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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자리
“국거리는 양지머리가 낫지요. 산적 거리는 꼭 등심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호호호, 그럼요, 한우니까 고기가 이렇게 좋죠. 이 동네서 사장님처럼 매너 좋으신 분이 어디 또 있겠어요? 사모님은 차암 좋으시겠다아. 그쵸오?”
거울을 보고 있는 오십대 중반 정도의 남자는 청바지를 입은 엉덩이가 럭비공처럼 단단해 보였다. 내 애교를 견디다 못해 고른 사골을 골절기에 소리 내어 자르는 동안, 뒷 목덜미에 남자의 강한 시선이 박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냉장고에서 박카스 한 병을 꺼내왔다.
“사골은 꼭 물에 담갔다가 고우셔야 해요.”
남자는 박카스 한 병을 두 모금에 마시더니 가게를 나갔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 남자는 집에 가서 바가지를 썼다고 마누라한테 바가지를 긁힐 것이다.
내 예감은 적중률이 매우 높은 편이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로 아홉 자 높이 네 자의 냉장 진열장이 있다. 진열장은 삼단으로 되어있으며 식욕을 돋구도록 붉은 등이 켜져 있다.
맨 아래 칸에는 소 족발과 사골 뼈, 꼬리 세트나 내장 따위의 부산물들이 쟁반에 담겨있고 둘째 칸에는 등심이나 불고기감, 국거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문을 제일 자주 여닫는 윗 칸에는 삼겹살이나 목살, 찌개거리나 국수사리처럼 갈아 놓은 민찌 등이 수북이 쌓여있다.
고기를 전부 썰어서 진열하고 도마나 육절기를 청소하고 장갑마저 빨아 널고 나면 나는 진열장과 육절기 사이의
칠십 센티미터의 공간사이에 지름 삼십오 센티미터의 둥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곤 한다.
그렇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굳이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도 아, 지금은 몇 시쯤 됐겠구나, 저절로 알아지곤 한다.
밝은 세상 안과의 미스 장이 길 건너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이면 그때는 열시가 틀림없다. 옅은 분홍기가 있는 가운을 입은 미스 장은 매일 같은 시간에 나와서 편의점을 이용한다. 어디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나봐? 했더니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열시가 되면 저 길 건너편에서 미스 장의 속삭이는 밀어들이 들려오는 듯해 나는 귀가 간지럽고 온몸이 나른해지곤 하였다.
내 가게에는 한 번도 들른 적이 없지만 숏 다리에 털이 많은 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 보이면 영락없이 열시 사십분이다. 약속다방 최 양은 시도 때도 없이 가게 앞을 지나다니는데 오후가 지나고 저녁이 될수록 그녀의 종아리는 창문너머로 보기에도 딱딱하게 알이 서곤 하였다.
탕수육 거리를 사러온 대동관 주인이 눈을 휘둥그레 뜬다.
“우와아, 한별이 엄마 칼솜씨 많이 늘었네? 처음엔 몇 번씩 칼질을 하더니만 이젠 아주 한 번에 칼같이 자르는구만.”
한 근, 정확히 육백 그램을 베어 싸주거나 많아 잘랐다가 몇 번씩 떼어낸다면 손님들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육백 십 그램쯤 베어 저울에 올려놓은 뒤 이삼십 그램 한 덩이를 더 올려놓았을 때, 손님들은 드디어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어느새 내 손은 원하는 무게를 정확하게 잘라내는 저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세상일을 저울에 올려놓고 평가하는 나쁜 버릇에 길들여져 있다. 반근짜리 손님은 별 볼일 없는 반근짜리 인생으로 보이고, 한 근 손님은 한 근 가벼운 인생으로, 열 근짜리 손님은 갈비짝처럼 묵직하고 튼실하게 보인다.
