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가스 요사의 『독재자의 향연』
--분석을 통하여 본 트루히요 독재시대 연구
이 용 선
1. 서론
바르가스 요사의 『독재자의 향연 La Fiesta del Chivo』1)은 도미니카공화국을 31년간 통치(1930.08.16 - 1961.05.30)했던 실존인물인 독재자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Rafael Le?nidas Trujillo Molina)(1891-1961)를 소재로 삼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소설이다. 문학과 역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세계의 직·간접 경험과 문학의 자율권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역사소설의 범주를 뛰어넘어 독재자 소설의 원형을 창출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바르가스 요사의 문학에 있어서 정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작가 자신이 12살 되던 해에 페루에서는 마누엘 아폴리나리오 오드리아(Manuel Apolinario Odria) 군부 독재자가 페루 정권을 장악 통치하면서 억압 정치를 전개하기 시작하여 작가 자신은 독재의 실상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독재자의 8년 통치기간 동안 페루 국민들은 자유와 권리가 제한되었으며 권력 남용과 부패가 자행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일련의 작품들을 통하여 폭력적이고 무소불이의 정권이 자행하는 불의를 공개적으로 파헤쳐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2000년 출간된 『독재자의 향연』은 20세기 중남미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독재자의 하나인 도미니카공화국의 대통령 트루히요의 암살을 전후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트루히요는 31년 재임기간 동안 독재자의 힘을 가장 사악한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나라 안팎으로 수많은 폭력과 잔인성이 표출되었다. 본 작품에서 작가는 독재의 극악무도함과 대다수 일반 국민들의 저항의 한계 속에서도 독재 권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의미심장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31년간의 가공할 만한 독재자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그의 사후에도 독재자의 악몽을 쉽게 지우지 못하였다.
본 작품은 여러 실존 인물들을 주된 등장인물로 설정하여 역사 기록물이 전하지 못하는 목소리를 문학적 상상을 통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독재자 트루히요가 작품의 절대적 무게 중심에 있으면서도 3부작으로 연상될 만큼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전개되는 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실명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1, 4, 7, 10, 13, 16장 그리고 마지막 장에 재등장하여 작품의 시작과 끝을 맺는 우라니아는 바르가스 요사의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는 가공의 인물이다. 우라니아는 14살에 조국을 떠나 3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다. 우라니아의 부친은 트루히요에 충성을 다하면서 상원의원과 당의장을 역임했던 트루히요 정권의 핵심 멤버였다. 이러한 막강한 배경의 우라니아가 황급히 조국을 떠나 왜 35년 만에 조국에 돌아왔는지 이유가 조금씩 밝혀진다. 2, 5, 8, 11, 14장에 걸쳐 전개되는 이야기는 트루히요가 암살당하던 날의 하루의 일과가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3, 6, 9, 12, 15, 17장 그리고 마지막 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들은 암살에 가담한 열사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러한 이야기들은 독재 정권하에서 기술되는 역사의 빈 공간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트루히요의 이야기는 31년 통치에 관하여 소위 공식적 문서에 포함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자신의 통치 이념과 이미지에 역행하여 상황이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대한 자신의 불편한 심정이 내면적 독백형식을 빌어 기술되고 있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에서 독재자 트루히요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다원적 관점에서 형상화됨으로써 독자들에게 독재자에 대한 입체적이고 부정적 이미지가 더욱 생생하게 전해진다.
바르가스 요사가 본 작품을 집필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들을 탐독하고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음으로 도미니카공화국 역사 특히 트루히요 시대에 전개된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인지하는 것은 바르가스 요사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선행적 조치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도미니카공화국 역사가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선 트루히요 시대를 중심으로 도미니카공화국 역사에 대한 주요 흐름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겠다. 따라서 2장에서는 트루히요 독재 시대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 특히 31년간 독재시대를 향유하기 위한 권력 등극 과정과 통치기간 동안 자행한 주요 정치 및 경제적 사건들을 살펴보며 트루히요 통치시절 발간된 우표들을2) 통해서 역사의 흔적을 재음미하고자 한다. 3장에서는 2장에서 살펴본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바르가스 요사는 어떻게 문학적 소재로 활용하고 있는지 분석해 보고자하며 역사적 실체와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독재자 소설의 원형을 창출한 본 소설의 정수를 평가해 보고자 한다. 본 작품에 나타난 독재자의 행태에 대한 심층 분석은 한 역사적 실존 인물에 대한 이해는 물론 독재자의 의지에 전 국민의 운명이 종속되었던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접근 방식으로 기대해 본다.
2. 트루히요 시대
2.1. 트루히요 정권의 탄생 배경 및 성장 과정
도미니카공화국은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타이노(Taino) 원주민들이 서구인들의 침입이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정착하고 살아왔는데 신대륙발견으로 인해 유입되기 시작한 서구 식민 통치자들의 온갖 핍박과 이에 맞선 투쟁의 과정에서 타이노 인디언은 서서히 멸종하기에 이른다. 이후 유입된 흑인노예들과 식민 통치자로 유입한 백인들 그리고 원주민들의 수백 년에 걸친 혼혈 과정을 거치면서 도미니카공화국은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형태의 인종구성을 형성하게 이른다. 도미니카공화국과 인접한 아이티 지역은 1776년 프랑스에 이양되어 불어권 국가로 남게 되었고 1822년에 도미니카공화국 지역은 아이티에 점령당해 22년간 지배를 받게 되면서 양국간의 긴장된 관계가 발생하였다. 결국 트루히요 통치 시절 아이티인 대학살 사건의 단초가 되었다. 1844년 독립이후 아이티의 침략이 계속되었고 1861년 스페인에 재점령 당하였으나 마침내 1865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회복하여 정치적 주권을 회복하였다. 19세기 말 울리세스 장군의 통치 시절 거의 파산에 이를 정도로 도미니카공화국은 외채에 직면하였고 도미니카공화국에 많은 차관을 빌려 주었던 독일 회사는 미국 자본주의 그룹에게 채권을 넘긴다. 미국의 이 그룹은 채권을 안정적으로 보존받기 위하여 도미니카공화국에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며 1898년 도미니카공화국 정부와 미국계 회사는 협상을 맺고 도미니카공화국의 재정은 이 그룹의 통제를 받게 된다. 울리세스 장군 사망 후 도미니카공화국은 국내적으로는 정치적 갈등을 겪으며 대외적으로는 유럽 열강들로부터 무력 침략의 위협을 받는다.
