삼고 그들을 위하여 눈물 흘리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심정의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수를 그 어머니 아버지 같이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이예요. 얼마나 불쌍해요! 먹을 것이 있으면 자기가 안 먹고 먹여 주려고 하고, 어렵고 제일 나쁜 자리는 내가 찾아가서 자려고 하는 걸 아는 거예요. 아침 한끼 먹으면 12시까지 얼마나 배가 고픈 줄 알아요? 혓바닥이 닳아 단내가 납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기도 배가 고프지만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일장 장편소설을 엮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 달이 못돼서 자기 면회와서 사식私食을 가져오면 내 앞에 갖다 놓고는 ‘선생님 마음대로 처리하시오’ 이렇게 되더라구요. 그거 무서운 일이예요. 통일교회는 간단합니다. 위하는 사랑을 가지고 완전 투입을 하는 것입니다. 천리의 근본이 그렇기 때문에 그 근본을 내가 붙안고 가는 곳에는 그것을 파괴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행동하면 출력은 강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감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침이면 반드시 인사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들어갔어요. 그래 가지고, 소문이 나 가지고 감방 안에서 ‘저렇게 선하고 좋은 사람을 가두어 버린 대한민국이 나쁘고 이 감옥이 나쁘고 너희들이 나쁘다’하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나오게 되었다구요. 또한 거기에서 목사라는 한 양반은 선생님이 이단이요 원수의 입장이라고 맨 처음에는 서슬이 시퍼래 가지고 ‘그래 당신이 주장하는 교리가 도대체 뭣인가?’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시간을 정해 놓고 찾아와서 상당히 친해진 일도 있습니다. 같이 들어간 제자들도 악착같이 선생님을 따르고 모시니 사람들은 ‘세상이 저렇게 욕을 하고 반대해도 저렇게 끈질기니 과연 통일교회 문선생은 난사람이야’라고들 했습니다. 영계의 증거와 협조 선생님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영계에서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너 몇 번 문 아무개한테 가서 인사해라! 그리고 차입 들어오면 전부다 바쳐라’ 하면서 호통을 친다는 것입니다. 어떤 간수는 나를 찾아와서 얘기를 하는데, 어느날 아침에 떡을 해먹었는데 떡이 목에 걸려서 넘어가질 않더라는 거예요. 떡이 왜 안 넘어갈까요? 조상이 걸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선조들이 선생님을 푸대접하다가는 큰일 난다는 것을 알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밀리에 떡을 해먹다가 혼이 났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갈 때는 심각한 마음을 가지고 갑니다. 감옥에 가는 도상에서도 ‘하늘이 바라보는 감옥은 이렇게 가야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이런 마음이 원인이 되어가지고 이렇게 살아나가는 것이다’ 할 때, 그 자리에는 내 치하의 결과가 반드시 상대적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주체가 있으면 완전한 상대는 창조되는 것이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어도 선조들이 나타나서 ‘이 자식아, 너는 너와 함께 계시는 그분이 누군지 아느냐?’ 하고 영계의 법도를 중심삼고 야단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어도 정면에 앉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게 되면 머리를 숙이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과 똑같지요? 그렇지만 나는 여러분이 미치지 못하는 동기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연구해도 알지 못하는 동기를 갖고 있다구요. 그것은 여러분이 죽어서도 모를 동기입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 저나라에 가서도 만민들에게 ‘이놈들아’하게 되면 ‘예이’할 수 있는 주체성이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올바른 길을 갔으면 영계에 가기 직전에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사랑을 받기를 바라거든, 참된 행복의 자리를 원하거든 전체의 불행의 자리를 대신하여 나 홀로 불행한 자리에 가라는 겁니다. 그런 자리에 가면 하나님이 나를 위하고 내가 열 대 맞으면 백 대 천 대의 수난을 개의치 않고 나의 앞을 미리 닦아 나가면서 싸움을 다해준다는 것을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습니다. 소장과 형무관들의 태도 변화 한 달 이내에 형무소 소장이 찾아와서 나에게 잘못했다고 인사하고, 거기에 간부들이 나를 초대하여 점심 대접까지 하는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구요. 한 달이 못되어 그들은 나한테 찾아와 가지고 ‘옛날에 들었던 통일교회 문 아무개와 지금 알고 난 통일교회 문 아무개는 다르더라’고 사죄하는 것을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구요. 정의는 아무리 혹독한 핍박의 쇠사슬 가운데서도 승리한다는 것을 봐 왔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정의의 길은 힘들지만 하나님이 찾고 있는 그 무리의 길을 책임지고 가는 길이므로 낙심하지 말지어다! 