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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흠신서(欽欽新書)의 구성과 서술방식 연구
Ⅲ.『흠흠신서』의 체제와 구성
1.『흠흠신서』의 체제:『추관지(秋官志)』․『심리록(審理錄)』과의 비교
『흠흠신서』74)는 관찬서인『심리록』,『추관지』와 인명사건의 판부를 담고 있는 동류서로서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중에서『심리록』은 111조목이 『흠흠신서』의「상형추의」와 일치하며,75)『추관지』는『심리록』,「상형추의」와 일치하는 옥안이 19건이다.76) 선행연구에서는 이러한 내용상의 공통점을 지적하면서『흠흠신서』,『추관지』,『심리록』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한 바 있다.77)
본고에서는『흠흠신서』의 체제와『심리록』,『추관지』의 체제를 비교하는 방식을 통해 동류서들 사이의 공통점뿐만이 아니라 차별되는『흠흠신서』의 특징을 살피도록 하겠다. 먼저 각각의 체제와 그 내용을 개괄적으로 표로 정리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78)
74) 본고에서는『흠흠신서』의 이본들 중 신조선사본(新朝鮮社本)을 저본으로 광무본(光武本) 판본을 참고하고, 다른 필사본(국립도서관본, 동양문고 재산루(在山樓) 장서본, 규장각본, 서울대 고도서 필사본) 등을 대조하여 조목을 보충하고 교주한 현대 실학사의『欽欽新書․原文』을 대본으로 삼는다.
75) 박병호, 앞의 해제, 15쪽.
76) 박병호, 앞의 해제, 16쪽.
77) 심재우는『추관지』해제에서『심리록』,『추관지』,『흠흠신서』을 비교, 검토할 필요성을 언급하였고, 박병호는『국역 심리록』해제에서, 사죄(死罪) 자료가 이 3서를 통하여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다. 특히 조선 시대에 사죄 내지 형사법에 관해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연구하였던 사람으로 세종, 정조, 다산 정약용을 꼽을 수 있다고 하였다.
78) 본고에서는 앞에서 언급한『심리록』5종의 이본 중에서, 완고본(完稿本)의 결점을 보완함과 동시에 옥안의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다고 평가되기 때문에 (박병호, 심리록, 해제 14쪽),『심리록』연구의 저본으로 많이 쓰이면서, 홍의호가 따로 간행하려고 했던『심리록』본과의 관련성이 있다고 추정되는『심리록』규장각 1770본과,『심리록』홍재전서본을 각각 표로 만들었다.
<표-3>『흠흠신서』의 체제79)
흠흠신서 5부(部)의 구성
經史要義
총 3권. 유교경전을 바탕으로 13개의 형정 기본 이념자신의 의견을 담아 정리하고, 이와 관련 있는 중국의 사례 79건과 조선의 사례 38건을 정사(正史)와 야사(野史) 등에서 폭넓게 선별하여 117건을 수록하였다.
批詳雋抄
총 5권. 70건의 모범이 되는 중국의 인명사건 형사 공문서를 발췌하여 수록하고 비평하였다.
擬律差例
총 4권. 청률조례(淸律條例)의 부록으로 실린 독무(督撫)의 상서(詳書)와 형부(刑部)의 복심(覆審)사건 중 188건의 중국의 사례를 24개의 항목으로 분류하여 법률을 차등하여 적용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비평하였다.
祥刑追議
총 15권. 우리나라의 사례를 상형고(詳刑考)에서 144건 골라, 사건의 종류별로 분류하고 사건 처리에 관하여 논하였다.
剪跋蕪詞
총 3권. 정약용이 현직시절 해결한 사건과 법률을 논해본 사례, 유배시절에 접한 사례 16건과 굴검법(掘檢法)에 대한 정약용의 입장을 담은 사례 1건, 총 17건을 수록하였다.
79) 정약용이 서문에서 밝힌 30권 10책의 구성과 내용을 바탕으로 정긍식의『흠흠신서』현대실학사 본 서평과 심희기, 권연웅의 앞의 논문을 참조하여 정리하였다. 본고의 대본인 현대실학사본에도 정약용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표-4> 『추관지』체제80)
권수 編目권1 總論(九) 官制,職掌,屬司,吏隸,館舍,經用,律令, 禁條, 奴婢, 雜儀
권2 祥覆部啓覆(附:檢驗, 同推, 訊杖) 倫常
권3 祥覆部復讎, 姦淫, 審理上
권4 祥覆部審理中
권5 祥覆部審理下(附:欽恤), 考律部除律
권6 考律部定制
권7 考律部續條一, 續條二, 續條三
권8 考律部續條四, 續條五, 續條六
권9 考律部續條七, 雜犯, 掌禁部法禁
권10 掌禁部申章, 雜令, 掌隸部工隸, 私賤
<표-5>『심리록』규1770본 권1 체제81)
<표-6>『심리록』홍재전서본 권1 체제82)
80) 심재우,『秋官志』上해제, 16쪽의 표 인용. 이것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추관지』규1012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81) 1권 정유년까지의 체제를 정리함. 이하는 체제가 이와 동일하므로 표에서 생략함.
82) 1권 정유년까지의 체제를 정리함. 이하는 체제가 이와 동일하므로 표에서 생략함.
먼저 <표-3>에서 정리한『흠흠신서』각 부(部) 구성의 의미는 정약용이 서(序)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경전의 교훈을 머리에 실어 정밀한 뜻을 밝히고, 다음에 역사의 자취를 실어서 옛날의 상례를 드러내었으니, 이것이 이른바「경사지요(經史之要)」이며 3권이다. 다음에는 판결, 보고, 선고의 실례를 실어서 당시의 법례를 살폈으니, 이것이 이른바「비상지준(批詳之雋)」이며 5권이다. 다음에는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의 죄를 헤아려 형벌을 정한 사례를 실어서 차등을 분별했으니 이것이 이른바「의율지차(擬律之差)」이며 4권이다. 다음에는 선대의 임금 때 군현의 공안 가운데 문사와 논리가 비루하고 저속한 것은 그 뜻에 따라 가다듬고, 형조의 의론과 국왕의 판결은 삼가 조심스레 기록하되 간간이 내 의견을 덧붙여서 변론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상형지의(祥刑之議)」이며 15권이다.
내가 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있을 때 왕명을 받들어 옥사를 다스렸고, 내직으로 들어와서 형조참의가 되어 이 일을 맡았었다. 그리고 죄를 받아 귀양살이하며 떠돌아다닌 이후로도 때때로 형사사건의 정상을 들으면 또한 심심풀이로 형사사건을 논하고 죄를 판정해 보았는데, 변변치 못한 나의 이 글을 끝에 붙였으니 이것이 이른바「전발지사(剪跋之詞)」로 3권이다. 이들은 모두 30권인데『흠흠신서』라고 이름지었다.83)
<표-3>과 윗글에서 살펴보면,『흠흠신서』의 구성은 총 5부(部)로서, 형정에 관한 대의를 밝히고 전거가 되는 사례로 중국과 한국의 판례, 개인의 경험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록하고 각 부의 구성을 유기적으로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표-4>를 보면『추관지』는 크게 형조의 직무에 따라 내용이 분류되었다. 즉 형조의 직제와 조직을 총괄적으로 정리한 1편과 형조의 중요한 네 가지 직무를 각각 정리한 4편 등 모두 5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편은 다시 24목으로 구성되었다.84)『군서표기』에 보면『추관지』는 사부(史部)의 직관류(職官類)라고 분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85) 형조의 관제에 대한 전문서로서의 성격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83) 冕之以經訓用昭精義次之以史跡用著故常所謂經史之要三卷次之以批判詳駁之詞用察時式所謂批詳之雋五卷次之以淸人擬斷之例用別差等所謂擬律之差四卷次之以先朝郡縣之公案其詞理鄙俚者因其意而潤色之曹議御判錄之唯謹而間附己意以發明之所謂祥形之議十有五卷前在西邑承命理獄入佐秋官又掌玆事流落以來時聞獄情亦戲爲擬議其蕪拙之詞係于末所謂剪跋之詞三卷通共三十卷名之曰欽欽新書. 『欽欽新書』序.
상복사(祥覆司)는 경외의 사형죄수에 대한 심리를 맡았다. 따라서「상복부(詳覆部)」는 상복사가 담당하는 살인사건을 분류한 계복(啓覆), 윤상(倫常), 복수(復讐), 간음(姦淫), 심리(審理)의 다섯 목(目)으로 되어 있으므로86),『추관지』에 수록된 사례는 범죄의 성격을 기준으로 분류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표-5>와 <표-6>를 보면『심리록』은 모두 사건들을 연도별과 지역별, 두 방식으로 수록하였다. 각 권에는 범인의 이름을 딴 사건별 목록을 싣고, 한 해 단위로 사건을 싣되, 같은 해는 지역별로 분류하였다.87) 즉,『심리록』은 주제나 목적별로 내용이 재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편찬자의 의도가 체제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자료로서의 구성적 특징을 보인다.
그런데『심리록』규1770본은 서례와 홍인호의 계가 있는 반면에『심리록』홍재전서본은『군서표기』에 다음과 같은 정조의 해제가 있을 뿐이다.
을미년(1775, 영조51)에 내가 대리청정한 이후로 경외(京外)의 옥안(獄案) 중에서 계사(啓辭)에 딸려서 판하(判下)한 것과 사면(赦免)을 받아 깨끗이 처리된 사건, 재앙을 없애기 위한 여수(慮囚) 등을 그때마다 형조에서 삼가 기록해 두도록 지시하였다. 그 후로 분량이 늘어나 책이 되면서부터 간간이 연신(筵臣)의 건의가 있었으므로 마침내 초계문신 홍인호(洪仁浩)와 김희조(金煕朝) 등에게 편집하여 책으로 엮도록 지시하였다. 방식은 연도별로 묶고 지역별로 분류한 다음, 옥안의 핵심적인 내용과 실제의 원인, 본도(本道)에서 올린 장계(狀啓), 형조의 계사,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헌의(獻議)의 대략을 들어서 기록하고, 판결문은 줄을 바꿔서 수록하였다. 비록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자가 아니더라도 반란자,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만들어 낸 자, 화폐를 위조한 범인 등 사형에 처해진 자들을 모두 수록하고, 서명을『심리록』이라 하였다. 모두 26권이다.
84) 심재우, 앞의 해제 참조.
85) 신승운,『군서표기』해제, 25쪽.
86) 심재우, 앞의 해제, 15쪽.
87) 박병호, 앞의 해제 참조.
책의 뒤에 응행격식(應行格式)을 수록하였는데, 초복검식(初覆檢式)ㆍ회추식(會推式)ㆍ완결식(完決式)ㆍ각도녹계식(各道錄啓式)ㆍ동추식(同推式)ㆍ결안식(結案式)ㆍ계복식(啓覆式)의 7종으로, 이것은 구례(舊例)와 신식(新式)을 참고해서 만든 것이다.88)
『심리록』1770본에 실려 있는 홍인호의 계(啓)에는, 정조의 명으로 정리한 판부들을 보완하여『심리록』을 편찬하도록 자신이 제안했다는 내용을 상세히 담아놓는 반면에, 윗글에서는 "분량이 늘어나 책이 되면서부터 간간이 연신(筵臣)의 건의가 있었으므로"『심리록』을 편찬하도록 명령했다고만 적혀있다.
