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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장 홍천 알리기 교재용 >
넓은 내(홍천) 이야기
석 도 익 지음
홍천은 강원도 중서부에 위치한 군으로 동경 128°51'∼127°32', 북위 37°32'∼37°56'에 위치하며. 동쪽은 양양군과 강릉시, 서쪽은 경기도 양평군과 가평군, 남쪽은 평창군과 횡성군, 북쪽은 춘천시, 인제군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1,818.68㎢이며, 인구는 69,163명(2020년 10월 기준)이다. 1읍 9면 192동리(980개반)가 있다. * 역사 고대 -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벌력천현이라 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녹효, 별호는 화산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 1018년(현종9) 홍천현으로 개칭되었다.
-무궁화의 고장 넓은 내 홍천강 400리-
홍천의
강물은 /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고 / 깊지도 않고 얇지도 않으며
산은 / 위압적으로 높지도 않고 비굴할 정도로 낮지도 않았다.
들은 / 막막할 정도로 넓지 않고 궁색할 정도로 좁지 않으며
개 짖는 소리는 멀리 들리고 닭이 우는 소리는 한가했다.
위의 글은 조선말 격동기에 선비의 상징적 인물로 철학자요 교육자 이신 화서 이항로 선생님의 화서집(華西集)에 기록된 글이다.
화서 이항로 선생은 1792년 2월 13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에서 탄생하여 1868년 3월 18일 서거하기 까지 높은 관직이나 영화를 사양하고 백년대계를 위한 후학을 길러 나라에 근간을 세운 분으로 말년에 홍천 화촌면 삼포에 이상농촌을 실현하려고 하셨으며 홍천을 잘 표현한 글이다.
또한 홍천사람들은 어질고 순박하여 이웃 간에 다툼이나 송사가 없어 관청에서는 누워서도 관리를 할 수있다하여 와치현(臥治縣) 이라고 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명을 붙인 홍천강이 흐르고 있어 강 유역을 따라 작은 분지로 형성된 강 유역을 따라 선사시대부터 터 잡고 살아온 홍천군은 전국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가장 덮기도 하려니와 추운지방으로 소문나 있다.
홍천기행 (지리 역사 문화를 찾아서)
서울에서 한강을 옆으로 바라보며 거슬러 올라오다보면 서울시민의 생명수인 풍만한 팔당댐을 보게 되며 다시 남한강과 홍천강물이 섞인 북한강의 합류지점인 양수리를 지나면 댐에 합류하여 거대하게 뭉쳐있는 남한강의 물가에 청둥오리들의 유유자적하는 모습도 보게 된다,
북한강을 따라 경춘 국도나 양양고속도로 춘천을 경유하여 홍천으로 올수도 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까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으며 머지않아 홍천까지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청운면 용두리 44번 도로가 속초를 이어주는 직통도로로 이용되고 있는데 청운면 삼성리 신당고개 정상에서부터 경기도와 강원도의 도계이자 홍천군 남면으로 홍천의 관문이다.
남면
홍천의 남쪽이라 하여 일제강점기 행정편의를 위해 남면이라 개칭했다. 원래의 명칭은 금물산 면이었다.
남면은 최첨단 의료기기를 생산하는 삼성메디슨공장이 있어 전 세계의 의료기기 시장을 점유하고 있고 이 외에도 많은 중소기업들이 농공단지에 유치되고 있다.
또한 최승희라는 세계적 무용수가 탄생한(제곡리)곳이기도 하다.
그는 격동기에 친일행적과 월북인사로 세계적인 예술인이지만 비운의 일생을 살다갔고 그의 재능은 묻혀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이곳 가까운 용수리 에는 가수 인순이가 세운 해밀학교가 있어 다문화시대 세계인의 화합을 열어가기도 한다.
남면과 홍천읍 의 경계인 며느리의 애달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며느리 고개가 있다. 지금은 고개를 넘지 않고 터널을 지나면 홍천읍이다.
며느리 고개에는 애달픈 전설이 하나 있다.
며느리고개의 전설
그 옛날엔 이 고개에 산적이 출현하여 고개를 넘는 나그네의 짐을 빼앗고 또한 맹수가 나타나 길가던 사람을 해쳤다.
때는 조선 중엽 어느 날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나귀 등에 집신을 가득 싣고 홍천의 어느 고개를 넘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앞만 보고 가다가 울창한 숲이 있는 성황당 산마루턱에서 쉬어 가려고 잠시 멈췄는데 그때 나귀 등을 보자 짚신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이곳 산마루에서 기다리게 하고 짚신을 찾으러 오던 길을 되돌아갔으나 찾을 수 없었다. 시아버지가 산마루 성황당에 되돌아와 보니 나귀만 있었고 며느리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며느리를 찾고자 산자락 이곳저곳을 헤매었으나 찾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내려가려는데 나귀마저 움직이지 않았다. 나귀를 강제로 회초리로 두들겨 패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며느리는 산적에게 잡혀가거나 호랑이에게 잡혀 먹혔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혼사 행렬이 그곳으로 지나가면 나귀의 발굽이 땅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가면 안전하게 넘을 수 있어 제사를 지내고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또한 며느리들이 이 고개를 넘으면 산적에게 잡혀가거나 호랑이가 나타나서 잡아 먹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런 사건이 있은 그날 이후부터 이곳 사람들이 행하는 혼례 행차는 며느리고개를 넘지 않고 길이 먼 삼마치고개로 빙 돌아갔다고 한다.
특히 며느리들은 이 고개를 넘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석도익 소설가가 쓴 며느리 재 전설
며느리 재 전(傳)
아주 오랜 옛날에 화산현 금물산면 월천동에는 지체 높았던 김 진사가 살고 있었다.
본디 김 진사는 사대 문안에 살던 세도가의 집안이었으나 간신배들의 거짓상소로 인하여 삭탈관직당하고 낙향한 병조참판의 아들로서 일찍이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의 강경한 반대로 관직을 받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서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는 선비였다.
감진사의 부친은 이곳에 낙향하여 터를 잡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다가 세상을 떴다. 김 진사에게는 늦게 얻은 외아들이 있었는데 인물이출중하고 영특하여 화산현의 삼포 대가 댁 규수와 혼인을 하였으나 학문만 하던 쇠약한 몸이라서 그랬는지 2년 도 채 되지 않은 신혼에 슬하에 자식도 두지 못하고 병사하고 말았다.
아내도 먼저 보낸 터에 아들마저 죽으니 큰집에는 풋 새댁인 며느리와 단둘이었다.