통일교회 문선생님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당한 수난의 매자국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때 입은 마음의 상처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약속을 해주신 후에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감옥소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거꿀잡이로 밑창에 처 넣는 것입니다. 거기에 있어 보라는 것입니다. 황금은 어디에 있어도 누런 빛을 발휘하는 겁니다. 선생님은 형무소에 들어가서도 소장까지 감동시켰어요. 나를 취조하는 형사들은 선생님을 미워했지만, 형무소에서는 소장까지도 감동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거기엔 많은 말이 필요없었습니다. 스스로 변하지 않는 입장에 서면 하나님이 동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때는 마치 봄절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를 테면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이 선생님의 꿈을 꾸고 일어나서는 퍼뜩 몇 호 감방의 아무개라고 나를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침이면 나에게 찾아와서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형무관들도 찾아와서는 인사를 하고 더울 때면 아이스 케이크ice cake도 사다 주는 겁니다.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러느냐? 하늘이 같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아무도 점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간수들이 ‘선생님, 뭐 불편한 것 없습니까? 뭐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사다 드리겠습니다’하면서 떡을 사 달라면 떡을 사다 주고, 무슨 연락을 해달라면 연락을 해주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좋아서 하겠다는 것이니 죄가 아닌 것입니다.(웃음) 천하가 제아무리 반대하고 세상이 제아무리 드세다 해도 그 천하와 세상을 녹여낼 수 있고 삼킬 수 있는 기백이 있으면 그는 영웅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최고의 면회기록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 있을 때에 고맙게 생각했던 것은 통일교회 교인들이 전부 선생님을 면회하겠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서로가 먼저 면회하려고 싸움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 통일교회 문선생은 전부 다 죽으라고 하고 망하라고 했는데도 안 망했어요. 사람들이 욕하면 욕할수록 내가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눈물을 흘리고 나를 위로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더구만요. 내가 형무소에 들어가는데 형무소에 서로 가겠다고, 우리 통일교회 패들은 아침 8시 이후에 만나는데 새벽 한 시부터 줄 서고 기다리고 앉아 있더라구요. 그것이 서대문 형무소에서의 기록이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미치게 해도 저렇게 새빨갛게 미치게 해놓았노?’이러더라구요.(웃음) 그거 그런 거예요. 집에서 엄마가 아버지한테 꾸지람을 듣고 야단을 맞으면 아들딸들이 ‘엄마!’하고 위로하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제일이라고, 우리 엄마가 제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 무엇 때문에? 사랑의 힘때문에. 어떤 사람은 사흘씩이나 거기서 기다려야만 면회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결과가 되니 ‘형무소에 자기 아들이 들어왔고 자기 여편네가 들어 왔고 자기 남편이 들어 왔다면 모르지만, 알지도 못하고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 저렇게 지성일 수 있느냐’하고…. 이게 문제가 안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뭐 세뇌 공작하고, 자기 아들딸을 강제로 교육하고, 뭐 어떻고?’ 이랬지만, 강제로 해 가지고 조금이라도 싫은 게 있으면 거기에 나타나서 그런 놀음을 하겠어요? 그러니까 형무소 안에서부터 그것을 전부 다 알기 시작한 거예요. ‘문선생은 독재자고, 착취하는 사람이고 하는 것, 다 헛소리다, 헛소리’하게 된 거예요. 역사 이래 형무소 앞에 아침부터 24시간 줄이 점점 길어진 것은 레버런 문이 기록이라구요. 그걸 볼 때, 이상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나면 내가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쌍것 왜 왔어, 부산스럽게? 그냥 박혀 있지 소문내고 말이야’이렇게 욕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눈물을 흘리면서 ‘우우’이러면서도 ‘그래도 좋은 걸 어떻게 해요?’이러고 있다 이겁니다. 내가 법원에 다니고 쇠고랑을 찼을 때 통일교회 교인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던 것을 잊지 않았어요. 그때의 얼굴들을, 누구 누구를 지금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서 가지고는 눈물을 훌쩍 훌쩍 흘리면서 우리 선생님 저래서는 안 될 텐데…. 다 보고 있었어요. 언제까지나 내 기억에 남아 있을 겁니다. 끝날 내가 죽기 전까지 기억했다가 죽기 전에 불러다가 축복을 해줄지도 모르지요. 감옥살이하는 선생님을 면회했다면 그것은 역사에 남는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을 면회하던 면회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앞으로 표창할 텐데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것 시집갈 때나 장가갈 때에 가슴에 품고 가서 그것을 그 가정의 보물로 간직해야 합니다. |
