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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士 僧侶들
성당기사단 연구란 알고 보니 거창한 작업이었다. 이 문제를 다룬 문서의 방대한 양만으로도
사람의 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도대체 이 자료의 어느 만큼을 믿을 수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카타리파가 피상적이고 낭만적인 전설을 무더기로 만들어 냈다지만,
성당기사단을 에워싼 신화적인 조작(操作)은 그보다 한 술 더 뜨는 판국이었다.
어느 차원에서 본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존재들이었다 – 끝 벌어진 붉은 십자가를
단 흰 망토를 입었으며, 십자군 원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광신적이며 용맹스러운 무사 승려,
기사, 신비론자였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여기서 십자군의 전형을 찾을 수 있었다 - 수천 명
씩 떼지어 그리스도를 위해 영웅적으로 죽어간 성지의 돌격대.
그렇지만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학자와 문필가들은 그들을 훨씬 신비로운 조직이며, 불투명한
모의, 비밀스런 책략, 남모르는 음모와 계획을 꾸미는 비밀 집단이라고 보고 있다. 거기에다
곤혹스럽고도 해명 불가능한 한 가지 사실이 남아 있었다. 200년에 걸친 활동 끝에 이들
흰 제복을 입은 그리스도의 전위들은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배척했으며, 십자가를 짓밟고 침을
뱉았다는 죄명으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월터 스코트의 소설 <아이반호우>에서 성당기사단은 오만 무례한 폭력배, 탐욕스럽고 위선적
이고 부끄럼없이 권력을 남용하는 독재자들이며, 인간과 왕국의 문제를 멋대로 주무르는
교활한 사기사들이라고 묘사한다. 그 밖의 19세기 저술가들의 글에서는 성당기사단은 악랄한
사탄주의자들, 악마 숭배자들, 모든 음란. 가증한 또는 이단적인 종교의식에 빠진 자들로 그려
지고 있다.
보다 최근에 나온 역사가들은 그들을 교회와 국가간의 고위층 정치조작의 가엾은 희생자,
제물이 된 졸(卒)로 보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필자들, 특히 프리메이슨
(Freemasonry)의 전통을 따르는 저술가들은 성당기사단을 신비주의의 숙련자와 신입전수자들,
기독교를 초월하는 고대 지혜의 수호자로 보고 있다.
그들 저술가들의 특수한 편견이나 정향이 어떤 것이든간에, 성당기사단의 영웅적인 열의와
역사에 대한 공헌을 논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또한 이 기사단이 서양문화사상 가장 찬란
하고 의문에 찬 조직의 하나라는 점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십자군 – 또는 12 ~ 13세기의 유럽 – 에 대한 기록을 작성할 때 성당기사단을 빠뜨릴 수는
없다. 그들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기독교권 전역에서 단 하나 교황청을 제외하고 그보다
더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조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고 서성대고 있다. 성당기사단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무엇을 겨냥했을까? 그들은 단순히 표방했던 외양과 일치하는 데 그쳤을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엇이 있었을까? 그들은 뒷날 전설과 신화조작의 후광을 입은 군사에
불과했을까? 그렇다면 왜? 그와는 달리 순수한 미스터리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었을까?
후세에 와서 그 신화를 장식할 만한 조사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들은 먼저 공인된 성당기사단의 자료를 검토하기로 했다. 물론 존경받고 책임감 있는
역사가들의 기록과 자료들이었다. 거의 모든 항목에서 이 자료들은 문제점을 해결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을 제기했다. 면밀한 조사를 한 결과 그 주장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으로 진실을 ‘엄폐(covet – up)’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무엇인가 고의로 숨겨왔으
며, ‘진실을 왜곡한 이야기’를 꾸며내어, 뒷날 역사가들이 그냥 되풀이하고 있다는 의혹을
우리들은 피할 수 없었다.
성당기사단 – 정통적인 설명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성당기사단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정보는 1175년에서 1185
년 사이에 글을 쓴 프랑크 왕국의 역사가 귀욤 드 티르가 제공했다. 이 때는 십자군 원정의
절정기에서, 서양군대는 이미 성지를 정복하고 예루살렘 왕국 – 또는 성당기사단이 부르는대로
‘우트르메르(Outremer)’ 즉 ‘바다 건너의 땅’ – 을 건설한 뒤였다. 하지만 귀욤 드 티르가 집필
을 시작했을 때에는 팔레스타인이 서양인의 손에 들어온 지 벌써 70년, 성당기사단이 탄생한
지도 50년이 넘었다. 따라서 귀욤은 자기 생애에 앞서는 사건들 – 그가 직접 목격했거나 경험
하지 못하고, 2차적으로, 심지어 3차적으로 배우게 된 사건들을 기록하게 되었다. 두 손, 세 손
을 걸렀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서 불확실한 권위를 바탕으로 했던 것이다.
1127년에서 1144년 사이에는 이른바 우트르메르에는 서양의 사관(史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중대한 시기의 기록사는 없다.
요컨대 우리들은 귀욤의 원전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따라서 그의 기록 가운데 일부는
의심스럽다. 그는 입으로 전해지는 말을 옮겼을 가능성이 있으며, 게다가 그다지 믿을 수 없는
구전을 인용했을 수도 있다. 그와는 반대로 그가 성당기사단과 직접 담판하여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되살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귀욤은 성당기사단이 알리기를 바라는 내용만
을 보도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고는 하나, 귀욤은 우리들에게 일정한 기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뒷날 성당
기사단에 관한 모든 자료, 그들의 기초에 대한 모든 설명, 그들의 활동을 에워 싼 일체의 설화
가 바탕한 것이 바로 이 정보이다. 하지만 귀욤의 기록은 모호하고 내용이 불충실하며, 그가
집필한 시가, 문서자료의 빈곤성으로 말미암아, 그는 결정적인 전체상을 세워야 할 자리에
불확실한 기반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귀욤의 연대기는 분명히 쓸모가 있다. 그러나 그 모두
를 비난할 여지가 없고 전적으로 정확하다고 보는 것은 잘못 – 많은 역사가들이 이 잘못에
무릎을 꿇었다 – 이다. 스티븐 런시먼경이 강조하는대로, 심지어 귀욤의 날짜들마저도 [혼란을
빚고 있으며 때로는 너무 명백하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귀욤 드 티르의 말을 빌리면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단(Order of the Poor
Knights of Christ and the Temple of Solomon)은 1118년에 창설되었다. 그 창시자는 위그 드
파엥이라는 샹파뉴의 귀족이며 샹파뉴공작의 가신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위그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8명의 동료를 데리고 보두엥 1세 – 예루살렘의 왕이며, 그의 형 고드프라 드 부용은
19년 전에 성도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 의 궁정에 나타났다. 보두엥은 그들을 아주 정중하게
영접했으며, 새 왕국의 종교지도자이고, 교황의 특사인 예루살렘 대사교 역시 같은 태도를
취했다.
귀욤 드 티르는 계속해서 말한다. 성당기사단의 선언적인 목표는 [그들의 힘이 자라는 한 순례
자들의 보호를 특별히 고려하여…. 크고 작은 도로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 3) 이었다. 이 목표
가 너무나 값진 것이어서 왕은 왕궁의 한 동 전체를 기사들에게 내놓았다. 그리고 그들의 공개
된 빈곤선서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호사스러운 거처에 들어갔다. 그들의 숙소는 고대 솔로몬
성전의 기초 위에 세워 졌으며, 여기서 갓 태어난 이 기사단의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전승이
밝히고 있다.
귀욤 드 티르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9년 동안 9명의 기사들은 그들의 기사단에
새로운 후보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공식 문장을 보면 2명의 기사들이 말 한 마리를 같이 타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의 가난이란
이런 형태의 것으로, 여기서는 형제애와 말 한 마리씩을 타지 못하는 빈곤을 은근히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양식의 문장은 성당기사단의 장비로서는 가장 유명하고 특징이 있고, 기사단
창설 초기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그보다 완전히
100년 뒤에 나왔으며, 설사 성당기사단이 가난한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에는
가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 50년 뒤에 기록을 남긴 귀욤 드 티르의 말을 다시 빌려보면, 성당기사단은 1118년에
창설되어, 왕궁으로 들어갔으며, 여기서 출동하여 성지의 대소 도로로 가는 순례자들을 보호
했었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 때에는 왕이 임명한 공식적인 왕실사관이 있었다. 그의 이름
은 퓔크 드 샤르트르였는데, 창설 취지를 전제로 추정한 기사단 청설 이후 50년이 아니라,
바로 문제되는 그 시기에 그는 사료를 쓰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퓔크 드 샤르트르는 위그 드 파엥, 위그의 동료 또는 성당기사단과 아득하게나마
연결된 내용이라고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사실은 그들의 창설 초기에는 성당기사단의 활동
에 대해서는 우뢰와 같은 침묵만이 있다. 분명히 순례자들을 보호하고자 그들이 활동했다는
기록은 어느 곳 심지어 그 뒤에도 없다. 그리고 그토록 적은 사람들이 그처럼 어마어마한
과업을 성취하려고 희망을 걸기라도 했던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성지에 이르는 모든 통로
상의 순례자를 9명의 기사들이 지킨다? 9명만이? 게다가 모든 순례자들을? 이것이 그들의
목표였다면, 틀림없이 새로운 단원을 기꺼이 모집하려 했을 터이다. 그러나 귀욤 드 티르의
말을 빌리면 , 그들은 9년 동안 성당기사단에 새로운 후보를 일체 용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사이에 성당기사단의 명성은 유럽에까지 퍼져나갔던 것으로 보였다.
