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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삼도(讀書三到)
독서를 하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뜻으로, 입으로 다른 말을 아니하고 책을 읽는 구도(口到), 눈으로 다른 것을 보지 않고 책만 잘 보는 안도(眼到), 마음속에 깊이 새기는 심도(心到)를 말한다.
讀 : 읽을 독(言/15)
書 : 글 서(曰/6)
三 : 석 삼(一/2)
到 : 이를 도(刂/6)
(유의어)
삼도(三到)
독서삼매(讀書三昧)
출전 : 훈학재규(訓學齋規)
독서(讀書)의 법은 구도(口到), 안도(眼到), 심도(心到)에 있다 함이니, 즉 입으로 다른 말을 아니하고, 눈으로 딴 것을 보지 말고, 마음을 하나로 가다듬고 반복(反復) 숙독(熟讀)하면, 그 진의(眞意)를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책을 읽을 때는 주위 환경에 휘둘리지 말고 정신을 집중하라는 말로, 삼도(三到)란 심도(心到), 안도(眼到), 구도(口到)를 가리킨다. 마음과 눈과 입을 함께 기울여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독서삼매(讀書三昧)라고도 한다.
본래 삼매(三昧)란 불교에 있어서의 수행법으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켜 감각적 자극이나 그 자극에 대한 일상적 반응을 초월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매(三昧)에 빠지면 옆에서 벼락이 쳐도 모르는 것이다. 삼도(三到)도 그런 경지를 의미한다.
동양권에서의 교육열은 예(古)부터 대단하여,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첫머리에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하였고, 맹자(孟子)도 진심편(盡心篇)에서 군자(君子)에게는 세 가지의 즐거움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그를 교육하는 것(得天下英才而敎育之)’이라고 하였다.
송대(宋代)의 주자(朱子)는 다음과 같은 권학가(勸學歌)를 지어 학문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하고 있다.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학난성)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
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
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
소년은 금방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잠깐의 시간이라도 가벼이 하지 말라.
못가의 풀들이 봄꿈에서 깨기도 전에
마당가의 오동나무잎이 가을 소리를 낸다.
동양권에서는 관직에 나가는 것이 부(富)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는 길이었다. 그리고 관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거쳐야 했으므로, 자연히 교육과 학문을 중시하게 되었다. 책을 읽는, 즉 독서하는 마음 가짐을 강조한 말이 이 독서삼도(讀書三到)이다.
링컨 대통령은 가난해서 책을 살 수가 없어 주로 이웃집에서 책을 빌려다 읽었다. 한번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전기를 빌려와 밤 새워 읽다가 잠든 사이 비가와서 새 책이 마냥 젖고 말았다.
그는 다음날 책 주인을 찾아가 사과하고 대신 그 집 일들을 거들어줬다. 그에 감동한 책 주인은 링컨에게 그 책을 주었고 그는 반복해서 그 책을 읽어 장차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다.
당(唐)나라의 문호 한유(韓愈)는 아들 창(昶)에게 독서를 권유하기 위해 시(詩) 한수를 써 주었다.
時秋積友霽(시추적우제)
新凉入郊墟(신량입교허)
燈火稍可親(등화초가친)
簡編可舒卷(간편가서권)
바야흐로 가을 장마도 말끔히 개고
마을과 들판엔 서늘한 바람 불어오네
이젠 등잔불도 가까이 할 수 있으니
책 한권 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리
가을 밤은 날씨가 서늘하여 책 읽기에 여간 좋지 않다. 그러나 그냥 읽어서는 효과가 없다. 마음(心)과 눈(眼) 그리고 입(口)을 함께 기울여 읽어야 한다. 심도(心到) 안도(眼到) 구도(口到) 즉 독서삼도(讀書三到)를 해야 한다.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집중해서 읽어야만 독서삼매(讀書三昧)경에 빠질 수 있다. 여기서 심도(心到)를 더 중시 여긴다. 마음으로 하는 독서야말로 더럽혀진 영혼을 맑게 해주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아침 독서 10분 운동을 펼친다. 정규 수업 직전 10분간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도록 하는 것이다. 국민독서장려를 위해 활자문화진흥법도 만들었다.
