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외춘추(方外春秋)
주기영
봄은 바람과 함께 온다. 옷깃에 스치는 느낌이 어제와는 다르다. 선뜻하면서도 어쩐지 훈훈한 정감이 있다. 그 바람과 함께 춘신이 도래한다. 담장 가에 노란 개나리가 피고 아직 잎도 피지 않은 나목에 목련의 꽃망울이 매달린다.
틴에이지로 접어들기도 전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니던 나는 아직 추위가 풀리지도 않은 이른 봄에는 집 근처 산골짜기를 돌돌돌 흐르는 작은 개울로 봄맞이를 간다. 가재를 잡는 재미에 빠져 혼자서도 심심한 줄을 몰랐다. 어쩌면 가재는 어린 시절 나의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가재는 누구보다도 계절을 먼저 알아차리는지 얼음이 녹는가 싶기만 하면 살살 기어 나와서 좋아라고 긴 수염과 하체를 펄떡이면서 차가운 물속을 기어 다닌다.
이렇다할 장난감이 없던 그 시절 스케이트에서부터 구르마(네 개의 통나무 바퀴 위에 나무 상자를 짜서 얹어 놓은 조그만 인력거 같은 것을 그렇게 불렀다)까지 모든 것을 망치와 톱 하나로 스스로 만들었으니 손재주는 자연히 발달했다. 나의 이런 손재주를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은 수술을 많이 해야 하는 의사들이다.
요즈음은 가끔 바람구경을 한다. 오죽 구경거리가 없어서 바람구경을 다 하자는 걸까? 그렇지만 나의 바람구경에 대한 끈질긴 집착은 전혀 즉흥적인 것이 아니다. 바람은 공기의 이동에 불과하니 눈으로 볼 수가 없지만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흔히 신의 존재를 말할 때에도 이런 예가 곧잘 들어지곤 한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것처럼 인간은 공기라는 유체 속에서 살게 되어 있다. 단 몇 분이라도 숨을 쉬지 못하고 산소가 결핍되면 우리 생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토록 우리에게 불가결한 요소인 공기는 바람을 일으킴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우리의 미적 감각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이기적 생존의지와 곧장 연결되어 있다. 여행 중에도 강이나 호수 또는 바다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생명의 희열을 느끼는 것은 물이야말로 생명유지에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일 텐데 마찬가지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볼 때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산소를 듬뿍 받아들이며 신명이 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계절 따라 바람의 형태도 다 특색이 있겠지만 그래도 몸과 마음을 가장 세차게 흔드는 것은 역시 봄바람이며 그중에서도 이른 바 꽃샘바람이라고 하는 3월말 4월초순의 바람이다. 꽃샘바람은 맵기는 한겨울 바람보다 더한데다가 봄의 숨결마저 품고 있어 바람 중에 최고의 바람이라 느껴지는 것이다.
고요한 여름날 뒤뜰에 가만히 부는 소리 없는 바람도 좋지만 나를 열광케 하는 것은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에 불어 닥치는 세찬 바람이다. 거친 바다를 달려와 사나와질 대로 사나와진 바람 덩어리들이 요크셔의 언덕을 스치고 하늘로 휘감아 올라가는 황량한 바람결을 나는 가장 좋아 하는 것이다.
나는 꿈속에서 가끔 감성 넘치는 저음가수가 되어 슈베르트의 보리수(Der Linden Baum)를 피아노 반주에 맞춰 열창하고픈 환상에 사로잡힐 때가 있는데 그것은 피아노 반주에서 수많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들리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섭지코지 해안에 홀로 섰을 때도 해풍은 거세게 불어왔다. 그때 나는 바람에 둥둥 떠서 한라산 정상까지 올라가고 싶다는 상상을 했었다. 바람이 사납게 불어대는 산야에는 키 큰 활엽수는 결코 자라나질 못하고 키 작은 관목들이 모질게 땅에 찰싹 붙어 명맥을 붙이거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그냥 잔디밭으로 남아 있는 수가 많다.
세월을 이기는 자 없으며 시간은 모든 것을 무력화시킬 뿐이다. 시간에 의한 패배를 조금이나마 지연시키는 방법은 건강을 증진하여 생물학적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이 유일하다. 금년에는 일가친척들의 부음이 특히 많았고 학교동문 중에도 유명을 달리한 숫자가도 부쩍 늘었다.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어느덧 내가 집안의 어른이 되어있음을 알고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가운데 더불어 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뜨니 그들에게 더 이상 무슨 애증의 감정이 있을 것이며 할말인들 남아 있겠는가? 세월은 약탈자이지만 또한 치료약이기도 하다.