화산현 삼포마을에 대대로 선비집안인 김생원의 셋째여식을 며느리로 혼례를 올리고 데려오던 날 혹시 하늘에 선녀가 세상으로 왔나 할 정도로 미모와 행동에 온 마을 사람들이 한동안 말을 못하였을 정도로 절세가인이었다. 거기다가 제사음식을 태워놓고 조상님께 미안해 몸에 좋은 까만 참깨를 뿌려놓았다고 귀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며느리가 아닌 솜씨까지 뛰어나 집안일에는 막힘이 없는 며느리다.
가문이 기울기는 하였으나 대를 이여 집과 농사일을 하고 보살피며 행랑채에 살고 있는 지서방과 그 댁내 그리고 며느리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곱단이 라는 계집종이 있었으나 집안은 언제나 절간같이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하였다.
가끔 김 진사의 헛기침이나 지서방의 장작 패는 소리나 그 댁네가 마당을 쓰는 빗질소리 부엌에서 곱단이가 설거지 하는 소리가 이 집에서 나는 유일한 큰소리였다.
소슬바람이 추수를 마친 들녘에 할 일없이 서있는 허수아비를 놀려대다 그것도 심심했는지 김 진사네 앞마당에 떨어져 널려있는 밤나무 낙엽을 몰고 다닌다. 이 스산한 풍경을 안채 사랑방 들창을 열어놓고 바라보고 있는 며늘아기의 얼굴에 구술 같은 눈물방울이 흐를 것만 같아 아까부터 며늘아기를 먼발치 마당에서 바라보는 감진사의 마음은 짠하기만 하다.
이팔청춘에 청상과부가 된 며늘아기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양반의 사대부집안에서 어찌하는 도리 없이 수절하며 한평생을 홀로 살아가야할 며느리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유복자라도 자식이나 하나 있다면 그를 낙으로 삼고 살아가라 하겠으나 새파란 새색시가 늙어가는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하는 그 기구한 팔자를 어찌 고쳐 주어야 한단 말인가? 느느니 한숨이요 하느니 헛기침뿐이다.
한이 맺힌 여인의 눈썹 같은 새벽달이 대추나무 가지에 걸려있고 하늘에는 기러기가 길을 떠나고 있었다.
한기를 껴안은 실바람이 밤나무 낙엽을 떨어트리고 지나가다 며느리 방 처마 밑 풍경을 울리는 듯싶었는데 풍경소리 대신 낮은 인기척이 들린다.
김 진사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마당에 나와 하늘을 처다 보며 오늘의 날씨를 가늠하는 버릇이 아내가 죽고 나서부터 생겼다.
밖으로 나오면 자기도 모르게 며늘아기가 긴긴밤을 독수공방하는 방을 먼발치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버릇이 되고 말았다.
신경이 곤두섰다. 분명 며늘아기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김 진사는 조심조심 며늘아기 방 쪽으로 까치발을 옮기는 중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마터면 누구냐? 하고 소리를 지를 뻔 하였으나, 지각 있는 터라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본다. 달빛에 어렴풋이 식별되는 것은 웬 사내가 며늘아기의 방문 고리를 잡아당기며 문열어달라는 나직한 소리였다.
이어 염려스러운 작은 목소리로 “아니 됩니다. 어서 돌아가세요.” 하는 애걸조의 며느리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부인 잠깐만 문 좀 열어 주시구려. 할 말이 있으니 어서요?
“뉘신지 모르겠으나 어서 돌아가세요. 나는 죽어도 이집귀신으로 죽어야 할 몸입니다. 어서 돌아가 주세요.”
“부인이 이곳으로 시집오던 날부터 보아온 죽은 칠성이 친구입니다.
친구도 이렇게 간 마당에 내가 부인을 위해서 함께 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분이 어찌하여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한답니까?”
며늘아기의 앙칼진 꾸짖음에도 이미 젖어있는 음색이다.
“물론 멍석말이하여 매 맞아 죽을 짓인 줄 알고 있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는 아니 될 것 같아서요. 우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멀리 떠나가서 살면 되지 않겠소, 부인!”
아들놈을 아는 사내인 모양이다. 문고리를 잡아 다니며 애원한다.
“자꾸 그러시다 아버님께서 아시면 큰일 납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사내의 몸 달은 소리와 며늘아기의 차분하면서도 혀를 깨무는 인내의 목소리가 늦은 밤 찬 공기를 덥힌다.
김 진사는 숨을 죽이고 오히려 자기가 그들에게 들킬 것을 염려하며 저 사내가 누군지를 생각해 내기에 바빴다.
그러던 사내가 며늘아기가 시아버지를 인식하는 말을 하자 자신이 앞뒤 분간 못하였음에 멈칫하고 잠시주위를 둘러보다 김 진사의 그림자를 인식하고서는 혼비백산하고 뒷걸음쳐서 달아나 버렸다.
다시 적막 속으로 빠져드는 밤 인기척에 놀라 울음을 멈추었던 늦가을의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합창으로 이어지는데 젊은 여인의 가슴을 마냥 구멍을 내고 있다.
시집 온지 2년도 채우지 못하고 가버린 남편의 병약한 체질은 젊은 여인의 성숙한 몸부림도 담당하기 어려워했기에 참아왔던 젊음은 타오르다 만 불씨가 되어 잠자고 있었는데 어제오늘 연이여 건장한 사내의 구애에 다시 살아나 조그마한 티 검불만 있다 해도 불이 지펴 연소될 것만 같았다.
여인은 부풀어 오른 젓 무덤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꿈인 듯 생시인 듯 건장한 사내의 넓고 뜨거운 가슴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황홀한 운우의 몽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며늘아기가 들고 들어온 아침밥상을 맞이하면서도 김 진사는 밤잠을 설친 며늘아기의 촉휘한 얼굴을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가 지난밤에는 바람이 벌써 차더구나. 잠은 잘 잤느냐?
“네 아버님 젊은 저야 아무렇지 않지만 아버님께서 몸조심을 하셔야지요. 찬 있는 진지도 제대로 올려드리지 못해서 송구스럽습니다. 나이 드실수록 잘 드셔야 건강을 유지하시는데요.”
효성이 지극하고 사대부집 며느리로서 버릴 것 하나 없고 못 쓸 것 하나 없는 여인이다.
시아버지로서 가슴이 또 찡하게 아려온다.
김 진사는 방에서 한동안 움직임 없이 고심하더니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지 서방을 불렀다.
지 서방이 달려오자 방으로 잠깐 들어오라 한다. 하인을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 처음이라 지 서방이 멈칫 멈칫 하자 어서 들어오라 다그친다.
