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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분 : 5ㆍ18 민중항쟁 사적지 제25호, 5ㆍ18 기념성당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동구 남동 55번지
- 전 화 : 062) 233-0518
빛고을 광주 전남도청이 소재하던(현재는 아시아 문화의 전당이 건설 중임) 호남의 중심부에 위치한 남동 5ㆍ18 기념성당은 설립 초기부터 6ㆍ25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수난의 시기를 거쳤고, 5ㆍ18 광주민중항쟁 기간에는 호남의 한을 가슴에 안고 성장하였으며, 이후 전남도청의 목포 이전으로 도심지가 텅 빈 가운데 생활 터전을 잃은 많은 교우들이 시내 곳곳으로 이전하는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본당으로 호남지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한 본당이라 하겠다. 남동 성당이 설립되기 이전에 광주에는 북동 성당 한 곳뿐이었다. 광주는 일제의 정책에 의하여 갑자기 성장한 도시로 북동 성당의 신자 수 증가와 인구 밀도 및 지역 여건의 변화에 따라 새 본당의 설립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1949년 7월, 당시 교구장이셨던 안브렌난 몬시뇰 지도하에 광주 북동 성당 주임 신부였던 모 신부(파트리치오 : 1932년 선종)가 광주시 남동 55번지의 대지 580여 평에 건물 70평을 매입하고 김 아우구스티노를 시켜 개축 수리하여 새 본당 설립을 준비하였다. 광주 북동 모 신부는 안 교구장과 상의하여, 1949년 12월 8일 성모 무염시태 축일을 기하여 준공하여 봉헌식을 갖기로 하고 본당 신부로 나주 성당 주임이었던 박문규(마카엘) 신부를 발령하였다. 모 신부와 박 신부는 합동으로 1949년 12월 8일 145명의 신자로 본당의 봉헌식을 거행하여 북동 성당에서 분리, 본당을 설립하게 하였으니 남동 성당은 광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되는 새 본당이 되었다.
이후 남동 성당은 사목활동에 열정을 쏟은 사제와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교활동으로 1957년 6월에 화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고 1964년 8월 15일에는 계림동 성당을 분리하였다. 같은 해 12월 5일에는 월산동 성당을, 1966년 6월 13일에는 방림동 성당을 분리하였다. 1968년 2월 11일에는 호남동 성당을, 1970년 12월 25일에는 지산동 성당을 분리하였으며, 본당 설립 이래 열 두 분의 사제를 배출하는 등 호남지역의 복음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동 성당은 어느 교회 못지않게 시련을 당하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9월에는 공산당에게 본당을 빼앗기고, 당시 본당 주임이던 박문규 미카엘 신부의 체포 명령으로 감금되어 성당 부속 문간방에 기거하였고, 1951년 1.4 후퇴 때에는 박 미카엘 신부를 포함한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교구의 지시에 따라 제주도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또한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나자 본당은 많은 광주시민에게 존경을 받았던 재야 인권운동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남동 성당을 찾은 것은 주임신부로 있던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와 함께 인권에 대한 뜻을 같이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광주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의 평화적 수습을 위한 수습대책위원회가 성당을 모임의 장소로, 토론의 장으로 활용했다. 그래서 남동 성당은 많은 시민들에게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인식이 확산되어 가면서 신뢰하기에 이르렀고 성당에서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민의 요구에 부응한 김성용 신부는 이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사제로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시민의 입장에서 대표적인 활동을 하면서 불철주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갔다. 그러나 김 신부의 활동이 협상 대상인 계엄사의 완고한 태도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주위의 권고로 경계가 삼엄했던 광주를 탈출, 서울로 상경하여 광주의 실상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고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분노보다는 슬픔이”란 제하로 광주 항쟁 때, 보고 들은 참상을 있던 그대로 수기를 써서 신앙으로 간증했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 철저하게 감추려하고 언론이 은폐 왜곡보도만 했던 계엄군의 시민학살 만행이 온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수기는 삽시간에 국내는 물론, 해외로까지 번역되어 전파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남동 성당은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뜻 있는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 받게 되었다. 당시 본당 신부는 보안사에 자진 출두하여 구속 수감되었고 보안사 지하실에서 25일간 심문을 받고, 광주 상무대 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 법정에 섰고, 1981년 8월까지 1년 2개월 복역 후 출감되기도 하였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게엄군에 의해 진압된 후, 광주에서는 독재 권력에 대한 각계각층의 저항 운동이 한때 침체되기도 했다. 그것은 권력이 조성한 공포적인 분위기와 혹독한 폭압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이었다(대학생들의 저항 시위는 계속되었다). 국가는 계엄령 하에 있었고 그 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사실상 준 계엄 사태와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반 인권운동 단체나 개인들의 수난이 거듭되고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혹독한 시련을 각오하지 않고는 감히 독재 권력에 저항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동 성당에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회로써 혹은 강론으로써, 성명서를 통해서, 또는 우리의 주장 등을 발표함으로써 정부의 부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항의하는 저항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광주 교구청과 사제단이 주관이 된 추모미사는 한 해도 빠짐없이 남동 성당에서 봉헌되고 있다. 광주항쟁이 수습된 1981년부터 시작된 이 미사는 5ㆍ18의 정당한 해결을 위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여 법 제정이 성사되었고 책임 있는 자들이 단죄 되는 등, 기대에는 미흡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해결되기까지 16년의 긴 세월동안 광주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매년 지속되고 있다. 초기 미사는 순수한 추모미사라기 보다는 독재 권력에 대한 투쟁이요 저항적 성격이 더욱 강한 행사라고 볼 수가 있었다.