그리움이나 미움 같은 감정도 올려놓기만 한다면 정확한 그램 수로 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을 저울위에 올려놓고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들이 필요했다. 나에게 삶이란 단지 오늘을 견디는 것, 바로 그것뿐이다. 아직 더 견뎌야 했다. 그러나 내게 삶을 견디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아직 나에게도 현재형으로 쓸 수 있는, 현재형으로 밖에 말할 수 없는 추억이 있다. 어쩌면 그 추억을 되새김질하기 위해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구상회 할머니가 들어서고 있다. 숱한 생각들이 한꺼번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상가 사람들은 오래 전 대구상회라는 포목점을 했던 칠순을 후딱 넘긴 할머니를 대구상회 할머니라고 부른다. 시장 뒤 단독주택에 온갖 화분을 가꾸며 혼자 사는 할머니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멋 내는 것을 좋아한다. 한시도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잊지 않는 타입이다. 립스틱 색깔도 볼 때마다 다르고 손톱엔 항상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자주 가게를 들러서 소가 들어오면 다음날 아들이나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갈비를 사가곤 하였다.
오후가 되기 전에 부탁한 갈비를 손질해 놓는다는 게 그만 막연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느라 잊고 있었다. 박카스를 탁자위로 내려놓으며 잠깐 기다리시라고 말하면서 미안하게 웃어 보였다.
“어젠 딸네 집에 다녀왔는데 말야.”
할머니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골절기를 작동시키는 소음이 실내에 가득 찼다. 소음을 이겨낼 목청은 없었는지 할머니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할머니도 책을 다 읽으시네요?”
“그럼, 늙은이라고 책도 안 보는 중 알어? 죽을 때까지 그저 사람은 책을 봐야 한다구. 늙어서 무식하면 그것도 병이야 병.”
“무슨 책인데요?”
“이거? 오바마 대통령 얘기야. 안즉 안 봤어? 늙어서도 정치 얘기는 재밌드라구. 어제 외손녀가 읽어 보라구 주드만.”
“숙자는 잘 있구요?”
숙자는 할머니가 기르는 요크셔테리어다. 개가 이가 빠졌으니, 열 살이 넘었다는 얘기를 들은 지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열 살이 넘었다고만 하신다. 아마 할머니의 제일 친한 친구요 유일한 말벗일 터였다.
지난번 할머니가 숙자를 데리고 왔을 때, 부쩍 수척해진 숙자를 슬며시 저울에 올려놓아 보았다. 삼 쩜 삼 킬로. 다섯 근 반. 전보다 오백 그램이 줄었다. 한 근 가까이 줄어든 살은 어디로 갔을까? 저울위에서 숙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었다.
음식 냄새를 맡으면 코를 벌름거리다가 침을 꼴깍 삼키는 것이나, 한숨을 깊게 쉬거나 눈치를 보는 걸 보고, 어쩌면 개에게도 영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 그 애야 잘 있고 말고 할 게 뭬가 있어, 늘 그렇지. 갈비를 반은 갸가 먹는데두 요즘은 부쩍 부실해지는 것 같어. 내 몸이 요즘 꼭 그렇다니까, 아주 속상해 주욱겄어. 내가 죽기 전에 숙자가 먼저 죽어야 할 텐데.”
“할머니 아직 정정하고 고우신데요 뭘.”
“그랴? 그래 보여?”
할머니와 나의 공통점은 미망인이라는데 있고 다른 점은 할머니는 무척 유복하고 나는 지지리도 복이 없다는 점이다.
내게 우월한 게 있다면 할머니 말대로 새파랗게 젊디젊은, 아직 몇 번이고 주소를 옮길 수 있다는 나이 밖에는 없다.
어쩌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쳐 할머니의 동공을 들여다보았을 때 얼핏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었다. 그것은 환시가 틀림없었을 테지만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미리 감지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보았을 때 검은 그림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지층이 깊이 쌓여있다고 나는 무턱대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뒤로 할머니가 갈비를 사러 올 때마다 어쩌면 이것이 할머니가 세상에서 사는 마지막 갈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기 근이나마 넉넉하게 저울 위에 올려놓곤 했었다.
봉지를 받아든 할머니는 갈비 값 외에 이만 원을 더 얹어주었다.
“이쁜 옷 좀 사 입구 그랴, 젊은 여자가 옷이 그게 뭬야?”
나는 고개를 숙여 새삼스럽다는 듯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남색 추리닝. 나는 계절에 상관없이 한 벌에 사만 오천 원 하는 무릎과 엉덩이가 튀어나온 두 벌의 추리닝만 입고 있다. 겨울에는 그 위에 잠바만 걸쳐 입는다.