| 真の御父母様の生涯路程 3 統一教会創立と摂理の再出発 第三節 西大門刑務所の受難 七・四事件、一九五五・七・四~一〇・四 四 西大門刑務所生活(一九五五・七・一三~一〇・四) 罪なき未決囚の牢獄生活(囚人番号三八〇番) 先生は、統一教会を中心として大韓民国を率いて出発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に、監獄に入ってしまったのです。しかし私は、約束の時代でもそうであったのだから、実体の時代である現在においてそうならないはずがあろうか、と思って平然としていました。だから先生は、監獄に入っても、いつ出られるかというようには考えませんでした。 監獄で十年生きようが、そこで死のうが、み旨のための道であると思い、平然としていました。他の人たちとは違っていました。その場所で道を切り開いたのです。どんな道を切り開くのでしょうか。「このすべてのことをいかに正し、将来、生きがいのある道をいかに行くか」ということを考えました。「高くて大きな山が幾重にも重なり合って立ちふさがったならば、トンネルを掘り、高速道路を造ってでも行く」というのです。そうして破れれば、神様が責任を負うのです。しかし、気力が残っている限りは、神様の助けは必要ないのです。それまでは、私のために祈祷する必要もありません。そうして、私の気力が尽き果てたのに、み旨の前に私が必要であるというならば、神様は協助するなといっても協助なさるのです。 先生は西大門刑務所に入っても、足を伸ばし、いびきをかいて平然と寝ました。彼らが私をのみ込めない時には、運が開いていくというのです。そのためには、時にはみすぼらしくもなければならず、時には後ろ指を指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の道を開拓しながら様々な苦難を受けました。そのたびに「神様はこれよりもっとひどい風霜を味わってこられたのに、私がどうしてこれくらいの風霜を味わないであろうか!」と思いました。公的な立場で迫害を受けたそのような事情が多いほど、人がもつことのできない宝物で倉庫をいっぱいに満た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先生は監獄に入っても、御飯をよく食べます。麦飯であろうと何の飯であろうと、与えられるまま全部食べます。しかし、それが問題ではありません。どこに行こうが、ただ唯一の心配は、「私が誤ることによって蕩減の道にマイナスとなる結果になりはしないか」ということでした。それが恐ろしいのであって、他に怖いものはありません。 偉大なる愛の力がなかったとしたら、統一教会は成立しなかったことでしょう。そのような力があったから、すべての迫害を押しのけて、孤独な身で昼夜を分かたず、万世にない悲しみの曲折をすべて私の懐で溶かしていきながら、新しい世界のために、開拓者の使命を尽くしたのです。それが素晴らしいと思うのです。この地上に人として生まれ、生きがいのある道を行くのは、一生という「生」を天が与えてくれたからです。それで私がこのような「生」の喜びを知って、力強く、生きがいのある愛の価値を探し求めていくのです。監獄に入っても、私にとっては監獄ではないのです。愛の宮殿です。愛は、次元の高い「拍子」として、高めてあげるべき一つの芸術作品になるのです。 入監時の屈辱 先生が西大門刑務所に入るようになった時、一番最初の門に入るや否や、所長が目をむいて、「統一教の教祖の文なにがしが来たな」と、あざ笑うように言いました。先生はその時、「お前が私に降参するかしないか、試してみよう」と思いました。 その西大門刑務所所長は既成教会員だったのですが、私を見るや「あんたが文なにがしか。一ヵ月は拘留されろ。こいつめ」と言うのでした。先生は、こういうどうしようもない人に冗談で一言言いました。「こいつとは何だ。あなたはこういうことをやってきただろう」と言うと、胸を突かれたのか、びっくりするのです。それで「こいつめ、黙っていろ」と言いました。こういうどうしようもない人が先生の心を傷つけました。 私が西大門刑務所に入る時、拘置課長が、入ってきた人たちを引率していき、判を押させました。その時の、その課長のことは永遠に忘れないでしょう。今はその人の名前を忘れてしまいましたが、その時、その男が私に向かって「統一教会が何だかんだと言っていたが、結局こうなってしまったな」と言ってあざ笑いました。その時、私の気分は相当に悪く、「うるさい、いい加減にしろ」と言いました。そして「私がここから出ていく時には、必ず刑事と看守ら、所長までも屈服させて出ていくんだ」と思いました。 いつかその者ともう一度会う時があるでしょう。昔、イエス様がローマ兵に捕まり、ピラトの法廷に出ていく前に、看守たちに愚弄されたように、先生もそのようにされました。そんな立場で先生は「そうか、どんなことでもやってみろ。けれども私がここを出る前に所長を屈服させてやるだろう」と、そのような決心をしたのです。 ある日は、私が気合を入れてやりました。どういうことかというと、ある日私に差し入れが届いたのに、勝手に手をつけたようだったので、怒鳴りつけたのです。本人は私が気がつかないだろうと思ったのに、私は知っていたのです。それで私が「どうして手をつけたのか。何と何に手をつけたんだな」と言って、たたみかけたところ、それ以降は私の顔さえ見れば、ものも言えなくなってしまいました。 囚人たちの感化 私が西大門刑務所に数ヵ月いる時、人々は私に向かって「統一教会の文なにがし」と呼びました。こっけいな話なようですが、刑務所に入ってみると、王様でない人がいないのです。みんな自分が一番だと思っているのです。しかし私は、私にむかって「なんとか」と呼んでも、何の返事もせず、じっと座っていました。入ってきた日から、静かにしているのです。そのまま一カ月でもいられるし、二カ月でもいられるというのです。けれども一、二週間ぐらい過ぎるようになると、彼らが私に気を遣いだしました。朝早くトイレに行けば、私が祈祷しているというのです。それを握りこぶし(腕力)で妨げることができますか。 先生は、彼らの中で一番やっかいな者、みんながその人は死んだらいいと思っている人を連れて来て、しばらく一緒に話をしながら、よく教え諭しました。すると、「以前は、あんなにやっかいな者だったのに、文という人が入ってきたら、その人が変わった」と言うようになりました。このように三、四ヵ月過ぎると、「監房の人たちはみんな、文という人の言うことは、よく聞く」といううわさが立ちました。 言葉が問題ではありません。なぜかというと、先生は大韓民国に代わって、大統領ももち得ない心情をもって、現在の韓国の運命と未来の韓国の運命、そしてこの民族が行くべき国民思想を中心として、彼らのために涙を流して祈祷したからです。心情の主人になっているからです。 囚人を、その母や父のように愛そうとするからです。食べるものがあれば、自分が食べずに食べさせてあげようとし、不便で一番悪い場所は、私が行って寝ようします。それを彼らは知っているのです。朝一食食べれば十二時まで、どんなにおなかがすくか分かりますか。舌がすれて臭いがするのです。 そのような環境において、自分もおなかがすいているのですが、彼らを慰労するために、一度、長編小説を編纂するのです。そうしてみると、一ヵ月もたたずに、自分の面会に差し入れを持ってきてもらうと、私の前に持ってきて、「先生の思いどおりにしてください」というようになったのです。それは恐ろしいことです。 統一教会は簡単です。「ため」に生きる愛をもって完全投入をするのです。天理の根本がそうであるために、その根本を私が抱き締めていく所には、それを破壊する者がいないのです。私が行動すれば、出力は強くなるのです。 そうして、監房にいるすべての人たちは、朝になると必ずあいさつをせざるを得ないようになりました。そうしてうわさが立ち、監房の中で「あんなに善良で良い人を閉じ込めてしまった大韓民国が悪い。この監獄が悪い。お前たちが悪い」と抗議する人たちも出てく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 また、そこで牧師だというある男性は、先生が異端で、怨讐だといって、最初はすごい見幕で、「あなたが主張する教理とはいったいどんなものか」と食ってかかってきました。