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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 요17:1-5/ 말씀: 안광복 목사님
그동안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제자들을 만났고, 니고데모와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고, 5장에서는 38년된 병자를 고치셨고, 8장에서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만나고, 11장에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고, 향유를 부은 마리아와 의심많은 도마를 만나 믿음의 고백을 받았고, 지난 주에는 베드로와 만나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부터 4주동안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대 제사장적 기도>로 알려져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1절의 첫 부분을 보면 “<이 말씀을>을 하시고, 눈을 들어 기도했다” 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것은 요한복음 13~16장에 있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나온 예수님의 귀한 말씀들을 말합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마음속에 평안을 가지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너희는 무엇이든 구하고, 그리하면 이룰 것이다."
"세상에서 너희는 환난을 당할 것이지만,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이 뜻밖에 이런 말씀을 하시니 제자들은 당황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됐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영광스럽게 하소서.“(요 17:1)
여기를 보면 예수님이 기도했는데, 누구에게 향해서 기도했을까요?
여기서는 “<아버지여!>”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했다>는 거지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기도의 영적 교훈>입니다.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기도의 방법과 기도의 내용, 기도의 결과와 축복 등 모두 다 중요하지만,
기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라는 점입니다.
왜 기도의 대상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거꾸로 기도의 대상이 잘못 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가?" 를 생각하면 다 알게 됩니다.
기도는 기독교 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타 종교에서도 기도를 합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정한수 떠 놓고 우물가에서 기도하거나, 성황당 앞에서 두손 모아 기도하기도 하고, 탑을 돌면서 기도하거나, 삼천배나 삼보일배를 하거나, 백일동안 날짜를 정해놓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기도의 대상이 잘못 선정되었다면, 그 기도는 가치가 없고, <헛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호칭을 부르면서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천지만물을 만드신 분이고, 우주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계셔서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54번이나 아버지를 부르면서 <구체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바른 호칭이 바른 관계를 만들듯이, 십자가를 지려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또 여기서 “<때>가 되었다.”라고 말씀했어요.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인가요?
이제 죽음이 임박하여 십자가를 져야 할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가장 친밀한 대상을 향하여 고백을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가장 친밀한 대상에게, 가장 간절하게 절규하는, 그런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이 아들은 영광스럽게 하소서"
이 말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사건>을 의미하고, "십자가를 잘 질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가지 [꿈]을 갖고 계셨어요.
첫 번째 꿈은 <십자가를 지는 일>과, 두 번째 꿈은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왜 <십자가 지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일까요?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가장 원하신 일이고,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사건>을 통해서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 지시는 일>을 원하셨어요.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요17:2)
여기를 보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에 꼭 해 주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생을 주고, 영생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고대 역사나 전래동화를 보면 [신]을 중시했어요.
그래서 신전을 세우고 선행을 강조하여 <신의 마음을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구원 받기를 원하셨던 거에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이 나타나 있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6)
이렇게 16절을 잘 알고 있지만, 요한복음 3장 17절은 잘 모르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 3:17)
이 말씀에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어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구원 받은 것>이나, <진리를 아는 것>이나, <영생을 얻는 것>은 모두 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럼 <영생>은 무엇입니까?
문자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지만, <영원히 죽지 않고, 끝까지 산다>고 축복일까요?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여 <오래도록 산다>고 모두 다 축복은 아닙니다.
<영생>이라고 “그 사람이 어떤 조건이고, 어떤 상태인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본인은 아파서 죽게 되었는데도 <100살이고, 200살을 산다>고 그 사람에게 축복입니까? 그건 축복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 면에서 <안다>는 것이 아니고,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믿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알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고, 알다보니까 믿게 되고, 믿다보니까 그 분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느끼게 되어, 더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게 되어, 서로 <신뢰>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럼, <신앙의 단계>는 무엇입니까?
신앙은 ① 먼저 주님을 알게 되고, ② 주님을 신뢰하여 더 가까이 나가는 것이고, ③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어 ④ 나도 “그 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되어 관계가 좋아지고, ⑤ 그러니까 그 분의 보호아래 들어가고 싶고, ⑥ 그 분의 베푸심을 우리가 누리면, 되는 것이예요
우리가 전도를 할 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말을 우리들은 흔히 <예수믿으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알아야 해요.
