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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3)
이렇게 행하라
요 13:1-17 / 조상호 목사
전에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시중에 이러한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은 뒤에 저승사자가 데리러왔습니다. 저승사자는 천국과 지옥을 상징하는 집을 각각 보여주었습니다. ‘천국’이라는 간판이 달린 집에는 아주 아름다운 꽃과 탐스러운 열매가 가득 차있었지만, 사람들이 없고 한적해서 별로 재미없게 보였습니다. 반면에 ‘지옥’이라는 간판이 달린 집에는 생각과 달리 밝고 환한데다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땀을 뻘뻘 흘리며 디스코를 추고 있었습니다. 저승사자를 따라갔던 이 사람이 그 모습을 보는데 너무 재미있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승사자에게 “나, 지옥 갈랍니다.”하고는 지옥을 선택했습니다. 드디어 이 사람은 지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지옥에 와보니까 아까 보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바로 전에 본 것처럼 즐겁게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괴로워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저승사자에게 항의했습니다. “아니, 얘기가 틀리지 않습니까? 아까 보았던 집과는 완전히 딴판 아닙니까?” 저승사자가 그 말을 듣고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그것은 모델 하우스였지. 요즘 누가 모델 하우스 믿고 집을 사나?”
아마 이 이야기는 부실공사로 다리와 백화점과 도로, 철도, 등의 건축물들이 무너지면서 사회가 한참 시끄러울 때 누군가가 만들어낸 유머라고 생각됩니다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유머라고 생각합니다. 모델이 무슨 의미입니까? 모델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모형’, ‘모범’, ‘본보기’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진정한 본보기가 되는 사람을 찾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겉모습으로는 정말 훌륭하고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나중에 드러나는 본모습 때문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한 때는 청렴결백한 학자로 존경을 받던 사람이 나중에 보면 부동산 투기를 전문으로 하는 복부인으로 밝혀지기도 합니다. 가정문제 전문가로 수많은 강연과 저술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분이 나중에 보면 이혼을 하고 자녀 교육을 잘못하는 등 자기의 가정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사람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거리의 부랑아들을 데려다가 양육하고 교육시킨다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사람이, 나중에 보면 국가에서 보조해 주는 보조금과 각지에서 들어온 성금을 빼돌려 마구잡이로 부동산을 구입하는 등, 개인의 부를 위해 쓰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TV에 7차례나 천사원장으로 소개된 사람이 무려 7년 동안 어린 원생들을 성폭행한 파렴치범으로 구속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우리 인생의 본보기가 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겉보기가 아닌, “바로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을 따르자, 이 사람처럼 되어야겠다.”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모델은 필요한데, 배우고 싶고 따르고 싶고 닮고 싶은 모델이 필요한데, 불행하게도 정말 본보기가 되는 모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가 배워야 할, 우리가 따라야 할, 우리가 닮아야 할 모델 한 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이라는 대명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큰 명절입니다. 과거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된 날을 기념하여 온 가족이 양을 잡아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함께 먹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매우 의미있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미리 만찬이 준비되어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다락방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식사를 하던 제자들은 “누구 더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눅22:24). 제자들은 3년 반 동안 쫓았던 예수님께서 왕이 되신다면 누가 예수님의 우편에, 누가 예수님의 좌편에 앉을까 하면서 다툼을 하다보니, 제자들 간에 서먹서먹해지고 만찬석상이 썰렁한 분위기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서로 좋은 자리 차지하려는 마음 때문에 긴장이 감돌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계시던 예수님은 나무나 마음이 답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제 곧 로마병사들에게 잡히셔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습니다(3절). 그런데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다투고 있는 철없는 제자들을 보니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다말고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으셔서 옆에다 놓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외출 나갔다가 들어올 때 발을 씻기 위해 문간에 놓아둔 물 항아리에서 물을 퍼서 대야에 담아 오시더니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나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남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여러 가지 일들 중에 가장 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얼떨결에 예수님께 발을 맡겼습니다. 겨우 베드로 한 사람만 “주님 안 됩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라고 했을 뿐, 다른 11명의 제자들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예수님께 발을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명, 한 명, 이렇게 열 두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시고 나서, 벗어 두었던 겉옷을 입으시고 식사하시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12절과 13절을 보겠습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먼저 자기가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으로, 또는 주로 부르는데 너희 말이 옳다. 내가 그러하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세상적인 논리로 보면 제자들이 선생님의 발을 씻기면 씻겼지, 선생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단순한 선생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을까요?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제자들의 발이 너무 더러워서, 보다 못한 예수님께서 식사도 멈춘 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까요? 아니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서비스하려고 발을 씻겨 주셨을까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단순히 제자들의 발에 붙어있는 먼지나 떼를 벗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처럼 섬기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세족식에는 ‘나처럼 너희들도 섬기라! 내가 한 것처럼 너희들도 이렇게 섬기라!’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의식이었습니다.
