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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한 죽음은 기본권”… 유럽국가들 잇따라 안락사 합법화
안락사 빗장 푸는 유럽
가톨릭 영향으로 반대 거세지만… 네덜란드-벨기에-스페인 허용
“불치병 고통 덜어줘야” 목소리… ‘존엄하게 죽을 권리’ 관심 높아져
이탈리아-포르투갈은 여전히 금지… “완화치료-임종관리 강화” 지적도
영국의 존엄하게 죽을 권리 운동가인 노엘 콘웨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런던에 모여 ‘노엘과 함께한다’는 문구를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시민단체 ‘디그니티인다잉’ 홈페이지
《‘존엄하게 죽을 권리’ 빗장 푸는 유럽
네덜란드는 불치병을 앓는 만 11세 이하 아동 및 유아에게도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추진할 계획이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페인 등도 안락사를 합법화하고 있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유럽의 화두로 떠올랐다.
“삶의 기본인 호흡, 식사, 배변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죽고 싶습니다.”
일본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다 불치병을 앓게 된 40대 남성 요시(가명) 씨는 2년 전 스위스 바젤의 한 병원에서 공영언론 스위스인포와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안락사를 결심한 이유를 이같이 밝혔다. 소생 가능성이 없는 데다 질환의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그는 안락사가 불법인 일본을 떠나 합법인 스위스로 ‘안락사 원정’을 왔다.
그의 마지막 여행에 동행한 부모가 “제발 결정을 바꿔 달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가 살아야 한다”고 애원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안락사에 필요한 거의 모든 절차를 마친 그는 마지막으로 두 의사와 최종 면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안락사 신청자가 결정에 망설이거나, 의식이 없어 정확한 의사를 확인하지 못하면 의사들이 안락사를 취소할 수 있다.
3시간이 넘도록 진행된 상담 끝에 요시 씨의 담당 의사는 “의학적 관점에선 이제 당신의 조력 자살을 막을 이유가 없다”며 안락사에 대한 최종 승인을 통보했다. 그는 이틀간 부모와 병원에서 시간을 보낸 뒤 부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의료진이 마련한 약물 투여로 숨을 거뒀다.
의료진이 제공한 약물이나 주사를 이용해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조력 자살’이 합법화된 스위스에는 다른 유럽 국가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세기의 미남’으로 불리는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88)도 지난해 건강이 더 악화되면 “스위스에서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스위스는 한때 유럽에서 극단적 선택을 부추기는 ‘안락사 관광국’이란 오명을 썼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생명의 존엄성을 우선시하는 보수적인 가톨릭 문화가 보편적이던 유럽에서 스위스 외에도 안락사를 허용하는 유럽 국가들이 늘고 있다.》
● 네덜란드, 아동 안락사도 검토
안락사는 생존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시행된다. 환자의 요청에 따라 의료진이 약물이나 주사를 환자에게 투여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의료진이 환자에게 의학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산소호흡기 등 인위적인 생명 연장 장치를 제거하는 ‘소극적 안락사’로 나뉜다. 환자가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직접 약물이나 주사를 투여하는 ‘조력 자살’도 안락사에 포함된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국가에선 의료진이 엄격한 검진과 가이드라인을 통해 안락사가 필요한 환자인지를 판단한다.
자살을 불경시하는 가톨릭 보수주의가 강한 편인 유럽 국가들은 안락사에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안락사를 허용하면 생명 존엄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특히 장애인이나 취약계층 환자들이 안락사를 선택하도록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불치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인간의 기본권으로 보는 시각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스위스와 함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페인 오스트리아가 조력 자살을 합법화했다. 이 가운데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페인 등 4곳은 조력 자살은 물론이고 적극적 안락사까지 허용한다. 소극적 안락사만 법적으로 허용하는 곳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프랑스 등이다. 소극적 안락사는 유럽 외에서도 인정하는 곳이 많아서 보통 안락사 논쟁은 조력 자살과 적극적 안락사에 집중된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는 2002년 4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안락사를 허용할 근거로 인정하고 있다. 그 대신 환자는 개선될 가망이 없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는 점과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의사에게 수차례 설명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
네덜란드는 현재 12세 이상에게 안락사를 허용하는데 이 중 15세 이하에게는 부모나 법적 보호자에게 동의를 요구한다. 1세 이하 영아는 의사와 부모 동의를 받아 제한적으로 안락사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당국은 14일 한 걸음 더 나아가 “1∼12세 불치병 아동에 대한 안락사를 허용하도록 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고통스러워하는 어린이들을 위한 안락사도 필요하다는 의사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벨기에는 성인 안락사의 경우 네덜란드에 뒤이어 받아들였지만 아동 안락사는 일찍이 2014년부터 합법화했다. 고통이 극심하고, 회복 가능성이 없는 중병 및 불치병 아동에게 한정된다. 자녀가 요청하고 부모 모두 동의해야 한다.
● ‘인구 70%가 가톨릭’ 스페인도 안락사
인구 70%가량이 가톨릭 신자인 스페인에선 안락사 반대 여론이 강했지만 ‘라몬 삼페드로’ 사건이 안락사 논쟁을 뜨겁게 지폈다. 스페인 선원이자 작가였던 삼페드로는 1968년 25세 나이에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목이 부러져 몸 전체가 마비됐다. 스스로 짧은 거리조차 이동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영원한 자유’를 원한다며 안락사를 결정했다.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 스페인 법정에서 약 30년을 다투던 그는 결국 1998년 친구인 라모나 마네이로의 도움을 받아 생을 마감했다.