1904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먼로 독트린 선언을 통하여 유럽 채권단을 배제하고 미국의 절대적 지배력을 획책한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여 투자된 미국 자본을 보호받기 위하여 미국은 전함들을 도미니카공화국에 1911년부터 1916년 사이에 수차례에 걸쳐 파견한다. 1914년 윌슨 대통령은 윌슨 플랜을 발표하며 미군은 1916년에서 1924년까지 8년에 걸쳐 도미니카공화국에 두둔하면서 사실상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 확보 차원에서 도미니카공화국 내정 간섭을 시작하였고 미국 해병대의 훈련을 받은 군인 트루히요는 향후 자신의 권력 쟁취를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트루히요는 아버지 호세 트루히요 발데스3)(우표1)와 어머니 훌리아 알타그라시아 몰리나(우표 2)4) 사이에서 1891년 10월 24일 산크리스토발에서 출생한다.5)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상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소년시절 잠시 전화국에 근무하기도 하였다. 도미니카공화국 치안을 위하여 미국이 창설한 국립경찰대에 입대(1918년)하여 엄격한 훈련을 견디며 미군 지휘관에 발탁 고속 승진의 발판을 마련한다. 미군이 철수하고 1924년 오라시오 바스케스(Horacio V?squez)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데 국립경찰대가 국가 방위대로 개편되면서 대장으로 임명되고 군 최고 실력자로 등장하면서 군 세력을 장악하여 차기 정치적 권력을 휘어잡는 발판을 마련한다.
1930년 대통령선거를6) 통해 정권을 장악한 트루히요는 1930년 8월 16일 대통령에 취임한다. 1931년 8월 2일 도미니카공화국당을 창설하여 장기집권의 정치적 도구로 삼는다.7) 초기 조국의 근대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 정권을 잡은 첫해 강력한 허리케인이8) 발생하였는데 이재민들을 효과적으로 구호하는 수완을 발휘하여 국민적 인기를 잠시 구가한다. 트루히요의 정치적 행보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42 순찰대? 를 창설하며 카리브 신문에 ?여론 광장?(El Foro P?blico)을 설치하여 정적들을 가차 없이 여론재판의 희생양으로 삼아 눈에 거슬리는 모든 정치적 세력들을 제거시켰다.9) 1942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되었는데 여당인 도미니카공화국당은 물론 야당으로 등장한 트루히요당도 사실상 트루히요를 지지하는 당으로 사실상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10) 국가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트루히요는 그의 친인척들과 더불어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다. 또한 군사력을 장악한 트루히요는 정보정치를 자행하면서 고문, 암살, 폭력으로 반대세력들을 잠재우고 절대 권력자로 아성을 구축한다.11) 1942년부터 1952년까지 권력의 최고봉의 자리에서 모든 권세를 누리다가 민주국가를 표방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는 자신의 동생인 엑토르를12)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막후에서 모든 권한을 행사하였다.
트루히요 독재시대의 극치를 보여주는 최대의 이벤트는 트루히요 치세 25주년을 맞이하여 개최된 ?자유국가 평화와 우정의 박람회(Feria de la Paz y la Confraternidad del Mundo LIbre)’였다.13) 트루히요는 자신의 통치기간 동안 이와 같이 정치적 부패, 군사적 완력, 고문, 살인, 전제정치, 상업적 독점, 그리고 국고에 대한 약탈이라는 방법으로 재산을 8억 달러로 증가시켰다. 트루히요는 보다 철저한 통치를 위해 군정보부 SIM(Servicio de Inteligencia Militar)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수사, 정보 수집은 물론 고문, 심지어는 살인까지 하였다. 또한 트루히요는 이들을 통해 언론을 통제하였고 공포분위기를 조장하였다. 1960년 6월 트루히요는 베네수엘라 대통령 로물로 베탄쿠르(Romulo Betancourt)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국제사회의 여론의 화살을 맞자 당시 부통령으로 있었던 호아킨 발라게르(Josquin Balaguer) 부통령에게 1960년 대통령 직을 이양했지만 1961년 5월 30일 암살당할 때까지 31년간 사실상의 모든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2.2. 트루히요의 경제정책
트루히요가 1930년 집권 할 당시 본인이 장악하고 있던 군대를 정치적 지배 수단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데 적극 활용하였다. 군납에 따른 커미션을 직접 챙기고 장군 시절의 옛 연인에게 군 세탁물의 독점권을 부여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얻게 하였다. 1931년에는 소금 생산 및 판매에 관한 독점권을 행사하여 부를 확장시켜 나갔다.14) 이어서 육류, 쌀, 우유 등의 독점권을 행사하여 자금을 확보한 후 보험회사, 담배회사 등의 경영권을 확보하였다. 이밖에 공공사업의 인허가에 따른 커미션 및 공무원 봉급의 10%를 당비로 각출하는 등 각종 이권 사업에 개입하여 트루히요 정권 제 1기에 도미니카공화국의 최고의 갑부가 되었다. 이와 같이 트루히요는 집권초기부터 끝없는 야망으로 상업적 독점과 약탈 방법을 이용해 모든 사업을 통제하는데 도미니카공화국 국민들을 위해서가 아니고 전적으로 개인의 재산을 증식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당연히 개인적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도 국부를 늘릴 필요가 있기 때문에 도미니카공화국 경제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한다. 초기에는 재원의 부족으로 바스케스 정부 시절 시작된 공공산업을 마무리하는데 그쳤으나 1938년 전후로 경제가 회복되자 트루히요는 도로, 다리, 수로 및 농경지 조성에 심혈을 기울인다.15)
이러한 공공사업의 실시로 인하여 주요 곡식 등을 자급자족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하다고 인지하여 인구확장 정책을 실시하였고 개선된 보건시설의 덕택으로 빠르게 인구가 증가하였다. 1935년 148만의 인구가 1950년에는 210만, 1960년에는 300만으로 성장하였다. 인구 성장과 더불어 도시 기반 시설 등의 확충은 농촌에서의 도시로 이주가 이루어졌으며 산토도밍고 도시에 시멘트, 식용유, 제제, 유제품 유리, 커피, 의약품, 직물산업 등이 유치되어 도시의 산업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트루히요가 발전시킨 또 하나의 주요 산업은 제당산업이었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제당산업이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는 산업으로 인식되자 알타그라시아 지역에 직접 제당공장을 설립하였다. 계속 제당공장을 늘려 나갔으며 외국인 소유의 제당공장도 인수하여 완전히 도미니카공화국의 제당산업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외국인 소유의 은행과 전력회사를 인수하여 국가 경제를 완전히 지배하고자 하였다. 부분적으로는 조국의 근대화와 경제적 성장을 이뤄내지만, 이러한 성장을 개인적 자산 축적에 이용했다. 트루히요 정권 말기에 국가 산업의 80%를 통제하고 있었으며 그가 관여하는 회사들이 생산 활동 인구의 45%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며 결과적으로 도미니카공화국 국민의 60%가 직간접적으로 트루히요의 의중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도미니카공화국 국민들의 의식주에 관련된 어떠한 소비도 결국 트루히요와 친인척의 부의 창출에 기여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모든 경제 정책이 개인적 야망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대외적으로는 외채를 줄이고 자주 경제의 기반을 조성하는데 기여한 지도자로 포장되고 있다.
