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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10월 16일 수요일]
『대동야승』 제13권
[기묘록 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 조광조 전(趙光祖 傳)
<조정암 전(趙靜庵傳)>은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정국의 『기묘록』에 이자의 『음애일록』을 붙인 다음, 김정국의 『사재척언』에서 옮겨온 글을 붙이고, 이어서 앞의 <척언>을 비판하는 상사(上舍) 정사원(鄭士元)의 <참언(僭言)>을 붙인 다음에 안로 본인의 <보유>를 붙였다. 이어서 이황의 『퇴계집』에서 <행장>을 옮겨 붙이고, 출전 없이 몇 책에서 옮겨온 글로 마무리하였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기묘당적> : 조광조(趙光祖)는 임인생이고 자(字)는 효직(孝直)이며, 경오년 진사에 장원하였다. 천(薦)으로써 참상(參上)직에 특배(特拜)되어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가 되었다. 을해년에 급제하여 벼슬을 대사헌까지 하였다. 능성(綾城)으로 귀양갔다가 곧 사사(賜死)되었다.
기묘년 8월 정해일에 주강(晝講)을 하다가, 우부승지 박세희(朴世熹)가 아뢰기를, “조광조는 젊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고 장성하여서는 스스로 깨닫고 분발하였습니다. 도학에 침잠하여 문구(文句)에 일삼지 않았으며, 의리를 깊이 탐구하였습니다. 한 시대 사람이 많이 헐뜯고 나무라서, 광자(狂者)라 하거나 화태(禍胎)라 하여 붕우들도 절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때를 당했으나, 입지(立志)한 것이 매우 독실하여서 조금도 흔들리거나 굴하지 않았습니다.
반정(反正) 초기에 그 학문으로써 후생을 인도하니 그를 따라서 감발(感發)한 자가 많아 비록 필부였으나 사류(士類)를 도야하고 성취한 공이 조정에 미쳤습니다. 폐조(廢朝) 때 판탕(板蕩 국정이 문란함)한 뒤에 사기(士氣)를 붙들어서 고동(鼓動)시켰고, 신이 약간 개발한 것도 모두 이 사람을 연유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이와 같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음애일록(陰崖日錄)> : 조효직 공이 임금의 명을 받고 죽었으니, 아, 사람이 죽었다 하는데, 어찌 할 말이 없겠는가.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 널리 배우고 힘껏 행하였다. 잇달아 높은 성적으로 과거에 합격하였고, 청현직 벼슬을 지냈다. 무릇 시행하는 바가 남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고 도에서도 이탈하지 않았으니, 사림(士林)이 다 추중(推重)하였다. 국가가 중흥할 운수를 당해서 조야에서 유신(維新)하기를 바랬다. 까닭에 공은 홀로 침착하게 건의하여 선왕(先王)의 법도를 회복하도록 청하였다.
아는 것은 임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하면 임금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스스로 세상에 흔하지 않은 지우(知遇)라 하여 교화할 조목을 밟지 아니하고 등용되었는데, 특별히 공을 대사헌으로 제수하여 군중의 바람에 부흥하였다. 기강(紀綱)을 파악하여 명령하면 행하여지고 금하면 그쳤다.
그러나 후진 여러 현사(賢士)는 넓고 기(氣)가 날카로워서,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점차적으로 개혁함이 없었으므로 험한 세정(世情)에 저촉되어 인심이 크게 어그러졌다. 공이 신 대용(申大用 신상(申鏛))ㆍ권중허(權仲虛 권벌(權橃))와 함께 신(新)ㆍ구(舊) 두 사이를 조화시켜서 파국(破局)에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하였으나 신ㆍ구가 서로 미워하여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사람의 꾀한 것이 착하지 못했음이랴.
아, 옳고 그름이 비록 한때는 혼돈했으나 정상(情狀)이 후일에는 반드시 드러날 것이니, 어찌 반드시 운운하리오. 머리 말과 편(篇) 끝은 음애전 가운데에 자세히 적혀 있다.」
「<사재척언> : 회령(會寧) 성 밑에 살고 있던 야인(野人 여진족) 속고내(速古乃)가 가만히 먼 곳 야인과 공모(共謀)하고 갑산부(甲山府)에 들어와서 백성과 가축을 많이 노략해 갔다.
무인년에 남도 공사(南道共使)가 밀계(密啓)하기를,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잠입하여 어렵(漁獵)하면서 왕래하나 무리가 많아서 잡기 어렵습니다. 불시에 군사를 풀어 덮쳐 잡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3공과 병조와 변경(邊境) 일을 아는 재상을 불러서 논의하니, 모두 아뢰기를, “이것을 징계하지 아니하면 성 밑에 살고 있는 야인들도 잇달아 반란할 것입니다. 중신(重臣)을 보내어 감사ㆍ병사(兵使)와 함께 적을 잡아서 법대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먼저 비밀 교지(敎旨)로써 본도(本道)에 알리고, 또 병기ㆍ갑옷ㆍ기계 따위를 보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지방(李之芳)을 보내도록 명하고, 특히 어의(御衣)와 활ㆍ화살을 하사하여서 즉일 하직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서 소대(召對)하고 이어서 전송하는 잔치를 벌였다. 3공 및 여러 신하가 좌우에 시위(侍衛)하였는데, 나는 병방 승지(兵房承旨)로서 참석하였다. 내시가 아뢰기를, “부제학 조광조가 와서 입시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곧 윤허가 내리니 조광조가 나와서, “이번 일은 바로 도둑과 같은 짓입니다. 기미를 엿보는 간사한 꾀는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제어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또한 당당한 큰 나라에서 요망한 오랑캐를 잡기 위해 도적과 같은 꾀를 행해서 나라를 욕되게 하고 위엄을 손상하는 일을 신은 적이 부끄러워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 다시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좌우에서 진언하기를, “병가(兵家)에는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이 있고, 오랑캐를 제어하는 데에는 경법(經法)과 권도(權道)가 있습니다. 여러 의논이 이미 같았는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이 아뢰기를, “밭 가는 것은 농노(農奴)에게 묻는 것이 당연하고, 베짜는 일은 계집종에게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북방에 출입하여서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알고 있으니, 신의 말을 청종(聽從)하기를 청합니다. 쓸모없는 선비의 말이 예로부터 이러한 바, 비록 이치에는 근사하나 다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여러 논의를 물리치고, 그 지방으로 보내려던 것도 파하였다. 조광조는 3품관인데, 능히 한마디 말로써 임금의 뜻을 움직여 조정의 큰 논의를 바르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또 대간이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여러 달이 지나도록 윤허하지 않았고, 홍문관에서도 날마다 논계하였다.
하루는 조광조가 부제학으로서 스스로 소장(疏章)을 짓고 동료를 거느려 정원(政院)에 나아가서, “오늘도 이 일에 대해서 윤허를 받지 못하면 집으로 물러갈 수 없다.” 하고, 날이 저문 뒤에 대간도 모두 옥당(玉堂)에 몰려와 머물러 있었다.
계하는 것이 닭이 울 때까지 그치지 아니하니 임금이 부득이 윤허하였다. 승지들은 모두 책상을 의지하여 깊이 잠들었으니, 모두 염증(厭症)과 괴로움을 느꼈다. 대내(大內) 엄밀한 곳에 중사(中使)가 밤새도록 출입하면서 번거로이 계하여 그치지 않았으니, 임금인들 어찌 듣기를 싫어하지 않았으랴.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는 것은 반드시 충성과 착한 도로써 임금의 마음과 맺고, 임금의 마음이 트인 곳으로부터 들어가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토록 핍박하고도 무사한 자가 있을 수 없다. 조광조가 패한 뒤에 임금은 곧 소격서를 다시 세우도록 명하였다.
또 대사헌 조광조가 임금의 총애를 받아 매양 소대(召對)하였는데, 반드시 의리를 끌어 비유하고, 경전(經傳)에 종횡으로 드나들면서 말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딴사람은 한마디 말도 그사이에 끼일 수 없었다. 비록 깊은 겨울이나 한여름이라도 한낮이 되도록 중지하지 않았다. 입대할 때에 한 말은 윤허받지 않은 일이 없었으나, 함께 입시한 자는 매우 괴로워하고 모두 싫어하는 빛이 있었다.
일찍이 대사헌으로서 아문(衙門)에 출사(出仕)하는 길에서 찬성(贊成) 고형산(高荊山)을 만났는데, 인사하지 아니하고 지나갔으므로 미워하는 자들이 이를 갈았다. 한(漢) 나라 《사기》를 상고하니, 소망지(蕭望之)가 어사가 되어서 마음에 승상(丞相)을 가볍게 여기고 만나서도 예를 갖추지 않았고, 장탕(張湯)은 어사가 되어서 매양 아침에 정사를 아뢰기 시작하여 해가 돋은 다음에 파하니, 승상은 자리만 지킬 뿐이고 천하 일은 모두 장탕이 결정하였다.
두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은 비록 같지 아니하나, 거만하고 권세를 마음대로 하다가 화를 취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군자가 처신하는 데 있어 공경하고 겸손하는 것이 복을 누리는 기초이니 조심하지 않을 것인가.」
「<참언(僭言)> 상사(上舍) 정사원(鄭士元)이 지은 것이다. : 김사재(金思齋)가 지은 척언(摭言)에, “정암(靜庵) 선생이 소격서를 혁파하는 일에 대해 계달(啓達)하기를 닭이 울 때에 이르도록 그만두지 않아서 임금의 듣기 싫어하는 뜻을 범했으니, 이는 간언을 할 때에 기미를 보아 점진적으로 하는 도리[納約自牖之道]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어진 사람이 성의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을 살피지 못하고 범연하게 상인(常人)의 마음으로써 요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저 군자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당연한 도리로써 인도하고 지성(至誠)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는 데 힘쓸 뿐이니, 어찌 딴 짓을 헤아릴 것이랴. 만약 임금이 듣기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요량하고 후일을 기다린다면 어찌 군자가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이루기에 급한 마음이겠는가. 선생이 중종(中宗)께 지우(知遇)하였을 때에, 아는 것은 임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하면 임금이 따르지 않은 것이 없어서 선생의 한 말씀으로써 조정의 중론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임금에게 득의(得意)한 것이 오로지했다 할 수 있다.