1. 주님처럼 섬기라
만약 예수님께서 단순하게 제자들의 발에 붙어있는 먼지나 떼를 씻어주기 원하셨다면 당시에 떼밀이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그 집안의 노예나 종을 시켰을 것입니다. 팁을 두둑이 주시면서 “너희들이 저 사람들의 더러운 발을 번쩍번쩍 빛나게 하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제자들의 더럽고 냄새나는 저 시커먼 발들은 우유 빛 같은 아름다운 색깔로 빛나게 될지어다.”라고 말씀 한마디로 제자들의 발을 깨끗하게 씻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손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14절과 1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영광과 특권을 버리고 종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선생인 내가 너희 말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 내가 너희들에게 본을 보인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다른 사람, 특히 나보다 연약한 사람을 섬기고 있습니까? 물론 나보다 강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나보다 약한 사람, 나보다 부족한 사람, 나보다 덜한 사람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반면,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해지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은 존귀와 영광을 다 버리고 친히 낮아지셔서 섬김의 모범을 보이셨다는 사실입니다. 강자인 예수님이 약자인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시면서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말씀을 드려서 어떨지 모르지만, 좋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개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희 교회 남 선교회가 생긴지 2년이 되었고 올해가 3년째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참 많이 섬기셨습니다. 1년에 두 차례 공원에서 젊은 유학생 청년들을 위한 바비큐를 손수 해 주셨습니다. 사실 아무리 못해도 막내 동생 정도 나이가 되고 많으면 아들이나 손주뻘 되는 청년들을 위해 남선교회 회원들께서 백발을 날리며 손수 앞치마 두르고 젊은 사람들을 대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힘들게 구운 고기를 앉아서 먹고 있는 청년들이 야속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남선교회 회원들은 앉지도 못하고 서서 고기 구워서 앉아있는 젊은 청년들을 대접하며 섬기셨습니다. 또 1년에 수차례 교회 대청소를 위해 바람이 불고 추운 날씨에도 약속 시간인 10시 이전에 이미 오셔서 교회 주차장과 정원을 열심히 정리하시고, 젊은 사람들도 힘겨워 하는 일을 늦게까지 남으셔서 섬기셨습니다. 여선교회 회원들도 참으로 귀한 섬김의 손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매주 금요일 금요 찬양팀을 위해, 올해부터는 없어졌지만 그 동안 매주 토요일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해, 매주 주일날 수백 명을 위해 점심식사를 준비하였고 지금도 매주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유초등부, 중고등부, 청년선교회 등의 각종 행사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섬기셨습니다. 제가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러한 모습을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 교회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교회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도 이제는 자원해서 봉사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많은 교회들이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합니다.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모 한인교회도 돈 주고 청소용역업체를 고용해서 하나님의 전을 청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자원함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전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리하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보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또 한국 교회에서는 평범하게 믿음생활 할 때는 기쁘게 봉사를 잘 하다가도 직분을 받아 서리 집사가 되고, 안수 집사가 되고, 권사, 장로가 되면 영적으로 교만해져서 허리가 뻣뻣해져서 섬기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저희 교회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매주 빠지지 않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분도 계시고, 교회 버스가 비만 오면 물이 줄줄 새는 것을 안 어떤 분은 사업으로 바쁜 가운데 평일에 교회에 오셔서 교회버스 지붕을 수리하시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뜨거운 뙤약볕에서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교회 잔디를 아무도 모르게 깎으시고, 또 어떤 분은 전날 늦게 끝난 금요집회로 인해 육신적으로 피곤하실 텐데 아랑곳하지 않고 토요일 아침 일찍 나오셔서 교회 안팎에 있는 휴지를 오랫동안 주우시기도 하셨습니다. 또 매주일 다른 분들보다 최소한 1시간씩 일찍 나오셔서 찬양팀으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며 섬기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이 바로 주님이 모본을 보여주신 섬김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모본을 따라 섬기는 이러한 모습을 주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은 섬기는 손길을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제가 제자훈련에서 자주 말씀드리지만, 구원은 분명히 믿음으로 받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반면에 축복은 어떻게 받습니까? 순종함으로 받습니다. 17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모본을 따라 섬기면 뭐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까? 복이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남들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따르는 사람에게는 섬김의 복을 더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주님의 모본을 따라 섬기는 일에 앞장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일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주님께서 모본을 따라 주님처럼 섬기시므로 섬김의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서로 사랑하라
주님은 세족식을 통해 “너희들도 나처럼 섬기라”는 말씀을 하신 후, 가룟 유다가 배신 할 것을 예언하고 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새삼스러운 말씀은 아닙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그 분이 일일이 다 세어보았는지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라’는 말이 56번이나 언급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시는 13장에서부터 21장 사이에 무려 44번이나 언급되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강조한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34절을 보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난 후 제자들만 남았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들에게 한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떠나십니다. 이 말씀은 더 이상 육체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곁을 떠나시면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조직을 만들고 어떤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같이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에 하실 말씀도 많으실 텐데 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불법이 판을 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말세에(마24:12),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는 커녕, 자기만을 사랑하려고 하는 말세에(딤후3:1)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새 계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아무 조건도 없이 주님께서 우리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비록 상대방이 연약해서 실수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비난하고 저주하기 보다는 오히려 아가페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여사에 대해서 자주 소개해 드렸는데, 그분의 간증 속에 실린 감동적인 한 토막 이야기입니다. 코리 텐 붐은 그의 가족 모두가 유태인들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독일에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 생활을 했습니다. 라벤스브룩이라는 참혹한 수용소에서 가족들은 모두 죽고, 독일의 패전으로 코리 텐 붐만이 기적적으로 살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이 여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자기를 핍박하고 가족들을 잔혹하게 죽인 독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담을 주셨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명에 순종하여 독일 마을과 도시를 찾아다니면서 간증집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집회로 인하여 죄책감 가운데 사로 잡혔던 수없이 많은 독일 사람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었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독일의 시골 도시에서 말씀과 간증을 모두 마치고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데, 그 사람들 중에 어떤 한 사람이 그녀의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감옥에서 자기 언니 벳시가 죽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죄수들을 못살게 괴롭혔던 라벤스브룩의 수용소 간수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는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 간수를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주님께 속으로 몇 번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안 돼요.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할 수 없어요. 저 사람만은 안돼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정할 때마다 계속해서 “사랑하라. 그것은 명령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그녀는 하나님의 명령을 깨달아 “하나님, 저는 그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사랑할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라면 해보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느새 그 사람이 자기 눈앞에 다가오자, 그녀는 사랑의 감정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고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에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넉넉한 감정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녀는 그 간수를 사랑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기로 결단한 순간,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3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진정한 제자의 표시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의 기준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서 험담을 하고 다니는 원수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주님의 제자입니다. 나에 대해서 피해를 준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아가페의 사랑으로 품는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성도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는 노력보다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토마스 아 캠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말라. 당신 자신조차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비판은 비판을 가져옵니다. 미움은 미움을 낳습니다. 반면에 용서는 용서를, 이해는 이해를, 격려는 격려를,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황금률입니다. 내가 남들을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옵니다. 반면에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그것이 산울림이 되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되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일회용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결코 일회용 용서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결코 일회용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때만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때만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한번만 사랑하지 않으시고 세상 끝까지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주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수직적으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수평적으로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용납하되 끝까지 용납하며, 서로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벽 쌓는 자가 되지 말고, 다리 놓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가지고 어느 누구라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 아가페의 실력자들로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17 / 엄기호 목사
날이 갈수록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이 식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랑은 인스턴트 음식만큼이나 금방 데워지고 금방 식어버립니다. 사실 처음 불같이 사랑하는 것은 쉬워도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 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고,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여 주님으로부터 회개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름다운 소녀와 약혼한 한 청년이 군대로 떠났고, 그 청년 은 전투에서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랑한 처녀는 그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 그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낯선 글씨체의 봉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편지에는“전쟁 중에 양팔을 다 잃었으니 나의 남은 생은 다른 사람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소. 그러니 나는 당신을 자유롭게 해 주고 싶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 하지만 처녀는 즉시 기차를 타고 청년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의 눈이 그와 마주친 순간 그녀는 “나는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겠어요. 내 생명 다하는 날까 지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나의 양손이 당신을 도울 거예요. 그리고 당신을 돌봐 드 리겠어요.”라며 울먹였습니다. 본문 1절에 쓰인 “끝까지”(eis telos)라는 말은 “생애의 마지막까지”, “영원히 ”, “지극히”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장애인이 된 청년과 같습니다. 또 죄악에 물들어 있기에 흠투성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십 자가에 자신을 내어주면서까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예수님 앞에서 지난 시간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배 워야 합니다. 이에 오늘 가룟 유다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끝까지 사랑 하시’는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배우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랑의 식탁을 마련하셨습니다.
