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
*1592년 방콕타임즈...나레수언폐하 임진왜란 참전결정...
역사를 주의깊게 보다보면 전혀 얘기치 못한,엉뚱한 곳에서 한반도와 연관된
사실을 발견하고는 흐믓해 할때가 있다.
물론 요즘 조금씩 문제되는 국제결혼의 원조,
가야 허왕비의 경우처럼 비교적 알려진 사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내용일수록
조금 더 관심이 가게되는건 한민족으로서 인지상정이다.
요즘 역사교육이 부실해서 한국전쟁이 일본과의 전쟁으로 안다는 뉘집자식들인지
참으로 암울한 초급학생들도 눈에 띄지만,
임진왜란 하면 모르는분은 없다.
그러나 태국군이 임진왜란에 참전한다....?
상상이 가시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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辯
근래 몇년사이에 중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 관심이 부쩍 많아져서 이 방면을 즐겨보고 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에 이쪽방면의 전사에 관심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전사도 시대별,지역별로 나누면 수많은 조합이 나오기에 사람들에게 별로 메리트가 없는
전사,즉 역사는 늘 존재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전문적인 접근은 배제하고 쉬운 글로 채웁니다.
......
1590년
아유타야왕국의 나레수언왕이 집권했다.
이때는 한창 버마에 압도당하고 있을 무렵이다.
아유타야가 공격당해 불탑에 뻘건 차압딱지 다 붙이고 그집자식은 버마에
고율의 사채이자를 빌미로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인질삼아 잡혀갔었다.
그러다가 귀국해 왕위에 오른 인물이 나레수언왕이다.
여기서 잠깐 동아시아 정세를 살펴보면...
불행하게도 동아시아의 역사는 중국과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대에 따라 조금씩 틀리지만 중국을 중심으로 각국에는 서열이 있었다.
각국에서 명청시대 중국으로 뭔 사절이 오면 국가의 서열순으로 도열을 한다.
마치 찬조얼마했느냐에 따라 독두광마 전통에게 가까운 의자를 배정 받듯이...
조선시대에 그렇게 뻔질나게 동아시아를 돌아다니던 유럽상인들이 조선에는 안오던 이유가 있다.
외국인눈에는 조선은 그냥 중국과 같은 나라로 보였다. 그래서 한양은 어딘지도 모르고
명나라 수도이던 남경이나 청나라 북경으로 향했다. 불행하게도 사실이다.
하여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나레수언왕이 들었다.
타이의 특징은...블러핑과 디프로매틱에 강하다는게 역사적인 느낌이다.
타이가 외교력부재라는 소리 들어보신적이 없으실것이다.
사통팔달 타이의 지정학적인 특성상 포용력과 유연함이 없었으면 팟퐁도 없고
덤핑패키지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레이처럼 영연방이나 코친차이나후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역대 중국과의 관계는 유연하다 못해 오일마사지 이백번쯤 받은것처럼 매끄러웠다.
그래서 한가지 외교적인 액션을 취한다.
"명 황제여...형제국으로서 임진왜란에 참전해서 왜놈을 눌러주겠소...."
-위에 기술한바대로 국제역학적인 이유로 전쟁 당사자인 조선정부와 협의한게 아니고
명나라와 협의한 이유가 있다-
사실 타이는 조선보다는 일본과의 유대가 강했다.(지금도 그렇지만)
아유타야에 조선상인은 한명도 없지만 일본상인은 리틀도쿄를 만들어 흥청망청 댈 정도였다.
판단하건데 앞에도 기술했다시피 외교적인 제스춰였을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의 한국정부도 제대로 못하는 유연함을 몇백년전 아유타야시절에 제대로 구사하고 있었다.
이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기록된 내용이다.
상상이 안가지만 코끼리부대와 창병으로 이뤄진 야유타야군이 진주성이나 평양성전투에 투입된다고
생각하면 한마디로 코미디이다. 다른건 다 놔두고 임진왜란,정유재란까지 겨울을 몇번이나 넘기는데
부실한 월동장비로 죄다 얼어죽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력은 어디까지나 창병과 도刀병이다. 아유타야 시절까지만해도 중국남부에서 내려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유목민기질과 약탈경제적인 습관이 남아있었다. 따라서 전투력은 무시할게 못되었다.