다음으로,『추관지』,『심리록』과 내용면에서 겹치는『흠흠신서』의「상형추의」의 체제를 정리한 <표-7>을 살펴보면, 편찬자의 주관이 배제된 직제, 날짜, 지역 등의 관습적이고 제도적인 기준에 따르지 않고, 편찬자의 법리적 관점을 기준으로 사례가 수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표-7>『흠흠신서』,「상형추의」의 체제 –생략
위의 표를 살펴보면 , 22개의 조목 중 범인에 대한 규정과 살인 사건 성립에 관한 법리적 판단의 중요한 기준에 부합하는 1~3번 사례의 수와 16번 항목인 배우자 사이의 살인사건의 수가 다른 조목에 비하여 많다.89) 또한 시체의 검험에 관한 사례와 일반적인 분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드물고 이상한 형사사건을 따로 수록한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굴검(掘檢)에 관한 사례와 일반적이지 않은 사례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약용의 관점에 의한 것이다.90)
이상의 4종의 체제를 살펴보면,『흠흠신서』의 체제가 사례에 대한 편찬자의 주관이 가장 분명히 드러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체제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4종의 편찬서가 판례의 내용 기술적 측면에서는 어떠한 차이점이 드러나는지, 공통적으로 수록된 동일한 사건이 기술된 양상을 정리한 다음의 <표-8>을 살펴보기로 한다.
88) 自乙未代聽以後京外獄案之隨啓而判下者及遇赦而疏決也弭災而慮囚也輒使秋曹謹記之積成卷帙間因筵臣陳請遂命抄啓文臣洪仁浩金煕朝等編次爲書繫年以統之列地以類之獄案之肯綮實因道狀曹啓與夫大臣諸臣獻議者提其槩以註之判辭則逐段而揭載之雖非殺越如亂民造言僞造潛貨等凡係一律者亦悉錄焉名之曰審理錄凡二十六卷應行格式之附見者七曰初覆檢式曰會推式曰完決式曰各道錄啓式曰同推式曰結案式曰啓覆式此舊例新式之參互而成者也.『羣書標記』四, 「御定」四. 한국문집총간 번역 참조.
89) 이것은 당시의 사건 발생 수가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추관지』의 倫常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가족 및 배우자 살해의 다양한 사례를 볼 수 있는데, 배우자 살해(殺妻) 판례가 제일 많이 실려 있다. 이것은 편집자의 관점 때문이 아니라 실재 조선후기 발생한 살인사건에서 배우자 살해의 비중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재우, 앞의 해제, 17쪽.)
90) 심희기는 이러한 분류방식이 이론지향적이 아니라 현실지향적이라면서, 근대법학의 전형적인 판례연구방법과 상당히 일치한다고 평가하였다. (심희기 앞의 논문, 58쪽.)
<표-8>은「상형추의」에 수록된 <원수 갚음에 대한 용서 1>의 사건으로서, (가).『흠흠신서』의 사례가 수록된 양상을 기준으로 (나).『추관지』와 (다).『심리록』규1770본, (라).『심리록』홍재전서본의 텍스트 구성을 비교한 것이다. 이 원수갚음에 대한 사건이 해결되기 전, 재조사에 이르기까지의 정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윤태서(庶子)와 윤언서(庶子)는 윤덕규(嫡子)를 구타하여 죽였다.
② 윤언서는 방면되었다.
③ 윤침(윤덕규의 아들, 윤언서를 붙듦)과 윤항(윤덕규의 아들, 윤언서를 칼로 죽임)이 윤언서를 죽이고 윤항이 살인사건의 주범이 되었다.
④ 윤덕규의 딸이자 윤항의 여동생인 윤임현이 격쟁을 하였다.
⑤ 사건을 재조사하게 됨.
위의 사건이 발생하고 해결되기까지의 과정 중『흠흠신서』에 수록된 옥안의 주요부분과 정약용의 의견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가)-③ : 윤언서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의 보고와 윤언서의 사체검험서.
(가)-④ : 윤덕규의 사망이 보고기한(保辜期限) 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살인 사건이 성립되지 않음. 윤언서의 사망 원인을 찔려 죽게 된 것으로 기록. 주범을 윤항으로 판단함.
이에 정약용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덧붙인다.
(가)-⑤ : 법조문 적용의 잘못을 지적.
(가)-⑥ : 윤덕규 사망사건에 있어서, 시골사람 윤항은 아버지 윤덕규가 다친 것에 대하여 조리 있게 진술하지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법관도 사건을 잘 파악하지못한 것임을 지적함.
복검발사와 순영제사는 각각 다음과 같은 소견이다.
(가)-⑦ : 윤덕규의 초검․재검안에 따르면 윤항을 사형에서 감형할 수 없음을 주장.
(가)-⑧ : 사체검험서와 기타 정황, 윤항의 살인 동기를 판단하면 본 사건은 적․서문제에 대한 집안간의 묵은 감정을 푼 것에 불과하므로, 윤항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원수를 갚은 조항을 적용할 수 없음.
(가)-⑩ : 윤임현이 격쟁하여 이르기를, 서족들에게 구타당하여 아버지가 숨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친 자국이 분명치 않고, 보고기한 이후에 사망하였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사망이 살인사건으로 성립되지 않은 바가 부당하므로 사건의 재조사를 요청함.
이에 정조가 사건의 재조사를 명한다.
(가)-⑪ : 본 사건이 의심스러우니, 형조의 당상관들에게 회계(回啓)하라고 명령함. 이에 형조의 관리들은 본 사건을 재조사하고, 윤항의 입장을 일부 인정하지만, 윤항의 감형에는 반대한다. 이러한 의견을 종합하여 형조에서 최종 계(啓)를 올린 것이 다음과 같다.
(가)-⑰ : 윤덕규가 죽게 된 원인은 고발할 때에 분명한 증거가 없었고, 보고기한내에 사망하는 등, 정황상 가해자들에게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음. 이후의 윤임현이 격쟁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윤언서가 이미 목숨으로 보상하였고, 윤태서의 죄는 무거운 데에 이르지 않으므로 형조에서 처리할 수 없음.
정약용은 형조 관리들의 잘못을 조목조목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자신의 법리적 논의를 펼쳐나간다.
(가)-⑱ : 형조판서 김종수와 형조참판 홍수보의 논의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형사사건 처리를 그르치고 임금의 분노를 사게 하는 것이라 함. 또한 수령이맨 처음 사건을 보고받지 않았다고 거짓진술을 하고 있는 잘못을 질책함.
정조는 다음과 같이 최종 판결한다.
(가)-⑲ : 첫째, 보고기한의 문제를 떠나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밝히고, 윤항을 감형할 것을 명령함. 둘째, 사건 처리에 관련된 수령과 관찰사의 잘못을 질책하고 책임을 물음. 셋째, 판부의 내용을 여러 도에 공문으로 보낼 것.
이러한 정조의 최종 판부의 말미에 정약용은 사건에 대한 총평격 언급을 하고 있다.
(가)-⑳ : 첫째, 이 형사사건을 판단하려면 먼저 윤태서 사건을 논의해야하는데,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형사사건의 조문을 모르기 때문이 문제였음. 즉, 윤항 형제는 아버지의 사건을 법의 뜻에 맞게 고발하지 못하여 검관이 분명히 사건을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살인사건이 성립되지 못한 것이며, 다만 아들의 도리로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이라고 함. 특히 사인(死因)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윤덕규의 급소의 상처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을 지적함. 둘째, 전라도와 형조의 조사에서 시체검험서를 통하여 이러한 문제점을 밝혀내지 못한 것을 질책. 셋째, 손윗 사람인 윤태서를 놓아두고 윤언서를 죽인 점은 용서할 수 있음. 셋째, 이러한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관리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사리와 정상(情狀)을 살피지 않음을 질책. 넷째, 본 사건에서 목숨으로 보상하면 되었을 것을,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는 등 잔학하게 죽인 부분에 대하여는 윤항에게 징계를 내려야 함.
살펴본 바와 같이 사건에 대하여 정약용은 백성과 검관, 수령과 관찰사, 형조의 관리 등 사건에 관련된 모든 인물들의 잘잘못을 논의하고 있으며, 정조의 판결의 말미에 본 사건에 대한 자신의 법리적 소견을 덧붙인다. 이 사건에 대하여 4종의 편찬서 모두 형조의 계와 판부가 수록되어 있으나 나머지 부분의 편집 양상에는 각각 차이가 있다. 이러한 『흠흠신서』와는 달리, (나)~(라)에는 형조의 계 이전의 검안기록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가)와는 달리 사건의 최종 결정을 내리기까지 지방 관리들의 형정 처리과정을 소상히 살펴볼 수 없다.
위의 표에서 각각의 텍스트에서 서로 다른 사건의 제목, 사건발생과 해결과정을 요약․기술한 양상을 살펴보면, 사건을 규정짓는 편찬자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비교를 통해 각 텍스트들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① 사건의 제목과 ② 사건의 요약 비교
(가).『흠흠신서』
(가)-① 원수 갚음의 용서 1 (원수가 목숨으로 보상되지 아니하자 사사로이 죽여 창자를 허리에 둘렀다. 원인은 의분(義憤)이며 죽은 원인은 찔린 것이다.)(復雪之原一(讎不償命私自屠腸根由義憤實因被刺.))
(가)-② 강진 백성 윤항이 윤언서를 살해했다. (康津民尹恒殺尹彦緖.)
(나).『추관지』
(나)-① 복수, 아비의 원수를 갚은 것, 금상 12년(復讎, 復父讎, 十二年)
(나)-② 강진의 윤태서․언서는 윤덕규를 구타하여 38일만에 죽게 되었는데 실인은 병환이다. 그래서 성옥되지 아니하고 언서는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덕규의 아들 윤침․윤항 및 아우 덕래 3인이 언서를 칼날로 찔렀다. 이리하여 성옥이 되고 동추가 행해졌다.(康津尹太緖彥緖毆打尹德奎第三十八日致死實因病患獄未成而彥緖蒙放還家是日德奎子尹忱尹恒及弟德來三人手刃彥緖成獄同推矣.)
(다).『심리록』규1770본
(다)-① 강진 윤태서와 윤항 등의 옥사(康津尹太緖恒等獄)
(다)-② 윤태서와 윤언서가 작은 일 때문에 그 일족인 윤덕규를 발로 차고 때려서 38일만에 죽게 하였다. 신낭에 상처가 났다. 실인은 병환이다. 윤덕규의 아들 윤항과 윤침이 윤언서를 칼로 찔러 배를 가르고 간을 씹었다. 정미년 6월에 옥사가 이루어졌다.(太緖彦緖人徵事蹴打其族德圭第三十八日致死傷處腎囊痕損實因病患德圭子恒忱手刃彥緖割腹齧肝- 丁未六月成獄.)
(라).『심리록』홍재전서본
(라)-① 전라도 강진현 윤항의 옥사(全羅道康津縣尹恒獄)
(라)-② 윤언서를 찔러 죽였다. 실인은 찔린 것이다.(刺殺尹彥緖實因被刺.)
『추관지』,「상복부」의 <복수>조목에 분류되어 있는 사건 (나)와『흠흠신서』(가)의 제목은 '복수'라는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여 분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가)-② 부분이 간략한 것은,『흠흠신서』에 수록된 각 단계의 옥안들을 통해 사건 발생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다)와 (라)는 가해자나 피해자의 이름과 지명으로만 제목을 구성하고 있어서 사건의 성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없다.
한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 사건으로서 정상을 참작하여 윤항을 감형해주기를 바라는 윤항의 누이동생이 격쟁한 내용을 기술한 차이점을 각각의 텍스트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흠흠신서』(가)-⑩과『추관지』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므로,『흠흠신서』의 내용은 생략한다.