しかし、そうこうするうちに、時間を決めて訪ねてきて、かなり親しくなったこともあります。一緒に入った弟子たちも、しゃにむに先生に従い侍るので、人々は「世の中があんなに非難し反対しても、あんなに粘り強いなんて、やっぱり統一教会の文先生は優れた人だ」などと言いました。 霊界の証と協助 先生が口を閉じて静かにしていると、霊界から天使たちが現れて、彼らに「お前、文という人の所に行ってあいさつしろ! それから差し入れが来たら全部捧げろ」と言って、しかりつけるというのです。 ある看守が、私を訪ねてきて話をするには、「ある日の朝、餅をつくって食べたのですが、もちがのどに引っ掛かってのみ込めない」というのです。なぜのみ込めないのでしょうか。先祖が引っ掛かるようにしたというのです。彼の先祖は、先生を冷遇しては大変なことになるということ知っ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そのようにするのです。それで彼は餅を作って食べて、ひどい目に遭ったのです。 先生が監獄に行く時は深刻な心をもって行きます。「天が望むように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そこでは、このような心が原因となり、このように生きていくのだ」と思う時、私が固く誓ったその結果が、必ず相対的結果として現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完全な主体があれば、完全な相対が創造されるのが原理です。それゆえに、口を閉じて黙っていても先祖たちが現れて、「こいつめ、お前はあの方が誰なのか分かっているのか」と、霊界の法度を中心として大騒ぎするのです。御飯を食べても「先生の正面に座って食べるな」と言うのです。食べているときも「頭を下げて食べろ」と言うのです。 先生は外から見た場合には、なんでもありません。皆さんと全く同じでしょう。けれども、私は皆さんが及ぶことのできない動機をもっています。皆さんがどんなに研究しても知り得ない動機をもっているのです。それは、皆さんが死んでも分からない動機です。それがあるがゆえに、先生はあの世に行っても、万民に向かって「この者たち」と言えば、「はい」となり得る主体性が決定されているのです。それは皆さんが正しい道を行ったならば、霊界に行く直前に自然に知るようになるのです。 それゆえに、真の愛を受けることを望むなら、真の幸福の位置を願うなら、全体の不幸な立場の身代わりとなって、私一人で不幸な立場に行けというのです。そのような立場に行けば、神様が私を慈しみ、私が十回打たれれば、百回、千回の受難も意に介することなく、私の行く道を前もって整えながら、戦っ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を、いくらでも体験できるのです。 所長と刑務官たちの態度の変化 一ヵ月もたたずに、刑務所の所長が訪ねてきて、私に「自分が間違っていた」とあいさつし、その上、幹部たちが私を招待し、昼食の接待までする運動が起こり始めたのです。 一ヵ月もたたずに、彼らが私を訪ねてきて、「昔聞いた統一教会の文さんと、今、知ったあとの統一教会の文さんは違っていたなあ」と謝るのを、この目ではっきり見たのです。そのように正義は、どんなに苛酷な迫害の鎖につながれていても、勝利するということを見てきたのです。ですから、正義の道は大変ですが、神様が探し求めていらっしゃるその道に責任をもって行く道であるので希望を失うなというのです。統一教会の文先生は希望を失わなかったのです。受けた受難のむちの痕が、あまりにもたくさん残っているとしても、その時受けた傷はなんでもないのです。 神様は祝福の約束をしてくださったのちに、どこに送られるかというと、監獄に送るというのです。逆にどん底にほうり込むのです。そこにいてみなさいというのです。黄金は、どこにあっても黄金色の光を発するのです。先生は刑務所に入っても、所長まで感動させました。私を取り調べる刑事らは先生を憎みましたが、刑務所では所長までも感動させたのでした。そこでは多くの言葉は必要ありませんでした。自ら変わらない立場に立てば、神様が同情されるのです。その時は、まるで春のようなものです。 例えば、刑務所にいる人たちが先生の夢を見て、起きてはハッとして、「何号の監房のなんとかだ」と私を思い出すのです。それで朝になれば、私の所に来て「おはようございます」とあいさつするのです。刑務官たちも訪ねてきてはあいさつをし、暑い時ならアイスキャンディも買ってくれるのです。頼んでもいないのに、なぜそうするのでしょうか。天が共に行く道だからです。その道は誰も遮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のです。 看守たちが「先生、何か不便なことはありませんか。何か必要な物があればおっしゃってください。買ってさしあげます」と言います。それで「もちを買ってくれ」と言えば、もちを買ってくれ、「何かの連絡をしてくれ」と言えば、連絡をしてくれたりしたのです。それは、自分たちが喜んで「やります」ということなので、罪ではないのです(笑い)。天下がいくら反対し、世の中がいくら手強いとしても、その天下と世の中を溶かすことができ、のみ込むことができる気迫があるならば、その人は英雄の称号を受け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最高の面会記録 私が西大門刑務所に入っている時に有り難く思ったことは、統一教会の食口たちが、全員先生と面会しようとしたことでした。互いに我先に面会しようと争うというのです。 統一教会の文先生は、みなが「死ね」と言ったり、「滅びろ」と言ったのに滅びませんでした。人、がののしればののしるほど、私が孤独ならば孤独なほど、涙を流して私を慰める人がだんだん増えていったのです。私が刑務所に入っていた時、統一教会の者たちは朝八時以降にならないと会えないのに、互いに競いながら夜中の一時から列をなして、座って待っていたのです。それが西大門刑務所での記録です。 だからそれを見た人々は、「いくら人を狂わせるといっても、あんなにめちゃくちゃに狂わせてしまったのか」と言うのです(笑い)。家で母親が父親になじられ、しかり飛ばされると、息子、娘が「オンマ(お母さん)!」と言って慰めるのです。お母さんが一番だ、うちのお母さんが一番だと言うのです。そのようになるのです。なぜですか。愛の力のゆえにです。 ある人は三日も待って、初めて面会できるくらいでした。そんなふうになるので、「刑務所に自分の息子や夫や妻が入ってきたというならぱともかく、関係もない人なのに、あれほどまで至誠を尽くすことができるのか」といって、そのことが問題にならないはずはありませんでした。反対する人たちは「文なんとかは、うちの息子や娘を強制的に教育して洗脳工作をした」と言いましたが、無理やりにしておいて、彼らがそんなことをするでしょうか。ですから刑務所の中から、すべて分かり始めたのです。「文先生が独裁者で、搾取する人だというのは、みんなたわごとだ」と言うようになったのです。 歴史始まって以来、刑務所の前に朝から二十四時間、列がどんどん長くなっていったのは、レバレンド・ムーンが記録です。それを見た時には、異常だというのです。そうしておいて、会えば、私が褒めるのではなく、「こいつ、何で来た、騒々しい。そのまま引っ込んでいればいいものを、うわさを立てて」と、ののしるのです。すると、彼らは涙を流しながら、「でも来たいのに、どうしたらいいのですか」と言って泣いているというのです。 私が手錠をはめて裁判所に通った時、統一教会の食口があっちに、こっちにと殺到したことを忘れていません。その時の人たちの顔、誰と誰なのかを、今も記憶しているのです。先生があんな姿であってはならないのにと、涙をはらはらと流しながら立っていたのです。私は、全部見ていました。いつまでも私の記憶に残ることでしょう。私が死ぬ時まで記憶しておいて、死ぬ前に呼んで祝福をしてあげるかもしれません。 獄中生活している先生に面会したとすれば、それは歴史に残ることです。当時、先生に面会したという面会証を持っている人たちを、今後表彰するつもりですが、それをなくしてしまった人が多いことでしょう。もしそれを持っている人がいれば、嫁に行く時や、妻をもらう時に胸に抱いて行き、それをその家庭の宝物として大切に保管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