남편은 나의 그런 고집스런 옷차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었다. 내가 옷차림을 바꾸었다면 그는 떠나지 않았을까.
대구상회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절둑거리며 가게를 걸어 나갔다. 나는 문밖까지 할머니를 부축해 드렸다. 나는 대구상회 할머니의 뒤뚱거리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어쩌면 저 검은 비닐봉지가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쟁반 바닥의 팔 수 없는 쇠고기 부스러기들을 모아서 미역국을 끓였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
사람이 순수하다는 것은 스스로 쉽게 상처를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상처를 빨리 흡수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편이 바로 그런 남자였다. 무역회사에 다니던 그는 바이어를 놓치지 않으려고 남의 가정을 파탄 지경으로 몰아넣는 사장에게 실망해 사표를 던졌다.
한 번 합석했던 여직원을 잊지 못한 바이어가 이 년 만에 찾아와 다시 그녀를 불러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녀는 결혼하여 직장을 떠난 뒤였다. 사장은 그녀를 찾아가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며 만나주라고 반 협박, 반 공갈로 바이어의 호텔방에 밀어 넣었다. 훗날 문제가 되자 사장은 남편에게 허락을 받은 줄 알았다고 발뺌했다. 오히려 혹시 다른 남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장의 얼굴에 남편은 월급봉투를 집어 던지고 나왔다.
가난하더라도 바르게 살자고, 세 식구 오순도순 살자고 낙향해 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난 시골 생활을 해보지도 않았고 축사를 구경해 본 적도 없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기는커녕, 죽은 생선 머리를 토막 낼 때도 멈칫거리는, 남편 말대로 온실속의 콩나물 같은 그런 여자였다.
하지만 그가 늦게 들어오는 밤 텔레비전이나 보고 낄낄거리며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분만하는 송아지를 받아야 했으며, 축산모임 총무로 항상 바쁜 남편 대신 소똥을 치워야 했다. 농가부채 탕감을 외치며 데모하러간 그 대신 사료를 못 주겠다는 조합 부장과 딸아이를 업은 채 멱살잡이를 하고 싸워야만 했다.
조합의 이자와 사료 값 독촉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자식 같던 중소들을 빼앗기다시피 헐값에 넘기고 이곳 중앙상가에 농민후계자 정육점 간판을 달았을 때, 주변 사람들은 모두 미친 짓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 동네의 지역적 특성에 대해 자신했다. 윗 블록에 정육점이 두 곳 있긴 했으나 주변에 밀집한 식당가들이나 재래시장 주변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정열적으로 몸담았던 축산모임 사무실과 가깝다는 것이 그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다.
난산으로 죽어가는 소를 놓고 삼백만원부터 시작한 소 값은, 시간을 끌수록 점점 내려가 막상 숨이 끊어졌을 땐 십 오 만원 이었다.
단돈 십 오 만원!
그것도 싫으면 그만 두라고 돌아서는 업자한테 되려 차를 막고 통사정을 해야만 했다. 그 큰 소를 도대체 어디다 묻는단 말인가? 그래서 이를 악물고 시작한 가게였다.
개업하고 열흘쯤 지나 억수같이 비가 오던 날은 정말 단 한 사람도 손님이 없었다. 어차피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모든 걸 빚으로 시작한 가게였다. 물건은 얼마든지 밀어 주겠노라던 축산모임 회원들이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며 외상값 독촉을 해오자, 잔돈까지 톡톡 털어서 수금을 해 주고 난 뒤라 우린 하루를 굶었다. 이튿날, 해장국집에 육만 원짜리 소머리 하나가 팔렸다. 우리는 그 돈을 가지고 종합분식에서 만두국을 곱빼기로 사 먹었다.
그날이 바로 내 생일이었다. 국물을 후륵거리면서 그가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았다.
가게로 돌아 왔을 때, 가게는 폭탄이 터진 전쟁터처럼 온통 난장판이었다. 깨어지고 부서지고….
염려하던 일이었다. 불쌍놈, 백정이 된 놈을 도저히 그냥 둘 수 없다며 종친회에서 몰려와 한바탕 난리를 치고 간 뒤였다. 남편은 그날 소주와 제초제를 마셨고 삼일 후 영영 내 곁을 떠나갔다.
