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의 날이다.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 해, 민정당 군부와 간신세력들이 또 다시 체육관 선거를 통해 권력을 군부에 대물림하려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을 기억하는 날이다. 1987년은 나에게 무척 특별한 해였다. 그해 2월에 신학교 4학년 학부를 졸업하고 군대 영장을 7월 말에 받은 나는 대학원 과정 한 학기를 서울 신학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해는 박종철군 고문살인 사건, 이한열 학생의 최루탄 살인 사건이 이슈가 되었던 해이고, 그에 따라 모든 의식있는 국민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몇 달간 외치던 해였다. 신학생이었던 나도 데모에 참가하여 두 번 전투경찰에 연행이 되었다. 그 때 처음 닭장차를 타 보았다. 그리고 그해 9월부터 2년 넘게 닭장차를 타고 군복무를 마쳐야 했다. 그것도 살아나는 땅, 깨어나는 땅, 민족의 땅 광주에서.
그해 4월 13일 철없는 전두환이 호헌을 발표한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김수환 추기경님과 사제단을 비롯한 사회 각계 인사들이 호헌철회를 공식적으로 요구한다. 그해 5월 18일 돌아가신 김승훈 신부님께서 광주 민중 항쟁을 기억하는 그날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학생의 살인에 대해 축소 은폐 의혹을 제기하며 일은 걷잡을 수없이 된다. 지금도 그날 십자가를 앞으로 하고 명동에서 신학생들과 신부님들이 행진을 하던 사진을 보면 가슴이 미어온다. 일주일 뒤에 희생양이 필요했던 전두환은 충견 노릇을 하던 노신영을 국무총리에서 해임하고 다른 강아지인 이한기를 임명하는 잔수를 둔다. 하지만 결국 6월 9일, 22년전 어제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진이 공개되면서 넥타이부대까지 매일 데모에 동참한다. 6.10 만세 운동 기념일인 오늘은 재야 단체와 인사들이 성공회 서울 교구 주교좌에 모여 국민대회를 연다. 일제에 항거했던 그 정신이 바로 민주화의 열망으로 이어진다. 오늘이 그날이다. 그날의 기록 필름을 꼭 보기 바란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정당은 그날 노태우를 체육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했고, 역사를 역행하리라 구체적으로 자세를 한 것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국민들의 반대에 항복하고 6.29를 선언한다. 그리고 그 해 내가 전투경찰로 폭도들과 맞서서 열심히 활동한 덕분에 노태우가 직접선거로 당당히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선된 노태우가 그 다음날 김 추기경을 찾아 뵙고 인사드릴 때, 추기경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저는 당선되지 않은 나머지 60%에 투표하였습니다”. 6월 항쟁은 이렇게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고, 몇 번의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 민정당 세력들은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아 아직도 집권하고 있고, 다음에도 집권을 하려하고 있다. 이미 총선도 승리한 김에 정국을 파행으로 몰아가며, 국론을 안보로 몰아세우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한다. 지겹게도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노태우는 아직도 우리 역사에 짙은 그림자로 살아 있다.
그러나 이 항쟁이 가진 중요한 함의가 있다. 그것은 시민적인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또한 담론을 이끌어 가는 방식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담론을 시작하는 방식, 담론을 이끌어 가는 방식이 아닌가? 그리고 그 담론을 검증하는 것은 바로 담론을 통해 무엇인가를 결정하여 시도했을 때 가능한 것으로, 그것이 실수와 실패를 가져오더라도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아닌가? 우리들이 지금의 집권당을 싫어하는 이유를 담론이라는 단어를 통해 찾자면, 담론을 조작하고, 담론의 주제를 국민들의 불안감에 입각하여 설정하고, 담론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면 그것을 막기 위해 거대 매체를 이용하여 여론이라는 것으로 짓밟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지긋지긋한 군사독재의 잔재가 남아 있다. 안보논리, 종북논리, 군대문화적인 무조건적인 집권자에 대한 맹종강요...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다. 당연히 6월 항쟁이 가지는 역사적인 임팩트보다 훨씬 중요하고 근원적인 효과를 인류사에 선사하는 축일이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이 세상에 남겨주셔서, 당신 차원에서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시면서 함께 기뻐하시고 함께 슬퍼하시며, 함께 사시고 함께 죽으시며, 무엇보다 끊임없이 인류의 성화를 위해 희생을 반복하고 계시다. 그리고 인간의 차원에서는 이 성사를 다시 거행할 때마다, 희생되신 그리스도를 새롭게 닮아서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이 신비를 다시 기념하는 날이다.
