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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백제 토론방 웅진은 바다 근처에 있었다
월지국 추천 0 조회 435 10.01.22 11:37 댓글 4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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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1.22 12:32

    첫댓글 [[웅진으로 가는 길이 끊어져서 성안에는 소금과 된장이 떨어져 ]]-...위의 내용은 문무왕의 답설인귀전의 내용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비성이 백제 부흥군에게 포위되어 신라에서 웅진성으로 가는 길목이 차단되어 웅진성안의 소금과 된장이 떨어졌다는 본래의 내용인데 이런 내용으로 웅진에서 소금을 생산한다고 어떻게 연계 시킬 수 가 있는지?..이런 내용으로 웅진이 소금을 생산하고 바다에 접했다고 하는 논리자체가 전혀 이해가 안되며 사료인용에 있어서도 잘못 인용된듯 합니다.

  • 10.01.22 12:26

    신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있어 백제의 웅진을 중요 거점으로 삼았고, 백제는 웅진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신라와 당나라를 공격하였음을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이부분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군요 당시 사비성(백제도성)이 함락되자 웅진성으로 의자왕이 피신했다가 항복한 곳으로 나당연합군은 웅진성과 사비성을 동시에 진수하여 관리한 것으로 나타납니다..사비성 보다는 웅진성이 견고하여 나당연합군의 방어진지로 활용한 것으로 당시는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의사조차도 있었는지? 금시초문이며 그런 목적으로 웅진성을 중요거점으로 삼았다는 논리가 이해되질 않는군요

  • 10.01.22 12:32

    보편적으로 웅진이 바다 근체 있었다는 목적으로 사료인용에서 많은 한계성을 보이고 있습니다..웅진이 바다근처라면 대략 거리가 어느정도가 되어야 하는지? 현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치에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비정된 현 위치가 잘못되어 더욱바다 가까이로 옮겨야 한다는지?..그렇다면 대략 어느 위치를 말하고자 하는지?를 밝혀 주셔야 어느 정도 제대로 된 토론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위의 본 내용으로서는 그저 반론밖에 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 작성자 10.01.22 14:11

    웅진이 바다 근처에 있는데 소금이 떨어 질리가 있나요
    삼국사기 문무왕 편을 읽고 반론을 하시는지 아니면 단편적인 글만 보고서 반론을 하시는지 의심이 가네요
    백제 시대에는 웅진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다고 보아야 겠지요
    웅진까지 큰 배는 들어 올 수 없었겠지요 .
    진 이라고 부르니까요

  • 10.01.22 15:05

    물론 문무왕편 답설인귀전을 보고 난뒤에 반론을 하는 것입니다..상대가 나름대로 본문을 작성하여 주장을 하는데 성의없이 반론 한다면 우선 반론자로써 예의가 아니지요..웅진이 바다 근처에 있던 없던 웅진성안에서는 소금이 얼마든지 떨어질 수가 있지요..그리고 도성 근처가 전쟁터인데 그곳에서 어느 누가 한가롭게 소금생산을 할 것이며 소금 생산을 웅진성의 나당연합군이 할 수가 없지요..그들은 군인이지? 소금 생산자가 아니니 부득이 외부로 부터 소금을 보급받아야 하겠지요..님께서 인용한 웅진성의 소금이 부족한 내용은 바다에 접하고 안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일 뿐이지요

  • 10.01.23 00:53

    소금에 대한 이야기는 사료를 거꾸로 해석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 월지국님은 '웅진성과 다른 곳 사이의 길이 끊어져서 (웅진으로부터 소금을 공급받는) 다른 지방의 소금이 떨어졌다' 라고 이해하신 것 같은데, 사료의 내용은 '웅진성 안의 소금이 떨어졌다' 는 이야기입니다. 원문과 앞뒤 맥락을 한 번 살펴봅시다.

    復圍府城 因卽熊津道斷 絶於鹽豉 卽募健兒 偸道送鹽 救其乏困
    (복신이) 웅진부성을 다시 에워싸니 이로써 웅진은 길이 끊겨서 성 안에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곧 장정들을 모집하여 몰래 소금을 보내 그 곤경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 10.01.22 17:41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는 웅진성이 포위되어 웅진성 안의 물자들이 바닥이 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웅진성에 물자를 보급했다는 기사지요. 바닷물이 성안에까지 들어오고 성 안에 소금제조시설이 있는 특이한 성이라면 모를까제아무리 해안가의 성이라도 적에게 포위되면 소금을 만들 순 없지요. 곡창지대 한 가운데의 성이라도 추수 전에 적에게 포위되면 곡식 떨어져 굶는 경우 많습니다.