프랑스에서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려면 생텍쥐베리의 인간의 대지, 빅토의 위고의 레미제라블, 알퐁스 도데의 풍차간의 편지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 이 정도의 책을 안 읽은 사람에게 장교를 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스포츠 심리학 용어로 러너스 하이(Runners·high)란 말이 있다. 마라톤 할때 느끼는 행복감을 뜻한다. 달릴때 얻는 쾌감이 러너스 하이라면 독서와 사색을 통해 리더스 하이(Readers·high)를 얻는다면 사람들은 더 행복해 질 것이다.
공자(孔子)도 가죽끈으로 엮은 주역(周易)을 끈이 세번이나 낡아 끊어질 때까지 정독했다고 하여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고사가 생겼다.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이란 말처럼 이 가을에 책 한권이라도 읽자.
독서삼도(讀書三到)
송나라 주희(朱熹)가 훈학재규(訓學齋規)에서 말했다.
讀書有三到, 謂心到眼到口到.
독서에는 삼도(三到)가 있다. 심도(心到)와 안도(眼到), 구도(口到)를 말한다.
心不在此, 則眼不看仔細.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눈은 자세히 보지 못한다.
心眼旣不專一, 却只漫浪誦讀, 決不能記, 記亦不能久也.
마음과 눈이 한곳에 집중하지 않으면 그저 되는 대로 외워 읽는 것이라 결단코 기억할 수가 없고, 기억한다 해도 오래가지 못한다.
三到之中, 心到最急.
삼도 중에서도 심도가 가장 급하다.
心旣到矣, 眼口豈不到乎.
마음이 이미 이르렀다면 눈과 입이 어찌 이르지 않겠는가.
이른바 독서삼도(讀書三到)의 얘기다. 비중으로 따져 심도를 앞세우고 안도와 구도의 차례를 보였다.
안도는 눈으로 읽는 목독(目讀)이다. 구도는 소리를 내서 가락을 타며 읽는 성독(聲讀)이다. 심도는 마음으로 꼭꼭 새겨서 읽는 정독(精讀)이다.
눈으로만 읽으면 책을 덮고 남는 것이 없다. 입으로 읽는 것이 좋지만 건성으로 읽으면 소리를 타고 생각이 다 달아난다. 손으로 베껴 쓰며 읽는 수도(手到)를 하나쯤 더 꼽고 싶은데, 목도든 구도든 수도든 모두 심도에 가닿지 못하면 헛읽은 것이다.
주희의 독서법을 한 단락 더 소개한다.
端莊正坐, 如對聖賢, 則心定而義理易究.
단정하게 바로 앉아 마치 성현을 마주한 듯 한다면 마음이 안정되어 의리가 쉽게 들어온다.
不可貪多務廣, 涉獵鹵莾, 纔看過了, 便謂已通.
많이 읽기를 욕심내거나 폭을 넓히기에만 힘을 쏟아 대충대충 보아 넘기고는 이미 알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小有疑處, 卽更思索, 思索不通, 卽置小冊子, 逐日抄記, 以時省閱資問, 無故不須出入.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다시 사색하고, 사색해도 통하지 않으면 바로 작은 공책에다 날마다 베껴 기록해 두고, 틈나면 살펴보고 물어봐야지 까닭 없이 들락거려서는 안 된다.
少說閑話, 恐廢光陰.
뜻 없는 대화는 줄여야 하니 시간을 낭비할까 걱정된다.
勿觀雜書, 恐分精力.
잡서는 보지 말아야 하니 정력이 분산될까 싶어서다.