이 미사에 참여한 이들은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 5ㆍ18 유족, 대학생들이 모여들어 발 디딜 곳이 없었으며 본당의 내외는 물론이요 인근 주변 도로에까지 초만원을 이룬 경우가 많았었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때는 밖에 모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형 확성기를 옥외로 설치해 놓고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이 미사에 참여한 비신자들은 모두가 5ㆍ18 민중항쟁으로 한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정의감과 의협심이 투철하고 부당한 권력에 투쟁적 정신이 강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무자비했던 독재권력 아래서도 굴함이 없이 언제나 일전을 불사한다는 마음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수많은 진압 경찰은 이들의 데모를 저지하기 위해 최루탄 발사기와 곤봉으로 무장을 하고 성당 주변에서 군중들의 동태를 감시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곤 하였다. 그러나 행사의 주체나 군중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모미사는 거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의 강론과 사제단의 성명서, 우리의 주장, 구속자 가족 대표들이 낭독하는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또는 광주시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등의 순으로 저항의 열기가 가해지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군중들은 그동안 말하고 싶었으나 말 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고만 있었던 시원스런 대목이 낭독될 때마다 성당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과 박수를 치고 양손을 들고 좌ㆍ우로 젓는가 하면 주먹을 쥐고 허공을 찌르는 등 장관이었다. 이와 같은 군중들의 행동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 미사 시간은 보통 두ㆍ세 시간씩 걸렸다. 그러면서도 군중들은 미사가 끝날 때까지는 아주 질서 정연하게 행동을 했다.
미사가 끝나면 군중들은 돌아가지 않고 누가 선동하는 것도 아닌데 통일된 구호로 “군사정권 물러가라,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외쳐댔다. 구호 외침이 끝나면 함성을 지르면서 일제히 시위를 했고 진압경찰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진압경찰은 수많은 군중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심지어는 사제관내에다 최루탄을 난사하는 야비한 행동까지 거침없이 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당 안은 물론이고 그 주변에까지 온통 최루탄 가스가 연기처럼 자욱했고 군중들은 눈을 뜰 수가 없었으며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군중들은 흩어지지 않고 노래를 부르면서 구호를 외치는 등, 끈질기게 대항을 해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같은 군중시위로 일어난 충돌 사건은 추모미사 첫해부터 5. 6년간은 거의 비슷한 일들이 발생하였다. 이후 현재까지도 5월이 되면 미사가 거행되어지고 있으나 초기와 같이 많은 인파가 모이거나 과격한 행동과 구호는 없이 차분한 가운데 추모미사로 거행되고 있다. 또한 KBS 시청료 거부 운동,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특별미사, 인권 회복미사,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투쟁 등 수많은 인권 운동이 이루어진 본당이다.
2005년 5월 16일 5ㆍ18 민중항쟁 25주년을 맞아 남동 성당은 광주광역시로 부터 25번째 5ㆍ18 민주항쟁 사적지로 지정되어 발표되었으며, 이때 성당 뜰에 조성된 성모동산은 호남의 중심인 무등산을 형상화 하였으며, 광주를 가슴에 안고 있는 성모님을 모셨고, 천주교 광주대교구로부터 5ㆍ18 기념성당으로 선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남동 5ㆍ18 기념성당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신자들의 한결같은 마음과 정신과 기도에서 비롯되리라 믿어진다. 그리고 이를 우리 후손들에게 바르게 전하여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내려질 수 있도록 전수하는 것은 부끄럼 없이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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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분 : 5ㆍ18 민중항쟁 사적지 제25호, 5ㆍ18 기념성당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동구 남동 55번지
- 전 화 : 062) 233-0518
빛고을 광주 전남도청이 소재하던(현재는 아시아 문화의 전당이 건설 중임) 호남의 중심부에 위치한 남동 5ㆍ18 기념성당은 설립 초기부터 6ㆍ25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수난의 시기를 거쳤고, 5ㆍ18 광주민중항쟁 기간에는 호남의 한을 가슴에 안고 성장하였으며, 이후 전남도청의 목포 이전으로 도심지가 텅 빈 가운데 생활 터전을 잃은 많은 교우들이 시내 곳곳으로 이전하는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본당으로 호남지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한 본당이라 하겠다. 남동 성당이 설립되기 이전에 광주에는 북동 성당 한 곳뿐이었다. 광주는 일제의 정책에 의하여 갑자기 성장한 도시로 북동 성당의 신자 수 증가와 인구 밀도 및 지역 여건의 변화에 따라 새 본당의 설립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1949년 7월, 당시 교구장이셨던 안브렌난 몬시뇰 지도하에 광주 북동 성당 주임 신부였던 모 신부(파트리치오 : 1932년 선종)가 광주시 남동 55번지의 대지 580여 평에 건물 70평을 매입하고 김 아우구스티노를 시켜 개축 수리하여 새 본당 설립을 준비하였다. 광주 북동 모 신부는 안 교구장과 상의하여, 1949년 12월 8일 성모 무염시태 축일을 기하여 준공하여 봉헌식을 갖기로 하고 본당 신부로 나주 성당 주임이었던 박문규(마카엘) 신부를 발령하였다. 모 신부와 박 신부는 합동으로 1949년 12월 8일 145명의 신자로 본당의 봉헌식을 거행하여 북동 성당에서 분리, 본당을 설립하게 하였으니 남동 성당은 광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되는 새 본당이 되었다.