나중에 동남아의 문화와 합일하여 늘어진 농경민족화되어 전투력이 순식간에 거덜나는데
이러한 특징은 한마디로 [동남아시아化]하고 표시한다. 이는 거의 모든 동남아시아의 거주민족의 특징이다. 마치 몽골의 투사적,유목민적인 기질이 한족의 거주민족인 안락한 특성에 융화되어 전투력 거덜났듯이...-
타이여자(아가씨)가 한국와서 가을부터 오돌오돌 떨듯이....왔다면 그들도 기후적응때문에 무척 고생하였을것이다.
명나라는 이런 제의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우매한 우월함의 발로로 뀡총잡고 어영부영 내려오다 왜군에게 신나게 깨지고 깜짝놀라 몇백리나 후퇴하여 꼼짝도 안하던것을 보면 수긍이 간다.
물론 나레수언도 계산에 다 넣은 행위였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연원이 400년뒤에 실현된다.
한국전쟁때 보병 1개대대(연인원4000명)와 함정 3척,공군수송대로 이뤄진 전투단이
한국땅에 발을 디뎠고 포천,김화전투와 기타 지원작전에서 13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전투에 임하였고 지금도 포천에는 태국군 참전기념비가 있다.
나레수언왕이 지하에서 본다면 감회가 남다를것이다.
...어...쟤들.....진짜 갔네....
비록 코끼리부대는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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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예가 하나 더 있음을 예전에 운남성 국민당군 철수과정을 소개한글에 썼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타이완의 장개석은 국민당군을 파견하겠다고 미군에게 제의했다.
물론 장개석의 이런 고성방가를 미군이 달가워하지는 않을것임을 우리 머리나빠도
잔머리의 대가 장씨아저씨는 다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국민당군의 참전은 중공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하므로...(결국 개입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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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타이 아유타야군의 침투용 반잠수 코끼리...
첫댓글 곡사마;;
아 난또 곡길희 80마리쯤 보내서 원균의 수륙양공작전 실현될뻔한줄알았네
흐음...본문에 '중국에 사신이 오면 서열대로 배열한다'라는 문장과 '서양인 눈에는 조선과 중국은 동일한 나라로 보였다'라는 문장의 조합이 관심이 가는데, 이게 좋은 의미인가요? 나쁜 의미인가요? 갑자기 조선의 서열이 궁금해진다능...
"중국"은 '조공국'들은 '서열'에 따라 '배열'한 후에~ '의례'를 행했는데, 이를 테면~ '관료'들의 '품계'를 정하는 것과 비슷했죠^^; "조선"은 '조공국'들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았습니다!!! 다음이 "안남(베트남)"이었죠^^;; "중국"의 '문헌'에 뻔질나게 '등장'하는 '문구'가~ "조선은 내복(內服)과 같다<중국과 조선은 거의 한나라>"였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하하..그렇군요. 이것을 위상이 높아서 좋다고 해야 하는지, 속국화가 심하다고 해야 할지... 뭐 지리적으로도 조선은 다른 조공국들과는 차원이 다른, 반드시 끌어안거나 없애야 할 나라이긴 하겠죠;;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당시는 "중국"이 엄연히 '국제질서'의 '중심'이었고, '중국화'가 '문명화'의 '척도'였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세계'가 '서구문명'을 '척도'로 삼고 있는 것처럼요^^;;; 이런 측면에서 보면~ "중국"과의 '친밀도'는 대단한 '플러스 요인'으로 볼 수 있고,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하고 '국체(國體)'를 '유지'하는데~ '필수 불가결'의 '요소'였다고 생각됩니다^^~ 또 "중국"과의 '조공무역'의 '이익'이나~ '선진문화 도입'에도 '유리'했구요^^~~