| 참父母經 - 078. 섭리의 중심기지가 된 본부교회 1954년 5월 1일 서울시 성동구 북학동 세대문집에서 협회를 창립한 뒤 1955년 1월 17일에 본부교회를 성동구 흥인동 241-44번지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4월 27일에는 중구 장충동 1가 37번지의 정원을 갖춘 2층 건물로 옮겼고, 참아버님께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하신 직후 1955년 10월 7일 다시 용산구 청파동 1가 71-3번지로 옮겼다. 이후 협회는 1963년 5월 31일 이 주소로 사회단체 제261호로 정부에 등록되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이곳에서 피어린 기도와 정성으로 섭리를 확산시켜 나가셨으며, 주야로 식구들을 교육하면서 세계를 향한 본격적인 섭리를 준비하셨다. 1 오늘날 세계에서 하나님을 위해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할 때, 엘리야가 말한 것처럼 ‘나만 남았나이다.’라는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천지 가운데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삼고 타락한 세상에 구원의 터전을 넓혀 나온 것이 이렇게 비참하고 초라한 청파동 1가 71의 3번지 통일교회입니다. 이곳을 바라보시며 6천년의 한을 풀겠다고 나오신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눈물이 고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이상으로 침울한 자리에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면 눈물이 쏟아집니다. 여러분이 그런 심정에 얼마나 접해 봤으며, 정적인 통일교회에서 이러한 심정을 바쳐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 우리가 갖고 나온 인연은 입체적인 인연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역사상에 있었던 어떠한 사상을 기조로 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기조로 하고 본성의 인격을 표준으로 하여 시작된 인연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연의 핵심이기 때문에 절대시 해야 됩니다. 그 인연이 이곳 청파동에서 나타났습니다. 청파는 푸른 언덕을 뜻하고 푸른 언덕은 이상을 상징합니다. 피안의 이상세계를 소망하며 노래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푸른 소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푸른 소망을 노래하는 청파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면적인 사위기대를 출발할 수 있는 터전이 청파동 통일교회 본부라는 것입니다. 3 청파동 본부 자리는 옛날 어떤 절의 자리였는데, 일제 치하 때의 적산 건물입니다. 이것이 또 역사적인 건물입니다. 1955년 그때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갔다 나온 뒤 오갈 데가 없어서 비상대책을 취하여 마련한 것입니다. 손수 마련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여기가 도깨비 장터 같았습니다. 기둥도 새까맣게 된 것을 전부 양잿물로 닦았습니다. 역사적인 인연이 맞부딪친 집입니다. ‘이 집에서부터 원한이 사무친 원수를 갚아야 되겠다. 채찍으로 치던 무리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해야 되겠다. 몰아내던 무리를 몰리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는 신념을 갖고 나왔습니다. 지금도 그 신념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혼자 있더라도 천하를 휘어잡고 칠 수 있는 기백은 언제나 깃들어 있습니다. 4 우리는 한국을 살릴 수 있는 깃발을 꽂아야 합니다. 그 깃발이 드높이 들리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승리를 찬양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 모였습니다. 이 장소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버님은 토굴같이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는 집에서 살면서도 세계를 한번 요리해 보자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청파동 본부교회 건물을 보고 통일교회가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면서도 본부의 건물은 왜 이렇게 형편없느냐고 말합니다. 아버님이 보아도 형편없습니다. 지붕이 깨져서 엉망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그냥 놔두는 것은 깨진 기와지붕을 고칠 수 있는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지붕을 고칠 수 있는 그 돈을 아껴서 민족을 위하여 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언젠가 싹이 터서 자라는 날에는 이 민족은 통일교회를 이해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민족을 위해서 싸워 나왔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될 때 이 민족이 통곡할 것입니다. 삼천리강산에 그런 한 날이 오기를 숙원하면서 그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지금도 진군하고 있습니다. 