이후 남동 성당은 사목활동에 열정을 쏟은 사제와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교활동으로 1957년 6월에 화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고 1964년 8월 15일에는 계림동 성당을 분리하였다. 같은 해 12월 5일에는 월산동 성당을, 1966년 6월 13일에는 방림동 성당을 분리하였다. 1968년 2월 11일에는 호남동 성당을, 1970년 12월 25일에는 지산동 성당을 분리하였으며, 본당 설립 이래 열 두 분의 사제를 배출하는 등 호남지역의 복음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동 성당은 어느 교회 못지않게 시련을 당하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9월에는 공산당에게 본당을 빼앗기고, 당시 본당 주임이던 박문규 미카엘 신부의 체포 명령으로 감금되어 성당 부속 문간방에 기거하였고, 1951년 1.4 후퇴 때에는 박 미카엘 신부를 포함한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교구의 지시에 따라 제주도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또한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나자 본당은 많은 광주시민에게 존경을 받았던 재야 인권운동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남동 성당을 찾은 것은 주임신부로 있던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와 함께 인권에 대한 뜻을 같이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광주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의 평화적 수습을 위한 수습대책위원회가 성당을 모임의 장소로, 토론의 장으로 활용했다. 그래서 남동 성당은 많은 시민들에게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인식이 확산되어 가면서 신뢰하기에 이르렀고 성당에서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민의 요구에 부응한 김성용 신부는 이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사제로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시민의 입장에서 대표적인 활동을 하면서 불철주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갔다. 그러나 김 신부의 활동이 협상 대상인 계엄사의 완고한 태도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주위의 권고로 경계가 삼엄했던 광주를 탈출, 서울로 상경하여 광주의 실상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고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분노보다는 슬픔이”란 제하로 광주 항쟁 때, 보고 들은 참상을 있던 그대로 수기를 써서 신앙으로 간증했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 철저하게 감추려하고 언론이 은폐 왜곡보도만 했던 계엄군의 시민학살 만행이 온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수기는 삽시간에 국내는 물론, 해외로까지 번역되어 전파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남동 성당은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뜻 있는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 받게 되었다. 당시 본당 신부는 보안사에 자진 출두하여 구속 수감되었고 보안사 지하실에서 25일간 심문을 받고, 광주 상무대 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 법정에 섰고, 1981년 8월까지 1년 2개월 복역 후 출감되기도 하였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게엄군에 의해 진압된 후, 광주에서는 독재 권력에 대한 각계각층의 저항 운동이 한때 침체되기도 했다. 그것은 권력이 조성한 공포적인 분위기와 혹독한 폭압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이었다(대학생들의 저항 시위는 계속되었다). 국가는 계엄령 하에 있었고 그 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사실상 준 계엄 사태와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반 인권운동 단체나 개인들의 수난이 거듭되고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혹독한 시련을 각오하지 않고는 감히 독재 권력에 저항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동 성당에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회로써 혹은 강론으로써, 성명서를 통해서, 또는 우리의 주장 등을 발표함으로써 정부의 부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항의하는 저항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광주 교구청과 사제단이 주관이 된 추모미사는 한 해도 빠짐없이 남동 성당에서 봉헌되고 있다. 광주항쟁이 수습된 1981년부터 시작된 이 미사는 5ㆍ18의 정당한 해결을 위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여 법 제정이 성사되었고 책임 있는 자들이 단죄 되는 등, 기대에는 미흡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해결되기까지 16년의 긴 세월동안 광주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매년 지속되고 있다. 초기 미사는 순수한 추모미사라기 보다는 독재 권력에 대한 투쟁이요 저항적 성격이 더욱 강한 행사라고 볼 수가 있었다.
이 미사에 참여한 이들은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 5ㆍ18 유족, 대학생들이 모여들어 발 디딜 곳이 없었으며 본당의 내외는 물론이요 인근 주변 도로에까지 초만원을 이룬 경우가 많았었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때는 밖에 모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형 확성기를 옥외로 설치해 놓고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이 미사에 참여한 비신자들은 모두가 5ㆍ18 민중항쟁으로 한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정의감과 의협심이 투철하고 부당한 권력에 투쟁적 정신이 강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무자비했던 독재권력 아래서도 굴함이 없이 언제나 일전을 불사한다는 마음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수많은 진압 경찰은 이들의 데모를 저지하기 위해 최루탄 발사기와 곤봉으로 무장을 하고 성당 주변에서 군중들의 동태를 감시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곤 하였다. 그러나 행사의 주체나 군중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모미사는 거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의 강론과 사제단의 성명서, 우리의 주장, 구속자 가족 대표들이 낭독하는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또는 광주시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등의 순으로 저항의 열기가 가해지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군중들은 그동안 말하고 싶었으나 말 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고만 있었던 시원스런 대목이 낭독될 때마다 성당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과 박수를 치고 양손을 들고 좌ㆍ우로 젓는가 하면 주먹을 쥐고 허공을 찌르는 등 장관이었다. 이와 같은 군중들의 행동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 미사 시간은 보통 두ㆍ세 시간씩 걸렸다. 그러면서도 군중들은 미사가 끝날 때까지는 아주 질서 정연하게 행동을 했다.
미사가 끝나면 군중들은 돌아가지 않고 누가 선동하는 것도 아닌데 통일된 구호로 “군사정권 물러가라,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외쳐댔다. 구호 외침이 끝나면 함성을 지르면서 일제히 시위를 했고 진압경찰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진압경찰은 수많은 군중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심지어는 사제관내에다 최루탄을 난사하는 야비한 행동까지 거침없이 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당 안은 물론이고 그 주변에까지 온통 최루탄 가스가 연기처럼 자욱했고 군중들은 눈을 뜰 수가 없었으며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군중들은 흩어지지 않고 노래를 부르면서 구호를 외치는 등, 끈질기게 대항을 해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같은 군중시위로 일어난 충돌 사건은 추모미사 첫해부터 5. 6년간은 거의 비슷한 일들이 발생하였다. 이후 현재까지도 5월이 되면 미사가 거행되어지고 있으나 초기와 같이 많은 인파가 모이거나 과격한 행동과 구호는 없이 차분한 가운데 추모미사로 거행되고 있다. 또한 KBS 시청료 거부 운동,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특별미사, 인권 회복미사,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투쟁 등 수많은 인권 운동이 이루어진 본당이다.