"조선은 내복"이라는 말은 "조선은 문화적으로 중국과 대등하다"는 말로도 볼 수 있고, "중국"과 '친근'한 "순이(順夷, 순한 오랑캐)", "소화(小華)"로써~ '정벌'과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중화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흔히 '속국'임을 '강조'하며 "조선"의 '외교정책'을 '폄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너무 '이상론'에 가까운 '입장'에서 본겁니다ㅡㅡ; "미국"의 '속국'처지인 우리 '후손'들이 너무 건방진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봅니다ㅡㅡ;;
전부터 궁금한게있는데 -_-; 해동천자님은 왜그렇게 명사에 ' ' <- 같은 따옴표를 많이쓰세요?;;
어찌보면 조선은 지금의 대한민국보다도 국제적 위상이 높은 국가군요. 음, 이런 말 함부로 하기가 힘들지만(조선빠, 사대주의자로 몰릴까봐) 해동천자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伊達政宗 // 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렇게 됩니다ㅜㅜ 이상하고 불편하신가요???^^;
단순비교는 쉽지않겠으나 지금으로 보자면 대략 미국과 영국의 관계쯤으로 보면 될려나...(이건 꼬붕짓이 더심한 케이스던가;;)하여간 뻔질나게 사절단 보내서 조공하고 하사품 수십트럭받아가고 황제생일에 조공, 황후생일에 조공, 태자태어나면 조공, 황족 죽으면 조공 신년되면 조공 뭐 하면 조공 올때마다 조공품의 수십배를 하사품으로 내리느라 명국조정에서도 조선의 조공횟수를 조절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분분할 만큼 조선은 명국의 맹방이었음이(뭐 이걸 갖고 화교놈이 세운 국가 후손들의 더러운 사대주의다 라고 떠드는 분들도 적지 않지만은)확실한거지요
조선이 명조내내 조공국중 최고서열을 유지했던거야 아는분은 다 아실거고...물론 왜국또한 명국 천자의 책봉을 받았던 적도 있긴 하지만 조선과는 다른케이스였으니(명조에서 왜국을 보는눈이 조선을 보는눈과 확연히 달랐던것도 있었고)...이렇게 비교하면 가장 쉽겠군요 명국천자는 아버지 조선국왕은 큰아들 안남국왕 둘째아들 그이하 서열대로...
그러니까 한번 고개숙이면서 금반지 한돈을 주지만, 돌아갈때는 다이아몬드 한트럭 얻어오는 건가요?
곡사마~~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투가 더 재미있습니다. 특히 그동안 딱딱한 서술위주로 글을 쓰시던 왕마귀님이 이런 글을 쓰시니까 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저는 글을 쓸때 개인적인 견해를 넣기보다는 "어떠한 역사적 사건 내지 사실이 있었다.'라는 점에 중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
동남아 군대 얘기 나올 때 투멘XX씨 떠오르는 사람은 저 하나 뿐인가요?
ㄷ
1차대전때 까깝지도 않고 먼나라 독일에게 선전포고도 했는데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는 단순한 정치적인 이유로 보면 됩니다. 그런식으로 하면 일본도 독일에 선전포고 했습니다. 그당시 시암은 영국과 프랑스에 둘러쌓인 상황인지라 영국과 프랑스의 편을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웃기게도 시암의 대-독일 감정은 대-영국, 프랑스 감정보다 훠어어얼신 더 좋았는데도 말입니다. 특히 프랑스는 자기네 영토를 철저하게 뜯은 원수에다가 나중에 2차대전에 '자의'로 싸울 정도로 이가 갈리던 상대인데도 말입니다.