목표를 세워 읽는 다독과 닥치는 대로 두서없이 읽는 남독(濫讀)은 자기만족이야 있겠지만 소화 불량이 되기 쉽다.
암송하라! 그러면 의미가 열린다
독서삼도(讀書三到)는 책을 읽을 때 마음이 이르러야 하고(心到), 눈이 이르러야 하고(眼到), 입이 이르러야 한다(口到)는 말이다.
글 읽기는 백 아름쯤 되는 굵은 나무를 조금씩 꾸준하게 베어가는 일이다. 독서란 눈과 입에 완전히 익고, 마음으로 이해해야 비로소 얻는 바가 생긴다
조선후기 학자인 신후담은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만 1000번 이상을 읽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은 매번 우리를 곤혹스럽게 했다. 시골 중학교를 막 마치고 주변의 중소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즐거움과 약간의 설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첫날 국어 시간은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큰 몸집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국어 선생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앞으로 국어 교과서에 나와 있는 모든 작품은 암기를 해야 한다. 단, 설명문이나 논설문과 같은 글은 암기에서 제외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 의문을 풀기도 전에 나는 교과서 첫 단원에 수록되어 있던 박두진과 이수복의 시를 외워야 했다. 시의 즐거움을 미처 알기도 전에 우리는 교과서의 작품을 날 것 그대로 머릿속에 집어 넣어야만 했다.
수업 중에 선생님께서는 마치 우리의 방심에 날카로운 비수를 날리듯 암기한 상황을 점검하셨고, 그 질문은 누구에게 떨어질지 몰라 수업 시간 내내 노심초사하면서 마음을 졸였다.
그렇게 현대시를 배우는 단원이 끝나기 무섭게 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을 외우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암기를 하다 보니 어떻게 국어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어느새 한 학기가 훌쩍 지나고 있었다.
암기를 위주로 하는 국어 수업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이상하게도 고등학교 2학년까지 같은 방식을 고수하는 선생님을 만난 덕에 우리는 대부분의 작품을 외우게 되었다.
고전문학이든 현대문학이든, 수필이든 ‘기미독립선언문’ 등 비문학 분야의 글이든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작품은 무엇이든 깡그리 외워버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 그 속뜻에서 감동받을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수업 시간에 내가 지목되면 그냥 외워야만 했고, 외우면 그만이되 외우지 못하면 가차없이 점수를 깎여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각박한 환경 속에서도 내가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꺾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교과서 밖의 책들을 꾸준히 읽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즐거움을 일찍 알았던 탓일 것이다.
교과서를 외우는 한편 새로운 문학 작품을 통해서 좁은 교실을 넘어 세계와 우주를 넘나드는 그 즐거움은 암기 수업의 괴로움을 잊게 해주었다.
그런 경험 탓인지 나중에 국어교육을 공부하면서 암기식 수업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작품 해석과 감상에서 얼마나 동떨어진 방법인지 절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 암기식 수업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암기식 수업 방법은 비난을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옛 선인들은 암송이 모든 공부의 기본이었는데, 그들은 왜 그런 방법을 비난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던 것일까?
🔘 외울 만큼 반복하며 읽고 또 읽고
안정복(安鼎福)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학자인 신후담(愼後聃)은 글 읽기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성현의 글은 만 번쯤 읽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백 아름쯤 되는 굵은 나무를 베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반드시 큰 도끼로 찍어야 벨 수 있을 것이다.
성현의 말씀은 평범한 책들과 그 깊이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뜻을 파악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만 번은 읽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여러 차례 읽기가 힘드니 한두 번 대강 훑어보고는 마치 그 의미를 다 안다고 자부한다. 이것은 큰 나무를 벤다고 하면서 낫을 들고 껍질이나 베끼다가 그만 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발언에 걸맞게 신후담의 독서 이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는 후손들에게 자신의 독서 이력을 글로 남겨서 경계로 삼도록 했다.