당시 마네이로는 체포됐지만 증거 부족으로 풀려났고, 공소시효가 만료된 뒤에 비로소 ‘내가 삼페드로에게 독극물을 줬다’고 시인해 파장을 낳았다. 이 사연을 다룬 영화 ‘씨 인사이드’는 2005년 제6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각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바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안락사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이어오던 스페인은 2021년 3월 안락사를 합법화해 이목을 끌었다. 가톨릭 국가로서는 안락사를 급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제 스페인에선 간병인이 환자의 요청에 따라 안락사를 도울 수 있다. 다만 환자는 심각하고 만성적인 고통이나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게 확인되어야 한다.
스페인 국적의 환자이거나 스페인에 1년 이상 합법적으로 거주한 성인일 경우 안락사를 의사에게 신청할 수 있다. 의사 결정 능력이 있는 상태여야 하고 안락사에 앞서 고통을 경감할 방법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대안이 없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안락사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신청자는 10일간의 숙고 기간에 의료진의 조언과 전문가로 구성된 평가위원회와의 논의를 거친다. 이 와중에 네 차례에 걸쳐 자신의 안락사 결정을 재확인해야 한다.
● 伊·포르투갈은 “생명 존엄 중요” 금지
가톨릭 국가 스페인까지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빗장을 풀었지만 스페인처럼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한 이탈리아는 여전히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선 2021년 안락사 합법화를 추진한 한 시민단체가 시민 1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국민투표 청원서를 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심리 끝에 국민투표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해 안락사 합법화가 무산됐다. 헌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보다 ‘생명 존엄성’이 더 중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포르투갈에선 의회가 안락사 합법화 법안을 두 차례나 통과시켰지만 번번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합법화의 길이 막혔다. 안락사나 안락사 허용 대상인 ‘말기 환자’ 개념이 모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현지 언론에 따르면 포르투갈에서 안락사 합법화에 찬성하는 여론은 절반을 넘고 있다.
최근 들어 안락사 논쟁을 적극 꺼내든 건 프랑스다. 프랑스에선 지난해 영화계 거장인 장뤼크 고다르 감독이 스위스 롤르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력 자살을 했다고 알려지면서 안락사 논쟁이 뜨거워졌다. 고다르 감독은 생전에 다수의 불치성 질환을 앓고 있었다.
이날 프랑스 엘리제궁(대통령실)은 홈페이지에 성명을 내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국가 차원의 토론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시민 자문기구를 설립해 의료 종사자들과 안락사 제도에 대한 주요 쟁점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연금개혁 입법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달 초 시민 자문기구인 ‘184 프랑스 시민들’을 만나 “삶을 끝내는 프랑스식 모델을 담은 법안을 여름이 지나기 전까지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기구는 안락사 합법화를 정부에 권고했다.
프랑스는 2005년 연명 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를 도입했지만 약물 등으로 사망에 이르게 돕는 적극적 안락사는 불법이다. 정부가 법안을 제출하더라도 의회에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좌파 진영과 일부 중도파는 안락사에 찬성하지만 우파는 반대하는 편이다.
● 안락사의 대안 ‘완화 치료’
안락사를 반대하는 이들은 안락사에 앞서 진정제 투여 등으로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는 완화 의료와 호스피스 제도부터 우선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임종할 때 고통을 완화하는 의료적 서비스는 실제 미흡한 편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세계에서 완화 치료가 필요한 환자 10명 가운데 1명꼴로만 완화 치료를 받고 있다. WHO는 2021년 10월 ‘양질의 의료 서비스 및 완화 치료’란 보고서를 통해 각국 정부가 완화 치료를 1차 진료센터(PHC)에서 제공하는 등 보건 시스템 전반에 적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2021년 싱가포르국립대 의대의 ‘사망 및 임종의 질에 대한 전문가 평가(A∼F등급)’에 따르면 세계 81개국 중 상위권인 A등급을 받은 국가는 영국 아일랜드 대만 코스타리카 한국 호주 등 6곳에 불과했다.
프랑스는 2005년부터 난치병 환자의 임종 절차를 규제하는 법을 마련해 완화 의료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소생이 힘들 것으로 예상되고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말기 환자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진정제를 받을 수 있다. 의료진은 완화 의료를 시행할 필요가 있는지를 엄격하게 따진다. 엄격한 조건을 충족하는 환자는 수분 및 영양 공급을 비롯해 기존 치료를 중단하고 진통제를 맡는다. 이 완화 의료는 병원은 물론이고 환자의 집에서도 할 수 있다.
프랑스는 2016년 법을 개정해 환자가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에 대비해 완화 치료 의사를 미리 밝히는 ‘사전 완화 의료 지시서’ 작성 방침을 강화했다. 이 지시서에는 환자의 이름, 성, 날짜 및 출생지, 서명이 명시돼야 한다. 환자가 의사 표현이 불가능한 상태일 때 자신을 대신해 의사를 밝힐 성인을 지정할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 2월 발간한 ‘임종 관리를 개선할 때’란 보고서에서 “임종 관리 서비스에 접근하기 힘들고 이를 접할 기회가 불평등한 경우가 많아 임종 당일이나 마지막 몇 달간 수준 이하의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며 “국가가 임종 돌봄 정책을 더 중요한 의제로 삼아 포괄적인 정책을 구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