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땜이란 액을 때우는 것을 뜻한다. 인간쪽에서 나온 특별한 행위가 하늘이 주는 저주를 커버할 수 있다는 기본 종교심을 액땜이라고 한다. 이 액땜이 성사되려면 필히 인간에서 행하는 일부 행위들에 대해서는 특별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 거기에 따라 신학적 근거로서 뒷받침 시켜주어야 한다. 인간들이 행하는 행위에 대해서 일부 인정해 주지 아니하면 액땜을 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시키는 셈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액땜 교회의 특징은, 뒷바침하기 위한 신학적 근거를 장만하기 위해 역할을 담당하는 담당자가 등장해야 되고 그 자가 만들어내는 각가지 액땜의 방법을 교인들이 듣고 그대로 실시하는데 있어 계시적으로 정당성을 보장되도록 노력하는데 있다. 이 일에 대해 선배격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했을까?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6-10)
버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에 관한한 전문가이다. 누구보다더 더 열심히 성경해석에 매달리는 자들이다. 이들의 내놓은 해석에 따라 전도도, 목회도 정당함을 가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랍비(스승)이라는 칭호로 불리워지는 것이다. 더니아가서 '아비'라는 책임성 있는 위상까지 짊어졌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전도나 선교에 대해 참 하나님의 평은 어떠한가? 직접 들어본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3,15)
예수님의 평가는 단호하다. "화 있을진저!"이다. 예수님은 도대체 이들에게 대해서 무엇이 못마땅한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전도와 비교해 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18, 21-24) 이 본문을 보면, 일단은 미련하게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통해서 하는 것이 전도라는 것이다. 얼마나 미련한지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으시단다. 사람에게 지혜있어 보이는 그리스도나 능력은 일단 구원하고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구원의 능력인 십자가는 유대인이 찾는 기적의 증거나 헬라인들의 찾던 지혜적 요소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다. 어쨋던 십자가 자체적인 능력이 아니면 구원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다른 인간을 구원할 능력이 아예 없고 또한 가질 하등의 필요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거기에 비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전도는 일단 자신들이 중심이 서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천국 문을 도리어 가로막고 있는 처사'로 규정하셨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바리새인들이 지도자될 자격이 없어서 이런 평가를 내리시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지도자는 오직 하나이시다'를 언급하고 계시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하나라면 그 지도자는 바리새인말고 오늘날 목회자를 집어넣도 되지 않을까? 그것도 옳지 않다. '지도자는 하나이시니 곧 그리스도니라'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의 전도나 선교가 "화있을 진저"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참 천국문이시고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자신들이 전도 행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전도의 중심을 넘겨줄 수 없는 이유는, 자기네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율법 해석이 옳아보이지 않아서이다.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요 9:28-2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 뿐만아니라 예수님도 율법에 대해서 그들에게 지지 않고 맞받아 치셨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자 모세니라"(요 5:45)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성경 해석은 그들을 지배하는 죄 때문에 그러하다. 그들의 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들인 것을 못 알아보게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2, 44) 이 본문에 의하면, 그들의 마음 속에는 죄가 자리잡고 있었다. 죄란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 바깥에서 그들이 다스리던 말씀 자체를 자기 속에서 해소시켜 없애려고 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서의 계명을 자기 속에 자기가 지배 관리하는 지혜로 변개시키고자 했다. 그렇게해서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적 간섭이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배후에는 물론 악마가 작용했다. 악마는 말하기를 인간들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하나님만이 점유하고 있는 선악의 지식을 인간들도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부축인 것이다. 그렇게해서 인간은 하나님 계명의 중심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계명 성취의 방식은 이러하다. 즉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선악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쪽에서 내려오는 모든 계명을 접수하면서 이미 자기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선과 악의 지혜로 판단하여 계명들마다 나름대로 알아서 준수하는 것이다. 즉 선한 것은 선행을 실제로 행함으로 성취하고 악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알아서 악행을 금지하므로서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숙제와 같은 모세의 율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특히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인 바리새인과 서기관 자신들이 타인들에게 전도하고 선교할 수 있는 주체자로서 적격이라고 간주했기에 자신들을 '지도자'나 '아비'라고 평을 듣는데 대해 조금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유도했다. 그것은 범세계 겨냥한 질서있는 전도와 선교의 효율성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평가는 간단하다. "화 있을진저 천국의 문을 막는 자들아!"