교회당국자들은 그들을 높이 평가했고, 기독교 활동을 찬양했다. 1128년 또는 그보다 조금 뒤,
그들의 미덕과 품성을 칭송하는 소책자가 다름 아닌 당대 기독교권의 최고 대변인이요
크레르보 수도원장인 성 베르나르가 내놓았다. <새 기시단을 찬양함>이라는 베르나르의
소책자는 성당기사단을 기독교 가치 체계의 귀감이요, 정수라고 선언한다.
9년이 지난 1127년에 9명의 기사들 가운데 대다수가 유럽으로 돌아가, 주로 성 베르나르가
배후에서 지휘하는 개선 환영을 받았다. 1128년 1월 로마교회 공의회가 트롸예 – 위그 드
파엥의 상전 샹파뉴 공작의 봉토 – 에서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도 베르나르는 다시 지도적
정신으로 등장했다. 이 공의회에서 성당기사단이 공식으로 인정되었고 종교군사조직으로
통합되었다. 위그 드 파엥에게는 단장의 칭호가 주어졌다.
그와 그의 부하들은 무사 승려, 병사 신비주의자였으며 수도원의 준엄한 규율과 광신이라고
해야 할 군사적 열정을 조합했고, 당시 그들은 ‘그리스도의 민병’이라 불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기사들이 준수해야 할 행위 규범을 열렬한 서문과 더불어 작성하는데 협조한 사람이 역시
성 베르나르였다. 이 규칙은 시토교단의 그것을 바탕으로 했으며, 베르나르 자신은 시토교단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성당기사단은 빈곤. 순결과 복종을 서약했다. 그들은 머리는 깎되 수염은 깎지 못하게 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깨끗이 수염을 깎고 있던 시대에 다른 사람들과 구분짓게 했다. 일상생활의
식사. 의복과 다른 측면들을 수도원과 군사규칙을 따라 엄격하게 규제했다. 성당기사단의 모든
구성원들은 흰 내리닫이 겉옷을 입어야만 했고, 이것이 곧 기사단이 이름을 떨치게 된 두드러
진 흰 망토로 발전되었다. [그리스도의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흰 옷이나 망토의
착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복의 상징적인 의미를 밝히고 있는 기사단의 규칙은
다음과 같이 지적되었다. [우리들은 서약한 모든 기사들에게, 여름과 겨울을 가리지 않고 구입
할 수만 있으면 흰 옷을 주어, 검은 생활을 뒤에 남기고 온 사람들은 순수하고 흰 생활로
창조주에게 자신을 추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자세한 내용과 함께, 그 규칙에 따라 산만한 행정적 위계조직과 기구를 확립했다.
그리고 싸움터의 행태는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가령 생포되면, 성당기사들은 자비를 구하거나,
속죄를 구걸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다. 그들이 3대 1로
불리하지 않은 한, 후퇴를 용납하지 않았다.
1139년 6)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 – 지난 날 클레르보의 시토 승려였고 성 베르나르의 보호
자 – 가 교서를 발표했다. 이 교서에 따르면, 성당기사들은 교황 이외의 어떠한 세속적 또는
교회의 권력에 충성을 바쳐서는 안 되었다. 말을 바꾸어, 그들은 모든 왕, 군주와 고위성직자와
는 완전히 독립시켰으며, 정치. 종교적 당국자의 간섭을 철저히 배제했다. 사실상 그들은 독자
적인 입법권을 행사하고, 자치적인 국제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트롸예 공의회 이후 20년 동안에 기사단은 비상한 속도와 규모로 확대되었다. 위그 드 파엥이
1128년 말 영국을 방문했을 때 헨리 1세의 ‘대대적인 경배’를 받았다. 유럽 전역에서 귀족의
차남들이 기사단의 대열에 떼지어 등록했고, 기독교권의 각지로부터 방대한 규모의 헌납 – 돈,
물품과 토지 – 이 있었다. 위그 드 파엥은 자신의 재산을 헌납했고, 새로 모집한 모든 기사들
은 그 뒤를 따라야 했다. 기사단에의 입단에 즈음해서, 각자는 자기 소유 전부를 넘겨주기로
서명했다.
그러한 정책을 고려할 때, 성당기사단의 재산이 급속히 증가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트롸예 공의회가 열린 지 불과 12개월 이내에 기사단은 프랑스. 영국, 스코틀란드.
플랑드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다시 10년이 흐르는 사이에 성당기사단
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성지와 동방의 여러 요충에 영토를 확보했다.
비록 기사들은 개인적으로는 빈곤 서약에 묶여 있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기사단이 재산을 축적
– 유례없는 규모로 – 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모든 선물을 환영했다. 동시에 기사단이
어떤 재산도 처분하지 못하게 조치했다. 그 지도자들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마저 금지했다.
성전에서는 풍성하게 받아들였으나, 엄격한 정책에 따라서 절대로 주지 않았다. 따라서 1130년
위그 드 파엥이 300여 기사들 –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였다 – 로 구성된 일행을 거느리고
팔레스타인에 돌아가면서, 유럽에 광대한 영토를 남겨 신입기사들이 관리하게 맡겼다.
1146년에 성당기사단은 저 유명한 붉은 십자가 – 끝이 벌어진 파테(pattee) 십자가를 채택
했다. 그들의 망토에 이 기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기사들은 프랑스의 루이 7세를 따라
제 2차 십자군에 참가했다. 여기서 그들은 거의 정신 이상적인 무모함과 잔인한 오만이 어우러
진 무사적인 열성으로 명성을 굳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그들의 규율은 눈부셨고, 당시
전세계의 전투병력 중에서 가장 규율이 엄격했다. 프랑스왕 루이 7세가 제 2차 십자군 –
발상이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리도 엉망이었다 – 을 완전 패주의 위기에서 건져낸 것은
성당기사단이었다고 직접 글을 남겼다.
그 뒤 100년 동안 기사단은 국제적인 영향력을 휘두르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쉬임없이
서양세계 전역과 성지에서 귀족과 군주간의 고위층 외교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영국에
서는 기사단장이 정기적으로 왕의 의회에 불려나갔으며, 모든 종교집단의 우두머리로 간주되었
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대소 수도원장보다 윗자리에 있었다. 헨리 2세 및 토머스 베케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성당기사단은 군주와 소외된 대주교를 화해시키는 데, 중재자의
역할을 했다. 존 왕을 비롯하여 그 뒤 영국의 여러 왕은 가끔 기사단의 런던 지부에 거주하기
도 했으며, 대헌장을 조인할 때, 기사단장이 존 왕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기사단의 정치 개입이 기독교권에 국한되지 않았다. 회교계 세계 – 싸움터에서 그렇게
빈번하게 적대했던 – 와도 밀접한 연계를 다졌고, 성당기사들은 사라센 제국의 지도자들로부터
다른 어떤 유럽인들보다 큰 존경을 받았다. 또한 회교의 성당기사단이며 전투적이고 광신적인
종파로 이름 높은 하쉬쉼파 또는 앗사신파와 은밀한 유대를 갖고 있었다.
하쉬쉼파는 성당기사단에게 조공을 바쳤고, 그들에게 고용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거의 모든 정치 수준에서, 기사단은 분쟁의 공식적인 중재자로 행세했으며, 심지어 왕까지도
그들의 친위에 복종했다. 1252년에 영국의 헨리 3세가 대담하게 그들에게 도전하여 그 영지의
일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대들 성당기사들은 …… 너무나 많은 자유와 특권을 누리고,
그 방대한 재물로 인하여 오만 불손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소. 따라서 신중하지 못하게 주어진
것은 신중하게 되돌려야 할 것이고, 사려 없이 증여한 것은 사려 깊게 환수해야 할 터이오.]
그러자 기사단장이 응수했다. [무슨 말씀이오니까, 폐하? 폐하의 입에서 그같이 불쾌하게
어리석은 말이 나오다니 당치도 않은 일이로소이다. 폐하가 정의를 실천하는 날까지는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정의를 침해하면, 왕좌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이 성명의 거대하고도 대담한 의미를 전달하기는 어렵다. 단장은 성당기사단과
자신을 교황마저도 감히 드러내 놓고 주장하지 못했던 권력 – 군주들을 즉위 및 퇴위시키는
권력이라고 묵시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성당기사단의 이익범위는 전쟁. 외교와 정치적 음모를 넘어 확대되었다. 실상
그들은 근대 금융조직을 창설하고 그 기반을 확립했다. 궁핍한 군주들에게 막대한 금액을 대출
하여, 그들은 유럽의 모든 왕실 – 그리고 나아가서는 회교 권력자의 일부에 대해서도 – 의
은행가가 되었다.
유럽과 중동 전역에 있는 그들의 지부망을 통해서 또한 그들은 온당한 이율을 붙여 상인
무역상들의 안전하고 능률적인 송금 체계를 완성했다. 실상 당시 상인계급은 점차 성당기사단
에 송금업무를 의존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한 도시에서 예입한 돈을 정교한 암호를 새겨 넣은
약속어음으로 다른 도시에서 인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성당기사단은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환전업자가 되었고 파리 지부는 유럽 금융의 중심으로 변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수표를 성당기사단이 창안해 내었을 개연성이 높다.
그리고 성당기사들은 돈만이 아니라 사상마저도 교역했다. 회교와 유대 문화권과 지속적이고도
호의적인 접촉을 통해서 그들은 새로운 사상, 새 차원의 지식, 새 과학과 학문의 어음교환소
기능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시대의 가장 우수하고 진보된 기술 – 무기제조업자. 가죽제품
기술자. 석공. 군사건축가와 기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제품 – 을 정당하게 독점했다.