소격서를 혁파하는 것도 또한 임금을 바루는 도리의 하나였다. 여러 달을 논계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은즉, 천의(天意)를 돌리는 정성을 다하지 못했음에 있었다. 까닭에 선생은 임금을 공경하는 의(義)를 궁리하고 못다한 정성을 확충해서 여러 차례 계하여 그만 두지 않아 밤중에 이르니 정성이 마침내 천심(天心)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그 복합(伏閤)할 때에 반드시 미리 재계(齋戒)하고 성심으로 하기를 생각해서 임금이 감동되기를 기대한 것이 정 부자(程夫子)가 진강(進講)한 뜻과 같았으니, 보통 사람이 능히 엿보고 측량할 바 아니다. 그 계사(啓辭)를 내가 보지는 못했으나, 반드시 임금의 한 점 트인 곳을 인해서 계발(啓發)한 것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이니, 어찌 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하였으리오.
옛적에 명도(明道 정호(程顥)) 선생은 소대(召對)했을 때 오시(午時)가 되어야 비로소 물러났고, 회암(晦庵) 선생은 조정에 있으면서 진강할 때와 주사(奏事)할 때에 말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선생의 한 바가 또한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매양 소대할 때에 말을 그치지 않아서 딴사람은 한마디 말도 그 사이에 끼일 수 없었다.”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선생이 강독하기를 반복해서 임금에게 의리를 익히 알아듣도록 하며, 함양하고 훈도(薰陶)하여서 깨닫지 못하는 중에 성덕(聖德)을 성취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물며 임금에게 정중한 대우를 받던 선생으로서, 자신이 아는 바를 다 말하지 아니하고 딴사람에게 미루는 것이 가하겠는가.
옛적에 이천(伊川) 선생이 진강할 때, 항상 그 문장의 뜻 외의 것을 반복하고 추리해서 밝히니 듣던 자가 탄복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한 바도 또한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적신(賊臣) 남곤(南袞)이 화얼(禍孼)을 꾸며서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죄다 죽인 그 사건이 선생의 처사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이 하고는 무사한 자가 있을 수 없다. 미워하는 자가 모두 이를 갈았다.” 하였으나, 소식(蘇軾)의 무리가 이천 선생을 원수같이 본 것이 정자가 미움받을 허물을 저질렀다고 하여도 가하겠는가.
소망지(蘇望之)와 장탕(張湯)의 일에 있어서도 또 어진지 어질지 않은지, 간사한지 바른지를 알지 못하겠다 한 말은 불합리함이 심하기도 하다. 학술이 밝지 못한 사람이 도학(道學)의 귀함을 알지도 못하면서 망령되이 상정(常情)으로 현인(賢人)을 논의한 것이 이에 이르렀는 바, 김공(金公)을 정인 군자(正人君子)라고 하는데 소견이 이와 같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보유> : 을해년 여름에 이조 판서 안정민(安貞愍)이 계하기를, “진사(進士) 조모(趙某)는 경술(經術)에 밝고 행검(行檢)이 있어서 성균관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니, 등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계자 격식(階資格式)에 구애되어서 보통 예(例)와 같이 참봉(參奉)으로 조용(調用)하면, 사림(士林)을 권장하기에 부족합니다. 육품(六品)의 준직(準職)에 제수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윤허하여 곧 사지(司紙) 벼슬에 제수되었다.
이해 가을, 알성 별시(謁聖別試)에 응시하여 을과(乙科)에 첫째로 급제하였다. 전적(典籍)으로 제수되었다가 감찰(監察)ㆍ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겨졌고,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어서는 대간인 권민수(權敏手)ㆍ이행(李荇)들이 스스로 언로(言路)를 막은 잘못에 대해 탄핵하였다. 정축년에 수찬(修撰)에서 교리(校理)ㆍ응교(應敎)를 역임하였고, 8월에는 전한(典翰)이 되어 사직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사직하는 글에, “소신(小臣)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실지로 힘쓰지 못했던 까닭으로 식견이 나날이 공소(空疎)하여지고, 직임(職任)은 매우 무거우니 마음에 저절로 부끄러워집니다. 사사로 동료(同僚)에게, ‘성상의 학문이 고명(高明)하고 다스림에 뜻이 있는데, 외람되이 시종하는 반열에 끼어 있으니, 어찌 스스로 편하겠는가. 물러가서 힘껏 배워 학문이 성취한 다음 다시 와서 벼슬하면 반드시 실오라기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궁벽한 고을에 보임(補任)되기를 청해서 백성을 다스리는 여가에 학술에 전심하다가 다행히 버리지 않으시고 수용(收用)하시면, 백성을 다스리고 학문을 이루는 데에 거의 양쪽으로 완전할 것이다.’ 하였으나, 소신이 생각만 하고 감히 우러러 계달하지 못 하였습니다.
전에 응교로 삼으시고 특별히 4품 계자에 뛰어올리실 때에 반드시 사면하고자 하였으나,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실행하지 못 하였습니다. 또 사사로 생각하기로는, ‘이 4품 관직에 3년만 종사하면 국사(國事)를 거의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마는, 한 달 동안에 또 전한(典翰)으로 된 다음에는 사람과 벼슬이 합당하지 못하여, 전에 먹었던 생각과 크게 달라졌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쓰는 데에는 반드시 그 사람이 하는 바를 보는 것인데, 소신은 완성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루아침에 뜻하지 않은 은택을 입었으니, 어찌 그 직위를 무턱대고 차지하겠습니까.” 하였다.
무인년 정월에 특별히 통정(通政)으로 올려서 부제학으로 제수하였고, 5월에는 동부승지로 옮겼다. 이에 우부승지 김정(金淨)이 진계(進啓)하기를, “조모는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성학(聖學 임금의 학문)을 보익한 것이 컸으므로, 중론이 모두 그 직에 알맞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승지는 왕명을 출납하는 곳이니 진실로 사람을 가려서 맡길 것이요, 또 입시하여서 논란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 업무를 전적으로 맡는 것만 못합니다. 전하께서 조모가 경연관으로서 합당하다는 것을 참으로 아신다면 반드시 딴 관직에 이임(移任)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신이 조광조와 임무를 같이 하는 것은 진실로 다행입니다마는, 경중을 헤아려서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도로 임명되었다.
임금이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문치(文治)에 뜻을 모았으므로 더욱 의중(倚重)하였다. 선생은 이에 세상에서 쉽지 않은 지우(知遇)에 감격하고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하였다.
임금의 마음은 다스림을 내는 근본이니 근본이 바르지 아니하면 정체(政體)가 확립되지 못하고 교화를 행할 수 없다 하여, 매양 입대할 때에는 반드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생각하기를 오래하여 신명을 대하듯 하였다.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말한 것은 바른말 아닌 것이 없었다. 마음속에 온축(蘊蓄)된 것을 자세히 논하고 극진하게 말하였다. 혹 날이 저물더라도 임금이 모두 허심(虛心)으로 귀를 기울여 듣고 날마다 더 권장하였다.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도록 청하였고 속고내(速古乃)를 잡으라는 명을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며, 선왕의 법을 밝혀서 차례로 거행하였다. 《소학(小學)》을 인재 양성의 근본으로 삼고 향약(鄕約)을 풍속 교화의 방법으로 하니, 백료(百僚)가 용동(聳動)하지 않는 이 없었고 사방에서 바람을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무인년 겨울에 특별히 대사헌으로 임명되자, 온축된 의리가 바람을 내어서 풍속을 고동(鼓動)하였다. 염치를 숭상하고 병이(秉彝)를 떨쳐 일으키어 효제를 숭상하니, 온 나라 백성이 분발하여서 따랐다.
기묘년 봄에, 김우증(金友曾)이란 자가 사림을 모함하여 헐뜯다가 일이 발각되어 정신(廷訊)하게 되었다. 선생이 대성(臺省) 장관(長官)으로서 국정(鞫庭)에 참석하였으나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벼슬을 갈도록 논란하여 부제학이 되었다. 5월에 다시 대사헌으로 되었으며 임금의 총애는 더욱 융숭하여 능히 사퇴하지 못 하였다.
도(道)를 행하기 어려움을 알고, 당시 사세에 크게 걱정스러움이 있음을 생각하여 진계하기를, “지금 국가에서 수보(修補)하고 거행하는 일은 모두 선조(先朝) 때에 미처 못한 바입니다. 훗날 소인이 만약 소술(紹述)이란 말을 빌려서 중상(中傷)한다면, 선한 무리가 위태합니다. 근래에 노산(魯山)에게 제(祭)를 지내고 소릉(昭陵)을 회복하는 등의 일은 모두 뜻있는 사람들이 행하고자 하였으나 되지 않았던 것인데, 성세(聖世)에 와서 시종하는 신하가 건의하여 거행한 것입니다.