그 글에 의하면 중용은 만 번을 읽은 뒤로는 수를 세지 않았다고 한다. 서경과 주역은 수천 번을 읽었고, 논어와 맹자는 1000번을 넘게 읽었으며, 노자와 장자는 수백 번, 예기와 춘추는 수십 번, 주자대전과 성리대전은 평생토록 읽었다고 했다.
그 외에도 많은 책의 읽은 횟수를 기록해 놓았는데, 정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물론 이보다 더한 사람도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김득신(金得臣)은 자신의 능력이 남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밤낮으로 공부를 하며 책을 읽었는데, 특히 사마천이 쓴 '백이전'을 좋아하여 1억1만8천 번을 읽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대부분의 글은 암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집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고 붙였다.
안정복(安鼎福)은 위와 같은 내용을 기록하면서 책 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 차례 강조를 한다. 그러면서 책을 읽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괜히 자신의 좁은 생각으로 책의 내용을 함부로 해석하면서 왜곡시키는 것은 위험하다는 말이다.
근대 이전의 지식인들의 독서 방식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 한켠에 얕잡아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무식하게 외우기만 하면 공부가 되느냐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암송이란 효율적이지 못한 공부 방법일 수도 있다. 내용을 이해하고 원리를 알면 그것으로 족하며, 그 공부가 개인의 상상력과 만나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유를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공부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암송에 의한 방식은 자칫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의 발현을 막고 개인의 사고를 규격화함으로써 넓은 학문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고도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어떤 공부를 막론하고 외우는 것이 완전히 배제된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중요한 개념이나 이론가, 그들의 이론적 모형, 중요한 발언 등은 외우고 있어야 그 토대 위에서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펼쳐나갈 수 있을 게 아닌가?
독서삼도(讀書三到), 즉 독서란 눈과 입에 완전히 익고 마음으로 이해해야 비로소 얻는 바가 있다
독서삼도(讀書三到)라는 말이 있다. 주희(朱熹)의 훈학재규(訓學齋規)에 나오는 말로, 책을 읽을 때 마음이 이르러야 하고(心到), 눈이 이르러야 하고(眼到), 입이 이르러야(口到) 비로소 얻는 것이 있다는 의미다.
암기식 방법이 완벽하다거나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서 눈과 입에 올라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어찌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공부의 기본은 역시 책 읽기에서 시작한다. 중요한 책이라면 열 번 백 번이라도 읽어서 깊이 있고 단단한 학문의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똑같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책을 찾아서 다양하게 읽는 독서 풍토, 독서량을 높이기 위한 노력 등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야 학문의 미래를 점칠 수 있겠다.
근대 이전의 독서광들이 그저 책만 읽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읽은 책을 자신의 힘으로 삼아서 좋은 문학적, 학문적 성과를 남겼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讀(읽을 독, 구절 두)은 ❷형성문자로 読(독)의 본자(本字), 读(독)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賣(매, 독)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讀자는 ‘읽다’나 ‘이해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讀자는 言(말씀 언)자와 賣(팔 매)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賣자는 물건을 파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팔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물건을 팔고 나면 얼마를 벌었는지 셈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팔다’라는 뜻의 賣자에 言자가 결합한 讀자는 물건을 팔아(賣) 돈을 센다(言)는 것을 뜻했었다. 