1930년 정권을 잡았을 때 도미니카공화국은 1924년 체결된 미국과 도미니카공화국 협정으로 인하여 징수된 관세의 50%는 외채 상환에 할당해야 했으며 관세율 인상 등은 사전 미국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1931년 트루히요는 우선 외채 상환의 연기를 도모하여 추가적인 재원 확보를 달성하였고 1941년에는 트루히요-헐 협정이 체결되어 미국의 통제를 벗어나 자주적인 관세 정책을 펼 수 있게 됨에 따라 경제적 자주권을 획득하였다. 트루히요 옹호자들은 이 협정은 관세에 대한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진정 도미니카공화국의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의미를 부각시키며 트루히요를 재정자립의 회복자로 명명하였다. 한편 그의 소득의 대부분은 외국은행에 예치된다. 또한 그가 소유한 회사들은 세금을 지불하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을 지불하거나 또한 죄수나 군인들을 대체 노동자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트루히요는 그의 능력을 개인적인 재산을 축적하는데 사용하였고 그의 친지들과 정치적 지지자들은 주요 사업들에 대한 특혜를 받았다. 국가 파티, 연회 등에 사용되었고 남은 돈은 안전을 위해 외국 은행에 유치하였다. 그는 미국의 투자자와 사업가를 환영했고 도미니카공화국 자체의 영세한 기업들은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16)
3.3. 트루히요 정권의 몰락
트루히요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수많은 모의와 2차 세계 대전 이후 망명가들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트루히요 정권은 흔들림 없이 정권을 유지하여왔다. 합헌적으로 트루히요는 4번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제1대(1930-1934). 제2대(1934-1938)를 역임한 후 1937년 아이티 양민 학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반대로 트루히요는 표면적으로는 일선에서 물러나고 부통령 하신토 페이나도(Jacinto Peynado)가 대통령직을 계승하나 1940년 사망함으로써 마누엘 데 헤수스 트론코소 데 라 콘차(Manuel de Jes?s Troncoso de la Concha)가 대통령직을 이어 받는다. 그러나 트루히요는 다시 1942년부터 1952년까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국경지대를 도미니카공화국화 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1952년부터 1960년까지는 동생 엑토르를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막후에서 전권을 휘두른다. 1960년 엑토르는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면서 국제 여론의 악화로 벨라게르가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트루히요는 국제관계를 악화시킬지라도 이를 무시하고 국제적 문제도 국내와 같이 전횡을 일삼는다. 아이티인 학살이 그 대표적 예이다. 역사적으로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는 국경을 마주하면서 아이티의 값싼 노동력이 계속 유입되면서 도미니카공화국의 아이티화가 지속되었는데 1929년 양국간에 국경을 확정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국경 설정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인들이 불법적으로 도미니카공화국으로 건너오자 트루히요는 1937년 수많은 아이티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도록 명령을 내린다.17) 이 사건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불러일으키고 이에 도미니카공화국은 아이티 정부에 75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한다. 1949년 6월 해외의 망명가들이 주축이 되어 루페론(Luper?n) 해안을 통해 침공하였으나 트루히요 군대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간다. 또한 1959년 6월에는 쿠바의 카스트로의 지원을 받아 꼰스탄사(Constanza)를 침공했으나 역시 실패로 끝남에 따라 이에 가담한 많은 정치적 반대세력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암살된다.
1960년에는 도미니카공화국의 감옥들에는 사회 각층의 수많은 정치범들로 가득 찼으며 트루히요 정권은 여전히 공포정치를 전개하였다. 트루히요는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반대세력에 대한 테러와 고문 그리고 암살 등을 자행했다. 반인권 폭력행위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바스크 지방의 헤수스 갈린데스(Jes?s Gal?ndez)의 납치와 살인을 들 수 있다. 스페인 내전 후 망명 온 콜롬비아 대학교의 교수이자 기자였던 그는 트루히요를 비판하기 위하여 1953년 『트루히요의 치세 La Era de Trujillo』라는 책을 출판했었다. 이에 분노한 트루히요는 갈린데스를 미국 심장부인 뉴욕에서부터 비행기로 납치하여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처형한다. 역사에 기록된 또 한 가지의 반인권 폭력행위는 쿠바에서 정권을 잡은 피델 카스트로의 후원 아래 도미니카공화국을 침입하려고 시도했던 재외 망명자들에 대한 1959년의 억압을 들 수 있다. 1959년 6월 14일 망명가들이 도미니카공화국을 침공했으나 격퇴 당했고. 해안에 겨우 착륙한 반군들은 잡혀서 고문당하거나 살해되었다.18) 이러한 실패들이 반대파의 끝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이 후 ‘6월 14일의 운동’ 이라는 움직임이 널리 퍼졌다. 트루히요에 대항하는 조직들은 여전히 활동하였으며, 그들 중 일부는 자유주의자인 베네수엘라 대통령 로물로 베탄쿠르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1960년 1월 트루히요의 암살을 계획하였다가 하루 전날 SIM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6월 14일의 운동’의 조직원들이 잡혀가서 전기의자 등의 고문을 당하고 살해되었다.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베탄쿠르에 대항하여 꾀한 암살 시도로 말미암아 도미니카공화국은 미주기구로부터 경제봉쇄와 함께 무기거래 중단이라는 국제적 제재를 받아야만 했다. 이리하여 독재자 트루히요는 전통적인 맹방들의 지지를 서서히 잃어간다. 교회는 트루히요에게 공개적으로 인권유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트루히요를 비판하는 세력으로 등장한다.19) 비록 트루히요는 여전히 워싱턴에 많은 지지자들을 두고 있었으나, 아이젠하워 정부는 트루히요를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급기야 트루히요가 무모하게 시도한 베네수엘라 대통령 암살이 실패로 돌아간 후 트루히요의 퇴진을 위한 모색을 강구한다. 트루히요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 혁명가들이 암살을 계획한다. 이들은 미국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미국 역시 가톨릭교회와의 충돌 등으로 시끄러웠던 트루히요의 독재정치를 청산할 시기가 왔음을 인지하고 그를 암살하기위한 지원을 약속한다. 수많은 도미니카공화국인들이 트루히요의 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되었고 이들 중 미라발 3자매도 체포당한다. 1960년 11월 25일 미라발 자매들의 죽음으로20) 트루히요에 대한 반대세력은 점차 커져만 갔고 이리하여 마침내 트루히요는 1961년 5월 30일 자신의 별장으로 가던 도중 총탄에 의해 암살된다.21)
