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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덕봉리 사람들의 충의(忠義)
筆華 (수필가)
인재의 보고 선비마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덕봉리(德峰里)가 있다.
덕봉리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경기도의 유일한 선비마을이다.
해주오씨 정무공파(海州吳氏 貞武公派)집성촌인 이 마을은 500여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의 보고로서 그 면목을 자랑하고 있다.
선비는 신분으로서의 위계라는 개념보다는 인격으로서의 절의와 지조라는 측면이 훨씬 중요하게 부각된다.
유교가 국가통치 이념이던 구시대가 지나고, 근대적 시민사회에 들어선 오늘에 있어서도 성숙된 시민정신의 함양과, 지도계층에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감, 다시 말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확립시키기 위해서도 선비정신은 더욱 강조되어 마땅하다고 하겠다. 정부가 선비마을을 지정하는 소이가 거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덕봉리 선비마을에서는 수많은 선비, 즉 그 시대의 인재들이 배출되어 그 당시 국가의 유지와 발전에 공헌하였다.
조선조 덕봉리 출신 인맥을 살펴보면, 과거 급제가 문무를 통털어 137명에 이르는데, 문과급제가 20명, 무과급제가 117명이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간 사람은 148명이나 된다.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임진 왜난 때 수훈을 세웠으며, 의주로 몽진하는 선조를 안전하게 모신 공로로 호성공신이 된 퇴전당 오정방(退全堂 吳定邦)장군이 해주오씨 정무공파의 중시조가 된다.
이조를 비롯한 예조, 공조, 형조 등, 판서가 즐비하였으며 관찰사와 참판이 있었고 학자와 승지도 있었다.
임금이나 나라에 대한 공덕으로 시호를 받은 이가 9명이고, 그밖에도 충신과 공신 각1명에 효자와 열녀 정려(旌閭)를 받은 사람이 여럿이다.
1680년(숙종6), 현종임금의 셋째 따님이고 숙종의 누이인 명안공주(明安公主)가 절조 있는 충신으로 널리 알려진 오두인(吳斗寅)의 아들 태주(泰周)와 국혼을 이루어 이 마을은 부마동리(駙馬洞里)가 되기도 하였다.
낙향한 반항아들
인걸은 한말까지 이어져 관직에 나가 있던 사람이 여럿 있었다.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탈취한 것은 1910년(순종 4)경술국치이지만 이미 을사늑약(1905, 고종9)때부터 침략의 야욕은 노골화 되었다.
고종황제의 제가도 없이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이 이등 박문과 협잡하여 체결함으로써 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이 이른바 을사늑약이다. 이에 즈음하여 관직에 나가 있던 이들이 그 직을 거부하고 낙향하여 일제에 비협조, 초야에 묻혀 비분강개하면서 반항생활을 한 사례가 있다.
또 다른 지식인들은 교육을 통해 국력을 키워 일제를 축출하고 국권을 되찾고자 계몽운동에 헌신한 사례도 있다.
오명근(吳明根1873-1926)은 1891년(고종2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비서원승, 규장각 직각을 역임하였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고 일본이 국정을 농단하는 현실에 직면하여, 나라 잃은 백성이 벼슬할 수 없다고 하며 관직을 버리고 덕봉리로 낙향하여 두문불출하면서 반항생활을 했다. 그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부인 오숙근 여사의 4촌 오빠가 된다.
오형근(吳衡根1874-1922)은 조선 후기 대표적 성리학자 중 한분인 오희상의 후손으로 1891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 비서원 승(승지)을 역임하였다.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일제에 빼앗기자 신하로써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 하다가 마침내는 덕봉리로 낙향하여 두문불출 무언으로 항거하였다.