본문 3절에 ‘저녁 먹는 중’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음식은 인간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랑의 식탁에서는 언제나 평 상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금번 부산 APEC 회담에서 봤듯이 최고의 국빈, 중대한 회담을 위해서는 가장 훌륭한 만찬을 만들고자 최고의 요리사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사랑의 식탁을 통해 복을 받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다니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은 사랑의 식탁을 통해서 예수님과 허물없이 지내는 가정이 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요 12:2). 주님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의 기적 으로 광야의 식탁을 차리시고 남자만 5천 명을 먹이셨으며, 부활하신 주님은 예수님 을 부인한 죄책감으로 고향에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를 위해 해변에서 사랑 의 식탁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듯이 유월절 전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사랑의 식탁을 마련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종의 위치에서 제자들에게 봉사하시므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길은 전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먼지투성이였습니다. 건조기에는 그 길이 몇 인치씩 먼지 속에 파묻히고 우기에는 진흙투성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신고 다닌 신발인 샌들은 먼지나 진흙을 방지하는데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문 앞에는 물 항아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손님이 왔을 때 에는 종이 손님의 더러워진 발을 씻겼습니다. 그런데 이 만찬에는 발 씻어 줄 봉사자 가 없었습니다. 이는 모두가 높은 사람, 섬김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눅 22:24).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신문, 잡지, 일반 서적들이 다루는 특집 주제에 관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고가 되려고”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친히 상전으로서 종의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까요? 먼저 세상을 이별하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 이며,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사랑의 정신을 심어 주시고, 성도간의 사랑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상생활의 장면들 속에서 서로를 신실하게 섬김으로써 사랑을 주 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겸손과 봉사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눅 22:27).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의 수고를 땀을 흘리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가장 미워할 사람을 가장 가까운 곳에 앉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곁에 유다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유월절 떡은 비스듬히 누워서 받아먹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유다의 위치는 예수님의 왼편이었습니다. 요한의 머리가 예수님의 가 슴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머리는 유다의 가슴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좌우에는 유다 그리고 요한이 앉았습니다. 주인의 왼편 좌석은 연회장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이며 가장 친한 친구를 위한 자 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되어질 일을 아시고도 이 귀중한 자리에 유다를 초대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우 리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넷째, 가장 미워할 자에게 떡을 찍어 주셨습니다.
주인이 손님에게 음식을 떼어 주는 것은 특별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룻기 2장 14절 이하에 보면, 보아스가 얼마나 룻을 존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데, 그는 자기 옆으로 와서 떡 조각을 포도주에 찍으라고 룻에게 권했습니 다. 이처럼 떡을 떼어 찍어주는 것은 신뢰와 우정과 사랑의 표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한 조각의 떡을 떼어 유다에게 주었던 것은 특별한 사랑의 표시였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자신 옆에 앉게 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면서 유다의 어 두운 마음을 향해 호소하셨으나,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배 신할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사랑의 표시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예수님을 떠나 밖으로 나갔으며, 그때는 밤 이었습니다. 마음이 사랑의 등불을 끌 때 그곳은 언제나 밤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에게서 등을 돌릴 때 언제나 밤이 됩니다.
다섯째, 유다의 나쁜 마음을 알고도 숨겨 주셨습니다.
유다의 체면과 그의 생명을 생각하신 예수님은 그의 흉계를 끝까지 숨겨 주시면서 회 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만일 다른 제자들이 유다가 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면 유다는 살아서 방을 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자 유다를 저주하기보다 끝까지 사랑하며 용서해주셨습니다. “만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주님은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며, 그가 회개하도록 기도하는 성도 가 되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 시며 도와 주셨습니다. 오해받고 이용당하고 거절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 래 참으시고 사랑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에게 배반당하시고 모든 제자들이 자신의 곁을 떠났지만 그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과연 그분의 그 크신 사랑을 받으며 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웃을 위해 사랑의 식탁을 마련하고, 섬기며, 허물을 덮어주고 끝까지 사랑하고 있 습니까? 당신을 떠나 끝내 배반한 제자들에게 사랑의 식탁을 마련하신 주님, 종의 위치까지 내려와 서로 높아지려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므로 사랑을 나타내시고, 가장 미워해 야 할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자신을 반성하면서 한해를 정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보여주신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됩시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요 13:3-15 / 김광일 목사
'영등포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선우경식(鮮宇景植) 요셉의원 원장은 21년 동안 극빈층과 노숙자에게 무료로 진료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그는 1969년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킹스브룩 주이스 메디컬 센터에서 내과학을 전공했습니다. 귀국하여 한림대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전문의가 없으니 일주일에 한번만 와서 도와달라”는 대학후배들의 요청으로 1983년부터 달동네인 신림동에서 무료진료를 시작했습니다.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던 그곳에서 선우 원장은 후배들과 함께 환자를 업고 다니며 의료봉사를 펼쳤습니다. 4년 뒤, 무료자선 병원인 요셉의원을 세우고 본격적인 봉사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호의호식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난한 환자를 도와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무료 진료사업을 시작했다. 힘들고 어려울 땐 차라리 병이라도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지만 돈이 없어 아프다는 말도 못하는 환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개원 한 달만에 천만원의 적자가 났습니다. 주변에서는 석 달도 버티지 못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직접 쌀과 의약품을 얻어 왔습니다. 후원인이 늘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1997년에는 영등포 역사 뒤편 쪽방촌으로 옮겼습니다. 병원 외에 알코올중독자 재활센터인 ‘목동의 집’, 환자재활을 위한 ‘요셉의원 재활센터’를 갖췄습니다. 요셉의원을 거쳐간 환자는 42만 명.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저소득층 환자 사이에서 그는 ‘영등포 슈바이처’로 불렸습니다. 제1회 한미 참의료인상, 카톨릭대상, 호암상 사회봉사상, 대한결핵협회 복십자대상을 받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했던 선우 원장은 투병 중에도 틈나는대로 병원을 찾았습니다. 요셉의원 관계자는 “2006년 위암 수술을 받은 뒤 통원치료와 입원치료를 반복하면서도 병원을 찾는 일을 잊지 않으셨다. 몸이 조금만 괜찮아졌다 싶으면 병원에 나와 직접 환자를 보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개원 20주년을 맞아 지인들에게 “처음 의학을 공부하며 사람을 살리는데 이용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밤늦게 퇴근하는 길, 길가에 쓰러져 있는 환자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 치료하고 나면 한 사람을 더 살렸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다”고 글을 보냈습니다. 그는 마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에 중독된 사람과 같았습니다. ‘주머니가 부르면 딴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주변에 항상 말해 왔던 선우 원장은 뇌출혈로 2008년 4월 18일 오전 4시 카톨릭대 강남성모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사자격증 하나만 남긴 채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선우경식 박사, 그는 예수의 정신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처럼 발을 씻어주는 삶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본문은 유대인들의 명절 유월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드시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시던 예수께서 갑자기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십니다. 일어나서 웃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발을 씻기 위해 놓아둔 항아리에서 물을 퍼서 대야에 담아 오시더니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씻기기 시작합니다.