2005년 5월 16일 5ㆍ18 민중항쟁 25주년을 맞아 남동 성당은 광주광역시로 부터 25번째 5ㆍ18 민주항쟁 사적지로 지정되어 발표되었으며, 이때 성당 뜰에 조성된 성모동산은 호남의 중심인 무등산을 형상화 하였으며, 광주를 가슴에 안고 있는 성모님을 모셨고, 천주교 광주대교구로부터 5ㆍ18 기념성당으로 선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남동 5ㆍ18 기념성당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신자들의 한결같은 마음과 정신과 기도에서 비롯되리라 믿어진다. 그리고 이를 우리 후손들에게 바르게 전하여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내려질 수 있도록 전수하는 것은 부끄럼 없이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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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분 : 5ㆍ18 민중항쟁 사적지 제25호, 5ㆍ18 기념성당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동구 남동 55번지
- 전 화 : 062) 233-0518
빛고을 광주 전남도청이 소재하던(현재는 아시아 문화의 전당이 건설 중임) 호남의 중심부에 위치한 남동 5ㆍ18 기념성당은 설립 초기부터 6ㆍ25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수난의 시기를 거쳤고, 5ㆍ18 광주민중항쟁 기간에는 호남의 한을 가슴에 안고 성장하였으며, 이후 전남도청의 목포 이전으로 도심지가 텅 빈 가운데 생활 터전을 잃은 많은 교우들이 시내 곳곳으로 이전하는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본당으로 호남지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한 본당이라 하겠다. 남동 성당이 설립되기 이전에 광주에는 북동 성당 한 곳뿐이었다. 광주는 일제의 정책에 의하여 갑자기 성장한 도시로 북동 성당의 신자 수 증가와 인구 밀도 및 지역 여건의 변화에 따라 새 본당의 설립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1949년 7월, 당시 교구장이셨던 안브렌난 몬시뇰 지도하에 광주 북동 성당 주임 신부였던 모 신부(파트리치오 : 1932년 선종)가 광주시 남동 55번지의 대지 580여 평에 건물 70평을 매입하고 김 아우구스티노를 시켜 개축 수리하여 새 본당 설립을 준비하였다. 광주 북동 모 신부는 안 교구장과 상의하여, 1949년 12월 8일 성모 무염시태 축일을 기하여 준공하여 봉헌식을 갖기로 하고 본당 신부로 나주 성당 주임이었던 박문규(마카엘) 신부를 발령하였다. 모 신부와 박 신부는 합동으로 1949년 12월 8일 145명의 신자로 본당의 봉헌식을 거행하여 북동 성당에서 분리, 본당을 설립하게 하였으니 남동 성당은 광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되는 새 본당이 되었다.
이후 남동 성당은 사목활동에 열정을 쏟은 사제와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교활동으로 1957년 6월에 화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고 1964년 8월 15일에는 계림동 성당을 분리하였다. 같은 해 12월 5일에는 월산동 성당을, 1966년 6월 13일에는 방림동 성당을 분리하였다. 1968년 2월 11일에는 호남동 성당을, 1970년 12월 25일에는 지산동 성당을 분리하였으며, 본당 설립 이래 열 두 분의 사제를 배출하는 등 호남지역의 복음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동 성당은 어느 교회 못지않게 시련을 당하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9월에는 공산당에게 본당을 빼앗기고, 당시 본당 주임이던 박문규 미카엘 신부의 체포 명령으로 감금되어 성당 부속 문간방에 기거하였고, 1951년 1.4 후퇴 때에는 박 미카엘 신부를 포함한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교구의 지시에 따라 제주도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또한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나자 본당은 많은 광주시민에게 존경을 받았던 재야 인권운동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남동 성당을 찾은 것은 주임신부로 있던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와 함께 인권에 대한 뜻을 같이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광주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의 평화적 수습을 위한 수습대책위원회가 성당을 모임의 장소로, 토론의 장으로 활용했다. 그래서 남동 성당은 많은 시민들에게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인식이 확산되어 가면서 신뢰하기에 이르렀고 성당에서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민의 요구에 부응한 김성용 신부는 이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사제로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시민의 입장에서 대표적인 활동을 하면서 불철주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갔다. 그러나 김 신부의 활동이 협상 대상인 계엄사의 완고한 태도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주위의 권고로 경계가 삼엄했던 광주를 탈출, 서울로 상경하여 광주의 실상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고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분노보다는 슬픔이”란 제하로 광주 항쟁 때, 보고 들은 참상을 있던 그대로 수기를 써서 신앙으로 간증했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 철저하게 감추려하고 언론이 은폐 왜곡보도만 했던 계엄군의 시민학살 만행이 온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수기는 삽시간에 국내는 물론, 해외로까지 번역되어 전파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남동 성당은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뜻 있는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 받게 되었다. 당시 본당 신부는 보안사에 자진 출두하여 구속 수감되었고 보안사 지하실에서 25일간 심문을 받고, 광주 상무대 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 법정에 섰고, 1981년 8월까지 1년 2개월 복역 후 출감되기도 하였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게엄군에 의해 진압된 후, 광주에서는 독재 권력에 대한 각계각층의 저항 운동이 한때 침체되기도 했다. 그것은 권력이 조성한 공포적인 분위기와 혹독한 폭압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이었다(대학생들의 저항 시위는 계속되었다). 국가는 계엄령 하에 있었고 그 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사실상 준 계엄 사태와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반 인권운동 단체나 개인들의 수난이 거듭되고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혹독한 시련을 각오하지 않고는 감히 독재 권력에 저항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동 성당에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회로써 혹은 강론으로써, 성명서를 통해서, 또는 우리의 주장 등을 발표함으로써 정부의 부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항의하는 저항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광주 교구청과 사제단이 주관이 된 추모미사는 한 해도 빠짐없이 남동 성당에서 봉헌되고 있다. 광주항쟁이 수습된 1981년부터 시작된 이 미사는 5ㆍ18의 정당한 해결을 위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여 법 제정이 성사되었고 책임 있는 자들이 단죄 되는 등, 기대에는 미흡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해결되기까지 16년의 긴 세월동안 광주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매년 지속되고 있다. 초기 미사는 순수한 추모미사라기 보다는 독재 권력에 대한 투쟁이요 저항적 성격이 더욱 강한 행사라고 볼 수가 있었다.
