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토요일 (자)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둘째 미사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17-21
형제 여러분, 17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기도하는 날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죽음과 죽은 이를 생각하는 자체는 실상 산 이들에게 더욱 큰 유익이 됩니다. 살아온 날을 돌이켜 보고 살 날을 의탁하며 겸손되이 자기의 죽음을 준비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지요.
교회에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올해는 둘째 미사의 묵상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중 누군들 죽은 뒤의 일을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과 성전이 전하고 교회가 가르치는 바를 믿고 따르며 희망할 뿐이지요. 예수님께서 둘째 미사의 말씀을 통해 그런 우리에게 힘을 북돋워 주고 계십니다.
"철부지들"(마태 11,25).
우리는 모두 철부지들입니다. 아무리 세상사에 밝고 능하다 해도, 유유하게 흘러가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하느님 섭리 앞에서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물에 불과하지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기 생애를 제 뜻대로 끌어왔노라고 으스댄 사람이 있었던가요... 어떤 종교를 가졌건 우리는 그저 선사받은 생명을 힘껏 살아내며 인간에게 허락된 만큼 계획하고 실천해 소명을 채워갈 뿐입니다.
우리가 "철부지"라는 인식이 자신을 평안하게 만듭니까, 아니면 불만스럽게 만듭니까? 아직도 모든 걸 제 힘으로, 제 뜻대로 하고야 말겠다는 투지가 넘친다면 무능하고 무지해 보이는 철부지 신세는 외면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는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제멋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철부지"야말로 예수님께서 특별히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마태 11,27)입니다.
널찍하고 든든한 아버지의 품에 폭 감싸여 안긴 아기의 모습에서 "철부지"를 봅니다. 아기는 여기 말고 다른 안식처를 알지 못합니다. 절대 신뢰, 절대 믿음이 철부지의 특징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기의 기대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철부지"의 절대 신뢰 관계를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가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살 것이다"(지혜 3,9).
주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의 대가가 진리와 그분 현존이라니 우리는 앞다투어 "철부지"가 되기를 바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철부지"는 주님의 멍에를 메기 위해 자기 것을 벗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소위 끝발이 좋고 투자 가치가 있어 멍에를 바꿔 타는 게 아니라 그분이 온유하고 겸손해서 그렇게 합니다. "철부지"는 더 이상 예수님에게서 현세 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 거칠고 약삭빠른 세상에서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 있을 텐데 개의치 않습니다. 그는 제 존재 속에서 작동하는 세상 계산기를 꺼버리고, 오직 영혼의 온도계만 켜 놓았습니다. 사랑의 열 센서가 울리는 대로 마음이 뜨겁게 향하는 분만 감지하면 그만이니까요.
"주님은 작은 이들을 지키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화답송).
"철부지"는 자신의 작음을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피조물의 작음은 하느님의 큰 자비를 부릅니다. 세상에서는 열등하고 미천하게 취급되는 작음이 하느님께는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해 지켜주고픈 사랑입니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 3,9).
삶이라는 광야를 통과하면서 인간적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되지만, 결국 우리를 끌어가는 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입니다. 이 은총과 자비에 기대어 충실하고 겸손히 삶을 꾸려간 "철부지"들은,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새 생명으로 건너가는 순간이 오히려 선물이 될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누린 단순하고 순수한 사랑의 삶을 하느님 나라에서 계속 이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보다 더 기쁘고 행복하게 하느님의 신비 속을 거닐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힘껏 "철부지"가 되어봅시다. "철부지"의 대명사인 예수님처럼, 모든 걸 맡기고 주님만 바라며 사는 길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느님 나라에 맞갖도록 더 "철부지"가 되기 위해 연옥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형제자매들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 하느님 곁에 머무르며 사랑을 누리는, 우리가 성인성녀라 부르는 모든 "철부지"들께도 전구를 청하며, 이 우주적이고 신비적인 사랑의 협력을 함께 완성해 갑시다.
▶ 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