당시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나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남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극히 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입니까? 제자들의 스승입니다.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십니까?
첫째로 사랑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 독재정권에 반기를 들고 앞장섰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목사는 히틀러의 전쟁과 유태인 학살에 대하여 단호하게 비판하고 저항했습니다. “만일 미친 사람이 버스를 몰고 간다면 자기는 목사로서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겠다. 그 대신 달려가는 버스에 뛰어들어 미친 사람으로부터 핸들을 빼앗아버리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나치정권 전복을 계획하며 히틀러를 혹독하게 공격하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감옥에 끌려가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밤, 감옥에서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회퍼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는 평생 히틀러를 비판만 했지, 그의 영혼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그날 밤 본회퍼는 자신의 사랑 없는 항쟁운동을 깊이 회개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삶의 현실에서 얼마나 사랑으로 풀어가고 있습니까? 예수는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내가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몸소 행동으로 보이셨습니다. 사랑은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워도 사랑으로 행동하여야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자리에 배신자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도 씻어주셨습니다. 배신자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예수는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어주심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편과 사정에 따라 사랑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상이 누구든지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는 자기 사람들 즉 제자된 그리스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이 사랑의 표시입니다.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못 박히시고 대신 죽으신 것도 사랑의 표현이며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서로의 발을 씻기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대접만 받고자 하고 있다면 이미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랑으로 서로 발을 씻기는 일에 앞을 다투어 나서야 합니다.
둘째로 겸손으로
헨리 나우엔(Henri J. Machiel Nouwen)은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인생의 가장 높은 정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캐나다 토론토 근교의 데이 브레이크라는 공동체에 장애자들을 섬기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이 결단은 교수로서 끝난 것이며 마치 죽음을 택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한 죽음의 자리, 이 공동체에서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위대한 영성작가 헨리 나우엔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공동체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감동적인 글들을 쓰기 시작합니다. 작은 공동체를 넘어서서 우리 시대에 수많은 이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고귀한 삶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더니 하나님이 고귀하게 쓰신 것입니다. 나우웬은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웠던 때에 진정한 리더십에 대한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은 세상이 시사하는 방향처럼 높은 곳을 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직결되는 저 낮은 곳을 향한 움직임이다. 지배의 지도력이 아니라 고난 받는 종이신 예수가 보여주신 스스로 낮아지는 겸손의 길이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지도력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높아지기를 구하는 자마다 낮아지는 겸손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자신을 쳐서 스스로 낮추며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것부터 먼저 행하여야 합니다. 낮아지며 겸손하여지는 순간 비로소 바로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행위에서 예수의 겸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은 겸손으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비하로 스스로 종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더할 나위 없는 겸손을 드러내셨습니다. 큰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겸손을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세상은 낮은 자가 큰 자를 섬기지만 성경은 큰 자가 오히려 작은 자를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이러한 겸손만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일은 언제나 겸손에서 비롯합니다. 그러므로 맡은 직분이 크면 클수록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직분이 권세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발을 씻기는 일을 위해 주어진 것으로 알고 겸손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직분은 존귀하게 될 것이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직분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섬김으로
일본에 유명한 정치가 가타오카 켄기치(片岡健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정치범으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가장 더러운 화장실 청소를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수많은 죄수 중에 왜 하필이면 나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키나요?” 그리고 반발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한복음 13장을 읽다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다. 나 같은 죄인이 화장실 청소를 못 할 것이 무엇이냐? 화장실 청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죄수들의 발을 모두 닦아 주자.” 가타오카는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다니면서 만나는 죄수마다 발을 닦아 주었습니다. 감옥에서 가장 밑바닥 일만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런 정신으로 살다가 형기를 마치고 나와 국회위원에 출마하여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2대 국회의장이 되었습니다. 국회의장이 된 다음에도 출석하는 고오치 교회에서 언제나 현관에서 들어오는 교인들의 신발을 받아 신장에 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갈 때 제일 먼저 신장 앞으로 가서 신발을 꺼내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발을 닦아 주는 섬김은 아랫사람을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발을 닦아 주는 섬김은 숨은 곳을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발을 닦아는 주는 섬김은 숨은 곳을 사랑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발은 닦아 주고 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닦아주고 나면 표시가 납니다. 표시나지 않는 섬김이 우리가 해야 하는 진정한 섬김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께서 너희들도 이렇게 행하라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서로 섬기는 모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큰 자인가로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섬김을 받기만 원했지, 섬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섬김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발을 씻기는 것은 섬기는 일입니다. 무지하고 세상적인 판단 기준을 버리고 서로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기는 자들의 반열에서 기뻐하는 자들만이 참된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이 일에 선구자가 되셨고 자기를 따라서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오직 섬기는 일로 인생의 승부를 거는 존귀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시베리아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벨딩 줄무늬 다람쥐(Belding ground squirrel)는 주행성 쥐목동물입니다. 이들은 천적인 오소리가 접근할 때 위험 신호를 다른 동료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이 신호를 보낼 때 나는 소리로 자신의 위치가 발각돼 천적으로부터 공격받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연구에 의하면 신호를 보낼 경우,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공격받을 확률이 평균 2.5배정도 높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숨거나 도망치기보다 목숨을 걸고 다른 동료에게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가족과 동료를 위해 신호를 보낸다는 것은 먼저 천적을 발견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천적을 피해 도망친다면 살아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가족과 동료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면서 위험신호를 보내는 줄무늬다람쥐는 자신은 공격을 받아 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작은 미물이 그 깨달음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는 서로의 발을 내밀 뿐 겸손히 무릎을 꿇고 남의 발을 씻기려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모두 높은 데 마음을 두고 섬김을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에 따라 서로 발을 씻겨야 합니다.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베푸신 사랑이 희미해지려고 할 때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며 발을 씻어주시던 그 자리로 가야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려고 할 때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기시며 낮아지셨던 그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섬김만 받으려고 할 때마다 섬김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던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본을 보이신 예수처럼 사랑으로, 겸손으로, 섬김으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제자로 변화되어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
요 13:4-10, 14-15 / 이동원 목사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대만 제2의 도시인 카오슝(高雄)에 위치한 성광 신학교가 주최한 대만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중보기도 컨퍼런스에 저를 포함하여 우리 교회 41명의 교우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20여개 교단 90개 교회에서 대만 교회 사상 유례 없는 1,000명에 가까운 약 900명 이상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룬 대만 교회 사상 최대의 기도 성회였습니다. 대회 첫 시간부터 마지막 시간까지 등록자 대부분이 한 시간도 빠짐없이 참여하며 부흥을 사모하는 열심은 한국 교회에서도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감동시킨 것은 그 신학교의 총장인 진 길송(다니엘 첸)목사의 진지한 태도였습니다. 그는 세미나 처음부터 끝까지 맨 앞자리에 앉아 경청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여리고 작전’을 할 때도 참여자들과 함께 땅 밟기를 하며 자신의 봉사하는 도시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고,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던 밤도 밤늦게 마지막까지 교회에 남아 아픈 분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세미나가 다 끝난 마지막 날 저녁에 우리 한국에서 온 일행이 저녁 식사를 하며 야시장에 나가던 밤에도 밤늦게 까지 함께 동행 하며 우리를 섬겨 주었습니다.