    따라서 이 기사는 웅진성이 바닷가에 있다는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 10.01.22 12:38

    월지국 님은 현재 거주하고 계신 보령이 백제의 도읍지였을 것을 전제하고 사료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렇게 되면 원 사료가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 아닐지라도 전제하고 있는 것에 의해 전제를 지지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연역법적으로 보시면 연구에 큰 왜곡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 작성자 10.01.22 14:12

    고정관념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연구에 왜곡 될 수 있습니다.

  • 10.01.22 15:11

    고정관념이 문제가 아니라 주장 하심에 있어서 사료인용이나 주장의 근거가 매우 설득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우선 님의 주장에 있어서 인용된 사료내용과 님의 주장과의 연계성도 납득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오히려 조수아님의 지적대로 보령이 백제의 도읍지였을 것을 전제하고 사료를 끼워 맞추면서도 인용된 사료조차 연계성에 의심이 가니 보다 설득력있는 주장이 필요한 듯 합니다.

  • 10.01.22 15:18

    님이 생각하는 '고정관념'이란 귀납적으로 추리해서 얻은 결론입니다. 누가 처음 공주가 웅진이라는 전제 하에 연구를 한 것이 아니라 여러 근거들을 종합한 끝에 공주가 웅진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이지요. 님이 택하고 있는 방법과는 크게 다릅니다. 학계의 통설을 뒤집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치밀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님의 이 글을 보면 치밀한 근거가 마련돼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당군이 사비성보다 웅진을 먼저 공격했습니까? 또한 웅진에서 맹약을 한 것이 웅진이 교역의 중심지였다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는지요??

  • 10.01.22 15:15

    만일에 님께서 언짢아하시지 않고 혼쾌히 허락을 하신다면 위의 본문을 단락으로 나누어 조목조목 반론하여 님의 주장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만..우선 님의 동의를 먼저 구하는게 예의인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 작성자 10.01.22 16:38

    본문을 단락으로 나누어 반론 하셔도 괜찮습니다.

  • 10.01.23 00:24

    이미 미주가효님과 조수아님께서 댓글로 일일히 반론한 부분등으로 단락을 구태어 나눌 필요도 없이 왠만큼 반론이 다된 것으로 보입니다..우선 한가지만 질문해야 겟군요..님의 글에서 "<동쪽은 신라가 부여 방면에서 공격하였고 서쪽은 당나라가 바다에서 공격 하여 백제의 도읍지 웅진에 도착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이런 내용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우선 삼국사기의 내용은 그런 내용이 아닌것으로 해석이 됩니다만...^^*

  • 10.01.23 00:52

    삼국사기 사료상 당군은 기벌포에 상륙하여 이미 백제군을 격파하고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군을 격파하여 먼저 서로 합류한 뒤에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웅진성으로 진격하여 의자왕의 항복을 받는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그런데 난데없이 "<동쪽은 신라가 부여 방면에서 공격하였고 서쪽은 당나라가 바다에서 공격 하여 백제의 도읍지 웅진에 도착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라고 주장하시니 님께서 삼국사기 내용을 잘못 해석한것으로 볼수 밖에 없네요

  • 작성자 10.01.23 13:48

    소호금천씨 반론을 하여 주셔서 감사 합니다. 하지만 백제본기 내용과 신라 본기 내용을 거시적으로 보시고 미시적으로 논리를 하여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기벌포도 웅진으로 보시면 저의 논리가 맞다고 봅니다. 기벌포도 웅진 근처 이다 글을 올릴까 하다가 올리지 않았거든요

  • 10.01.22 15:15

    "학계에서 말하는 공주 공산성에 군사1만 7천명이 머물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 ?. 공주가 백제의 전투에서 중요한 지역인가? 도읍지라면 수 천채 또는 수십 만 채의 기와집이 있어야 하는데 고고학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지역과 흔적이 있는가? 고고학적으로 증명을 하여야 한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우선 보령이 웅진이라는 고고학적 증거를 대셔야 할 줄로 압니다. 공산성이 수도로서 적합지 않다면 왜 부소산성엔 한톨의 의문도 제기하지 않으시는지? 공주에 있는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왜 왕릉이 변방에 널려 있는 것인지...?

