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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는 그 이름처럼 참 살기좋은 마을로 만들고 가꾸기 위해 주민과 자치단체가 서로 협력하는 사업입니다. 타 사업과 다른 점이 있다면 거창한 건축물을 만들고 도로를 정비하는 그러한 사업이 아니라 도시, 농촌 상관없이 각 지역별로 가지고 있는 개성과 부존자원을 활용하여 마을을 더욱 아름답고 쾌적하고 특색 있게 만드는 활동으로서 주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업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주에는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찾은 마을 보물의 복원을 통해 전통문화마을로 다시 태어난 「2008 참살기좋은마을가꾸기」 대상, 전남 장흥군 안양면 기산마을을 소개합니다.
장흥 기산마을은 참살기좋은마을가꾸기 사업을 계기로 구전으로 내려오던 역사적 전통을 토대로 자료를 수집하고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조선중기 가사문학의 효시를 이룬 기봉 백광홍 등 문학적 전통과 유물을 발굴하였습니다. 송광 정철의 관동별곡에 영향을 준 가사문학의 효시인 관서별곡의 저자이자 조선 팔문장 중의 한 분인 기봉 백광홍 선생을 비롯하여 8현을 배출한 서재인 봉명재터를 복원하고 기산 팔문장 시가비 건립, 시가문학 동산 조성, 우물 및 빨래터 정비 등 하마터면 역사속에 사라질뻔한 마을의 전통을 마을의 보물로 재탄생 시킨 주민 모두의 노력이 돋보이는 마을입니다.
☞장흥 기산마을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흥 안양 기산마을 카페 (http:cafe.daum.net/jnjhgisan)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수기>
- 팔문장 전통 문화마을 조성 -
전남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기산마을 백광철
마을입구에 걸려 있는 행정안전부 주관 「2008년 참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전국 대상마을 선정」이라는 경축 현수막이 오늘도 이곳을 지나는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민들이나 찾아오는 모든 분들에게 살기좋은 마을로 변모되어있는 모습들을 보여줘야 한다는 무거운 부담이 바람에 나부끼는 현수막처럼 나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한다.
우리마을은 준 산간 마을로서 사자산밑에 자리하고 있으며 군 소재지인 장흥읍과는 4km정도 떨어져 있고 멀리는 득량만의 바다가 가느다랗게 보이는 남쪽의 끝자락에 위치한 87세대 176명이 오순도순 살고있는 따뜻한 곳이며 60세 이상의 고령인구가 105명(59%)으로 노인들만 거주하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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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화 조 성> |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쇠락해가는 모습을 보다 못한 주민들 스스로가 마을을 바꾸어 보자고 마음을 모아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안을 찾던중 행정안전부에서 주관하는 참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콘테스트를 듣게 되었다. 마음이 설레였다. 주민들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줄 해답을 찾은 느낌이었다.
당장 마을 개발위원장을 비롯한 추진위원들에게 연락을 하고 회의를 개최하였다. 먼저 주민 전체 회의를 통하여 자치규약을 작성하였으며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콘테스트에 대해 마을 주민들을 교육시키고 타 마을에 견학을 가보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다음날 주민회의를 열어 참 살기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설명회를 가졌다. 면사무소에서 나와 자세히 사업 설명을 해줬다. 타 마을 견학 얘기를 했더니 차량과 견학장소도 협조해주겠다고 했다. 이틀후 부녀회에서 음식과 식사를 준비하여 타 마을 견학을 가게 되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주민들의 보고 듣고 느낀 소감을 듣게 되었는데 한결같이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결의들이었다. 그 중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한 내용이 있었다.