본래 진 총장은 신학을 하기 전에 대만에서 핵무기를 만들던 명망 있는 과학자였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국제 사회의 개입으로 핵무기 계획이 무효화되는 계기로 자신의 남은 인생을 고민하고 기도하던 때 하나님의 인도로 신학을 하고 신학교수가 된 후에 그의 경건한 인격과 모범적인 리더십을 인정받아 신학교 총장이 되어 대만 최고의 신학교로 성장시키고 계신 분입니다. 제가 그 신학교에서 선교학과를 담당하며 섬기시는 한국인 선교사인 김 기문 선교사님에게 이런 신학교 총장이 단 한분이라도 한국에 계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자 김 선교사님은 진 총장에 대한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 주셨습니다. 김 선교사님이 진 총장과 함께 여행을 하며 호텔에 투숙을 하면 그는 이른 새벽에 먼저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만들어 놓고 조용히 자기가 잠깨어 일어나기를 기도하며 기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학교 총장이 학교 교수를 위해 아침 식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모습을! 그런데 그분은 신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그런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제가 진 총장에게 어떻게 그렇게 까지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수줍어하며 자기는 그냥 당연히 할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자기가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 흉내를 조금 내보는 것이라고 하면서 아기처럼 웃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 총장이 사모한 예수님의 리더십의 본질이 바로 섬김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마음을 지배하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의 죽음이나 고통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섬김이었습니다. 섬김은 그의 거룩한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잘 알려진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계신 장면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이것이 과연 일회성의 이벤트인지 아니면 정말 그분의 라이프스타일이었는지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요한복음 13장 1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예, ‘끝까지’입니다. 바로 그 ‘끝까지 사랑하심’이 자연스럽게 섬김의 실천으로 나타난 것뿐입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 자신은 섬김에 대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사셨을까요?
1. 예수님의 오심은 섬김이 목적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막10:45을 읽어 보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 이니라” 저는 이미 지난 설교에서 ‘인자가 온 것은’이란 표현은 예수님의 사명을 나타내는 대목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 땅에 오신 주님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일인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막10:45에 의하면 예수님의 또 하나의 사명이 바로 섬김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섬김이 과연 별개의 것일까요? 막10:45은 구원과 섬김이 결국 하나임을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섬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섬김은 결국 섬김의 대상에 대한 최선의 유익을 구함이 아니겠습니까? 주께서는 인류에 대한 최선의 유익은 우리의 구원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는 우리를 섬겨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목숨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다시 막10:45을 묵상해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이 바로 섬김이었습니다. 섬김의 절정의 표현이 바로 자신의 목숨의 드림이었고 그 결과가 또한 인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섬김은 목숨을 드리는 거창한 일 뿐 아니라 가장 작은 일로도 가능한 것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본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수건과 대야를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친히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가장 작은 일도 목숨을 드리는 일 못지않게 소중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자동차 주차할 때 이렇게 주차하면 이웃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배려하여 주차하고, 주차금지라고 쓰여 있으면 주차 안하는 일, 엘리베이터 타실 때 몸이 불편한 이웃들이나 노약자들을 먼저 배려하는 일,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분들이 먼저 다 밖으로 나오기까지 기다려 타는 일, 다른 분들이 엘리베이터 타도록 양보하고 자신은 에스컬레이터 이용하고 또는 층계를 이용하여 걷는 일, 나 하나라도 대중교통 이용하면 그 만큼 주차난 해소에 도움되리라고 생각하여 주일만이라도 대중교통 이용하는 일, 짐을 들고 있는 분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일, 교회 봉사에도 남이 가장 꺼려하는 일들을 자원하는 일, 복도에 주보나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줍는 일, 화장실에서 화장지 두장 쓸 수 있는 것을 한 장만 쓰는 일-이런 사소한 섬김에서 섬김의 정신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예수님은 누군가 자신의 제자 중에 발을 씻기는 섬김을 실천하는 모습을 기다리고 계신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발 씻음은 샌들을 신고 다니던 시절 더위가 심한 사막지대에서는 손님들에 대한 예절이어서 집 문 곁에 물동이와 대야를 준비했다가 귀한 손님이 도착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섬김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제자도 이런 섬김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요한복음13:3은 “저녁 먹는 중에”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사실 발 씻음은 저녁 전에 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때까지 제자들의 액숀을 기다리고 계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들 편에서 아무런 행동의 징후가 없자 본문이 시작되는 4절에 보면 그분은 마침내 저녁 드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아마 저녁 식사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서둘러 자신의 식사를 끝내시고 이 소중한 기회를 섬김을 가르치는 기회로 사용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실천 후에 주님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시지 않으셨습니까? 1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렇습니다. 그분의 실천은 '본'(example)이었습니다.
‘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따라 오게 하려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가 누구입니까? 그의 제자들, 예수의 제자들이 아닙니까? 제자의 의미가 바로 “따라가는 자들”(followers)이란 뜻이 아닙니까? 우리가 자신들을 예수의 제자로 자처한다면 예수의 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못할까요? 자신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내 한 몸 조금 편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작은 고난들을 견디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벧전2:21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대만 성광 신학교 진 총장의 고백처럼 그분의 흉내를 조금이라도 내어야 옳지 않겠습니까? 섬김은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3. 예수님은 섬김의 행함을 명령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섬김은 옵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섬김은 명령입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일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될 주인 되신 분의 명령이란 말입니다. 요한13:13-14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주라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섬김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분들을 향한 주인 되신 그 분의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선택은 하나입니다. 주인 되신 그분에게 어떻게 순종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 뿐입니다. 저는 지난 새해 첫 주일 이제부터 우리 교회가 이제부터 기존 타 교인 전입을 억제하고 전도하는 교회가 될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교회 모두에게 진지하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섬김을 고민해 주십사는 것입니다. 섬김은 보다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이들을, 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보다 편리하게 사는 자가 덜 편리하게 사는 이들을 섬기는 것이 성경적 원칙입니다.