이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전도는 다르다. 유일무이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친히 전도의 중심에 나서시는 전도이다. 즉 바리새인적 사고방식을 예수님적 사고방식으로 바뀌는 것, 그 자체를 두고 진정한 "도(道) 전함"곧 전도라고 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친히 지도자로 인정케 하자는 것이다. 그 어떤 인간도 지도자가 될 수 없음과 병행해서 말이다. 인간도 인간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바리새인적 인식을 분쇄하는 식의 전도 말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무이한 지도자임을 증거하는 것이 참 전도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 있어 이러한 요구는 무리였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 말씀 성취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어야 한다는 의식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실재하는 인간들보다 지키라고 실재하는 말씀을 주었지 지킬 수 없다고 실재하는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인식점에서 벗어나서 달리 생각할 방도가 막혀 있었다. 이미 따먹어서 대대로 알게 된 선과 악의 지혜를 백분 활용하지 않고 썩히는 것을, 인간 세계을 지배하는 악마가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기적을 발생시키면 기적을 소급해서 신을 믿겠고 지혜를 주면 그 지혜를 소급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아채서 영접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고작이다. 어리석게도 예수라는 인물의 죽음을 전도의 중심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구원시키는 지도자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인간에 의한 것이야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인간도 우리가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것을 구태여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기 자리를 빼앗도록 하는 작업은 하나님편에서나 인간편에서 볼 때나 전혀 불필요한 구상이라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은 인간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그런 무리하고 무모한 일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나 나타나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고 그리스도로부터 교훈을 받아 그것을 지켜내는 능력도 인간으로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참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일하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존재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계약 중심 사상이 결국 메시야를 살해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계명 지키기위해서 자기들이 소외되기 보다는 자칭 메시야라는 예수를 소외시키는 것이 옳았다고 판단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보다는 자신들의 능력을 신봉하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한계는, 자기네들에 의해 실제로 죽임을 당한 그 예수라는 분이 부활이 되며서 드러났다. 십자가 사건은 전도의 주체를 놓고 그동안 시도한 모든 인간들의 선악적 노력을 가증한 죄악으로 들통내 버렸다. 이제 이러한 공격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이 참 지혜와 기적으로 가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예수님을 십자가를 못박은 그 지혜를 이제 십자가에다 도리어 정죄하며 못박으려는 것이다. 바리새인적인 전도관을 못박으려는 것이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모든 움직임을 십자가로 정죄하며 못박으려는 것이다. 즉 십자가 자체에서 나오는 능력을 대체 할 만한 능력이 따로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로 이 십자가 사건만을 재현코자 하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6:8-11)
이렇듯 성령께서 이런 십자가 사고 방식으로 활동하시는데 세상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도 바리새인적인 인식관에다 성령관을 섞어서 새로운 바리새인들이 등장시키기 시작한다. 성령을 재료로 삼아 새로운 기독교식 바리새인으로 변신하고자 한다. 즉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지도자가 아니라 예수님이나 성령께서 그 지도자 역할을 거듭난 자기 자신에게 일임했다는 것이다. 인간 바깥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간 자체가 죽는 십자가로서 대리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만이 십자가 지신 분으로 복음의 중심에 서는 것이 아니라 제 2의 십자가맨(Man), 제 3의 십자가(Man)에게 전도의 중심이 되라고 권한을 위임했다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성령의 내주가 확실한 그 증거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증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라는 고백 자체가 전도인에게 다가설 수 있는 일차적인 복음의 중심이라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십자가가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하고, 나의 중보기도가 주님의 중보기도를 대신하고, 나의 전도가 주님의 전도를 대신하고, 나의 헌신이 주님의 헌신을 대신하게끔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면서 이미 정당화했다는 주장이다. 