그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이후를 대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효력이 발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 받는다>는 뜻입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죽고 난 이후에만 혜택이 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의 축복이 시작되고, 영원한 생명이 이미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서 일평생을 <함께 사는 것>을 말해요.
그러므로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같이 동행하며 즐겁게 살다가,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의 소망에 따라 천국에 가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주님을 알게 되고 그 순간부터 구원의 축복으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나는 아버지께 맡겨 주신 일을 다 완성해 이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요 17:4)
4절의 말씀도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한마디로 기가 막히게 압축하여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① 첫째,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성하고 >
② 둘째,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평생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살고 마지막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저와 여러분도 이런 <믿음의 고백>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소명>은 무엇일까요?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삶의 목적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소명이란 <내가 살아 가야 할 삶의 방향>을 말해요.
하나님은 나를 부르셨어요. 왜 불렀을까요?
그것은 나에게 부르신 목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창세 전에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우리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재능>도 주셨어요.
우리는 우리들에겐 각자에게 주어진 <은혜>가 있어요.
우리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알아야 해요.
그리고 우리는 그 소명에 따라 살아가야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자기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마지막 5절에 예수님이 다시 한번 간구하며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으로 이제 아버지 앞에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 (요 17:5)
여기에서 <창세 전에 누렸던 영광>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영광>이란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려 드리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자 >고 기도합니다.
그런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무슨 일을 합니까?
그것은 내 삶 속에 영광을 나타 내기 위해서는 <자기 희생>이 필요 해요.
그러나 우리들은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희생>은 하지 않고, 나의 영광과 명예를 나타내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해 준다>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죽음을 받아 드린 거예요. 예수님은 <자기 만족>과 <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나를 포기하고 죽기로 작정 하신> 거예요.
우리들은 내 영광도 챙기고 내 명예도 지키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없어요. 내 자신의 <혈기>와 <자존심>과 <내 의도>를 꺽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거예요.
어쩌면 이런 것이 <영광>이라면, 오늘 설교를 안 듣는 편이 오히려 좋았을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에 겉으로는 억울하게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런 삶이 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예요.
오늘 말씀의 결론은 <내가 열정을 가지고 나를 포기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두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의 예는, 마치 창공을 나르는 <연>이 창공에서 자유함을 느끼고,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연을 날리는 소년의 손에 줄로 메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 높이 올라가고, 멀리 날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연이 줄에 매여 있지 않고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면, 그것은 날아 오른 것이 아니라, 그냥 멀리 사라져 없어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줄에 매여 있는 것이 속박 당하고 답답한 것 같지만, 그것이 진정 자유함을 느끼며, 연으로써의 역할과 빛을 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예는, 한자루의 무딘 [칼]이 [명검]으로 만들어지려면,
대장장이의 힘찬 망치소리와 뜨거운 쇳 가마 속으로 들락 날락하면서 달궈질 때에, 더 강하고 더 날카로운 <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생활을 할때에 속박당하는 것 같지만, 그 분에게 순종하고 그렇게 따를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며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 겉으로는 속박 당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올바른 길이 됩니다.
그렇게 행하므로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요 17:6~11/말씀: 안광복 목사님
지난 주부터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 나눈 얘기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1. 첫째,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들도 남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나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하기 바랍니다.
내가 은혜를 받지 않고, 어떻게 남을 위해 기도하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차고 넘쳐야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는 거예요.
2. 둘째, 그 곳에 함께 있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오늘 설교와 다음 주일 설교)를 드립니다.
3. 셋째.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키워드는 무엇입니까?
1. 처음엔 [영광]에 대한 내용이고,
2. 두 번째는 [지켜주심]***** (보존)
3. 세 번째는 [거룩하심]***** (거룩)
4. 마지막으로는 [하나되게] 하심***** (하나됨)
오늘의 말씀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첫 번째는 6~8절은 예수님이 바라보는 제자들의 모습이고,
두 번째는 그런 제자들을 향해서 “어떤 기도를 하시는가?“ 라는 내용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생각>을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잘 모르고, 철들지 않은 미숙한 제자들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특징은 이런 엉성한 제자들도 “사랑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했기에 포기하지 않고, 제자들이 성숙하여 변화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 내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고,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제 그들은 아버지RP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요17:6~7)
여기서 제자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택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미리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이 미리 정한 사람들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소유>입니다.