讀자에는 아직도 ‘계산하다’나 ‘세다’라는 뜻이 남아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讀자는 돈을 세며 중얼거린다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후에 이러한 뜻이 확대되어 ‘읽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讀(독, 두)은 ①읽다 ②이해하다 ③세다 ④계산하다 ⑤구절(句節) ⑥읽기 그리고 ⓐ구절(두) ⓑ구두(읽기 편하게 구절에 점을 찍는 일)(두) ⓒ이두(두) ⓓ풍류의 이름(두)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책을 그 내용과 뜻을 헤아리거나 이해하면서 읽는 것을 독서(讀書), 책이나 신문이나 잡지 따위의 출판물을 읽는 사람을 독자(讀者), 글을 읽는 소리를 독음(讀音), 글을 읽어서 이해함을 독해(讀解), 지도나 도면을 보고 그 내용을 해독함을 독도(讀圖), 글을 막힘 없이 죽 내려 읽음을 독파(讀破), 글을 읽어서 익힘을 독습(讀習), 그림을 관상하며 음미함을 독화(讀畫), 책을 읽고 난 뒤를 독후(讀後), 단어 구절을 점이나 부호 등으로 표하는 방법을 구두(句讀), 자세히 살피어 읽음을 정독(精讀), 소리를 높이어 밝게 읽음을 낭독(朗讀),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읽음을 통독(通讀), 책이나 신문이나 잡지 등을 사서 읽는 것을 구독(購讀), 풀이하여 읽음을 해독(解讀), 차례나 방법 및 체계가 없이 아무렇게나 읽음을 남독(濫讀), 식사나 축사 등을 대신 읽음을 대독(代讀), 글을 빨리 읽는 것을 속독(速讀), 많이 읽음을 다독(多讀), 열심히 읽음을 열독(熱讀), 글에 맛을 들여 자세히 읽음을 세독(細讀), 글을 소리내어 읽음을 송독(誦讀), 소리를 내지 않고 글을 읽음을 묵독(默讀), 익숙하게 읽음으로 글의 뜻을 잘 생각하면서 읽음을 숙독(熟讀), 독서를 하기에 적당한 세 여가 즉 겨울이나 밤이나 비올 때를 이르는 말을 독서삼여(讀書三餘), 책을 읽느라 양을 잃어 버렸다는 뜻으로 마음이 밖에 있어 도리를 잃어버리는 것 또는 다른 일에 정신을 뺏겨 중요한 일이 소홀하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을 독서망양(讀書亡羊), 책을 읽음으로써 옛 현인과 벗한다는 말을 독서상우(讀書尙友),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책읽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상태 또는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독서삼매(讀書三昧), 글 읽기를 백 번 한다는 뜻으로 되풀이 하여 몇 번이고 숙독하면 뜻이 통하지 않던 것도 저절로 알게 된다는 말을 독서백편(讀書百遍),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공부한다는 뜻으로 바쁜 틈을 타서 어렵게 공부함을 이르는 말을 주경야독(晝耕夜讀), 쇠귀에 경 읽기란 뜻으로 우둔한 사람은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우이독경(牛耳讀經), 갠 날에는 밖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비오는 날에는 책을 읽는다는 뜻으로 부지런히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공부함을 이르는 말을 청경우독(晴耕雨讀) 등에 쓰인다.
▶️ 書(글 서)는 ❶회의문자로 书(서)는 간자(簡字)이다. 성인의 말씀(曰)을 붓(聿)으로 적은 것이라는 뜻이 합(合)하여 글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書자는 ‘글’이나 ‘글씨’, ‘글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書자는 聿(붓 율)자와 曰(가로 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聿자는 손에 붓을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붓’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 ‘말씀’을 뜻하는 曰자가 더해진 書자는 말을 글로 적어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참고로 일부에서는 曰자가 먹물이 담긴 벼루를 표현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書(서)는 성(姓)의 하나로 ①글, 글씨 ②글자 ③문장(文章) ④기록(記錄) ⑤서류 ⑥편지(便紙) ⑦장부(帳簿) ⑧쓰다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책 책(冊), 글월 문(文), 글 장(章), 문서 적(籍)이다. 용례로는 책 또는 경서와 사기를 서사(書史), 편지를 서신(書信), 글 가운데를 서중(書中), 남이 하는 말이나 읽는 글을 들으면서 그대로 옮겨 씀을 서취(書取), 책을 넣는 상자 또는 편지를 넣는 통을 서함(書函), 글씨를 아주 잘 쓰는 사람을 서가(書家), 글방을 서당(書堂), 글씨와 그림을 서도(書圖), 책의 이름을 서명(書名), 대서나 필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서사(書士), 글자를 써 넣음을 서전(書塡), 책을 보관하여 두는 곳을 서고(書庫), 남편의 낮은 말서방(書房), 책을 팔거나 사는 가게서점(書店), 이름난 사람의 글씨나 명필을 모아 꾸민 책을 서첩(書帖), 글씨 쓰는 법을 서법(書法), 유학을 닦는 사람을 서생(書生), 글방에서 글을 배우는 아이를 서동(書童), 글씨와 그림을 서화(書畫), 문서를 맡아보거나 단체나 회의 등에서 기록을 맡아보는 사람을 서기(書記), 글씨 쓰는 법을 배우는 일을 서도(書道), 책 내용에 대한 평을 서평(書評), 글자로 기록한 문서를 서류(書類), 책을 갖추어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을 서재(書齋), 문자의 체제를 서체(書體), 책은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다는 서불차인(書不借人), 편지로 전하는 소식이 오고 간다는 서신왕래(書信往來) 등에 쓰인다.