예수님이 몸은 혼자몸이기에 여기 저기 쏘다닐 수 없기에 자기가 성령주었다는 지도자라는 몸들을 통해서 동시다발적으로 전도를 효과있게 할 수 있도록 조치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과 이들 지도자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십자가는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미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알만큼 익숙해졌기에 보다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즉 처음 성령이 오시도록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 죄사함의 그 십자가를 믿을 뿐이지, 이미 예수믿고 의인이 된 이상에는 더 이상 십자가 앞에 설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미 의인되었기에 모든 의로움이나 말씀 성취에 대해서 본인이 알아서 충분히 완성시킬 자질이 된다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의인으로 유지되기 위한 화목제물 그 자체에서 나오는 속죄의 효력은 불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믿자"라는 것은 지도자에게는 지금도 믿을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한번만 믿기만 하면 성령님이 자기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이제는 십자가의 능력을 믿지 말고 자기 속에 들어온 성령님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들 지도자들은 더나아가서, 자기들에게는 더 이상 예수를 믿는다든지 의지한다는든지 하는 것도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의 사람으로 독자적으로 독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있었던 그 성령께서 이들에게 있기에 이들이 의논할 일이 있으면 더 이상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귀찮게해서는 아니되고 성령님과 의논해야 한다. 그런데 성령님은 지도자를 돕는 자 역할(보혜사)을 하라고 내주해 있기에 차라리 주도권은 지도자가 쥐고 있다. 지도자의 의욕이 내키는대로 시키면 성령님은 그대로 따라주어야 된 입장에 있는 관계가 된다. 예수 중심에서 성령중심으로 나아갔다가 결국 지도자 중심사상으로 민중들 앞에서 밀착의 거리를 좁혀가라고 하늘의 예수님이 그렇게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복음의 내용이 되지만 사실 그 엄청난 걸림돌은 성령받은 자신의 존재와 사역을 통해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도록 조처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의 내용에서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만 들어있으면 접촉점이 형성되지 못하기에 여기에 성령받은 지도자의 존재 그 자체를 복음의 외곽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이 우선 내세워야 할 것은 십자가 이야기가 아니라 지도자의 고생담이요 성령받은 경위 같은 것이 된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러한 과정을 피해서 십자가에 도달되는 자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즉 구원의 내용에 접근하는데 있어 그 교회에서는 지도자와 다른 교인들이 경쟁관계에 놓이는 것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구원에는 과정이 필요한데 교회 안나오면 구원없고 또한 교인들 앞에서 어슬렁거리다가도 강단에 서면 열을 성령을 뿜어대는 '나' 곧 성령받았다는 지도자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성도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런 복음의 변형을 용납하시는가?
갈라디아 1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사도는 전하고 있다.(1:4-5, 8)
이 본문에 볼 것 같으면, 참 복음에는 몇가지 필수 요건이 담겨져야 한다. (1)이 세대가 '악한 세대이다'는 점 (2)예수님의 몸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점 (3)이 복음에로의 초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 뿐이라는 점 이 세가지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요소는 그 어느 요소 인간쪽에서 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인간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는 사항도 전혀 없다.
그런데 다른 복음, 곧 사람들에게 저주를 한아름 안겨다 줄 가짜 복음은, 이 복음의 세가지 요건을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고 상식적으로 받아드려 곧 그것으로 성령의 경험으로 삼을만한 재료거리를 제공해 주자는 종교 서비스 차원에서 등장된다. 즉 복음이 추상적인 이론에 머물러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실천될만한 것이어야 하고 가시적인 성과로서 차별난 특징으로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인간의 행동 여하에 따라 액땜의 효과가 반복적으로 재생산될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얻은 것을 가지고 '신앙 있음'으로 '성령 생겨났음'으로 확증짓어주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복음에서 종교로 쉽게 변신되는 것은, 사도가 제시한 복음의 요건들이 모두 인간들이 관여할 수 없는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먹혀 들 수 없어 목회 자체가 차단된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다. 목회가 차단되면 목회자 자신의 존재 의의가 공중에 붕 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적으로 일하라고 하늘에게 자기에 성령을 주셨는데 그 성령받을 것을 써먹을 근본 바탕은 본인이 그 어떤 종교적이고 주술적이고 상관없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우선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성령의 일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 세상이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것을 최대한도로 이용하자는 식이다. 율법이 있는 율법으로 접근하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 율법없이 접근해서 목회에 성공한 사도 바울의 경우와 같이 자신은 주술적인 바탕에서 주술적인 목회로서 우선 자기 사람을 많이 확보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목회라는 것이 성사되려면 목회의 대상이 되는 자기 사람이 있어야 하기에 일단은 그들의 입장에서 서서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겠다는 전략이다. 즉 "당신은 이런 경험을 했으니까 틀림없이 신앙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확정을 지창 지도자인 자신이 내려주어서 결국 교회 안의 모든 이에게 똑같은 종교적 위상안으로 모아지게끔 하는 방법까지 주저없이 활용해야만 하는 것이 자신과 교회의 할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다보니 복음과 접촉할 수 있는 거점 만들기에 주력한다. 이 거점은 인간쪽에서 성의와 정성을 가지고 쉽게 따라하기만 하면 그때마다 성령이 나타나 언제든지 성령의 열매를 반복해서 재생산해 낼 수 있는 자동 체험 종교 기능을 가동케 하는 방식이다. 보이지 않는 복음을 인간의 실천력의 결과로 보일 수 있는 복음으로 가시화 시키고 언제든지 재생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만들겠다는 것이 종교화된 가짜 복음이다. 따라서 이들이 새로 제정한 복음의 실천강령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1)이 세대가 전적으로 악하지 않고 선한 점도 아직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그런 자질과 성령을 거부하고 환영할 수 있는 마음만큼은 멀쩡하다.