그때 나는 내 육신과 정신 모두 파기와처럼 산산조각 나버렸다고 생각했다. 현실에 대한 자폐감이 목울대까지 차버렸으며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는 수 천 수 만 송이의 목련이 흔들거렸다.
삶이 자꾸만 점멸하기 시작했다.
삼우제를 지내러 온 칠장사 너른 뜰에 목탁 소리가 내려앉았다. 빗소리는 점점 세차게 들렸고 침묵의 소리 저편에 바람이 피워 올린 안개비가 독경 소리를 파고들었다. 마당에 손수건이 떨어져 있었다. 신도중에 누군가가 흘렸나 보다. 비에 젖어 색상이 더 선명해진 손수건이 처연하게 비를 맞고 있었다. 향수를 몇 방울 떨어뜨렸던 손수건의 젊은 날은 즐거운 나날이었으리라. 주인이 버렸는지 잃은 것인지 빗물을 함빡 맞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남편의 넥타이에도 저 빛깔과 같은 것이 있었다.
남편의 죽음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이었다. 지가 무슨 쇠뜨기나 바랭이야, 제초제를 마시게….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누군가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하나 둘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한 뭉텅 잘려나가 버린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지금은 단지 터널을 지날 뿐이라고, 하루에도 수 십 번이나 뇌까리며 자신을 달래고 억누르며 살아야만 했다. 그러면서 내 안에 간직한 불빛들을 하나 둘 꺼내보는 일이 잦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사탕을 넣어둔 유리항아리 뚜껑을 계속해서 열어대는 아이처럼 나는 빤히 보이는 그 불빛들이 그리워 자꾸만 과거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나의 가슴속에는 슬퍼할 여유 있는 자리가 없었다. 희미해진 기억의 현기증 너머로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을 보았다. 신호등 앞에 선 자동차의 깜빡이등처럼 발길을 재촉하는 심장의 고동 소리도 들렸다.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의 길이었다.
상복을 벗자마자 얼마 되지 않는 조의금으로 소와 돼지를 사서 이를 악물고 다시 시작했다. 주변의 조롱을 비웃듯이 얼굴에서 화장기를 지우고 그동안 진 빚을 갚고, 단골들도 많이 늘리고 이만큼 꾸려나왔다.
개중에는 후계자가 죽었는데 아직도 후계자 정육점이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
팍팍한 입안으로 미역국에 밥을 말아 수저질을 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언니야? 잠깐만, 한별이 바꿔줄게.”
“엄마, 엄마야? 생일 축하 합니다아. 이모가 그러는데 오늘이 엄마 생신이래요. 한별이가 이렇게 축하드려요. 짝짝짝.”
수화기 속에서 한별이의 손뼉 치는 소리가 맑고 투명하게 들려왔다. 갑자기 가슴속에 바람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눈물이 떨어졌다.
한별이만은 정육점집 딸로, 백정의 딸로 키우지 않으려고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동생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돌아갈 친정조차 없어진 내게 김치며 밑반찬 따위를 챙겨주고, 분당에서 싸온 보따리를 잔소리와 함께 풀어내 냉장고를 가득 채워놓곤 하였다.
동생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반찬들의 대부분을 썩히고 어떤 때는 아예 통째 내다버리기도 했다. 동생이 알면 한별이처럼 종아리를 맞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밥은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는 거지?”
어느새 아줌마가 되어버린 동생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밥 거르지 않고 잘 챙겨먹는 거, 그거 아주 중요한 의무라는 거 알아 언니?”
나는 놓았던 수저를 들어 미역국을 휘저었다. 어느새 미역국은 미지근하게 식어 몽글몽글 기름이 떠 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날벌레들이 날아들었다. 살충제를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나는 문 밖에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그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깨달아지곤 하기 때문이다.
유리 전면에다 살충제를 뿌리자 날벌레들이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머리사랑 헤어 숍 주인여자가 나를 보고 조금 웃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험담할 때 유난히 생기가 돌았고 중앙상가의 모든 소문은 먼저 저 입술에서부터 흘러나와 빠르게 번지곤 하였다. 나는 그 여자가 말을 걸어 올까봐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 딸아이 몸에는 검고 푸르죽죽한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쯤 그 여자는 제 아이를 죽지 않을 만큼 패곤 했다. 그 때마다 나는 한별이 생각이 났다.