그들은 측량. 지도제작. 도로건설과 항해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 독자적인 항구. 조선소와
선단(船團) – 상업. 군사 양면의 선단이었고 자석 나침반을 사용한 최초의 선박으로 손꼽혔다
– 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인으로서 상처와 질병을 치료해야 할 필요성이 컸으므로, 성당기사들은 약물 사용에
능숙했다. 성당기사단은 자체의 내외과 의사를 갖춘 병원을 운영했으며, 거기서 곰팡이 추출물
을 사용했던 점으로 미루어 항생제의 성능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적인
위생. 청결의 원리들도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시대를 앞질러 의학지식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간질을 악마에 신들린 것이 아니라 제어 가능한 질병으로 보았다.
자체의 업적에 힘입어, 유럽의 성당기사단은 점차 부유. 강력. 자기만족적인 상태로 나아갔다.
이 집단은 점점 교만. 잔인. 부패해졌다. [성당기사들처럼 마신다]라는 말은 그 시대의 상투어가
되었다. 그리고 어떤 자료에 따르면, 기사단이 파문된 기사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성당기사들이 유럽에서 번영을 누리며 악명을 떨치고 있는 사이에, 성지의 상황은 심각
하게 악화되었다. 1185년 예루살렘왕 보두엥 4세가 죽었다. 뒤이은 왕권쟁탈전에서, 성당기사
단의 단장, 즉 대사(大師) 제라르 드 리드포르가 서거한 왕에 대한 맹약을 어겨, 팔레스타인에
있던 유럽인들은 내란 직전의 상황에 처했다. 리드포르가 취한 의심스러운 행동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사라센인들에 대한 그의 거만한 태도로 인해서 장기간 지속되어 온 휴전상태가 급진
적으로 악화되고 잇달아 새로운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다가 1187년 7월 리드포르는 자기 기사단과 나머지 기독교 군대를 합쳐 성급하고도
무모한 전투를 하틴에서 벌여 결국 파멸적인 패전을 당했다. 기독교군은 섬멸되다시피 했고,
2개월 뒤, 예루살렘 – 거의 1세기 전에 점령했던 – 마저 또 다시 사라센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 뒤 1세기 동안, 상황은 차차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다. 1291년이 되자,
우트르메르의 거의 모든 지역이 함락되었고, 성지도 가히 전부가 회교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크레만이 남았으나, 1291년 5월에는 이 마지막 요새마저 잃고 말았다.
이 운명이 다한 도시를 방어하면서 성당기사들은 그들의 영웅적 기질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단장 자신도 중상을 업었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싸움을 계속했다. 성당기사단이 소유하고 있던
노예선의 공간이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여자와 아이들은 철수시켰으나, 모든 기사들은 부상자
들까지 뒤에 남기로 했다. 아크레에 있는 최후의 보루가 함락될 때, 전투는 처절을 극하고,
성벽이 무너져 공격과 방어 상방의 군사들이 묻혔다.
성당기사들은 키프로스에 새 사령부를 설치했으나, 성지를 상실한 이상, 사실상 존재 이유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 이상 정복해야 할 이교도의 땅이 가까이에 없었기 때문에, 기사단은
유럽으로 관심을 돌려, 거기서 그들이 계속 존재해야 할 정당한 조치를 찾으려고 했다.
1세기 전에, 성당기사들은 따로 기사적인 종교. 군사 집단인 튜튼기사단의 창설을 주관한
바 있었다. 후자는 중동에서 소수집단으로 활동했지만, 13세기 중엽에 이르러, 관심을 기독교권
의 동북 변경지대로 돌렸다. 여기서 그들은 영토를 확보하고 스스로 독립 공국 – 동부 발틱
전지역을 차지한 오르덴슈타트 또는 오르덴스란트, 다시 말하면 승단국 – 을 세웠다. 이 공국
– 프러시아에서 핀란드만을 거쳐 현재의 소련 땅까지 퍼져 있었다 – 에서, 튜튼기사단은 세속.
종교 쌍방의 통치에서 멀리 떨어져 도전을 받지 않고 주권을 누리게 되었다.
오르덴슈타트의 창건 초기부터 성당기사단은 유사한 승려기사단이 누리는 독립과 자유로운
지위를 부러워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서, 그들은 튜튼기사단이 누리는 것과 같은
무제한의 권위와 자치를 선망하게 되고, 그와 같은 나라를 직접 건설해 보자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한데 그들은 튜튼기사단과는 달리, 동부 유럽의 거칠은 황무지는 흥미가 없었으며
이미 그들은 사치와 풍요에 너무 길들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보다 접근하기 쉽고 녹녹한 땅
– 랑그토크의 땅에 국가를 건설할 꿈을 꾸었다. 11)
당초부터 성당기사단은 카타리파, 특히 랑그도크에 있는 카타리파와는 어느 정도 따뜻한
공감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대지주들 – 카타리파 또는 카타리파에 동정적인 – 이 기사
단에 거대한 토지를 헌납했다. 최근에 발간된 어느 저서에 따르면, 성당기사단의 공동발기인
가운데, 최소한 1명은 카타리파였다. 이건 불가능할 것 같지만, 기사단의 제 4대 단장 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는 카타리 가문의 출신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베르트랑의 사후 40년이
되어 그의 후손들은 다른 카타리파 영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북방의 침략자 시몽 드 몽포
르에 대항하여 싸웠다.
알비 십자군 전쟁 중에는, 외관상 성당기사단이 중립을 지켜 증인의 역할만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시의 단장이 진정한 십자군은 사실상 오직 하나 – 사라센에 대항한 십자군 – 밖에
없다고 선언하여, 기사단의 자세를 분명히 했다고 하겠다. 나아가서, 그 시대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성당기사들은 숱한 카타리파 피난민들에게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때로는 이들 난민을 위해 무기를 들기도 했다.
그리고 알비 십자군 초기에 기사단의 명단을 조사해보니, 카타리파가 기사단의 대열에 가장
많이 흘러들어 왔으며, 여기서는 시몽 등 몽포르의 십자군까지도 감히 드골에게 도전을 하지
못했다. 그 시기의 성당기사단 명부에 따르면, 기사단 고위 인사의 상당한 비율이 커타리파
가문 출신임이 드러난다. 랑그도크에서는, 기사단의 간부들은 가톨릭보다 카타리파가 더
많았다. 한 걸음 나아가서 기사단에 등록한 카타리 귀족들은 가톨릭 교도들과는 달리 세계를
돌아다니지 않았던 것 같다. 그와는 반대로, 대부분 랑그도크에 머물러 있었던 까닭에
그 지역에서 기사단에게 장기적이며 안정된 기지를 만들어 주었다.
성당기사들은 회교와 유대교 문화와 접촉한 데 힘 입어, 전통 로마 가톨릭과는 다른 방대한
사상을 벌써부터 흡수하고 있었다. 예컨대 기사단의 지부단장들은 아랍인 비서를 고용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고, 숱한 기사들이 포로가 되어 아랍어를 배웠으므로, 그 언어에 능통했다.
유대사회 및 경제. 학술계와도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므로 성당기사들은 로마교회
가 일상적으로 대할 수 없는 수많은 사물과 접하였다. 카타리파의 신입회원들이 흘러 들어옴
으로써, 영지주의적 이원론 – 실제로 그때까지 한 번도 접해 본 일이 없다면 – 에 새로이
노출되었던 것이다.
1306년이 되자, 프랑스의 필립 4세 – 필립 단려왕 – 는 자기 영토에서 성당기사단을 제거하려
고 안달했다. 그들은 교만하고 다루기가 힘들었다. 또한 그들은 왕이 규합할 수 있는 병력보다
능률적이며 고도의 훈련을 받은 직업적인 군사력으로, 그 힘과 조직이 훨씬 앞서 있었다.
프랑스 전역에 그들의 세력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고, 이 시기에 이르자, 교황에 대한 그들의
충성이란 명목뿐이었다. 필립에게는 기사단의 통제력이 없었다. 그는 기사단에게 빚을 지고
있었으며, 파리의 반란 폭도를 피하여 성당기사단지부에 비참한 꼴로 피신을 하게 되어,
체면을 크게 손상시킨 적도 있었다.
그는 기사단의 방대한 재산을 탐내었다. 파리 지부에 숨어 있으면서 그는 그들의 재력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성당기사단에 가입을 지망했다가 불손하게 툇자를 맞는 굴욕을
맛보았다. 이와 같은 요인들 – 독립된 성당기사단 국가의 무서운 전망이 뒷문간에 서성대는
것과 더불어 – 만으로도 왕이 행동을 취하기에 충분한 자극제가 되었다. 게다가 이단이 편리한
구실이기도 했다.
먼저 필립은 교황의 협력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이론적으로는 성당기사단이 교황에게
충성과 복종을 맹세한 관계였다. 1303과 1305년 사이에, 프랑스 왕 필립 4세와 그 신하들이
한 교황(보니파티우스 8세)을 납치 살해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며, 또 다른 교황(베네딕투스
11세)은 독살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다가 1305년에 필립은 자기가 미는 후보자
보르도의 대주교를 공석중인 교황의 자리에 선출되도록 했다. 새 교황은 클레멘스 5세라는
칭호를 택했다. 필립의 영향력에 빚진 그인지라, 왕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 요구에 성당기사단을 억압하라는 항목이 마침내 들어왔다.