3. 작품을 통하여 본 트루히요 시대
3.1.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세계와 작품의 구도
바르가스 요사는 “소설은 그의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장르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침략적, 제국주의적 장르이자 문학의 최상의 형태”22) 이며 “소설은 현실을 언어로 대변해 주는 것”으로23) 정의하면서 인종학자, 심리학자, 역사가들 모두 소설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바르가스 요사는 현실 세계의 경험을 중시하면서도 문학 세계의 자율권을 강조하고 있다. 작품 주제를 결정짓는 것은 무의식적이면서 강박관념을 갖게 하는 악령들로서 이것들은 비단 내면적 억압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열악하고 불충분한 현실과의 접촉에서도 발생하게 된다. 작가는 그가 속해있는 사회, 시대, 계급에 불만을 갖고 있는 반란자이며 글쓰기는 이러한 사회적 고뇌를 표현하고자 하는 일종의 신명의 행위로 간주되는 것이다. 비록 창작 활동은 불만족과 공허감을 신명으로 바꾸는 것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삶을 정당화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작가는 소설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문학적 기교를 통해 효과적으로 노출시키는데 그 본질적 소명감이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바르가스 요사는 모든 소설은 자서전적이라고 설파한다.
그러나 글쓰기 과정에서 작품의 주제에 영향을 주는 인물과 사건의 설정이나 혹은 시점이나 수사학적 기법 등을 활용한 작품의 구조나 문체의 변경을 통해서 자서전적 악령들이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소설관을 가지고 있는 바르가스 요사는 자신의 소설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하여 본 연구 대상인 『독재자의 향연』에서 역사적 기록물에 기술된 트루히요를 트루히요와 연관된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다원적 관점에서 조망함으로써 다시 한번 바르가스의 소설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구조를 살펴보면 순환적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 제1장에 우라니아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작품 마지막 장인 24장에 다시 등장하여 매듭을 짓는다. 제1장에서의 우라니아의 이야기는 조국 도미니카공화국을 떠난 지 35년 만에 귀국하여 부친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다. 49세가 되어 돌아 온 1996년을 기점으로 1961년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기억들을 회상하여 펼쳐 나간다. 마지막 장에서 그녀가 왜 조국을 떠나 가족과 단절하여 살아온 것에 대한 이유가 밝혀진다. 우라니아의 이야기는 연속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또 다른 화자들의 이야기, 즉 트루히요 자신의 독백과 트루히요를 암살했던 열사들의 이야기가 중간 중간에 일정하게 삽입되어 트루히요를 둘러싼 모든 사건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서 전달되어 진다. 트루히요의 암살에 가담했던 열사들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왜 독재자 트루히요 암살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트루히요의 시대에 도미니카공화국 국민들이 느꼈을 억압과 공포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열사들은 트루히요를 암살하기 위하여 대기 중이던 좁은 차안의 공간에서 왜 암살 시도에 가담하게 되었는지를 독백 형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아마도 가르시아 게레로, 안토니오 데 라 마사, 안토니오 임버트, 살바도르 에스트레야 사달라 등이 바로 대기 중이던 차 안에 같이 있었던 암살 시도 가담자들이었다. 암살에 가담했던 공통된 이유는 트루히요 독재자의 잔인성을 직 간접적으로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특이한 사실은 이들이 모두 처음부터 반대자의 입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은 대통령의 측근들로서 트루히요가 신뢰하는 소위 친위집단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암살 음모가 트루히요 사람들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트루히요 독재에 대한 반발이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트루히요 정권하에서 가장 수혜를 받은 사람들이 독재자를 물리치고자 했던 것이다. 암살 가담자 모두 각각의 이유가 있었지만 공통된 이유는 트루히요의 절대적 권력 남용과 인권유린이었다. 그들의 염원은 개인으로서 박탈당했던 자유와 권리의 회복과 도미니카공화국 국민들에게 가했던 공포와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트루히요의 이야기는 그가 사망한 날 하루의 일과를 묘사하고 있다. 새벽 4시 10분 전 잠에서 깨어난 그는 당일 저녁 9시 45분 암살당하기까지의 모든 행적들을 밝혀주고 있다. 절대 권력자로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중요사건들과 최근에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 해결을 위해 고심하는 정권 말기의 절대 권력자의 화려함의 이면에 담긴 고독과 고뇌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3.2. 작품 속에 나타난 트루히요 시대의 특징
3.2.1. 우라니아의 이야기: 트루히요의 공포정치와 정욕의 골리앗
작품에 거론되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실존 인물들이다. 트루히요의 암살 이후 이 사건에 대하여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는 버나드 다이드릭(Bernard Diedrich)의『트루히요: 독재자의 죽음』에서 거론되고 있는 모든 인물들이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에서 대부분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도 다수의 등장인물들을 검색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성으로 볼 때에는 본 소설을 독재자에 관한 역사기록물로 규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히요 독재자에 관한 역사적 기록물과 본질적 차이는 우라니아의 등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르가스 요사에서 다루고 있는 열사들의 이야기는 다이드릭의 저서와 많은 유사점들이 발견된다. 역사적 실체와 허구의 절묘한 조화, 문학의 자율권이 최대한 역량을 발휘하는 부분이 바로 우라니아의 이야기 부분일 것이다. 우라니아는 상원의원과 여당 당수를 역임한 안토니오 카브랄의 딸로 설정되어 작품의 핵심적 축을 구성하며 우라니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는 트루히요의 공포 정치와 치보(chivo)로 상징되는 정욕의 골리앗과 같은 여성편력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실존 인물들임을 감안할 때 당연히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우라니아도 실존의 인물로 착각한다.
