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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자유게시판 스크랩 소주 원림Ⅲ - 퇴사원(退思園) ② 강남수향 중의 퉁리[同里]
눌인 추천 0 조회 111 11.12.11 20:22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소주 원림Ⅲ - 퇴사원(退思園) ② 강남수향 중의 퉁리[同里]

 

 

960만㎢에 달하는 넓은 중국의 땅위에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한반도 면적이 221,000㎢. 남한의 면적은 99,500㎢, 남한의 96배). 자연이 빚어낸 산과 계곡은 물론이고 산과 들, 그리고 물가에 산재해 있는 옛 동네 역시 비경을 연출하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 수 백 년에서 천년 넘게 이어온 옛 가옥들이 모여 있는 마을을 중국에서는 고진(古鎭)이라 부른다. 고촌락(古村落)이라 부르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물의 도시인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사이에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운하의 지류를 따라 크고 작은 마을들, 즉 고진들이 점재(點在)하여 있다. 이들을 강남수향(江南水鄕)이라 부르는데, 수향고촌락군(水鄕古村落群)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남수향 중 저지앙[浙江]성에 있는 것을 저지앙꾸젠[浙江古?]이라 부르는데, 西塘, 烏?, 南?, 前童, 安昌, 郭洞, ?源, 新葉, 諸葛村, 龍門, 三門源, ?八都, 斯宅, ?灘, 石塘, 紹興, 碗窯, 大濟, 泰順, 楠溪江, 新市, 長樂, 溪口 등이 있다. 또 지앙수[江蘇]성에 있는 지앙수꾸젠[江蘇古?]에는 同里, 周莊, ?直, 楓橋, 錦溪, 木瀆, 盛澤, 沙溪 등이 있다. 또 상하이꾸젠[上海古?]에 속하는 朱家角, 金澤, 七寶 역시 강남수향(江南水鄕)에 들어간다.

 

강남수향(江南水鄕) 일대 지도

 

이들 중 옛 마을(古鎭)의 모습이 아직 잘 보존되고 있어 『중국100대 매력적인 옛 마을(中國100魅力古鎭)』에 선정된 곳은 지앙수[江蘇]성의 경우, 저우좡[周莊], 펑지아오[風橋], 진시[錦溪], 무두[木?], 광푸[光福], 리리[黎里], 루지[?直], 동샨[東山], 퉁리[同里], 유산[虞山], 젠저[震澤(震?)]등 11곳이 있다. 또 저지앙[浙江]성의 경우, 우젠[烏鎭], 시탕[西塘], 샤오싱[紹興],안창[安昌], 구오동[郭洞], 린캥[林坑], 난?[南尋], 시자이[斯宅], 포탄[?灘(??)], 치안통[前童], 타이순[泰順(泰?)]등 11곳이 있으며, 지금은 행정구역이 상하이[上海]에 편입된 주자자오[朱子角]와 진저[金?]도 중국의 아름다운 옛 마을 100곳 중에 들어가니 이들 중 23곳이 강남 수향인 셈이다.

 

이들 중 우리나라 사람들에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저우좡[周莊]이다. 강남 수향 중 가장 먼저 개발된 곳이라 2001년 아펙(APEC)회의 때 참가한 세계정상들이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자자오[朱子角]는 상하이[上海]에 가까운 탓으로 이곳을 포함한 패키지여행 상품이 많이 있다. 시탕[西塘]은 <미션 임파시벌3>라는 영화 덕분에 널리 알려진 곳이고, 샤오싱[紹興]은 소설가 루쉰[魯迅:1881~1936]이 태어난 곳이며,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어릴 때 백부(伯父)집에서 자랐던 곳이며, 중국 8대 명주(名酒)에 들어가는 샤오싱주[紹興酒] 때문에 잘 알려진 곳이다.