지 서방이 들어가자 방문을 닫게 하고는 한참 뒤에야 지 서방은 방을 나와 마을 밖으로 종종 사라졌다.
며칠 뒤 김 진사는 며느리를 불렀다.
며느리에게 추수도 다 끝났고 집안에 큰일도 없으니 잠시 짬을 내서 친정집에 가서 쉬고 오거라. 화산까지 나도 볼일도 있고 하니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것이니 준비 하라 일렀다.
이튿날 며느리와 김 진사는 아침밥을 물리자마자 길을 떠났다. 며느리에게는 며칠간 친정에서 묶으며 보모님께 진지라도 지어드리는 효도를 하고 오라 했기에 조그만 옷 보따리 하나만 들고 나섰고 김 진사 역시 지서방과 곱단이에게 따라 나서지 말고 집에서 일할 것을 당부하고 마을 어귀를 지나 며느리의 친정인 삼포로 간다.
화산현 삼포로 가려면 금물산 줄기인 높은 재를 하나 넘어야 한다. 산이 험준하지는 않으나 거목과 울창한 숲이 우거져서 낮에도 어두컴컴하고 무서워서 가끔은 산적들이나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나돌고 있는 고개다.
이 재만 없다면 화산 동헌까지 걸어서 한나절 반 정도 걸리고 삼포까지는 해전에는 당도할 수 있는 거리다. 더욱이 연약한 아녀자가 넘어가기는 어려운 산길이라 이 재를 넘을 때는 여럿이 모이면 오가곤 하는 금물산과 화산을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삼포에 사돈이 되는 정생원은 김 진사와는 오랜 친분으로 잘 아는 터라 여식을 이곳 금물산까지 기꺼이 시집보내준 사람이다. 이에 보답도 못하고 딸이 청상 과부되게 한 김 진사는 볼 면목도 없고 만나기조차 민망한 처지였는데 며늘아기마저 친정에 가는 것을 사양하여 시집오고 근친한번 다녀 온 후 오늘 나들이가 처음이다. 부부가 함께 처가를 간다면 얼마나 즐거울 가를 생각하는지 서너 걸음 뒤따라 땅만을 내려다보며 걸어오는 며느리는 흐르는 눈물을 몰래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경사가 아주 가파른 산길이다. 애리한 며늘아기가 작은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힘겹게 따라 올라온다.
“아가 천천히 오거라 이제 조금만 더 오르면 정상이란다.
“네 아버님 저야 젊은데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버님이 힘드시죠? 곱단이 데리고 혼자가도 될 것을 아버님 죄송스럽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나도 오랜만에 버덩에 좀 구경하러 일부러 가는 건데 아가랑 가니 더없이 든든하구나. 어험!”
김 진사는 착잡한 마음을 헛기침으로 누르며 며늘아기의 모습을 한 번 더 눈여겨 새긴다.
여름에는 하늘이 안보일정도로 우거졌던 나무숲이 군데군데 참나무가 낙엽을 떨구고 있어 훤하게 드러난 산길을 두어 식경 오르니 정상이다.
정상에는 앞마당만한 평평한 터가 있고 네 갈래 길이 뭉쳐있다.
하나는 금물산에서 올라온 길이고 반대쪽은 화산으로 내려가는 길이며 정상 양쪽으로 난 길은 산적들이 살지도 모른다는 도사곡길이고 반대는 원주 감영으로도 갈 수 있다는 산길이다.
“아가 힘들었겠구나. 여기서 쉬었다 가자 이제 내려가는 길은 쉬울 것이다 멀기는 하다만”
“네 아버님 좀 쉬세요. 이럴게 힘든 길을 가마꾼이 저를 태워서 왔으니 그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아버님”
“허허 그러게 말이다”
며느리는 조그만 바위 위를 손바닥으로 쓸고 치마를 여미며 걸터앉는다.
김 진사는 나무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장죽에 담배를 담아 부싯돌로 불을 붙이면서도 주위를 연신 둘러보며 무언가 살피고 있는 듯하다.
도사곡길 쪽을 바라보던 김 진사는 초초에서 안심의 얼굴로 바뀌더니 급하게 일어나며 며느리에게 “소피 좀 보고 올 것이라고 말하고는 도사곡길 반대 능선으로 내려가 자취를 감추었다.
며느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피를 보기위한 것 일게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며 붉은 낙조가 드리워진 월천동 산자락 길에 김 진사는 힘없는 발걸음을 옮겨 마을로 향하고 있다.
기진맥진하여 돌아온 김 진사는 진서방과 곱단에게 일러 며늘아기를 산에서 소피보러간 사이에 잃어버렸다고 했다. 온 마을 장정들이 횃불을 들고 산으로 달려가서 찾았으나 김 진사의 아름다운 청상과부 며느리는 영영 찾지 못하고 말았다.
며느리를 친정으로 데리고 가다가 고개정상에서 며느리를 잃어버린 사건이 있은 후 마을에서는 이 고개를 며느리고개라 불렀으며 아름다운 청상과부 며느리와 시아버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떠돌았다.
시아버지가 소변보러 간 사이에 호랑이가 며느리를 잡아 갔다고 아이들에게 겁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런가 하면 산적들이 예쁜 며느리가 탐이 나서 데려다 두목의 각시를 삼았다는 이야기는 동네 여인들의 공공연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웃마를 봉로 방에서는 시아버지가 너무 어여쁜 며느리에게 흑심을 품고 덤비자 며느리가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진사가 혼자 사는 며느리 방문을 사내가 열려고 하던 현장을 목격하고 다음날 진 서방을 시켜 사내를 불러오게 하여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보고 며늘아기의 장래를 부탁했으며 사나이에게 멀리 떠나가서 살 수 있는 노자를 마련하여주고 며칠 후 고개정상으로 와서 며느리를 데려가라 당부해 놓았었다. 는 구체적인 이야기도 쉬쉬하며 나돌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가서 바람에 날리며 비에 젖고 눈이 내려 덮여지고 나무가 떨군 낙엽에 쌓여 며느리고개 이야기도 깊이 묻어졌다.
홍천읍
며느리고개 터널을 빠져나오면 농공단지가 있고 이를지나 삼거리에 이르면 양지말 먹거리 촌인데 여기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그냥은 지나가지 못하는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는데 앙짓말 숯불 화로구이 집은 옛날 온 가족이 둘러앉아 겨울을 보내던 무쇠화로위에 석쇠를 놓고 검정돼지 삼겹살 에 고추장과 향긋한 더덕을 넣은 주물럭 숯불구이가 홍천의 풍미와 인심을 대변한다.