저는 이 원칙이 우리 교회의 섬김에도 적용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는 빠른 시일에 여러 가지 면에서 축복을 누리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우리가 자랑이 아닌 책임으로 받아 드려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우리 보다 더 연약하고 힘들어하는 많은 교회들을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동안 우리 교회가 그런 노력을 안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느낍니다. 저는 그냥 연약한 교회들에게 선교 비를 얼마 지원하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주변에 약하고 어려운 교회들을 돕기 위해 우리 교인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한 성도가 한 교회에서 평생을 섬기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 모두는 한 날 모두 흩어져 개인적으로 죽음의 다리를 각자가 건너 천국에서 만나야 하고, 그 천국에서는 우리 모두 특정한 교회 소속도 교파 소속도 없이 존재해야 한다면 지금부터 그런 천국의 교제를 실천함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영구 제직들이 은퇴 연령인 70세가 되기 전 은퇴하실 수 있는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이런 분들이 아직도 건강 하실 때 우리 교회에서 배운 여러 훈련의 유익함을 활용하셔서 어려운 개척 교회들을 섬기실수가 있다면 얼마나 이 땅의 개척 교회들이 큰 힘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교회 시니어 부원들 중에는 이미 우리 교회에서 이른 아침 예배를 드리고 천안의 개척 교회에 가셔서 온 종일 섬기고 돌아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실 개척 교회에는 한 두 사람도 귀하지 않습니까? 거기서 안내하고 봉사하고 교사도 하고 필요한 일로 섬기시고--이 얼마나 보람 있는 섬김이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를 떠나지 않으시고 그렇게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아니면 1-2년 섬기시고 돌아 오실수도 있으십니다. 아니 거기서 여러분을 필요로 한다면 거기서 나머지 평생을 섬기실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영구 제직이 된 분들은 우리 교회의 명예 영구 제직으로 계속 남으시게 될 것이고, 우리는 여러분을 우리가 파송한 국내 선교사로 기억하고 기도해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곁에 있는 또 다른 중형, 대형교회로 옮겨 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작은 교회에서 섬기시다 보면 어려운 일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말없이 섬겨 주시고 “지구촌 교회에서는 이렇게 한다”는 등의 소리는 하지 마셔야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작은 교회를 더 힘들게 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섬기다가 정 힘이 들면 다시 돌아오셔서 우리 교회에서 충전하고 또 가십시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해도 무리가 없는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 지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해서 돌아오시는 분들을 여러 교회 왔다 갔다 하는 분으로 취급하시면 안 됩니다. 고향에 돌아온 선교사로 맞아 주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떠나실 때 그런 의향을 밝혀주고 떠나십시오.
은퇴란 말은 본래 영어로 ‘retirement’라는 뜻입니다.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고 달린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건강하시다면 그 건강과 지혜로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한번 섬겨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텐트 메이커로 해외 선교지에도 도전해 보십시오. 그 일에 지나치게 느껴지시면 국내 멀지 않은 곳, 우리가 조금만 도우면 금방 일어설 수 있는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개척 교회에 가서 섬겨 보십시오. 나는 수지와 분당의 여러 개척 교회들에도 우리 교우들이 좀 흩어져 섬기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이 번에 안 용호 목사님이 2월부터 개척하시는 신갈 지구촌 교회에도 많이 가서 섬겨 주십시오. 성도 여러분, 언제까지 우리는 소위 편리한 시설, 명성 있는 교회, 좋은 설교, 짜임새 있는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즐기기만 하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하늘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섬기시고자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이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동일한 삶을 명하고 계시다면 이제 우리도 겉옷을 벗고 수건을 들고 섬김을 결단할 시간이 되지 않으셨는지요? 언제 섬김 받는 자가 아닌 섬기는 자로서의 보람과 기쁨을 누려보시겠습니까? 아씨시의 성자 프랜시스의 라베르나 산에서의 기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님, 저에게는 주님처럼 섬기다가 고난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제 몸에는 못 자국이 없습니다. 저에게도 주님의 고난을 알게 해 주십시오.”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의 손과 발에 생긴 거룩한 5개의 못 자국을 우리는 거룩한 ‘상흔-스티그마타(stigmata)’라고 부릅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우리의 일생을 부끄럼 없이 마감하도록 거룩한 섬김의 상흔을 만들기 위한 기도와 결단이 필요한 때가 되지 않으셨는지요?
예수님 따라가기 – 섬기는 본
요 13:4-15 / 임현수 목사
제가 교회에서 일반 성도들에게 듣는 불평 가운데 종종 직분자들에 대한 불평 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집사가 장로에게 또는 집사가 권사에게 하는 불평하는 경우들 입니다. 그 중에 많은 불평이 우리 목자는 너무 가르치려고만 해요. 저 권사님은 항상 사람을 가르치려고 해요. 저 장로님은 언제나 설교하려고만 해요…. 이런 불만스러운 말 속에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설교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 사람들은 그 사람의 가르치려는 태도 때문에 저런 불평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너보다 높다는 느낌을 받을 때…. 내가 너보다 좀더 안다는 느낌이 전달 될 때, 나는 너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는 의식이 전달 될 때 ….사람들은 기분이 상하는 것 같습니다. 겸손하게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이런 문제를 놓고 따질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제 경우에도 해당 되리라고 생각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서도 이 문제는 성령 받는 오순절 이전까지 계속 되었던 갈등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 주님 이 다음에 권세를 잡으실 때 내 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하나는 우의정 하나는 좌의정 삼아 주세요. 치마 바람을 일으키는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막 10장)
도토리 키 재기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크냐? 라는 경쟁을 하면서 평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문제, 요한과 야고보 형제의 문제도 이런 문제였습니다.
여러분은 섬김이라는 말을 들을 때 느끼는 감정이 무엇입니까? 혹시 낮은 자리의 사람이 높은 신분의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 되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이라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우리를 섬겨 주십니다. 예수님도 섬기러 왔다고 말씀 하십니다. 사도는 강자가 약한 자의 약함을 담당하여야 하고, 강자가 약자를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상황에도 얼마든지 적용 될 수 있습니다. 롬 14장에 보면 신앙의 본질적인 것은 아닌데… 사람들이 각각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제시 합니다. 예를 들면 음식에 관한 경우가 많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개고기 먹어도 되느냐?