마을어르신 한분이 술을 한잔 하시고 과거 기산마을의 팔문장에 대하여 설명하셨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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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명재터 복원 > |
“옛부터 우리마을은 조선팔문장(기봉 백광홍)을 배출한 마을로 독특환 역사,
문화자원이 풍부한 마을로 기산마을은 봉명재(서당)가 자리하고 있어 예부터 많은 문학인을 배출하여 장흥의 일기산 이라고 불리우기도 하였으며 마을 내 600년 전통의 옛우물(석간수)은 앉은뱅이가 끓어오르는 물을 마시고 거짓말처럼 일어나서 갔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면서 관광버스가 마을을 찾을 정도로 사람이 모여드는 마을이었제...
그러면서 한시와 연계되어 자연스레 팔문장 마을로 불리웠어. 그런데 도시화․산업화의 물결속에 하나둘씩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고 손질에 비해 소득이 별로 없자
관리의 소홀과 무관심으로 방치한 탓에 팔문장님들을 잊어 가고 옛 우물도 회손된
것이여... ”
팔문장...돌담길...우물가...옥녀바위...뭔가가 잡히는 느낌이었다. 면장님과 추진위원들에게 팔문장과 우물 얘기를 했더니 모두다 같은 생각이셨다. 팔문장과 옛 우물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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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위원회 회의> |
행정관계 부서에서 협조를 구하고 추진위원회를 통하여 세부사업계획서를 세워 추진하고 이러한 사실을 향우회원들에게 알려 주민들과의 한마음 한뜻이 되도록 했다. 팔문장님들의 시를 생각하며 돌담길을 따라 뛰어놀던 아이들의 함성과 우물가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빨래하고 물을 깃던 아낙내들의 모습은 세월과 함께 기억속으로 잊혀지고 있지만 그 복원을 통하여 오늘을 살고있는 어린후세들에게 고향을 지키고 사랑하는 어르신들의 삶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체험을 통하여 시골의 넉넉한 인심과 사랑을 나누어 보고자 추진위원회에서는 “팔문장 전통문화마을 조성사업”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향우들에게서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에 내려온 향우들과 마을주민 모두가 꽃과 돌담길을 정비하고
잔치를 벌렸다. 골목길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꾸며지는 골목길을 보면서 그동안
잘될까 하는 불안한 마음들이 사라졌다. 모두들 너무나 고마웠다.
문제는 팔문장님들의 시가비를 세우는데 자료를 찾는 문제였다,
우선 팔문장님들을 배향하는 사우인 기양사와 장흥문화원을 다 뒤졌으나
기봉 백광홍님과 옥봉 백광훈, 서곡 임분, 죽곡 임회, 님들은 장흥문화원에
자료가 남아 있었지만 남계 김윤, 지천 김공희, 동계 백광성, 풍잠 백광안, 님들의
자료는 찾을길이 없었다,
용산면 금곡출신으로 김규정님께서 국립중앙 도서관과 한국 고전문학번역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문집과 시가비 자료들을 어렵게찾아 복사해 주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18년 2월1일자와 12월1일자에 조선왕조실록에 기봉 백광홍이
조선 팔문장이며 이산해 송익필 윤탁연 이순인 최립 최경창 하응림 등으로 기록되어진
기록도 복사해왔다, 기봉 백광홍이 조선팔문장에 드시자 동문수학하셨던 남계 김윤,
지천 김공희,동계 백광성,풍잠 백광안, 옥봉 백광훈, 서곡 임분, 죽곡 임회,
소위 동 시대에 사마양시에 합격하신 8분을 기산팔현, 장흥 기산 팔문장이라
칭 하였다는 ,강진 성전면의 원주이씨 이 금, 의 기산팔현지 서문과, 서계 위백순
선생의 기산 8현찬 시문도 복사해 와서 자료를 확보했다,
우리 마을에는 팔문장배출 이후로 이사 오셔서 사시는 광산노씨 들이
30 여가구 살고 계시는데 마을가꾸기 사업이다보니 주민화합 차원에서 노진사 노관의