이 미사에 참여한 이들은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 5ㆍ18 유족, 대학생들이 모여들어 발 디딜 곳이 없었으며 본당의 내외는 물론이요 인근 주변 도로에까지 초만원을 이룬 경우가 많았었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때는 밖에 모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형 확성기를 옥외로 설치해 놓고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이 미사에 참여한 비신자들은 모두가 5ㆍ18 민중항쟁으로 한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정의감과 의협심이 투철하고 부당한 권력에 투쟁적 정신이 강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무자비했던 독재권력 아래서도 굴함이 없이 언제나 일전을 불사한다는 마음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수많은 진압 경찰은 이들의 데모를 저지하기 위해 최루탄 발사기와 곤봉으로 무장을 하고 성당 주변에서 군중들의 동태를 감시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곤 하였다. 그러나 행사의 주체나 군중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모미사는 거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의 강론과 사제단의 성명서, 우리의 주장, 구속자 가족 대표들이 낭독하는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또는 광주시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등의 순으로 저항의 열기가 가해지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군중들은 그동안 말하고 싶었으나 말 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고만 있었던 시원스런 대목이 낭독될 때마다 성당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과 박수를 치고 양손을 들고 좌ㆍ우로 젓는가 하면 주먹을 쥐고 허공을 찌르는 등 장관이었다. 이와 같은 군중들의 행동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 미사 시간은 보통 두ㆍ세 시간씩 걸렸다. 그러면서도 군중들은 미사가 끝날 때까지는 아주 질서 정연하게 행동을 했다.
미사가 끝나면 군중들은 돌아가지 않고 누가 선동하는 것도 아닌데 통일된 구호로 “군사정권 물러가라,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외쳐댔다. 구호 외침이 끝나면 함성을 지르면서 일제히 시위를 했고 진압경찰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진압경찰은 수많은 군중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심지어는 사제관내에다 최루탄을 난사하는 야비한 행동까지 거침없이 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당 안은 물론이고 그 주변에까지 온통 최루탄 가스가 연기처럼 자욱했고 군중들은 눈을 뜰 수가 없었으며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군중들은 흩어지지 않고 노래를 부르면서 구호를 외치는 등, 끈질기게 대항을 해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같은 군중시위로 일어난 충돌 사건은 추모미사 첫해부터 5. 6년간은 거의 비슷한 일들이 발생하였다. 이후 현재까지도 5월이 되면 미사가 거행되어지고 있으나 초기와 같이 많은 인파가 모이거나 과격한 행동과 구호는 없이 차분한 가운데 추모미사로 거행되고 있다. 또한 KBS 시청료 거부 운동,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특별미사, 인권 회복미사,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투쟁 등 수많은 인권 운동이 이루어진 본당이다.
2005년 5월 16일 5ㆍ18 민중항쟁 25주년을 맞아 남동 성당은 광주광역시로 부터 25번째 5ㆍ18 민주항쟁 사적지로 지정되어 발표되었으며, 이때 성당 뜰에 조성된 성모동산은 호남의 중심인 무등산을 형상화 하였으며, 광주를 가슴에 안고 있는 성모님을 모셨고, 천주교 광주대교구로부터 5ㆍ18 기념성당으로 선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남동 5ㆍ18 기념성당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신자들의 한결같은 마음과 정신과 기도에서 비롯되리라 믿어진다. 그리고 이를 우리 후손들에게 바르게 전하여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내려질 수 있도록 전수하는 것은 부끄럼 없이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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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분 : 5ㆍ18 민중항쟁 사적지 제25호, 5ㆍ18 기념성당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동구 남동 55번지
- 전 화 : 062) 233-0518
빛고을 광주 전남도청이 소재하던(현재는 아시아 문화의 전당이 건설 중임) 호남의 중심부에 위치한 남동 5ㆍ18 기념성당은 설립 초기부터 6ㆍ25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수난의 시기를 거쳤고, 5ㆍ18 광주민중항쟁 기간에는 호남의 한을 가슴에 안고 성장하였으며, 이후 전남도청의 목포 이전으로 도심지가 텅 빈 가운데 생활 터전을 잃은 많은 교우들이 시내 곳곳으로 이전하는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본당으로 호남지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한 본당이라 하겠다. 남동 성당이 설립되기 이전에 광주에는 북동 성당 한 곳뿐이었다. 광주는 일제의 정책에 의하여 갑자기 성장한 도시로 북동 성당의 신자 수 증가와 인구 밀도 및 지역 여건의 변화에 따라 새 본당의 설립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1949년 7월, 당시 교구장이셨던 안브렌난 몬시뇰 지도하에 광주 북동 성당 주임 신부였던 모 신부(파트리치오 : 1932년 선종)가 광주시 남동 55번지의 대지 580여 평에 건물 70평을 매입하고 김 아우구스티노를 시켜 개축 수리하여 새 본당 설립을 준비하였다. 광주 북동 모 신부는 안 교구장과 상의하여, 1949년 12월 8일 성모 무염시태 축일을 기하여 준공하여 봉헌식을 갖기로 하고 본당 신부로 나주 성당 주임이었던 박문규(마카엘) 신부를 발령하였다. 모 신부와 박 신부는 합동으로 1949년 12월 8일 145명의 신자로 본당의 봉헌식을 거행하여 북동 성당에서 분리, 본당을 설립하게 하였으니 남동 성당은 광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되는 새 본당이 되었다.