다시 봉긋한 산길을 하나 빠져나오면 길 양옆으로 중앙고속도의 홍천 나들목이 있고 시야에는 넓은 강이 바라보인다.
이 강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명을 그대로 붙여 부르기도 하는 홍천 강으로 홍천의 역사가 면면히 새겨놓으며 유유히 흐르고 있다.
화양강 이라고도 하는 홍천강은 홍천군 서석면 생곡에서 발원하여 10개 읍면의 지류를 다 합쳐서 흘러가서 청평의 북한강과 합수한다.
우리나라의 강들은 대부분 발원지에서 여려 고장의 지천을 합하여 흐르기 때문에 지명을 따서 강 이름을 부르는 예가 없으나 이 홍천강은 홍천군의 전 지역의 지천만 모였을 뿐 다른 지역의 물이 유입되지 않은 순수한 홍천군의 물이 홍천 땅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지명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 “홍천강”이라고 부른다 해도 강 이름에 크게 손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명 자체가 넓은 내이기 때문에 홍천인의 자존심이다.
물안개 피는 강 언덕엔 까마득히 오랜 옛날,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유적지가 있어 지금도 수많은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선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강변을 바라보며 홍천에 들어서면 강 하구에 바라보이는 산업도로 옆에는 농공단지가 있고 삼각지에 우리나라 굴지의 하이트 맥주공장이 홍천의 맑은 암반수로 만들어내는 맥주가 전국 애주가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강벼랑위에 우거진 송림에는 고고한 자태의 학이 무리지어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송학정이며 시내로 진입하기 전 로터리에는 관문 수문장격인 작은 동산이 있는데 이곳은 무궁화의 고장을 알리는 무궁화 공원이다.
이곳에 무궁화나무를 심어 무궁화 꽃을 그려놓은 공원으로 무궁화보급운동의 창시자인 구한말 애국지사 한서 남궁억 선생 동상을 비롯하여 군민헌장기념비, 충혼탑, 3·1만세 탑, 6·25당시 전적을 기린 홍천지구 전투 전적비, 국회부의장을 지낸 동은 이재학 선생 기념비와 광장에 건립한 반공희생자 위령탑 과 역사적 고증인 각종의 비석 등이 있고 홍천의 역사유물이 있는 홍천박물관이 있어, 여가선용은 물론 향토애와 나라사랑의 산교육의 도장으로서 잠시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무궁화동산에는 이곳출신 민현숙 아동문학가의 시비가 있어서 보는 이의 가슴에 꽃을 피워준다.
고르게 펴면
울퉁불퉁 험한 길 / 고르게 펴면 / 다람쥐랑 개미랑 / 다니기 좋겠다 / 들숙날쑥 못난 땅 / 고르게 펴면 / 사람들은 모두 다 / 친구가 되겠다.
해님이 가는 곳
가시나무라 해서 / 해님이 피해 가는 것 보았니 / 보잘것 없는 풀 위에
눈곱만한 꽃이 핀다고 / 눈곱만큼만 해가 뜨는 걸 보았니 / 썩은 물 쏟아지는 하수구 옆에
이마를 찡그린 시궁쥐를 / 언제 또 본 것일까 / 쏜살같이 달려가 / 젖은 발을 감싸는 해님
홍천시내 북편으로 봉긋이 솟아있는 두개비 산은 망루가 있는 산성 터이며 봉화를 올리던 곳이라 한다. 맥을 같이하여 석화산이 버티어 있고 그 자락에 홍천군청이 자리 잡고 옆에는 향교가 동방의 효와 충의에 예절을 지키며 후세에 전하고 있으며 지난날 홍천군 청사였던 건물은 근대유산으로 지정되어 홍천미술관이며 주위에는 보물540호 괘석리 사사자석탑 보물 79호 희망리 삼층석탑이 있어 홍천의 옛 문화의 융성을 가늠하게 한다.
한양도성 마포나루에서 상인을 실은 상선이 홍천읍 진리나루터에 정박하면 나루터 장이 열려서 홍천에 상권을 형성했고 그 범위가 커지자 지금의 장터인 신장대리로 옮겨서 시장이 현성되니 이곳이 신시장이라 하여 새로 생긴 장터라고 하였고 그것이 지금의 신장대리가 되었다.
홍천 시가지 중심을 흐르는 화양강물의 물비늘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황홀함을 바라보며 거슬러 올라가면 시내중심가에서 동족으로 444번 분기점에서 동쪽으로 가면 대미산성과 이괄 장군바위가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춘천에서 북방면을 거쳐 홍천읍을 통과하여 횡성원주를 잇는 국도 5호는 6.25사변당시 피난민을 비롯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피난길을 떠나야했던 삼마치 고개를 넘어 횡성 원주로 가는 길이다.
영귀미면 (동면)
홍천시내 중심가를 벗어나 동쪽을 향하는 444호 국도는 영귀미면으로 간다. 일제강점기 동면으로 개칭되었던 것을 2021년 6월부터 옛 이름으로 다시 부르게 되었다. 오룡터널이나 여우고개 벼랑길을 돌아가면 의병군이 포진하여 관군과 싸우던 성전 터와 3.1운동당시 4월 2일 독림만세운동을 거행하다 일본군에 의해 주도한 민씨 형제가 순직한 곳인 성수리 마을이 있고 수변공원에는 항일의병장 한갑복 의사의 추모비와 근래에 작고한 향토시인 이종호의 시비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다 털고 가는 구나 (이 종 호)
해질 무렵 / 돌아갈 시간인데 / 아이들은 땅뺏기 놀음에 / 노을마저 가는 줄 모르는 구나/ 어미가 부르는 소리에 / 아이는 아쉬워 하는가 / 땅을 보다가 / 손 털며 집으로 간다/
다 털고 / 가는 구나
시비 저 너머로 공작산이 보인다.
공작산은 해발 887m로 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홍천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며, 산세가 공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홍천읍에서 바라보면 거인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단풍이 매우 아름다우며, 기암절벽과 분재모양의 노송군락, 눈 덮인 겨울산도 일품이며 수타사 주변 공작산 생태 숲 과 농촌테마공원을 찾는 이의 몸과 마음을 편히 쉬게 한다.
한국 100대명산 공작산 끝자락에 자리한 천년고찰 수타사는 신라 33대 성덕왕 7년(서기 708년)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대적광전 팔작 청기와 지붕과 1364년 만든 동종, 3층 석탑이 보존되어 있고 보물 제745호 월인석보를 비롯한 대적광전, 범종, 후불탱화, 홍우당부도 등 수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영서내륙 최고 고찰이다.