오진영(吳震永1868-1944)은 일찍부터 간제 전우(艮齊 田愚/도학자)에게 수학했고 갑오개혁 이후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각국 공관과 정부에 통박하는 글을 보냈다. 그 뒤 이수홍과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공한을 작성하였으나 스승인 전우의 만류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간제 전우는 오랑캐들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것을 부정하고 오직 도학정신을 강조하여 무모한 저항으로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후일을 기약할 것을 강조하며 나라 찾는 방편으로 도학부흥에 힘쓸 것을 역설했다. 이 때문에 만국평화회담에 보낼 공한도 말렸던 것이다. 오진영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지(智)와 인(仁)과 용(勇)을 겸비한 한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3.1운동과 덕봉리 사람들
3.1운동 때는 덕봉리 사람들이 선도적으로 앞장서서 서부안성 지역에 2일간의 해방을 이루어, 경기남부 지역 독립항쟁의 기폭제기 되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열흘이 지난 3월 11일 오전 11시, 양성공립보통학교(현 양성초교)운동장에서 한국인 교사들과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당시 덕봉리 출신 남진우(南進祐 양성초교1회/보성전문학교 학생)와 동항리 출신 고원근(高元根 같은 학교 2회/선린상업학교 학생)이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3월 10일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내려와 모교 후배들에게 항일 독립정신을 일깨울 목적으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었다. 야기라는 일본인 교장이 있었고 교사들 중에 일본인도 있었으나, 나이가 많은 학생들의 당당한 기세를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학교에서의 만세운동은 간헐적으로 며칠간 계속되었다. 3.11 만세시위가 서부안성 지역, 나아가 전 안성군에 걸친 격렬한 만세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양성면과 큰 고개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는 원곡면의 학생들도 같은 양성보통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3.11학교 만세소식은 순식간에 두 면 각 동리에 전파되었다. 따라서 지역 여론은 인근 각처의 시위정황에 지역 내의 만세소식이 실려 극히 격앙되고 흥분되었을 것이다. 이 같은 정세 하에 이 지역 각 마을들끼리 긴밀한 정보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두 면 각 마을에 분포되어 있는 양성초등학교 동창생들 끼리나 마을 지도자 상호간, 나아가 원곡⦁양성 양 면 민간 지도자간에 긴밀한 정보교류와 거사에 대한 모의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정세와 사안의 속성상 은밀성과 기밀을 요하는 사항이었기 때문에 역사의 표면에 노출되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
양성면에서 4월 1일 저녁, 각 동리별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덕봉리에서 200여명의 주민들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고 기세도 당당하게 동항리 소재지로 나아갔다. 선두에는 오세경(吳世卿)이 서고 후미에 오관영(吳寬泳)이 대열을 수습하면서 뒤따랐다.
덕봉리를 시발로 산정리에서는 손정봉(孫正鳳)이 인솔하는 마을사람들이 동리 앞 행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면 소재지로 향했다. 9시경이었다.
도곡리의 김영대(金永大)가 앞장서 동리사람들과 함께 마을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동항리 경찰관 주재소(지금의 지서 또는 파출소)로 나아갔다.
추곡리, 석화리, 구장리, 명목리 에서도 동리별로 마을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연합시위의 장인, 면 소재지로 나아갔다. 각 동리 모두 9시경이었다. 한밤중에 만세함성과 함께 횃불과 태극기의 물결이 파상적으로 면소재지로 모여드는 장관을 이루었다. 동리별로 주재소와 면사무소 그리고 보통학교를 돌면서 만세시위를 벌렸다. 밤이 이슥하게 깊어지고 있었다. 동리별로 돌아가려고 할 지음에, 고개 넘어 원곡면민 시위대 약 1.000여명의 행렬이 횃불을 밝혀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양성에 당도하였다.
원곡면에서는 벌써 3월 초순부터 서울의 3.1운동 현장에 다녀와서 치밀한 계획으로 만세시위를 추진해온 일단의 지도계층이 있었다. 3월 하순에 면내에서 간헐적으로 만세를 부르다가 4월 1일 밤, 약1.000명의 시위 군중을 이루어 양성을 향해 행진해온 것이다. 당시 원곡에는 면사무소만 있었고, 주재소나 우편소(지금의 우체국) 학교 등 관청이 없어 고개 넘어 양성으로 다녔다.
원곡면 시위대가 양성에 닿았을 때, 두 면 시위자들은 의식적으로 또는 부지불식간에 합류하여 양성 1.000명, 원곡 1.000명이 합쳐진 2.000명의 연합시위대가 이루어졌다.
이날 밤, 2.000명 시위대는 10시경 양성 주재소를 불 질렀다. 주재소 순사들은 뒷산으로 도망쳤다. 다시 가까이 있는 우편소를 습격하여 전신주를 잘라 불태워 통신을 두절시켰으며 벽에 걸린 일장기를 잡아 채 불속에 던졌다. 면사무소로 가서 공용서류를 불태웠다. 그리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으로 가서 가게를 부수고,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집으로 가서 가재도구를 부셨다. 새벽 2시에 다시 고개를 넘어가 밝을 녘 4시에 원곡면 사무소까지 불 질렀다. 일단의 열혈 시위자들은 평택으로 진출하여 경부선 철도를 차단하려고 움직이던 중 일본군 수비대가 들어온다는 정보가 들어와 해산하여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밤중에 식민지 통치기관을 완전히 방화 파괴하여 무정부상태를 만든 것이다. 이 지역에 짧지만 2일간의 해방을 쟁취한 것이다. 이 만세시위를 안성4.1만세운동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서부안성의 3.1운동, 즉 안성4.1만세운동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한다.
1. 전 주민적 운동이다. 초기 서울 유학생에 의한 보통학교 시위에서 끝나지 않고 자체적으로 전 주민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2. 계획적 조직적 특성이다. 양성에서 덕봉리를 필두로 각 동리 공히 저녁 9시에 소재지로 집결한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극히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힘이 움직인 흔적이라 하겠다. 원곡의 1.000여명 시위대는 각 동리별 담당자가 있어 치밀한 계획과 조직의 틀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3. 공세적 특징이다.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에 대한 방화, 우편소와 일인 상점의 습격 파괴 등은 당초부터 공세적인 양상이다. 전국적으로 이와 같은 공세적 기습은 이곳이 유일하다.