또 신씨(愼氏)를 다시 세우라는 논의는 김정(金淨)ㆍ박상(朴祥)이 상소까지 하였는 바, 이것은 정당한 논의이나 당시에 논란하던 자는 그들을 대죄(大罪)로 처치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등등의 일은 모두 소인이 구실로 할 바이며, 사림의 화근이 여기에 잠복한 것입니다. 성상께서 모르고 계셔서는 불가하며, 또한 원자(元子)에게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師道)는 비록 서지 않았으나, 조정 선비로서는 붕우간에 서로 책선(責善)하는 의리가 있으니, 붕우의 도는 아직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훗날에 군자를 무함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당류(黨類)라고 지목하여 송(宋) 나라 원우(元祐) 연대의 일같이 할 것입니다. 서로 친교를 맺어서 왕래하는 자는 모두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고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는 도를 강론한 것인즉 이것은 국가의 복입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정직한 선비가 세상에 성하면 반드시 큰 화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지금 붕우 사이에 교유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서로 자뢰하여 유익하고자 함인데, 어찌 이런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여염에서도 모두 큰 화가 반드시 머지않아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바, 대개 예전 일에 깊이 징계되었던 것입니다. 개국 이래로 사림의 화가 끊이지 않았으나, 군자가 국사(國事)에 힘을 기울여 거의 성공한 적은 있었으나, 패망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소신은 폐조 때 사림의 화를 눈으로 직접 보았으므로, 도무지 벼슬할 뜻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비로서 이 세상에 나서 무심할 수 없었고, 외람되이 성은을 입어서 마지못해 종사하거니와 다만 두려워하는 마음만은 사람마다 있습니다. 국가가 비록 한때는 공고(鞏固)하더라도 후사(後嗣)에 가서는 위태하지 않은 적이 드무니, 가장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그런즉 선생이 염려한 바는 세대가 바뀌어진 뒤를 생각하였던 것인데, 어금니를 갈고 입맛 다시던 자가 곁에 있어서 가만히 틈을 엿볼 줄을 어찌 뜻하였으리오.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이 올바른 논의에 용납되지 못하여 원망이 가슴에 쌓였던 참인데, 선생이 임금의 지우(知遇)로 말미암아 학자들이 추향(趨向)을 같이하고 소민(小民)이 선(善)을 칭도(稱道)하니, 그들은 이런 점을 구실로 하여 일망타진하고자 하였다.
홍경주(洪景舟)를 시켜 초방(椒房 내전) 액리(掖吏 내시)를 인연하여, 인심이 죄다 조씨에게 쏠렸다 하여 임금의 뜻을 흔들리도록 하고, 또 이치에 닿지 않는 참언(讖言)으로 금원(禁苑) 나뭇잎에 무엇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겁나게 하였다.
정국 4등 공신(靖國四等功臣)의 명단을 삭제하던 날, 교묘하게 온갖 간계를 얽어서 북문을 열도록 청하고, 밀계를 올려서 드디어 선생을 죄인의 괴수로 만들었다. 잡아다가 곧 쳐서 죽이고자 하여 흉한 기구를 이미 전(殿) 뜰에 벌여 놓았으나, 다행히 수상이 임금의 옷깃을 잡아당김으로써 정성이 천심을 감동되게 하였고, 벼락같은 위엄이 조금 누그러져서 조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에 도성 안 약도(約徒)로서 차자(箚子)를 올리는 자가 궁성에 몰려와서 많은 사람이 웅성거렸고, 관학 선비들은 대궐 뜰에 호곡(號哭)하여서 소리가 대내에 들렸다. 이러므로 참소하는 자는 구설거리를 더했고 임금의 의혹은 더욱 심하여졌다.
공은 다시는 임금의 용안을 볼 수 없어서 밤새도록 통곡을 하였으니, 공의 지성도 또한 극진하였다. 김정ㆍ김식(金湜)ㆍ김구(金絿)와 같은 말로 추국(推鞫)당했는데 공이 공초(供招)하기를, “사(士)가 세상에 나서면 믿는 바는 임금의 마음뿐입니다. 국가의 병통은 이(利)가 나는 근원에 있다는 망령된 요량으로 국운을 새롭게 하여 무궁토록 하고자 했을 뿐이었고, 딴뜻은 전연 없었습니다.” 하였다.
처음에는 사율(死律)로 정했으나, 마침 영상(領相)이 구원하여서 능성(綾城)으로 장배(杖配)하게 되었다. 다음날 다시 금부(禁府)에 모여서 전지(傳旨)를 받고 갔다. 김 판서와 김 제학 등의 전(傳)에 자세하다.
얼마 뒤에 대간이 죄를 더하도록 청하여, 적소(謫所)에서 사사(賜死)하도록 명하였다. 아이 종이 도사(都事)가 또 왔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선생은 도사에게 “주상 전하께서 신에게 사사하셨으니 죄명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들은 다음에 죽겠다.” 하고, 뜰에 내려가 북쪽을 향해서 두 번 절하고 꿇어앉아서 교지를 받았다. 임금의 체후(體候)가 어떤가를 묻고, 다음으로 3공ㆍ6경ㆍ대간ㆍ시종의 성명을 낱낱이 물은 뒤에 집에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한 자도 틀림이 없었다. 목욕을 하고 옷을 바꿔 입는데, 금오랑(金吾郞) 유엄(柳渰)이 재촉하는 빛이 보였다.
선생은 크게 탄식하면서, “조서(詔書)를 안고 주막에 엎드려 울던 옛사람과 어찌 그다지도 다른가.” 하였다. 자리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임금을 사랑한 것이 아비를 사랑함과 같았다. 하늘의 해가 나의 단심(丹心)을 비출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약을 마시고 죽으니, 12월 20일이었고 나이는 38세였다. 다음해에 용인(龍仁) 선영(先塋) 밑에 반장(返葬)하니, 선생이 남긴 뜻이었다. 선생이 죽던 날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 동서로는 각각 두 돌림이었고, 남북으로는 각각 한 돌림이었다. 남북으로 두른 바깥쪽에 또 두 줄기 무지개가 띠를 드리운 듯한 것이 하늘에 뻗쳤고, 또 미방(未方)에는 한 발 남짓한 한 줄기 무지개가 있었는데, 모두 한참 지나서 사라졌다. 이때에 아들 조정(趙定)은 5세였고, 조용(趙容)은 2세였는데, 조정은 일찍 죽었고 조용은 벼슬하여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아들이 없어서 종질(從姪) 조순남(趙舜男)으로 후사를 삼았다.
인묘(仁廟) 을사년 봄에 태학 유생(太學儒生)들이 소장을 올려서 선생의 관작을 회복하도록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조모는 젊어서부터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서 학업을 받았습니다. 김굉필의 학문은 김종직(金宗直)에게 배웠고, 김종직의 학문은 그 아비인 사예(司藝) 신(臣) 김숙자(金淑滋)에게서 전해 왔으며, 김숙자의 학문은 고려 신하였던 길재(吉再)한테서 전해 왔고, 길재의 학문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서 나온 것이니, 실상 우리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이 됩니다. 그 학문의 연원(淵源)과 행신의 바름과 설시(設施)한 방법이 모두 이와 같았습니다.” 하였다. 궐문에 엎드려 세 번이나 소장을 올리니,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서 타일렀다. 대간과 시종도 또한 차자를 올려서 간절하게 아뢰었다.
6월 30일에 하교하기를 “조광조의 일은 일찍이 내 마음에 잊히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 때 일이므로 경솔하게 고치지 못 하였던 것이다. 지금 내 병이 이에 이르렀으니, 조광조의 관작과 품계를 회복하라.” 하였다. 지금 임금 무진년 여름에 태학 유생 홍인헌(洪仁憲)ㆍ이계(李啓)들이 소장을 올려서 공부자(孔夫子)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선유(先儒) 조모는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품(資稟)이 이미 다르고, 확충(擴充)하여 수양한 것이 도가 있었습니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여서 드디어 큰 선비가 되었습니다. 용이 풍운을 만난 것처럼 우리 중묘의 지우(知遇)를 얻어서 후직(后稷)과 설(契)이 임금을 섬기던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고 요순의 다스림을 그 임금에게 기대하였습니다. 《소학》의 가르침을 밝혀서 인재를 떨쳐 일으키고, 천거하는 과거를 설치하여 준예(俊乂)를 숭장(崇獎)하였습니다.
한 시대의 인재를 양성하여 거의 삼대(三代) 시대와 같이 융성할 뻔하였는데, 간사한 사람이 질투하고 한 그물에 화를 얽어서, 도를 일으키며 다스림을 이루려는 기회를 중도에서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50년 동안은 온 나라 인심이 소경과 귀머거리 같아서 탐내는 것이 버릇으로 되고, 어진 사람을 원수같이 보는 바, 이것은 기묘년 사화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베이고 사그라든 나머지에서도 간혹 스스로 분발하여서, 의를 흠모하고 이(利)를 부끄러워하며 어버이를 사랑하고 왕사(王事)에 급할 줄 아는 연이어진 정기(精氣)가 오늘까지 내려온 것은 모두 광조의 힘이니,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양사(兩司) 및 영의정 이준경(李俊慶)이 서로 잇달아 계청하고 옥당에서도 높은 관작과 아름다운 시호를 추증하기를 청하였던 까닭에, 영의정으로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에 참찬(參贊) 백인걸(白仁傑)이 소장을 올려 논열(論列)하였다. 모두 신원소(伸冤疏) 가운데 있다.