2009년 춘3월부터 시작된 은퇴생활도 어느덧 5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멀리 사라진 젊은 시절에 대한 회한은 그만두더라도 정년 이후의 5년이란 세월을 나는 어떻게 보내는지 뒤돌아보며 자주 마음을 다잡아 흘러가는 세월에 대항하고 있다.
그간 나는 경제와 법률과 일상생활 등에 관련된 상식 차원의 공부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영어 하나로 평생의 밥벌이를 했으므로 세계정세나 경제동향을 원문으로 읽을 수 있어 큰 도움이 되긴 하지만 나의 전공이며 평생을 공들인 영어교육과 영어학 영문학의 지식 이외에도 정작 현실생활을 헤쳐 나가는 데는 필요한 지식이 너무 많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요긴한 분야를 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했다.
시간이 나면 교외로 나가 빈 들녘을 걷고 또 걸었다.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가고 우수(雨水)가 지나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꽃송이들도 촉촉한 빗물로 바뀌고 잔설(殘雪)마저 사라진 들녘에는 파릇한 보리밭이 제법 질서 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배고프던 때 허기를 채워주던 보리밥 한사발이 못내 그리워서인지 추위 속에서도 푸르게 자라나는 보리밭의 모습이 고마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봄꽃을 샘하는 추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 오늘 오랜만에 보리밭 사이로 난 작은 길을 걸어가 보았다. 혼자서 노래도 불러보지만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저녁노을만 곱게 물들어 서쪽 하늘에 가득 퍼져있다. 검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왠지 지금의 나의 모습인 것만 같아 자꾸만 추워지고 한없이 쓸쓸해지기도 한다.
더불어 살던 사람들을 멀리 떠나왔다는 쓸쓸함, 이제 나 스스로가 정든 이 세상을 떠나갈 시간도 그리 많이는 남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정겹고 감사할 뿐이다. 고령화시대라고 하지만 누구나 다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살아가는 길에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현인들이 지혜로운 노년에 대해서 훌륭한 가르침을 주지만 그 실천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도 나대로의 생활지침을 정해보기도 했다.
하루 중 내가 가는 곳은 마트와 체육관 그리고 가끔은 산 또는 산책로이다. 집사람과 함께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충분히 구입해오는 것이다. 세끼 식사를 집에서만 먹게 되면 아무래도 준비를 부실하게 하기가 쉬우므로 마음먹고 체질에 맞는 식재료를 구입해 온다. 체력관리를 위해서는 식재료를 원활하게 조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건강관리가 제일 큰 문제이다. 행운이랄까? 은퇴 후부터 취미를 붙이기 시작한 수영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한 까닭에 전신건강에 많은 도움이 되고는 있으나 여기저기 병원신세를 져야 할 곳도 많다. 시간의 풍화현상을 현실 그대로 인정을 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섭생과 치료에 순응할 뿐이다.
매일같이 가까운 체육관에 가서 두어 시간씩 부드럽게 그러나 충분할 만큼 운동을 한다. 운동에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조금씩 기량이 향상되는 맛도 큰 재미이다. 팀 스포츠보다는 인디비쥬얼 스포츠를 택한다. 누군가와 페어를 맺고 시간약속을 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혼자서 하는 대표적으로 좋은 운동이 수영이다.
세월을 이길 자가 어디 있으랴!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존재는 그 자체가 변화이다. 그것은 대우주의 자기실현과정일 수도 있다. 인식의 주체인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의 창조주는 바로 나라고도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우주라는 거대한 나무에 매달린 아주 작은 나뭇잎에 불과하다. 그 작은 나뭇잎이 제한적이나마 스스로 선택권도 있고 자기결정권도 있으니 스스로 우주의 주인이라는 오만을 부릴 수도 있으나 그 주체성이라는 것도 우주의 큰 파도 속에서 움직이는 작은 파문일 뿐이다. 나라는 존재는 조물주의 자기실현의 작은 대상물이고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
험난한 인생길을 헤치고 헤쳐 여기까지 용케도 와있지만 갈 길 또한 만만치 않다. 아끼던 육신도 하나하나 고장이 나기 시작하고 노후의 재정관리며 가족간 인간관계 등 무엇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노년은 무엇보다도 외로움에 떨어야 한다. 사회참여의 기회가 줄어든 만큼 많은 시간을 스스로 창의적으로 보내야 한다. 햇빛이 좋은 날에는 공원 또는 능원(陵園)으로 산책을 나간다. 요즘 둘레길도 많이 생겨났지만 서울주변에는 잘 보존된 능원이 참 많다. 내가 잘 가는 곳은 장릉(章陵)으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원종의 능이지만 인적이 뜸하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너무 좋다. 경내를 두어 바퀴 걸으면 한 시간이 간다.