원래 이 축일은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 즉 우리에게는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에 거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목요일에 지내면 오늘날의 상황에서 신자분들이 많이 참례할 수 없기 때문에 주일로 옮겨서 지내고 있다.
이 대축일은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께서 그 전해에 있었던 성체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이탈리아 라치오 주 북부에 볼세나라는 호수가 있고, 볼세나라는 동네가 있다. 그곳에 성녀 크리스티나에게 바쳐진 성당이 있는데, 이곳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어느 신부가 미사를 드리다가 빵과 포도주가 정말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지 의심을 했다. 다음 순간 빵이 살로 변하고 포도주가 피로 변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볼세나 옆에 있는 오르비에토에 와 있던 교황께서는 그 소식을 듣고 당장 성체와 성혈을 모셔오라고 해서 그 깡촌에 정말 멋진 대성당을 건립하고 그곳에 모셨다. 불행하게 그 교구가 돈이 없어 재작년부터 돈을 받는다. 신부는 공짜다. 그리고 실제로 기적이 일어난 볼세나의 성녀 크리스티나 성당에는 제대에 핏자국이 남아있었는데, 그부분의 돌을 오려서 모셔두었다. 여기도 돈을 받는다. 신부는 공짜다. 신부가 의심하여 기적이 일어났고, 신부는 공짜로 보게 해 주면서 의심하지 말라고 한다. 덕분에 신자분들만 열심히 교회에 갖다 바친다. 농담 한 마디 하자. 신부들 가운데 도대체 몇 명이나 단 한 번의 의심없이 성변화를 집전할까? 기적을 체험한 그 신부는 복 받은 사람이다.
이 기적이 일어난 성체는 외출을 통하여 사람들을 찾아가신다. 그것이 바로 성체거동의 시작이다. 실제로 이때부터 엄청나게 많은 지역에서 성체 거동을 한다. 우리나라는 내가 알기로 감곡에서 이 거동을 아주 아름답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여러 교구에서 하는데, 꽃으로 완전히 길을 미리 장식하는 곳도 있다. 주교좌가 산 위에 있는 어떤 교구는 주교좌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층계를 완전히 꽃으로 덮어 장관을 이룬다. 해마다 순례객이 수 만명씩 몰려오는 곳이다.
정리를 하자. 예수님께서는 역사에 성체와 성혈로 살아계시고 함께 움직이신다. 그분께서 이 신비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는 영원하며, 진리를 위해 몸바친 당신의 모범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표징으로 남겨두셔서, 우리가 매일 오관으로부터 시작하여 영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그분의 희생이다.
나는 예수님의 이 위대한 희생과 6월 항쟁의 희생자들을 동등 비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의미가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의 존재는 우리들이 하고 있는 정치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자극을 주고 영감을 줄 것이며, 더 나아가 판단을 하기 위한 시금석이 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희생하였다.
인류 역사를 위해 희생되시고 그 희생의 자국을 성체와 성혈로 남기신 예수님께, 우리 역사 안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영혼을 맡기고 싶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희생된 사람들 안에서 다시 한 번 희생되신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오늘의 눈으로 읽어보고 싶다. 아니 모두에게 같이 읽자고, 읽으려 노력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 역사에 길게 당신의 손을 드리우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내 피니라.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성체 성혈 축성문).
ㅈ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