  • 10.01.22 15:18

    옳으신 지적입니다..제가 반론할 부분까지 미리 지적하셨군요...조수아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 작성자 10.01.22 16:46

    공주가 백제의 도읍지임을 주장하는 것은 백제의 패배주의를 심어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 하는데요 . 임시 도읍지로 정한 공주가 백제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지형 이었나요
    무령왕릉에 관하여 이도학 교수가 쓴 논문을 참고 하셨으면 합니다.

  • 10.01.22 17:44

    이도학 교수가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을 하였는지 그것을 인용해 주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기분나쁘게 들리실 지는 모르겠지만, 근거는 주장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제시해 주어야지 주장을 듣는 사람이 일일이 찾아봐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료나 남의 주장을 인용할 땐 인용하는 사람이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찾아서 제시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월지국님이 이도학 교수의 주장을 직접 인용해 주시어 주장을 펼쳐 주셨으면 합니다.

  • 10.01.22 20:34

    공주가 백제의 도읍지임을 주장하는 것이 백제의 패배주의를 심어 주기 위한 것이라고요? 월지국 님, 저는 이 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공주에 있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무엇이냐 하고 물었고 님은 공주의 고고학적 증거들에 대한 답을 주셔야 합니다. 공주와 백제의 패배주의를 심어주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들은 적도 없거니와 설령 1%의 가정을 보태서 누군가 그리했다면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을 보령에서 공주로 옮겨왔다는 것이 됩니까? 그럼 대륙론자들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어지는데요.

  • 10.01.22 20:37

    그리고 미주가효 님 말씀대로 이도학 교수의 논문을 참고하라고 하실 때 이도학 교수의 무슨 논문을 참고하라는 것인지 자세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괜히 논문 등 글을 쓸 때 각주를 쓰고 참고 자료를 밝히겠습니까? 자신의 주장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지지받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런 힘든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계속 동문서답을 하시면 토론이 더 이상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 작성자 10.01.22 22:10

    반론이 많이 올라와 저도 자료 준비를 하여야 하는 부분이 많네요 .
    이도학 교수 논문 내용은 내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10.01.23 01:17

    공주가 백제의 도읍지임을 주장하는 것은 백제의 패배주의를 심어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갑자기 뜬금없는 내용이라 약간 의아하고 당혹스럽군요??당시는 사비성인데 좌우지간 웅진성이든 사비성이든 백제도읍지라 하여 갑자기 패배주의를 어떻게 도입시킬수가 있는지요?..그리고 이도학 교수분의 논문내용이 몹시 궁금하군요..

  • 10.01.22 17:49

    웅천은 배를 정박하기 좋고 태풍과 풍랑 등을 피하기도 좋은 천혜의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서해안이 솟아오르고 있다 . 백제당시에 배를 정박 했다는 장소가 지금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다. //
    => 조금 의아하군요. 이 말은 제가 앞서 지적했던, '해수면' 의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월지국님 역시 백제(정확히는 초기와 말기겠지만...)때에 배를 정박했던 곳이 지금은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내륙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현재의 바닷가 상당지역이 당시에는 바닷물에 잠긴 곳이라는 이야기니 현재의 바닷가인 웅천지역은 당시 '육지' 라고 보장할 수 없다는 말과 같게 됩니다.

  • 작성자 10.01.22 18:17

    웅천천이 길이 있듯이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길이 있습니다.
    웅천의 상당 부분은 바다 였다고 봅니다.

  • 10.01.23 00:26

    월지국님은 아예 삼국사기 660년 백제정벌기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고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시는 것 같은데 만일에 삼국사기의 기사를 인용하였다면 님께서 삼국사기 내용을 잘못 해석한 탓으로 보입니다..

  • 작성자 10.01.23 08:43

    삼국사기가 660년 정벌기사
    정벌기사는 무엇을 의미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산성에 도읍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 자체가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고 패배주의에 빠지게 한다고 보는데요

  • 10.01.23 11:10

    삼국사기가 660년 정벌기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니요?..소정방의 진격로와 김유신의 진격로가 님의 주장처럼 충남 보령이 백제도읍지가 되었을때는 삼국사기 백제정벌 기사가 이상해 질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김유신 부대와 소정방의 당군은 사비성(부여)을 치기전에 이미 합류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충남 보령이라니요?

  • 10.01.23 11:15

    또한 웅진지역내에 웅진산성이 있고 사비지역내에 사비성이 있는데 뜬금없이 "<산성에 도읍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 자체가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고 패배주의에 빠지게 한다>"고 보다니요?..오히려 제가 어리둥절 할 뿐입니다.