이후 남동 성당은 사목활동에 열정을 쏟은 사제와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교활동으로 1957년 6월에 화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고 1964년 8월 15일에는 계림동 성당을 분리하였다. 같은 해 12월 5일에는 월산동 성당을, 1966년 6월 13일에는 방림동 성당을 분리하였다. 1968년 2월 11일에는 호남동 성당을, 1970년 12월 25일에는 지산동 성당을 분리하였으며, 본당 설립 이래 열 두 분의 사제를 배출하는 등 호남지역의 복음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동 성당은 어느 교회 못지않게 시련을 당하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9월에는 공산당에게 본당을 빼앗기고, 당시 본당 주임이던 박문규 미카엘 신부의 체포 명령으로 감금되어 성당 부속 문간방에 기거하였고, 1951년 1.4 후퇴 때에는 박 미카엘 신부를 포함한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교구의 지시에 따라 제주도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또한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나자 본당은 많은 광주시민에게 존경을 받았던 재야 인권운동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남동 성당을 찾은 것은 주임신부로 있던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와 함께 인권에 대한 뜻을 같이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광주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의 평화적 수습을 위한 수습대책위원회가 성당을 모임의 장소로, 토론의 장으로 활용했다. 그래서 남동 성당은 많은 시민들에게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인식이 확산되어 가면서 신뢰하기에 이르렀고 성당에서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민의 요구에 부응한 김성용 신부는 이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사제로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시민의 입장에서 대표적인 활동을 하면서 불철주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갔다. 그러나 김 신부의 활동이 협상 대상인 계엄사의 완고한 태도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주위의 권고로 경계가 삼엄했던 광주를 탈출, 서울로 상경하여 광주의 실상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고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분노보다는 슬픔이”란 제하로 광주 항쟁 때, 보고 들은 참상을 있던 그대로 수기를 써서 신앙으로 간증했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 철저하게 감추려하고 언론이 은폐 왜곡보도만 했던 계엄군의 시민학살 만행이 온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수기는 삽시간에 국내는 물론, 해외로까지 번역되어 전파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남동 성당은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뜻 있는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 받게 되었다. 당시 본당 신부는 보안사에 자진 출두하여 구속 수감되었고 보안사 지하실에서 25일간 심문을 받고, 광주 상무대 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 법정에 섰고, 1981년 8월까지 1년 2개월 복역 후 출감되기도 하였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게엄군에 의해 진압된 후, 광주에서는 독재 권력에 대한 각계각층의 저항 운동이 한때 침체되기도 했다. 그것은 권력이 조성한 공포적인 분위기와 혹독한 폭압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이었다(대학생들의 저항 시위는 계속되었다). 국가는 계엄령 하에 있었고 그 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사실상 준 계엄 사태와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반 인권운동 단체나 개인들의 수난이 거듭되고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혹독한 시련을 각오하지 않고는 감히 독재 권력에 저항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동 성당에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회로써 혹은 강론으로써, 성명서를 통해서, 또는 우리의 주장 등을 발표함으로써 정부의 부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항의하는 저항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광주 교구청과 사제단이 주관이 된 추모미사는 한 해도 빠짐없이 남동 성당에서 봉헌되고 있다. 광주항쟁이 수습된 1981년부터 시작된 이 미사는 5ㆍ18의 정당한 해결을 위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여 법 제정이 성사되었고 책임 있는 자들이 단죄 되는 등, 기대에는 미흡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해결되기까지 16년의 긴 세월동안 광주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매년 지속되고 있다. 초기 미사는 순수한 추모미사라기 보다는 독재 권력에 대한 투쟁이요 저항적 성격이 더욱 강한 행사라고 볼 수가 있었다.
이 미사에 참여한 이들은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 5ㆍ18 유족, 대학생들이 모여들어 발 디딜 곳이 없었으며 본당의 내외는 물론이요 인근 주변 도로에까지 초만원을 이룬 경우가 많았었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때는 밖에 모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형 확성기를 옥외로 설치해 놓고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이 미사에 참여한 비신자들은 모두가 5ㆍ18 민중항쟁으로 한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정의감과 의협심이 투철하고 부당한 권력에 투쟁적 정신이 강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무자비했던 독재권력 아래서도 굴함이 없이 언제나 일전을 불사한다는 마음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수많은 진압 경찰은 이들의 데모를 저지하기 위해 최루탄 발사기와 곤봉으로 무장을 하고 성당 주변에서 군중들의 동태를 감시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곤 하였다. 그러나 행사의 주체나 군중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모미사는 거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의 강론과 사제단의 성명서, 우리의 주장, 구속자 가족 대표들이 낭독하는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또는 광주시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등의 순으로 저항의 열기가 가해지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군중들은 그동안 말하고 싶었으나 말 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고만 있었던 시원스런 대목이 낭독될 때마다 성당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과 박수를 치고 양손을 들고 좌ㆍ우로 젓는가 하면 주먹을 쥐고 허공을 찌르는 등 장관이었다. 이와 같은 군중들의 행동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 미사 시간은 보통 두ㆍ세 시간씩 걸렸다. 그러면서도 군중들은 미사가 끝날 때까지는 아주 질서 정연하게 행동을 했다.