내 집이 상처 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나라와 이 민족에게 상처가 있는 이상 내 집이 편안할 수 없습니다. 5 앞으로는 본부의 권위를 지켜야 합니다. 본향을 보고 싶어하고, 가고 싶어하고, 살고 싶고 그리워하는 그들 앞에 보고 또 봐도 영원히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살고 싶은 마음을 한층 북돋워 주고 사기를 올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전 인류를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하면 본향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고 싶어서 찾아온 외국 식구들을 하루 이틀, 1년이라도 기쁨으로 맞이하여 이마를 맞대고 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그가 나를 좋아하게 되면 내가 그와 더불어 동고동락하며 지내겠다는 여유 있는 심적인 준비를 해놓지 않으면, 조국이요 본향이라고 찾아오는 많은 외국 식구들에게 큰 상처를 줄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청파동은 오늘의 청파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통일교회가 세워지는 곳곳마다 수많은 식구들이 이 한국을 본향 땅, 조국 땅으로 생각하면서 찾아올 것이고, 더욱이나 청파동을 사랑하여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의 현재 환경이 갖추어지지 못했다고 낙심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앞으로 사람들은 좋은 장소를 택하여 웅대한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곳을 그리워하지 않고 바로 청파동 이곳을 그리워하며 찾아올 것입니다. |
| 真の父母経 - 078. 摂理の中心基地となった青坡洞・旧本部教会 一九五四年五月一日、ソウル市城東区(ソンドング)北鶴洞(プカクトン)の三つの門の家に協会が創立されたのち、一九五五年一月十七日に、本部教会が城東区興仁洞(フンインドン)二四一の四四番地に移転された。そして、四月二十七日には、本部教会が中区奨忠洞(チャンヂュンドン)一街(カ)三七番地にある庭園付きの二階建ての建物に移転され、真のお父様がソウルの西大門刑務所から出監された直後、一九五五年十月七日には、龍山区(ヨンサング)青坡洞一街七一の三番地に再び移転された。それ以降、協会は、一九六三年五月三十一日、この住所で社会団体第二百六十一号として政府に登録された。真のお父様は、ここで血のにじむ祈りと精誠によって摂理を拡大させていき、昼夜、食口たちを教育しながら、世界に向けた本格的な摂理を準備されたのである。 1 今日、世界で神様のために死んだ人がどれほどいるのかという時、エリヤが「ただわたしだけ残りました」(列王紀上一九・一〇)と言ったように、その言葉しか語れません。天地の中で、このような父の心を中心として、堕落した世界に救いの基盤を広げてきた所が、このように悲惨でみすぼらしい青坡洞一街七一の三番地の統一教会です。ここを見つめながら、六千年の恨を晴らそうと歩んでこられた神様は、どれほど哀れ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私自身を見つめると涙があふれます。 皆さんも、神様以上に沈鬱な立場でそのような境地に入れば、涙があふれるのです。皆さんはそのような心情にどれほど接してみたでしょうか。情的に深い統一教会で、このような心情を捧げて神様と向き合えるかというのです。皆さんは、今までそのことを考えられずにいたのです。 2 私たちが結んできた絆は、立体的な絆です。それは、今まで歴史上にあった何かの思想を基調として現れた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様の心情と神様の創造理想を基調として、本性の人格を標準として始まった絆です。これは、あらゆる絆の核心なので、絶対視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絆がここ青坡洞で現れました。「青坡」とは、青い丘を意味し、青い丘というのは理想を象徴しています。彼岸の理想世界を望みながら歌う人々が暮らす所、生き生きとした希望を謳歌するのが青坡洞です。ですから、平面的な四位基台を出発できる基盤が、青坡洞の統一教会本部だというのです。 3 青坡洞の本部の場所には、昔、ある寺があったのですが、日本統治下の時代に日本人が所有していた建物です。これがまた、歴史的な建物なのです。一九五五年に、当時、西大門(ソデムン)刑務所に入っていた私が釈放され、行き来する所もないので、非常手段を使って手に入れたものです。自ら用意したのです。最初、ここはお化け屋敷のようでした。真っ黒になっていた柱をすべて洗濯用の苛性ソーダで磨いたのです。 歴史的な因縁がぶつかり合った家です。「この家から、怨恨に満ちた恨を解かなければならない。むちを打った群れを屈服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私を)追い出した群れを、逆に追い込ま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信念をもって歩んできました。今もその信念は失っていません。いくら一人でいても、天下をつかんで打てる気迫は、いつも宿っています。 4 私たちは、韓国を生かせる旗を立て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旗が高々と掲げられる先々で神様の勝利をたたえるため、私たちはここに集まりました。この場所は、外見的に見れば何でもありません。お父様は、土窟のような、とても小さなみすぼらしい家で暮らしながらも、世界を一度指導してみようという夢をもっています。ある人は、青坡洞の本部教会を見て、「統一教会は世界的に話題になっ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本部の建物はどうしてこんなにみすぼらしいのか」と言います。お父様が見てもみすぼらしいのです。屋根が壊れてめちゃくちゃです。それでも、それをそのままにしておくのは、壊れたその瓦屋根を直すお金がないからではありません。屋根を直すそのお金を節約して、民族のために使うためです。 これがいつか芽を出して育つ日には、この民族は統一教会を理解するでしょう。私たちが、この民族のために闘ってきたという歴史的な事実を知るとき、この民族は痛哭するでしょう。三千里の山河にそのような一日が来ることを宿願としながら、その日を迎えるために今も進軍しているのです。私の家に傷がつくことが問題ではありません。この国と、この民族に傷がある以上、私の家は安らかではいられません。 5 これからは、本部の権威を守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本郷を見たいと思い、行きたいと思い、暮らしたいと思って、(本部を)慕わしく思う彼らに対し、何度見ても永遠に見たいと思い、また会いたいと思い、暮らしたいと思う心を一層かきたててあげ、士気を高揚させてあげ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様に代わって全人類と向き合うことができる立場に立てなければ、本郷の人ではありません。 そのように会いたくて訪ねてくる外国の食口たちを、一日、二日、あるいは一年でも喜んで迎え、額を突き合わせて暮らせる心をもたなければなりません。また、彼らが私を好きになれば、私が彼らと苦楽を共にして過ごそうという、ゆとりのある心の準備をしておかなければ、祖国であり本郷だといって訪ねてくる多くの外国の食口たちに、大きな傷を与えることは間違いありません。 青坡洞は、今日の青坡洞で終わるのではありません。これから統一教会が建てられるあらゆる所から、数多くの食口たちがこの韓国を「本郷の地、祖国の地」と思いながら訪ね、それ以上に青坡洞を愛して訪ねてくるでしょう。かといって、私たちの現在の環境的な不備を落胆する必要は全くありません。今後、人々は、良い場所を選んで雄大な中で礼拝を捧げる所を慕うのではなく、正に青坡洞のここを慕いながら訪ねてくるのです。 |