(2)예수님 몸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도 거듭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독자적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
(3)은혜가 강림은 성령을 많이 받고 그 조절이 가능한 지도자에게 일임했기에 지도자가 시키는대로 종교적인 자극을 가하게 되면 언제든지 받아낼 수 있다.
라고 하는 전제를 이용한다. 만약 이 세가지 원칙이 깨어지면 그 어떤 경우라도 복음은 걸림돌 밖에 안되기에 지도자인 자신으로서의 더 이상 목회로서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 자신을 목회에 곤란하게 만들 주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존이 하늘의 예수님과의 정책과 직결되기 때문에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도록 조치하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자기 목회 비젼과 하늘의 예수님의 정책 사이에 혼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땅에서 내가 매면 하늘에서도 군말없이 매이도록 성령을 통해 사전에 계약된 바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복음을 가지고 종교로 전환하겠다는 발상은 복음 자체에 대한 무지하다는 것은 물론이요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군상으로부터 신의 영역에 도착시키려는 종교성의 발작이다. 즉 내가 진정 목회자이며 그리스도의 종이냐의 실존 확인을 자기가 벌리는 목회 성공 여부에다 맡기려고 한다. 자기 뜻대로 성공하면 자신의 주의 종이고 그렇지 못하면 주의 종이 아니라고 일단은 시험 가동에 들어가지만 결국에는 목회에 성공 못해도 이 세상이 너무 악해서 진정한 지도자를 지도자로 못 알아본다는 세상 탓으로 돌릴 정당성은 이미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목회 성공을 위해서 이것저것 가릴 게 없이 되는 것이다. 신비로운 경험은 무조건 일단 성령의 경험이라고 간주해 주기로 하고, 착한 양심은 무조건 성령의 열매라고 불려 주기로 작정한다. 교회에 사람 수가 점차 늘어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면 성령 충만의 상태라고 우기는 것이다. 어차피 십자가 사건은 이미 2000년 전의 먼 땅에서 일어난 딱딱한 화석같은 사건이라서 현대인에게는 보이는 기적으로 부적절하니 보편적 신앙 상품으로 사람들 앞에 내밀기는 적당치 않다고 여기고 그 대신 현재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금 경험가능한 경우들, 예를 들면, 성령 체험, 성령 충만, 성령 내주로 인한 인격 변화, 같은 것이라고 정당화시켜 주면 그것처럼 설득과 납득하기 수월한 일이 또 있을까!
따라서 못믿을 십자가 복음을 세상을 향해 증거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경험 가능한 일들을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성령의 일로 치부시켜주면서 이것이 곧 구원받을 복음적인 신앙체험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 만족과 자기 도취로 인해 불신과 공포의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겠는가 하고 계산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의 근거를 자체적으로 원하는대로 반복해서 꺼집어 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자기를 근거로 한 가짜 확신인가!
그런데 종교 세계에서는 왜 자기 체험에 바탕을 둔 확신을 갖고자 하는가?
그것은 죄악한 이 세대가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종교성향을 토대로 하여 종교 사업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논리적 절차를 열거해 본다.
(1)모든 이는 양심상 하나님을 알고 있다.
(2)모든 이는 양심으로부터 무거운 죄책을 짊어지고 있다
(3)어떤 식으로도 하나님께 액땜을 하고 싶어한다.
(4)액땜은 추상적이면 사람들이 못믿게 되니 가시화되는 액땜이어야 한다. 인간들의 원초적 종교성향이 이를 선호한다. 그 가시화된 액땜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교회라는 이름의 종교업체의 설립이다.