여기에서 철이 나지 않은 제자들을 보는 <예수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제자란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예수님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 사람들이 <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 두 번째로, 내게 속하기 전에 하나님에게 속하여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리 하나님이 선택하여 <나에게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혼은 그 상대편 배우자를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택하여 나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준 배우자를 내가 받아 들이고,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자녀는 우리가 낳았다”고 해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녀도 하나님이 선택해서 나에게 맡겨 준 것입니다.
이런 정체성을 우리가 확실하게 알아야 시험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 주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좀 모자라는 사람들을 모아 끊임없이 가르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제자훈련>의 요체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이제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내가 아버지께로 온 것을 진정으로 알았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요 17:7~8)
그들이 깨닫은 것은 말씀뿐이 아니고, 모든 것이 [하늘로 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의 능력도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것으로 알고 있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도 알고, 믿고 있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요.
하나님은 외면적인 평가를 중요시하지 않았고, 존재가치를 중시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제자로 삼은 거예요.
예수님은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나타내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든 초점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내 의견, 그리고 내 비젼과 같이,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니까 <갈등이 생기는 법>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 것은 그들이 모두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내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통해 영광 받았습니다.(요17:9~10)
예수님이 기도는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은 “그들 안에서 영광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서 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적용할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식도 <나의 소유물>이 아니고, [아버지의 것]입니다.
[헌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에 드리는 헌금도 <내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나에게 맡기신 것]을 <내가 드리는 것>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내 시간>이라고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은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받은 은사도 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이므로, 그것을 <소중하게 관리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11장을 보십시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겠지만, 그들은 아직 세상에 있고,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지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은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17:11)
여기에서 <지켜 주신다>는 의미는 <보살펴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심 = 보호 하심 = 보존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도 소중한 물건은 그것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노력을 해요.
귀하면 귀할수록 더욱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해요.
예수님은 우리들을 소중한 사람으로 여겼고, 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여기서 <지켜 주신다>는 의미는 “목숨을 잃지 않게 하신다“ 는 의미가 아니고,
죽음은 어떤 형태로 든지 우리들에게 다가 오지만, “그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는가?” 에 따라 지켜 주는 내용이 달라 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나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지만 그들(제자들)은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켜주 시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 되게 하소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제자들은 누가 보호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철없는 제자들을 보호해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떠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이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사랑>이 싹트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서로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도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도 당신만의 아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내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랫동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식과 아내에 대한 사고방식을 버리고,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
1. 첫째, 건강을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2. 둘째, 거룩한 명성을 지켜야 합니다.
3. 셋째, 우리 가정을 건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4. 넷째. 신뢰와 명성을 지켜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을 확실하게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가만히 있어도 지켜 주십니까?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을 지켜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 생활을 할 때에도 하나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지켜 주셨고, 엘리아는 까마귀를 통해서 먹여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43장 1~2절 말씀을 보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가 말씀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만드신 분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건져주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이름을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 네가 바다를 건널 때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네가 강을 건널 때 휩쓸려 가지 않을 것이다. 네가 불속을 걸어갈 때 타지 않을 것이고, 불꽃이 네 몸을 태우지 못할 것이다.(사43:1~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지켜 주실 것 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늘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 지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2/요 17:12~19/ 말씀: 하용조 목사님
제가 요즘에 병상에 누워서 투석을 하다보니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중에서 제가 깨달은 것은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두 가지 축이 있는데 하나는 <말씀>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두 개의 <바퀴>와 같아서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만 강조하다 보면, 율법에 빠지게 되고
또 그렇다고 <기도>만 강조하다 보면, 신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는 두 가지를 적절하게 조절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내가 영적으로 응답받고 힘을 얻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열심히 내가 기도를 했는데 “왜 응답이 없을까?“라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습관적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내 주변의 이야기를 가지고 습관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를 많이 하기는 하는데, 그 알맹이가 별로 없어요.
그러나 “누구든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이어야 한다” 고 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귀신들린 자를 데려다가 기도를 했으나,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예수님한테 데려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도하자 금방 해결됐어요.
왜 제자들은 능력이 없었을까요?
그것은 <형식적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권세도 있었지만 그것을 믿지 않고,
<영의 기도>를 했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일 때에도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감사기도>를 한 후에 기적을 보이셨어요.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중보기도>를 하고 계셔요.