(나).『추관지』
(나)-③ 덕규의 어린 딸 임현이 격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희 아비 덕규는 지난 3월에 환곡을 받는 일 때문에 창저(倉底)에 갔었는데, 문중의 서얼인 태서․효서가 환곡의 일을 가지고 다투다가 저의 아비를 구타하였습니다. 현장에서 기절하여 38일만에 사망하였으므로 즉시 관가에 고하였는데 검관은 모호한 말로 감영에 보고하여 끝내 성옥되지 못하였습니다. 저의 조부는 분통하여 단식하다가 자살하였으며, 저의 어미는 피를 토하고 울다가 사망하였습니다. 한 집안의 세 번 초상이 이 두 원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두 오빠 침․항 및 서숙(庶叔)이 부모를 위해 복수한다는 마음을 품고 효서가 나오기만을 엿보아 3인이 칼날을 휘둘러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서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비의 무덤에 가서 곡하고 본관에게 자수하였더니 두 오빠 및 서숙에게는 칼을 채워 수금하고 태서는 방면하였습니다. 본조에서 회계를 올렸다.91)(德奎女童蒙任賢擊錚原情內矣父德奎去年三月爲受還往倉底則門孼泰緖孝緖92)以還事爭奪毆打矣父卽地氣絶至三十八日而身死故卽爲告官則檢官漫辭報營終不成獄矣祖父憤痛絶食而自盡矣母泣血身殞一室三喪由此兩讐則矣兩兄忱恒及庶叔有爲父母復讐之心竊孝緖之出來三人手瞯刃刳腹齧肝來哭父塚自首本官則兩兄及庶叔枷 因太緖放送云曺回啓.)
91) 번역은『역주 흠흠신서』와 『추관지 제1권』(법체처, 1975)을 참조하였다.
92) 두 본의『심리록』과『흠흠신서』,『추관지』나-② 부분에는 언서(彦緖)로 되어 있다. 동일 인물이다.
(다).『심리록』규1770본
(다)-③ 윤항의 누이동생 윤임현이 격쟁하였다.(恒妹任賢擊錚.)
(라).『심리록』홍재전서본
(라)-③ 윤항의 여동생 윤임현이 격쟁을 하였기 때문에, 형조회계에서 한 여인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판결을 믿기 어렵다 하였다고 하였다.(因恒妹任賢擊錚刑曹回啓一女呼寃恐難盡信.)
각각의 텍스트에서 보이는 위와 같은 차이는 본 사건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시각 차이를 보여준다.『흠흠신서』의 (가)-⑩에 해당하는 형조의 아룀은 그 전 단계에서 사건 처리에 문제가 있음을 격쟁하는 윤임현의 의견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가장 상세한 기술을 하고 있는 (나)와 이를 요약하여 기술하고 있으나, 판결을 믿기 어려워한다는 격쟁의 사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라)와는 달리 (다)에서는 단순히 격쟁했다는 사실만을 기술하여, 그 전의 형정 처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윤임현의 주장을 배제하고 있다.
(나)와 (다)에서 각각 형조의 계를 요약기술하고 있는 방식이 다른 점은 다음의 부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다).『심리록』규1770본
(다)-⑧ 복수는 본래 허락하지 않는 것이고, 멋대로 죽이면서 또한 관청에 고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의심스러운 사건이라 실정을 보아 너그럽게 용서하자는 논의를 내기가 어렵습니다.(復讎本不當許擅殺亦無告官此乃疑案難議原情.)
(라).『심리록』홍재전서본
(라)-⑧ 이것은 중요한 사건이며 의심스러운 사건입니다.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결정하는 것은 논하는 것은 어렵습니다.(此是重獄疑獄難議原情定罪.)
위의 부분에서 (라)와는 다르게 (다)에는 윤항이 정당한 복수를 갚은 것이 아니라 멋대로 사람을 죽인 것이기 때문에 윤항을 감형시킬 수 없다는 형조의 주장이 보다 분명하게 실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②에서도 (라)와 다르게 윤덕규 사망 경위를 분명히 기술(記述)하면서, 실인(實因)을 병환이라고 밝혀서, 윤덕규의 사망사건이 살인사건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추관지』에 생략된 (나)-④, (나)-⑥의 부분을 나머지 편찬서들의 판부와 비교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판부의 인용은 (가)『흠흠신서』의 부분으로 한다.
(가)-⑮ 비록 관청에 고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죄는 제멋대로 죽인 죄에 해당하지 않는다.(雖不告其罪猶不至擅殺(分叱不喩.))
(가)-⑲ 관찰사의 직책은 형률을 담당하는 관원의 경우와 달라서 법례와 윤의(倫義)하나라도 버릴 수 없다. 또 하물며 내가 이 형사사건에 대해 적절한 문장으로 판결해 내린 뒤에도 여전히 잘못을 고치지 않고 우기며 덮어 가리기 위해 집요한 말로 거침없이 번거롭고 지루하게 늘어놓으니, 일반적인 도리로는 참으로 이 관찰사를 책하기 어렵겠다. 수령을 편들고, 범인을 감쌌으며, 오히려 옥사를 성립시키지 못해 목숨으로 보상하게 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듯했으니,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책임을 묻는 교서를 자주 내리면 도리어 가볍게 여기고 내버릴 테니 잠시 그대로 두라. 초검관과 복검관은 결단코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백성을 돌보아야 할 책임을 진 자가 풍교를 어지럽힌 것에 대해서 우선 옥사를 잘못 판단한 죄율을 시행하여, 해당 부서로 하여금 잡아다가 문초하여 처리하도록 하라.93) (道伯之職異於檢律律例倫義不可偏廢且況措辭判下之後乃以遂非執拗之說無難張皇尋常道理固難責之於此道伯而右袒邑倅庇覆兇身猶恐獄不堅而殺不償意未可曉多費責敎反涉屑越姑置之所謂初覆檢官等決不可仍置字牧之任以亂風敎爲先施以誤決獄之罪令該府拿問勘斷.)
(가)-⑮ 부분은 정조가 윤항의 행위가 제멋대로 사람을 죽인 죄에 해당하지 않고, 아버지의 복수를 정당하게 갚은 것이라고 강조하는 부분이고, (가)-⑲부분은 잘못된 사건 처리에 관하여 관리들을 문책하는 것이다. 이 두 부분이 빠지게 된 정확한 경위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가)-⑲부분으로 추론해 본다면,『추관지』의 형조(刑曹) 직관지(職官志)로서의 성격 때문에, 형조에 대한 정조의 질책에 관련된 부분을 생략하게 된 것인지, 다른 사례들의 비교 분석 등을 통한 보다 자세한 연구를 통해서 밝혀질 문제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 4종의 텍스트들은 내용의 구성 면에서 사건 별로 사건의 정황과 경과, 범죄가 성립한 직접 원인과 사건의 개요 등을 앞에 밝히고 그 뒤에 각 부서의 사건 처리과정과 판부를 수록하는 개괄적인 구성상의 공통점을 보이지만, 편집과 기술(記述)상의 차이를 통해 사건을 바라보는 편찬자의 관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서『흠흠신서』는 다른 동류서들과 달리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텍스트 안에서 편찬자의 목소리를 개진하고, 편찬자의 관점에 따라 사건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며, 독자들에게 사건을 보다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93) 번역은『흠흠신서』와『국역 심리록』3권을 참조하였다.
2. 텍스트 구성의 특징 분석
2.1. 사례 수집의 최대․최적화
『흠흠신서』는 앞장에서 살핀 바와 같이 체제에 편찬자의 의도를 짜임새 있게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었다. 이 체제 안에서 분류되어 수록된 텍스트들을 살펴보면,『흠흠신서』의 편찬자가 주요한 형정의 기본 이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에 부합하는 의미 있는 사례를 폭넓게 수록하기 위하여 경서와 형정서류 뿐만 아니라 역사서 , 잡기류(雜記類),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여 출전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사례는 출전을 소상히 밝힌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혼재되어 있으며, 먼저 정약용이 출전을 밝힌 것과 선행연구를 통해 출전이 밝혀진 것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9 생략)
위의 표를 살펴보면 경전과 역사서, 법률서, 불경, 소설을 망라하여 사례를 수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실학자적인 면모를 바탕으로『흠흠신서』에 유용한 사례들과 인용서들을 두루 섭렵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가『목민심서』를 편찬하기 위하여 필요한 내용을 수집한 방식을 보아도 역시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먼 변방에서 귀양살이한 지 18년 동안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되풀이 연구하여 수기(修己)의 학을 공부하였다. 다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학문의 반이라 하여, 이에 중국 역사서인 23사(史)와 우리나라 역사 및 문집 등 여러 서적을 가져다가 옛날 지방 장관이 백성을 다스린 사적을 골라, 세밀히 고찰하여 이를 분류한 다음, 차례로 편집하였다.96)
다음의 글에서 정조는 정약용의『시경강의』에 드러난 정약용의 박학함을 감탄하고 있다.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온축(蘊蓄)이 깊고 넓지 않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97)
94) 심희기, 권연웅의 앞의 논문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본고를 통해 사례의 출전으로 추정한 것은 <표-11>에서 따로 정리하였다.
95) 1889년에 간행되었으므로, 1822년 이전 본서의 저본의 사례일 것으로 추정됨. 심희기의 연구에 따르면, 정약용이 참고한 1803~1822년 사이의『청률조례』를 아직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심희기 앞의 논문 참조.)
96) 窮居絶徼十有八年執五經四書反復研究講修己之學旣而曰學學半乃取二十三史及吾東諸史及子集諸書選古司牧牧民之遺跡上下紬繹彙分類聚以次成編.『牧民心書』序.
97) 其出無窮苟非素蘊之淹博安得有此.『與猶堂全書』,『詩文集』第十三卷,「詩經講義」, 序.
이렇게 폭넓은 정보 수집력은 정약용의 다음과 같은 독서습관과 관련이 있다.98)
초서의 요지는 무릇 한 (鈔書) , 종류의 책을 볼 때마다 아름다운 말씀과 착한 행실로서『소학(小學)』에 실려 있지는 않으나『소학』을 이을 만한 것이 있으면 뽑고, 모든 경설(經說)에 새로운 것으로서 전거(典據)가 있는 것을 뽑고, 예경(禮經)도 마찬가지이다. 자학(字學)ㆍ운학(韻學) 같은 종류는 10에서 1만을 뽑아야 한다. 예를 들어,『설령(說鈴)』에 수록된 유구(琉球) 기행문 같은 것은 마땅히 병학(兵學)이 될 것이니 뽑고, 농사나 의학(醫學) 등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먼저 집에 있는 서적을 고찰하여 새로운 학설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 뽑도록 하여라.99)
윗글은 정약용이 서적을 대하는 태도의 단면을 보여준다. 정약용에게 기행문은 필요에 따라 병법에 관한 지식을 담은 텍스트가 된다. 이것은 정약용이 텍스트의 관습이나 권위에 연연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책의 내용을 취사․선택하여, 훗날 자신의 편찬서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2. 문학적 텍스트의 문화적 현실성
2.2.1. 형사사건 기록문의 문학성
『흠흠신서』를 구성하고 있는 인명사건 기록문에 대한 문학성은 첫째로, 그것이 본질적으로 '이야기 성'100)을 갖는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형사사건은 문학 장르에 적합한 소재로서 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되어왔다.101) 형사사건이란 사회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가 구성원들 사이에서 기능하는 데에 어긋남이 발생했다는 증거이며, 그 중에서 살인사건은 사회 구성원들 간의 극대화된 갈등이 발현된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 존립 자체에 위협을 줄 수 있는 반인륜적 특성 때문에 엄격한 절차를 거쳐 해결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에 관한 각종 해석의 작업102)에도 참여자들 간의 긴장이 극대화된다.