지난 봄, 그 여자가 친정에 간다며 소뼈를 사러 왔을 때 나는 삼만 오천 원짜리 등뼈를 오만원에 속여 팔았다. 그리고 아이를 불러 대동관에서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켜 함께 먹었다.
손님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나는 도마를 청소하고 유리문을 잠갔다.
유리문을 잠그면서 문을 이렇게 꽉 닫아버리면 슬픔이나 고통 따위가 들어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실내를 돌면서 스위치를 모두 내렸다. 실내에 어둠이 고여 들었다. 오늘 들어온 돼지들 때문에 냉장고는 혼자서 여전히 큰 소리를 내며 쉬지 않고 돌고 있었다. 또 하루가 지났다는 생각을 하자 어깨 위에 큰 돼지 한 마리가 올라탄 것처럼 발길이 아뜩해졌다.
굵은 빗물이 유리창 밖에서 수많은 빗금을 휘긋고 있었다. 한결같은 소리로 한결같은 굵기로. 빗방울은 물 위에 못을 박는 듯 아프게 떨어지고 있었다. 빗줄기들은 거칠고 난폭한 태도로 가로수들과 간판들을 쓸어가고 있었다. 실내 가득 비릿한 비 내음이 스며들었다.
건널목에 우산을 펴든 사람들이 몇몇 서 있었다. 해바라기가 프린트된 노란 치마가 얼핏 눈에 어른거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호등에 녹색 불이 켜졌다.
나는 진열장에서 어제 유치원 조 선생이 맞춰두고 간 소 족발을 꺼냈다. 토치램프를 켜고 압축을 하며 불을 적당한 크기로 서서히 맞추었다. 쐐액하는 소리가 잦아들면서 토치는 짧고 파란 불꽃을 내뿜고 있었다.
조 선생이 길을건너 가게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상념에 빠져 있다가 문 여는 소리에 놀라 허둥거리며 손님을 맞이했을 것이다. 대개 그런 경우 손님들은 다시 가게를 찾지 않았다.
거의 하루 종일, 작업할 때만 제외하고 창밖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눈인사를 해야 되고 손님이 오는 것이 보이면 외삼촌이 온 것 보다 반갑게 맞이하고, 용모에 대한 손님들의 착각을 요령껏 부추기거나 전혀 관심 없는 그네들의 사생활을 심각한척 물어줘야만 한다. 그래야 손님들은 나를 믿을 수 있는 후계자 한우 정육점 주인으로 취급해 주는 것이다.
게다가 소고기 수입이 늘어나면서 한우에 대한 신용을 얻는 일이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 284번지, 박 아무개네 농장 삼백칠십 킬로 이년생 암소이며, 전화번호까지 버젓이 적혀있어도 으레 이거 한우 맞아요? 하고 물어오기 일쑤다.
한우를 차에 실은 채로 가게 앞에 몇 시간씩 세워 놓아야 하고, 소머리나 족발은 이틀 쯤 손질하지 않고 잘 보이는 입구 쪽에 진열해서 한우임을 광고해야 했다. 누런 한우 털을 탁구공만큼 붙여 놨다가 보는데서 토치램프로 손질해 주면 절로 고개를 끄떡이기 마련이니까. 그런 날 매상이 뛰는 건 당연하다.
계산을 하면서 조 선생은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좀 깎아주시면 현금으로 계산할 수 있는데.”
족발 값은 칠 만원이었고 조 선생이 지니고 있는 현금은 육 만원이라고 했다. 현금으로 육 만원을 받으면서 지갑에 빼곡히 들어있는 만 원권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조 선생은 가슴골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목선이 깊이 패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 조 선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한별이가 곁에 있더라도 그 유치원에 맡기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길을 건너 제과점에 가서 갓 구워낸 따끈한 식빵을 사왔을 것이다. 그러나 밖을 내다보면서 도무지 저 폭우를 뚫고 가게 문 밖을 나갈 엄두가 생기지 않았다.
