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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호 |
제 24 話 북벌계획을 추진하다 뜻을 못 이룬 효종(孝宗)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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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음력 5월 22일 亥時生
(재위기간 1649년~1659년. 41세때 사망)
시 일 월 년
乙 甲 庚 己
亥 辰 午 未
39 29 19 09
丙 丁 戊 己
寅 卯 辰 巳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그는 즉위 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자점(金自點) 등 친청파(親淸 派)를 조정에서 몰아내고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서인계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하여 북벌계획을 추진하다가 그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원대한 포부를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던 불운의 임금 효종의 사주는 어떨까?
甲木 일간이 여름에 낳았으나 亥水도 있고, 辰土의 습토도 있으니 水는 충분하다. 신약하지도 않으니 월간의 庚金 편관으로 용신을 정한다.
丁卯대운도 좋은 운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丁火는 陰이라 陽인 庚金에 주는 타격이 약하여 불안하게나마...임금으로 지냈다.
丙火의 陽火운이 들자 庚金이 견뎌내지 못하여 붕어하게 된 것이다.
제 25 話 삼국지의 영웅 제갈량의 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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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81년 7월 23일 巳시생.
시 일 월 년
丁 癸 丙 辛
巳 丑 申 酉
53 43 33 23 13 03
庚 辛 壬 癸 甲 乙
寅 卯 辰 巳 午 未
癸水 일주라 지혜가 출중하다. 더욱 인수가 사주에 많아 학문 또한 심오했다.
지지에 巳,酉,丑 金局이 전비하고 辛金까지 천간에 뜨니 종강왕격(從强旺格)이라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대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金,水가 기쁘고 木,火는 흉신이 된다.
庚寅 대운에 접어들자 火가 長生하여 격국을 反하니 한(恨)을 남기고 갔다.
제 26 話 성철(性徹)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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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음력 2월 19일 寅時生(1993년에 입적)
시 일 월 년
壬 壬 甲 壬
寅 子 辰 子 (月支 司令 乙木)
80 70 60 50 40 30 20 10
壬 辛 庚 己 戊 丁 丙 乙
子 亥 戌 酉 申 未 午 巳
신왕하다. 옛 서적에는 신왕무의(身旺無依)하면 승려나 도사의 운명이라 했다.
木으로 설기는 되고 있으나... 火가 천간에 나타나서 주류무체(周流無滯)하고, 식신생재(食神生財)를 하여야 할 텐데....이 사주는 생재(生財)가 안 된 그 점이 매우 안타깝다.
年으로 보나 月로 보나 日로 보나 生時의 寅木이 공망이다.
甲木 용신의 뿌리가 공망이고, 時에서 보면 月柱가 공망이다.
용신이 호공(互空)이 되니 山門으로 출가하게 된 것이다.
제 27 話 정력이 센 남편과는 못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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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거주하는 단골 여인이 여동생을 봐 달라고 왔다.
시 일 월 년
己 甲 壬 癸 <ㅡ 여동생
巳 寅 戌 卯
42 32 22 12
丁 丙 乙 甲
卯 寅 丑 子
丁卯대운은 木의 氣라 재격(財格)이 파괴되는 시기로 흉운.
관(官)도 없어 지장간(支藏干)의 巳中 庚金이 남편이나 火局으로 파괴된 중 年柱를 기준으로 공망이 巳가 되니 그 巳中의 庚金 마저 더 힘이 없다.
근본적으로 남편과 인연이 없는 사주가 된다.
일 월 년
壬 壬 壬 <ㅡ 동생의 남편
寅 寅 寅
41 31 21 11
丁 丙 乙 甲
未 午 巳 辰
여동생과 제부가 甲寅일주,壬寅일주로 2005년 乙酉년과 원진살(寅-酉가 원진살)이라 이혼수라 판단했다.
평소 제부(弟夫)가 험한 언어와 고함이 심했고, 바람끼도 심했으나 더욱 어려운건 성행위 요구가 너무 잦고, 많아서 못살겠다는 여동생의 생각이란다.
정력이 센 남편과는 못 살아 !