필립은 작전을 치밀하게 구상했다. 왕이 기사단에 침투시킨 첩자들이 일부 자료를 제공하고,
기사단 니탈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고백이 또한 자료가 되기도 하여, 범죄목록이
작성되었다. 이러한 죄상목록으로 무장하여, 필립은 마침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나치친위대 SS나 게쉬타포의 비밀작전에 말려들 만큼 은밀하게 필립은 전국에 있는 그의
청지기들에게 밀봉된 비밀 지령을 내렸다. 이 명령서는 모든 곳에서 동시에 개봉하고 즉시
시행하게 되어 있었다.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프랑스 내의 모든 성당 기사들은 왕의 심복들이 수색 체포하고,
그들의 지부는 왕이 가압류하며, 물품은 몰수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습공격을 가하겠다는
필립의 목표는 달성되었다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일차적 이익 – 성당기사단의 방대한
재산 – 은 그의 손아귀를 빠져 나가고 말았다. 영영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전설적인
‘성당기사단의 보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실은 필립의 성당기사단에 대한 기습이, 그 자신이나 뒷날 역사가들이 믿듯이 과연 예상하지
못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성당기사들이 어떤 형태의 사전 경고를 받았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상당히 있다. 예를 들어 체포되기 얼마 전에 단장 자크 드 몰래는 기사단의 서적과
기존 규칙집을 많이 가져오게 하여 불태웠다. 이 때 기사단을 물러나는 어느 기사에게 재정
책임자가 대재난이 임박했으므로, 대단히 ‘현명’하다는 말을 했다. 공문이 프랑스내 각 지부에
회람되어, 기사단의 관례와 의식에 대한 정보는 일체 내보내지 말라고 강조했다.
성당기사단이 사전에 경고를 받았건, 그런 낌새를 알아차렸건, 일정한 예방조치를 취했던
것만은 확실했다. 먼저 체포된 기사들은 그렇게 하라는 지시라도 받은 듯이 무기력하게 굴복
했다는 인상을 준다. 프랑스내의 성당기사단에 관한 어느 기록에도 왕의 신하들에게 적극적
으로 저항했다는 흔적이 없다. 둘째 특정한 기사집단 – 기사단의 재정과 관계된 사실상 모든
인원 – 이 조직적으로 탈출했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있다.
그러므로 기사단의 보물이 거의 모든 서류 및 기록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
니라고 하겠다. 일제 검거를 조금 앞두고 파리 지부로부터 야간에 보물을 밀반출했다는 풍문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은 채 끈덕지게 나돌고 있다. 이 풍문에 따르면 마차편으로 보물을
해변으로 실어 냈으며 – 성당기사단의 해군기지인 라 로셀이 아닌가 한다 – 18척의 노예선에
실어 갔는데, 두 번 다시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성당기사단의 선단은
왕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기사단의 선박이 나포되었다는 보도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이 점은
증명된다. 오히려 그 배들은 싣고 가던 적재물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프랑스에서는 체포된 성당기사들을 심문했으며, 고문을 당한 자도 적지 않았다. 기이한 고백을
물어내기도 하고, 그보다 기괴한 죄명을 뒤집어 씌웠다. 나라 안에 음산한 풍문이 돌기 시작
했다. 성당기사들은 바보메라는 마귀를 숭배하며, 비밀 의식에서는 덥석부리 남자의 머리 앞에
엎드리는데, 이 머리가 그들에게 말을 하며, 마력을 준다고 했다. 허락을 받지 않고 이러한
의식을 보는 사람은 영영 자취를 감춘다는 말도 들렸다. 그리고 다른 죄명을 들추기도 했는데,
갓난애 죽이기. 여자의 낙태법 가르치기. 지원자가 유도하는 음란한 키스, 동성행위 등 근거를
대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한데 이들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바쳐온, 그리스도의
군사들에게 뒤집어 씌운 죄명 가운데서도 가장 괴기하고 터무니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은 의식을 통해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배척하며 짓밟고 침을 뱉았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체포된 성당기사들의 운명은 완전히 끝장이 났다. 필립은 그들을 난폭
하고 무자비하게 약탈. 유린했다. 많은 기사들이 화형을 당했고, 그보다 많은 기사들이 투옥
되고 고문을 받았다. 한동안 버티던 교황이 1312년에 양보하여 성당기사단은 결정적인 유무죄
의 선고도 없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필립의 영토 안에서는 그 뒤 2년 동안 재판. 심문과 조사가 계속되었다. 드디어 1314년
3월 단장 자크 드 몰래와 노르망디 지부장 조프롸 드 샤르내가 약한 불에 시름시름 구워져
죽었다. 그들의 처형과 더불어 성당기사단은 표면상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은 끝장이 나지 않았다. 탈출한 기사들, 잡히지 않은 기사와 무죄석방된
기사들의 수를 고려에 넣을 때, 오히려 살아 있지 않았다면 이상한 지경이었다.
필립은 이웃 나라의 군주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기독교권의 어느 곳에서도 성당기사들이
남아 있지 못하도록 씨를 말리려고 했다. 실은 이 점에서는 왕의 열의가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자기 영토 안에서 성당기사단을 제거하려는 거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곳에 있는 성당
기사들을 멸종시키려고 그렇게 열중해야 할 이유가 있었는지 명백하지 않다.
분명히 그 자신도 미덕의 본보기가 아니었다. 2명의 교황을 죽게 한 군주가 신앙을 침해했다고
그처럼 비통하게 여겼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프랑스 밖의 성당기사단이 고스란히 남게
되면 보복을 당할까 필립왕이 두려워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엇이 개입되어
있었던가?
어쨌든 프랑스 국외의 성당기사들을 제거하려던 그의 시도는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가령
필립의 사위인 잉글란드의 에드워드 2세도 처음에는 성당기사단을 옹호하는 편에 섰다. 결국
교황과 프랑스왕 필립의 압력을 받고, 그들의 요구에 영합했으나, 그것도 미지근하게 부분적으
로 했을 뿐이었다. 잉글란드의 대다수 성당기사들은 피해버린 것 같으나, 일부는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절대다수는 가벼운 형 – 경우에 따라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크고 작은
수도원에서 몇 년을 보내는 정도 – 을 받는데 그쳤다. 그들의 토지는 결국 성 요한의 병원
기사단(Knights Hospitaller)에게 넘어갔지만, 프랑스의 형제들이 겪은 악랄한 박해만은 면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성당기사의 제거작업은 훨씬 어려웠다. 이를테면 스코틀란드에서는 당시
잉글란드와 전쟁 중이어서, 그 결과 빚어진 혼란으로 미세한 법적 절차를 집행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성당기사단을 해체한다는 교황의 교서가 스코틀란드에서는 선포되지 않았고
– 따라서 여기서는 성당기사단이 정식으로 해체되지 않았다. 잉글란드의 성당기사들과 나중에
알게 되지만 프랑스의 성당기사들이 스코틀란드에 망명했으며, 상당한 병력이 1314년 베너크
번 전투에서 로버트 브루스의 편에서 싸웠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 그리고 뒷받침할 증거도 있다 – 성당기사단은 그 뒤 4세기 동안 스코틀란드
에서는 통일된 조직을 유지했다. 1688 ~ 91년 전쟁중에 잉글란드의 제임즈 2세가 오린지 공
윌리엄에 의해 퇴위당했다. 스코틀란드에서는 고립상태에 빠진 스튜어트 왕가의 지지자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1689년 킬리크랭키 전투에서는 던디 자작 존 클래버하우스가 싸움터에서
전사했다. 그의 시체를 회수했을 때, 그는 성당기사단의 대삽자장(大十字章) – 얼마 전에 만든
것이 아니라 1307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 을 차고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의 일부였던 로렌느에서는 성당기사들이 공국 대공의 지원을
받았다. 극소수는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석방되었다. 대다수는 그들의 지부장이 구레나룻을
깎으라는 명령에 따랐고, 세속적인 의복을 입고 지방 주민들과 동화되었던 것 같다.
독일 본토에서는 성당기사들이 공공연히 재판관에 맞서 무장봉기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공포를
느낀 재판관들은 그들의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성당기사단이 공식적으로 해체되자, 독일내
의 수많은 성당기사들은 성 요한의 벙원기사단과 튜튼기사단에 피난처를 구했다. 스페인에서도
역시 성당기사들은 박해자들에게 저항했으며, 다른 기사단 안으로 도피했다.
한편 포르투갈에서는 성당기사단은 심문을 거쳐 무죄가 판명되었고, 단순히 이름만 바꾸어
그리스도 기사단이 되었다. 이 명칭 아래 그들은 16세기가 깊도록 제대로 기능을 발휘했으며,
해상활동에 전념했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그리스도 기사단원이었고, 포르투갈 왕자 엥리케
항해왕은 성당기사단의 대사, 즉 단장이었다. 그리스도 기사단의 선박들은 눈에 익은 붉은
파테 십자가를 달고 항해했다. 그리고 크리스토포 콜룸부스의 세 범선이 대서양을 건너 신세계
로 갔을 때 달고 있던 깃발도 검은 십자가였다. 콜룸부스 자신도 과거 그리스도 기사였던
사람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의 장인이 갖고 있던 해도와 일기를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갖가지 방식으로 성당기사들은 1307년 10월 13일의 공격을 견뎌냈다. 그리고 1522년
성당기사단의 프러시아 후손인 튜튼기사단이 세속화하여 로마교황청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상승일로에 있는 반도요, 이단자 마르틴 루터에 그들의 지지를 보냈다. 그들이 해체된 지
2세기 뒤에, 비록 대리자를 통해서이기는 하나 성당기사단은 그들을 배반했던 로마교회에
보복을 가했다.