어둡도록 울창한 숲 속의 길도 좋지만 이곳에는 크고 작은 두개의 호수가 있다. 좀 작은 호수는 호수라기보다는 큼직한 연못이라 하겠는데 연꽃이 여기보다 더 아름답게 피어나는 곳을 나는 보지 못했다. 아래쪽 큰 호수는 청둥오리의 서식지로 우거진 숲이 수면에 반영되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을 상징하지만 모든 생물에게 있어 물은 생명 자체를 의미한다. 흙에서 왔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사람의 몸은 9할 이상이 수분으로 형성이 되어있으니 결국 인간은 물에서 왔다 물로 돌아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죽어서 땅에 묻힌다 해도 수분은 땅에 스며 지하수가 되거나 침출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당 터에는 반드시 가까이에 물이 감돌아야 한다.
외로운 여행길에도 물을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차창 밖으로 강이나 호수가 나타나면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낮에는 거친 모래 폭풍이 불고 밤에는 별빛으로 가득차는 사막에도 어딘가에는 오아시스가 있어 대상의 무리로 하여금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힘과 희망을 주는 것이다.
물은 강과 바다 그리고 호수 등을 형성한다. 바다는 끝없이 넓어 끝 간 데가 없어 좋고 강물은 불철주야 흐르기를 쉬지 않아 좋다. 그러나 호수는 산과 제방으로 포근하게 감싸인 채 정지되어 있고 바람이 불어도 가벼운 흰 물살이 둥글게 퍼져나갈 뿐이다. 그래서 호반의 오솔길은 잠시 마음을 맡기고 산책도 하며 사색하기에 좋은 곳이다.
거칠고 사나운 바다보다도 흐르는 강물보다도 나는 잔잔하고 포근한 호수를 더 사랑한다. 호수라 해도 그 종류와 성질은 천태만상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바이칼이나 레만과 같은 한눈에 조망이 될 수 없을 만큼 넓은 호수는 포근한 맛이 없다. 또한 연못 수준으로 규모가 너무 작거나 모양 자체가 너무 길거나 산만하면 이상적인 호수의 모습이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의 북해도에 있는 다자와 호수의 싸늘함과 신비함이 겹쳐진 칼데라의 겨울풍경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지만 아무래도 내 고향 예당호수의 계절 따라 변화하는 풍경화에는 미치지 못한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학교 때 선생님들과 친구들... 그리운 얼굴들이다. 사랑으로 키워주시고 잘되라고 격려해 주시던 분들이다. 눈을 감으면 고향의 푸른 산과 시내와 넋 놓고 바라보던 하늘과 구름까지도 보인다. 정겹고 그리운 모습들이다.
눈을 감으면 또 보이는 얼굴들이 있다. 훌륭한 인재가 되고자 밤낮으로 공부하던 제자들의 모습과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의 모습이다. 가끔 연락을 주는 제자들도 있어 역시 사람 키우는 일로 일생을 보낸 것이 스스로 흐뭇하게만 생각된다.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회의 유능한 일꾼이 되어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제일가는 마음의 행복이다. 이제 내 삶의 남은 시간들은 오로지 그들의 행복과 성공을 염원하는 기도의 시간으로 채우리라 굳게 마음 먹어본다. (2013. 09. 23)
주기영(朱基榮) 약력
1946년 충남 예산 출생
대전중학교, 서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졸업
대전고등학교(5년), 서울 동성고등학교(32년) 등에서 봉직, 정년퇴임
황조근정훈장 수훈, 한국문인협회 회원, 서울교원문학회 이사
수필집 <봄은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등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