미사가 끝나면 군중들은 돌아가지 않고 누가 선동하는 것도 아닌데 통일된 구호로 “군사정권 물러가라,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외쳐댔다. 구호 외침이 끝나면 함성을 지르면서 일제히 시위를 했고 진압경찰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진압경찰은 수많은 군중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심지어는 사제관내에다 최루탄을 난사하는 야비한 행동까지 거침없이 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당 안은 물론이고 그 주변에까지 온통 최루탄 가스가 연기처럼 자욱했고 군중들은 눈을 뜰 수가 없었으며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군중들은 흩어지지 않고 노래를 부르면서 구호를 외치는 등, 끈질기게 대항을 해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같은 군중시위로 일어난 충돌 사건은 추모미사 첫해부터 5. 6년간은 거의 비슷한 일들이 발생하였다. 이후 현재까지도 5월이 되면 미사가 거행되어지고 있으나 초기와 같이 많은 인파가 모이거나 과격한 행동과 구호는 없이 차분한 가운데 추모미사로 거행되고 있다. 또한 KBS 시청료 거부 운동,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특별미사, 인권 회복미사,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투쟁 등 수많은 인권 운동이 이루어진 본당이다.
2005년 5월 16일 5ㆍ18 민중항쟁 25주년을 맞아 남동 성당은 광주광역시로 부터 25번째 5ㆍ18 민주항쟁 사적지로 지정되어 발표되었으며, 이때 성당 뜰에 조성된 성모동산은 호남의 중심인 무등산을 형상화 하였으며, 광주를 가슴에 안고 있는 성모님을 모셨고, 천주교 광주대교구로부터 5ㆍ18 기념성당으로 선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남동 5ㆍ18 기념성당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신자들의 한결같은 마음과 정신과 기도에서 비롯되리라 믿어진다. 그리고 이를 우리 후손들에게 바르게 전하여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내려질 수 있도록 전수하는 것은 부끄럼 없이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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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분 : 5ㆍ18 민중항쟁 사적지 제25호, 5ㆍ18 기념성당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동구 남동 55번지
- 전 화 : 062) 233-0518
빛고을 광주 전남도청이 소재하던(현재는 아시아 문화의 전당이 건설 중임) 호남의 중심부에 위치한 남동 5ㆍ18 기념성당은 설립 초기부터 6ㆍ25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수난의 시기를 거쳤고, 5ㆍ18 광주민중항쟁 기간에는 호남의 한을 가슴에 안고 성장하였으며, 이후 전남도청의 목포 이전으로 도심지가 텅 빈 가운데 생활 터전을 잃은 많은 교우들이 시내 곳곳으로 이전하는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본당으로 호남지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한 본당이라 하겠다.
남동 성당이 설립되기 이전에 광주에는 북동 성당 한 곳뿐이었다. 광주는 일제의 정책에 의하여 갑자기 성장한 도시로 북동 성당의 신자 수 증가와 인구 밀도 및 지역 여건의 변화에 따라 새 본당의 설립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1949년 7월, 당시 교구장이셨던 안브렌난 몬시뇰 지도하에 광주 북동 성당 주임 신부였던 모 신부(파트리치오 : 1932년 선종)가 광주시 남동 55번지의 대지 580여 평에 건물 70평을 매입하고 김 아우구스티노를 시켜 개축 수리하여 새 본당 설립을 준비하였다. 광주 북동 모 신부는 안 교구장과 상의하여, 1949년 12월 8일 성모 무염시태 축일을 기하여 준공하여 봉헌식을 갖기로 하고 본당 신부로 나주 성당 주임이었던 박문규(마카엘) 신부를 발령하였다. 모 신부와 박 신부는 합동으로 1949년 12월 8일 145명의 신자로 본당의 봉헌식을 거행하여 북동 성당에서 분리, 본당을 설립하게 하였으니 남동 성당은 광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되는 새 본당이 되었다.