사건 해결에 관련되는 모든 사람들―증인․관리․최종판결자 ―등은 하나의 이야기를 타당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화자의 역할을 한다. '어그러진 현실의 서사'인 '살인사건'은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편집되고 해석된다. 입전자가 "타자화된 주체"를 만드는 것처럼103), 형사사건의 문건 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에게, 사건 해결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해석을 위한 판단으로 삼을 수 있는 공적인 기준들인, 증거와 진술의 사실성, 유교적 당위성 등의 잣대로 왕에 의해 최종 판결문이 작성될 때까지 끊임없이 집단적으로 해석이 가해진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일어난 사건의 해석이 거듭될수록 끊임없이 사건은 재구성되고, 해석자의 의견은 덧붙여지면서 사건을 둘러싼 새로운 이야기들의 생산이 계속되는 것이다.
98) 정민은 다산이 평소에 독서를 하면서 중요한 부분을 초서(鈔書)작업해 두었다가 저술을 편찬할 때 이를 분류하는 일종의 '카드작업'을 하였으며『흠흠신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편찬되었다고 한다. (정민,『다산선생의 지식경영법』, 김영사, 2006, 139~145쪽.)
99) 鈔書要旨凡看一種書有嘉言善行之不載小學而可爲小學之續者採之凡經說之新而有據者採之禮經同如字學韻學之類十採其一假如說鈴中琉球紀程之類當爲兵學而採之凡有農醫諸說先考家中所有書籍知其新說然後鈔之. 『詩文集』, 第二十一卷,「答二兒」.
100) 최시한은 사건이 '인물에 의해 야기되거나 체험되는,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의 전이 혹은 변화'이며, 사건은 "변화와 함께 갈등을 내포한다"고 하였다.(최시한,「사건의 개념과 갈래」,『한국문학이론과비평』15집, 2002, 참조.) 형사사건을 둘러싼 사건을 구성하는 인물들, 사건 해결에 관여하는 사람들 간의 첨예한 갈등구조는 형사사건 기록문의 이야기성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01) 이헌홍은 특히 판결이 기능하는 송사사건이 삶의 현장에서 빚어지는 대립 갈등의 각종 현실적 관심사를 그 내용으로 삼기 때문에, 서사문학의 주요 모티프 중의 하나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헌홍,「문헌 소재 송사설화의 유형과 의미」,『야담문학의 현단계 1』, 2001, 보고사, 409쪽.)102) "입법 관계자가 어떻게 유의하여 신중한 법문을 작성하더라도 그 법문을 실제의 구체적 사건에 해당하려는 경우 그곳에 해석의 여지가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강현철,『현안분석 2003-9 법령용어의 순화와 정비에 관한 법언어학적 연구』, 2003, 45쪽, 한국법제연구원.)
103) "전에서 형상화된 정체성은 현실적 재현이라기보다는 입전자의 해석적 관점과 회상 작용에 의해 '재구성된 주체'이자 '타자화된 주체'임을 보여준다." (최기숙,「18•19세기 '複數창작 전'의 창작 경위와 글쓰기 방식」,『고전문학연구』제27집, 2005, 290쪽.)
둘째,『흠흠신서』에 수록된 형사사건 기록문의 문학성은 사건을 둘러싼 해석자들이 표현하는 문학적 수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당시 형정은, 공권력이 국가를 통제하기 위해 사건 해결에 개입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 대신하여 가해자를 단죄하고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도의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사건의 비극성은 해석자의 감성의 발현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는데,『흠흠신서』에 수록된 형사사건의 기록에서는 사건과 피해자에 대한 관리들의 정서가 드러난 문학적 수사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형사사건의 전모를 철저히 밝힘과 동시에 사건 해석의 최종 결론에 따른 행동의 실천을 위해서는, 고증과 논증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는 해석자들 간의 정서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노력이 행해진다. 이 지점에서 다른 해석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전략이 "정서적 설득"으로서 "공리적 설득이나 규율적 설득이 유효하지 못한 곳"인 "미묘하고도 미세한 영역에서 탁월하게 작용"104)하는 양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① 아아 부부는 인륜이요 모자는 타고난 성품입니다. 어머니를 아침에 맞아들이고 나서 자식은 저녁에 내쫓겼으니 정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1년 가까이 기다려 비로소 한번 얼굴을 보는 때였습니다.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는 정과 같은 마음이 쓰이는 것을 어찌 견디겠으며, 죽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비통한 마음처럼 얼마나 애간장이 마디마디 끊어지는 듯했겠습니까. 어린 자식을 껴안고 젖 한번 물리고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마침내 살은 문드러지고 뼈는 부서져 가루가 되어 살아서는 3일을 살갗이 성한 곳이 없었고, 죽어서는 천년의 원통한 귀신이 될 줄을 어찌 뜻하였습니까. 아아, 정씨는 원래 자기 몸을 버려 자식을 살리려고 한 짓인데, 이제 도리어 자식 때문에 그 몸이 죽었으니, 죽어서 알지 못한다면 그만이지만, 죽어서도 아는 것이 있다면, 피 흘리고 살이 터지고 손가락이 잘리고 늑골이 부러진 몸으로, 흉악한 놈이 조금이라도 관대한 처벌을 받기를 바라겠습니까.105)
② 음양위는 15세 된 교활한 미소년이었습니다. 황전은 그 남색을 좋아하여 친하게 지내려고 사홍을 통해 만나자 하고 관극하는 곳에서 기회와 인연을 기다렸으니 미욱한 자가 무턱대고 , 덤벼드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곧 앞의 물고기를 미끼에 놀라게 하여 풍류가 없게 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음양위는 참으로 흐르는 물처럼 무정하여 "문 앞을 지나면서 들어오지 않는다."할 만 했습니다. 쓸쓸한 서재에 짝을 지어서 휘장 속으로 들어갔건만 달빛은 가득하고 봄 아지랑이는 아물거리는데 밤은 바야흐로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여 거절하였다는 말을 지어내어 양왕(襄王)을 고달프게 한 것은 정리에 있을 법하지 않은 일입니다.106)
①의 글은 재가한 여성이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게 된 사건에 대한 심어(審語)이다. 심어를 작성한 해당 관리로서 서술자는, 남편에게 학대당하여 자살하게 된 여성 피해자의 억울한 입장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그는 자살의 결정적 원인으로, 여성 피해자가 모성(母性)을 지키려다 학대당했기 때문이었음을 내세우며, 비유적 표현을 통해 피해자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어미소가 송아지를 핥는 정같이 마음이 쓰이고, 죽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비통한 마음처럼 애간장이 마디마디 끊어지는(犢舐口口堪憐猿腸寸寸欲斷)"107), "천년의 원통한 귀신(千年之怨鬼)" 등 피해자의 입장을 드러내는 수사적 표현과 함께 피해자의 참혹한 상처를 묘사하는 것은 사건 해결에 관여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전략의 한 방식이다. 이는 사건 해결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최대한 피해자의 입장을 공감하고 가해자인 남편을 강력히 처벌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에 ②의 글은 남색의 연정관계에 있던 이에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가족이 뒤늦게 사건해결의 의문을 제기하는 등, 본 사건에 의옥(疑獄)에 해당한다는 판단 하에서 사건 사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신상(申詳)이다.
104) 안미현,「학문적 글쓰기와 수사학적 설득」,『독일어문집』34, 2006, 162쪽.105) 嗟乎夫婦人倫母子天性母朝入而子暮出情何以堪乃偵俟年餘始獲一面斯時也犢舐口口堪憐猿腸寸寸欲斷豈意以抱麑之悲流連一乳遂至化肉爲糜碎骨爲粉生無三日之完膚死作千年之怨鬼.『欽欽新書』卷5,「批詳雋抄」二, <毛賡南自縊審語虐妻自殺>.
106) 陰陽位以十五狡童黃田悅其色而求與爲好觀其導款曲於謝紅侯機緣於觀劇似非傖父狂且躁率無術者比卽使前魚驚餌何至焚鶴碎琴況位果流水無情謂當過門不入耳乃寂寂書齋雙雙入幕月楹春陰夜乃丙矣而忽作正襟之拒以惱襄王當非情理之所有也.『欽欽新書』卷6,「批詳雋抄」三, <趙最疑獄申詳男淫疑殺>.
107) 죽은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비통한 심정을 말한 것이다. 진(晉) 나라 사람이 산에 들어가서 새끼 원숭이를 잡아와 나무에 묶어 두었다가 마침내는 죽이고 말았는데, 그 나무 위에서 계속 하소연하는 듯 슬피 울다가 끝내는 나무 위에서 몸을 던져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가르고 보니 애가 마디마디 끊겨져 있더라(腸皆寸寸斷)는 이야기가 전한다.『世說新語』,「黜免」.
신상의 서술자는 죽은 음양위를 동정하거나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입장이라기보다는 "교활한 미소년(狡童)", "흐르는 물처럼 무정하여(況位果流水無情)"의 표현 등을 통하여 오히려 음양위의 성품이 사건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자신의 판단을 곁들이는데 반해 황전은 "양왕(襄王)"108)이라고 비유하면서 음양위가 유혹하여 당시 사건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당위적 상황에 대한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
정약용이 대신 지은 발사(跋辭) 역시 서술자의 관점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규정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아아, 저 재앙을 빚은 우두머리인 김상운을 사형에 처할 수 없단 말인가. 아아, 필부가 정절을 품고 오랫동안 백주의 맹세(柏舟之誓)를 굳게 다졌으나, 미친 사내는 무례하게 번포지계는 생각지 아니하고 깜깜한 밤에 뛰어들어 파리처럼 더럽히는 계책을 이루지 못하자 비밀리에 더욱 교묘히 개미떼의 후원을 늘어놓고 꾀하여, 마침내 티 없는 보배로 하여금 끝내 스스로 부수는 구슬이 되게 했으니, 이 사실을 보는 사람은 마음을 다치고 듣는 사람은 머리를 쭈뼛하게 되었다. 비록 그자로 하여금 스스로 설명하도록 하더라도 그가 또한 무슨 말로 죽음에서 벗어나겠는가.
가엾다 정녀(鄭女)여! 현숙하지만 운수가 사나워서 남편의 죽음이 3년이 안되었고 아이는 태어난 지 겨우 한 돌이 지났다. 백년의 상투를 틀고 쪽을 짓고 부부가 된 정을 생각하여, 유복녀 한 핏덩이를 안고, 깊은 슬픔을 마음에 지녔으나 매운 정절은 달라지지 않았으며 양육의 노고를 마쳐 저승과 이승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했으니, 그 아름다운 뜻을 돌아볼 때 또한 고통스런 일이다. 참으로 조금이나마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어찌 차마 이 여자를 더럽혀 무너뜨리겠는가.…중략… 가엾은 이 정녀가 문을 걸어 잠그고 방으로 들어갈 때,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는 고통을 품고 더럽혀지는 것에 미치겠으나 도망칠 수 없으니, 세 겹의 끈으로 스스로의 한 가닥 목숨을 끊어야 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109)
108) 소식(蘇軾)이 일찍이 서주(徐州)에 있을 때, 전당(錢塘)에서 승 삼요(參寥)가 찾아왔으므로 소식이 한 기녀로 하여금 장난삼아 삼요에게 시를 요구하도록 하자, 삼요가 절구 한 수를 불렀는데 그 시에, “술동이 앞의 낭자가 많이 고맙기는 하지만, 그윽한 꿈 좋이 가져다 양왕이나 꾈지어다. 스님 마음은 이미 진흙에 붙은 버들개지가 되어, 동풍을 쫓아 위아래로 미쳐 날지 않는다오. (多謝尊前窈窕娘好將幽夢惱襄王禪心已作霑泥絮不逐東風上下狂)”라고 했다. 양왕은 유혹을 받게 된 인물을 뜻한다.