 

우리나라에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강남수향들 중 유일하게 세계유산이 있는 곳은 퉁리[同里]이다. <소주고전원림(蘇州古典園林)> 9곳 - 졸정원(拙政園), 유원(留園), 망사원(網師園), 환수산장(環秀山莊), 창랑정(滄浪亭), 사자림(獅子林), 예포(藝圃), 우원(?園), 퇴사원(退思園) - 중 8곳은 소주에 있고, 나머지 한곳 퇴사원만이 이곳 퉁리[同里]에 있기 때문이다.

졸정원(拙政園)

유원(留園)

사자림(獅子林)

이 지앙수[江蘇]성에세계유산 한곳이 더 있다. 2000년 지정된 <명· 청 시대의 황릉(明?皇家陵寢;the Imperial Tombs of the Ming and Qing Dynasties, including the Ming Dynasty Tombs and the Ming Xiaoling Mausoleum) 중 명(明) 주원장(朱元璋)과 황후 마씨(馬氏)가 합장된 효릉(孝陵) 한 기는 이 곳 지앙수[江蘇]성의 성도(省都) 남경(南京)에 있다. 나머지 명· 청 시대의 황릉들은 북경과 심양에 있다. 참고 바란다.

 

타이후[太湖]라는 거대한 호숫가에 자리한 퉁리[同里]의 옛 이름은‘푸투[富土]’였다고 한다. 당(唐) 초기 이름이 너무 사치스러우니 바꾸라는 엄명이 떨어져 '구리 동'자를 쓴‘퉁리[銅里]’라 고쳐 불렀고, 송대(宋代)에 다시‘퉁리[同里]’라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나라 가경(嘉慶: 1796~1820) 연간에 기록된 『동리지(同里志)』에 '푸투[富土)'라고 불렀던 것을 나중에 '티앤[田)'을 떼어내고 여기에 '투[]'를 붙여, 결국 '통리(同里)'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고 그 연혁을 설명했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지는 말은 다르다. 수(隋) 양제(煬帝)가 방탕한 생활로 국고가 비게 되고 때마침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자, '푸투' 지역에 황량(皇粮)이라는 명목으로 과중한 세를 부과하여 이곳 주민들을 곤란에 빠지게 했다. 이때 진[] 아무개라는 수재(秀才)가 '푸[]'의 글자 윗부분의 점과 획을 빼버리고 남은 티앤[]과 투[]를 합쳐서 리(里)로 만들 계책을 생각해냈다. 그래서 주민들과 협의하여 모든 상점의 편액을 퉁리[同里]로 바꾸고, 황제가 파견한 사신이 오자 지명을 잘못 알고 온 것이 아니냐고 따져서 위기를 넘겼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곳은 장강(長江)이 가져다 준 비옥한 토질이 있는 타이후[太湖] 유역의 강남수향 중 한곳이다. 또 아열대 계열풍 습윤 기후대라서 강수량이 많고 일조량도 풍부한 지역이다. 벼농사, 양잠과 어업, 가축 사육 등 정착 생활을 하기에 더 좋을 수 없는 천혜의 환경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여분의 식량생산은 교역을 통한 부의 축적을 가져다주었는데, 특히 이곳 퉁리[同里]에서는 저우좡[周莊]과 함께 쌀과 식용유를 주로 교역하는 시장이 생성되었다.

 

명?청대(明?淸代)에서는 교역과 수공업의 중심지로서 번성할 수 있었는데, 축적된 부는 교육과 문화를 흥성시켰다. 많은 학자, 문인, 그리고 화가들을 성장시켰다. 많은 저명인사들이 이곳으로 터를 옮겨 여생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들의 영향은 자식 교육으로 이어졌고 과거에 많은 급제자를 낳았다. 장원(壯元) 1명, 진사(進士) 42명, 문무거인(文武擧人), 즉 진사 아래 단계인 문과와 무과에 급제한 사람이 93명이 배출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인구 5만8천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인 퉁리[同里]로선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퉁리밍린관[同里名人館]이라는 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음식 중 장원(壯元)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 많다. 장원족발(狀元蹄), 장원엿(壯元糖) 등이 그것인데 음식점의 상호에도 장원(壯元)이 많이 들어 있었다. 엿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도 입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기원(祈願)식품이다. 장원 급제가 꿈인 선비들의 보양식인 돼지 족발을 장원제(狀元蹄)라고 부른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백리가 멀다 않고 통리에 와서 장원제를 사 간다. 통리에서 잔치를 할 때 반드시 상 위에 있어야 할 음식이 바로 장원제다. 장원제의 유무가 손님 접대의 척도가 될 정도다.