▶️ 三(석 삼)은 ❶지사문자로 弎(삼)은 고자(古字)이다.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 젓가락 셋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셋을 뜻한다. 옛 모양은 같은 길이의 선을 셋 썼지만 나중에 모양을 갖추어서 각각의 길이나 뻗은 모양으로 바꾸었다. ❷상형문자로 三자는 '셋'이나 '세 번', '거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三자는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三자는 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숫자 3을 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중국식 예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3번은 거절한 후에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三자가 '자주'나 '거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三(삼)은 셋의 뜻으로 ①석, 셋 ②자주 ③거듭 ④세 번 ⑤재삼, 여러 번, 몇 번이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석 삼(叁)이다. 용례로는 세 해의 가을 즉 삼년의 세월을 일컫는 삼추(三秋), 세 개의 바퀴를 삼륜(三輪), 세 번 옮김을 삼천(三遷),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를 삼대(三代), 한 해 가운데 셋째 되는 달을 삼월(三月), 스물한 살을 달리 일컫는 말을 삼칠(三七), 세 째 아들을 삼남(三男), 삼사인이나 오륙인이 떼를 지은 모양 또는 여기저기 몇몇씩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삼삼오오(三三五五), 삼순 곧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삼순구식(三旬九食),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삼매경(三昧境), 유교 도덕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일컫는 말을 삼강오륜(三綱五倫),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삼성오신(三省吾身),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사흘 간의 천하라는 뜻으로 권세의 허무를 일컫는 말을 삼일천하(三日天下),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 형편이 불리할 때 달아나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삼십육계(三十六計), 하루가 삼 년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몹시 사모하여 기다리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삼추지사(三秋之思), 이러하든 저러하든 모두 옳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삼가재상(三可宰相), 삼 년 간이나 한 번도 날지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웅비할 기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삼년불비(三年不蜚), 세 칸짜리 초가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초가를 이르는 말을 삼간초가(三間草家), 봉건시대에 여자가 따라야 했던 세 가지 도리로 어려서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좇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삼종의탁(三從依托), 키가 석 자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뜻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을 삼척동자(三尺童子), 세 사람이 마치 솥의 발처럼 마주 늘어선 형상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을 삼자정립(三者鼎立), 세 칸에 한 말들이 밖에 안 되는 집이라는 뜻으로 몇 칸 안 되는 오막살이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간두옥(三間斗屋),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삼생을 두고 끊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언약 곧 약혼을 이르는 말을 삼생가약(三生佳約),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즉 청백리를 이르는 말을 삼마태수(三馬太守), 세 치의 혀라는 뜻으로 뛰어난 말재주를 이르는 말을 삼촌지설(三寸之舌), 얼굴이 셋 팔이 여섯이라는 뜻으로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삼면육비(三面六臂),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의 벗으로서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견문이 넓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익지우(三益之友), 세 가지 아래의 예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지지례(三枝之禮),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이라 함이니 괴상할 정도로 힘이 엄청나게 센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두육비(三頭六臂), 세 번 신중히 생각하고 한 번 조심히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을 삼사일언(三思一言) 등에 쓰인다.