4.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목표를 들 수 있다. 일제 통치기관을 철폐하고 일인을 구축하였지만 지방의 친일인사나 일인 경찰관 또는 악질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살상은 일체 없었다. 다만 독립 쟁취를 위한 목표가 뚜렷했을 뿐, 시위의 도덕성을 훼손하지 않았다.
5. 투쟁역량의 결집을 들 수 있다. 양성과 원곡 두 면의 역량을 결집함으로써 전의를 드높일 수 있었다.
일제는 민족대표 33인의 재판과정에서 전국 3대 소우지역으로 지목하였다.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그리고 안성의 원곡 양성 즉 서무안성지역을 3대 소우지역으로 본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사편찬 위원회에서는 위의 세 지역을 전국 3대 실력항쟁지로 손꼽고 그중에서도 양성 원곡지역을 가장 으뜸 되는 곳으로 평가하고 있다.
3.11학교 만세시위를 주도한 학생이 덕봉리 사람이었다.
4월 1일 밤, 연합시위의 선두에 덕봉리 사람들이 서 있었다.
덕봉리 사람들은 전국 3대 실력항쟁의 역사적인 거사에 앞장섰던 찬연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백야 김좌진장군(1889-1930)의 부인 오숙근(吳淑根)여사
덕봉리 출신 오숙근 여사는 청사에 빛나는 애국투사 김좌진(金佐鎭)장군과 혼인하였다.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장군은 15세때(1904)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명을 모아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종 문서를 불사르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만큼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교육과 계몽운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서울에 올라와 노백린, 신현대와 함께 대한광복단이라는 비밀결사체에 소속되어 치열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8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장군은 1920년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10월 21일부터 6일간 전개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3.300명을 섬멸하였다.
일제강점기 종로의 협객이었으며 건국 후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두한(金斗漢)의 아버지이고 현역국회의원인 김을동(金乙東)의원의 할아버지시다.
덕봉리는 김좌진 장군의 처가동리이고, 김두한의 외가이며 김을동 의원의 진외가가 되는 동리다.
오숙근 부인은 백야장군의 독립운동 뒷바라지를 하였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만주에서 살다가 차차 독립군의 이동이 빈번하여 서울로 돌아와 삼청동에서 살았다. 백야장군은 1930년 1월 24일 산시역 부근 정미소에서 공산당 청년 박상실의 흉탄에 쓸어졌다. 비보에 접한 오숙근 여사는 다시 만주로 갔다. 암매장된 남편의 유해를 밀감상자에 위장해 조국으로 모시고 돌아와 백야장군의 고향인 충남 홍성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하였고, 김두한이 살아 있을 때,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에 묘역을 조성하여 이장하였다. 1957년 세상을 떠난 선비마을의 딸 오숙근은 남편의 유택에 합장되었다. 그가 태어나고 처녀시절을 보냈던 덕봉리를 아련히 꿈꾸면서 잠들어 있다. 지금은 보령시에서 장군묘역으로 성역화 하였고 충남 기념물 제 73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봉 이씨(牛峰 李氏) 부인
덕봉리에 입장과 처지가 다른 또 한 여인의 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놀랍게도 을사오적의 으뜸이요, 경술국치의 원흉인 만고의 역적 이완용(李完用)의 누님 우봉 이씨 부인이 이 동리의 오득영과 혼인하여 왔다.
전국 3대 실력항쟁지로 알려질 만큼 격렬했던 이 지역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덕봉리 였으므로 일제의 경찰과 군대가 들어와서 휘발유로 동리를 완전히 불태워 버린다고 위협하여 온 동리는 공포에 휩싸였다.
우봉 이씨 부인이 동생 이완용을 찾아가서 동리를 구해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묵묵부답으로 턱을 괴고 앉아있던 이완용이 이튿날 차를 타고 안성경찰서로 와서 서장을 만나고 돌아갔다. 그 후 만세운동 뒤처리가 완화되어 폐동의 위기를 모면하고 희생을 줄였다는 이야기가 마을 고령자들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필자는 실제로 마을회관에 들러 산수(傘壽)가 됨직한 어르신으로부터 들은 생생한 이야기다. 3.1운동 그때로부터 90여년이 지나간 오늘에, 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묘한 갈등이 느껴진다. 그러나 우봉 이씨부인의 덕봉리를 구해야 되겠다는 일념은 가상타 할 것이다.
마을 뒤에 산세가 범상치 않은 고성산이 높다랗게 솟아있다. 맥을 뻗어 마을의 내청용 내백호(內靑龍 內白虎)를 이루어 주고, 그 뒤에 호쾌하게 우뚝 솟아있는 고성산은 역시 신령스러운 산이다. 마을을 둘러싼 소나무 숲은 독야청청한 선비의 넋을 오늘에 되살리는 듯 하고, 향기로운 솔 내음은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타고 그윽하다. 두 줄기로 흐르다가 마을 한가운데에서 합수되어 한줄기로 흘러내리는 물길이 정겹게 졸졸댄다.
(‘15.10.15)
*본고는 “순국”11월호(‘15)에 게재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