109) 噫彼禍首之金尙雲不得置之大辟乎嗟乎匹婦懷貞久堅柏舟之誓狂夫無禮不念樊圃之戒黑夜突入計未售於蠅汚暗地排布謀益巧於螘援遂使無瑕之玉竟爲自碎之璧見之者心傷聞之者髮竪雖使渠自爲之解說其亦何辭以免死乎哀哉鄭女賢而薄命郞死不及三霜兒生纔過一朞念百年結髮之情抱一塊遺腹之產深悲在中苦節靡渝庶卒鞠養之勞不負幽明之義顧其志良亦苦矣苟有一分人心何忍段汚此女…중략… 哀此鄭女當鎖門入房之時懷跼天蹐地之痛汚衊將及逃遁不得遂將三糾之索自殘一縷之命思之及此寧不痛心.『欽欽新書』卷29,「剪跋蕪詞」二, <康津縣鄭節婦初檢案跋詞(代人作)>.
윗글에서 정약용은 수절을 지키는 여인을 자결하게 만든 사건의 가해자를 "재앙을 빚은 우두머리(彼禍首之金尙雲)", "미친 사내(狂夫)", "파리처럼 더럽히는 계책(售於蠅汚)"을 저지르는 인물로 규정하며, "티 없는 보배(無瑕之玉)", "스스로 부수는 구슬(自碎之璧)"로 비유된 피해자와 극렬히 대조시키고 있다.
"가엾다(哀哉)"라는 표현에서 서술자는 자신의 안타까운 심경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데, "柏舟之誓"110)의 표현을 통해 정렬부인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며, 이것이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주요한 이유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혼하자마자 유복녀를 키워야만 하는 미망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의 비극적 개인사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과, 정절을 지켰던 피해자의 인격을 예찬하는 것은 마치 제문(祭文)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이러한 형사사건의 문예적 서술 방식은 모두 서술자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로서 기능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서술자의 주관이 표현된 방식은 곧 사건의 경중에 대한 서술자의 판단을 보여준다. 또한 사건을 보다 개별화, 구체화 시키면서, 법률의 논리만이 아니라 그 이면의 다양한 정황을 고려하도록 사람들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며, 사건에 대한 해석과 판결에 영향을 미치도록 한다.111)
110) 과부가 수절(守節)하는 것을 말한다. 백주(柏舟)는『시경(詩經)』,「용풍(鄘風)」의 시(詩) 제목으로, 위(衛) 나라 태자 공백(共伯)의 처(妻) 공강(共姜)이 남편 사후 재가(再嫁)하지 않고 절조를 지킨 내용을 읊은 시이다.
111) 법관이 "법적 논증에서 부적절한 문학적 해석과 수사의 사용을 자제하는 법 또한 익혀야 한다.
셋째, 해석된 ‘비극적 이야기’로서의 살인사건에 관한 판결은 문학적 수사의 표현을 넘어 문학적 장르의 형태로 표현되기도 한다.112)
<답사행사(踏莎行詞)>에 이르기를 "이 까까중놈 수행이 어
긋나 운산 꼭대기에서 계율을 잘 지켜야 함에도 기생을 좇아 사련에 빠졌으니 누더기 옷 어쩔 수 없네, 독수(毒手)로 사람을 해치니 꽃 같은 얼굴 산산이 부서져 모두가 헛된 것, 이제 무엇이 남았나. 팔뚝의 자자(刺字)에 상사(相思)의 고통을 말했으니, 이제는 사랑의 빚을 돌려주어야 하는 수밖에..." 라고 판결을 마치고 형장으로 보내 죽였다.113)
윗글은「경사요의」에 <음탕한 중이 기생을 죽이다(淫僧殺妓)>의 조목으로 실린 사건에 대한 글인데, 정약용이『요산당기(堯山堂記)』에서 수록한 사례로 보인다.
이 사건은「비상준초」에 <소안원의 음란한 중에 대한 사형 판결문>의 조목에도 등장하는데, 이 사건과 판결문인 <답사행>이 사건이 문학 장르의 소재로서 널리 향유될만한 대중성을 획득하였음을 보여준다.
윗글에서 판관인 소식은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느낀 정서적 공감을 판결문에 <답사행(踏沙行)>의 형식으로 담아내면서, 기생을 살해한 행위에 대한 형을 받는 것을 "사랑의 빚을 돌려주는 것(還了相思債)"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소식이 이 사건을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닌, '중과 기생의 비극적 치정 이야기'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판결문의 표현 방식은 자신의 정서적 공감이 서는 점이 강조된 것"은 (이소영,「법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해체주의 문학방법의 법적 수용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5, 8쪽) 수사학적 기술이 판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이 인정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시의 형식으로 '향유'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114)
112) 이소영은 문학으로서의 법의 특징으로, 1) 법학의 '이야기하기'적 속성, 2) 연작소설로서의 판결문, 3) 문학적 수사(rhetoric)와 법의 관계를 그 근거로 든다. 문학으로서의 법(law as literature)은 법의 이야기하기(storytelling)적 속성에 기반한 것이라는 의견(D. Farber and S. Sherry, "Telling Stories out of School : An Essey on Legal Narratives", Stanford Law Review 제45호, 1993, 807쪽.)을 소개하면서, 이에 대한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법을 문학작품처럼 해석되어야 할 이야기라고 보는데 대다수가 동의한다고 한다는 G. Minda,의 주장(21쪽 참조)을 소개하고 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소영, 앞의 논문 참조.)
113) 踏莎行詞云"這箇禿奴修行忒殺雲山頂上特戒一從迷戀玉樓人鶉衣百結渾無奈毒手傷人花容紛碎空空色色今何在臂間刺道苦相思這回還了相思債..." 判訖押赴市曹處斬.『欽欽新書』,「經史要義」卷三, <淫僧殺妓>.
114) "법을 통한 관계의 회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관계가 일그러진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러한 아픈 사람들이 법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면서-법률가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초대함으로써-기대하는 것은 법률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분석해주는 것이 아니다. …중략…법의 관계 속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각자의 이야기는 예 외 없이 '더 진실한 것이며, 법률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경험'하고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초대를 하는 것이다." (이상돈 외 3인 공저,「화자의 관점」,『문헌연구 포스트모더니즘과 법』, 세창출판사 2006, 52쪽.)
2.2.2. 문학적 장르의 선택: 야담․야사․전․소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례의 출전이 다양하다는 것은『흠흠신서』의 큰 특징이다. 특히「경사요의」는 정사와 야사, 그리고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야담류가 혼재되어 있는 양상을 보인다.「경사요의」는『흠흠신서』의 총론에 해당하는데115) 이 부(部)의 서두에 그 의의를 밝혀놓았다.
형사사건 처리 방법에는 원칙과 예외가 있되, 조금도 융통성이 없으면 안 된다. 더러 법률에 해당 조문이 없는 경우에는 고훈(古訓)․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참작하는 자료로 삼아야 하니, 이에 경전이나 역사서의 중요한 뜻을 간추려서 가려 쓰도록 하겠다.116)
정약용은 형사사건의 해결이 법률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전례를 바탕으로 융통성을 발휘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정약용은「경사요의」앞부분에서 밝힌 13개 대의(大義)를 기준으로 이에 합당한 전례로서의 사례들과 대의를 보충할만한 사례를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117)
115) 권연웅, 앞의 논문 153쪽.
116) 斷獄之法有經有權不可膠柱其或法津之所未言者宜以古訓古事引之爲義以資參酌玆摭經史要義以備採用.『欽欽新書』,「經史要義」卷1.
117)「경사요의(經史要義)」13조목은 다음과 같다. <표-10>
「경사요의」13조목
1 眚怙欽恤之義 생호(生․怙)에 관한 흠휼(欽恤)
2 辭聽哀敬之義 진술의 청취와 애경(哀敬)
3 明愼不留之義 명신(明愼)하여 옥(獄)을 유(留)하지 않음
4 司刺宥赦之義 사자(司刺)의 유사(有司)
5 過殺諧和之義 과실에 의한 살인과 해화(諧和)
6 仇讎擅殺之義 구수(仇讐) 천살(擅殺)
7 義殺勿讎之義 의살(義殺)은 복수하지 못함
8 受誅不復之義 수주(受誅)는 복수하지 못함
9 議親議貴之義 의친(議親) 의귀(議貴)
10 亂倫無赦之義 난륜(亂倫)은 용서될 수 없음
11 弑逆絶親之義 시역(弑逆)에는 친(親) 단절의 뜻
12 盜賊擅殺之義 도둑의 천살(擅殺)
13 獄貨降殃之義 옥화(獄化)는 재앙을 내림
「경사요의」사례 117건118) 중 선행연구에서 출전이 밝혀진 것을 제외하고, 정약용이 출전을 밝히지 않은 사례의 일부를 본고에서 확인하여 보았다.
<표-11 생략>
<표 -9>을 살펴보면 정약용은 어떠한 사례의 출전은 명확히 밝히는 반면에 어떠한 사례들은 출전을 밝히지 않는다. 정약용이 무엇을 출전 기록 여부의 원칙으로 삼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정약용이 명확히 출전을 밝힐 수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해당 형사사건의 담론의 성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19)
살펴보건대, 시역(弑逆)사건은 반드시 극형으로 처벌하고, 정황은 묻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사책에 전한 기록이 없고, 오직『유청집(留靑集)』에 어머니, 형, 남편, 주인 등을 죽인 사건의 기록이 있다. 판결 내용은 하편에 엮여 있으니 일을 처리하는 자는 참고하기 바란다.120)
118) 우리나라의 사례 38건과 중국의 사례 79건이 실려 있다. (권연웅의 연구(1996) 이후에 현대실학사의『흠흠신서』(1999) 간행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사례 2건이 추가되었다.) 권연웅은 중국의 사례가 더 많은 이유가 정약용이 이용한 사례집의 제약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심희기의 출전연구에 이어 중국의 사례의 39건을『의옥집』,『절옥귀감』에서 인용했음을 밝혔다. 정약용이 중국 사례의 출전을 거의 다 밝히지 않은 이유로, 다른 사례집에 인용된 것을 재인용했기 때문이라면서, 출전의 확인을 앞으로의 과제로 남겼다. (권연웅, 앞의 논문, 156쪽.)
119) 임완혁은 출전을 밝히는 것은 기존 자료의 가치를 인정하고 저작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筆記類의 위상이 稗說, 野談과 대비되는 모습이라고 지적한다. (任完爀,「조선전기 筆記의 전통과 稗說」,『大東漢文學』題二十四輯, 2006, 89쪽 참조.)
120) 案弒逆之獄隨用極刑不問情理故史冊無傳唯留靑集錄弒母弒兄弒夫弒主等獄判編在下篇當事者考焉.『欽欽新書』,「經史要義」卷1, <弒逆絶親之義>.
위 글은「경사요의」에 시역사건을 수록한 경위를 적어놓은 것이다. 정약용은 꼭 필요한 사례를 수집하기 위한 기록을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던 자신의 입장을 토로하고 있다.