그러나 우라니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인물로서 실존의 인물로 착각할 정도로 묘사되면서 역사적 실체와 허구가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에 혼재되어 있다. 트루히요의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역사적 기록물은 트루히요 독재자의 실상을 다면적으로 기술하는데 한계를 내포하였을 것이다. 역사적 공식 기록물은 제한된 시각에서의 트루히요의 실체를 기술했다면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에서는 독재자의 실상에 대한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결정적 역할을 우라니아의 이야기가 담당하고 있다. 우라니아는 전직 고관의 딸로서 14살 때 황급히 조국을 떠나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성공한 전문 직업인 여성으로서 35년 만에 일주일 간의 짧은 휴가기간을 이용하여 조국을 방문한다. 당연히 살아계신 아버지를 방문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선 호텔에 머물면서 지난 세월을 회고하면서 35년 전의 도미니카공화국 모습, 화려했던 부친의 부귀영화와 현재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는 초라한 모습들에 대한 언급과 함께 우라니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트루히요 독재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인 공포 정치와 여성 편력의 실상이 조망된다.
먼저 우라니아의 부친인 카브랄 상원의원의 경우를 살펴보자. 실존의 카브랄 의원과24) 더불어 트루히요 주변에서 충성을 다했던 많은 정치인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이 본 소설의 카브랄 상원의원을 통해서 공포정치의 실상이 폭로되고 있다. 카브랄은 독재자 트루히요를 위해서 수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해 왔던 실세 중의 실세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본인에게 사전 통보 없이 신문 매체를 통해서 카브랄의 부정 축재를 폭로하면서 모든 지위와 재산을 박탈한다. 그렇게 충성을 다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트루히요로부터 어떤 질책이나 참담한 조치에 대한 암시를 받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이 아무리 잘 나가는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사전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일거에 매장함으로써 충성을 다하는 모든 트루히요 추종자들에게 공포심을 부여하고 있다. 카브랄 본인을 매도하는 신문기사를 그것도 자신보다 주변에서 먼저 그 기사를 보고 우려의 목소리로 연락을 취해 옴으로써 뒤늦게 자신이 처한 황당한 상황을 인식하게 된다. 신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국장님
트루히요 총통이 영도하시는 도미니카공화국 정부가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와 도미니카공화국 시민의 명예가 손상되었기에 이에 응당 항의해야 하는 시민정신으로 본 글을 올립니다. 귀사의 존중받고 사랑받는 본 <여론광장> 칼럼에서 아우구스틴 카브랄 상원의원이 건설부 장관 봉직 시절에 저지른 부정혐의로 상원의장직을 사퇴했다는 사실이 자명한데도 아직 기사화하지 않은 것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현 정부는 청렴과 공금에 관해서 매우 철저하기 때문에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횡령과 예산을 부풀리고 불필요한 자재들을 높은 가격에 사들인 혐의에 대하여 상원의원을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중대한 사실에 대하여 트루히요 국민들은 알아야 할 권리기 있는 것이 아닐까요? 건승을 기원합니다. 텔레스로로 이달고 사이노25)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보아 트루히요 정권에서는 공적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신분보장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상호 견제와 트루히요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위해 노심초사할 뿐이다. 실제로 군 수뇌부는 권력을 쌓지 못하도록 18개월 이상을 한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언제 보직 변경이 있을지 아니면 징벌이나 퇴임 혹은 뜻밖의 승진의 행운이 내려질지 예측불허였다고 한다. 독재자 트루히요의 두 형제 비르힐리오(Virgilio)와 아니발 훌리오(Anibal Julio)도 주요 직책을 수행한 후 버림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1930년 정권을 잡은 이후 저명인사를 포함하여 적극적으로 등용을 시도하고 이용가치가 없으면 굴욕감을 줄 정도로 갈아 치웠다고 한다.26)
대표적인 인물인 안셀모 파울리노(Anselmo Paulino)의 경우를 살펴보자.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안셀모는 도미니카공화국의 2인자로 간주되었다. 발라게르가 피력하듯이 안셀모는 트루히요의 모든 의중을 파악하고 실행에 옮기는 트루히요의 분신과 같은 존재였다. 트루히요의 역할을 도맡아 하는 안셀모의 권력 상승은 결국 카브랄의 운명처럼 날개 없는 추락으로 귀결된다. 어느 날 라디오를 통해서 자신의 실각을 알게 된 안셀모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트루히요와 점심을 같이하면서도 이러한 돌발적인 상황에 대한 언질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10년 형을 받고 투옥되었으며 조기 석방되어 망명의 길을 걷게 된다. 이와 같이 트루히요는 모든 당근과 채찍의 수단을 총 동원하여 자신을 절대 권력자로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를 전개한다. 한편 트루히요는 자신의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정욕의 골리앗의 행태가 적나라하게 우라니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묘사된다. 트루히요의 호색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주변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보존받기 위하여 부인과 딸들이 트루히요의 성적 유희의 대상이 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3.2.2. 트루히요의 이야기: 신격화와 과대망상증
2, 5, 8, 11. 14장에 걸쳐 시간별 흐름에 따라 트루히요가 새벽 3시 50분에 일어나 밤 9시 45분 암살당하기까지의 하루의 행적이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바르가스 요사는 암살당하는 날 공식적인 기록물에 나타나 있는 트루히요의 행적을 근간으로 트루히요의 마음속을 당시의 정황을 바탕으로 트루히요 자신의 독백 형식으로 소설을 전개하고 있다.