「<행장> : 행장(行狀)의 대략에, “선생은 천분(天分)이 매우 기이하고 무리에서 뛰어났다. 난새[鸞]가 머무른 듯 따오기가 우뚝한 듯하였고, 옥처럼 윤택하고 금처럼 정순(精純)하였다. 또 아름다운 난초가 꽃다움을 떨치고, 밝은 달이 빛을 나타내는 듯하였다. 나이 17, 18세 적에 개연히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었다. 능히 어지러운 세상을 당해 험난함을 무릅쓰면서, 한훤(寒暄) 김 선생(金先生)을 희천(熙川) 적소에서 스승으로 섬겼다. 《소학》을 독신(篤信)하였고, 《근사록(近思錄)》을 숭상하였다. 일찍이 밤낮으로 가다듬고 신칙하여 허물이 없도록 하며, 언행을 단속하는 데에 옛 가르침을 상고하였음은 공경함을 갖는 법이었다. 강습하는 여가에 종일토록 우뚝이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늘을 모신 듯하였고 대원(大原 근본되는 학문)을 수양하며, 굳게 견디고, 부지런히 힘쓰는 것은 고요함을 주로 하는 학문이었다. 후진을 권장하면서 각자 그 재질대로 하였다. 본분을 지키는 행실이 나타나서 재주가 한 세상을 인도하기에 족하고, 영특한 재화(才華)가 밖으로 발(發)하여 도가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족했다. 그의 의표(儀表)를 바라보고 백료(百僚)가 다 마음을 기울였으니, 한 시대 사람들을 감복하도록 한 것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자신을 돌보지 않는 왕신(王臣 참으로 나라를 생각하는 신하)으로서 구오(九五)의 성한때를 당해서, 나아가면 날마다 세 번이나 인접하였고 물러나면 사람들이 다투어 가며 손을 이마에 얹었으니, 이것은 상하가 서로 기뻐하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어찌할까. 하늘은 체동(螮蝀 무지개의 이명)을 그 사이에서 가만히 없애지 못하여, 위로는 그의 뜻이 크게 시행되는 것을 보지 못했고, 아래로는 그 덕택이 널리 덮임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때 운수와 나라의 액운에 관계된 것이었다. 천지가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고 귀신이 조희(調戲)한 바이니, 선생께서야 어떻게 할 수 있었으랴.” 하였고, 또 이르기를, “아, 천도는 본디 떳떳함이 있고, 인심은 진실로 속이기 어려운 것이다. 방훈(放勳 요(堯) 임금)의 남긴 뜻을 중화(重華)가 아름답게 이루었다. 이로부터 선비의 학문은 이로 말미암아 방향을 알게 되었고, 세상 다스림은 이로 말미암아 화평을 거듭하게 되었으며, 사문(斯文)은 이를 힘입어서 무너지지 않았고, 국맥(國脈)은 이로 말미암아 무궁하였다. 이에서 말한다면, 한때 사림의 화는 비록 슬프다 하겠으나, 선생께서 도를 숭상하고 학문을 인도한 공이 또한 후세에 미친 것이다.
또 한 가지 말이 있다. 주(周) 나라가 쇠망한 이래로 한때는 성현의 도가 행해지지 못했으나, 오히려 만사에 행하게 되었다. 대저 공(孔)ㆍ맹(孟)ㆍ정(程)ㆍ주(朱)의 덕과 재주로써 쓰이기만 되었더라면, 왕도를 일으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귀취(歸就)한 바는 의견을 발표해서 후세에 법을 보이고 만 것에 불과하였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늘에 있는 운수는 진실로 알 수 없지마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선생의 나아옴이 이미 이로써 이름하였으니, 그 세상을 어떻게 할 수 없었음도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유독 한스러운 것은 그의 실덕(實德)을 능히 밝혀서 우리 동방의 후생(後生)을 다행하게 하지 못했음이다. 또 대저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고 하면서 어찌 일찍 한 번 이루게 하는 데 만족할 수 있었으리오. 반드시 덕이 충분히 쌓이고 나이가 많아진 뒤에 크게 구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그렇지 못 하였다.
첫 번째 불행한 것으로는 크게 발탁되어서 높은 벼슬에 갑작스럽게 올랐고, 두 번째 불행한 것으로는 물러가기를 구했으나 이루지 못 하였으며, 세 번째 불행한 것으로는 귀양가던 날로 마친 것이었으니, 앞에서 이른바, ‘덕이 충분히 쌓이고 나이 많아진 뒤에’ 한 것은 모두 그렇게 할 겨를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 의견을 발표해서 후세에 법을 보이는 일은 이미 미칠 수 없었은즉, 하늘이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던 뜻은 마침내 어떠하였던가.
이런 까닭으로 논쟁하는 무리의 끝도 없는 말이 도리어 화복(禍福)과 성패(成敗)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여 세도(世道)는 더욱 구차하여졌고, 이에 방자하게 지목하여서 서로 헐뜯고 비웃었다. 행신하는 자는 꺼리고 선비를 가르치는 자는 경계하였으며 선량한 자를 원수로 삼는 자는 효시(嚆矢)로 삼아서 우리 도의 병통을 중하게 하였다.
아, 이것이 어찌 방훈의 남긴 뜻을 중화가 능히 따라서 사도를 붙들고 국운을 길게 한 훌륭한 뜻이리오. 또 후세의 착한 임금과 어진 정승이 무릇 세도를 바로잡을 책임을 맡은 자와 더불어 마땅히 깊이 근심하고 깊이 살펴서 힘껏 구원할 바이다. 그러므로 근년 이래로 바꿔 옮기고 고쳐서 새롭게 하여 호오(好惡)를 밝게 보인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선비된 자가 아직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도(霸道)를 천하게 알며, 정도(正道)를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할 줄 알며, 다스리는 도는 반드시 자신을 수양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쇄소(灑掃)ㆍ응대(應對)하는 것으로써 이치를 궁구하여 타고난 성품을 다하는 데에 이르러서 차차로 능히 흥기 분발(興起奮發)하여 큰일을 하니, 이는 누구의 공이며,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인가. 상천(上天)의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고, 성조(聖朝)의 교화(敎化)도 이에서 무궁하게 된다.
후일에 붓을 잡는 이가 만약 이를 상고하게 되면, 선생의 학문과 사업 언론과 풍채는 사책(史冊)에 기재되어서 생각하고 읊조리는 이에게 전파됨이 더욱 많을 것이다. 어찌 이것으로써 한할 것이랴.” 하였다. 《퇴계집(退溪集)》」
「 <보유 추가> : 태상에서 시법을 상고하였는데, “도덕이 있고 넓게 들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바름으로써 복사(服事)한 것을 정(正)이라 한다.” 하여,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내렸다. 중간에 서서 기대지 않는 것을 정(正)이라 한다고 한 곳도 있다.
능성현(綾城縣) 사람이 선생을 추모하여 서원을 지었는데, 방백(方伯)이 사유를 갖추어서 계문(啓聞)하므로, 죽수서원(竹樹書院)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도록 명하고 또 서적을 하사하여 권장하였다.
선생은 한양(漢陽) 사람이다. 한양이 지금은 양주(楊州)에 예속되었는데, 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선생을 위하여 서원을 지었다.
효직(孝直)이 처음에는 호남 능성현에 귀양갔는데, 얼마 뒤에 사사(賜死)되었다. 고사(故事)에, 재상에게 사사할 때에 어보(御寶)가 찍힌 문서가 없고 다만 왕지(王旨)만 받들어 시행하였다. 금오랑이 귀양지에 도착하여 선지(宣旨)하니, 공은, “국가에서 대신을 대우하는 것이 이와 같이 초초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장차 간사한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을 제 마음대로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는 소장을 올려 말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실행하지 못 하였다. 목욕한 다음 의관을 정제(整齊)하고 조용하게 죽으니, 38세였다. 눌재(訥齋) 박 창세(朴昌世 박상(朴祥))가 시를 지어 곡(哭)하기를,
남대(어사대)의 옛 자의가 / 不謂南臺舊紫衣
우거로써 초초하게 고향에 돌아올 줄 알았으랴 / 牛車草草故鄕歸
훗날 지하에서 서로 만날 때엔 / 他年地下相逢處
인간의 만 가지 잘못은 말하지 말자 / 莫話人間萬事非
하고, 또,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악수하면서 / 分手院前曾把手
그대가 황각(정부)에서 주애로 감을 괴이하게 여겼다 / 怪君黃閣落朱崖
주애와 황각을 분별하지 마소 / 朱崖黃閣莫分別
구원(황천)에 이르자마자 차등이 없어진다오 / 纔到九原無等差
하였다.
공의 당손(堂孫) 조충남(趙忠男)이 퇴계(退溪)에게 공의 행장(行狀)을 지 어 달라고 청하였다. 퇴계가 시를 짓기를,
의봉이 임금의 뜰에 상서롭게 노닐던 것을 생각했는데 / 相思儀鳳瑞王庭
어제 옥수(남의 후손을 기리는 말)를 만나 그의 전형(얼굴 모습)을 상상한다 / 玉樹今逢想典刑
성스럽고 아름다움을 내 어찌 유양(남의 장점을 들어서 말함)하리오 / 聖美揄楊吾豈敢
눈서리 천리길에 그대 옴이 미안하다 / 雪霜千里愧君行
하였다.」
[주-D001] 구오(九五) : 임금의 위(位)를 말하는데, 효사(爻辭)에 나오는 성인(聖人)은 임금을 말한다. 《周易》」
[출전 : 한국종합고전DB]
[참고자료 1] 김정국 金正國 (1485년(성종 16) ~ 1541년(중종 36))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은휴(恩休). 김안국(金安國)의 동생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0세와 12세에 부모를 다 여의고, 이모부인 조유형(趙有亨)에게서 양육되었다. 1509년(중종 4)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1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조정랑·사간·승지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음 해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1537년에 복직, 다음 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수십 조에 달하는 백성을 편하게 하는 정책을 건의, 국정에 반영하게 하였으며, 그 뒤 병조참의·공조참의를 역임하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540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다.성리학과 역사·의학 등에 밝았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사재집(思齋集)』을 비롯하여,『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역대수수승통지도(歷代授受承統之圖)』·『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기묘당적(己卯黨籍)』·『사재척언(思齋摭言)』·『경민편(警民篇)』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참고자료 2] 조광조(趙光祖, 1482년 8월 23일(음력 8월 10일)~1520년 1월 10일(1519년 음력 12월 20일)
조선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조선국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로 전라도 능성현에서 사사(사형).되었다.
한양 조씨는 조휘가 원나라에 포섭되어 초대 쌍성총관이 되면서부터 쌍성총관부의 수장인 총관을 세습해 온 원나라의 끄나풀 집안이었는데, 그 후손 중 1명인 조돈이 환조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고 고려에 귀순하였다. 귀순 후 환조를 도왔던 조돈의 후손만 대가 이어지면서, 한양 조씨는 대표적인 조선 개국공신 집안이 되었다. 조광조의 5대조 조상인 조온은 이성계의 조카로, 이성계와 이방원을 보필하며 무공을 세운 인물이다.