 

옛 저명인사로는 葉茵, 徐純夫, 莫旦, 鄒益, 梁時, 何源, 計成, 王寵, 朱鶴齡, 沈桂芬, 陸廉夫, 袁龍, 陳沂震, 顧我錡, 黃增康, 黃增祿, 任預 등이 있다.

근대 저명인사로는 陳去病, 金松岑, 嚴寶禮, 費鞏, 王紹?, 藍公武, 馮新德, 楊天驥, 費以復, 劉汝醴, 範煙橋, 金國寶, 沈善炯, 馮英子 等。倪瓚, 顧瑛, 韓奕, 姚光孝, 董其昌, ?丹生, 沈德潛 등이 있다.

 

이 들 중 일부를 소개하면

 

위에인[葉茵]:송대(宋代) 저명시인(著名詩人)

모관[莫旦; 1429~1510?] 자(字) 경주(景週),호(號) 로향자(??子),현재 통리가 속해있는 오강시의 저명한 향토사학자. 『오강현력대지방지제요(吳江縣歷代地方志提要)』에 따르면 5살 아래인 이 지방 출신 시지안[史鑒;1434~1496]과 함께 오강시의 향토사료를 많이 수집하여 저서로 남겼음.

첸왕따오[陳王道:1526-1576] 명(明) 가정(嘉靖) 44(1565)년 진사. 벼슬은 남경감찰어사(南京監察御史)에 이르렀다.

지청[計成;1582~1642] : 문징명(文徵明), 이어(李漁)와 더불어 명말?청초의 유명한 원림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조경(造景) 서적(書籍)인 원야(園冶; 1634년)를 지은 사람이다. 그의 기념관은 오강시(吳江市) 수홍교유지공원(垂虹橋遺址公園)안에 있다.

 

 

 

수홍교유지공원 원경 - 화엄탑(華嚴塔)이 보인다. 안에는 세계최고의 조경서인 원야(園冶; 1634년)를 지은 지청[計成]의 기념관이 있다.

-북송 경력 8년(1048)에 건립된 수홍교는 강남에서 가장 긴 다리로 원나라 때 원래 목조 다리를 헐고 그 자리에 다시 석조 다리를 지었는데 그 길이가 약 500m나 되었다고 한다. 반달처럼 둥근 모양이 마치 무지개가 뜬 것 같다고 하여 수홍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다리는 유명 시인이 지은 시와 유명 화가가 그린 그림이 100편이 넘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67년 5월 다리가 붕괴해버려 이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주하오링[朱鶴齡;1601~1683] 저명작가. 저서로는『우암시문집(愚庵詩文集)』, 『송릉문집(松陵文集)』, 『두공부집집주(杜工部集輯註)』,『한산집(寒山集)』,『춘추집설(春秋集說)』,『역광의략(易廣議略)』,『상서비전(?書?傳)』

첸이젠[陳沂震] 1700年(康熙39年) 庚辰科殿試 金榜 第二甲 賜進士 出身 60名에 들어있다. 참고로 第一甲 賜進士及으로는 3명(汪繹, 季愈, 王露)이 뽑혔고, 第二甲보다 아래인 第三甲으로는 242명이 뽑혔다.