성당기사단 – 그 미스터리들
이것이 크게 압축해 놓은 성당기사단의 역사요, 지금까지 연구집필가들이 인정하고 제시해 온
내용이며 우리들이 조사과정에 부딪친 자료의 요약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당기사단의 역사
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으며, 그것이 훨씬 잡기 어렵고 도발적이며 추리를 요구하는 사실임을
재빨리 발견했다.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시기에 마저, 신비의 장막이 기사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무당과 마술사, 비밀의 명수와 연금술사들이라고 했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고, 그들이 깨끗하지 못한 세력과 야합하고 있다고 믿었다.
일찍이 1208년 알비 십자군정쟁이 시작할 때, 인노켄티우스 3세가 비기독교적인 행위를 한다
고 성당기사들을 꾸짖었고, 사자(死者)점을 친다고 드러내놓고 말했다. 다른 한편 그들을 아주
열렬하게 찬양한 사람들도 있었다. 12세기 말, 중세의 군중연애시 또는 기사소설의 가장 위대
한 작가 볼프람 폰 에셴바하가 우트르메르를 특별 방문하여 활동중인 성당기사단을 직접 관찰
했다.
그리고 1195년과 1220년 사이에 볼프람이 그의 낭만적 서사시 <파르찌발>을 지었으며, 그 때
성당기사들에게 가장 높은 지위를 부여했다. 볼프람의 시에서 성배, 성배성과 성배가문을
지키던 기사들은 성당기사단이다.
성당기사단이 무너지고 난 뒤에도, 그를 에워싼 신비의 장막은 끈덕지게 남아 있었다. 성당
기사단의 역사에서 최후로 기록된 행위는 기사단 최후의 단장 자크 들 몰래를 1314년 3월에
태워 죽였다는 것이었다. 슬금슬금 타오르는 불에서 나오는 연기가 그의 몸뚱이에서 생명의
숨통을 죄고 있을 동안, 자크 드 몰래는 불길 속에서 저주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그의 박해자들 – 교황 클레멘스와 프랑스왕 필립 – 을 불러 그 해 안에
함께 하나님의 법정에 나가 각기 죄상을 밝히자고 했다. 한 달 안에 교황 클레멘스는 죽었고
갑작스런 이질 때문이었다고 추측이 돌았다. 그 해가 끝날 즈음 필립 역시 죽었는데, 지금까지
그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물론 초자연적인 설명을 구할 필요는 없다.
성당기사들은 독약 사용에 기막힌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적절한 보복을 할 사람들 –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니는 망명 기사들, 성당기사단의 동조자들 또는 박해받은 형제의 친척들
– 이 충분히 있었다. 그렇지만, 단장의 저주가 분명히 성취되자, 성당기사단의 마력에 대한
믿음의 크게 높아졌다. 저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설을 빌리면, 아득한 미래에 이르기
까지 프랑스 왕계(王系)에 죽음의 장막을 드리우려고 했다. 그리하여 성당기사단의 지녔다는
신비적 마력의 메아리가 수세기를 따라 내려오며 울려퍼졌다.
18세기에 이르자, 갖가지 비밀, 준비밀 결사들이 성당기사단을 그들의 선구자요 신비의 입문자
들이라고 찬양하고 있었다. 그 시기의 숱한 프리메이슨, 즉 자유석공조합원들이 성당기사단을
그들의 선행자들이라고 치부했다. 어떤 프리메이슨 ‘의식들’ 또는 ‘관행들’은 성당기사단으로
부터 직접 흘러 나왔다고 주장했으며, 동시에 그들의 옛 비밀을 보전할 자격을 가진 자가
프리메이슨이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들 가운데 일부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것들
– 예를 들어 성당기사단이 스코틀란드에 실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
은 그에 따르는 장식들은 큰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한 가닥 정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789년에 이르자, 성당기사단을 둘러싼 전설들은 가히 신화의 차원으로 확대되었고, 그들의
역사적 현실은 혼미와 공상의 광배로 말미암아 희미해졌다. 그들은 능란한 박수, 개명한 연금
술사, 마술사와 현자들, 상급 프리메이슨과 고도의 신통력을 가진 자들로 보았으며, 당연히
무시무시한 비밀 능력과 지식을 타고난 초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영웅과 순교자들,
그 시대의 반교회 정신의 전위로 간주하기도 했다. 루이 16세에 항거하여 음모하던 다수의
프랑스 프리메이슨들은 자크 드 몰래가 죽어가면서 프랑스 왕가에 내린 저주를 실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왕의 머리가 기요틴 아래로 떨어지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단두대로 뛰어올라가, 왕의 피에 손을 적셔 에워싸고 있던 군중 위에 뿌리며 [자크 드
몰래여, 그대의 원수를 갚았도다!]하고 외쳤다는 보도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성당기사단을 둘러싸고 있는 광배는 지금까지 사그러지지 않았다.
최소한 3개의 현존하는 조직들이 오늘날 스스로 성당기사단이라 칭하고, 1314년 이후의
계보를 갖고 있으머 조직의 헌장도 갖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아직까지 그 정확성을 밝히지
못했다. 어떤 프리메이슨 지부들에서는 ‘성당기사(Templar)’라는 계급의 칭호를 채택하여 써
내려오고 있으며, 아울러 성당기사단 창설 당시부터 있었다는 의식과 명칭을 따르고 있다.
19세기 말이 가까워지면서 ‘신성당기사단’이라는 불길한 조직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설립되어,
그 기장의 하나로 만자 십자장을 사용했다. 신지학의 창시자 H.P.블라바츠키, 인지학의 창시자
루돌프 슈타이너와 같은 인물들이 심원한 ‘지혜전승’이 장미십자회에서 카타리파와 성당기사단
– 그때까지도 고대의 비밀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 을 통해서 흐르고 있다고 했다. 미국
에서는 10대의 소년들이 드 몰래 협회에 가입하고 있는데, 그들이나 지도자들이나 그 이름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잘 모르고 있다. 영국에서는 서양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은밀한 로터리
클럽들이 ‘성당기사’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위엄을 꾸미고, 저명한 인사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위그 드 파엥은 칼로 정복하려던 천국에서 지금 자기가 만들어 낸 대머리에 ‘베불뚝이’ 안경잡
이인 후기 기사들을 씁쓸한 곤혹감을 안고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자기
유산의 지속성과 생명력에 감명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프랑스에서는 이 유산이 유난히 강력하다. 사실 성당기사들은 프랑스에서 당당한 기업이며,
영국의 글래스턴버리, 목초(牧草) 이랑이나 로크네스 괴물과 비슷하다. 파리의 서점에는 성당
기사단의 역사와 소개자료 – 일부는 타당한 근거가 있지만, 일부는 기꺼이 정신이상상태로
뛰어 들어가는 – 가 가득 차 있다. 지난 4반세기 남짓 동안에 성당기사들의 편에 서서 기상
천외한 주장들이 적지 않게 나왔으며, 그 중 일부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만도 아니다. 어떤
필자들은 그들에게 고딕대성당의 건축 공로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큰 몫을 돌렸고- 또는
최소한 그 폭발하는 건축의 에너지와 천재를 유도하는 자극을 준 공로를 인정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필자들은 일찍이 1269년에 성당기사단이 남북아메리카 대륙과 교역의 길을 텄으며
그들의 재산은 대부분 수입한 멕시코 은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성당기사단은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모종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그들은 영지주의자라거나, 이단이고, 회교도의 변절자라는 말도 있다. 또한 그들은 혈통
과 인종과 종교간의 창조적 통일을 추구했으며, 회교. 기독교. 유대교 사상을 융합하려는
체계적 정책을 추구했다고 선언되기도 한다. 그리고 볼프람 폰 에셴바하가 약 8세기 전에
그랬듯이, 성당기사단은 그 정체가 무엇이든간에 성배의 수호자였다는 주장이 거듭되고 있다.
흔히 우스꽝스러운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당기사단과 연관된 미스터리들이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고, 어떤 비밀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들 비밀의 일부는
요즘 우리들이 ‘비교(秘敎, esoterica)라고 보는 것에 관계가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이를테면
성당기사단 지부에 있는 상징적 조각들을 검토해보면, 기사단 위계조직내의 일부 간부들이
점성술. 연금술. 성기하학과 수점술 등에 통달했으며 아울러 천문학 – 12 ~ 13세기에는 점성
술과 뗄 수 없었으며 ‘비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 에도 정통하고 있었음을 비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관심을 크게 자극한 것은 기상천외의 주장도 밀교적인 잔재도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그보다 훨씬 세속적이고 산문적인 무엇 – 공인된 기사단의 역사가 품고 있는
엄청난 모순. 개연성의 부재. 불일치와 드러나는 ‘연막’ – 이었다. 성당기사단이 비교적인 비밀
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컸다. 하지만 그밖에도 무엇이 숨겨져 있었고 - 그것은 그 새대의 종교
및 정치 조류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우리들이 조사를 착수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
서였다.
우리들은 이야기 끝, 다시 말하면 성당기사단의 몰락과 그들에게 겨냥된 범죄내용을 출발점으
로 삼았다. 이 죄목의 진실성 여부를 탐색하고 평가하려는 수많은 저서가 나왔다. 그리고
대다수의 연구가들이 그렇듯, 우리들이 결론의 바탕으로 삼은 증거로 미루어 그들에게는 어떤
근거가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종교재판소의 심문을 받으면서 상당수의 기사들이 ‘바포메
트(Bsphomet)’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 바포메트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서로 다른 수많은
장소에서 지적하고 있으므로 어느 개인이나 한 개 지부가 만들어냈다고 하기는 불가능하다.
