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동춘동 14.4.4 게재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 考 35 14402
동쪽말 · 동촌(東村)에서 바뀐 연일정씨 마을 동춘동
자앞, 동촌, 각골, 야곡, 동막 등 취락이 있었던 바닷가 마을
연수구 동춘동(東春洞)은 조선시대에 인천도호부 원우이면에 속해 ‘동막’과 ‘자앞’이‘라는 취락이 있었던 곳이다. 앞글에서 설명했듯이 원우이면은 우리말로 먼우금이라고 했으며 대략 오늘의 연수구 일대를 가리킨다.
1789년 발간 <호구총수>는 동막과 자앞 두 마을을 동막리(東幕里)와 척전리(尺前里)라는 한자명으로 기록했다. 이 지명들은 오늘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서 테어나 평생 살아온 필자의 인천고 동기인 전 인천남부교육지원청 은수봉 관리국장은 동막이 지금 동막역과 동막초등학교, 평생학습관, 정수장, 대건고교가 앉은 지역이라고 설명한다. 옛날 서쪽에 군대가 있어서 ‘군막(軍幕)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붙은 지명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인천의 명문가인 연일정씨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기도 하다.
자앞은 동춘초등학교와 동춘동 주민센터 부근이다. 네모 나게 각이 진 자(尺)의 앞부분처럼 생긴 지형이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청량산의 다른 이름이 척량산(尺量)이어서 ‘척량산의 앞마을’이란 뜻으로 붙인 지명이라는 설도 있으며 황금 자로 땅을 재는 형상이라 풍수리지에도 기막힌 곳이라는 그럴 듯한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그러나 어딘가 꾸며진 이야기 같은 냄새가 난다.
1903년 동리명을 확정할 때 동막리와 척전리를 그대로 썼고, 1906년 원우이면을 서면으로 개칭하면서 척전리를 서면3리로, 동막리를 서면4리로 기록했다. 1914년 부평과 인천 일부를 떼어 부천군을 만들며 문학면을 신설했는데 서면3리와 4리를 통합해 동춘리라 명명했다. 그러니까 동춘은 명명된 지 꼭 100년이 된 지명이다.
1911년 일제가 합병 직후에 조사 기록한 <조선지지자료>에는 서면3리(척전)에 야곡(冶谷), 가곡(稼谷), 동촌(東村), 척전(尺前)이라는 동리명이, 서면4리에 동막(東幕)이 실려 있다. 1980년대에 이곳 원로들의 구술을 채록한 필자 선친은 <인천지명고>애서 자앞말 동쪽말, 동막, 풀무골, 각골 등을 기록하셨다. 자앞말은 척전이고 가곡은 각골, 동쪽말은 동촌, 풀무골은 야곡이다.
그 취락들은 어디인가. 은수봉 국장은 동촌이 천주교 연수성당 뒤에 있는 연일정씨 선영 부근 자연취락 이름이었다고 말한다. 청량산의 동쪽이라 그렇게 부른 것으로 알고 있다. 야곡은 말뜻으로 보아 대장간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각골은 청량산 기슭의 각이진 골짜기에 자리잡은 취락이고, 산밑 어딘가에 대장간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그럼 100년 전에 명명된 동춘은 무슨 뜻일까. 연일정씨 선영이 있는 ‘동촌’을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필자 선친은 <인천지명고>에서 ‘연일정씨 가문 출신인 한 명인(名人)의 아호가 동춘이어서 그렇게 붙였다는 설도 있다고 쓰셨다. 막상 정씨 가문에서 그분이 어떤 분인가 답하지 못하고 누군가 알지 못하니 그냥 전설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은수봉 국장도 동촌이 동춘동의 지명어원일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 아무래도 동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연일정씨는 영정이 인천시문화재로 지정된 좌의정 정우량(鄭羽良)을 비롯해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인천은 개항 직후부터 전국 어디보다도 빨리 일본식 정명으로 마을 이름들이 바뀌었다. 인근 동리 옥련동은 일본 해군 2백여 명이 순직한 순양함 마츠시마함(松島艦)을 기려 1930대에 송도정으로 바뀌었는데 동춘리는 살아 남았다. 1940년 일본식 정명으로 바뀌었으나 글자는 그대로 동춘정이었고, 광복 후인 1946년 동춘동으로 회복되었다.
지금 연수구의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동춘동도 청량산과 일부 고지대를 빼고는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바다였다. 필자의 소년시절 기억도 선명하다.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가다 보면 염전도 있고 빨간 나문재가 무성하고 게들이 지천으로 기어다니는 갯벌, 개개비새가 야단스럽게 울어대던 갈대숲을 볼 수 있었다. 기다란 방죽들도 보였다. <인천지명고>를 보면 새방죽들, 쇠이들이라는 방죽 이름이 실려 있는데 지금은 매립해 사라졌다. 수령 5백년이 된 고목들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언젠가 고사해 버렸다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