시역사건은 계급체제를 뒤흔드는 가장 반사회적이고 위험한 사건이다. 정황을 불문하고 극형으로 처벌된 사건들은 그 전모가 역사책에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반사회적 담론은 기록의 제약뿐만 아니라, 공론의 장121)에서 형사사건의 해결을 위하여 논의되는 것에도 제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공론의 장이야말로 지배담론 하에서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장 구체적인 사실로서 검증되어야 하는 영역이지만,『흠흠신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당대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자가 양반 씨족이기 때문에 간음에 대한 말은 오히려 차마 입에 올리지 아니하고 죽게 될 때의 절차만을 야금야금 물어 조목조목 끝까지 따져 물었으며…122)
위의 글은 간음 사건의 연루자로 양반이 심문을 받는 상황을 기록한 형사 공문서의 일부분인데, 간음이라는 금기 담론이 논의가 허락되어야만 하는 공공의 장소에서도 통제당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유교적 신분질서와 충돌하는 형사사건의 해결과정에서, 유교적 가치에 반하는 담론을 공론화하는 절차가 허용되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정약용은 이러한 현실적 상황이 인명 사건의 해결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직시해야만 하는 형사사건 실체를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도록 한다.
121) "공론영역에 관한 근래의 여러 연구 성과들이 제기하듯, '추상적이고(abstract) 실체 없는(disembodied)'주체는, 자신의 고유한 특수성을 '패러다임적인 주체성'의 기획 아래 입막음 당한다." (이상돈 외 3인 공저,「토포스 속에서 자아를 찾고 자아를 잃다」, 앞의 책, 16쪽.)
122) 其士族之故奸淫一款猶不忍汚口只以致死時節次由淺入深逐條究詰…『欽欽新書』卷八,「祥刑追議」十二, <彝倫之殘五(淫姑殺婦計在滅口根由奸淫實因被刺)>.
역사서로 전해질만한 이야기가 아닌 사례들은, 이외의 서적이나 구전되는 이야기 중에 발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형사사건 처리의 전범으로서 선별된 사례들의 일부는, 당대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성격 때문에 출처를 밝히기에 적합하지 않은 서적들에 수록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정약용은『흠흠신서』의 사례들에 구체적인 사건발생 시기와 가해자 피해자 등의 인물정보를 기록함으로써 사건의 사실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약용은 그동안 야담의 형태로 존재해온 이야기들의 진실성뿐만 아니라 사실성에 주목한 것이다.
「경사요의」의 출전 분석은 이미 선행연구에서 시도되었으나, 출전이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야승에서 온 것으로 알려졌다.123) 정약용이 출전으로 밝혔지만, 확인할 수 없는『유산총화(酉山叢話)』124)의 이야기 역시 영조가 판결한 사건이지만, 야담적 성격의 사례로서 사건의 사실 여부는 다른 출처에서 확인할 수가 없다.
『유산총화』에 일렀다. "공주에 살던 한 가난한 선비가 걸음이 느린 말을 타고 호젓이 산 밑 길을 지나는데 산 위에는 나무꾼 십여 명이 벌여 앉아 쉬고 있었다. 이들이 말에서 내리라고 소리쳤으나 가난한 선비는 듣지 못했다. 나무꾼들은 떼 지어 내려와 가난한 선비를 끌어내리고는 그들의 성기를 입에 빨려 욕을 보이자고 의론했다. 가난한 선비는 힘이 약해 다만 공손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 나무꾼은 그 성기가 대단히 강했는데 입에 물리고 왔다 갔다 하면서 한참을 뽑아내지 아니하니 가난한 선비는 분함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그것을 깨물어 피가 나왔으며, 저들 또한 흩어져 돌아갔다. 며칠 뒤 물린 독이 크게 덧나서 마침내 죽게 되었다. 초검과 재검에서 모두 목숨으로 보상해야 한다고 했다.
절도사 이원 은 (李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손자이다. 이 때 서산군수로서 마침 공주에 와 있었다. 조사관에 임명되어 관찰사에게 들어가 보고하기를 '이 사건은 목숨으로 보상되어서는 안된다.'라고 하고 정상을 참작하여 석방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관찰사는 성을 내며 '사람을 물어 죽였는데 어찌 목숨으로 보상하지 않는단 말인가?'라고 하니, 이원은 다투어 끝까지 굽히지 않으며 '가령 사또께서 이 경우를 당하면 어찌 그 성기를 물지 않고 견디겠습니까?'라고 했다. 관찰사는 크게 성내며, '관아에서 난잡한 말을 했다'하여 파면할 것을 장계를 올려 요청하고 그 사건을 기록하여 승정원에 보고했다.
영조 임금은 장계를 보고 의문을 품고 승지를 불러 물었다. 승지가 자세한 내용을 아뢰니, 임금은 '이원의 말이 옳다. 가령 승지가 이 경우를 당하면 그 성기를 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정은 같다. 죄를 줄 수 없다.'라고 하고 드디어 무죄 석방시킬 것을 명령하고, 조사관도 파면시키지 말라 했다."125)
이 사건이 필기류로 추정되는『유산총화』에 수록되었던 것은 그것이 단순한 판례 이상의 이야기로서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건의 기록에 등장하는 실명은 살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사건의 해결을 훌륭히 해낸 이원과 영조이다. 상급 관리에게 당당히 판결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의로운 관리는 바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원군을 이끌고 공적을 세운 이여송의 손자이다. 결국 이여송은 영조의 판결로 선정을 인정받으며, 억울한 백성도 사형에서 벗어난다.
이 이야기는 반유교적이며 선정적이다. 그러나 상급관리와의 갈등을 무릅쓰고 힘없고 가난한 선비를 구하기 위하여 뜻을 굽히지 않는 관리와 담론의 금기를 깨면서 이 관리의 편을 통쾌하게 들어주는 왕의 이야기는 재미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123) 심희기와 권연웅의 앞의 논문들을 참조.
124)『역주 흠흠신서』에서는『유산총화』가 다산의 저술『목민심서』에서 인용해 쓴『유산필담(酉山筆談)』과『유산필화(酉山筆話)』,『유산일초(酉山日鈔)』등을 한데 묶어 일컬은 듯하며, 이들이 다산의 저술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역주 흠흠신서』1권, 人名․索引해설, 372쪽.)
125) 酉山叢話云公州有一寒士騎款段馬蕭條過山下山上有樵者數十人羅坐休息遙叫下馬寒士不聽樵者羣下來拽下之議以陰莖納口中以示辱寒士力弱但得恭受有一夫其莖甚強納口進退良久不拔寒士不勝憤苦齘以咬之血出伊等亦散去後數日咬毒大發遂至致命初檢覆檢皆請償命李節度源提督之孫也時爲瑞山郡守適到公州遂差査官査訖入告于監司曰此獄不當償命仍請酌放監司怒曰豈有口咬殺人而不償命者乎李公爭之不已乃曰令使道當此境豈不咬其莖乎監司大怒遂以公堂悖說狀請罷黜書記其事報于政院英宗大王覽奏疑之召承旨問之承旨具達其事上曰李源之言是也令承旨當此境能不咬其莖乎人情所同不可罪也遂命白放査官勿罷.『欽欽新書』卷2,「經史要義」二,<憤殺樵夫>.
이 이야기의 갈등 구조는 두 개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억울하게 사형을 선고받은 선비를 중심으로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여송과 상급관리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구조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건에 연루된 가해자와 피해자라기보다는 사건의 해결자인 이원과 영조인 것이다. 이러한 사대부 일화적 성격126) 때문에 전승되어 사대부들이 공유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흠흠신서』에서 법리적으로 고려할만한 형사사건의 모범이 되는 사례로서 정사(正史)와 나란히 수록된다. 반윤리적 인격모독 사건의 피해자인 선비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정상 참작하여 융통성을 발휘하여야 한다는 법리적 교훈과, 사건처리 과정에서 반사회적 담론을 통제하려는 관리의 폐해를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앞으로의 사건처리에 경계를 삼게 한다.
정약용은 이렇게 통제된 반사회적 담론들의 실체를『흠흠신서』안에서 '역사' 로 끄집어낸다. 그것은 부정되어온 세상의 실체를 직시하려는 시도이다.「경사요의」에 실린, 꿈에 알려주어 시체를 찾은 사례, 꿈에 알려주어 다친 흔적을 알아낸 사례, 바람에 날린 나뭇잎으로 시체를 찾아낸 사례, 뱀을 뒤쫓아 시체를 찾아낸 사례 등은 일반적으로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영역까지 형사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려하여야 한다는 정약용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정약용이 수록한 이러한 야담적 사례들은 "실화와 설화의 공교한 합성 또는 역사와 문학의 융화적 결정체"127)로서의 성격을 갖는데, 서로 다른 층위에서 존재하던 이야기들은 편찬자 정약용의 관점에 따라 개연성을 지닌 사례 연구의 대상이 되면서, 판결을 위하여 참고할만한 사례의 표본으로서 서로 대등한 입장을 갖는다.126) 이강옥은 일화가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나 실존한 인물에서 포착할 수 있는 특별한 사연을 언어화한 것이므로 일화에서 가장 중시되는 점은 실재성, 현실성이라고 한다. 일사(逸史)가 빠뜨려진 역사로서 빼어난 역사, 특별한 역사라는 뜻도 간직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대상으로 한다면 일화는 일상사를 대상으로 하고, 일사가 역사의식 혹은 과거의식을 바탕으로 한다면 일화는 현재적 체험이 중시, 일사가 역사적 진실 후세전달 목표이며, 일화는 현재전후한 시각에 일상생활 중 일어난 재미나거나 독특한 사건을 알리는 것 목표라고 한다. (이강옥「일화의 설정과 그 정의 및 역사」,『야담문학연구의 현단계 1』, 정명기 엮음, 보고사, 2001, 96쪽 참조.)
흠흠신서 에서 기존의 『』관습적인 이야기 층위의 구분은 무의미해진 것이며, 이것은 이야기를 인식하는 개인이 이야기들을 가치매김 하면서, 새로운 텍스트로 탄생시켰다는 것을 뜻한다.128)
결과적으로『흠흠신서』는 금기된 담론들을 사대부의 대표저서에 수록하여 공개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기회를 넓힌 것으로서, 사회문화적 현실로서의 가치가 인정될 수 있는 존재 영역을 확장할 수 있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129)
둘째, 위에서 살펴본 야담이나 야사의 형식뿐만이 아니라『흠흠신서』에는 인명사건을 소재로 한 산문 문학 장르인 전(傳)과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상형추의」에는 이덕무(李德懋)의 전 두 편이 각각 수록되었다.「은애전(銀愛傳)」130)은 <인정과 도리에 대한 용서>에, 신여척(申汝倜)의 이야기는 <의로운 기개에 대한 용서>에, 각각의 사건에 대한 간단한 요약 후 검안(檢案)은 빠져있다고 기록하고 소상한 사건의 전말을 전으로 수록한 것이다.131)
127) 김창룡,『고구려 문학을 찾아서』박이정, 2002, 240쪽.
