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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2. 14 주일 낮예배 메시지
설교를 위한 묵상
지난 7주 동안 올해를 위한 다섯 가지의 키워드를 가지고 설교를 했다. 그것은 누가복음 14장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는데, 진리, 겸손, 공감, 기회, 각오가 그것이다. 그러나 나의 우려는 이 다섯 가지는 마치 절반으로 줄여진 십계명처럼 우리가 따라야 할 계명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살아계신 주님과의 역동적인 관계가 그 생명이며 그것은 사랑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가르침은 자칫 좋은 관계를 이루는 데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설교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고 무엇을 전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제 잠시 주제를 돌려보자. 성만찬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오늘은 성만찬에 대한 세 번째 메시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작년에 두 차례 성만찬에 대한 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1) 성찬,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이 되는 축하 피로연(披露宴)-2016년 2월 1일, (2) 성찬, 주님과 함께 하는 식사 2016년 3월 1일.
오늘 그 세 번째 주제를 다룰 것이다. 그것은 성만찬의 삼중적 의미라고 할 것이다. 이번 설교는 Frank Viola의 글, Reimagining Church: Pursuing the Dream of Organic Christianity, David Cook: Nashville, TN, 2008을 참조한 것이다. 이전에 한 두 번의 설교도 그의 책을 많이 의존했다.
오늘 다룰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성찬에 대한 복습
A. 세례가 개인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들어오는 관문이라면 그것을 계속 기념하는 것이 성찬이다.
B. 성찬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것을 기념하는 피로연이며 오는 세상을 미리 맛보는 소망의 잔치다.
2. 성찬의 삼중적 의미-시간을 초월함
A. 과거, 현재, 미래
B. 믿음, 소망, 사랑
3. 성찬의 삼중적 의미-삼위일체적 공동체
A. 성부와 성자의 교제
B. 성자와 성도의 교제
설교의 목적: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의 삶은 영적인 실재성 가운데 영생을 누리는 삶이며,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삶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바로 성찬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의 영적인 정체성과 우리의 영적인 삶이 보여주고 있는 현주소를 생각해 볼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의 역동성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목: 성만찬의 메시지(3) 성만찬, 그 신비한 영적 실재성
본문: 고린도전서 11:23~26
신앙을 전수하는 의식
우리의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안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그려줍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하나님에 의해 주도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셔서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의식을 제정하십니다. 성경에는 그런 의식들이 몇 가지 나옵니다.
언약 백성의 표시-할례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만나주신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자녀를 갖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많은 자녀를 줄 것이며 그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오직 하나님과 언약을 맺자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의식을 제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割禮)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는 그 양피를 베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표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도록 배려하셨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은 남자들은 스스로 매일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구원의 기념-유월절
두 번째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유월절이라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 때는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양고기를 굽고 부풀지 않은 딱딱한 빵을 준비하고 여기에 쓴 나물을 먹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허리에 띠를 띠고 신발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짚고 급히 먹습니다. 그 때 자녀들이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 오늘 밤 식사는 왜 다른 날과 다릅니까?”
그 때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유월절에 일어난 일을 설명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전에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날을 기념하는 거란다. 그 때 애굽 왕은 아홉 가지 재앙으로 벌을 받았어도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지. 그 때 하나님이 열 번째 최후의 재앙을 준비하셨는데 그것은 애굽에 사는 모든 장남이 죽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단다. 그 때 우리 조상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제정하신 거란다. 그 무서운 사망의 천사가 온 애굽의 가정에 들어가 장남을 죽일 때,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족 수에 맞게 양을 잡아 삶지 않고 구워 먹었단다. 죽음의 천사가 우리 조상들의 집에는 들어오지 않았고 그냥 넘어갔단다. 그래서 넘어간 절기, 곧 유월절이 된 거야. 그리고 그날 밤 애굽 왕은 모든 우리 조상들을 애굽에서 나가라고 했지. 우리 조상들은 급히 나가느라 반죽만 해서 애굽을 떠났고 그래서 우리도 부풀지 않은 딱딱한 빵을 일주일 동안 먹으면서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구원을 기억하는 거란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켜왔습니다. 그 절기를 지키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감사하고 앞으로도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역경을 이겨냈습니다. 그런 절기를 통해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성례전-성찬
우리가 속한 기독교회에도 하나님이 하신 위대한 일을 기념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찬식입니다. 성찬식을 하는 날이면 포도주와 빵을 먹습니다. 아주 작은 잔에 포도주나 포도주스를 부어 작은 빵과 함께 먹습니다. 그러면서 그 예전을 인도하는 사람은 “이것은 주님의 살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빵을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핍니다”라고 하면서 포도주를 줍니다.