(5)액땜의 방법은 필히 기록된 법제화된 계시이어야 한다. 그래야 시키는대로 그 항목들이 지켜나갈 때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또 양심의 짐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액땜으로 정기적인 예배 참석하기, 액땜으로서의 기도, 액땜으로서의 헌금, 액땜으로서의 예수를 믿어주는 결단성 발휘하기, 액땜으로 얻고자 하는 성령 충만받기, 액땜으로 하는 목회자 섬기기, 액땜으로하는 선교나 전도 하기, 액땜으로 신학교 가기, 액땜으로 험악한 먼 나라에 선교사로 자청해 가기, 액땜으로 세례 받기, 액땜으로 직분받기, 액땜으로 하는 교회 충성 봉사하기, 액땜으로 하는 한국 교회 개혁 부르짖기, 액땜으로 하는 환경 살리기 운동, 액땜으로 자기 몸을 못살게 굴기, 같은 것을 누군가(목회자)가 강제로 자기에게 명령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신의 법으로부터 지배받는데서 오는 쾌감을 경험한 자만이 남보다 더 정당화될 수 있고 동시에 남을 당당하게 지배하는 수법을 깨우친(리더싶 훈련 코오스) 초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여기에 성경 읽기와 묵상과 성경 공부를 통해 그 액땜의 방식을 교육할 당위성이 생긴다.
(7)교육이 되려면 지도자가 요구된다
(8)준비된 교육자가 곧 지도자이다.
(9)교육의 효과있는 성과를 위해 필히 지도자의 권위 확보 전제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등장한다. 지도자는 너무 신성한 교육을 담당하기에 예수님에게 준하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가 같은 성령이 임재해 있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교육받는 태도를 견지주어야 하지 만약 감히 교육받는 자가 가르치는 자를 공격하거나 뒤에서 흉을 보는 그런 무엄한 일이 있으면 가차없는 하늘의 저주가 떨어진다. 성령의 교육을 방해하는 것은 악마밖에 없다. 따라서 악마의 짓을 했기에 용서라는 것은 성령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도 용납이 안된다. 따라서 지도자는 평신도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 지위에 존재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교육을 보다 효과있기 하기 위한 지도자의 깊은 배려와 사랑과 애정의 표현이기에 피교육자도 아마 믿음으로 수긍할 것이고 간주하고 강하게 밀어붙인다. 단 주의 사항이 있다. 이 교회을 담당하려고 예수님이 보낸 주의 사자는 오로지 자기 뿐이기 때문에 이 교회에서 자기보다 더 성령받았다는 자가 나타나는 것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이론에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둘 중의 하나는 악마의 종일 것이다. 누가 악마의 종일까? 그것은 주의 종의 권위를 엿보고 대드는 그 자가 분명하다.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유 1:8)라는 본문을 가차없이 공중석상에서 공포해서 정치적으로 조치할 것이다.
(10)교육의 지속적인 유지와 경영의 안정성을 위해 일정한 부동산 소유와 운영비가 충당되어야 한다. 물론 운영비 안에는 지도자의 생계비가 우선적으로 책정되어야 한다.
(11)교육만이 아니라 회원들 간의 친목도 도모해야 재미나는 종교집단이 된다. 양심의 짐을 들게해줄 뿐만아니라 더나아가서 과감하게 그들의 욕망까지 신의 은혜인양 정당화시켜주면 금상첨화이다. 오래 교회 출석한 회원은 어떤 명분으로도 높은 계급을 달아주어서 종교 노동에 따른 성과급으로 교회가 그 사람에게 보상을 해준다. 그래야 그동안의 투자와 노고에 대해 보람을 갖기 때문이다.
(12)이처럼 종교는 모든 진리를 측정 가능한 실적 중심으로 판단해서 액땜의 효력을 확인하고자 한다. 실적 변화로 나타나야 믿을게 아니라는 것이다. 가시화된 업적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하여 법적인 조직체 안에 묶어놓아 구원의 안도감을 서비스하려는 종교사업체 안에서 오늘도 사람들은 종교라는 또 하나의 취미를 즐기고 여가 생활을 영위한다.
이러한 '액땜 교회'에 비해서 복음 교회는 다음과 같다.
(1)모든 이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2)모든 이는 양심으로부터 무거운 죄책을 짊어지고 있다.
(3)복음은, 이 악한 세대에서의 인간은 그 죄에 합당한 고난과 고통과 죽음을 당연히 맞이해야 될 입장에 놓여 있음을 증거한다. 그리고 이 고통 속에서 죄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하기는커녕 쉴사이없이 지속적으로 불평과 짜증과 원망과 모독을 퍼부는다는 사실도 증언한다.
(4)이 고통에서 구원해 줄 그 어떤 종교적이고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경제적인 액땜도 인정치 않는다.