아울러 바포메트가 누구 또는 무엇이었으며, 그 또는 그것이 무엇을 대표하고, 어찌하여 그
또는 그것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시사하는 바가 전혀 없다. 바포메트는 우러러 보다,
우상을 대하는 자세와 같았다는 점 만은 밝혀질 듯하다.
어느 경우에는 여러 지부에 있는 홈통주둥이와 같은 귀면조각과 명칭이 연관되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에는 바포메트가 덥석부리 인두의 유령과 이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좀 오래된
역사가들의 주장이 있기는 했으나, 바포메트가 마호메드라는 이름이 잘못 전해진 것은 아니다.
그와는 달리 아랍어 아부피하메트(abufihamet), 또는 무어화된 스페인어 부피히마트(bufihimat)
의 와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이해의 아버지’ 또는 '지혜의 아버지’라는 뜻이며, 아랍어의
‘아버지’는 ‘근원’을 뜻하기도 한다. 이것이 진정한 바포메트의 어원이라면, 아마도 어떤 초자연
적이거나 신성한 원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엇이 바포메트와 그 밖의 다른
초자연 및 신성한 원리와 구별짓게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바포메트가 단순 하나님이나 알라라
고 한다면, 성당기사단이 그를 다시 이름짓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가령 바포메트가
하느님이나 알라가 아니라면, 그는 누구 또는 무엇이었을까?
아무튼, 우리는 어떤 형태의 머리가 들어가는 비밀의식이 있었다는 확고부동한 증거를 찾아냈
다. 그와 같은 머리가 존재한다는 점이야말로 종교재판소 기록을 꿰뚫고 흐르는 중심 테마의
하나였다. 그런데 바포메트와 연관지어 볼 때, 그 머리의 뜻은 불투명하다. 아마도 연금술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연금술의 과정에 ‘카푸트 모르툼(Caput Mortuum)’ 즉 ‘죽은 머리 – 화금
석(化金石)이 침강하기 직전에 일어난다는 니그레도 또는 ‘묵화(墨化)’ – 라는 단계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 머리는 성당기사단의 창설자이며 초대 단장이었던 위그 드
파엥의 것이었다. 그리고 위그의 방패는 황금 바탕에 3개의 검은 머리로 되어 있다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 머리는 또한 유명한 투린의 수의와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것은 1204년에서
1307년 사이에 성당기사단의 손에 있었고, 만일 접었다면 사람의 머리 하나와 비슷하게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서머시트 템플콤의 성당기사단 지부에는 투린 수의에 있는 놀랍도록
흡사한 머리의 복제가 발견되었다. 그와 동시에 최근에 와서는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세례
요한의 잘려진 머리와 그것을 연결시키는 추리가 나왔다.
그리고 어떤 저술가들은 성당기사들이 요한파 또는 만다교 이단 – 예수를 거짓 선지자’로
몰아붙이고 요한을 참된 메시아로 인정했다 – 에 ‘전염되었다’는 암시를 주어왔다. 중동에서
활동하는 과정에, 성당기사들은 요한파와 접촉이 분명히 있었고, 기사단 내에 요한파적인
경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이 기사단 전체에
있었다거나, 공식정책의 차원으로 문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1307년의 일제검거에 뒤이은 심문기간 중에, 머리 하나가 또 다시 다른 두 가지 맥락에서
언급되었다. 종교재판 기록에 따르면, 파리 지부의 몰수품목 가운데 여자 머리 모양의 성골
상자가 발견되었다. 꼭대기에 돌쩌귀뚜껑이 달려 있었고, 기이한 유물이라고 해야 할 물건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아래와 같이 묘사되어 있다.
금박 입힌 은으로 만든 큰 머리가 더없이 아름다우며 여자의 행상을 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머리뼈 2개가 하얀 아마포에 싸여 있었으며, 그 위에 다시 붉은 베로 싸 놓았다. 꼬리표가
붙어 있는데, CAPUT LVHm(정확하지 않음) 이라 씌어 있었다. 안에 있는 뼈들은 작은 편인
여자의 것이었다.
기괴한 유물 – 특히 엄격한 수도원 같은 군사 조직인 성당기사단에 있어서는, 그런데 이 여자
머리를 앞에 놓고 심문을 당하던 한 기사는 그것이 기사단의 의식에 사용되던 덥석부리 남자
머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머리 58m’이라는 뜻을 가진 Caput LVII m은 아직
도 감질나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한데 여기서 ‘m’은 ‘m’이 아니라, 처녀자리(Virgo – 황도대
(黃道帶)의 제 6궁 – 의 점성술 표시인 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머리는 전통적으로 성당기사단과 연관지어 온 또 다른 미스터리에도 다시 등장한다.
여러 가지 변형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인용하기로 한다.
마라클레아라는 훌륭한 여자가 시돈의 영주인 성당기사의 사람을 받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젊을 때 죽었고, 그녀를 묻은 날 밤, 이 간교한 영주가 무덤으로 기어가 그녀의 시체를 파내어
범했다. 그 때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 9개월 뒤에 돌아와서 아들을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는 명령에 따라 지정된 시간에 무덤을 다시 열었으며 유해의 다리 뼈 위에 있는 머리(두개골
과 십자골)를 발견했다. 똑같은 목소리가 ‘그것을 잘 지켜라. 그것이 좋은 것은 모두 주게 되리
라’고 말했으며, 그는 그것을 들고 갔다. 이것이 그의 수호신이 되었고, 그는 마법의 머리를
보이기만 해도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때가 되어 그것은 성당기사단에게 넘어갔다.
이 소름끼치는 설화의 근원을 찾으려면 적어도 12세기 후반에 활동하던 월터 매프까지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월터 매프가, 1세기 가까이 뒤에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다른
필자이건 시체 강간자가 성당기사였다고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07년
에 이르러 그 설화는 성당기사단과 밀착되었다. 종교재판소 기록에 거듭 지적되고 있는데다,
적어도 2명의 기사들이 심문을 받으며 그것을 익히 알고 있노라고 고백했다. 위에서 인용한
바와 비슷한 그 뒤의 기록을 보면, 강간한 자가 스스로 성당기사라고 밝히고 있으며,
프리메이슨단 – 두개골과 십자골을 채택하여, 비석에 표지로 자주 사용했다 – 이 보전해 온
이야기에도 성당기사로 전해지고 있다.
어느 면으로 보면, 그 설화는 무원죄회태(無原罪懷胎),Immaculate Conception)의 괴기한 희화화
하라고 할 수도 있었다. 또 어떻게 보면, 그것은 성년식의 일그러진 상징적 설화, 또는 상징적
인 죽음과 부활이 등장하는 의식일 수도 있었다. 한 연대기 작가는 이 설화에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 이세(Yse) – 이것은 이시스(Isis)에서 유래했으리라 보고 있다 – 를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설화가 바다에 머리를 던져버린 탐무즈나 아도니스의 그것과 더불어 이시스와 연관된 미스
터리를 일깨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머리가 은하수에 던져진 오르페우스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 머리의 마법적 성격이 켈트족의 신화 <마비노지온(Mabinogion)>에 나오는 축복
받은 자 브란의 머리를 되살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숱한 저술가들이 성배의 이교적인 효시로
보고자 했던 것이 브란의 신비로운 큰 잔이다.
‘머리 숭배(cult of the head)’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건, 종교재판소가 그것을 중요시했던
것만은 확실했다. 1308년 8월 12일에 작성한 범죄목록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다.
죄목, 그들은 각 주에 우상을 갖고 있었으니 곧 머리돌이라….
죄목, 그들은 이러한 우상들을 숭배하였다……
죄목, 그들은 그 머리가 그들을 구출할 수 있다 했다.
죄목, 그것이 재물을 만들 수 있다고 했으며……
죄목, 그것이 나무에 꽃을 피게 한다고 했다.
죄목, 그것은 땅으로 하여금 싹이 트게 한다고 했다.
죄목, 그들은 앞서 말한 우상들의 머리마다 작은 끈으로 에워싸거나 대었다가, 그 끈을 내복
위 또는 살갗에 묶고 다녔다.
마지막 항목에 지적되고 있는 끈은 카타리파를 연상시키는데, 카타리파 역시 어떤 종류의
거룩한 끈을 매고 다닌다고 했다. 하지만 이 목록 가운데서 제일 인상적인 대목은 그 머리의
능력이 부를 낳고 꽃을 피우며 땅을 비옥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질은 기사소설에서
성배의 기능이라고 한 성질과 놀랍게도 일치하고 있다.
성당기사들에게 겨냥한 모든 죄목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독신(瀆神)과 이단 – 십자가를
부정하고 짓밟으며 침을 뱉았다는 – 의 그것이었다. 소송의 대상이 된 이러한 의식의 목표 –
말을 바꾸어 성당기사단이 실제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 – 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했었을까? 혹은 단순히 십자가의 처형을 부정했을까?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부정. 거부했건, 그 대신 찬양했던 게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그 누구도 이러한
질문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지 못했으나, 어떤 형태의 거부행위가 있었고, 그것이 성당기사단
과는 뗄 수 없는 원리의 일부였던 것 같다.