우라니아 이야기처럼 트루히요 이야기도 역사적 실체와 작가의 상상력에 입각한 허구의 세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트루히요의 자화상이 생생하게 독자들에게 전달되어 진다. 트루히요의 정권 말기에 즈음하여 국내에서 높아져 가고 있는 반정부 목소리와 민주화와 트루히요의 퇴진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압력 속에서 심기 불편해 하고 있는 트루히요의 마음이 잘 형상화되고 있다. 트루히요의 속마음은 역사적 기록물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바로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서 유추되어 피력되고 있다. 트루히요의 속마음이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되듯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31년간의 통치 과정은 한마디로 신격화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악화되고 있는 미국과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 트루히요의 대응 방식이 매우 흥미롭게 나열되어 있다. 트루히요가 암살당하는 당일의 심적 상황에 대한 묘사들임으로 상당히 긴장감이 감돌며 트루히요 정권 말기의 급변하고 있는 심각한 국내외 상황이 잘 투영되고 잇다. 우선 바르가스 요사가 전달해 주고 있는 트루히요는 다음과 같다. “그는 필요하다면 분노를 통제할 줄 알았다. 인간쓰레기들과 배신자들의 부인들과 자식들과 형제들에게 필요하면 예를 갖추어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그래서 국가의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32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27) 속임수를 모르는 자는 통치를 모르는 것과 같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본 소설에서 바르가스 요사는 트루히요가 측근으로부터 배신당할 수 있다는 불안과 의구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간파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배반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배반하기 전에 이미 냄새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생존해 있으며 많은 유다들이 꾸아렌따 수용소, 빅또리아 수용소, 베아따 섬이나 상어들의 뱃속에서 썩어가고 있거나 도미니카공화국 땅속의 벌레들을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28)
트루히요 통치 시절 그를 암살하거나 권력에서 내려오게 하기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다. 정권을 잡은 최초 4년간 10번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고 망명자들이 중심이 되어 3번에 걸친 침공이 있었다. 1947년 카요 콘피테스, 1949년 루페론, 1959년 콘스탄사, 마이몬, 에스테로 온도에서의 침공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바르가스 요사에 의하면 트루히요는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에게는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도록 매우 엄격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국가에 위험이 되지 않고 쥐, 두꺼비, 하이에나, 뱀들의 먹이로 삼을 수 있어 분노도 가라앉힐 수 있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상어들의 뱃속이 아직 자신의 이러한 취향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고 있다. 그 불충한 갈리시아 출신의 호세 알모이나의 시체가 멕시코에 있지 않나? 그리고 식사하는 손을 물었던 뱀 같은 바스코 출신의 헤수스 데 갈린데스는 어디에 있지? 유명한 작가랍시고 술대접하고 출판비용도 부담하고 계집과 놀아나도록 돈을 대주었건만 뉴욕 타임지에 기고한 라몬 마레로 아리스티는 어디에 있지? 공산주의자로 영웅인 것처럼 놀아난 미라발 세 자매들도 그가 화를 내면 막을 댐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거기에 있지 않은가?29)
트루히요는 엄청난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바르가스 요사는 소설에서 여러 차례 그의 경제력을 묘사하고 있다. 트루히요가 개입하는 모든 사업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기존 법체계를 이용하거나 새로운 법을 제정하였다. 담배 생산의 독점권을 갖기 위하여 경쟁관계에 있는 사업주들을 감옥에 넣었으며 1951년에는 세금을 면제해 주는 법을 통과시켰다. 트루히요는 경제적 독점권을 자신이 최대한 활용했을 뿐 아니라 주변 친인척에게도 파격적으로 이권의 권리를 행사하도록 하였다. 바르가스 요사는 트루히요의 측근 중용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쿼바디스의 페트로니오도 친구들과 협력자와 자신을 위해 봉사한 자들에게 그렇게 관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생일, 결혼식, 출생일 등이나 임무를 잘 완수했을 때 혹은 단지 충성에도 은공을 잘 베풀어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엄청난 선물들을 하사하여 돈방석에 앉게 하였다. 돈, 집, 토지, 주식 등을 선물로 주었으며 본인이 경영하는 농장이나 회사의 주주가 되게 하거나 많은 돈을 벌고 국가의 예산을 축내지 않도록 사업체를 만들어주기도 하였다.30)
트루히요의 가족들이나 총애를 받는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누렸을 뿐 아니라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트루히요가 소유했던 보험회사의 사장은 자신의 숙부 테오둘로 피나 체발리에르(Teodulo Pina Cheval!ier)였으며 육류사업체의 동업자는 동서였다. 또 다른 동서 라몬 사비뇬 유베에스(Ram?n Savi??n Llubees) 는 복권사업체의 동업자로 일하였다. 프란시스코 마르티네스(Francisco Mart?nez) 와 파이노 피차르도(Paino Pichardo)는 맥주회사를 경영하는 등 이권을 보장받는 주요 국가산업은 친인척등이 독차지하였다. 트루히요는 정권 말기 조니 아베스(Johnny Abbes)에 크게 의존하였는데 바르가스 요사는 트루히요가 아베스를 군 정보부장으로 임명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는 몸과 마음이 뜨거운 이 나라에서 내가 아는 가장 차가운 자이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인물 중에서 나를 배반하지 않을 유일한 자야.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니 증오나 죽일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거야. 죽음이 아니면 결코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지.31)
조니 아베스는 무한한 악과 폭력의 원천을 제공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염탐, 검열, 첩보 활동 등에 관여하였다.
3.2.3. 열사들의 이야기: 트루히요의 비열함과 인권유린
31년간 지배하였던 트루히요 독재 정권은 인권 유린과 모든 부패와 불의의 온상이었다. 공포정치의 위협아래서도 트루히요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들이 감행되었다. 베네수엘라, 쿠바, 코스타리카 등 주변국들의 우호적인 지원 아래 해외 망명가들이 주축이 되어 해상 침투가 이루어졌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던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 마침내 1961년 5월 30일 트루히요 암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암살 사건이 본 소설에서 3장, 6장, 9장, 12장, 15장, 17-23장에 걸쳐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3장부터 소개되고 있는 열사들의 이야기는 트루히요 독재정권의 불의와 트루히요의 암살에 가담했던 공모자들의 기막힌 사연들이 소개되면서 트루히요의 정보정치와 인권유린이 얼마나 심각하게 자행되었는지 파악해 볼 수 있다. 암살자들은 트루히요 암살 이후 원안대로 쿠데타를 성공하지 못하고 도피하여 은둔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다. 트루히요 정권 붕괴 이후 이들은 열사로 추앙되어 민주화의 일등공신으로 재평가 받는다. 1961년 5월 30일 트루히요를 암살하기 위하여 산 크리스토발로 향하는 고속도로 주변에서 잠복 대기 중이던 열사들의 마음들을 회고를 통해서 왜 독재자 제거에 가담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대부분 독재자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사람들로서 열사들의 다양한 관점에서 트루히요의 이미지가 형상화되고 있다.