아버지 조원강은 역참을 관리하는 찰방을 지냈다. 찰방은 비록 외직이기는 하나 문관 종6품에 해당하는 결코 낮지 않은 관직이다. 조광조가 태어날 당시 조씨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지만, 크게 몰락하진 않았던 듯하다. 조선은 공신의 후손에게 음으로 양으로 만만치 않은 혜택들을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4]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후에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이다.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관직은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이르렀고, 사후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 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 초에 기대승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한때 그와 가까웠으나 뒤에 그의 정적이 된 남곤과, 그의 정적 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김전 역시 김종직 학파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의 문하생 백인걸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림파는 훈구파를 몰락시키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성인화, 성역화된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참고자료 3] 나무위키의 세 가지 평가
1. 긍정적 평가
그의 사상은 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실천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한국의 도학 및 실천유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율곡 이이(李珥)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그를 모범으로 따랐다.
37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패하고 침체된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였던 신진 사림들에게는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지도자였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학자요, 정치가로서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정암은 현실정치에서 패배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다.
2. 중의적 평가
그는 유교 특히 성리학만을 유일한 배타적 종교로 신봉하고,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평가도 있다. 불교·도교·도참비기(圖讖秘記) 등을 금할 것을 주장하여, 도교에 대해서는 소격서 혁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무격(巫覡)의 숭신 및 영철야의 풍습을 금지시켰으며, 불교에 대해서도 사찰 중창을 엄금하고 사찰의 노비·전지를 몰수하였다.
3. 부정적 평가
민생이나 국방에 관련된 실무적인 능력과 감각이 전혀 없고 급진적이었다는 점이 부정적인 평가로 지적되고 있다. 소격서 철폐에 관련되어서는 일개 제후인 조선 국왕은 감히 천제를 지내서는 안되며, 세종대왕이 이를 유지한 것이 잘못이라는 모화사상에 매몰된 주장을 하였다.
선조때의 성리학자 이이는 자신의 저서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옛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를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하였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며 그 급진성을 비판하였다.
퇴계 이황(李滉)은 '퇴계집(退溪集)'에서 “그는 자질이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학력이 충실하지 못해 그 실행한 바가 지나침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실패를 초래하고 말았다. 만일 학력이 넉넉하고 덕기(德器)가 이뤄진 뒤에 나와서 나라의 일을 담당했던들 그 성취를 이루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민이 요순시대의 군민과 같고 또 비록 군자의 뜻이 있다 하더라도 때와 힘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묘의 실패는 여기에 있었다”라고 했다.
또한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라는 점 역시 부정적인 평가로 지적된다.
[출전 : daum나무위키]
[팔경논주]
가장 앞에 있는 김정국의 『기묘당적』은 기묘사화 이후 정국이 좀 조용해지자 기묘명현들과 화매들의 경력과 직위에 이어 조광조를 칭송하는 평을 간단하게 보탰다. 다음의 이자가 쓴 『음애일록』은 조광조의를 추숭하는 평가 위주로 썼다. 세 번째 『사재척언』은 김정국이 이십여 년 세월이 흐르고 난 후 기묘사화를 당한 사림파들이 복권되자 썼는데, 조광조와 사림파들이 과격한 주장과 무리한 개혁 추진으로 중종과 대신들로부터 배척받게 된 사례를 몇 가지 예로 들면서 비판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네 번째 상사(上舍) 정사원(鄭士元)의 <참언(僭言)>은 바로 앞 『사재척언』에서 김정국이 언급한 비판 사례에 대한 변호와 함께 김정국을 비판하고 있다. 이어지는 <보유>에서는 안로가 조광조와 사림파의 주장과 정책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변호하면서 조광조를 추숭하고 있다. 다음의 이황의 <행장> 역시 조광조를 변명하고 변호하면서 추숭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조광조를 추모하는 글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 <조광조전>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세 번째 『사재척언』이다. 이 글을 쓴 김정국은 조광조와 함께 활동한 김안국의 동생으로 1519년 기묘사화가 벌어진 해에 황해도관찰사로 있다가 삭탈관직 되어 고양에 침거하며 학문을 닦으며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었지만 조광조 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파직만 당하였다. 그러므로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과 관점에서 조광조와 사림파들의 행태를 관찰할 수 있었다.
김정국은 조광조와 사림파 사대부들이 추진하는 도학정치의 근본정신과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정책 목표와 추진하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비판과 반대를 표시하고 있다. 조광조가 중종과 대신들로부터 경원당하다가 마침내 배척, 숙청당하게 된 원인으로 몇 가지 사례를 들고 있다.
먼저, 야인 속고내(速古乃)를 잡는 문제에 대하여 조정 대신들과 유담년 등 장수들이 논의하여 결정한 다음에 군대를 전송하는 자리에 조광조가 나타나 중종에게 반대를 직언하여 임금이 조정의 결정을 번복하고 준비를 파하도록 한 데 대하여 길게 인용하며 비판하고 있다.
김정은 ‘조광조는 3품관인데, 능히 한마디 말로써 임금의 뜻을 움직여 조정의 큰 논의를 바르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라며 조광조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야인 추장 속고내(束古乃)르 잡는 문제에 ‘기미를 엿보는 간사한 꾀는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제어하는 도리가 아닙니다.’라는 말은 참 답답하고 옹졸하다. 유담년의 말이 천 번 만 번 옳다. 여러 대신과 장수들의 합리적인 말을 조광조의 한마디 말로 무시해버리는 중종도 답답하지만, 중종을 답답하게 만드는 더 답답한 조광조에 대하여 대신들과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대부들이 의아심과 분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는 중종이 조광조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 해도 믿을 만큼 빠져 있었으니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불쾌했을 것이다. 조광조의 이러한 행태를 보고 많은 대신과 점잖은 사대부들이 비판하는 마음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참언>과 <보유>에서 정사원과 안로는 조광조의 말이 도리에 맞다 하면서 변호하고 있다. 퇴계는 <행장>에서 ‘덕이 충분히 쌓이고 나이 많아진 뒤에’ 라는 문장으로 실책과 실언 등을 감싸면서 전체적으로 추숭하고 있다.
여진족은 수백 년 전에 금나라를 세워 송나라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아 송나라가 양자강 남쪽으로 도주하여 남송으로 불리게 만든 강력한 족속이다. 윤관의 함경도 지역 여진족 토벌과 세종 때의 사군과 육진 개척으로 겨우 완성한 국경 밖 여진족 경계와 토벌은 고려조 때부터 내려온 중대한 국가사였다. 그러므로 여진족 한 부족의 추장을 잡는 일은 국력을 기울인 전쟁일 수밖에 없다. 방어사로 임명된 이지방 장군과 속고내 토벌에 대한 사료는 다음과 같다.
「이지방(李之芳, 1466년 10월 15일 - 1537년 12월 11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 정치인, 군인이자 외교관이다. 본관은 우계(羽溪)이고 자(字)는 자화(子華)이다. 과거 급제 후 평안도병마절도사와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변방 군사를 거느리고 오랑캐를 여러 번 공략했다.」 [daum백과]
「 <조광조의 반대로 여진족 토벌 무산>
1518년(중종 12) 회령성(會寧城) 밑에 있는 야인(野人, 여진족) 속고내(束古乃)가 몰래 먼 곳에 있는 야인들과 함께 갑산부(甲山府)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해갔다. 그는 1512년에도 갑산부를 약탈하여 조선 조정은 황형(黃衡)을 파견하였으나 물리치지 못했다. 바로 남도 병사(南道兵使)가 비밀리 장계를 올렸다. 그해 8월 16일 삼정승과 이조판서, 병조판서는 이지방의 이름을 써서 '이 사람은 지모와 방략이 있으며 또 강하고 용맹하니 내일 보내라(此人有謀略且强勇, 請及明日遣之)[24]'고 건의하였다. 중종이 명하여 세 정승과 해당되는 조(曹)를 불러 이것을 의논하고 먼저 본도(本道에 밀지(密旨)를 내리고 또 무기를 보내 이지방을 파견하여 틈을 엿보아 법에 따라 처치하려고 하였다.
(이지방이) 8월 16일 방어사(防禦使)에 임명되었다. 바로 승정원에서는 다음 날 그를 면대한 뒤 보낼 것을 상주하였다.
이때 병조판서 유담년은 구체적인 계책을 제시했다. 그가 구체적 계책을 제시하자 중종은 적임자를 거론하였고, 유담년이 그를 천거하였다. (이지방이) 8월 16일 방어사(防禦使)에 임명되었다. 바로 승정원에서는 다음 날 그를 면대한 뒤 보낼 것을 상주하였다.
중종이 이지방을 명하여 특별히 어의(御衣)와 활과 화살을 주며 그날로 떠나게 하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전송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승지 김정국(金正國)이 아뢰기를, “부제학 조광조가 입대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 윤허하였다.
조광조가 나아가 아뢰기를, “이것은 곧 도적이 기미를 노려 속임수를 쓰는 모의와 같습니다. 당당한 대 조정으로써 한 일개 조그만 추한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모의를 행한다는 것을 신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합니다.” 하니, 임금이 중의를 물리치고 파견할 것을 철회해버렸다.
좌우가 번갈아가며 간하기를,“병법(兵法)에는 기발한 방법과 바른 방법이 있으며, 적을 막는 데는 상도(常道)와 권도(權道)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모두 일치하였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이 아뢰기를,“밭을 가는 일은 머슴에게 물어야 하고 길쌈하는 일은 계집종에게 물어야 합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북문(北門)에 출입하여 오랑캐의 정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정에 어두운 저 유자(儒者)의 말은 예로부터 이러했으니, 지금 묘당의 방침이 이미 정해진 마당에 갑자기 변경해서는 안 됩니다.”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고 이지방이 가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도성을 나갔던 이지방은 명령을 받고 다시 회군하였다.
