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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들이 - 80 여인들의 재발견
이틀에 걸친 서울나들이를 마치고 귀향열차를 타러 영등포역에 왔을 때는 비가 내렸다. 설도 지나지 않았으니 봄비라기에는 성급한 관념이겠지만 2월의 빗방울이 그리 시리지는 않았다. 사무적인 일도 있었고 전시회를 돌아보는 문화적 치기도 부려봤지만 역시 가장 흥미롭고 의미심장했던 사건은 동기들과의 회동이었다.
기용이나 광흠이야 그리 새삼스러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아무 예고 없이 당일 날 전화를 했는데도 망설임 없이 뛰쳐나온 것은 봄비 같은 감동이었다. 광흠이는 저녁 먹다가 숟가락을 던지고 나왔다고 하는데 그 숟가락에 누가 안 맞았는지 모르겠다.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담겨있는 압축된 정보도 정보지만 그 정제된 치음(治音)의 세계는 80년대 내가리 강가에서나 21세기의 화려한 노래방에서나 변함이 없다. 불행히도 이날은 그의 노래 들어볼 겨를이 없었다.
기용이, 세련된 패션에 우산 하나 달랑 들고 나타난 절제된 모습이 겨울 분위기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25년 만에 기용이를 본 두 여인들의 첫 마디가 "역시"였는데 그건 바로 기용이의 겨울 패션에 대한 감탄사였다. 기용이의 패션 감각이 어제 오늘에 형성된 것이 아님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인간 배기용의 미스터리가 워낙 다층적이라 평생 풀어야 할 과제이지만 친구들에게 조차 그렇다는 것은 정녕 미스터리다. 그의 섬세와 우정 어린 배려는 너무나 투명하여 들여다 볼 필요도 없지만 '특정 영역'에 있어서만은 손톱도 안 들어가는 불투명이니 내 추리와 분석력은 아무 쓸 모가 없다.
금화수, 동양인들이 쓰는 최고의 개념 일곱 개를 모아놓은 요일 이름 중에 3개를 고스란히 점유하고 있는 여자. 학교 다닐 때부터 좀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이름이다. 당시의 고전적 풍조로 비춰볼 때, 그가 일찌감치 내숭과 요조를 버리고 발랄과 무격의로 캠퍼스라이프를 이끌고 간 것은 거의 도전으로 보였다. 역시 전화를 걸자마자 망설임 없이 나오겠다고 했다. "혹시 시간과 형편이 되면..." 이라는 어렵게 꺼낸 말이 되레 무안스러울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교생실습도 같이 나가며 꽤 가까웠는데 25년 동안 연락도 없이 지냈다는 것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고야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게다가 화수는 혼자 나오지 않고 귀하디 귀한 인사 한 명을 대동하고 나왔다.
채서우, 학교 다닐 때는 채순자였는데 개명을 했다고 한다. 개명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개명을 감행한 것을 보면 뭔가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개명의 역사를 들어볼 겨를은 없었다. 나이 오십에 아이처럼 그렇게 선명소박한 웃음을 내보일 수 있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회색 빵모자가 어이된 일이냐고 물으니, 일하다 나와서 머리를 못 챙겨서 그렇다고 했다. 내 눈엔 그게 아무래도 의도된 미적 컨셉이 아니었나 싶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특별히 79 선배남들에 대한 추억이 남달랐는데, 이게 아주 흥미롭고도 의미심장한 발견이었다.
너무나 반가운 동기들이었고 기쁜 만남이었지만 25년 만의 해우에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너무 많다는 것은 너무 적은 것 보다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물어 볼 게 산더미로 쌓여 있었지만 일단 과거에 공유했던 추억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시작하는가 싶었는데 12시가 다 되었다. 오랜만의 한양 나들이라 심야의 스케줄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런데 거시기한 스토리에 관한한 80 남자들에게 80 여인들은 거의 공백이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그 공백은 독문과 야사에, 정확히 말하면 독문과의 미학적 야사에 씻을 수 없는 태만이자 달란트 방기였다. 그런데 놀랍고도 흥미로운 것은 그 공백을 메울 가능성이 보였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수평관계에서라기보다는 수직관계 혹은 사선관계에서 일어난 스토리라는 게 좀 아쉽긴 했지만.
하여간 화수와 서우를 만남으로 인해 80년대의 절반을, 민감하고 치열했던 감성시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다. 최소한 80 동기들의 외연이 확대될 가능성은 훨씬 커졌음에 틀림없다. 멀지 않는 미래에 좀 더 큰 규모의 만남을 도모하자, 그렇게 말하고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엔 내내 비가 내렸다.
그렇지만 아, 흘러가버린 세월을 어찌할 건가! 그 시절에 이미 세월의 허망함에 잠 못 이루며 읊조리던 시가 하나 있지 않았던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목마와 숙녀 - 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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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니들 진짜 하나도 안변했네. 화수언니는 여전히 백옥같은 피부고.. 순자언니 얼굴이 생각 안난다고 했더니 총기백배 홍여사는 "채순자 언니, 그 예쁜 언니 있잖아..." 그래도 가물가물했는데 사진보니 금방 알아보겠네요. 진짜 소녀같다. 이상하게 80 언니들과 별로 못 어울려서 우리가 참 문제있는 동생들인가 반성도 했었어요. 어제 우리 인희언니 보고싶다고도 했는데.. 우린 어제 선배가 팽개치고간 숙제 끝내고 학교서 나와 허탈한 맘으로 그 아가씨 파전집에 갔는데.. 막걸리 없이 파전 묵는 인간들 우리밖에 없더라. 피튀기는 말싸움에도 불구하고 선배가 좀 그리웠음.. 근데 이 멤버로 쭉 간 것이 아니고 야밤에 딴 스케쥴있었다고요?
25년 만에 만난 두 여인, 실제로 어떻게 그렇게 긴 세파를 넘어 청순발랄을 그대로 소지하고 있을 수 있는지 미스터리였다. 내게는 이 미스터리를 풀어야 하는 문학적 과제 하나 더 부과된 셈이다. 그놈의 '숙제'야 내가 있었다고 해도 도움 될 일은 없었을 테고. 하여간 마무리했으니 짐을 덜었겠구만. 서울에서도 막걸리는 마셨다만 4 건의 미팅을 몰아서 한꺼번에 소화해내야 했던 관계로 마음놓고 술잔 들지는 못했다. 나 때문에 2차 없이 헤어지게 된 것은 안타까움이고 아쉬움이었지만 첫 술에 배부르기는 어려운 법. 다음 기회를 노릴 수 밖에.
영미의 신선한 등장에 이어 언니들의 청순발랄한 출현에 긴장보다 막막함... 가려지지 않는 흰머리땜에 태어나 처음 염색하고 좀 회춘하나 싶었는데... 절망.... 우째 살면 저렇게 되는강?
화수와 서우, 회원 가입해서 피부관리와 젊음유지법에 대한 비전을 좀 알려 주길. 동창 좋은게 뭐고. 도와가며 살아야지. 우리도 좀 품위있게 늙고 싶다. 그리고 언급했던 경자와 정애 연락처 좀 올려주고. 스토킹할 사람 없을테니 걱정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