오늘 점심은 상가 건물 내에 있는 음식점 중에서 시켜먹어야 한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쯤 중앙상가나 건너편 하나로 상가 내에 있는 식당에서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정머리 없다는 말이 나돌고 그네들 또한 윗 블록에 있는 정육점이나 대형마트 정육부를 이용하려 들것이다. 나는 대동관으로 전화를 걸어 울면 한 그릇을 시켰다.
대동관 청년은 울면 한 그릇을 내려놓고 가게를 나갔다. 세워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청년은 또 다른 곳으로 배달을 가는지 약국과 편의점 사이로 올라갔다. 청년의 오토바이에서도 내 가슴에서처럼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꼬리를 물었다. 간이 맞지 않는 울면은 이미 불기 시작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하나로 상가 이층 계단에서 국일관 갈비 사장이 우산을 들고 한 남자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간판을 달고 가게 문을 연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남편과 나는 국일관 갈비 사장을 찾아 갔었다. 국일관 숯불갈비에서 우리 후계자 한우 정육점 고기를 써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물론 최고의 육질과 파격적인 가격 제시도 잊지 않았다.
백오십 근. 규격 돈 한 마리 무게의 육중한 그는, 이미 윗 블록에 있는 현대정육점과 계약을 하고 있으므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음성은 영농자금을 빌리러 온 농부를 냉대하는 말단 농협 직원처럼 싸늘했다.
어쩐지 나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음흉한 남자의 눈빛처럼 질척해 보였다.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나는 남편의 팔짱을 꼭 낀 채 갈빗집을 걸어 나왔다.
남편이 내 곁을 떠나고 난후 국일관 숯불갈비에서 전화가 왔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방에서 그를 만났다. 작업한 뒤라 기름기가 번들번들하게 묻은 옷을 갈아입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입고 있던 추리닝차림 그대로 갔다.
그는 요즘 장사가 잘 되느냐, 뭐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은 그나마 남편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어서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하다고 대꾸했다. 그는 두툼한 턱 밑에서 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자신의 식당에서는 하루에 사백인분은 너끈히 나간다고 했다. 가장 큰 거래처가 될 것이다. 몇 년 만 거래해 준다면 어쩌면 남편 소원대로 다시 소를 기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현대정육점과 오래 거래했지만 앞으로 주문을 내 가게로 하겠다고 말하며 그는 조금 웃어 보였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한 뒤 나는 엽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엽차에서는 게으르게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어내 얼굴을 코앞에 들이민 그가 오늘 밤에 시간이 있느냐고 음흉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약속 다방 최 양이 나와 국일관 사장을 자꾸만 흘끔 거리는 게 느껴졌다. 언젠가 최 양이 국일관 사장이 요구했던 체위를 견디지 못하고 여관방을 뛰쳐나왔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최 양이 배달 보자기를 싸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건너보았다.
내 내부에 도사린 무언가가 이윽고 자신을 폭발시킬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르는 것을 삭히느라 애써 말소리를 낮추었다.
나는 심하게 얽은 자국이 난 사장의 번들거리는 얼굴을 정면으로 꼿꼿이 바라보고 시간은 없다, 그리고 주문은 받지 않겠다며 딴에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방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자꾸만 휘청거려 발을 헛디뎠다. 계단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최 양이 다가오더니, 언니 저 사람 왜 그래요? 하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녹색불이 켜지길 기다렸다가 길을 건넜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나는 생각했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문은, 그가 떠난 바로 그날로 중앙상가나 길 건너 하나로 상가까지 불불이 번졌을 터였다. 못이 뽑혀져 나간 자리에 남은 녹슨 자국처럼 과거의 흔적은 역시 지울 수가 없었다.
다음주, 국일관 주방장이라며 등심 두 채, 갈비 네 짝 등 많은 고기를 가지러왔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우리 가게에서는 해줄 수가 없으니 다른 곳에 가서 주문하라고 말했다. 여기 가면 잘 해줄 거라고 사장님이 그러시던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모지를 든 주방장이 나갔다. 문득 사장의 입술 끝을 약간 치켜 올린, 얼굴 전체를 일그러뜨리며 웃던 표정이 생각났다. 귀밑으로 땀이 흘렀다.
그가 떠난 뒤, 이유도 없이 왼쪽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가끔 따끔거리며 아프기도 했다. 이비인후과의 의사는 아마 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긴듯 하다는 자신 없는 진단을 내렸다.