구우치[顧我錡] 字 湘南,鄂文端任 江蘇藩使 時,古學試士,得五十三人,湘南?冠,後?博學鴻詞,文端奏請,若?湘南設也。及詔下,而湘南歿已,?於才,嗇於命,文端歎息彌襟。

후앙젱캉[黃增康] 字 瀛叔,工?。『松陵?友詩』

후앙젱루[黃增祿] 中國?人名大辭典誤祿作采。字 谷卿,號 子?,道光二十年(一八四O)?人。從金應仁學山水,出筆幽秀,書法?壽平。『墨林今話續編』

 

 

 

육염부 작 임한석당화상(臨漢石堂?像) (40.9 X 101.4cm)

루리안푸[陸廉父;陸恢, 1851~1920] 청대의 저명화가, 소주 유원(留園)의 임천기석지관에는 육염부(陸廉夫) 등 4명이 공동 작업한 ‘관운봉도(冠云峰圖)’가 있다.

유원(留園)의 임천기석지관

첸취빙[陳去病;1874~1933] 시인, 서예가 겸 정치인으로 孫中山 秘書, 즉 중화민국 참의원 비서장을 지냈다. 신해혁명의 풍운아라는 미명도 가지고 있다. 중국 청나라 말에서 중화민국 초기의 문학결사단체인 남사[南社]를 1909년 가오위[高旭]·류야쯔[柳亞子]와 함께 발기하였는데, 신해혁명 후 한때 사우(社友) 800명을 넘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가 살던 집은 <진거병고거(陳去病故居)>라는 이름으로 개방되어 있다. 동남대학(東南大學) 교수와 강소성혁명박물관 관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호가당시초(浩歌堂詩?)』, 『속초(續?)』, 『오석지(五石脂)』, 『백척루총서(百尺樓叢書)』등.

 

진쑹천[金松岑;1874~1947] 혼란스러운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녜하이화[?海花]』를 처음 쓴 작가. 『녜하이화』는 중국 청나라 말기에 청푸[曾?]가 지은 고전 소설로, 한국에서는『얼해화』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청푸가 아닌 진쑹천[金松岑]이 먼저 창작을 시작했다.

양텐지[楊天驥;1882~1958] 근대 중국의 아버지 쑨원의 비서로 유명함. 자(字)는 천리(千里). 《민호(民呼)》, 《민립(民立)》등의 신문 편집자. 국무원(國務院) 비서(秘書), 감찰원(監察院) 비서장(秘書長)등을 역임하였다. 항전기간(抗戰期間) 중 홍콩(香港)으로 피신했다.

왕샤오아오[王紹?;1888~197O] 자(字)는 각진(?塵), 직업정치가. 어릴 때 무술변법(戊戌變法)에 영향을 받아 혁신론(變法論)에 심취, “世無百年不變之法”라는 구호를 외쳤다. 무술변법은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가 중심이 되어 행해진 정치개혁운동으로 1898년 6월 11일에 일어나 103일 후인 9월 21일 100여일 만에 실패했다고 하여‘백일유신(百日維新)’, ‘강양변법(康梁變法)’이라고도 부른다. 1908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1911년 귀국하였다. 제일차(第一屆)국회 중의원(國會 ?議院) 의원(議員)에 선출되었고, 헌법기초위원회위원(憲法起草委員會委員)을 역임하였다. 중국의 집권 정당은 공산당이지만, 8개 다른 정치단체(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중국민주동맹·중국민주건국회·중국민주촉진회·중국농공민주당·중국치공당·구삼학사·대만민주자치동맹)들이 공산당과 함께 권력을 구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8개 집단 중 하나가 민진이라고도 부르는 중국민주촉진회(中國民主促進會)이다. 이 모임의 창건자(創始人) 중의 한 사람으로 부주석 등을 역임하였으니 통리에서 가장 크게 치는 인물인 것 같다. 2008년 11월 3일 이곳 퉁리에서는 왕샤오아오기념관[王紹?紀念館] 낙성식이 열렸다. 이 날 전국인대全國人大 상무위常委會 부위원장副委員長 겸 민진(民進) 중앙 주석(中央主席)인 엄준기(嚴雋琪)와 民進 중앙상무부주석(中央常務副主席) 라부화(羅富和) 등이 방문하였다. 이 때 오강시(吳江市) 령도(領導) 온상화(溫祥華)와 손열량(孫悅良) 등 지방 고위관리도 배석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류야쯔[柳亞子] 중국 시인. 이름은 웨가오[慰高], 후에 기츠[棄疾]로 개명했다. 자는 안루[安如], 야쯔[亞子]는 호이다. 1903년 상하이애국학사[上海愛國學社]에서 수학하였고, 1909년 천취빙[陳去病] 등과 혁명적 문학결사인 남사(南社)를 조직했다. 신해혁명 후에는 국민당 중앙감찰위원 등을 역임했고,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4·12쿠데타 후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장제스 반대활동을 했다. 중일전쟁 중 쑹칭링[宋慶齡] 등과 항일민주운동에 참여하고, 1945년 종전 후 홍콩[香港]에서 민주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 후에는 중앙인민정부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쑤만주[蘇曼殊]와의 친교가 두터워, 『쑤만주전집(5권, 1928)』 등을 편집했다. 그의 작품은 『남사총선(南社叢選, 1927)》 『승부집(1928)』 등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풍에 대하여 궈모뤄[郭沫若]는 <현대의 굴원(屈原)>이라고 논평하였다. 사후(死後)인 1959년에는『류야쯔시사선[柳亞子詩詞選]』이, 1981년에는『류야쯔시선[柳亞子詩詞選]』 등이 출판되었다.