《국조보감 제19권》 중종조 2, 중종 13년(무인, 1518)≫
[NAVER위키백과]」
속고내는 길들여진 여진족이 아니라 부단히 약탈을 자행하는 난폭한 여진족 추장이다. 이미 6년 전에도 국경을 침범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면 그자가 가까이 있을 때 습격하여 잡는 것이 당연한 상책이다. 그런데도 조광조는 도덕성을 강조하며 중종을 압박한 탓에, 이미 왕과 조정이 결정하여 임명한 방어사 이지방의 군대가 도성을 벗어난 것을 회군하게 했다. 조광조가 저지른 매우 엄청난 실책이다. 정나라 정공은 <정공지양>하다가 크게 패하고 마침내 나라를 잃었다. 조정 문신들뿐만 아니라 유담년을 위시한 무신들도 조광조의 편협한 도덕론에 크게 분개했을 것이다.
중종 5년(1510) 삼포 왜란 때에 경상우도 병마사로 왜구를 토평한 병조판서 유담년의 말이 얼마나 명분과 이치에 맞는 말인가. 그럼에도 중종은 조광조의 말만 경청하는 유약함과 가벼움을 보였다. 이때에는 모든 신하들의 말을 물리치고 조광조의 말만 맹종하던 31세의 중종이, 1년 후에는 조광조를 내치고는 죽여버렸다. 얼마나 극심한 변덕인가. 조광조도 편협하고 경솔하지만 중종 이역도 편협하고 경솔하기 그지없다. 이런 유형의 인간들은 한때는 호흡이 착착 맞지만 얼마 안 가서 자석이 같은 극끼리 밀어내듯이 서로 밀어낸다. 중종과 조광조 둘 다 정상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소격서 문제이다.
「고려 때에 소격전(昭格殿)으로 불렸던 소격서 昭格署는 조선시대 도교의 재초(齋醮)를 거행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로서 정도전이 편찬한 ≪경국대전≫에 소격서의 직제가 실려있다.
그런데 연산군과 중종 2대에 걸친 시대에는 소격서의 혁파문제를 둘러싸고 왕실과 유신(儒臣)들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벌어졌다. 연산군 때에는 소격서가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혁파되었으나, 위판도 보존되고 초제도 여전히 집행되었다.
연산군을 몰아 내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 혁파문제가 본격화되어 끈질기게 논란이 계속되었다. 조광조(趙光祖)를 선두로 한 신진사류들은 강경하게 소격서의 혁파를 중종에게 요청하였으나, 조종(祖宗:임금의 조상) 이래로 지켜 내려온 제도이므로 경솔하게 없앨 수 없다 하여 중종은 거부하였다.
이에 신진사류들은 도교는 세상을 속이고 세상을 더립히는 좌도(左道), 즉 이단이므로 소격서는 혁파되어야 하고, 또한 하늘에 대한 제사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데 일개 제후인 조선왕이 하는 것은 예에 어긋나므로 소격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쌍방의 완강한 대립으로 인하여 과거의 시행이 어렵게 되고, 조광조 등이 밤중까지 물러가지 않고 집요하게 혁파를 요청하는 바람에, 중종은 1518년에 결국 뜻을 굽혀 소격서의 혁파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신진사류가 숙청된 뒤에 중종은 모후(母后)의 병중 간청이라 하여 소격서를 부활시키고 초제와 기도를 행하게 하였다. 이후에도 조정 신하들의 간언이 계속되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렇지만 소격서에서 행해지던 양재기복의 과의적(科儀的)인 도교는 유교로 사상을 통제하던 조선에서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겪은 뒤 선조 때 아주 폐지되고 말았다.」 [daum백과]
대간들이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여러 달이 지나도록 윤허하지 않았고, 홍문관에서도 날마다 논계하였다. 그리하여 하루는 부제학 조광조는 작심하고 대간들과 함께 옥당에서 철야농성을 했다. 승지들이 모두 책상에 엎드려 잠들고 중종도 꼬박 밤을 새우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란 속담이 있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다. 잠도 못 자게 승지가 계속해서 들락날락하며 계를 올리니 중종이 할 수 없이 윤허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염증을 가졌겠는가.
유학자인 조광조가 소격서를 폐지한 논거는 도교가 이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유학자인 정도전은 도교를 인정하고 ≪경국대전≫에 항목으로 정해 놓았다. 그러므로 소격서를 폐하기 전에 ≪경국대전≫부터 수정해야 한다. 그러나 ≪경국대전≫은 조선 건국의 바탕을 이루는 기본 법전이다. ≪경국대전≫을 수정하는 것은 조선 건국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정도전이 <배불론>을 써서 불교를 배척했지만 불교를 말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정도전이 배불정책을 실시한 목적은 불교가 정법보다 기복과 사술로 세상 인심을 현혹하여 왕실과 귀족, 백성들로부터로 토지, 쌀 물품 등을 시주받아 불로소득을 증대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소격서 제도를 명시하여 도교 사상을 부정하지 않듯이 불교 교리와 사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세의 유학자들은 도교와 불교를 이단으로 몰아 소격서를 철폐하고 사찰을 철폐하며, 불상을 훼손하는 우를 범하였다. 또한 수천 년 전래해온 민속신앙을 미신으로 매도하여 천시하였다.
임란 이후 소격서가 완전히 철폐되면서 도교는 산중 절간에 산신령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고, 백성들 가까이에 있는 사찰들은 폐사되고 깊은 산중에 있는 사찰들만 겨우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생각과 마음, 종교와 사상이 똑같을 수 없다. 그래서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사상과 종교가 다양하다. 사상과 종교가 다양한 나라가 난잡할 것 같지만, 오히려 생동감이 넘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신체 에너지와 함께 정신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질로 채우는 신체 에너지도 필요하지만 정신으로 채우는 정신 에너지도 반드시 필요하다. 사상과 종교는 정신 에너지이다. 다양한 사상과 종교가 서로 비교, 경쟁하면서 사회 스스로 평형을 유지한다. 그런 가운데 정신적 에너지가 성장 발전하면서 사회와 국가가 전체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조광조 시대부터 조선의 유학자들은 도교와 불교를 완전히 말살하려고 했다. 그 첫 작업이 1518년 부제학 조광조에 의한 소격서 철폐이고, 두 번째 작업이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에 의한 백운동서원 건립과 1550년 풍기군수 이황에 의한 사액 소수서원이다.
유학 중의 학문으로 고려 말에 안향에 의해 수입된 주자성리학은 정도전을 거쳐 발전하면서 성종 때까지는 관학파에 의해 그런대로 보편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고려 말 정몽주의 학맥이 길재 – 김숙자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로 이어져 사림파를 형성하면서 주관성이 강화되었다. 특히 김굉필은 평생동안 ‘소학동자’로 불릴만큼 소학을 중시하였고, 그의 제자 조광조 역시 소학을 중시하였다.
소년기 때부터 김굉필로부터 배운 소학이 조광조의 의식세계의 전부였다. 논어, 대학, 중용과 같은 고차원의 정신적 세계보다 눈앞의 현실 세계에서 행실과 처신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했다. 조광조는 생각과 행위, 정책을 보면 소학적 사고의 틀 안에 갇혀 있음을 볼 수 있다.
소학은 말 그대로 어린아이들을 위한 계몽서이다. 소학은 소학 차원이 있고 대학은 대학 차원이 있다. 나라일을 보는 사대부들은 대학 차원의 사고와 행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조광조는 소학 차원을 계속 고집했다.
조광조 자신도 말하고, 동시대의 다른 대신들과 사대부들도 말하고, 다음 세대인 이황과 이이가 평했듯이 학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중종의 은총을 받아 고속승진을 하여 중책을 맡게 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소학적 사고가 기묘사화라는 엄청난 사태의 원인이었다.
이십여 년 후에 조광조가 복권되면서 소학적 사고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조광조의 부정적인 면은 눈 감고 긍정적인 면만을 보는 후학들이 주류를 차지하는 데에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사대부들의 죽음이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한 현상이 2000년대 초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밑거름 삼아 정권을 탈환한 친노파들에게 나타났다.
이황과 이이 등 한 차원 진화한 학자들에 의해 소학적 사고보다는 대학적 사고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대학적 사고’는 사상과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긍정적인 방향이 아니라 주자성리학만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도교는 완전히 몰락하고, 불교는 기피되고 승려들은 천민계급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양한 정신 에너지가 아니라 주자성리학 에너지만을 고집하는 조선은 차츰차츰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마침내 1910년 조선은 망하고 말았다. 망하도 그냥 망한 게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로 글러 떨어지고 말았다.
신체 에너지만 강조하는 국가는 명이 짧다. 마찬가지로 정신 에너지만 강조하는 국가도 쇠약해진다. 두 종류의 에너지가 조화를 이루는 국가가 건강하다. 정신 에너지는 다양한 정신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힘차게 솟아 나온다.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는 건강하다. 반대로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는 겨우 숨만 쉬다가 결국 패망한다. 중국은 유교, 도교, 불교, 제자백가 등 사상과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중세와 근대에 걸쳐 세계 최강의 국가를 유지했다. 그러나 조선은 주자성리학만 고집하다가 패망하고 식민지가 되었다.
나치독일은 나치즘만을, 소련은 공산주의만을 고집하다가 망하거나 해체되었다. 한 가지 사상이나 종교로 국가를 통치하기는 쉽다. 그러나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정신 에너지가 고갈되면서 인내의 임계점을 지나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소대(召對)할 때 말의 장황함 문제이다.
「또 대사헌 조광조가 임금의 총애를 받아 매양 소대(召對)하였는데, 반드시 의리를 끌어 비유하고, 경전(經傳)에 종횡으로 드나들면서 말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딴사람은 한마디 말도 그사이에 끼일 수 없었다. 비록 깊은 겨울이나 한여름이라도 한낮이 되도록 중지하지 않았다. 입대할 때에 한 말은 윤허받지 않은 일이 없었으나, 함께 입시한 자는 매우 괴로워하고 모두 싫어하는 빛이 있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으면 물리고, 아무리 듣기 좋은 꽃노래도 여러 번 들으면 지겹다. 친한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요점을 간결하고 조리있게 말해야지 쓸데없이 이리저리 빙빙돌며 장황하게 말하면 듣는 사람이 피곤하다. 하물며 임금에게 말씀을 올릴 때에는 정말 조심하며 요점을 간결하게 조리를 세워 말해야 한다.