잠을 자려고 베개에 머리를 묻을 때면 한쪽 귀에서 덜컹덜컹 기차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일 밤 귓속으로 기차 한 대가 회차점도 없이 굴러다녔다.
그가 탄 기차일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가게 뒤편에 방을 만들면서 달아놓았던 샤시문이 덜컥거리고 짐승 같은 검은 그림자가 보였을 때, 나는 벌떡 일어났다.
두려움에 사지를 떨면서 나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턱 막힌 가슴을, 옷 앞섶을 부여 쥐고 나는 벌벌 떨고만 있었다. 온몸의 핏줄이 곤두섰다. 가슴이 답답하고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숨이 막혀왔다. 손은 살의 때문에 부들부들 떨렸고 악문 이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이 습격당한 캐비닛 속같이 파헤쳐져 닫혀 지지를 않았다. 온몸이 사방에서 쑤셔왔다.
부엌을 통해서 뒷마당으로 후다닥 도망치는 발짝 소리가 들렸다. 허름한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 있었고 희미하게 숯불갈비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불행을 되풀이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슬프고 괴로운 일이다.
그리고 도끼보다 무서운 것이 혓바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의 행실이 어쩌고 하면서 나를 화냥년 취급할 것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내를 불러들이는 꼴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누가 알까? 온몸이, 영혼이 송두리째 타인에 의해 뽑혀져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 같은 이 절망감을.
사무친 설움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떠난 후 처음으로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날이 밝을 무렵까지 울음은 길고도 길었다.
옆 가게 김씨 아저씨를 불러 문고리를 더 달아달라고 부탁했다. 퉁퉁 부은 눈두덩과 부석거리는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문고리를 달아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입술과 뇌가 연결되는 선이 누전된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도 나는 억지를 쓰며 이비인후과를 며칠 다녔다. 그러나 기차는 귓속에서 끊임없이 덜컹거리며 지나다녔다.
*
저녁 여덟시쯤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서랍에서 초를 꺼내 불을 붙여놓고 밖으로 나갔다. 손님이 오면 곤란해질 것이다. 전자저울만 쓰는 요즘엔 정전이 되면 무게를 재 볼 수도 육절기로 썰 수도 없었다. 오늘은 주변 식당에서 안주거리 몇 근씩을 사러 오는 손님 외엔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채 이십 만원어치도 팔지 못했다. 그래서 비 내리는 날을 ‘우후죽순’이라고 한다. 비가 내리면 손님 발길이 뚝 끊어져 죽을 쑨다는 은어였다. 전기가 들어오고 또 손님이 와야만 했다.
십 분쯤 지난 뒤, 중앙상가 전체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슬픔의 암호를 모두 풀어버린 것 같이 일순 환해졌다.
후, 입김을 세게 불어 단번에 촛불을 껐다. 불이 꺼진 후에도 한참 동안 흰 연기는 가늘게 피어올랐다.
열시 쯤, 얼마 전 부터 팔리지 않아 진열대 가장 구석에 놓여있던 소 내장을 꺼냈다. 식도와 허파를 떼어내고 지방을 제거하니 염통이 불빛에 매끄러운 속살을 들어냈다. 추리닝 속에 감춰진 아직은 탱탱한 내 젖통만한 크기였다. 잘게 썰은 소뼈와 염통을 냄비에 올려놓고 돌아서는 내 얼굴이 유리창에 고스란히 비춰졌다.
나는 약간 웃어보았다. 파마기 없는 머리를 뒤로 틀어 올린 삶에 지친 한 여자가, 유리창에서 이쪽을 쳐다보며 우는 듯 웃고 있었다.
많은 것들이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삶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추억을 울궈먹으며 산다고 누가 그랬다.
어두움, 만져지지 않는 존재감, 익숙했던 만큼 이제 낯설어져버린 남편의 사진. 이제 사진 속에서라도 그의 모습 하나쯤을 건지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가슴에 가득 찬 것들 위로 미지근한 밥을 밀어 넣었다. 찌개를 입 속에 떠 넣으며 이제 나는 스스로 알아왔던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셔터를 내리고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와 약 한 봉지를 먹었다. 이틀 전에 새로 받은 처방은 조금 더 강해진 듯했다. 약을 먹고 30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몽롱해지고 못 견디게 잠이 쏟아졌다. 이틀 치씩 돈으로 살 수 있는 달콤한 잠.
