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야기 넷
김정호
달은 밝고 밤공기는 싸늘하다. 정월 대보름이 지난 겨울 날씨가 고추같이 맵다. 러시아를 침공하는 나폴레옹 군대 병사들처럼 온몸을 방한복으로 중무장하고 아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밤길을 걷는다. 지난해 늦여름 때 반바지 차림으로 걷기 시작한 지도 반년 가까이 흘렀다. 큰 불평 없이 동행해주는 아내가 고맙고 사랑스럽다. 대구 지상철 3호선 노선이 지나는 팔거천을 따라 매천역에서 매천시장역까지 걷기에 아주 적합한 길이다. 어쩌다 간간이 짧은 대화를 나눌 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수많은 대화를 속으로 나누고 있다.
달
정월 대보름 겨울밤의 달빛은 유난히 밝다. 구름 한 점 없는 겨울밤 달을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 새색시 시절 동그란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던 엄마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무척이나 복스러웠던 모습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우리가 엄마를 모시지 못하고 요양원에 입소하여 계신다. 구순을 넘기고 남은 생을 하나하나 정리하시는 엄마가 갑자기 그리워지고 보고 싶다.
저 밝은 보름달도 며칠 전에는 손톱 같은 반달이었는데 또 며칠 뒤에는 눈썹을 닮은 달로 변할 것이다. 달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데 우리가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달리 보인다. 저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볼 때까지 엄마가 살아계실까. 지난 정원 대보름 달님에게 엄마의 만수무강을 빌어도 보았지만, 점점 쇠약해지는 엄마를 어쩔 수가 없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던가. 언젠가는 편안한 길로 가실 엄마, 저 달만 하염없이 쳐다보면 걷는다.
오리
한여름 팔거천에는 오리가 많다. 몇 마리씩 무리 지어 군데군데 모여서 살아가고 있다. 지독한 강추위에 강물은 얼어붙었다. 물에 사는 오리들은 생활터전을 온통 겨울 추위에 빼앗겨버렸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이 겨울을 나고 있을까. 지난 초여름 어미 꽁무니를 쫓던 새끼 오리들은 아직도 어미 품속에서 편안한 밤을 보내고 있을는지 궁금하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은 주인이 때맞추어 먹이를 주지만, 야생 오리들은 스스로 먹이를 찾아야 한다.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자맥질을 하던 녀석들이 이제는 동토가 되어버린 겨울 강가에서 어찌 지내고 있을까 걱정이 된다. 이 시련의 겨울을 버티어내고 강물이 풀리는 날이면 다시 팔거천 변으로 돌아오겠지.
영춘화
봄을 맞이한다는 영춘화迎春化는 봄에만 피는 줄 알았다. 지난해 겨울이 시작되는 12월 초 언저리였다. 강둑을 따라 걷는 중에 난데없는 노란색 꽃을 보았다. 영춘화 꽃이다. 여기 철모르는 녀석이 또 하나 있어 지나는 길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곧 매서운 겨울 한파가 닥쳐올 터인데 어쩌자고 지금 꽃을 피웠단 말인가. 잠시 잊고 지내던 영춘화, 철없이 초겨울에 꽃망울을 터트린 녀석은 지금 어쩌고 있을까.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서 봐서는 필시 동사하였겠지. 불쌍하고 가련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지만, 누구를 탓하랴. 꽃나무의 잘못인가. 일찍 밀고 올라온 꽃눈인가.
눈치 없고 앉을 자리 설 자리를 구분 못 하는 내 꼴을 닮았음인가. 필시 이 강추위에 동사하였을 철없는 영춘화에게 애달픈 조사弔詞라도 써 보내고 싶다. 그래도 춘삼월 호시절이면 영춘화는 만발하겠지. 세상에는 철없는 녀석이 더러 있어야 살맛에 이야깃거리도 생기는 법이다.
3호선
꿈의 열차가 지나간다. 매일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걷는다. 대구 지상철 3호선 옆길을 걷는다. 흔히 하늘 열차라고 부르는 3호선은 지상 15m 높이에서 괘도를 따라 달린다. 겨우 세 칸을 연결하고 달리는 열차다. 어린이 만화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앙증맞은 열차다. 매일 그 열차를 본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었으련만, 하늘 열차만 보면 가슴에 울렁증이 되살아난다.
상주 땅 소백산 준령 산골에서 자란 나는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기차를 그림으로만 보았다. 기차를 타고 도회지에 나가면 모두가 출세하고 잘 사는 줄 알았다. 꿈처럼 막연히 도시생활을 동경하였다. 중학교를 부산에 있는 학교를 입학하면서 처음 타보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도시생활을 하였다. 허나 꿈은 꿈이었다. 없는 사람들의 서러움은 도시생활이 더 크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때가 언제 이야기인데 아직도 꼬마 열차만 보면 가슴이 설렌다. 머리에는 온통 흰서리를 이고 있는데 아직도 미련이 많이 남았는가. 그래도 밤하늘을 달리는 꼬마 열차만 보면 눈길을 쉽게 거두지 못한다. 가끔씩은 일탈도 꿈꾸어 보지만, 어림이나 있는가. 구름처럼 살아가는 보헤미안의 기질이 내 속에 숨어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