수타사에서 동면 노천리까지 약12km에 이르는 수타사 계곡에는 넓은 암반과 큼직큼직한 소(沼)들이 비경을 이루고 있고 계곡 양쪽으로는 기암절벽과 빽빽이 우거진 숲이 호위하고 있어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보면 비경삼매에 빠져들기 일쑤이다. 한편 영귀미면에서 고대유물에는 무기류가 출토되었으며 항일의병과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현대에 와서도 무관인 군 장성이 배출되어 별이 많은 마을이다.
또한 홍천용씨의 시조인 용득의 사당이 있다. 용득의는 팔만대장경을 총괄하여 제작지휘 했으며, 북방면 금학산자락에 용수사를 창건했다.
동면 노천에서 좌운을 지나 횡성으로 나가는 길과 서석으로 넘어가는 양 갈래 길이 있다.
다시 원래의 44번 국도의 홍천읍으로 이야기를 옮기면 그 옛날에는 나룻배가 서울서 거슬러 올라와 포구를 형성했다는 구성포에서 춘천의 뒤편으로 이어주는 가락재 넘어가는 풍천리길이 열려있고 동으로는 내삼포 외삼포를 거쳐 서석면과 내면을 지나 운두령을 넘어 강릉으로 가는 길이다.
홍천에는 서울한강에서 거슬러 올라온 배가 닻을 내리고 교류를 하던 나루터 즉 포구가 많다. 서면의 어유포 홍천읍에 진리 화촌면에 구성포 내삼포 외삼포 등이다.
화촌면
홍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또 하나의 포구가 있으니 화촌면 삼포다. 화서 이항로 선생이 이상농촌을 만들려던 곳이기도 하다.
화서 이항로는 1792년 2월 13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에서 탄생하여 1868년 3월 18일 서거하기 까지 높은 관직이나 영화를 사양하고 백년대계를 위한 후학을 길러 나라에 근간을 세운분이다.
선생은 고향인 벽계를 떠나지 않고 오로지 학자와 학문을 위한 교류와 후학에 힘쓰다 잠시 금강산을 다녀오는 길에 홍천을 지나치다 산과 강에 매료되어 자신의 나이마저 잊고 이상형 마을을 만들기 위한 꿈을 펼치던 곳이 홍천군 화촌면 홍천강 마지막 포구였던 삼포마을이다. 그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하여 61세에 8년의 세월 동안 벽계를 떠나 홍천에서 이상형의 낙원을 만들어 가던 중 가정 사정으로 69세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면서도 자꾸 뒤돌아보게 하던 곳이 홍천의 산하라고 했다.
산이 높지도 험하지도 않으니 이곳 사람 또한 모나지 아니하고 온화하며 강은 위협적으로 깊지도 갑갑하게 좁지도 아니하니 여기 터 잡아 사는 사람 또한 마음 넓고 정이 많아 홍천에는 송사가 없고 평온하여 관리가 정사보기가 수월하기에 누워서도 정사를 볼 수있다하여 와치현(臥治懸) 이라는 말이 있던 곳이 홍천이다.
삼포를 지나 말고개를 넘노라면 북괴군이 6. 25 남침을 준비하기를 위해 정탐군을 자주 남침시켜 민간청년들을 무참히 살상시키기도 했는데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해 대한청년단인 마을청년들이 밤이면 목총을 들고 마을을 지켰는데 북괴군이 침범하여 13명이 희생되고 2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실제 적들이 6.25남침 때나 후퇴할 때에 주 작전도로가 되었던 이곳은 제 1진으로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하는 적의 탱크를 맞아 탱크 문을 열고 수류탄을 넣어 폭파시켜 남침을 72시간을 지연시킨 육탄11용사전적비가 있으며 지금도 피아의 시신발굴을 하고 있을 정도로 피의 능선인 곳이기도 하다.
두촌면
홍천강의 물굽이를 벼랑 밑으로 내려다보며 말고개를 넘으면 두촌면 철정에 다다른다. 여기서 내촌면으로 가는 분기점이 있고 역내리로 거슬러 가는 길 좌측으로 가리산이 있는데 해발 1,051m의 가리산은 산 정상에 서면 탁 트인 시야와 발 아래로 펼쳐진 소양호의 풍경이 등산객들의 발을 묶는 곳이다. 또한 이 산의 1봉 남쪽 정상아래 바위 벽면사이에서 샘물이 솟아나와 400리 홍천강으로 흐르는 작은 석간수는 목마름에 지친 등산객들에게 청량감을 더해주는 자랑거리이기도하며 이곳 산자락 중턱에는 중국에 한 천자가 나온 명당 터에 묘가 있다.
옛날, 춘천시 북산면 내평리에 한(漢)씨 성을 가진 마음씨 착한 머슴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머슴이 사는 집에 스님 두명이 찾아와 하룻밤 쉬어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야박한 주인은 방이 없다며 냉정하게 거절하다가 못 이기는 척하더니, 머슴 방이라도 좋다면 거기서 묵고 가라고 했다.
머슴은 스님들을 정중히 자기 방으로 모셨다. 그러자 봇짐을 푼 스님들은 머슴에게 달걀을 세 알만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머슴은 스님들이 육식을 하지 못하니 대신 달걀이라도 먹으려나 보다 싶어 얼른 구해 와 먹기 좋게 쇠죽 끓이는 데다 삶아서 갖다 드렸다.
머슴은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없을까 싶어 문 가까이 갔다가 스님들이 조심스럽게 나누는 대화를 그만 엿듣게 되었다. 스님들은 가리산에 있다는 명당 터를 확인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스님들의 대화는 이러했다.
가리산 명당 터에 달걀을 묻어 두고 기다려 보아 이것이 축시(丑時;오전 1~3시 사이)에 부화돼 홰를 치면 천자가 나오는 터가 틀림이 없고, 인시(寅時;오전 3~5시 사이)에 부화하면 역적이 날 자리라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엿들은 머슴은 웃음이 나왔다. ‘삶은 달걀에서 웬 병아리’ 하면서도 엿들은 사실이 탄로날까 봐 차마 그 이야기를 털어놓지를 못했다. 한밤중이 되자 스님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옆에서 잠자는 척했던 머슴도 슬그머니 일어나 스님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스님들은 소양강을 건너더니 물노리에 있는 가리산 중턱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어느 산자락에 이르러 달걀을 파묻어 놓고는 부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천자가 나온다는 축시가 지나고 인시까지 지나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숲속에서 이를 몰래 지켜보던 머슴은 또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아무렴 삶은 달걀에서 무슨 병아리가 나온다고 저 야단들일까.’