(5)이 고통 속에서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인가를 드러내는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그것은 복음의 기본 요건, 즉 죄와 그리스도 몸의 희생하심과 그 희생에 참여하는 은혜의 부르심을 요건으로 하여 증언한다. 교육이나 설득이 아니라 증거할 따름이다. 교육이나 권면의 효과를 노리는 증언이 아니라 주님의 살아계심에 완전히 일임하는 취지에서 증언을 할 따름이다. 왜 증언만 반복하느냐 하며는 일시적이고 우연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체험을 그것을 고정된 계시처럼 활용하려고 하게 되면 곧 바로 또다른 복음이 변형체로서 고개들기 때문이다. 즉 "내 몸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곧 계시니라!"라고 외치는 새로운 사이비 교주가 탄생되는 근거가 된다. 진정으로 "길이여 진리여 생명이요!"라고 외칠 만한 분은 복음의 요건에 의하면 오직 예수님뿐이다.
(6)성도는 서로가 서로의 대해서 종이요 서로의 기도나 권면이나 믿음이나 설득으로 구원된 것이 아니기에 자기만의 특권을 고집하지 아니한다.
(7)은혜가 설교자로부터 온 것도 아니요 그 어느 누구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오직 직접 주님으로부터 왔기에 목회자나 성도는 다른 성도를 '자기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가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붙여준 인물로 본다.
(8)모든 것이 은혜 체제 안에 있기에 모여있는 것도 은혜요 흩어지는 것도 은혜라고 믿는다. 그래서 모여있는 모임을 일부러 흩으려고 하지도 않고 흩어지려는 성도를 억지로 모이라고 협박하지도 않는다.
(9)이런 자세가 곧 복음을 추상적인 이론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곧 실제 현실임을 고백하는 자세이다.
결 론
인간은 자기 절대화에 늘 매료되고 굴복당한다. 전문종교인이 되었던 비종교인이 되었던 인간이라면 다 마찬가지이다. 특히 종교계 안에서 노골적으로 구체화된다. 자신의 체험과 경험을 절대화하여 한시라도 그것 붙들지 아니하면 확신도 만족도 못하는 불안전성이 종교심을 가진 모든 인간의 기본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들에게 조심스러움을 가르친다. 인간의 자기 행동과 선택 여하에 따라 운명이 어떻게 바뀔 질 모르니 액땜을 제대로 하여 신의 노여움을 거스리게 하지 말라고 한다. 따라서 종교 상품은 늘 장사가 되는 상품이다.
따라서 어느 시대이고 상관없이 사람들은 늘 종교를 활성화 시켜 왔다. 그들은 예수를 원한게 아니다. 예수의 종도 원치 않는다. 단지 자신의 구원을 원해서 전문 종교인을 찾게 될 뿐이다. 교회 밖에서 혼자서 해온 자기 절대화 작업이 부실하다고 여길 때 이들은 종교를 찾는다. 이들 손님에게 만족한 서비스를 해주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전문 종교인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완전 전담받은 이들은 늘 다음과 같은 것만 생각한다. 즉 사람들에게 어떤 처방을 내리면 신적인 사람으로 졸지에 변할 수 있는가 그 비법을 만들어 알려주려고 한다. 이러한 소위 성령받았다는 종교전문가의 자기 확신은 그동안 민중들이 찾던 바이다. 그 살아계신 성령의 몸체 되시는 분이 하사하시는 실천 항목은 신의 계시와 동일하게 취급해서 주저없이 엎드려 순종하여 그 종교적 액땜으로 인해 구원 확보와 양심의 가책에 면죄부를 붙이려는 자들이 오늘날 종교시장의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을 향하여 가차없이 저주를 퍼붓는 분이 있다. 사도 바울이다. 그분은 오늘날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신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8-10) 이런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 대해서 소위 지도자들은 이렇게 대꾸한다. "너만 그리스도 종이냐?"
사도도 끝났다. 계시도 끝났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모든 성도가 다 해당된다. 서로는 서로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섬기는 관계 뿐이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1-12) 이와같은 예수님의 사상은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더 분명해진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2:20) 그러면 사도 바울은 자신은 어떤 식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1-12)
즉 사망은 사도와 디모데 안에서 일어나고 그와 동시에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게 하시는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이나 디모데에 있어 그 속은 여전히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작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자신의 십자가가 아니다. 주님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이 본문에서 말씀하듯이 사도 자신의 강한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여전히 약하고 오로지 주님을 십자가에서 건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된다. 즉 사도는 한시라도 십자가에서 떠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이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가 아니면 동일한 성령을 받는 성도라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