그런데 고전에서 인용하는 근거와 비유가 과다하고, 경전을 종횡으로 드나들며 아는 게 많은 티를 철철 내며, 다른 신하들이 말할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한서 주야를 막론하고 장광설을 늘어놓는다면 어느 누구라도 속으로는 피곤하고 짜증이 나지 않겠는가. 처음에 무한한 존경심으로 대했던 중종이라도 이런 장광설에 오래 노출되면 어찌 피곤과 짜증이 나지 않았겠는가.
이것을 보면 조광조가 매우 자기 현시성이 강한 성격이었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아집과 편견이 강해서 자기 생각과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즉 자기가 가장 유식하고 현명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자기보다 하치이기 때문에 생각과 의견이 부실하다고 결정한다. 이런 사람은 사회생활에서나 공적 생활에서나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 그래서 적을 양산한다. 기묘사화를 당한 것도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였기 때문이다. 조광조와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얽힌 이역, 홍경주, 심정, 남곤, 김전과 같이 앙심을 품은 사람들은 당장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정광필, 이장곤 등 대부분의 건전한 사고를 가진 대신들은 조광조의 잘못된 점을 알지만 조광조가 악인이나 간신은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결코 당장 죽일 정도는 아니라며 중종을 말렸다.
네 번째로 조광조의 거만함 문제이다.
「일찍이 대사헌으로서 아문(衙門)에 출사(出仕)하는 길에서 찬성(贊成) 고형산(高荊山)을 만났는데, 인사하지 아니하고 지나갔으므로 미워하는 자들이 이를 갈았다. 거만하고 권세를 마음대로 하다가 화를 취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군자가 처신하는 데 있어 공경하고 겸손하는 것이 복을 누리는 기초이니 조심하지 않을 것인가.」
조광조는 존경하는 대신에게는 인사를 하지만 거슬리는 대신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만나면 인사하는 것이 인간사회의 기본이다. 직장생활에서 좋아하든 안 하든 간에 상사에게는 깎듯하게 인사하고, 동료들과 부하들에게 친절하게 인사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물며 대궐에서는 대신들에게는 여하 간에 인사를 먼저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조광조가 상급자인 찬성 고형산을 만났는데도 인사를 안 하고 그냥 지나갔으니 얼마나 거만하고 괘씸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고형산은 기묘사화 때 적극적으로 나서 조광조와 사림파를 공격하진 않았다.
사림파의 우두머리인 조광조의 인사관이 그러하니 따르는 동류들의 인사관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반대파 대신들과 신하들은 더욱 괘씸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사림파들의 인사관이 이러하니 1519년 11월 15일까지 조정 내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신들이 사람파들의 공격에 얼마나 시달렸겠는가. 사림파의 의견에 조금만 반대해도 대번에 소인으로 몰아 비판해버리니 얼마나 분했겠는가. 글을 아는 선비에게 ‘소인’이란 말은 인격을 말살하는 치명적인 말이다. 조광조보다 10세 연장으로 출사 초기에 추천하기도 해서 친했던 남곤이 왕당파로 돌아서서 중종의 밀지를 받고 기묘사화를 계획하게 된 이유가 사림파로부터 소인이란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대신 이하 신료들이 진절머리를 냈을 것이다. 특히 훈구파 공신들은 주야로 말과 상소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니 얼마나 통분하며 이를 갈았겠는가.
대신들에 대한 비난과 공격도 심했지만 훈구공신들에 대한 공격과 위훈삭제는 기묘사화를 일으키도록 한 결정적인 타격이자 실책이었다. 입장을 바꿔 놓고 보면, 위훈을 삭제 당한 공신이라면 누구나 이를 벅벅 갈며 조광조를 음해할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다른 사안은 그렇다 쳐도 위훈삭제만 없었다면 기묘사화는 없었다.
성격은 운명이라고 한다. 나무위키를 검색하면, 청소년기 때부터 조광조는 좀 특별난 성격 때문에 집안과 이웃으로부터 일종의 경원 내기 기피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에 더하여 18세에 김굉필로 부터 소학을 배운 탓인지 편협하고 고집스런 성격이 결국 기묘사화를 초래했다. 조금만 넉넉한 성격이었다면 액운을 피해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중종도 호불호가 극단적이고 변덕이 심한 성격이지만 조광조도 성격에 문제가 많았다. 나무위키를 보면 ‘고서적과 옛 학문을 좋아하고 세상일을 개탄하면서 학문의 뜻은 출세에 있는 것은 아니라며 과거 보기 위한 글은 하지 않았는데, 부형(父兄)과 친척들로부터 세속과 어긋나게 행동하여 남의 비방을 산다고 꾸짖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욕은 꺾을 수 없었다’라고 한다. 좋은 뜻이 담긴 글이지만 ’꾸짖음을 당하였다’는 함축된 의미를 담고 있다. 보통 청소년의 상식적인 차원과 다른 언행이 많았던 모양이다.
또한 <김정전>에 보면 ‘정암이 통곡하면서, “우리 임금을 뵙고 싶다.” 하였다. 제공이 서로 권면하면서, “조용하게 취의(就義)함이 마땅하오. 울어서는 무엇하겠소.” 하였다. 서로 술을 권하며 한껏 마셨는데, 정암이, “조용하게 취의하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소마는 다만 우리 임금을 다시 뵈올 수 없음이 한스럽소. 만약 우리 임금을 뵈옵게 된다면, 어찌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겠소.” 하면서, 갇힐 때부터 밤새도록 통곡하던 것을 이튿날도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라고 한다.
또한 나무위키는 ‘다음 날 취조를 위해 간수들이 조광조를 끌어냈을 때는 이미 너무 취해서 심문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여기서 만취한 나머지 조광조는 심문관이었던 병조판서 이장곤에게 술주정을 했는데 "희강(이장곤의 자)아!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못난이 같으니라구!"라는 반말도 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라고 한다.
동료들과 후배들은 정작 침착하게 사태를 받아들이는데 수장인 조광조는 밤새도록 통곡하며 술을 마셨다. 그만큼 정서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다섯 살이나 적은 조광조로부터 반말조 희롱을 당한 이장곤도 불쾌했겠지만 조광조가 술에 취해 추태를 보였다는 말을 들은 중종도 매우 불쾌했을 것이다. 중종이 화를 더 냈지만 남곤이 술 취했기 때문이라면서 변호했다고 한다. 이 사태가 없었다면, 옥에 갇힌 조광조가 조용히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다음 날 아침 노기를 조금 가라앉힌 중종이 조금은 가벼운 형벌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이상으로 김정국이 네 가지를 들어 조광조의 잘못을 질책하고 있다. 물론 김정국도 사림파로 몰려 파직된 사람으로 조광조에 대한 존경심은 기본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 객관적인 관점에서 붓을 들었다. 그러나 조광조 메니아인 정사원은 김정국의 비판을 불쾌하게 여겨 조목마다 반론을 펴고, 안로는 부정적인 면과 비판사 없이 칭송하는 글을 길게 남겼다.
<참언(僭言)>에서 정사원이 김정국을 ‘학술이 밝지 못한 사람이 도학(道學)의 귀함을 알지도 못하면서 망령되이 상정(常情)으로 현인(賢人)을 논의한 것이 이에 이르렀는 바, 김공(金公)을 정인 군자(正人君子)라고 하는데 소견이 이와 같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라고 한다.
참언(僭言)의 뜻은 ‘거짓으로 꾸며서 다른 사람을 헐뜯어 일러바치는 말’이다. 이 ‘참언’을 정사원이 썼는지 안로가 붙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김정국의 말이 뭐가 거짓이고 잘못됐다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조광조 광신도에게는 김정국의 비판이 참언이다. 존경하는 스승 조광조를 비판하는 <사재척언>의 해당 글을 보고 정사원이 매우 분개한 모양이다. 김정국은 자기가 본대로 느낀대로 사실을 썼다. 어디 사람이 100% 완전한 사람이 있는가. 60%만 돼도 대단한 인물이다. 조광조도 당연히 부족한 점이 있다. 그런데 정사원은 김정국이 비판한 조목에 대한 비판에서 억지 논리를 제시햐고, 고사를 예로 드나 우활하다. 더구나 일세를 풍미한 사재 김정국을 학술이 밝지 못하고 도학(道學)의 귀함을 알지 못한다 하는 것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뱁새는 뱁새고 황새는 황새인 것, 일개 하급 관리인 상사(上舍)가 어찌 김정국의 도량을 알겠는가.