머슴이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묘시(卯時;오전 5~7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삶은 달걀을 묻어 놓은 곳에서 닭이 튀어 나오며 홰를 치는 게 아닌가. 그러자 스님들은 투덜 거리며 일어났다.
“에이 헛수고만 했네. 하필 묘시에 닭이 나올 게 뭐람. 이곳은 천자도 역적도 아니 날 곳이 아닌가.”
그런데 한 스님은 못내 아쉬운 듯하면서 한마디를 보탰다.
“닭이 묘시에 홰를 쳤더라도 금으로 만든 관을 쓰고, 황소 백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나면 천자가 나올 수 있는 명당이 될텐데. 그런 정성을 쏟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더니 두 스님은 산을 내려가 버렸다.
집에 돌아온 머슴은 스님들의 이야기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몇 달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을 그곳에 옮겨 묻기로 결심했다. 역적이 나든 말든 종놈의 신세보다야 더 낫지 싶어서였다. 궁리 끝에 머슴은 금관을 대신해 노란 귀리(볏과의 두해살이 재배식물로 열매를 먹는다)대로 시신을 싸서 묻었다. 그러나 머슴 팔자에 황소를 잡아 제사를 지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백 마리를 장만해야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쉽지만 그냥 돌아서야 할 참이었다. 주변 정리를 하고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쉬고 있는 동안 몸안에 있던 이들이 난리법석을 떨어 댔다. 참다 못한 머슴이 윗옷을 벗어 들고 이를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가 어찌나 머슴의 피를 많이 빨아 먹었는지 그 크기가 엄청났다. 머슴은 이를 잡으며 무심코 ‘어따 이놈의 이들 꼭 황소만하네’ 하고 소리를 연발했다. 그러길 벌써 백여 마리째를 잡아 무덤 앞 잔디에 떨어뜨렸다. 엉겁결에 머슴은 황소 대신 황소만한 이를 백 마리나 제물로 올린 셈이 되었다. 머슴은 이제사 아버지의 유택을 마련해 드렸다는 안도감을 갖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나서 며칠이 지났다. 한밤중에 뇌성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너는 빨리 일어나 아이를 데리고 집을 떠나라.”
머슴은 그 소리에 너무 놀라 잠자는 아이만 깨워 급히 산으로 올라갔다. 얼마 후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온 동네가 삽시간에 물에 잠겨 버리는 게 아닌가. 머슴이 살던 집도 논밭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겨우 목숨을 구한 머슴은 살길을 찾아 북으로 북으로 한없이 올라갔다. 그러자 어느덧 중국을 넘어가는 국경 근처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중국에서는 천자가 죽고 후사가 없어 새 천자를 구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방법이 독특했다. 관리들이 길가에 짚으로 만든 북을 걸어 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쳐보게 했다. 천자가 될 인물은 짚북을 쳐도 소리를 낸다는 것이었다.
한씨 머슴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북을 쳐보았는데 역시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지나치려는데 관리가 머슴의 어린아이에게 ‘너도 사내자식이니 한번 쳐봐라’며 농담처럼 말했다. 얼떨결에 북채를 쥔 아이가 힘껏 북을 내리치자 놀랍게도 ‘쿵, 쿵, 쿵’ 하면서 북이 울렸다. 관리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엎드려 코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이후 머슴 아들은 중국의 천자가 되었다. 이후로 한씨 머슴이 살던 마을은 한터로 부르게 되었고, 그 묘소 자리는 한천자 묘가 돼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산자락 밑에 위치한 조그마한 폭포의 물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며, 이곳에서부터 계곡과 능선을 따라 등산이 시작된다. 또한 가리산 정상에서 마주보이는 곳이 옛 이름은 천치리였으나 지명을 바꾸어달라는 주민의 청원을 받아드려 천현리로 개명한 샘재 마을에서 로또복권 사상 1등 407억 최고액과 2등이 몇 주 사이에 당첨된바 있어 명당터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일대를 홍천군에서 자연 휴양림 지역으로 조성, 95년 7월 홍천군이 개장한 가리산자연휴양림이 있어 통나무집, 야영장, 체육 시설을 이용하는 가족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길 우측으로는 1억 톤의 철이 매장되어있는 철광이 있으나 지금은 개발을 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제철산업에 한몫을 차지할 수 있는 국내 제일의 광산이 있다.
또한 용수계곡은 내촌면 광암리에서 발원하여 두촌면 괘석리를 거쳐 천현리에 이르는 10km의 계곡으로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조화롭게 펼쳐져 있는 곳이다.
우거진 숲과 곳곳에 펼쳐지는 소와 너래 바위들이 어우러져 비경을 자랑하는 곳으로 내설악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계곡이다.
봄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이 갈대와 어우러지고, 여름철에는 시원함을 주는 이 계곡에는 옛날 절터와 삼층석탑이 아직 남아 있으며, 이 삼층석탑을 옮기려 할 때 호랑이가 나타는
바람에 옮기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용소계곡은 가족단위의 등산이나 산림욕 코스로 적당하며 당일 산행으로 알맞은 곳이다.
홍천과 인제군의 경계지점인 두촌면 장남리 산기슭 도로변에는6.25사변당시 참전한 프랑스 의무장교 장루이 소령 동상이 서있다.
1951년 5월 8일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 전투에서 한국군 부상병을 구출하고 34세의 꽃다운 나이로 이억 만리타국 땅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그를 위해 그는 갔으나 그가 남긴 자유수호의 의지와 전쟁의 와중에서 주민들까지 치료해준 인도주의적 정신을 이 땅과 전 세계에 길이 기억되게 하기 위하여 동상을 세웠다. 동상에서 조금 더 올라가 고개 마루에서 44번 국도는 인제군으로 보내진다.
내촌면
두촌면 철정 삼거리에서 우측도로로 들어서면 철정 국군병원이 있고 산세 좋은 고개를 넘고 맑은 냇물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면 충렬의 땅 내촌면에 다다른다.
내촌면으로 하여 인제 상남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아홉 사리 고개 밑에는 가령폭포의 물줄기는 천상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환상을 자아내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경관을 자랑하고 있어 예부터 시인 묵객의 글을 감탄사로 만들어 놓았다. 아홉 사리라는 국수사리 같은 아홉 개의 고개를 넘어가면 인제경계이며 과거에는 이곳까지도 홍천 땅이었으나 수복 후 인제지역의 빈약성에 의해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제군에 편입된 상남면이 나온다.