남에게는 행복한 일도 개인에 따라서는 즐거움이 아니라 노동, 아니 고문일 수도 있다.
세상은 요지경 !
제 28 話 복상사(腹上死)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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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일 월 년
丙 辛 壬 乙 <- 남성
申 丑 午 巳
33 23 13 03
戊 己 庚 辛
寅 卯 辰 巳
자료를 찾다보니 20여년 전의 어느 자료에 특이한 것이 있어서 옮겨 본다.
火가 지나치게 강하다. 水를 용신으로 쓸까? 丑土를 쓸까?
己卯 대운중 대운 己卯와 천충 지충(天冲 地冲)하는 癸酉(29세)年 丑월에 여자하고 자다가 복상사(腹上死)로 단명하였고, 甲戌년 양력 1월에 火葬.
화장을 시킨날 오후에 그의 아버지가 비감(悲感)하여 보러와서 얻어진 자료이다.
2015년 4월호 |
제 29화 역술인 柳忠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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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석(老石) 류충엽 선생은 역술인이라기보다 역학자에 가깝지만 역학 명리로 밥벌이를 하였으니 역술인 대열에 끼일 수 밖에 없으리라.
그를 처음 알게 된 때는 1975년 무렵이라 기억된다. 그 무렵의 나는 혈기 방자한 20대라 나와 동문인 육선생이 와서 서울에 ‘易門關’이란 철학원에 류충엽이란 인물이 있는데 역학 실력이 대단하다고 호들갑을 떨어 속으로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당시 나는 우물안 개구리처럼 한국에서는 내가 가장 사주를 잘 본다는 잘못된 자부심에 젖어있었기에 승부욕이 생겨서 질문을 가장한 도전장을 그에게 들이 밀었었다.
얼마 후 한통의 답장 편지가 왔는데 고급한지에 붓글씨로 답장이 왔는데 필체가 장난이 아니었다.
내용은 나보고 택지췌(澤地萃: 모움의 풍요)에만 능하고(즉 지식을 채우기만 하고), 지산겸(地山謙: 겸손)을 모르니 교우할 인물이 못된다고 연락을 하지 말란다.
가만히 생각하니 역학계 입문은 내가 약간 선배지만 연배도 20년 가까이 많고 학식이 많은 사람에게 내가 크게 결례를 한 것이 분명하여 다시 정중히 사과를 하였다.
그 후 노석선생이 타계할 때 까지 교우를 지속하게 되었다.
노석선생의 저서 [역문관야화(易門關野話)] 속의 한편의 글을 소개하면서 그를 추억해 보고자 한다.
-화락공산조습춘(花落空山鳥拾春)-
신문지 쪽만한 유리창 너머, 앞마당에 뒹구는 낙엽을 보며 추곡(楸谷: 춘천에 있는 계곡의 이름)을 그리던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겨울을 뛰어넘어
오늘이 청명(淸明), 내일이 한식(寒食)이란다.
주흥사(周興詞: 중국 양대(梁代)의 문인,천자문의 작자)선생은 얼마나 세월이 빠르다고 생각했으면 년시매최(年矢每催: 세월은 화살과 같이 빠르다)라
하여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날아가는 화살에 비유했을까?
봄냄새 완연한 툇마루에 나가 보니, 그래도 돗자리 넓이만한 마당에 수목들의 새순이 파릇파릇 돋아나기 시작하지만 봄날의 감회를 더해줄 화초 한포기가 없다.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작년 이맘때의 추곡이다.
명도암 앞뒤에 피를 뿌린 듯 뒤엉킨 진달래 바다. 그 꽃 사이에 홀로 누워서 술잔을 기울였는데...
‘벼르던 제사에 물 한그릇 못 떠 놓는다’더니 나야말로 간다 간다 하던 것이 결국 가지못한 채 봄을 맞았다.
보따리를 싸려고 하면 엉뚱한 친구들이 시간을 뺏는다. 오진암 기생 하룻밤 화대도 안되는 것을 내놓고, 여의도행이 어떠냐고 침을 흘리며 조른다.
그들의 사주는 거개가 내 사주만도 못한 치기배 사주.