  • 작성자 10.01.23 12:01

    소호금천씨는 무엇인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백제의 도읍지가 바닷가 근처에 있다고 볼때 논리적으로 해결 되지 않나요
    웅천에 있는 웅진성은 평지에 있습니다. 부여의 도읍지도 평지에 있었지 부소산성에 있었나요
    삼국사기는 긍정과 부정의 법칙 즉 변증법으로 보아야 진실을 볼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웅천에는 수십만채의 기와집이 있음을 증명 할 수 있습니다.

  • 10.01.23 22:14

    아니오 본인은 오해한 것이 없습니다..님을 제외한 댓글로 반론한 분들과 대부분 일맥상통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님께서 설명한 삼국사기는 긍정과 부정의 법칙 즉 변증법으로 보아야 진실을 볼 수 있다고 생각 하시니 그러면 그렇게 라도 하여 660년 당군의 침공 루트와 신라의 침공 루트 그리고 백제 의자왕 항복시까지 한번 설명해 주시지요..어떠한 논리로 충남 보령이 당시 도읍지가 될 수 있는지?..님의 주장이 매우 기대 됩니다.

  • 작성자 10.01.23 11:57

    『무녕왕과 무녕왕릉의 수수께끼
    무녕왕에 관해서는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인 점에서 볼 때 몇 가지 의문이 항상 따르고 있다. 첫째 무녕왕은 역사상 두 인물이 있었다. 백제 25대 임금인 무녕왕이 그 한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550년 무녕군왕에 봉해졌다가 13세의 어린 나이로 살해된 양나라의 왕족이다.
    둘째는 의학적인 분석 결과 무녕왕릉에서 확인된 왕비의 어금니가 30대 여인의 것으로 밝혀졋다는 데 있다.
    셋째는 무녕왕릉이 완벽한 처녀분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도굴꾼들이 다녀간 것처럼 부장품들이 매우 교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 이도학 <새로쓰는 백제사 > 1997

  • 10.01.23 13:00

    뭐... 이도학교수님의 제자로서 이에 대해 한말씀 드리자면 교수님께서 쓰신 내용은 어디까지나 의문에 표현 정도의 수준이지, 무령왕릉 자체를 무령왕의 무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금석문에서도 표시가 제대로 나와 있는데 구태여 무령왕의 무덤이 아니라고 볼 순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오히려 예전 수업시간에 무령왕릉에 대해 연대측정법을 실시한 것에 대해서 주인공과 무덤을 만든 시기가 뚜렷한데 굳이 그러한 연대측정법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셨었지요.) 셋째 부분에 대해서도 본문의 말미에 연도 입구가 단단히 막혀 있었기 때문에 후대에 누군가 침입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써 놓고 있습니다.

  • 10.01.23 19:25

    무령왕릉 내의 유물들이 교란되어 있는 것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중에 '지진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천 여 년이 흐르는 동안, 아무리 지진이 드물게 일어나는 이 땅이지만 지진 한 번 일어나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비사인님 말씀대로 발견 당시 연도 입구가 막혀 있었고 유물은 쓰러져 있었을 뿐 도굴 당한 것은 없었습니다.

  • 10.01.23 21:20

    무녕왕릉이 지진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가설은 나름 개연성이 있는 것이, 남한지역에서 해방 이후 일어난 가장 큰 내륙지방의 지진은 모두 충청도지역(홍성 5.0, 속리산 5.2)에서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초대형 지진이 한반도에서 잘 발생하지는 않는다지만, '땅이 좀 흔들릴' 정도의 지진은 간간히 발생한다더군요. 약 60년 동안 리히터 규모 5.0 대 지진이 몇 차례 발생할 정도라면 무녕왕릉 건설 이후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는 6.0 이상급 지진이 몇 차례 정도는 발생했을 수 있습니다.

  • 10.01.23 12:59

    공산성을 백제의 도성으로 보지 않으신다면 몇가지 부분에서 설명을 해 주실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일단 산성을 도읍으로 함을 패배주의와 연결시킨다면 고구려의 환도산성과 신라의 반월성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가 궁금하네요. 그리고 공산성은 애초에 고구려의 침입을 피해 내려와서 거주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방어를 주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가용면적이 적다고 하더라도 성의 군데군데 주거지가 확인되며 임시적인 수도로서 쓰기엔 과연 규모가 작다고만 할 수 있는지가 의문입니다. 공산성을 다년간 답사 한 제 생각엔 특히 방비의 면에서는 부소산성보다도 뛰어나고 금강을 끼고 있어서 천혜의 요새라고 봅니다.