때로는 꿈꾼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 나를 모르는 낯선 곳으로 가서 새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산뜻하게 새로 시작하는 꿈.
*
대구상회 할머니가 죽었다며 김씨 아저씨가 영안실을 알려주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죽음을 나쁜 소식이라고 안됐다고 말한다. 죽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손해인가? 물론 죽은 사람에게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오지 않지. 모두들 내일이 온다는 말을 희망이 있다는 뜻으로 쓰고 있어.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내일을 향해 뛴다….
그런데 내일이 오는 것,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희망이라는 걸까? 나에게 내일이란 단지 지루한 시간의 연속일 뿐이야.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서랍을 열어 만 원짜리 다섯 장을 꺼냈다. 저녁에 영안실에 갈 거라는 김씨 아저씨에게 조의금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김씨 아저씨는 함께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나는 싫다고 했다. 대신 갈비 한 대를 발라 정성껏 칼집을 내고 손질을 했다. 그리고는 불고기 양념을 넣고 오래도록 끓였다.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가게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화장기 없는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추리닝 앞섶이 들썩거리고 뒤로 묶어 맨 머리채가 너풀거렸다. 바람은 한결 난폭해 있었지만 아직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북서쪽 하늘에서는 검은 구름들이 진군해오고 있었다.
공터를 지나자 할머니네 크고 너른 마당이 보였다. 대문을 슬쩍 밀어보았다. 대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마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수 십 개의 화분이 현관으로 통하는 좁은 길만 남겨놓은 채 바람 속에 서 있었다. 어디에도 인기척은 없어 보였지만 그것은 그저 밥 먹고 자기 위해서만 지은 집들하고는 달랐다.
덩굴무늬가 정교하게 조각된 현관 손잡이를 당겨 보았다. 뜻밖에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마루가 깔린 널따란 공간으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 꼬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숙자였다.
어둠 속에서 시각보다 청각이 더 믿을 만하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나는 준비해간 갈비를 꺼냈다. 숙자는 냉큼 갈비를 물고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오도독 거리는 씹는 소리를 듣다가 나와, 가장 늙고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를 찾아 그 앞에 섰다. 거칠고 야윈 몸통의 향나무는 정원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었다.
삽을 찾아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흙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흙을 파낸지 얼마 되지 않아 뿌리들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뿌리는 완강하게 뒤엉켜 있었다. 고기를 냉장고에 걸을 때만큼이나 숨이 가빠오고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렀다.
누군가 그랬던 것이 기억났다. 죽기 직전의 몸무게에서 죽은 뒤의 몸무게를 빼면 그게 바로 영혼의 무게라고. 할머니 영혼의 무게는 얼마쯤 나갔을까.
구덩이는 이제 제법 깊게 파였다. 숙자를 안아다 움푹 파인 구덩이에 밀어 넣었다. 숙자는 어둠속에서 꼬리치며 빤히 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파낸 구덩이 속으로 숙자는 순식간에 묻혔다.
흙을 덮고 꾹꾹 정성들여 오래도록 눌러주었다. 숙자야, 이제 할머니 곁으로 가거라. 그리고 다음 생엔 부디 사람으로, 그리고 사내로 태어나거라.
나는 허공에 대고 지껄였다.
언젠가 내가 죽으면 내 몸을 태워 보아줘. 늑골과 늑골 사이에, 명치가 있던 자리를 잘 찾아봐. 거기 얹혀있던 외로움이 뭉쳐서 독한 돌이 되어 있을 거야.
누군가 그랬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한번 후계자는 영원히 후계자야. 누가 뭐래도 당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난 꼭, 이루고야 말겠어.
낚싯줄처럼 투명하고 단단한, 그 동안 간신히 부여 쥐고 있었던 팽팽한 끈 하나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흙을 털어내고 간신히 일어섰다. 휘청거리며 늙은 향나무의 몸통을 꽉 부여잡았다.
참고 있었다는 듯 굵은 빗방울이 후득후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2009. 12. 동양일보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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