옌빠오리[嚴寶禮;1900~1960] 상해의 교통대학 전신인 남양공학(南洋公學) 출신. 1938년 1월 25일 현재 중국의 종합대형일간지인 웬후이빠오[文匯報] 창간. 이 신문사의 총경리(總經理)를 맡았다. 이 신문은 1939년 5월 18일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의 압박을 받아 정간되었다가 1945년 8월 18일 복간되었다. 1946년 전면적인 내전 발발 후 〈원후이바오〉는 공산당 쪽으로 기울어 다음해 5월 24일 국민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1949년 6월 복간되었다.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글들을 발표해서 다양한 의견을 제시, 토론을 전개하며, 문화면을 발행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또한 대형 문예잡지 〈문회월간 文匯月刊〉을 출판하고 있다.

런촨신[任傳薪;1887~?] '퉤이쓰위앤(退思園]'을 지은 런란성[任蘭生]의 아들. 천취빙과 진송천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여성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어 19세 때인 1906년, 퉤이쓰위앤 안에 뉘쩌뉘샤오[女則女校]를 창설했다. 고액 월급을 주고 대학자인 치앤지보[錢基博], 서예가 치앤쭈이[錢祖翼], 판이앤챠오[范煙橋] 등과 같은 유명인사들을 초빙했다. 이후 학생 수가 늘어나자 현재 자리에 별도 건물을 지어 나왔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정원을 매각하면서까지 교육진흥에 힘써, 강남 일대에 현대식 교육을 보급하고, 당시의 민족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주의 정신의 고취에 공헌했다. 특히 1915년 위앤스카이[遠世凱] 정부가 일본 정부와 21개 항목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자, 학교 안에 '국치기념비(國恥紀念碑)'를 세우기도 했다.

진꾸오빠오[金國寶;1894~1963] 중국 저명 경제학자,통계학자,부단대학(復旦大學), 기남대학(?南大學), 상해사회과학원경제연구소(上海社會科學院經濟?究所) 교수 저서『통계학대강(統計學大綱)》, 『중국경제문제(中國經濟問題)』, 『공업통계학원리(工業統計學原理)』등.