도관리를 지나는 길의 우측방향 깊숙이 들어선 물걸리에 동창마을은 일찍이 동서를 있는 물류통로로서 창고가 있고 마방이 있는 곳으로 인적교류가 많아서 문화예술의 바탕을 둔 유적이 많으며 이곳출신인 서곡대사의 법명은 찬연(粲淵:1702~1768)이다
쌍계사를 창건하였고 지금도 서곡리라는 지명이 있고 원주에도 서곡리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로 인망 높은 고승이 태어난 곳이다.
물걸사지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에서부터 이어온 불교문화에 국보급 유물이 대량출토 되어 불교문화의 융성을 말하고 있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선각자적 역할을 했음으로 동학의 마지막 결전지가 되었는가하면 민족자존의 삼일독립운동의 확산지가 되기도 한 충렬의 고장이다.
독립지사들이 은거하며 나라 일을 걱정하였던 그곳에 삼일운동의 불꽃이 당겨지고 일본 경찰에 의해 살해당한 팔열사를 기리기 위한 팔열사 위령비가 있고 팔렬중고등 학교가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으며, 동창만세운동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4.3동창독립만세운동의 장두 김덕원 의사 후손이 이곳에 동창기미만세운동기념 사업회를 설립하고 민족정기성지 성역화 사업을, 2021년 올해로 100세를 맞이하시는 김창묵옹이 자신의 노력과 재력을 다해 30여 년 간에 이루어 놓은 척야산 문화수목원은 사철 자연과 역사 민족정기를 일깨우기 위해 수 십 만평의 부지에 조성해 놓음으로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석면
춘천에서 가락재를 넘어오는 56호 국도는 구성포를 지나 동학군이 홍천에서 관군을 만나 첫 번째로 접전을 치룬 장평을 거쳐 솔치재(터널)를 넘으면 옛날에도 쌀밥을 먹고 살았다는 부촌인 서석면이다.
전라도에서 일어난 동학의 민중봉기는 관군에게 밀려 홍천의 양귀미면(동면)을 거쳐 서석에서 마지막 항전으로 피가 자작자작 흘러내렸다하여 자작고개가 되어진 이곳에서 관군에 의해 모두 전사하니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민중봉기는 몇 백 명의 시신을 묻은 무덤만을 서석면 풍암리 마을 뒷산에 남기고 농민혁명의 역사를 마감했다.
서석 풍암에서 횡성으로 빠지는 길이 있고 56호 국도는 계속 내면방향으로 치닫는 산길 옆에는 피리골이라는 계곡으로해서 구목령을 넘나들던 산길은 보부상들이 홍천에 상권을 형성해 주었던 길이며 이곳이 태기산 자락이다.
구목령 중턱에는 피리샘물이 용천수같이 솟아 보부상들의 목을 축이게 했는가 하면, 삼한시대 진한의 마지막 태기왕이 신라군에 패하여 이 산에 숨어 살아서 후에 이름이 태기산이 되었고, 신하들이 왕을 위로 하고자 이 곳에는 자생하는 구릿대로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하며, 어린왕자와 공주도 피리를 불며 외로움을 달랬다고 전해져 피리골이란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하며, 이어지는 역사는 동학군이 주둔하며 관군에 동향을 서로 연락의 수단으로 피리를 불렀다고 하니 이곳의 지명이 생곡이다.
생곡 즉 피리소리라는 슬프고도 충절이 넘치는 아를다운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또한 홍천강의 발원지 생곡의 미약골은 천혜의 자연경관과 인간의 원천을 만드는 여인의 은밀한 곳같이 아름다운 곡선의 산속에는 모태의 샘터같이 생긴 곳에서 생명의 젖줄 같은 샘물이 솟아올라 아래로 흐르고 산 아래에는 내면 뱃재의 분수령에서 흐르는 계곡천과 함께 아래로 흘러내려지고 모아져 홍천군의 각 면마다의 개천 지천을 합하여 홍천강을 이룬다.
내면
서석을 지나 하늘을 오르듯이 뱃재 고개를 오르면 홍천의 오지 내면이다. 이곳에서 한 여인이 눈발에 길을 잃고 오직 아이만을 살리려고 품속에 꼭 껴안은 채 동사하였으나 품안에 딸아이는 생명을 구한 살신 모정 박정열 여사의 숭고한 모정이 새겨진 곳이기도 하다.
청정 자연 속에 열묵어가 서식하고 곰취가 자생하는 첩첩산중 골마다 시린 물이 흐르고 한여름에도 목욕하기가 힘든 이곳에는 삼봉약수가 도심에 찌는 마음까지 씻어주고 칡소와 살둔 계곡은 지친 도심인의 발길을 묶는다.
한국100대명산인 계방산의 높이는 1,579.1m로, 남한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한강기맥의 고봉으로 주변에는 오대산을 비롯하여, 백적산(白積山, 1,141m)·태기산(泰岐山, 1,261m)·방대산(芳臺山, 1,436m) 등이 솟아 있다. 북으로는 설악산(1,708m), 남으로는 태백산(1,567m)을 이어주는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인근의 오대산(1,563.4m), 발왕산(1,485.8m)과 함께 이 지역 일대의 식생을 대표한다. 지난날에는 무장공비가 자주 출몰하여 독가촌을 없애려고 했으나 이제는 도심 부자들의 별장 휴식처가 계곡마다 생겨나고 있다.
계방산의 우람한 등선으로 올라 강릉을 가고 구룡령을 넘어 양양으로 넘나드는 길목이이기도 하다.
북방면
이야기는 다시 화양강을 따라 내려가 보기로 한다.
홍천강은 홍천읍내를 동에서 서로 관통하여 흘러 북방면을 휘감아 돌아가며 비옥한 토지를 만들고 강 유역에 터 잡아 살던 선사유적지를 남기고, 동양 굴지의 맥주공장을 우뚝 세우고, 홍천온천이 샘솟아 레저시설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우방을 지키고 국가재건에 이바지한 월남 파병의 선진인 맹호부대가 있을 당시 파병 훈련 중 부하장병이 잘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장병들을 살린 고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군인정신이 살아있는 강재구 소령 위령탑과 기념관과 공원이 조성되어있어 애국교육장이 되고 있다.
대룡산자락에서 흘러내리는 성동천을 따라 올라가면 대룡저수지를 지나면 강원도자연연구공원이 여의도의 두 배되는 크기의 공원과 자연생태연구시설이 조성되어있어 전국에 자연환경을 보고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으며, 연엽산 골짜기에 연화사에는 동양에서 가장 큰 아미타대불이 모셔져 있고 부처상내에는 108계단으로 오르며 심오한 불심의 세계가 그려져 있다.
