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는 근세초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진행되었는데
16세기를 중심으로 한 제 1차 인클로저운동은 모직물 공업의 육성에 따른 양모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양(牧羊)의 목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18세기로부터의 제 2차 인클로저운동은 농업개량과 농업경영의 능률화를 위한 것이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어느 경우나 지주층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중세 농촌의 공동체적 성격이 사라지고 빈농이 토지를 빼앗겨 농촌을 떠나는 현상이 일어났다.
제 1차의 경우 이러한 빈농의 대량이동현상(rural exodus)은 큰 사회문제를 야기시켜 인클로저 금지조치가 여러번 취해졌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제 2차의 경우는 산업혁명으로 새로이 일어난 공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함과 아울러 기계의 발명으로 농업자체가 기계화하여 인클로저운동이 촉진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업자본가가 농업노동자를 고용하여 농업생산을 하는 농업의 자본주의화가 진행되고 중농층인 자영농(yeoman)이 거의 몰락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농업혁명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에서도 지방에 따라 인클로저운동이 행해지기는 했으나 영국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았고
따라서 프랑스는 소토지 소유자 농민의 나라로 머물렀다
출처http://blog.naver.com/inside_of_me/20010368959
인클로저란 말은 목양을 하거나 농업개량을 목적으로 울타리를 치는 것을 말합니다
1차 인클로저 운동은 15세기 말부터 16세기 크게 전개됐는데 젠트리가 주축이 되었고
많은 빈농이 경작지를 잃고 농촌을 떠나 큰 사회 문제가 되엇다고 합니다. 2차 인클로져 운동에선 산업혁명으로 인해 농업이 기계화 되는 과정에서 자영농이 몰락하고 일꾼을 고용하는 옹업자본주의가 성행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작품 '돈키호테'에서 나오는 양떼와 풍차는 인클로저 운동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토마스 모어가 인클로저 운동을 두고 남긴 재밌는 말이 있는데 '사람이 양을 먹는게 아니고 양이 사람을 먹는다' 라고 했다는군요^^;
첫댓글 왜 프랑스는 영국처럼 인콜로저 운동이 규모가 크지 않았을까요. 그런것을 찾아보는 것이 더 의미있지 않을ㄲ가요.
프랑스는 대부분의 농민들이 농노 신분에서 해방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목양의 중심지는 영국이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고, 독일 프랑스는 약 일세기후에 장려하기는 했지만 크게 성행하지는 못했던거죠. 당시 영국은 프랑스의 경제를 따라잡기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정치 군사 경제 모든면에서 앞지르는게 영국의 목표였던거죠. 당시 프랑스 경제는 영국에 뒤쳐지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