▶️ 到(이를 도)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동시에 음(音)을 나타내는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이르다의 뜻인 至(지)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到자는 ‘이르다’나 ‘도달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到자는 至(이를 지)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至자는 땅에 화살이 꽂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어떠한 장소에 ‘다다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금문에 나온 到자를 보면 至자와 人(사람 인)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이것은 사람이 어느 한 지점에 도착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人자가 刀자로 바뀌면서 지금의 到자가 되었다. 착오라기보다는 발음을 위해 글자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到(도)는 도착하다의 말로 (1)관리(官吏)의 출근을 명부(名簿)에 표시하는 기호 (2)관리(官吏)의 끗수는 하나임 등의 뜻으로 ①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②닿다, 미치다(공간적 거리나 수준 따위가 일정한 선에 닿다) ③어떤 곳에 가다 ④주밀(周密)하다, 빈틈없이 찬찬하다(성질이나 솜씨, 행동 따위가 꼼꼼하고 자상하다) ⑤세밀(細密)하다 ⑥말하다, 설명하다 ⑦속이다, 기만하다 ⑧거꾸로 서다 ⑨거꾸로 ⑩근무(勤務) 일수의 계산(計算) 단위(單位)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이를 계(屆), 붙을 착(着), 이를 지(至), 이를 치(致), 이를 진(臻), 이를 흘(訖)이다. 용례로는 목적한 곳에 다다름을 도착(到着), 학식이나 생각이 아주 깊음을 도저(到底), 정한 곳에 다다름을 도달(到達), 이르러서 옴이나 닥쳐 옴을 도래(到來), 가는 곳이나 이르는 곳을 도처(到處), 지방의 관리가 임소에 도착함을 도임(到任), 문에 다다름을 도문(到門), 배로 와 닿음이나 배가 와 닿음을 도박(到泊), 귀양가는 죄인이 배소에 도착함을 도배(到配), 공문 등이 와 닿음 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일을 도부(到付), 세차게 몰려듦을 쇄도(殺到), 독서 삼도의 하나로 글을 읽을 때 다른 말을 아니하고 책에 집중하는 일을 구도(口到), 독서 삼도의 하나로 마음이 글 읽는 데만 열중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일을 심도(心到), 독서 삼도의 하나로 글을 읽을 때에 눈을 집중시키는 일을 안도(眼到), 와 닿음이나 닥쳐옴을 내도(來到), 늦게 다다름을 만도(晩到), 도달하지 못함을 부도(不到), 먼저 도착함을 선도(先到), 간절하고 빈틈없이 마음을 씀을 간도(懇到), 가까이 다가가 이름을 박도(迫到), 조심성이 두루 미쳐서 빈틈이 없음을 주도(周到), 어떤 한 곳이나 일에 닿아서 이름을 당도(當到), 아직 도착하지 아니함을 미도(未到), 생각이 미침을 상도(想到), 서로 미침을 상도(相到), 아주 정묘한 경지에까지 이름을 정도(精到), 감흥이 일어남을 흥도(興到), 근무 일수를 깍음을 삭도(削到),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아니함을 도처낭패(到處狼狽), 가는 곳마다 살기 좋은 곳이 있음을 도처청산(到處靑山), 빈한함이 뼈에까지 스민다는 뜻으로 매우 가난함을 일컫는 말을 빈한도골(貧寒到骨), 정성스러운 마음을 다 한 결과를 성심소도(誠心所到), 물이 흐르면 고기가 다닌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나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는 수도어행(水到魚行), 주의가 두루 미쳐 자세하고 빈틈이 없음을 주도면밀(周到綿密)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