5번 국도는 하화계리 홍천무궁화테마공원을 지나고 다시 능평리에 전국에서 유일한 무궁화고장답게 가꾸어놓은 홍천무궁화수목원이 자리 잡고 나라꽃을 피우고 있다. 여기서 5호 국도는 춘천으로 넘어 보내고. 다시 홍천강 400리를 따라서 강변길로 돌아가 본다.
홍천읍 시내 중앙을 동서로 가로질러 북방면의 지천을 합하여 서면으로 방향을 잡고 구비 구비 돌아가니 강변 바위벼랑마다 철쭉이 붉게 타고 꽃잎과 오색의 단풍을 태우고 흐르는데 금학산 정상에 오르면 구불구불 흘러가는 발아래 홍천강을 굽어보라! 네 귀퉁이에 건·곤·감·이를 그려 넣고, 빨강 파랑 색을 칠하면 분명 우리나라의 태극기가 황홀하게 펼쳐져 있으니. 산 태극 수 태극이다. 이토록 완벽하게 태극 모양을 대자연이 그려낼 줄이야. 어이 알았으랴 싶다.
서면
서면의 옛 이름은 감물악 면이었다. 이 역시 일제강점기 행정편의에 의하여 서쪽에 위치한다하여 서면으로 개칭하였다.
홍천강물이 서면 팔봉에 이르면 설악산이 떠내려 온 듯한 작은 설악산의 모형 같은 팔봉산이 팔봉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란히 한 형제인 듯 솟아있으니 괴암 비경을 오르는 사람마다 새로운 감회를 만들어준다.
팔봉산 뒷자락 마을에 위치한 대명비발디파크가 각종 레저시설과 콘도 등을 가추고 있어서, 레저와 휴양을 위해 단체나 가족들이 전국에서 찾아오고 있으며, 한국의 100대 명산인 팔봉산은 설악산 일부가 떠내려 온 듯이 아름다운 산 및을 감싸고 흐르는 홍천강물은 팔봉산 유원지를 휘돌아 밤벌을 지나 보리 울 유리봉에 피어나는 무궁화는 한말 애국지사인 한서 남궁억 선생이 독립을 이루고자 후학을 키우고 무궁화보급운동을 장려한 곳이기에 홍천이 무궁화고장의 모태가 된 곳이며 나라꽃 무궁화 태동의 원천지이며 한서중학교가 역사를 이야기해 준다.
민족의 꽃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되게 하고 무궁화 선양으로 나라사랑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충정이 거세게 물결치며 화양강과 함께 우리나라 민족의 가슴마다 나라사랑의 마음으로 피어나게 하고 있다.
홍천강은 다시 마지막 남면에서 흘러온 용수계곡물을 거두어 홍천군의 10개 읍면의 물을 다 합치고서 품어서 홍천강의 마지막 포구인 어유포를 지나 청평댐에 담수하니 그 길이가 장장 143키로미터 긴 물줄기는 우리 서울의 젓줄이 되고 있음이다.
산맥이 인맥이요 수맥이 명맥이라 노동서원이 있으니 최충은 고려 시대 대표적인 유학자로 9재학당을 세워 유학을 보급하고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학문 진흥과 사학(私學)발전에 크게 공헌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칭송되었고, 최유선역시 고려 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벼슬이 문하시중까지 오른 인물이다.
홍천은 조국을 수호한 애국지사에서부터 호국열사가 난시를 이겨냈고 사상가 정치가 문재들이 많으니 어찌 다 열거 하겠는가마는 한말의 정치가로 언론인으로 독립운동으로 무궁화보급운동을 하신 한서 남궁억 선생이 나라사랑의 실천의 터인 서면의 보리울은 홍천이 무궁화의 고장으로 거듭 나게 하고 있으며 격랑의 제1공화국시대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동은 이재학 선생의 업적 또한 커서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 사상 유래 없는 옥중당선을 한 사실이며 그의 아들인 이교선 이응선도 국회의원이었던 것 또한 홍천의 역사이며, 이상용 강원도지사도 박석환 화백 근래 홍천에 신두식 재력가도 서면출신이다.
내면 뱃재자락 계곡물과 서석 미약골에서 발원한 용천이 10개 읍면의 모든 지천을 합하고 포용하여 명산을 감돌고 풍요로운 들판에 농토를 적시며 마을을 지나 때로는 소를 만들고, 수 태극을 이루며 굽이쳐 흘러 팔봉의 명산을 심고 보리울에서 무궁화 뿌리내려놓고 도도하게 흘러 북한강에 합류하니 장장 400리길(143km)을 쉼 없이 달려왔다.
북한강은 흘러내려 남한강을 만나 한강을 이루니 한강에 기적을 이루어 대한민국이 융성하니 홍천강은 ‘넓은 내’ 사람들의 자랑이며 자부심이다.
지은이 석 도 익
소설가/심리상담사/인성지도사
단기 4280년 홍천 산
강원대학교경영행정대학원 수료
재건국민운동 종합지도자
향토재건중학교 설립 운영
도민저축은행 근무
대통령자문 새교육공동체 지역위원 역임
한서장학회 상임이사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역임
바르게살기운동홍천군협의 회장 역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홍천지회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홍천지부 회장 역임
칼럼리스트 < 홍천인터넷신문 . 실버신문 >
강원도자연환경연구공원 자연학습지도자
김유정문학촌 문학해설사
강원문화재단 심의위원
강원도 주민예산심의위원
국가균형발전사업 강원도 평가위원
홍천문화원 부원장
홍천교육복지네트워크 꿈 이음 이사장
농민문학에 수필 “코뚜레”로 등단
한맥문학에 소설 “어머니의 초상화”로 신인상
한맥문학상 수필“보리밭”/ 강원수필문학상 “어머니라는 이름”
홍천군민대상수상 (문화예술부문) / 홍천향토문화대상 수상 /
한민족통일문학상 공모 통일부 장관상 /
한맥문학가협회 자문위원 / 월간 한맥문학 편집위원
-저서- 소설집 : “미친놈 (단편모음집)”“ 넘지 말아야 하는 선”
수필집 : “사리암”“잃어가는 우리의 멋”“그때는 그랬단다.”
“삶의 길목에서”“넓은 내(洪川)이야기”등 다수
강연집 : “바르게 살자.”“부부는 핵이다.”인문학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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