| Chambumo Gyeong - 078. The central base HSA-UWC was founded on May 1, 1954 at a small house in Bukhak-dong, Seongdong-gu, Seoul. On January 17, 1955, the church moved to 241-44, Heungin-dong, Seongdong-gu, Seoul, and on April 27, to a two-story building with a garden at 37, Jangchung-dong 1-ga, Jung-gu, Seoul. On October 7,1955, right after True Father was released from Seodaemun Prison, it moved yet again, this time to 71-3, Cheongpa-dong 1-ga, Yongsan-gu, Seoul. This is the address that the church used on May 31, 1963, when it registered with the government as Civil Society Organization No. 261. It is where True Father offered countless prayers while shedding tears and where he made many conditions of devotion for the advancement of the providence. It is where he educated members day and night and where he prepared to expand the providence to the worldwide level. 1 When we think about all the people in today's world who died for God, just as Elijah said, all I can say is, "Lord, I alone am left." It is with that heart that I am leading the providence in these miserable circumstances at the shabby Unification Church building whose address is 71-3, 1-ga, Cheongpa-dong, Seoul. This is the place under the sun where I am expanding the base for the salvation of the fallen world. How sad God must feel as he looks down at this place, where a small band of followers and I are striving to dissolve the 6,000 years of His bitter sorrow. When I think of this, tears well up in my eyes. Tears flow down my face when I think of God's situation, so sad and painful. But the question is how much you have experienced that heart. In the Unification Church, do you relate to God with such a heart? You have not been thinking this way. (027-075, 1969/11/23) 2 The relationships we have brought for humankind are three-dimensional. They are not based on any philosophy or ideology that ever existed before. They are relationships originating in God's heart and His ideal of creation, and from the standard of original nature and character. These relationships are the essence of all relationships. Therefore, you must guard their absoluteness. These relationships have emerged here at Cheongpa-dong. The meaning of Cheongpa-dong is "green hills," and green hills symbolize the ideal. At Cheongpa-dong, people live singing and aspiring for the ideal world of peace and freedom, where people sing with hope that is fresh and green. Hence, our Headquarters Church in Cheongpa-dong is the base where we begin the four-position foundation on the horizontal plane. (049-206, 1971/10/10) 3 Cheongpa-dong Church was built on the site where a Buddhist temple stood long ago.