안로가 김안국의 글 다음에 정사원의 글을 붙인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보유>에서 칭송한 걸 보면 정사원의 글로서 김안국의 글을 비판하고자 함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정축년 1517년 정축년 8월에 전한에 임명되어 곧 올린 사직서에 있는 ‘소신(小臣)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실지로 힘쓰지 못했던 까닭으로 식견이 나날이 공소(空疎)하여지고, 직임(職任)은 매우 무거우니 마음에 저절로 부끄러워집니다. 외람되이 시종하는 반열에 끼어 있으니, 어찌 스스로 편하겠는가. 물러가서 힘껏 배워 학문이 성취한 다음 다시 와서 벼슬하면 반드시 실오라기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궁벽한 고을에 보임(補任)되기를 청해서 백성을 다스리는 여가에 학술에 전심하다가 다행히 버리지 않으시고 수용(收用)하시면, 백성을 다스리고 학문을 이루는 데에 거의 양쪽으로 완전할 것이다.’가 조광조의 본심이었을 것이다. 총명한 사람이라서 갑자기 중종의 총애를 받아 고속성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심중에는 소학 단계를 넘어 대학을 지나 성리학의 궁극에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사직을 윤허하지 않고 계속해서 중용하여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이때 희망대로 외직에 나가 다만 3년이라도 더 학문에 정진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조광조 개인의 인생과 조선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어서 안로는 소격서(昭格署)를 혁파, 속고내(速古乃)를 잡으라는 명을 정지하도록 한 청, 《소학(小學)》을 인재 양성의 근본으로 삼고 향약(鄕約)을 풍속 교화의 방법으로 한 정책을 들며, 그 결과로 ‘백료(百僚)가 용동(聳動)하지 않는 이 없었고 사방에서 바람을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고 좋게 평가한다. 또한 1518년 무인년 겨울에 ‘특별히 대사헌으로 임명되자, 온축된 의리가 바람을 내어서 풍속을 고동(鼓動)하였다. 염치를 숭상하고 병이(秉彝)를 떨쳐 일으키어 효제를 숭상하니, 온 나라 백성이 분발하여서 따랐다’고 하며 크게 칭찬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소급서 혁파와 속고내 체포 중지 간언은 부정적인 면이 더 많았고, 지나친 《소학(小學)》 중시는 긍정적인 명이 더 많았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향약(鄕約) 역시 긍정적인 면도 많았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차후에 있는 <이구 전(李構傳)>의 <보유>에 보면, ‘신이 근일 시골에 있으면서 민정(民情)을 염탐하니, 향약(鄕約)을 시행한 뒤에 풍속이 순후하여지고 조금씩은 향방(向方)을 아는 듯하였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행한다면 장차 길에 떨어진 물건도 주워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라는 긍정적인 말도 있지만, ‘이에 언관이 논계하기를, “지금 바야흐로 양남에 도적이 부쩍 일어나고, 향약을 적절하게 시행하지 못해서 자주 모이게 하고 지나치게 형장을 가해서 민정이 어수선합니다. 전날 한림 이구가 ‘장차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게 되겠다.’고 한 것은 망령된 아룀이니 파직하기를 청합니다.” 하여 향약도 드디어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라는 부정적인 말도 있다.
과거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시대 때 반상회라 하여 한 달에 한 번씩 마을 사람들을 모아 정부 정책에 대한 설명과 함께 주의할 점을 듣는 집회가 있었다. 조광조가 시행한 향약이 그러했던 모양이다. 마을 백성들을 자주 모이게 하고, 향약을 위반하는 사람을 지나친 형장으로 다스리는 일들이 자주 있었던 모양이다. 향약을 주관하는 사람들은 지역사회의 양반들이었을 테니 백성들이 속으로 얼마나 떨었으며 불편했을까. 향약이 겉으로는 좋은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양반 계층에 의한 지역사회 장악의 도구였다. 향약을 명분으로 한 지방서원의 횡포는 결국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초래하고 말았다.
안로는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자 온 나라 백성이 분발하여서 따랐다’고 하며 크게 칭찬한다. 그러나 대사헌 재임 동안 중종의 심화만 돋우고 대신들과 불협화음을 계속 조장하다가 1년 만에 대숙청을 당했다. 조광조가 아무리 좋은 대의명분을 갖고 정치 활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동료, 후배들을 한꺼번에 참화 속으로 몰아넣은 큰 잘못을 범했다.
조광조가 상소에서 ‘그러나 옛날부터 정직한 선비가 세상에 성하면 반드시 큰 화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지금 붕우 사이에 교유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서로 자뢰하여 유익하고자 함인데, 어찌 이런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여염에서도 모두 큰 화가 반드시 머지않아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바, 대개 예전 일에 깊이 징계되었던 것입니다. 개국 이래로 사림의 화가 끊이지 않았으나, 군자가 국사(國事)에 힘을 기울여 거의 성공한 적은 있었으나, 패망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라고 한 걸 보면 기묘사화와 같은 사화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한 것 같다.
그렇다면 더욱 조심하고 겸손했어야 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대신들의 의견을 수합하여 시세에 맞게 시행하고, 위훈삭제와 같은 민감한 문제는 서서히 해결하는 여유를 가졌어야 했다. 중종의 그릇과 심기를 살펴서 할 말 안 할 말을 골라서 적당히 하는 지혜를 가졌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후세인의 조언일 뿐이다. 한 인간의 운명은 그의 성격에 달렸다. 중종의 총애를 철석같이 믿는 그의 앞에 방해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조광조의 도학정치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안로가 안타까운 마음에 <보유>를 찬사로 가득 채웠지만, 조광조 행적의 부족한 점, 잘못된 점은 가식 없이 지적하는 것이 후세를 위한 경계가 될 것이다.
이어지는 이황의 <행장>을 살펴보자.
1564년에 64세 이황은 당질로서 대를 이은 종손 조충남의 청으로 19세 때 만났던 조광조의 행장을 44년 만에 지었다. 전체적으로는 조광조의 학문과 이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개혁정치가 좌절한 데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반드시 덕이 충분히 쌓이고 나이가 많아진 뒤에 크게 구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그렇지 못 하였다’라며 덕과 경륜이 아직 미흡했음을 은근히 지적하고, ‘크게 발탁되어서 높은 벼슬에 갑작스럽게 올랐고, 물러가기를 구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하며 실패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과유불급이라 한다. 평범한 말이지만 지극한 세상 이치를 담고 있다. 과격함은 한때 극성하지만 결국은 실패한다. 세상을 바꾸고자 노력한 조광조와 젊은 선비들의 정신은 만대에 빛나는 북두칠성이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은 그 아래이다. 조광조 시대의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를 오늘에 경계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474년 세월이 흐른 2024년 깊은 가을밤에 장황하게나마 이런 글을 쓰는 나 박희용. 기묘사화 그날 밤의 풍경과 인물들이 주마등으로 떠오른다. 이 글에 등장하는 김정국, 정사원, 안로, 이황과 더불어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한다.
대동야승을 읽으며 조선 건국 후 150년 동안 명멸했던 많은 인물을 글로 만났다. 역사의 동인물성, 동시대성, 동현장성이란 말이 있다. 인간의 역사는 강물처럼 대를 이어 흐른다. 그렇다면 나에게 DNA의 중심 부분, 즉 씨를 물려주신 당시의 조상님들은 어떻게 처신했을까 궁금하다. 다행히 간신이든 기묘명현이든 명부에 든 분은 없다. 뭐 상하에서 미움받을 정도로 특출나게 사신 분이 없다는 것이다.
밀양박씨 규정공파인 21대조 박침(朴忱)은 두문동 칠십이현의 한 분으로 후에 두류산에 은거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다. 20대조 박강생(朴剛生) 호 나산경수(蘿山耕叟 칡산에 사는 늙은이)는 태종조에 집현전 부제학을 했다고 한다. 18대조 박중손(朴仲孫)은 단종조에 집현전 박사를 했는데도 계유정난공신이 되고 사육신 처벌을 주청하여 수양대군 세조에 충성하였다. 사육신에 대하여 참 안타까운 심정인데, 중손 할아버지께서 처벌을 주청했다니, 충신들에게 매우 죄송스럽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중종조를 산 분은 16대조 박광영(朴光榮)이다. [daum백과]를 보면, ‘1486년(성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에 보임되었다. 곧이어 홍문관박사·봉상시주부·홍문관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504년 정언으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廢妃尹氏)의 추숭(追崇)을 반대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목천(木川)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정언으로 복직되고 이듬해 지평으로 승진, 이어 사인(舍人)·응교·집의를 거쳐 통례원좌통례 등을 역임하였다. 1515년(중종 10) 동부승지가 되었고 또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었다. 이어 대사간을 지내고 병조참의가 되었다.
1518년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고, 뒤이어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뒤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으나 도둑을 토벌하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어 강릉부사로 임용되었고, 만기가 되자 이조참의가 되었다.
1528년 좌승지를 거쳐 한성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맏형이 아들이 없어 뒤를 잇지 못하므로 박광영이 작위를 이어받아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32년 공조참판에 부총관을 겸하였고, 이후 형조참판, 경주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박광영은 직언으로 대신들의 미움을 샀고 생원으로 있을 때 나라에서 배척하는 불교를 숭봉했다는 죄목으로 곤장을 맞고 유배되기도 하였다. 또 폐비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되는 등 많은 파란을 겪었다. 외교에도 상당한 수완을 가지고 있어 중국을 세 번이나 다녀왔고, 어려운 일들을 곧잘 처리해 왕의 신임을 받았다.’라고 한다.
조광조보다 20여 세 연장이니 사림파가 아니라 훈구파였을 것이다. 그러나 간신 쪽에도 없고 기묘록에도 없는 걸 보면 중도에서 무난하게 지낸 것 같다. 후손인 내가 보기에도 처신 잘 하셨다.
또 중종조에 아들인 15대조 박란(朴蘭) 號 오정(梧亭)이 살았는데 음사로 함경도 북평사와 고원군수를 지내며 역시 중도에서 무난하게 살았다. 시판이 울진 망양정에 걸려있다.
충정공파 파조이신 14대조 박숭원(朴崇元) (1532 〜1593)은 명종 19년(1564)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관찰사 · 대사헌 · 충청도 관찰사 ·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윤으로서 의주로 몽진하는 선조를 호종하여 선조로부터 보검(寶劍)이 하사받았고, 난후에 호성공신2등에 책록되었다.
이렇게 나의 21대에서 14대까지의 할아버지들이 1300년대 말부터 1500년대 말까지 200년 동안 살았다. 내가 대동야승을 읽고 쓰는 글마다 무신의난 참극을 벌인 이의방의 방계 혈통인 전주이씨 왕조를 계속해서 비판하는데, 내 DNA의 중심을 물려주신 먼 윗대 분들은 전주이씨 왕들에게 충성을 바쳤다.
그분들이 산 시대나 내가 사는 시대나 사람 살아가는 모습과 정치 돌아가는 모습은 오십보백보다. 잘했든 못했든 간에 조선 땅 모든 가문의 혈통은 강물처럼 흐른다. 수천수만 가문들의 혈통이 모이고 모여 대하장강을 이룬 실체가 조국 대한민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