이것은 각 나라마다 문화가 각각 다르기에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신앙의 본질적인 것이 아닌 이상 저는 크리스챤들은 자기 민족과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고 자기 문화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것이 좋다고 생각 합니다. 또 음식 가운데도 믿는 사람들이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
이방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데 우리도 그런 것을 먹어도 되는가? 꼭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야 하는가? 나는 직업이 토요일 날 쉬는데 토요일에 예배 하면 안 되는가? 술은 먹어도 되는 건가? 술에 취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 음식과 날짜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와 갈등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이런 갈등은 문화권에 따라서 다르지만 우리들의 가장 예민한 현실 이기에 그냥 지나 갈 수는 없을 것 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가 발생 할 때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가르치기 시작 합니다. 그런 것은 안되지요. 어떻게 우상에게 드렸던 제물을 먹을 수 있습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 사도는 우상이 어디 있으며, 우상이 무슨 음식을 먹느냐? 음식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먹어도 되는 것이고, 양심을 묻지 말고 먹으면 그만이라고 가르칩니다. 먹는 사람이 믿음이 더 좋은 사람이다 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결론에 가서는 이렇게 말 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믿음이 좋아서 먹어도 되지만 믿음이 없고 양심이 약한 자를 실족 시키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안 하는 것이 좋다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하면 덕의 차원 입니다.
성경은 믿음에 덕을 세우라고 가르칩니다. 지식에 절제해야 한다고 가르칩니 다. 얼마 전에 말씀 드렸던 신앙의 8계단을 기억 하십니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을 섬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강자의 덕 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정신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면에서도 우리들이 따라가야 하는 삶의 모델이 되어 주신 것 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 섬김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섬김은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
이것도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 입니다. 섬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리는 것 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섬겨주려 오신 분 입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말구유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난했던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섬김이 MISSION 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들 의 삶의 목적이라는 것 입니다. 섬김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목사의 직분도 섬김입니다. 설교와 가르침은 은사인데… 그것으로 섬기는 것 입니다. 장로의 직분도 섬기는 것 입니다. 권사의 직분도 섬기는 것 입니다. 물론 집사의 직분도 섬기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지도력은 섬김의 지도력입니다. 군림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 리더쉽을 말하면서 예수님은 성자형의 지도자라고 했습니다.
지도자 가운데는 BOSS 형이 많습니다. 두목형입니다. 히틀러, 모택동, 전두환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HERO형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영웅형입니다. 나폴레옹, 알렉산더, 이순신 장군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GENIUS 형의 지도자 입니다. 미국의 키신저나 우리나라의 율곡 선생이나 세종대왕 같은 분은 천재형의 리더쉽을 발휘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자형의 지도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아브라함 링컨, 성 프랜시스, 테레샤, 간디 같은 분들이 이런 유형에 속할 것 입니다.
그래서 요즘 예수님의 리더쉽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SERVANTSHIP입니다. 다스린다는 개념보다 종의 개념을 강조하기 시작 합니다. 리더쉽은 종의 정신이 기본이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섬김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면 저와 여러분의 사명도 분명하지 않을까요? 이제부터 주님을 따라 섬김을 사명으로 알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시는 종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섬김은 예수님의 라이프스타일(생활양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발 씻기시는 장면도 한번 행사로… 이벤트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일년에 한번 수련회 때 하는 세족식 행사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섬기시고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요 13:1절을 보겠습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니라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가롯 유다에 대해서도 베드로에 대해서도 끝까지 참으십니다.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오래 참으십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사명이란 끝까지 하는 것 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언제나 중도 에 그만 두는 것 입니다. 작심삼일로 끝나는 것 입니다. 이벤트성으로 흉내 내는 정도 하고 마는 것 입니다.
한번 돌보면 끝까지 돌보고, 한번 사랑하면 끝까지 사랑하고, 한번 믿었으면 끝까지 믿어주는 것 이것이 섬김의 정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은 일종의 평생 습관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습관에 따라….
마지막 최후의 만찬석 에서도 본을 보이십니다. 본문에서 주의할 구절 가운데 저녁 먹는 중…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유대 관습은 식사 전에 손님들의 발을 씻겨 드리는 것이 기본 예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 아무도 그런 일에 신경쓰는 제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시던 주님은 식사 도중에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기 시작 하십니다. (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 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무엇이든지 example 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지금 본을 보여 주고 계신 것 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입니다. 지난 주에는 기도하시는 모본을 보이신 주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시 주님을 따라 가자는 것 입니다. 우리는 지금 섬김의 본이 되시는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섬김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이기심 때문 입니다. 자기의 입장, 자기의 체면, 자기의 체통, 자기 의 위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 하기 때문 입니다. 남자가 어떻게 그런 일을.. 여자에게 어떻게 그런 일을… 이런 생각이 섬김을 방해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의 도를 말씀하시면서 항상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자기부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을 말하면 무슨 발 한번 씻어주는 것이 대단해서 미션이라는 말을 쓰는가? 생각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언제나 지극히 작은 것 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대하여 한 것 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작은 친절, 작은 관심, 작은 배려, 작은 양보, 작은 봉사, 작은 섬김은 어디 에서부터 시작 될까요? 주차장에 들어오는 차량을 맞이하는 작은 친절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차를 주차 할 때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차를 주차하는 일에서 부터 시작 됩니다. 교회 식당에서 식사 하실 때, 수고 하시는 분들에게 한마디라도 감사를 표현하고, 줄 설 때도 서로 양보하고, 설겆이 봉사도 하고, 봉사 할 때도 남들이 하기를 꺼려 하는 일들을 찾아서 하고, (지난 주 콩나물 삶는데 남자 분 두분이 일하는 보습이 보기에 아름다웠습니다)
젊은 부부를 위해서 어린아기 봐주기(예배 시간), 다음 사람을 생각해서 화장 실 개끗하게 닦는 것, 주변 청소하기… car pool 을 하면 주차 문제도 해소되 고, 환경오염도 줄고, 이웃사랑도 나누고, 삼중 사중 효과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이메일로도 섬길 일이 많습니다. (방지일, 전종석 어른들도 이메일로 은혜 끼쳐 주십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 곁에서 당분간 힘이 되어 주고, 새신자들을 당분간 친절하게 도봐주고, 시험당한 성도를 만나면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실 것이고, 감당치 못할 시험은 안주신다고 가르쳐 주고, 중보로 기도해 주고, 직장을 잃고 사업에 실패한 친구들에게 욥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가 나를 단련 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올 것이라는 말씀도 들려주고… 그러면서 말과 행동으로 섬겨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 입니다. 이런 섬김의 삶이 평생 습관이 되어 주님을 따라가시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3. 섬김은 주의 명령입니다.