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Japanese families lived there. This is such a historic building. After I was released from Seodaemun Prison in 1955, I had nowhere to go, and I did what I had to do to purchase this property. At first the condition of the house was so terrible that it was like a den of ghosts. Even the poles supporting the ceiling were tarnished black, and we had to wash them with harsh soda to get them clean. So many past relationships were intertwined within the structure. So after I bought this house, I resolved, "While I am living here, I will ease the pain in all those spirits' bitter, vengeful hearts that have accumulated over a long history. I will make those who whipped others kneel down, and expel those who kicked out the innocent people living there." Even now, I have not forgotten my resolution. Even if everyone leaves me and I am all alone, I will not forget. I will always keep the spirit to subjugate the entire fallen world. (051-227, 1971/11/28) 4 We must plant God's flag to save Korea. We gathered here to praise His victory in all the places where that flag is raised high. From the outside, this building may seem like nothing, but even though I live in this small and humble house, I have a dream of someday leading the whole world. Some people ask me why Cheongpa-dong Church Headquarters is so shabby, even as the Unification Church makes such a sensation worldwide. Indeed it looks shabby, even to me. Its roof was messy with broken tiles and in need of repair, but I leave it as it is without fixing it. It is not because I do not have the money, but I would rather save that money and spend it for the salvation of the Korean people. When my efforts grow from today's fledgling efforts to reach public awareness, the people of Korea will understand what the Unification Church has done for them. When the people come to know our history, how we have fought for this nation on their behalf, they will weep in deep repentance. We sincerely hope to see that day, and we are ever marching forward to welcome it. The problem is not whether the house in which I live needs many repairs. I cannot make my residence comfortable as long as this nation and its people have many wounds that need to be healed. (022-105, 1969/01/26) 5 You need to maintain your dignity as the members of the Headquarters Church. You need to be able to encourage and raise the spirit of overseas members who yearn to visit the original homeland, who yearn to meet the people there, who yearn to live there and even stay there forever. If you cannot be God's representatives, with His heart, and relate to all humanity from that position, you cannot be the people of the original homeland. You need to have the heart to welcome overseas family members who come to see the original homeland. Whether they are here for a day or two, or even a year, you should be able to live with them joyfully, and so close that your foreheads touch. Because they want to love you, you should be prepared to share all the joys and pains of life with them. Otherwise, you will certainly hurt the many members who will come from abroad to visit Korea and who regard it as their original homeland. Cheongpa-dong Church is not just an ordinary place. Countless members from Unification Churches from every corner of the world will come to Korea, regarding it as their original homeland. In particular, they will visit Cheongpa-dong Church and hold it in high esteem. Don't be discouraged because its current condition is not good. People who come to visit here will not expect to worship at a majestic palace. Rather, they will come longing to embrace this humble Cheongpa-dong Church. (023-087, 1969/05/11) |

첫댓글 참아버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我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