한가지 태클입니다. 나레쑤언당시 아유타야의 화기화는 상상외로 높았습니다. 다들 간과하시는 것 중 하나가, 일본의 그 유명한 조총은 동남아시아를 거쳐서 온 것입니다. 버마의 뜨빈슈웨티-버인나웅, 아유타야의 나레쑤언대에 벌어진 시암-버마전쟁에서 머스킷은 매우 중요한 역활을 했습니다. 버마는 내부통일과 아유타야 공격, 그리고 나레쑤언의 반격으로 인한 짧은 분열기에 머스킷을 주무장으로 한 포르투갈 용병이 대활약을 했으며, 나레쑤언의 공격직후 버마의 분열때는 포르투갈 용병그룹이 한 지역을 차지하여 중요세력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한편 아유타야는 나레쑤언이 버마를 공격할때 나레쑤언이 '친히' 2.25미터의 머스킷을
사용하여 곡사마 위에서 적장을 죽였다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http://www.m-culture.go.th/en/index.php/articles/the-important-days-in-thailand/45-king-naresuan-the-great-day.html 동남아의 화기화는 보통분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의외로 높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태글. 나레쑤언 당시 아유타야의 군사력은 절정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유목민 적인 습관이야 13~14세기 이야기고 -ㅅ- 버마-아유타야 전쟁이 한창이었던데다가, 적인 버마는 그당시 전성기를 누리면서 포르투갈인들과 싸워 이기고, 또는 용병으로 고용하며 기술을 배우던 상대였습니다. 또한 종속지역인 말레이반도 또한 포르투갈 세력과의 오랜 전쟁을 했던 지역이니, 서구의 군사기술은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최전성기를 누리던 버마와 40년 이상 전쟁을 치루던 상태였습니다. 물론 버마에 종속을 당하지만 1592년 당시는 종속상태에서 벗어나고, 버마와 캄보디아의 협공을 모두 이겨내고
북쪽의 란나(치앙마이 지역)을 종속국으로 두고, 버마를 역공하기 시작해 버마의 수도인 버고와, 따웅우조의 발상지인 따웅우까지 역공을 할려던 시점이었습니다. 결국 이 공격으로 최전성기를 누리던 버마는 산산조각이 나서, 따웅우-삐-아라칸-포르투갈 용병으로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 아유타야의 그당시 군사력은 아시아에서도 손꼽힐정도의 수준이라고 봐야 합니다. 물론 임진왜란에 참전하면 얼어서 다 죽었겠지만 말입니다. 당연히 중간 수송과정은 없다고 생각할 지라도(먼산)
얼어죽는다는 표현이 참 재미있군요 ㅋㅋ
님이 본좌
초록마르스/ 대략 그렇게 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설마 금반지 한돈과 다이아한트럭까지야 되겠습니까마는 ㅋ;;명국 조정에서 황제한테 조선사신들한테 하사품 싸주는 돈이 만만찮다, 가만보니 얘들이 이거노리고 계속 조공하는거같으니까 조공횟수 줄여라고 압력넣어야합니다 했을정도니 만만찮은거겠죠? ㅋㅋ
저는 좀더 넓은 시각으로 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조공에 대한 회사의 이익만을 논하는 것은 좀 좁은 시각이 아닐까요???^^;; 당시의 조공은 중국과의 무역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조공하지 않는 나라와는 무역을 전면금지하여~ 외국에 경제적, 정치적 압박을 가하는 방법으로~ 주변국들을 책봉체제에 편입시켜 나갔으며, 조공에 대한 회사나 사신에 대한 은상 이외에도~ 사신단을 따라나선 상인들에 의한 무역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런 상황의 부산물이 조선의 재벌이었던 역관들과~ 의주 만상의 임상옥과 같은 거상들이죠!!!^^~
조공 사절단에 끼이는 무역상들얘기를 제가 빼놨군요 당연히 아실걸로 알고 글에는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만은 ^^;;
그렇습니까???^^; 사신단을 따라간 상인들의 거래 이외에도~ 모든 중국과의 무역, 상거래는 조공이 필수조건이었습니다!!!^^;; 일본의 경우도~ 왜구의 횡횡과 영파왜구사건 이후로~ 명나라가 폐관절공의 조치를 취하자~ 변칙적인 무역형태로 밀무역과 왜구가 성행했었고, 훗날 척계광 등의 노력으로 왜구짓도 여의치 않아져서 많은 불만이 누적되는데~ 이것이 임진왜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었죠^^;;; 포르투갈의 경우도~ 조공을 가장하여 중국과의 무역을 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