나는 볼 수가 없지만, 우리를 향하여 기도하는 예수님을 우리는 느껴야 해요.
예수님은 또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했어요.
그것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했어요.
그러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기도 없이 사역을 하려고 하니, 신경질이 나는 거예요.
기도 없이 어떤 봉사를 하려고 하니, 어렵고 막히는 거예요.
기도 없이, 어떻게 남에게 봉사를 해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비밀을 하나 발견할 수 있어요.
예수님은 바리세인들과도 이 문제에 관해, 논쟁을 했어요.
그것은 서로 간의 개념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와 <우리들의 기도>가 다른 차이를 발견해야 해요.
그럼,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 생각과 자기 뜻대로 기도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기도를 했어요.
그것이 <영의 기도>예요.
예수님은 <육의 기도>를 하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들은 <영의 기도>를 하지 않고, <육의 기도>만 해요.
그래서 우리들은 <영의 기도>를 알아 듣지를 못하고, 그렇게 못 해요.
예수님 당시에도 제자들이나 율법학자들이 기도를 이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이해가 되고, 또 어떤 때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결론은 분명해요.
<영의기도>를 하면 능력이 나타나고,
인간들이 드리는 <육의 기도>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요.
그 좋은 예가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러나 그 <주기도문>을 우리들은 주문을 외우듯이 그냥 소리 내어 읽으므로,
능력이 없는 거예요.
그 속에 담겨진 말씀의 깊은 뜻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읊조리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들은 이성으로써 먼저 반응하기 때문에, <영>으로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영>이 흐르지 않으면, 주술사가 주술을 외우는 것과 같아서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변해요.
<영>적으로 해석하고, <영>의 코드에 맞춰져야 하는데,
그냥 종교행위에 그치게 되므로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그런 기도에는 종교행위는 있어도, 성령의 감동은 오지 않는 거예요.
우리들의 기도는 <육신의 기도>예요.
시골교회의 장로님이 기도하면, 교인들이 그 다음에 할 말을 다 외워요.
오래하다 보니까 습관이 되어 하는 말이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대표기도를 직접 글로 써서 기도하라“고 해요.
일주일 내내 생각하고, 고치고 또 고쳐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기도해야 해요.
그럼 <영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내 생각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서 성령에 이끌려 말을 하도록 하는 거예요.
기도하면서 성령 안으로 들어가서, 성령이 이끄는 기도를 해야 해요.
<말씀>을 듣더라도 이성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말씀>으로 해석하여 받아드려야 해요.
예를 들자면, 요한복음 17장 3절의 말씀인 “영생을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 7:3)
이 말씀은 <이성>으로 읽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그러나 <영>으로 해석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어요.
<영>의 눈으로 읽으면 “이 말씀이 성경의 핵심이구나!” 라고 금방 이해 해요.
우리 인간은 3가지 형태로 만들어 졌어요.
1. 첫째는, 인간은 육체로 만들어 져서 <육신의 기도>를 해요.
이런 기도는 우리들이 제일 많이 하는 먹고, 마시고, 사는, 모든 것에 관한 기도를 말해요.
2. 둘째는, 인간은 정신이 있기 때문에 <정신의 기도>를 해요.
그래서 정신 차리지 못한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해요.
3. 셋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는 <영의 기도>가 있어요.
영은 하나님과 제가 직접 통할 수 있도록 “코드로 연결하는 안테나”와 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무슨 얘기를 나에게 하려고 하면, <영>으로 얘기하시니까,
먼저 내게 <영>이 열려 있어야 하고, 그것을 연결해 주는 코드 역할을 <영>이 해요.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는 [영]으로 읽어야 해석이 돼요.
우리들의 문제는 이것을 이성으로 읽으니까 졸리기만 하고, 기쁨을 맛보기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거예요.
저는 이 시간에 조금 시간을 내서, <영의 기도>를 시도해 보세요. 그것은 간단해요.
“하나님! 저는 지금 <영의 기도>를 하고 싶어요, 나에게 <영의 기도>를 알게 해주세요.
나를 도와 주세요!” 라고 말로 시작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성령님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인도해 주세요.”
<육신의 기도>는 공부 안하던 사람이 공부를 하려고 하면, 졸리기만 하고 잡 생각만 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영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알고, 읽어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이끌고, 나의 사고를 리드하게 돼요!