1) 안토니오 데 라 마사: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에서 안토니오 데 라 마사가 트루히요 암살계획의 중심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그가 거미줄처럼 얽힌 많은 사람들과 공범들을 손바닥처럼 잘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트루히요 암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네트워크의 복잡성 때문에 안토니오 데 라 마사에 대한 이러한 정황을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오 데 라 마사가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트루히요를 기다리면서 안토니오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 젖어있다.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는 나타날 것이야. 그러면 1957년 1월 7일 즉 4년 4개월 전 동생 타비토 장례를 치루면서 부모, 형제, 동서 등이 모인 모카(Moca) 가족 농장에서 한 맹세를 마침내 1961년 5월 30일 화요일 오늘 이행할 것이야. 자기를 가장 잘 따르던 막내 동생이 비겁하게 살해당한 이후 고통, 절망과 열병에 시달린 자기 삶을 생각해 보았다.32)
안토니오 데 라 마사가 트루히요의 암살에 참여한 동기는 동생 옥타비오의 죽음에 관한 억울함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독재자 트루히요는 자신을 비방하는 갈린데스를 뉴욕으로부터 비행기로 납치하는 음모를 꾸미는데 조종사는 미국인인 머피였고 머피를 끌어들인 장본인은 옥타비오였다.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납치이후 사건 전모를 은폐하기 위하여 도미니카공화국 정부는 머피를 제거한다. 갈린데스를 납치하고 머피의 행방불명에 미국이 발끈하자 비행기에 동승했던 옥타비오에게 모든 누명을 씌운다. 즉 옥타비오가 동성연애자인 머피를 개인적인 이유로 살해했다고 공표한다. 옥타비오는 살인 혐의로 구속되고 이후 옥타비오는 머피처럼 살해된다. 가족들에게는 본인 스스로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고 통보한다. 유서의 필체가 위조된 것을 가족들은 알고 있었으며 안토니오는 하염없는 비탄에 빠진다. 이후 데하반 도로 건설을 25만 페소에 건설하도록 계약을 체결해야 했고 이러한 복합적 요인들이 안토니오를 트루히요 타도를 원하는 사람들을 규합하는 중심적 역할에 앉도록 하였다.
2) 안토니오 임버트: 실존의 안토니오 임버트 바레라스 장군은 1949년 루페론 침공 때 푸에르토 플라타 주지사였다. 침공 때 붙잡은 포로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은 이유로 주지사직을 상실하였다. 그 후 6년 동안 그와 가족들은 군정보부의 감시를 받아왔고 2번 투옥되었으며 지인들과의 교분도 용이치 아니하였고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였다. 해외에 망명중인 동생 세군도가 반트루히요 운동을 효율적으로 전개하지 못하도록 인질로도 활용하였다. 1954년 푸에르토리코에 2주 여행 허가를 받고 출국하였고 귀국 후 복권사업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동생 세군도는 반정부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함께 자유국가 평화 및 우정 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1955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즉시 체포되었고 8년 전 사람을 살인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30년 형 선고를 받았다. 이와 같이 변덕스러운 트루히요의 마음으로 본인은 정부를 위해 일하면서 동생은 옥살이를 하는 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왔다.
3) 살발도르 에스트레야 사달라: 1938년 트루히요는 육류, 우유, 소금, 기름, 땅콩, 성냥 및 가구 사업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유형의 사업으로 전체 국가 재산의 40%를 소유하고 있었다. 1955년에는 제당산업의 획득으로 더욱 경제력이 증대되었다. 소설에서 에스트레야 사달라를 트루히요의 불의와 미라발 자매들의 죽음으로 마음이 움직인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미라발 자매들과 시달림을 받고 있는 교회 성직자들을 지켜보면서 신앙심이 깊은 살바도르는 자신이 거사에 참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트루히요 암살에 동참한다.
4) 아마디토 가르시아 게레로: 바르가스 요사가 묘사한 것처럼 아마도 가르시아 게레로는 군인으로서 그의 충성심을 실험받기 위하여 두 눈을 가린 한 남자를 총살시킨다. 본인이 죽인 사람이 사귀던 옛 애인의 오빠라는 사실을 통보받는다. 살바도르는 거짓말일거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잊으라고 위로한다. 다이드릭에 의하면 아마디토가 결혼을 승인 받지 못한 이유는 애인의 오빠가 수도에 있는 한 대사관에 망명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오빠를 사살하라는 명령에 고문보다 나을 것으로 생각하고 총을 쐈으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 순간 트루히요를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4. 결론
31년간 도미니카공화국을 통치했던 독재자 트루히요의 시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독재자의 향연』은 많은 화제와 논쟁을 불러일으킨 소설이다. 중남미 독재자 소설의 한 원형을 이루고 있는 본 작품은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아울러 문학의 자율성을 최대로 확보하면서 트루히요의 부정적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다. 도미니카공화국 근대사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트루히요의 수많은 행적이 본 작품에 집대성되어 있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력에 입각한 허구의 세계가 접목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실재와 허구의 혼재 속에 역사적 진실을 파헤치는데 미궁에 봉착하기도 한다. 따라서 역사적 실체를 파악하고 작품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미니카공화국 독재시대를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실존했던 인물들과 허구의 인물들의 분리 작업, 실재 일어났던 역사적 주요 사건들의 이해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접근방식이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실체로서의 트루히요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작품의 문학적 형상화 과정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역사적 기록물은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외형적으로 드러나 있는 제한된 현상에 비중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 바르가스 요사의 본 소설은 역사적 관점에서의 객관적 요소와 문학적 자율성의 특권인 주관적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트루히요의 이미지를 매우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각주
1) 독재자 트루히요가 암살당한 후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즐겨 부르던 메렝게에서 트루히요를 색골(色骨)의 의미를 지닌 chivo로 지칭했다. 본 소설의 제목도 트루히요를 상징하는 메렝게의 chivo와 연관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2) Luis Morillo Vilches, La Era de Trujillo. La otra Fiesta del Chivo
3) 우표 1: 트루히요의 부친인 호세 트루히요 발데스 사망 4주년(1939년)을 맞이하여 발행한 추모 우표. 트루히요는 1930년 정권을 잡은 후 권세가 날로 치솟으며 가족에게도 권력의 후광이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우표 2: 1940년 발행우표. 어머니날을 기념하여 독재자 모친을 도미니카공화국의 국모로 명함.
5) 산 크리스토발 도시는 트루히요의 출생지였고 1844년 도미니카공화국 최초의 헌법이 이곳에서 서명되었다. 1939년 법으로 이 도시를 ‘치적의 도시(Benem?rita Ciudad)’로 명명하였다.