예컨대 한 기사가 성당기사단에 입단할 때 [너는 잘못 믿고 있다. 그 (그리스도)는 거짓 선지자
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지 말라’ 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었다. 다른 성당기사는 [우트르메트에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이고 너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지 말라] 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사도 비슷하게 그리스도는 거짓 선지자이니 믿지 말고 ‘보다 높은 하나님’만
을 믿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서 그 앞에 십자가를 내보이며 [이것은 너무
어리니, 여기에 큰 믿음을 두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한 기록은 빈번할 뿐더러 일관성이 있어서, 그 죄명의 신빙성을 높여준다. 게다가 그 기록
들은 비교적 온화한 어조인데, 만약 종교재판소가 증거를 조작하려 했다면, 그보다 훨씬 극적
이고, 중죄이며 저주스러운 내용을 꾸며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 대한 성당기사
단의 태도는 가톨릭의 정통사상과 일치하지 않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성당기사단의
태도가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성당기사단이 했다는 의식 – 십자가
를 짓밟고 침을 뱉는 – 이 있었다는 풍문은 1307년 이전 줄잡아 반세기 동안 떠돌고 있었던
증거가 있다. 그 맥락은 혼란스럽지만, 1249년에 일어난 제 6차 십자군과 연관지어 언급되고
있다.
성당기사단 – 숨겨진 측면
성당기사단의 종말에 곤혹스러운 수수께끼들이 잔뜩 실려 있다고는 하지만, 기사단의 창설과
초기 역사는 그보다 더 심했던 것 같다. 우리들은 이내 숱한 모순과 터무니 없는 주장에 시달
렸다. 9명의 기사들, 9명의 ‘가난한’ 기사들이 난데없이 등장했는데, 성지에 들끓고 있던 다른
모든 십자군들을 제치고, 즉각 왕궁 한 모퉁이가 그들에게 넘겨지다니! 9명의 ‘가난한’ 기사들
– 그들의 대열에 신입단원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그들만으로 팔레스타인의 공로를
보호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 – 심지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궁정의 공식 사관 퓔크 드 샤르트르마저도 일체 거론하고 있지 않다니
이를테면 그들의 활동, 왕궁의 일각에 입주한 사실이 어떻게 퓔크의 주목을 끌지 못했을까?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관은 전혀 말이 없다.
(지도) 예루살렘 – 12세기 중엽의 성전과 시온산 부근
사실 족히 반세기가 지난 뒤 귀욤 드 티르가 나올 때까지는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그 기사들이 찬양할 만한 공적인 봉사를 하고 있지 않았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면, 궁정사관마저 모르고 있던 어떤 비밀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궁정사관에게 재갈을 물렸다는 것일까? 후자가 오히려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이 될
법하다. 왜냐하면 오래지 않아 가장 화려한 두 사람의 귀족, 즉 그의 존재를 모르고 지날 수
없는 인재들이 그 기사들과 합세하기 때문이다.
귀욤 드 티르에 따르면, 성당기사단은 1118년에 창설되고, 원래 9명의 기사들만이 있었으며
9년 동안 일체 신입단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앙주 백작 – 조프리 플랑타즈네의
아버지 – 이 창설 추정 연도보다 불과 2년 뒤인 1120년에 성당기사단에 가입했다는 기록이
분명히 나와 있다. 그리고 1124년, 유럽의 가장 부유한 영주 샹파뉴 백작이 마찬가지로 입단
했다.
만약 귀욤 드 티르가 옳다면, 1127년까지는 새 단원이 없어야 했다. 하지만 사실은 1126년까지
성당기사단은 새 단원 4명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9년 동안에 새 단원을 가입시키지 않았다는
귀욤의 주장은 잘못인가? 혹은 그의 주장은 옳지만, 성당기사단 창설의 시기가 잘못 되었는가?
가령 앙주 백작이 1120년에 성당기사가 되었고, 성당기사단은 청설 후 9년 동안 새 단원을 가
입시키지 않았다면, 그 창설년도는 1118년이 아니라 줄잡아 1111년 또는 1112년이어야 한다.
이러한 결론은 뒷받침할 매우 설득력 있는 증거가 있다. 1114년에 샹파뉴 백작은 성지에
갈 여행 채비를 하고 있었다. 출발 직전에 그는 샤르트르 주교의 서신을 한 통 받았다.
어느 대목에서 주교는 이렇게 지적했다. [백작께서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에 ‘그리스도의 민병
(la malice du Christ)’에 가담하기로 서약했으며, 이 선교 병사조직에 등록을 하시기로 했다……
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민병’이란 성당기사들이 원래 알려진 이름이며, 성 베르나
르가 그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주교가 보낸 편지의 문맥으로 보아, 이 명칭이 그 밖의 다른
조직에 붙여졌을 가능성은 없다. 가령 샹파뉴 백작이 심자군에 가담하기로 했다고 간단히 풀이
할 수는 없다. 주교가 편지 가운데서 그의 결정에 뒤따른 순결서약을 들먹이고 있으니까 말이
다. 그러한 서약이란 보통 십자군에게는 요구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을 터이다.
그러니까 샤르트르 주교의 서신으로 미루어, 성당기사단은 이미 존재했었고, 또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날짜보다 4년 앞선 시가, 빠르게는 1114년에 계획이 섰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일찍이 1114년에 샹파뉴 백작이 벌써 기사단에 가입할 의사가 있었으며, 결국 10년
뒤에 실천했다고 하겠다. 이 편지를 주목했던 어느 역사가는 주교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
고 하는 기이한 결론을 끌어냈다.
문제의 역사가는 주교가 성당기사단을 거론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성당기사단은 4년 뒤인
1118년까지는 창설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주교는 자기가 기원 몇
년에 편지를 쓰고 있었는지 몰랐을까? 한데 그 주교는 111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1114년에 어떻게 존재하지도 않은 것을 ‘잘못’ 거론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오직
한 가지 대답이 가능하며 그것도 매우 분명한 대답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주교가 아니라
귀욤 드 티르와 그를 탄핵 불가능한 권위로 떠받드는 그 이후의 모든 역사가들이다.
성당기사단의 창설 시기를 그보다 앞질러 설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의심스럽게 보아야 할 까닭
이 없다. 한데 결정적으로 의심스러운 다른 환경과 신기하게도 일치되는 현상이 있다. 최소한
9명의 창설기사들 가운데 3명 – 위그 드 파엥을 포함하여 – 이 인근지역 출신이었고 가족의
유대를 맺고 전부터 서로 알고 있었으며, 같은 영주의 가신들이었던 것 같다. 이 영주가
샹파뉴 백작이었으며, 샤르트르 주교가 1114년에 편지를 보낸 수신인이었다. 그 샹파뉴 백작이
1124년에 성당기사가 되어 그의 가신에게 복종을 선서했다는 것이다! 1115년에 샹파뉴 백작은
성당기사단의 후원자 성 베르나르가 유명한 클레르보 수도원을 세우게 된 땅을 헌납했다.
그리고 9명의 창설 기사들 가운데 하나인 앙드레 드 몽바르는 성 베르나르의 숙부였다.
더구나 트롸예의 샹파뉴 백작의 궁전에서는 1070년 이래로 히브리 신비철학과 비교 연구학교
가 번창했었다. 1128년 트롸예 공의회에서 성당기사단은 공식적으로 교회에 통합되었다. 그 뒤
2세기 동안 트롸예는 성당기사단의 전략중심지였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도시 인근에 ‘성당
기사단의 숲’이라는 숲이 우거진 땅이 있다. 게다가 가장 이른 성배소설의 하나 – 가장 오래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를 크레티앙 드 트롸예가 지었는데, 바로 이곳 샹파뉴 백작의 궁전인
트롸예에서 나왔다.
이 무성한 자료 중에서, 우리들은 희미한 연결의 거미줄 – 단순한 우연의 일치 이상의 것으로
보이는 패턴 – 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한 패턴이 존재한다면, 성당기사단은 비밀활동에 가담
했다는 우리들의 의혹을 뒷받침하게 된다. 그렇기는 하나, 우리들의 추리를 가능케 하는 한
가지 근거는 기사들의 주거라는 특수한 장소 – 까닭 모르게 그들에게 넘겨준 성전 언덕의
왕궁의 한 구석 – 이었다. 기원 70년에 그 자리에 서 있던 성전은 티투스가 지휘하던 로마군대
에 약탈을 당했다. 그 보물은 빼앗겨 로마로 실려 갔으며, 다시 빼앗겨 피레네 산맥으로
옮겨졌으리라 짐작된다.
한데 성전에 그 밖에도 다른 것 – 로마군사가 노략질해 간 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밀듯 쳐들어오는 로마군대 앞에서 성전의 제사장들은 약탈자들이 예상하
고 있는 전리품은 남겨 놓았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 밖에 무엇이 있었다면 가까운
어느 곳에다 숨겨 두었을 것이다. 가령 성전 밑에.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 가운데에는, ‘구리 두루마리’로 알려진 문서가 있다. 1955~6년
에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판독된 이 두루마리는 다량의 금괴, 성기(聖器), 그 밖에 명시되지
않은 자료와 밝혀지지 않은 ‘보물’이 있었다고 똑똑히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는 성전 바로 밑에
24개의 다른 보고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12세기 중엽에, 성지 순례를 간 요한 폰 뷜즈부르크가 이른바 ‘솔로몬의 마구간’을 찾은 기록을
남겼다. 성전 바로 아래 위치하고 있는 이 마굿간은 아직도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요한이
남긴 글을 보면, 이 마굿간은 2천 마리의 말을 들일 만큼 컸다. 그리고 성당기사단이 말을 둔
곳이 바로 이 마굿간이었다. 그 밖에도 최소한 다른 한 역사가의 기록에 따르면, 성당기사단들
은 일찍이 1124년, 그들이 오직 9명 뿐이라고 생각되던 때부터 말을 이 마굿간에 넣어 두었다.