그러면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인도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성령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채널을 맞추게 되는 거지요.
나도 이렇게 몸이 아픈데도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니까> 버티는 거예요.
CGN-TV를 시작할 때에도 저는 이렇게 커질 줄을 전혀 몰랐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인도하니까, 사람도 보내주고, 물질적인 후원자도 보내 주어서 이렇게 성공한 거예요.
하나님이 <영>으로 인도하니까 불가능이 가능해지고, 어려움도 쉽게 해결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영의 기도>입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성령님이 오시기 전이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기도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어요.
나는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영>이 시키는 일들을 스스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낸 시간 중에서 “가치있게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의미없이 보냈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의미있는 <영의 기도>를 시작해 보세요.
1.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는 “제자들을 지켜주고, 보호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지키고 보호했습니다.“ (요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는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켰습니다.
그들 가운데 멸망의 자식외에는 하나도 잃어버린 사람이 없으니, 이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을 지켜 달라”는 부탁의 기도입니다.
2.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는, 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 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두사람만 모이면 서로 싸우고, 편을 가르고, 서로를 비판하고, 결국은 서로가 헤어지는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서로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헤어지려고 합니다.
인간의 본능은 사랑이 아니고, 미움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나눔이 아니고, 소유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평화가 아니고, 전쟁입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이 행동을 하여도, 부패한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미움으로 변합니다.
인간은 <분열의 영>이 있어요.
왜 인간은 분열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죄악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도덕과 교양과 훈련을 통해서 처음에는 잘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죄악의 뿌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서로 싸우지 않게 해 달라>는 거예요.
아무리 어려워도 <서로 싸우지 않고, 하나 되게 해 달라>는 부탁이예요.
온누리 교회는 <하나되는 영>이 흐르기 바랍니다.
세상이 너무나 혼란스럽고, 싸우니까, 그래서 우리교회 표어가 <화해와 일치>로 정했어요.
3. 예수님의 세 번째 기도는 “기쁨으로 충만케 해 달라”는 기도 입니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의 독특한 것은 <기쁨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고, <기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좌절의 종교가 아니고, <기쁨의 종교>입니다.
4. 예수님의 네 번째 기도는 “악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 에서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는 “악에서 보호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냅니다>”(요17:18)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키운 사람이 <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이 <제자>예요.
여러분의 제자는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이예요.
예수님은 비록 나는 떠나지만, "남아 있는 제자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5. 예수님의 다섯 번째 기도는 “제자들이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 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입니다.
<거룩>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고, <하나님의 공의>가 그 안에 있습니다.
거룩은 순결을 만듭니다.
거룩의 옷을 입을 때, 인간은 순결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순결을 잃어버린, 양심의 갈등이 문제 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이 너무나 더러우니까, <거룩하게 되도록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거룩>은 순결을 뜻하므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다름 주에는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될 때, 우리의 삶에는 영광스런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 요17:20~26/ 말씀: 안광복 목사님
오늘은 <예수님의 기도>에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했고, 두 번째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했고,
세 번째로 오늘 말씀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지금까지 4가지 중요한 Key Word는 (1)영광 (2)보존하심 (3)거룩하게 하심
(4)그리고 오늘 나오는 <하나되게 하심>에 대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17:21~23)
첫 번째로, <하나 되게 하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건강이 나빠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꿈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둘째는 <교회를 세우는 꿈>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십자가를 지기위해> 오셨고, 이 땅이 <하나 되게> 하시려고 했어요.
그러나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 됨>이 깨졌어요.
처음에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가 되었으나, 아담이 죄를 지으면서 인간과 하나님은 사이가 벌어졌고,
<하나가 되지> 못하고, <관계>가 깨졌어요.
결국, 아담은 죄를 짓고 숨었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거예요.
그 후에 인간이 겪은 아픔이나 비극이나 갈등은 결국 <하나 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거예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이 모든 문제들을 <하나 되게>하시려는 예수님의 뜻이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하나 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됨>이 중요한 것은 세상 어디를 가나 중요해요.
세상에서 <하나 됨>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동이므로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초선 국회의원인 홍 정욱 의원은 어떤 인터뷰에서 국회에 들어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적군과 아군으로 싸우던 동료 의원들이 싸움이 끝나고 사석에서 만나면, 서로 웃고 즐기는 가식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했어요.