6) 1930년 5월 24일 자신이 단독 출마 (찬성 224.000, 반대 2.000)하여 당선한 이래로 31년간에 걸친 무소불위의 독재 정치를 폈다.
7) 모든 성인은 의무적으로 도미니카공화국당의 당원으로 가입하여야 했고 정부 관리들은 봉급의 10%를 당비로 납부하였다. 당의 로고는 야자수와 본인 이름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의 이니셜을 따서 RLTM 이 들어가 있는데 정직(Rectitud), 자유(Libertad), 노동(Trabajo) 도덕(Moralidad)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8) 우표 3: 1930년 9월3일 허리케인이 수도 산토도밍고를 강타하여 도시가 거의 폐허가 된다. 도시 재건 사업을 벌이면서 발행한 우표.
9)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에서도 이러한 방법을 가상의 인물인 우라니아의 아버지에게 똑같이 적용하여 공포정치의 일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10) 우표 4: 1942년 대통령 선거 투표결과 도미니카공화국당 391.708표, 트루히요당 196.229표를 얻었다.
11) 우표 5: 1936년 수도 산토도밍고는 트루히요로 개명되고 아를 기념하는 방첩비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12) 우표 6: 트루히요 치세 25주년 기념우표. 대통령은 트루히요의 동생 엑토르이지만 트루히요 치세 25주년이 부각되고 있다. 8년 동안이나 공화국 대통령(1952-1960)의 지위를 누린 바 있는 엑토르는 2002년 10월 19일 94세의 나이로 자연사하였으며, 월요일(10/21) 마이애미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유해는 마이애미 8번가에 근접한 ‘Woodlawn Norte’ 공동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13) 우표 7: 트루히요 치세 25주년 기념우표, 트루히요의 찬란한 휘장, 조국의 수호자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우표 8: 세계 박람회를 맞이하여 트루히요의 딸 앙헬리카가 박람회의 여왕으로 선출되었다. 우표 9: 트루히요의 아들 라다메스가 폴로 대표 선수로 선발된 것을 기념하는 우표. 트루히요의 치세가 주변 가족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4) 염전개발을 금하는 법을 통과시켜 자신이 관장하고 있는 바라오나 광산의 소금만 소비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100 파운드 당 60센트의 가격이 3 페소로 상승하였다.
15) 우표 10: 농촌에 5000개 학교를 설립한 공적으로 트루히요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대 스승의 호칭을 부여받았다. 1941년 발행.
16) 트루히요 치세를 포함한 도미니카공화국 역사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자료는 프랭크 모야의 Manual de Historia Dominicana 참조. 513-525.
17) 20세기 초반 가난한 아이티 사람들은 도미니카공화국의 사탕수수 농장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였는데, 1930년 대공황 이후 사탕수수 가격이 폭락하고 실업자가 양산되는 등 경제가 어려워지자 트루히요는 1937년 10월 2일과 4일 사이에 2만에서 3만에 달하는 아이티 출신의 노동자들을 무차별 학살함으로써 정권 안정을 꾀하였다. 트루히요는 물라토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미니카공화국은 스페인의 문화전통을 이어받았으며 가톨릭 신앙의 백인들의 국가라는 점에서 아프리카적이고 프랑스적이며 부두교를 믿는 아이티에 비해 근본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18) 우표 11: 꼰스탄사 침공 25주년 기념우표. 1959-1984
19) 트루히요,는 총통(Generalismo), 조국의 수호자(Benefactor de la Patria), 신조국의 아버지(Padre de la Patria Nueva) 등의 칭호가 붙었고 추가로 교회 수호자(Benefactor de la Iglesia) 칭호를 부여받기를 원했으나 교회에서는 거절했다.
20) 11월 25일은 국제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의 날이다. 이 기념일은 1960년 11월 25일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미라발 3자매가 군인에 의해 살해된 날로부터 유래한다. 이들은 지하조직활동을 했으며 독재자 트루히요에 대한 반대 활동에 가담하였다. 1981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개최된 남미-카리브해 페미니스트회의 참가자들은 이 여성들을 생각하고 11월 25일을 국제 여성과 소녀에 대한 폭력희생자들의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영화 <도미니카공화국의 붉은 장미>는 바로 미라발 3자매를 소재로 만들었다. 원제목은 “In The Time Of The Butterflies”.
21) 우표 12: 트루히요의 사망 후 트루히요가 자주 애용했던 문구 Mis mejore amigos son los hombre de trabajo.를 담아 발행한 추모 우표(1961년 발행) 우표 13: 열사들의 트루히요 암살 1주년 기념우표 1962년 5월 30일 발행.
* 출처: ["스페인어문학" 2007년 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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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거작 <독재자의 향연>에 대한 평론이다. 원작을 읽지 못한 상태이지만, 評論을 통해서도 소설의 륜곽과 내용을 짐작할 수가 있다.
중남미문학을 접하면서부터, 문학을 통하여 재현된 중남미 각 나라의 역사가 그렇듯 요동쳤고 처절했음에 놀랐었다. 따라서 60년대 중기에 세계문학의 중심에 폭발적으로 떠올랐던 중남미문학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콜럼비아의 마르케스, 멕시코의 카를로스 푸엔테스, 페루의 바르가스 요사, 칠레의 이사벨 아옌데......
--(아래 계속)
(계속)---
一群의 "작가군단"이 분출해낸 엄청난 문학을 모르면 "발언권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되었던 것은 최근 년간의 일이였다. 원작들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보르헤스전집>(全五券),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미국은 섹스를 한다>.....그外 여러 작가들의 단편들을 좀 읽었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격에 휩싸이기에는 충분하였다. 원작들을(이곳의 출판상황의 빈렬하기에) 많이 읽을 수 없는 상황이기에 더구나 평론(비평)이라도 많이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것이 이 순간의 생각이다. 일독을 바라마지 않는다.
찬찬히 읽어보니 지기님의 말씀, 공감이 되네요.......) 읽었지만 중남미문학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요.
사실 저는 마르케스의 거작__<백년동안의 고독>은
힘들게(후
큰 계발과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마워요, 항상
"도미니카공화국"이라는 작은 중남미 나라의 정치사가
저렇듯 요동쳤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것을 담아낸 바르가스 요사의 문학이
그저, 경탄스러울 뿐입니다.
잘 공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