  • 작성자 10.01.23 21:12

    고구려의 환도산성과 신라의 반월성에 대해 연구 한적이 없어 답변을 드리지 못하겠네요
    공산성에 임시 도읍지로 63년간 있었을까요 ?
    임시 도읍지라고 볼때 신라와 당나라는 공주 지역을 중요한 지역으로 보았고 싸움을 하였을까요? 당시에 도읍지는 부여 였는데요
    공산성에서 발굴된 유물과 기와 는 무엇이 있나요 ?
    백제는 와 박사 제도를 두어 기와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고 연구하였지요
    63년간 도읍지로 있었다면 궁궐도 새로 지었을 것이고 신하의 집도 새로 지었을 것입니다.
    궁궐에는 적어도 수백명이상 있었고 잠을 자고 먹고 하였을 것입니다.
    궁궐의 크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10.01.23 21:21

    후... 님은 산성에 도읍을 한 것은 패배주의와 연결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비사인님은 그렇다면 고구려의 환도성과 신라의 월성도 산성인데 그 두 나라도 패배주의와 연결되는 것이냐고 물으신 거죠. 님의 논지대로라면 응당 고구려와 신라도 패배주의와 연결시키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연구를 하면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 10.01.23 21:26

    그리고 왜 자꾸 '산성' 하나만 도읍지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하시는지요. 고구려 국내성도 환도성과 평지의 국내성이 한 세트, 장수왕의 평양성도 대성산성과 안학궁이 한 세트, 신라도 월성과 평지가 한 세트였고 공주, 부여도 그러했습니다. 공산성의 규모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그게 웅진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 10.01.23 22:26

    월지국님이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도읍지를 왜 성안에 가둘려고 하시는지요?..꺼꾸로 도읍지 안에 성을 가두어보십시요..신라도읍지 서라벌안에 월성과 반월성등 여러개의 성이 있었습니다. 백제역시 사비도읍지 안에 사비성이 존재하였다고 보아야지요..그리고 몇개의 성이 더 존재했을 수도 있구요..대부분 도읍지 내에 사비성처럼 궁궐 외곽을 성으로 둘러 쌓아 보호하는 경우는 있지만 산성의 경우 궁궐이 산성속에 존재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작성자 10.01.23 23:10

    궁궐이 산성에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공산성 밖에 없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또 다른데도 있었나요

  • 작성자 10.01.23 23:19

    조수아 님 , 소호금천씨님 도 제가 물어보는 것에는 답을 하지 않고 있네요
    개로왕이 고구려에 패하여 문주왕이 공주로 임시 도읍지 삼았다는 기록 자체만으로도 백제의 역사에 패배주의를 심어 주는 것입니다.
    보령이 도읍지임을 증명하면 문제는 해결 되겠지요 그 부분에 관하여 토론을 하지요 .
    웅진이 보령있다고 제가 주장을 하였으니 보령이 아니라고 논리를 전개 하여달라는 말씀입니다.

  • 10.01.23 23:18

    월성도, 환도성에도, 대성산성에도 궁궐이 있습니다.

  • 작성자 10.01.24 10:32

    웅천에는 웅진성을 보호하기 위한 산성이 웅진성을 중심으로 좌우로 2개씩 4개가 있고 또한 바다에서 웅진성에 들어오는 입구에도 하나 가 있었고 구 마량진 성이 있어 도읍지에서 바다 까지 산성이 6개가 있네요 .그리고 그 주변 현재 남포에도 산성이 있었지요 ...

  • 10.01.24 18:27

    월지국 님, 개로왕 건은 님이 해명을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님이 먼저 개로왕이 고구려에 패하지 않았도 도읍지를 옮기지 않았다 하셨고 님은 그것에 대해 글을 올리시겠다 하시고선 지금껏 그 글에 대해 올리지 않으셨습니다. 일전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학계의 통설-개로왕은 고구려에 의해 죽었고 한성이 점령됨으로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을 깨뜨시려면 그에 상응하는 치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이 있다고 그게 백제의 성인지도 논리적으로 밝혀셔야 할텐데요?

  • 작성자 10.01.24 19:42

    보령 웅천이 백제의 도읍지 임을 증명하면 그 모든 문제는 해결 됩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방법은 발굴 입니다.
    개로왕건은 올리지 않는다고 글을 올렸는데 보지 않으셨나요

  • 작성자 10.01.24 19:44

    많은 분이 토론에 글을 올려 주시고 보완도 하여 주시고 하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네요 .

  • 10.01.24 20:19

    소통이 되지 않으면 토론은 이루어질 수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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