명령이라고 하면 강제성을 띤 것 처럼 들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을 말씀 하실 때에는 명령하십니다. 전도도, 기도도, 섬김도 명하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면, 그 분이 나의 사령관이라면 그 분의 명령에 마땅히 순종해야 할 것 입니다. 본문 요13:13-14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요 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명령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옵션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 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서로 눈치 보며 아무도 발을 씻겨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일어나 본을 보이신 것 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도 이렇게 행하라고 명하십니다.
내게 지금 물질의 넉넉함을 주셨다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기도하며 고민하셔야 합니다. 내게 지혜와 지식의 은혜를 주셨다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내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한 힘과 건강을 주셨다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약한 사람들을 섬길 것인가?... 내게 여호와의 기업인 자식의 축복을 주셨다면 그들을 잘 길러서 어떻게 섬길 것인가? 우리교회가 부흥되어 큰 교회가 된다면 어떻게 작은 교회를 섬길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은퇴하신 분들은 나의 실버 인생을 어떻게 주님게 드려 섬김의 삶을 사실 것인가를 생각 하셔야 합니다. Silver mission, tentmaker의 모델들이 필요합니다.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지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후배 들이 따라 올 것 입니다. 섬김은 명령입니다. 명령에는 순종만이 필요합니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순종하면 주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 입니다. 순종은 본성을 극복하는 것 입니다. 섬김의 도는 우리들의 순종하는 자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입니다.
부산 호산나 교회 최홍준 목사님이 쓰신 책 가운데 <장로,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한 자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회 생활에 무척 열심인 자매입니다. 주일예배는 물론, 주중 성경공부와 새벽기도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회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자매입니다. 그런데 이 자매의 마음 속에 늘 자리잡고 있는 걱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직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 이었습니다.
아무리 설득하고 간청해도 교회 나가는 것은 항상 거절하던 남편에게 이 자매는 어느 날 교회 대각성 집회 하는 날 다시 한번 권했으나… 남편은 냉정히 거절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자매는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여보! 이번에 딱 한번만 같이가자. 그러고도 당신이 가기 싫다면 이제 더 이상 말 안 할께, 응?>
자매의 간절한 부탁에 남편도 슬그머니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했습니다. 대신에 단서가 붙더랍니다. <딱 한번만이다> 드디어 주일에 자매는 남편의 손을 잡고 교회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할 때는 눈을 감고… 찬송하면 따라 부르고…별로 거부감없이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매는 내심 어떤 기대를 갖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돌아오자 남편은 양복을 훌훌 벗어 던지면서 말하기를 “됐지? 한번만 간다고 했어! 이제 또 교회 가자고 하지 않기다” 뭐라고 할말이 없었 던 자매는 기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달 후 이 교회에서 목양 장로 사역이 시작되었고… 어느 날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자매님 안녕하세요? 아무개 목양 장로입니다. 그리고… 몇일 후 그 장로님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자매의 집에 심방을 왔다고 합니다. .. 착하고 친정 아버지 처럼 느껴진 장로님은 기도의 제목을 물었고 이 자매는 남편의 이야기 를 했다고 합니다. 장로님은 기도하겠다고 하면서 남편의 연락처를 물었습니 다. 그날 저녁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장로님이라는 분이 자기에게 전화 한것을 말했고… 마음이 조금 움직이면서 <한번 더 나가보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몇개월 만에 다시 교회에 나온 남편이 교회에 도착 했을 때 전화 하셨 던 장로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 나이드신 어른이 친절하게 영접해 주시 는 모습에 남편의 마음도 조금 열렸다고 합니다. … 장로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분의 손을 잡아 끌고 교회 구석 구석을 구경시켜 주고, 예배가 시작 되자 남편 옆자리에 앉아 기도해주고 함께 찬양도 불러주고 남편이 어색해 하지 않게 배려 했다고 합니다.
예배후에 식사 하자며 지하 1층 식당으로 갔습니다. 나이드신 분이 가자고 하니 거절 할 수 없어 따라가는 눈치였지만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습니다. 장로님은 그 부부에게 손수 음식을 갖다 주며 이것 저거 챙겨 주었다고 합니다…. 어느덧 남편도 그 장로님과 편하게 대화하며 식사하기 시작 합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이 말하길… 당신네 교회 장로님들은 다그래? ..그럼…남편왈.
“사실 내가 교회 안 나가는 이유가 장로들 때문이었거든. 나도 어렸을 때 교회 다녔는데, 어찌나 장로들이 교회에서 왕노릇 하던지… 그때 내가 장로 아들하고 친하게 지냈는데, 교회 사람들이 그 애가 장로 아들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못하는거야. 그리고 개네 아버지도 교회에 헌금을 얼마했네 …하면서 너무 권위적인 모습이었지. 보통 장로들이 다 그런 모습이더라구. 나는 뭐 우리 아버지가 교회 다니는 것도 아니고, 달랑 나혼자 교회 나갔었는데, 그런 모습이 보기 싫어서 안나게 됐지. 그런데 오늘 그 장로님은 안그러시더라고. .. 정말 좋으시던데? 그래서 한번 교회 다녀 보기로 했어.”
그 후 그 남편은 장로님과 일대일 성경공부도 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버 지처럼 찾아가 의논도 하고, 신앙생활의 즐거움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분은 그 교회에 집사로 임명됩니다. 이 자매는 이 모든 일이 목양 장로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다고 고백합니다. 그 교회는 이런 행복한 간증들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계속 말씀 하십니다. <서로 서로 섬겨라> <서로 종이 되라> <높은데 처하려 하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 <스스로 낮추라> <자기를 낮추는 자는 주께서 높이시리라>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왜 섬기라 하실까요?
1. 섬김에는 기쁨이 있기 때문 입니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행복하면 그 행복은 나에게도 전염되어서 나도 행복해집니다. 오지에서 불편하게 살면서도 선교사님들이 헌신하는 이유는 섬길 때 오는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 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 고 증거합니다.
2.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져 가기 때문 입니다. 섬김을 통해 약한 자들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 입니다. 있는자가 없는 자를 섬기는 것 입니다. 건강한 자가 병약한 자를 섬기는 것 입니다. 우리 교회에 섬기는 자가 많을 수록 교회는 든든하게 세워질 것 입니다.
3. 섬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목적은 그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섬김의 흔적이 있느냐는 것 입니다. 이것을 성흔이라고도 합니다. 섬김을 통해 육체의 고통의 흔적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는 아픔을 당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수치와 모욕과 욕먹음을 당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상처 가 무수했습니다. 그러나 주 앞에 설 때 이런 성흔 밖에는 보여 드릴 것이 없을 것 입니다. 주님은 이 상처를 어루 만지시면서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면서 위로해 주실 것 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4. 섬김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 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의 삶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것 입니다.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