128) 그동안 선행연구를 통해『절옥귀감』이「경사요의」의 출전이라고 밝혀졌으며, 층위의 구분 없이 사례를 수록한 방법에서『흠흠신서』와 공통점이 있다. 김지수는 그 자료의 선택 수록이 시대상으로나 문헌상으로 매우 광범위하여, 위로는 역대 정사(正史)와 실록(實錄)으로부터 아래로는 각종 문집(文集)이나 필기소설(筆記小說)까지 망라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많은 원전(原典)은 이미 망일(亡佚)되어 전해지지 않고, 일부 내용은 현전 자료와 중요한 차이도 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나 문화, 특히 법제사(法制史)를 연구하는 학자에게도 학문적인 참고문헌 가치가 클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아직 명확히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절옥귀감』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통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판례집의 편찬은 후대로 갈수록 국가적인 관방(官方)판례집 편찬의 전통으로 이어져, 청(淸)의『형안회람(形案匯覽)』이나 조선의『심리록(審理錄)』등을 낳았으며,『흠흠신서』를 비롯한 한중 각 왕조의 적지 않은 개인 문집 형태의 판결집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짐작된다고 하였다. (정극 편저 ; 김지수 옮김,『절옥귀감 : 고대 중국의 명판례』, 서울 : 소명출판, 2001, 5쪽.)
129) "다산은 저술을 설명하면서 경집이 232권, 문집이 260여권이라고 분리해서 말했다.『목민심서』와 같은 경세의 저작은 모두 문집에 포함되어 있다." (정민, 앞의 책, 68쪽.)
130)『欽欽新書』卷八,「祥刑追議」十一,<情理之恕八(室女被誣自殺奸婆根由奸淫實因被刺)>.
131)『흠흠신서』의「상형추의」에 판부만 실려 있는 조목에는 정약용이 "검안이 빠져있다. (檢案闕)"는 표현을 쓴다. 이것이 해당 사건의 공문서 기록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인지 일부러 편집하여 수록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두 전을 수록한 조목에 다음과 같이 공문서의 누락을 밝히고 있다. "강진현 김은애가 안소사를 죽였다. 검안은 빠져있다. 이덕무가 지은 은애전에 이르기를 … (康津金女銀愛殺安召史檢案闕李德懋作銀愛傳曰….『欽欽新書』卷八,「祥刑追議」十一,<情理之恕八室女被誣自殺奸婆根由奸淫實因被刺>.) ", "장흥 백성 신여척이 김순창을 죽였다. 검안은 빠져있다. 이덕무가 지은 소전에 이르기를… (長興民申汝倜殺金順昌檢案闕李德懋作小傳曰…. 『欽欽新書』卷八,「祥刑追議」十一, <義氣之赦一兄不庇弟鄰以義殺根由義憤實因被踢>.)"
이덕무가 이 두 사건을 전으로 지은 것은 정조의 명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김은애전과 신여척전을 지어 올렸다. 은애는 강진현에 사는 양가의 딸이다. 이웃에 사는 노파가 그가 음탕하다고 헛소문을 냈으므로 속으로 분하고 원통하게 여긴 나머지 칼로 노파를 찔러 죽이자 그의 정렬을 장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현관(縣官) 박재순(朴公載淳)이 그의 정상을 살펴서 풀어주고자 했으나 법을 어길 수 없으므로 옥에 가두었다.
이 때 장흥사람 신여척이라는 자가 있었다. 같은 마을 사람 김순창이 자기 동생이 보리를 훔쳤다고 꾸짖으며 형제간에 싸우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겼다. 이는 대개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여척이 순창의 의롭지 못함을 문책하고 발로 차서 죽였다. 이 일이 발각되어 그 또한 옥에 갇히었으니, 이는 모두 기유년(정조 13년)의 일이었다.
이해에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서 상이 사형수들의 기록을 검토할 때 특별히 재가를 내려 아울러 석방하였다. 그리고 이어 공에게 명하여 전을 짓게 하고 내각일력에 싣게 하였다132)
이덕무의 기록을 보면, 김은애 사건과 신여척 사건은 법리와 정상 참작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조가 규장각의 소관업무나 문화사업에 관련된 것을 수록한 내각일력에도 두 전을 싣게 한 것을 보면 명찬(命撰) 전(傳)의 문화적 가치나 효용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조는「은애전」에 수록된 판부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전의 목적을 밝힌다.
이러한 일이 열국시대에 있었더라면 그 삶과 죽음을 멀리하고, 의기와 절조를 높여 섭영과 명성을 나란히 하여, 사마천도 또한 사기의 유협전 끝에 기록했을 것이다. 수십 년 전 황해도에 이와 비슷한 형사사건이 있었다. 관찰사가 용서함을 요청하므로 조정에서 표창하여 , 찬양하는 유시(諭示)를 내려 곧 석방하도록 명령했다.
그 여자가 감옥에서 나가자 중매쟁이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금으로 그 여자를 취하려 했는데 마침내 선비의 아내가 되어 지금까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 온다. 다만 이제 김은애는 이러한 행동을 출가한 뒤에 해냈으니, 더욱 높이 뛰어남이 아니겠는가. 김은애를 특별히 석방하라.
일전 장흥의 신여척에 대한 범죄에 의문이 있어 죽음을 모면시켜 살려 줌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와 기개와 절조를 무겁게 여기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김은애를 특별히 석방함도 또한 이런 따위인 것뿐이다.
김은애 사건과 신여척 사건의 줄거리 및 판부의 내용을 베껴 도내에 반포하여,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없고 기개와 절조가 없는 자는 짐승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풍속과 교화에 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133)
위의 판결문에서 정조가 본 사건을 전으로 지을 것을 명한 이유는 살인사건의 가해자 김은애의 의기와 절조가 섭영에 비견되기 때문인 것이며, 사마천이「유협전」에 지어 수록할 정도로 두 사건이 유교적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정조는 김은애와 신여척이 비록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것이 오히려 윤리를 지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었던 경우라고 판결하였다.「은애전」을 저술한 표면적 목적은 풍속의 교화이지만, 정조는 이와 함께 살인사건의 가해자가 된 김은애가 간음에 관한 모함을 입은 상황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음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판결의 정당성이 공감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은애전」에는 김은애가 양가집 딸이라는 출신 성분이 강조되고, 살해된 안소사가 원래 창기(娼妓)출신으로 성품이 간사하고 허황스럽다는 등의 인물설명이 충실히 담김으로써, 사건의 전모가 전의 장르를 통해 입전자의 입장에서 생생히 재구성 된 가운데 김은애를 석방하라는 정조의 판부는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은애전 과 「」「신여척전」은 공적인 해석에 의해 사실성과 진실성이 부여된 형사사건 해결의 기준인 "이념적 가치"가 "언어적으로 재현"되어 적극적 "설득의 기제"로 작동되는 것이다.134)
132)『국역 청장관전서 12』, 민족문화추진회 편, 솔, 1997, 178~179쪽. (製進金銀愛申汝俶傳銀愛康津縣良家女也有隣嫗誣其淫竊自憤寃挺刃刺嫗人莫不壯其烈縣官朴公載淳驗其狀察其情欲原釋法不可屈係于獄時長興人申汝倜者痛其同里金順昌詈弟盜麥䦧于牆盖誣也汝倜責其不義踢而殺之事發亦係獄皆己酉事也是歲國有大慶上錄死囚特下判付幷放仍命公立傳載之內閣日曆.『靑莊館全書』卷之七十一,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133) 若使玆事在列國之時其外死生尙氣節可與聶嫈而齊名太史公亦當取而書之於游俠傳末(分叱不喩)往在數十年前(卽英宗朝) 海西有似此獄事按道者請原之朝廷下褒諭卽令釋之厥女出獄媒儈雲集以千金賭其女終爲士妻至今傳爲美談惟今銀愛辦此擧於旣嫁之後尤豈不卓然乎哉銀愛身(乙) 特放日前長興申汝倜之傅生出於重倫常重氣節也惟今銀愛之特放亦類是耳兩案梗槪及所下判辭謄頒道內俾知人而無倫常無氣節者與禽獸無異則未必不爲風敎之一助. 『欽欽新書』卷八, 「祥刑追議」十一, <情理之恕八(室女被誣自殺奸婆根由奸淫實因被刺)>.
134) 최기숙, 앞의 논문 322쪽.
그런데「은애전」과「신여척전」을 살펴보면 정조의 판결문뿐만 아니라 사건 발생의 범죄 행위에 대한 치밀한 묘사135)나 사건을 해결하는 형정절차에 대한 기술(記述), 사건처리에 관련된 관리들의 이름이 상세히 나타나는데 이것은「은애전」의 형사사건 공문서적인 성격 때문이다.136)
정약용은 두 전의 중간과 말미에 의견을 덧붙이거나, 이덕무의 찬(贊) 부분을 삭제하는 등의 편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약용이 "판례"적 성격을 공고히 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즉,『흠흠신서』에서 두 전은 단순한 문학적 텍스트가 아니라 고려할만한 판례인 것이다. 따라서 두 전은 공문서적인 성격과 자유롭고 풍부한 수사적 표현이 결합되어 공증된 판결의 정당성을 충실히 전하는 기능을 한다.
135) "은애가 빠른 소리로 말하기를, "여러 말 할 것 없다."하고 몸을 비키며 번개같이 목구멍 좌측을 찔렀으나 노파가 오히려 살아서 급히 칼 가진 팔뚝을 잡으니 은애가 홱 뿌리치며 또 목구멍 우측을 찔렀다. 노파가 비로소 우편으로 쓰러지므로 드디어 옆에 쭈그려 앉아서 어깨 위의 좌편을 찌르고 또 견갑(肩胛)ㆍ겨드랑ㆍ팔ㆍ목ㆍ젖을 찔렀으니 모두 좌편이다. 끝으로 우편 척추 등을 찔렀는데 혹 두 번, 세 번 찌르고 소리를 지르며 날치니, 한 번 찌르고 한 번 꾸짖기를 무릇 열여덟번이나 하였다. 칼의 피를 씻을 겨를도 없이 당에 내려와 문을 나와서 급히 정련의 집으로 향하여 남은 분을 풀고자 하였으나, 길이 멀고 그 어머니가 울며 말리어 돌아왔다."『국역 청장관전서4』, 민족문화추진회편, 솔, 1997, 37쪽.(銀愛疾聲曰"可勝言哉" 側身倐刺其喉左嫗猶活急把其持刀之腕銀愛瞥然抽掣又刺喉右嫗始右仆遂蹲踞于旁刺缺盆之左又刺肩胛腋胑䏩膊頸及乳皆左也末迺刺右脊背或二刺三刺揮霍飛騰一刺卽一罵凡十有八刺未睱拭刀血下堂出門急向正連之家聊以洩餘憤焉路遠其母泣挽而歸.『雅亭遺穚』,「銀愛傳」.)
136) 허경진은 사관이 왕명에 의해 열전을 지은 의도가, 권선징악을 보여주고 지배층의 가치관을 실현하는 인물을 표창하여 그러한 인간형을 보편화시키고 그에 반대되는 인물 유형을 깎아내려서, 현존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허경진 편역,『평민열전: 19세기 평민시대에 쓰여진 평민전기』, (주)웅진북스, 2002, 14쪽.)
정약용은 이 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자와 전의 창작자의 입장에 동의하면서「은애전」말미에 다음과 같은 의견을 덧붙인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가경 신유년 1801 겨울, 신이 강진현에 유배되어 민간에서 어렵게 살고 있을 때 , 읍내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김은애가 시집가기 전 이미 최정련과 사사로이 간행을 했고 안노파가 중매쟁이 노파가 되어 늘 안노파의 집에서 간통을 했으며, 그 뒤 이익이 적어지자 안노파가 널리 전파했다. 김은애가 마침내 죽이기는 했으나 집안 깊숙한 곳에서의 남녀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 했습니다.