이후 남동 성당은 사목활동에 열정을 쏟은 사제와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교활동으로 1957년 6월에 화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고 1964년 8월 15일에는 계림동 성당을 분리하였다. 같은 해 12월 5일에는 월산동 성당을, 1966년 6월 13일에는 방림동 성당을 분리하였다. 1968년 2월 11일에는 호남동 성당을, 1970년 12월 25일에는 지산동 성당을 분리하였으며, 본당 설립 이래 열 두 분의 사제를 배출하는 등 호남지역의 복음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동 성당은 어느 교회 못지않게 시련을 당하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9월에는 공산당에게 본당을 빼앗기고, 당시 본당 주임이던 박문규 미카엘 신부의 체포 명령으로 감금되어 성당 부속 문간방에 기거하였고, 1951년 1.4 후퇴 때에는 박 미카엘 신부를 포함한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교구의 지시에 따라 제주도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또한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나자 본당은 많은 광주시민에게 존경을 받았던 재야 인권운동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남동 성당을 찾은 것은 주임신부로 있던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와 함께 인권에 대한 뜻을 같이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광주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의 평화적 수습을 위한 수습대책위원회가 성당을 모임의 장소로, 토론의 장으로 활용했다. 그래서 남동 성당은 많은 시민들에게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인식이 확산되어 가면서 신뢰하기에 이르렀고 성당에서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민의 요구에 부응한 김성용 신부는 이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사제로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시민의 입장에서 대표적인 활동을 하면서 불철주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갔다. 그러나 김 신부의 활동이 협상 대상인 계엄사의 완고한 태도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주위의 권고로 경계가 삼엄했던 광주를 탈출, 서울로 상경하여 광주의 실상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고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분노보다는 슬픔이”란 제하로 광주 항쟁 때, 보고 들은 참상을 있던 그대로 수기를 써서 신앙으로 간증했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 철저하게 감추려하고 언론이 은폐 왜곡보도만 했던 계엄군의 시민학살 만행이 온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수기는 삽시간에 국내는 물론, 해외로까지 번역되어 전파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남동 성당은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뜻 있는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 받게 되었다. 당시 본당 신부는 보안사에 자진 출두하여 구속 수감되었고 보안사 지하실에서 25일간 심문을 받고, 광주 상무대 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 법정에 섰고, 1981년 8월까지 1년 2개월 복역 후 출감되기도 하였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게엄군에 의해 진압된 후, 광주에서는 독재 권력에 대한 각계각층의 저항 운동이 한때 침체되기도 했다. 그것은 권력이 조성한 공포적인 분위기와 혹독한 폭압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이었다(대학생들의 저항 시위는 계속되었다). 국가는 계엄령 하에 있었고 그 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사실상 준 계엄 사태와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반 인권운동 단체나 개인들의 수난이 거듭되고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혹독한 시련을 각오하지 않고는 감히 독재 권력에 저항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동 성당에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회로써 혹은 강론으로써, 성명서를 통해서, 또는 우리의 주장 등을 발표함으로써 정부의 부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항의하는 저항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광주 교구청과 사제단이 주관이 된 추모미사는 한 해도 빠짐없이 남동 성당에서 봉헌되고 있다. 광주항쟁이 수습된 1981년부터 시작된 이 미사는 5ㆍ18의 정당한 해결을 위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여 법 제정이 성사되었고 책임 있는 자들이 단죄 되는 등, 기대에는 미흡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해결되기까지 16년의 긴 세월동안 광주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매년 지속되고 있다. 초기 미사는 순수한 추모미사라기 보다는 독재 권력에 대한 투쟁이요 저항적 성격이 더욱 강한 행사라고 볼 수가 있었다.
이 미사에 참여한 이들은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 5ㆍ18 유족, 대학생들이 모여들어 발 디딜 곳이 없었으며 본당의 내외는 물론이요 인근 주변 도로에까지 초만원을 이룬 경우가 많았었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때는 밖에 모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형 확성기를 옥외로 설치해 놓고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이 미사에 참여한 비신자들은 모두가 5ㆍ18 민중항쟁으로 한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정의감과 의협심이 투철하고 부당한 권력에 투쟁적 정신이 강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무자비했던 독재권력 아래서도 굴함이 없이 언제나 일전을 불사한다는 마음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수많은 진압 경찰은 이들의 데모를 저지하기 위해 최루탄 발사기와 곤봉으로 무장을 하고 성당 주변에서 군중들의 동태를 감시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곤 하였다. 그러나 행사의 주체나 군중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모미사는 거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의 강론과 사제단의 성명서, 우리의 주장, 구속자 가족 대표들이 낭독하는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또는 광주시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등의 순으로 저항의 열기가 가해지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군중들은 그동안 말하고 싶었으나 말 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고만 있었던 시원스런 대목이 낭독될 때마다 성당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과 박수를 치고 양손을 들고 좌ㆍ우로 젓는가 하면 주먹을 쥐고 허공을 찌르는 등 장관이었다. 이와 같은 군중들의 행동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 미사 시간은 보통 두ㆍ세 시간씩 걸렸다. 그러면서도 군중들은 미사가 끝날 때까지는 아주 질서 정연하게 행동을 했다.
미사가 끝나면 군중들은 돌아가지 않고 누가 선동하는 것도 아닌데 통일된 구호로 “군사정권 물러가라,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외쳐댔다. 구호 외침이 끝나면 함성을 지르면서 일제히 시위를 했고 진압경찰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진압경찰은 수많은 군중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심지어는 사제관내에다 최루탄을 난사하는 야비한 행동까지 거침없이 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당 안은 물론이고 그 주변에까지 온통 최루탄 가스가 연기처럼 자욱했고 군중들은 눈을 뜰 수가 없었으며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군중들은 흩어지지 않고 노래를 부르면서 구호를 외치는 등, 끈질기게 대항을 해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같은 군중시위로 일어난 충돌 사건은 추모미사 첫해부터 5. 6년간은 거의 비슷한 일들이 발생하였다. 이후 현재까지도 5월이 되면 미사가 거행되어지고 있으나 초기와 같이 많은 인파가 모이거나 과격한 행동과 구호는 없이 차분한 가운데 추모미사로 거행되고 있다. 또한 KBS 시청료 거부 운동,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특별미사, 인권 회복미사,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투쟁 등 수많은 인권 운동이 이루어진 본당이다.
2005년 5월 16일 5ㆍ18 민중항쟁 25주년을 맞아 남동 성당은 광주광역시로 부터 25번째 5ㆍ18 민주항쟁 사적지로 지정되어 발표되었으며, 이때 성당 뜰에 조성된 성모동산은 호남의 중심인 무등산을 형상화 하였으며, 광주를 가슴에 안고 있는 성모님을 모셨고, 천주교 광주대교구로부터 5ㆍ18 기념성당으로 선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남동 5ㆍ18 기념성당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신자들의 한결같은 마음과 정신과 기도에서 비롯되리라 믿어진다. 그리고 이를 우리 후손들에게 바르게 전하여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내려질 수 있도록 전수하는 것은 부끄럼 없이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