그러나 어쩌랴! 모두가 인연의 소치인 것을...
흩날리는 꽃잎 사이에 누워 푼돈처럼 낭비해 버린 내 생애,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없는 고달픈 중생의 넋두리를 글로 엮다보니,
중국 전한(前漢) 원제(元帝)때, 척박한 오랑캐 땅으로 끌려간 왕소군(王昭君)의 비련을 읊은 시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 오랑캐 땅에는 꽃이 피지 않으니 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라는 글귀가 떠 오른다.
서경잡기(西京雜記: 송대의 야사, 작자미상)란 책에 의하면 원제는 궁녀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어떤 궁녀가 예쁜지 알기가 어려워서 화공으로 하여금 모든 궁녀의 얼굴을 그리게 했다. 그 당시에도 출세하기 위해서는 뇌물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많은 궁녀들이 화공에게 뇌물을 주고 잘 그려 줄것을 부탁했지만, 왕소군은 미모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뇌물을 주지 않았다. 뇌물을 받지 않은 화공이 왕소군의 얼굴을 제대로 그렸을 리 없다.
그때 마침 흉노족과의 평화를 위해 궁녀중 하나를 선우에게 시집보내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원제는 그림을 보고서 가장 못생긴 왕소군을 흉노의 선우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막상 인계하는 자리에 나가보니 못생겼으리라 짐작했던 궁녀는 절세의 가인이 아닌가! 일국의 제왕으로 약속한 일을 번복할 수는 없는 일이라 원제는 한탄 속에 왕소군을 꽃 한 송이 피지 못하는 오랑캐의 땅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후 진노한 원제는 뇌물을 받은 화공의 손목을 전부 자르고, 화법선녀(畵法選女)의 제도를 타파했다고 한다. 이 비련의 여인 왕소군의 사주를 알 수는 없지만, 명리학적으로 상상하자면 홍염도화(紅艶桃花), 몰관성(沒官星)에 내 사주같은 유병무약(有病無藥)의 격국이리라.
왕소군의 슬픈 사연은 후세의 많은 시인들에 의하여 읊조려졌는데, 그중에서도 ‘호지무화초’란 구절은 역문관에 유폐되어 살아가는 나의 노년기같이 느껴진다.
역문관 앞뜰에도 화초 한 포기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같지 않은 적막강산... 흉노의 괴수인 선우(單于)에게 끌려가 꽃 한 송이 안 피어나는 척박한 땅에서 살다간 왕소군, 그리고 역문관 주인.
천팔백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일면식도 없는 비련의 여인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 억겁(億劫)의 숙연(宿緣)일까?
툇마루에 기어든 봄볕을 바라보고 있자니 공연히 부아가 끓어올라, 좌하식상에 고집투성이 마누라를 회유 반, 협박 반으로 달래서 10만 원어치의 봄꽃을 배달해 왔다. 진달래, 영산홍, 이름모를 서양꽃들을 두서없이 배열하고 보자니, 추곡 골짜기의 명도암 아랫마당에 피어 있는 진달래가 왜 그리도 아른거리는지...
꽃을 꽃답게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인간혐오증에라도 걸린 듯 해서 사람없는 골짜기 구석방에라도 은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속진(俗塵)에 찌든 심신과 <미장트로피>라는 인간 혐오증도 치료될 듯 하다.
작년 이맘때 쯤 개울가로 떠내려오는 꽃잎들은 유행가 가사처럼 낙화유수 그대로였다. 시냇물에 떠내려가던 꽃잎들은 의암호로 갔는지, 소양호로 갔는지 알 길이 없지만 윤회의 수레바퀴는 계속해서 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꽃잎들을 업고 내달리는 시냇물들은 십여년 전의 맑은 시냇물이 아니었다. 새로 증축한 여인숙의 수세식 화장실과 샤워장에서 흘러나오는 오물이 뒤섞여 소양호로 떠내려 간다. 그렇게 흘러간 물은 팔당의 취수탑을 거쳐 상수도로 둔갑한다. 이것도 윤회라면 윤회일 것이다. 하지만 더렵혀진 물이 자기 아들 딸이 마시는 보리차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건지 몰라서들 그러는 건지, 물 아까운 줄 모르고 많이 써야 미덕이라도 되는듯 마구 써 버린다.