시가비도 한수 세워 드리기로 주민총회에서 합의 되었으나 70년전 아래 사랑채의
화재로 문집이 남아있지를 않았다, 다시 김규정님의 도움으로 나주출신 학이재의
문집에서 차운시인 충 의 라는 노진사의 시 자료도 찾아왔다,
조선대학교 교수인 백수인(문학박사) 친구에게 부탁하여 한문시 들을 전부 한글,
현대문으로 번역해서 그동안의 자료를 모아 마을 문집도 만들고,
마을입구에 팔문장님들의 시가비(14기)를 설치하고 시가문학 동산 조성과 마을내 우물 및 돌담도 정비하고 확충했다. 물론 시가비동산 부지를 확보하는데는 백인천님을 포함해서 마을 주민들의 20분이 인감증명을 첨부해서 토지 사용승락을 해 주셨기 때문에 공원 조성과 문학 산책로 조성이 가능했다,
예부터 지천으로 깔려있는게 돌인지라 마을 어리신들의 돌 다루는 솜씨는 감탄할만하다. 돌담은 힘이 아닌 지혜가 쌓는단다. 돌담을 쌓고 있는데 허리가 구부정하신 어르신께서 나오셨다. 걷기에도 부담스러워 보이시는데 넘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어르신 조심하세요”했더니 “괜찮네, 고생이 많구먼” 하시며 앞에 놓인 조그마한 돌 하나를 주워 담위에 놓으신다. “어르신 감사합니다”하니 말씀하시길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죽으면 돈도 가져갈 수 없고 내가 죽더라도 이곳에 올려놓은 돌덩이 하나는 돌담이 되어 있을 것이 아닌가”하시면서 겉옷을 벗으시며 도와주신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동안 일하면서 힘들었던 수고가 한순간 풀리는 듯 했다. 한편으로 세월의 흐름앞에 숙연해지며 협력하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작은 마음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봉명재(서당)를 가기 위해 지났다는 좁은 오솔길을 복원하는 시기에는 가을 추수와 겹쳐지게 되어 주민들의 참여가 저조해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몇몇 어르신들의 협력속에 계속하여 일을 하게 되었다. 방치되고 풀이 무성하여 흉물스럽게 쓰레기들이 널려있는 사용불가능의 길이 수고의 덕에 아름답게 꾸며졌다. 틈새의 시간이 있을적마다 이곳을 찾으며 곧고 늘 바쁘게 살아왔던 삶의 모습을 뒤돌아 보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어본 곳이다.
늘 나오셨던 어르신이 나오시질 않으셨다. 다음날 나오셨기에 “어제는 좋은 일이 있으셨기에 안나오셨어요? 여쭈니 허리가 아파 병원에서 주사맞고 물리치료하고 오셨단다. 정말 미안한 생각이 들고 무척이나 고마웠다. 보통때면 치료하고 쉴 수 있는 상황이지만 협력하시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령으로 인한 연약함으로 함께 하지 못하셨던 많은 어르신들은 볼때마다 고생한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고 동네가 활기가 돈다며 즐거워하시는 모습, 때로는 오해속에 불평을 하시면서도 협력하고 함께 하시는 주민들을 보면서 정말 좋은 마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돌담 집앞에서 빨갛게 익은 홍시를 가져다주시는분, 집에 손님이 오면서 가져왔다고 음료수와 과자를 가져다 주시는분, 닭을 잡아 죽을 끓여 갔다 주시는 분 등등...
여러 모습으로 함께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정을 나누고 사랑하는 우리들의 마음들이 골목길 마다의 꽃의 향기처럼 마을을 넘어 이웃주변까지 훈훈한 미담으로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 계속된 일로 인하여 피곤속에 잠을 설치기도 하고 입술에 물집이 생기기도 했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핀잔을 주는 아내의 등을 토닥거리며 설득하면서 함께했던 시간동안 최선을 다했다. 정말 좋은 시간들이었다.
끝으로 수시로 우리마을을 찾아주셔서 격려해주셨던 군수님을 비롯한 면장님,
행정관계자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참 살기좋은 마을로 꼭 만들어 보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