첸취빙[陳去病] 등 상해 일대 문인들의 아지트 난위앤차스[南園茶社]내부

 

이곳 퉁리를 찾은 사람들 중에 훌륭한 글(詩詞)을 남긴 이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예운림(倪雲林), 동기창(董其昌), 당인(唐寅), 심석전(沈石田), 문징명(文徵明), 고영(顧瑛), 한혁(韓奕), 요광효(姚光孝), 수단생(?丹生), 침덕잠(沈德潛) 등을 꼽을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운림(倪雲林)이다. 원(元)나라 말기 화가·시인으로 장쑤성[江蘇省(강소성)] 우시[無錫(무석)] 출신이다. 호는 운림(雲林)·환하생(幻霞生)·형만민(荊蠻民)·정명거사(淨名居士)·주양관주(朱陽館主)인데 운림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오진(吳鎭)·황공망(黃公望)·왕몽(王蒙) 등과 함께 원말(元末) 4대가라 불린다. 산수와 고목죽석(枯木竹石)을 즐겨 그렸는데, 4대가 중에서 가장 품격이 있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저택 내에 청비각을 세워 고서화·유물(遺物)·서적을 수집했다. 장우(張雨)와 황공망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과 교제하였으며, 도교(道敎)에 심취하였고, 벼슬에 뜻이 없어 풍류를 즐기는 은둔자 생활을 했다. 52세 때에 가재를 나누어주고 처자와 함께 20여 년 유랑생활을 하고 74세에 귀향했고 그 해 병사했다. 그가 그린 산수화는 조용한 취향의 독자적인 화경(畵境)에 도달한 산수화 양식으로 <소산체(蕭散體)>라고 한다. 대표작에「어장추제도(漁莊秋霽圖)」,「용슬재도(容膝齋圖)」 등이 있고,『운림시집(雲林詩集)』이란 저서가 있다. 많은 후예들이 그의 그림은 본떠 그렸는데, 이를‘방예운림(倣倪雲林法)’,‘방예운산수도(倣倪雲林山水圖)’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방예운산수도(倣倪雲林山水圖)’가 있다. 2010년 6월 26일 베이징에서 열린 경매에서는 청초(淸初)의 화가 팔대산인(八大山人;1624~1703)의 '방예운림산수'가 한화 150억 원에 낙찰된 적이 있다.

 

명나라 때의 문인?화가?서예가?정치가였던 동기창(董其昌;1555~1636) 역시 그 중의 한분이다. 자는 원재(元宰), 호는 사백(思白)과 향광거사(香光居士)이다. 장쑤 성 출신으로 명 최고의 문인화가 및 화론가라 불린다. 서예는 왕희지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행서, 초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중국 그림의 2대 유파 중 하나인 남종화를 대성함으로써 당시의 그림 경향을 남종화 일색으로 만들기도 했다. 저서로는『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 『화안(畵眼)』, 『화지(畵旨)』, 『용대문집(容臺文集)』 등이 있다.

 

명나라의 4대 화가 - 당인(唐寅)·심석전(沈石田)·문징명(文徵明)·구영(仇英)- 중 구영(仇英)을 제외한 세 사람도 이곳 퉁리를 찾아 훌륭한 글(詩詞)을 남겼다.

청(淸)나라 시인 심덕잠(沈德潛)도 이곳에서 훌륭한 글을 남겼다. 자는 확사(確士), 호는 귀우(歸愚). 장쑤성[江蘇省] 창저우[長洲] 출신으로 1739년 67세에 처음으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황제 측근으로서 순조롭게 출세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郎)에 이르렀다. 저서로는『고시원(古詩源)』. 『당·명 국조시별재집(唐明國朝詩別裁集)』, 『심귀우시문전집(沈歸愚詩文全集)』,『당송팔가문독본(唐宋八家文讀本, 30권)』 등이 있다.

 

나는 이 모든 분들보다 퉁리를 세계적 명소로 만든 분은 '퉤이쓰위앤(退思園]'을 지은 런란성[任蘭生;1837~1888]이라고 생각된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퇴사원을 만들었으며, 그 결과 이곳 퉁리 뿐 아니라 강남수향을 세계에 더욱 널리 알렸던 분이기 때문이다.

퉤이쓰위앤(退思園]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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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2.12 16:10

    첫댓글 좋으네요

  • 11.12.13 11:31

    우와 나도 가고싶당

  • 11.12.24 13:15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풍부한 지식과 높은 식견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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