물론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부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서로 싸우던 사람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딴청을 부리는 사람들을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세상에서 벌어지는 노사 간의 갈등도 마찬가지 이지요.
시간이 지나거나, 상황이 바뀔 경우에 과거의 약속을 쉽게 번복을 하지요.
이런 것들은 세상이 바뀌니까 그런 것이라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가 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제자들은 틈만 나면 서로 싸우기 때문에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 되기>를 소망했어요.
2. 두 번째로,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됩니까?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하나가 된다>고 했어요.
오늘의 말씀 中에서 “(누구) (누구) 안에”라는 말이 반복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할 때 행복합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 거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어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할 때****(이것이 삼위일체의 개념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이 모여 있으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흔히 <몸>으로 비유하는데, 머리는 <예수님>이고, 우리는 그 <지체>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여럿이 모이면, <교회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지혜롭게 판단을 해야 해요.
그것은 이단의 세계가 교묘하게 접근해 오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세계관>이 건전한지? 그들의 <교리>가 분명한지, 먼저 따져 보고 얘기해야 해요.
그들은 상대방의 믿음을 알 수가 없는데도, 바로 “믿음이 어떻다”고 평가를 해요.
그건 크게 잘못된 말이지요.------> 그 분의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만 알고 있어요.
그러니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판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3. 세 번째로, <하나>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소통이 중요해요. 소통을 위해서는 막힌 것이 있으면 뚫어야 해요.
막힌 담을 뚫고,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주님과 맞는 <코드>를 접붙여 져야 해요.
주님과 확실한 관계를 설정해야 <주님 안에> 살게 되지요.
구멍이 막히면,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는, 선이 끊어져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선이 끊어져 있으면, <하나>가 될 수 없어요.
끊어진 줄을 연결해서, 서로 이어 져야 해요.
막혔던 담을 허물수록 소통이 잘 되고, 끊어진 코드를 연결해야 하나가 됩니다.
인간과 담을 헐고 소통을 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은 주님 안에서 온전히 거하고 계십니까?"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그 분과 함께 온전히 함께 있어야> 행복합니다.
4. 네 번째로 <하나 됨>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니까, 자주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게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알게 해 줍니까?-----> <하나 됨>의 목적과 결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줍니다.
예수를 믿고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돼요.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그냥 생기지 않아요.
<믿음>은 [알게 된다]는 것과 같이, 반드시 지식을 필요로 해요.
<믿음>은 뭘 알아야 믿게 되듯이, 먼저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해요.
여러분?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뭐예요?
“신앙생활이 성숙해 졌다”는 것은 과거에 내가 하지 않던 일을-----> "이제는 순종해서 한다"는 말이예요.
또 과거에 나는 혈기가 왕성하여 참지를 못했는데,------->
이제는 “참을 수 있다.”는 것이 <내 신앙이 성숙해 졌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니까 과거에는 <하나가 되는 일>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하나가 되는 것>에 관심이 생겼어요”라는 사람은 분명히 <성숙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단계에 따라, 때로는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는데 앞장서는 사람이 되요.
우리도 그런 믿음의 성숙을 통해, 인간들의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가 해결되기를 바래요.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친히 죽으심으로 막힌 담을 십자가를 통해 허물고, 화목제물이 되셨어요.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든, 성도간의 문제이든, 모두 다 해결되기 바래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었어요.
막혀있던 장벽을 허물고, 끊어진 것을 연결하여,
하나님과 소통을 이룰 때에 하나님과 <하나 된>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문화생활이 아니예요.
힘들고 구체적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면, <너희는 내 제자가 된다>고 했어요.
누군가 믿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를 알아야> 하고,
그리고 나서 그 다음 단계는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봉사일수도 있고, 전도일수도 있어요.
성도여러분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흘려보내고, 내게 막힌 담을 허물어야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담을 쌓고, 담을 지키려고만 해요.
주님 안에서 <하나 된> 관계가 유지될 때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과 진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막힌 것을 뚫고, 끊어진 것을 연결하세요.
그렇게 할 때에 건강한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어,
자연스럽게 <하나 된>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를 이루고,
통로가 된 우리를 통해 연결되어 <남에게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추석 명절을 맞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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