무릇 간음에 대한 다툼은 한번 지목이 되면 여러 사람이 따라서 사실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담에, 도둑의 누명은 끝내 벗을 수 있으나 간음에 대한 모함은 씻기 어렵다 했으니, 이를 일컬은 것입니다. 만일 실제 범행이 있었다면 움츠러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서 이와 같이 통쾌하게 죽이지는 못할 것입니다.137)
윗글에서 정약용은 판결 이후에도 판결의 정당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직접 경험한 사실을 소개하면서, 그것은 간음 사건에 수반되는 모함이라며 판결의 정당성에 공감하는 입장을 드러낸다. 결국 이덕무의 전은 사건에 대한 정약용의 판단과 부합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기 때문에『흠흠신서』에 수록하기에 적합한 사례로 판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비상준초」4권과 5권에는 여상두138)의 공안소설 19편139)이 수록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이들 모두의 출전이『皇明諸司廉明奇判公案傳』140)임을 확인하고, 원제목과 내용을 <표-12>에서 정리하였다.
<표-12> 『흠흠신서』의 여상두(余象斗) 공안(公案)소설 원제목과 내용 – 생략
위의 표에서 소설들은 , 출전에서 모두 원제목이 따로 있으나, 정약용이『흠흠신서』의「비상준초」에 수록된 여타 조목과 같은 형식으로 제목을 수정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소설 속의 이야기를 다른 사례들처럼 하나의 판례로 여기겠다는 것을 의미한다.145)
원제목과 수정된 제목의 공통점은 사건을 해결한 관리의 이름이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비상준초」의 대부분의 조목도 마찬가지인데, 해당 관리의 이름이 포함된 제목을 붙이는 공안소설의 특징은 소설의 주인공인 판관처럼 공명정대한 법률관리의 출현을 소망한 심리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46)
137) 臣謹案嘉慶辛酉冬臣謫配康津縣窮居民間聽邑人之言曰銀愛自未笄時已與崔正連私奸安嫗爲作媒婆每於安嫗之家行奸其後利少安嫗播之銀愛遂殺之然中冓之事有誰知之凡奸淫之訟一被指目衆人從而實之故諺曰盜冤終脫淫誣難雪此之謂也如有實犯理當沮蹙不能若是之快殺也.『欽欽新書』卷23, <祥刑追議>十一, <情理之恕八(室女被誣自殺奸婆根由奸淫實因被刺)>.
138) 중국 명나라 때 건안(建安)사람으로 자는 앙지(仰止), 문태(文台), 삼태산인(三台山人)으로 통속소설을 편찬․간행하고 비평했다. 편서로『皇明諸司公案』,『廉明奇判公案』,『開闢衍繹通俗志傳』,『列國志傳』,『三國志傳評林』,『北游記』,『南游記』등이 있다. (『역주 흠흠신서 1』, 인명․서명 해설, 368쪽.)
139) 공안(公案)이란 관부의 공문서로, 특히 형사사건이나 민사사건 등의 소송사건과 관련된 문서 내지 그 해당사건을 뜻하는 것이다. 박명진은 다음과 같이 공안소설의 기원에 대해 설명한다. "오대시대 때『의옥집』과『절옥귀감』,『당음비사』등의 소송사건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책들이 나온 이후 송대에 본격적으로 "공안(公案)"이라는 이름이 붙은 문언단편소설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는데, 명대에는 소설 제재 면에서 완전히 독립된 공안소설이라는 한 소설유형을 형성하였다." (박명진,「明代公案小說專集의 創作과 刊行」,『중국어문학』제41집, 2003.)
140) 심희기의 앞의 논문에 따르면, 宮岐市定는「欽欽新書解題」(『朝鮮學報』, 제47집)에서, 日本 上野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全像類編皇明諸司公安傳』, 明萬曆間三台館刊本및 日本內閣文에 소장되어 있는『皇明諸司廉明奇判公案傳』, 明建安書林鄭氏萃英堂刊本임에 틀림없다고 하였지만,『흠흠신서』조목의 원제(原題)가 무엇인지와 현존여부를 모른다고 하였으므로, 여상두의 공안소설의 책 제목까지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심희기, 앞의 논문 50쪽 각주 참조.) 본고에서는 이 두권 중, 4권 105則의『皇明諸司廉明奇判公案傳』(일명『廉明公案』)이 출전임을 확인하고 원 제목을 밝혔다. 이 책의 6종의 판본간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본고의 대본으로 삼아『흠흠신서』조목의 내용을 확인한『廉明奇判公案傳』(上海古籍出版社, 1990)과『廉明公案諸司公案』(群衆出版社, 1999)에는 <표-12>의 ④ 范侯判逼節婦의 내용이 수록되지 않았고,『廉明奇判公案傳』목차에 제목만 있다. 두 책은 각각 萃英堂刊本(日本內閣文庫)본을 저본(底本)으로 삼았고,『廉明公案諸司公案』(群衆出版社, 1999)은 建泉堂刊本을 교본(校本)으로 한 것인데 이후 나머지 판본들을 확인하여 내용을 찾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中國通俗小說總目提要』(江蘇省社會科學院, 明淸小說硏究中心文學硏究所共編, 中國文聯出版公司, 1990, 124쪽.)에서의 제목과 내용을 요약한 것이『흠흠신서』의 조목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후 나머지 판본들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조선에서 여상두의 공안소설이 필사되어 읽힌 기록 등, 정약용이 어떠한 정확한 텍스트를 보았는지는 이후의 연구에서 분명히 밝혀져야 할 것이지만 본고에서 현존 본으로 출전을 밝히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소현,「공안 소설 다시 읽기」,『中國小說論叢』제17집, 2003, 254~255쪽. ;『廉明奇判公案傳』, 上海古籍出版社, 1990, 1쪽. ;『廉明公案諸司公案』, 余象斗(明) 編述, 李永祜, 李文笭, 魏水東校点, 群衆出版社1999, 160~161쪽 참조.)
141) 여상두 소설의 목차와 본문의 제목이 일치하지 않는 이야기의 제목을, 본문을 기준으로 바로잡은『廉明公案諸司公案』(群衆出版社, 1999)의 제목을 기술하였다.
142) 此下六條係余象斗所輯公案文亦雅馴故錄之.
143) 此下四條係余象斗小說頗不雅馴唯其差拘審核之法可考故錄之.
144) 此下九條亦余象斗小說荒誕不中抄錄特以告訴之狀招認之供其式例可考斯亦存之唯刪其浮蔓焉.
145) 루샤우펑은 명․청대 문학 비평에서 소설을 '보완적인 역사(補史)라고 여기는 관념이 일반적으로 나타나며, 소설의 역사와 경전을 보완할만한 가치는, 빠진 이야기들을 모아 기록하고 그 자신만의 방법으로 인간사의 심층을 꿰뚫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루샤우펑 지음, 조미원․박계화․손수영 옮김,『역사에서 허구로』, 도서출판 길, 2001, 94~96쪽.)
146) 이헌홍, 박소현의 앞의 논문을 참조.
정약용은 ①~⑥를 여상두가 수집한 "공안"으로 명명하면서 ⑦~⑲의 "소설"과 구분 지었는데, ①~⑥의 '공안'은 내용면에서 사실적이고, 형식상 실제 판결문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①~⑥ 중 ④번 항목을 제외한,『흠흠신서』의 서술양상을 출전과 비교해보면, ③번 항목의 두 군데 생략된 부분과 나머지 조목간의 몇몇 글자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
공안소설이 판결문과 유사한 이유는 여상두가 상업적인 출판업자로서 단시간에 많은 공안소설을 간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법률유서 등에서 표절하거나 개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박명진은 위의 소설들이 법률유서(法律類書)의 문체를 모방하여 서술하면서 사법문서를 삽입하는 공안소설이기 때문에 "법률서인 듯하나 법률서가 아니며, 소설인 듯하나 또한 소설이 아니다."147)라는 평가를 소개하면서,148) 결과적으로 독자들에게 법률지식을 소개한 현실성과 실용성을 갖춘 작품이라고 하였다.149)
➆~⑲은 정약용이 그 내용이 황당하여도 각종 형사사건 공문서의 작성법과 사건을 밝혀낸 방법 등을 참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수록한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내용적 특성을 살펴보면 ①~⑥ 사건들에 비해서 ➆~⑲ 사건들이 더욱 복잡한 사건 전개를 보인다. 또한 특수한 사건으로서의 개별성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나타내는데,『흠흠신서』에는 해당 이야기들의 전개상 인물간의 대화 등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삭제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흠흠신서』의 목적에 맞는 형사사건의 발생과 해결 과정을 담은 텍스트로서 적절히 재구성 하는 것이라고 볼 수있다.150)
⑪~⑲의 이야기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을 귀신이나 동물에 의해 해결한 사례인데,「경사요의」편에 수록된, 꿈으로 시체를 찾는 이야기나, 바람에 날린 나뭇잎으로 시체를 찾는 이야기, 뱀을 뒤쫓아 시체를 찾아내는 이야기 등과 그 내용이 비슷하다.
정약용이 수록한 이와 같은 문학적 텍스트 속의 귀신이나 동물들은 인간이 최선을 다해도 해결할 수 없는 사건해결의 지점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초월자의 대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보상함은 죽은 혼백을 위로하고 크게 원통함을 풀려는 것"151)이라는 판결문의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건을 심판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규범이 원귀의 모습으로 형상화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부 사이는 희롱을 하다가도 싸움이 벌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내가 죽었는데 남편이 또 죽는다면 죄가 없는 자는 아들딸인 것이다. 하물며 범인의 목숨으로 보상함은 죽은 자의 원통함을 위로하려 함인데, 죽은 자가 그의 아내이니, 만일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다면 반드시 그 남편이 살아서 나가는 것을 다행스레 여길 것이며, 어찌 법대로 집행하여 사형시킴을 달가워하겠는가. 이러므로 아내의 죽음에 그 남편을 목숨으로 보상하도록 하는 사건은 언제나 선뜻 처리하지 못하고 미루는 것이다.152)
윗글은 의도적이지 않게 부부싸움 중 살인사건이 벌어진 사건을 판결하면서 가해자가 된 남편의 형을 감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들의 관점을 원귀가 된 피해자의 입장에 투영하는 표현방식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가해자인 남편을 사형에서 감형시키기 위한 정당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즉, 위의 글에서 원귀는 법리적 판단에 있어서 정황의 근거가 되는 禮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147) 박명진, 앞의 논문, 35쪽.
148) 박명진은 이것이 명대 이전의 공안소설의 문체와는 구별되는 특징으로서, 이러한 류의 소설을 '書判體公案小說'이라 하였다. (박명진, 앞의 논문, 34~35쪽.)
149) 박명진, 앞의 논문, 24쪽.
150) 출전의 텍스트와『흠흠신서』의 서술양상이 다른 이유에 대한 다른 가능성은 수정된 판본이나 필사본을 저본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으나, 개연성은 낮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이후의 연구를 통해서 보다 분명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151) "殺人償命所以慰幽魂雪隱冤."『欽欽新書』卷25,「祥刑追議」十三, <伉儷之戕五(情移少艾疑生匹布根由吝財實因被打)>.
152) 夫婦之間易致弄假成鬪(分叱除良) 婦旣死而夫又死則無辜者子與女也況兇身之償命所以慰死者之冤而死者渠妻也如使死者有知必陰幸其夫之生出寧或甘心於正法此所以夫償婦命之獄每有所持難也.『欽欽新書』卷25,「祥刑追議」十三, <伉儷之戕七(怒奴移妻閾撲泄忿根由使氣實因折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