그러나 옛날 우리 선조들은 돈 안내고 퍼 쓰는 동구 밖의 우물물도 낭비하면 용왕님이 노하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님때 까지만 해도 새 며느리에게 물 아껴 쓸 것을 당부해 왔다. 이것이 우리 전통 사회의 생활 태도였다. 불가에서도 이승에서 자기가 함부로 써 버린 물은 염라대왕 앞에 가서 다시 모두 마셔야 한다는 말이 있다.
환경 오염과 공해를 예측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바로 인과의 섭리가 아닐까?
추곡 골짜기를 생각하다보니 괜한 소리만 한 것 같다. 봄볕이 점점 따스해지는 걸 보니 봄꽃도 오래가지 않을 듯 싶다.
화락공산조습춘(花落空山鳥拾春) 진달래, 영산홍 등 낙화가 수북한 빈 골짜기에 새가 봄을 줍는다는데, 이 봄이 다 가기전에 꼭 가야지...
노석선생의 글 솜씨는 역술가중 단연 탁월하다.
노석의 권유로 춘천의 추곡에 가 본적이 있는데 내가 갔을때는 그의 글에서 처럼 빈 골짜기는 아니었고 약숫물 뜨러 온 사람 음식점에 온 사람들로 북적되고 차 세울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제 30화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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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일 월 년
戊 癸 丙 甲 ← 1924년생
午 亥 子 子
59 49 39 29 19 9
壬 辛 庚 己 戊 丁
午 巳 辰 卯 寅 丑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의 사주
한국 본명 金信洛. 일본 이름 百田光浩(모모타 미쓰히로)
서기 1924년 음력 11월 14일 午時생 [40세 1963년 12월 15일 사망]
이 사주는 일간 癸水가 겨울 水旺한 子월에 태어나서 연지에도 子水 일지에도 亥水이니 신왕한 사주라 그 기운을 설하는 연간의 甲木과 그것을 다시 또 설하면서 조후를 해 주는 월간의 丙火가 용신이다. 즉 <상관생재격>이다.
10대 때 고향 함경도를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戊寅 대운에는 일본 씨름 ‘스모’선수로 성공했다가 27세[庚寅년]에 스모를 그만두고 28세부터 레슬링을 배워 己卯 대운에 용신 甲木을 도우니 30세[癸巳년]에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창설 후 31세[甲午년]부터 본격적으로 스포츠 스타로서 죽기 전까지 전 일본을 뒤흔들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던 것은 신왕사주인데다 그것이 水라 원기(元氣) 즉 신장기능과 뼈의 기능이 강한 탓이다.
결혼을 3번이나 하게 된 것은 시지 午火가 편재였기 때문에 조강지처와 해로가 힘들 수 밖에 없고, 다소 화려한 생활과 시건방졌던 성격은 상관과 겁재의 성격이 합쳐져 나타난 것이고 스프츠 선수가 된 것은 비견이나 겁재가 많은 사주에 종종 나타난다.
戊寅과 己卯의 대운에 용신과 재를 생조하니 거금을 벌었다.
40세[癸卯년] 양력 12월 8일 밤 야쿠자 村田勝志(무라타 가쓰시)와 시비가 붙어 칼에 찔렸다가 15일에 숨진 것은 용신과 희신을 극하는 金과 水가 강해지는 庚辰 대운을 만난 탓이다.
첫댓글 토정 이지함,구월산인 신승남. 백운학,전백인, 자강 이석영, 도계 박재완, 제산 박재현, 그리고 서낙오와 위천리....기라성같은 천재들의 발자취가 너무나 아쉽습니다..선현의 발자취는 참으로 위대하나 그 그림자 하나 찾기가 너무도 어려워 망연자실하던 때가 생각납니다..학선 선생님의 건승을 기원드릴 따름입니다..
좋은글 감사
참고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신분은 원래 토정 이지함 선생이십니다...토정과 율곡은 매우 가까운 절친이라 토정의 의견을 율곡이 받아들여 주장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