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오전 06:30분
이승만은 아침 낚시 중 전쟁 발발 보고를 받았다.
1950년 6월 26일 국회에 모인 의원들은 "서울 사수냐 철수냐"를 놓고 밤샘 회의를 하여 "서울 사수" 결정.
1950년 6월 27일
새벽에 이승만이 탄 특별열차가 서울을 출발하여 오전 11시 대구 도착 했다. 하지만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극소수의 관료들이 "너무 많이 내려오신 것 같습니다"라고 해서 대전으로 되돌아 갔다.
같은 날 오전, 국무위원들이 국회의 서울 사수 결정을 보고하러 경무대를 방문했으나, 이미 이승만이 피난간 걸 그때서야 알게 된다.
같은 날 밤 10~11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세 번 반복 방송됩니다.
대전에서 녹음한 뒤 라디오로 송출한 연설 내용 :
"유엔이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했고,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군수와 물자를 날라 도우니 국민들은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마자 발행된 조선일보의 호외
".... 오늘 28일 오전 3시 30분 부터 조선 인민군은 제 105군 부대를 선두로 하여 서울시에 입성하여 공화국 수도인 서울을 해방시켰다.... 오래 갈망하여 맞이하던 조선인민군대를 서울시민들은 열열한 환호로서 환영하였다..... 조선인민군대는 정의의 총검으로 서울시를 해방시켰다..... 반동을 제때에 적발하라! 그렇케함으로서 당신들이 공화국의 수도를 튼튼히 고수하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1, 우리민족의 경애하는 수령인 김일성장군 만세!
이승만이 대구로 도망치면서 북한군의 추격을 우려해 폭파시켜 버린 한강인도교 (위쪽)
1950년 6월 29일 북한군의 남하를 막으려 미군 폭격기 B-29가 한강철교를 폭격하는 모습.
이로써 한강의 모든 다리가 파괴됩니다.
이승만의 예고 없는 폭파 지시로 인해 당시 한강 인도교를 지나던 500여명 이상의 서울 시민이 폭사 당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함락한 뒤 시가행진중인 북한군 보병부대
폭격으로 무너진 한강철교 옆을 필사적으로 건너는 피난민들.
한강을 건너지 못한 100만명 이상의 시민들은 3개월간 북한 공산당의 '인공 치하'를 견뎌야 했습니다.
모든 다리가 폭파되어 나룻배를 타고 강의 남쪽으로 이동하는 피난민들
얼어붙은 한강을 목숨 걸고 건너는 피난민들 (1950년 겨울)
1950년 6월 28일 한강교 폭파…서울 함락
새벽 1시 45분 "돈암동에 북한군 탱크, 한강 다리를 끊어라"
새벽 2시 30분 지금의 한강대교 불기둥이 솟았다.
굉음 속에 비명은 묻혔다.
피난민 500~800명이 다리 위에서 사라졌다.
* 당시 4,000여 명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서울은 함락됐다. '인공 치하' 버려진 시민들
비극의 서막
버려진 건 시민만이 아니었다
국군 총병력 46% 한강 이북에 고립
국회도 버려졌다. 전날 새벽 '수도사수 결의안'
의장단이 경무대로 갔을 때…
*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조봉암
이미 서울 떠난 대통령이 녹음한 음성만이 서울을 지켰다
* 이승만 : 27일 새벽 3시 경무대 떠남 (새벽 4시에 서울역서 열차편으로 대구행. 이후 열차를 돌려 대전까지 되돌아옴)
* 의장단 :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고 국회로 돌아와 27일 새벽 4시 비상국회 산회 (2대 국회 210명 의원들은 27일 '각자도생'. 62명 서울 잔류. 이중 35명이 피살 혹은 피랍)
정작 한강대교 입구까지 북한 탱크가 출현한 건 다리 폭파 7시간이 훌쩍 지나서였다.
* 참고: 6·25 전쟁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강 인도교는 폭파 8년 만에 복구됐다
그 다리를 건넌 대통령
경축 테이프만 끊고 그날 이후 생사 끊긴 넋들에 대한 '진혼'은 없었다
한강인도교 폭파 희생자 추모제는 민간단체가 2007년에 처음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