어떤 교회는 일년에 서너 차례 성찬식을 행하고 어떤 교회는 한 달에 한 번, 그리고 어떤 교회는 매주일 성찬식을 행하기도 합니다. 작년 이맘때 저는 두 차례에 걸쳐 성찬에 관한 설교를 한 바 있습니다. 그 제목은 각각, (1) 성찬,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이 되는 축하 피로연(披露宴)(2016년 2월 1일), (2) 성찬, 주님과 함께 하는 식사(2016년 3월 1일)였습니다.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을 축하하는 자리요, 주님과 함께 하는 식사로서 앞으로 우리가 들어갈 천국에서 맛볼 잔치를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은 반드시 무겁고 슬픈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새 몸으로 부활하여 잔치에 참여할 때를 소망하는 기쁨과 즐거움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성찬, 시간을 초월한 의식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성찬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26절)
성찬식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담는 삼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면서 우리 안에 현재 거하시는 주님을 선언하는 현재적 의미가 있습니다. 성찬의 떡을 먹고 잔을 마시면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계심을 고백합니다. 아울러 성찬식은 우리가 들어갈 영광을 소망하는 미래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기독교의 3대 미덕인 믿음, 소망, 사랑을 눈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으로 우리가 얻은 영광스런 구원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또한 성찬의 떡은 본래 한 덩어리로서 우리 모두가 한 덩어리에서 나온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서로 사랑하며 하나되는 사랑의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은 어디에 있든지 모두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의 가족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될 것을 소망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찬식은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맛보듯 체험하도록 하는 귀한 의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게 됩니다.
천주교 즉 가톨릭에서는 성찬식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는 문자 그대로 살과 피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찬식을 할 때마다 실제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리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성찬을 상징이나 기념의 의미로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지 직접 피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찬식을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에게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새롭게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재확인하고, 우리가 주님의 몸을 이루는 한 가족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으로서 함께 먹고 마십니다.
성찬, 성삼위 하나님의 그림자
성찬의 먹고 마시는 행동은 성경에서 더 깊은 의미로 나타납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에게 음식이 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마 4:4).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고 계셨습니다(요 4:3).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7)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은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에게 양식이 되신다는 말이요, 힘이 되신다는 말이요, 의지 곧 도움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양식이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의 양식이 되십니다. 그리고 아예 나를 먹는 그 사람도 살리라고 하심으로 우리에게 예수님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요 1:29). 어린 양은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고 나면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고기를 먹습니다(레 7:6).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주님은 우리의 양식이시며 또한 음료가 되십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4:10). 예수님은 광야를 지나는 백성에게 생수를 내시는 반석이십니다(고전 10:4).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 22:17)
영원 전부터 성삼위 하나님은 서로 생명을 나누셨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서로 생명이 흐릅니다. 이렇게 서로 생명에 동참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먹고 마시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신적 만찬에 동참하게 됩니다. 아버지 안에 있는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시면서 그 생명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연극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우리는 성찬식에 동참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생명에 내가 동참하면서 매일 살아가고 있는 존재임을 행동으로 고백합니다. 또한 우리의 일상이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 곧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삶임을 확인합니다.
성만찬과 성도의 삶
한 주간을 살면서 저는 두 사람을 부러워했습니다.
한 분은 금요일에 우리 교회에 와서 성경공부에 동참하는 허난윤 집사님입니다. 가정주부로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 교회당에 가서 기도하노라면 한 두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가족과 형제들 사이에서 보면서 정말 감사가 넘친다고 합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저희 부부가 집사님 부부와 더불어 식사를 했는데 정말 좋아 보였습니다. 주님과 사귀어 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양식으로 삼고 사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이 그 안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다른 한 분은 이인성 장로님입니다. 어제 토요일 같이 점심식사를 하면서 교회의 일을 의논했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중 지난 일년 동안 일어난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6년 전부터 한 집사님이 매일 성경을 묵상할 수 있는 교재인 ‘생명의 삶’을 보내오셨는데, 지난 해부터 매일 그 교재로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성경을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 목사님의 설교와 방향이 일치하는 부분을 발견하면서 설교에 더욱 은혜를 받노라고 하십니다. 3년 전과는 지금 생각이 많이 달라진 자신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부인인 장은화 권사님도 변화된 남편을 보면서 놀라워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장로님은 ‘생명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삶, 예수님을 양식으로 먹고 살아가는 삶을 누리고 계십니다. 얼마나 부럽고 아름다운 이야기였는지요?
성만찬을 대하면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 작은 빵 조각과 이 작은 잔에 담긴 포도주가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이 되며 얼마나 많이 우리를 배부르게 할 것인가? 또한 성찬식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의식인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찬식은 친히 우리의 양식이 되시고 우리에게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되시는 주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인생은 목마름의 연속입니다. 인생은 늘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인간은 눈에 볼 것을 많이 만듭니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즐거운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주변에는 늘 볼거리와 뉴스들로 가득합니다. 아예 손바닥에 휴대폰이 들어온 뒤에는 어디에서나 눈을 즐겁게 할 것을 찾게 합니다. 화장실에서 조용히 묵상하던 그 짧은 시간마저 이제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귀한 것을 일깨워줍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도서 1:8)
우리들은 보아도 족함이 없는 것을 계속 보려고 합니다. 들어도 가득 차지 않는 것들을 듣느라고 피곤에 지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 값을 지불합니다. 역시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부터 2,600년 전에 이렇게 그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주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사야 55:1~2)
오늘 성찬식에 임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양식이 되시고 우리의 생수가 되시는 주님을 두고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고 양식 아닌 것을 위해 돈을 지불하면서도 그것이 우리를 곤고하게 하고 지치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지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다시 주님의 초대에 조용히 응답하며 나아갑시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갑시다. 그러면 좋은 것을 먹으며 우리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의 재미와 멋 그리고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 성찬식에 임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성찬식이 우리 모두에게 이런 삶을 풍성히 누리는 계기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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