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풍경
-페이드아웃
고재종
삭풍과 더불어 당산나무는 허공을 후린다.
회청색의 하늘을 머리에 인 나무,
한번 떠나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동구에
우뚝하니 서서 해동갑하는 것이다.
말할 때마다 포르족족, 정떨어지게 하는 사람처럼
싸늘한 빛, 보다 더한 적막 이전의 무엇,
저 밑으로 멀어지는 신작로며
갈대로 덮인, 이제 상징마저 말라버린 강이라니!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다고 되뇔 때에
갈비짝을 등에 입은 것 같은 개 한 마리를 앞세우고
당산나무 밑으로 유모차가 세월을 끈다.
그렇게 끌리는 것인가, 구십 도로 꺾인 허리
끌려가긴 끌려가는 것인가, 호호백발
까마귀 몇 마리가 날아오더니
이내 당산나무엔 주렁주렁 까마귀 떼 열매다.
순간, 서녘부터 기이한 핏빛 놀이 번지자
까마귀들은 후두두둑 대숲으로 떨어지고
을씨년스런 게, 잠시 밝아지더니, 이내 어두워진다.
저녁인지 무엇인지 아무런 해명도 없이
저 가릴 데 없는 시간의 검은 냉갈령 속으로.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밖집 열두 식구」 등 7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바람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사람의 등불』, 『날랜 사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 문장』, 『꽃의 권력』, 『고요를 시청하다』, 『독각』과 육필시선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이 있고, 산문집으로 『쌀밥의 힘』,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감탄과 연민』과 시론집 『주옥시편』, 『시간의 말』, 『시를 읊자 미소 짓다』가 있다. 신동엽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흙의문예상,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송수권시문학상, 조태일문학상, 송순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