그렇다면 갓 태어난 이 기사단이 창설 직후부터 성전 밑을 발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와 같은 발굴작업으로 미루어 기사들은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었다는 암시를 받게
된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에 파견되었고, 무엇을 찾으라는 명백한 위임을 받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만일 이 가정이 정당하다면, 여러 가지 비상식적인 현상을 풀이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궁전 안에 그들을 기거하게 했으며, 사관이 일체 침묵을 지켰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다면 도대체 누가 그들을 보냈을까?
1104년에 샹파뉴 백작은 어느 고위 귀족들과 은밀히 만났는데, 최소한 그 중 1명은 갓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인사들 중에는 어떤 가문 - 브리엔느, 죙빌과 쇼몽 - 의 대표들이 참석했고,
뒤에 안 일이지만 이들은 우리 이야기 속에서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 자리에
는 성당기사단의 창설단원이며 성 베르나르의 숙부인 영주 앙드레 드 몽바르가 참석했다.
이 회의 직후에 샹파뉴 백작은 몸소 팔레스타인으로 출발했고 4년 동안 그 곳에 있다가 1108
년에 돌아왔다. 1114년에 그는 제 2차 팔레스타인 여행을 하며, '그리스도의 민병'에 가담하려
다가 마음을 바꾸어 1년 뒤 유럽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시토 교단에 넓은 땅을
기증했는데, 이 교단의 저명한 대변인이 성 베르나르였다. 이 땅에다 성 베르나르는 클레르보
대수도원을 세우고, 거기에 자기 저택을 마련하고 시토 교단을 굳게 다졌다.
1112년 이전에 시토 교단은 파산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다가 성 베르나르의 영도하에
그들은 눈부신 변화를 이룩했다. 그 뒤 불과 몇 년 사이에 6개의 수도원이 건립되었다. 1153년
에 이르러, 300여개의 수도원이 솟아났고, 그 중 69개는 성 베르나르가 직접 창설했다.
이 경이적인 성장이 바로 성당기사단의 그것과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후자는 같은 기간에
같은 방법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성당기사단 공동창설자의 한 사람이
성 베르나르의 숙부 앙드레 드 몽바르였다.
이 착잡한 사태의 연속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1104년에 샹파뉴 백작은 어떤 귀족들을
만났으며, 그 중 한 사람은 안드레 드 몽바르와 연계가 있었다. 그 직후 샹파뉴 백작은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1112년 앙드레 드 몽바르의 조카 성 베르나르가 시토 교단에 가담했다.
그리고 1114년에 샹파뉴 백작은 성지에 제 2차 여행을 떠났으며, 성당기사단에 가입할 의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성당기사단은 그 자신의 가신과 앙드레 드 몽바르가 공동으로 창설했으
며, 샤르트르 주교의 편지에 이미 존재했거나 설립 중이라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었다.
1115년에 샹파뉴 백작은 1년이 채 안되어 유럽에 되돌아 왔으며 클레르보 대수도원을 지을
땅을 기증했는데, 이 수도원의 원장은 앙드레 드 몽바르의 조카였다. 그 뒤 몇 년 사이에,
시토교단과 성당기사단 - 성 베르나르의 교단이며, 앙드레 드 몽바르의 교단인 - 이 다같이
어마어마하게 부유해졌으며, 경이로운 성장을 자랑했다.
이러한 사태의 연속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우리들은 그와 같이 착잡한 거미줄을 밑받침하고
지배하는 어떤 패턴이 있다는 확신을 점차 굳히게 되었다. 그것은 임의롭거나 전적으로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다. 그와는 달리 어떤 복잡하고 야심적인 통합설계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상세한 내용은 역사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이 치밀한 내용을 재구성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임시적인 가설 - 말하자면 알지 못하는 사실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나리오'
- 을 개발했다.
예루살렘에서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무어 -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중 일부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만한, 지극히 의미심장한 무엇을 발견했다는 가정을 세웠다. 나아가서 이 발견에
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방대한 재산이 될 수 있는 무엇 - 그와 동시에 비밀을 지켜야 할
그 밖의 무엇, 극소수의 고위 영주들에게만 공개할 수 있는 무엇 - 이 들어 있다고 가정해
보았다. 끝으로 이 발견의 내용을 1104년의 회의석상에서 보고하고 토의했으리라는 가설을
내 놓았다.
그 직후에 샹파뉴 백작은 몸소 성지로 떠났는데, 들은 바를 직접 확인하고 어떤 행동 - 예컨대
뒷날 성당기사단을 이루게 되는 기초 - 을 실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 이전이
아니라면, 1114년에 성당기사단은 샹파뉴 백작이 중대한 역할 - 아마도 지도정신과 재정적
후원자가 되어 - 을 하는 가운데 창설되었다. 1115년이 되자, 벌써 돈이 유럽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시토교단의 금고에 들어왔다. 이 교단은 성 베르나릉의 지도하에 새로이 강력한
지위에 올라 갓 태어난 성당기사단을 뒷받침하고 그 신뢰도를 높였다.
베르나르 휘하에서 시토교단은 유럽에서 높은 정신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위그 드 파엥과
앙드레 드 몽바르의 지도하에 성당기사단은 성지에서 군사. 행정적으로 지위를 급상시켜,
그 위력은 재빨리 유럽에 전파되었다. 이 두 교단의 성장 등 뒤에는 숙부와 조카의 어렴풋한
존재가 우뚝 솟아 있었고, 그와 동시에 샹파뉴 백작의 재산. 영향력과 후원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이 중대한 고리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역사의 표면을 꿰뚫고 솟아오른 표적과
같으며, 정교하면서도 숨겨진 설계의 희미한 지형을 가리켜 주고 있다.
그와 같은 설계가 실제로 있었다면, 이 세 사람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그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들과 정교한 조직의 협력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조직이야말로 핵심적인 요소가 아닐까.
우리들의 가설이 정확하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교단 - 이미 알려져 문서화 되어 있는 시토
교단과 성당기사단 배후에 있는 제 3의 비밀교단 - 을 전제로 해야 한다. 제 3의 교단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나타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편, 우리들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가설적인 '발견' - 우리들이 시나리오의 추론적인 바탕으
로 삼은 - 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로 해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성당기사단이 성 베르나르와
샹파뉴 백작과 더불어 몰래 알고 있었던 것이란? 성당기사단은 그들의 역사가 끝났을 때에도
그 보물의 행방과 내용을 비밀에 붙이고 있었다. 그 문서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문제의
보물이 단순히 경제적인 것 - 가령 금괴 - 라고 한다면, 모든 기록, 모든 규칙, 모든 문서고를
파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성당기사단은 다른 무엇을 보관하고 있었으며,
너무 귀중하기 때문에 고문을 해서도 그들의 입 밖으로 끌어내지 못한 무엇이었다는
함축을 찾게 된다. 재물만으로는 그처럼 절대적이고 통일된 비밀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다른 문제 - 가령 성당기사단의 예수에 대한 태도 - 와 반드시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1307년 10월 13일, 프랑스 국내의 모든 성당기사들은 필립 단려왕의 하수인들에게 체포되었
다. 하지만 이 기록이 꼭 맞다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성당기사단 1개 지부는 왕이 쳐놓은
그물을 다치지 않고 빠져나갔다. 렌느 르 샤토 이웃에 있는 베쥐 지부였다. 어떻게 탈출했을
까? 이 물음에 대답하고자, 우리들은 베쥐 일대의 성당기사단 활동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활동은 제법 광범했었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6개 남짓한 지부가 있었고
그 밖에도 작은 집단들이 있었는데, 담당지역은 약 20평방 마일이었다.
1153년에 이 지방의 귀족 - 카타리파에 동조하던 - 이 성당기사단의 제 4대 단장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로, 그의 조상 집이 베쥐와 렌느 르 샤토에서 다같이
몇 마일 떨어진 산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1153년에서 1170년까지 성당기사단을 이끌어
갔던 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는 성당기사단의 단장들 가운데서도 가장 의미심장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가 단장에 취임하기 전까지는, 성당기사단의 위계조직과 행정구조는
좋게 보아도 흐릿했다. 성당기사단을 극도로 능률적이며 잘 조직되고 탁월한 규율을 갖춘 위계
체제로 전환시킨 인물은 베르트랑이었다. 또한 고위 외교와 국제정치에 개입하게 한 장본인도
베르트랑이었다. 그들에게 유럽 - 특히 프랑스에다 중대한 이익권을 설정한 주인공도 베르트랑
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증거에 의하면 베르트랑의 스승 - 일부 역사가들은 베르트
랑 직전의 단장을 그의 스승이라고 한다 - 은 앙드레 드 몽바르였다.
성당기사단이 결성된 지 몇 년 이내에 베르트랑이 여기 가담했고 뿐만 아니라, 이 단체에 렌느
르 샤토와 베쥐 부근에 있는 토지를 헌납했다. 그리고 1156년에 베르트랑이 단장으로 있는
가운데 성당기사단은 일단의 독일 광부들을 끌어들였다고 전한다. 이들 광부는 엄격하여 가히
군대라고 할 규율을 지켜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 지방주민들과 사귀지 못하
게 했고, 그 주변 주거지역과는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특별한 사법기관 '독일인 사법부(la
Uudicature des Allemands)'가 세워져, 그들에 관계되는 법률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광부들의
작업이란 블랑슈포르의 산비탈에서 금광 - 약 1000년 전에 로마인들이 바닥을 내버린 - 을
일구는 것이라고 했다.
17세기에 기사들에게, 그 지역의 광물자원 보존상태를 조사하여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작업을 위탁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기사 세자르 다르콩이 자기가 발견한 폐허, 독일
광부들의 활동 흔적을 검토했다. 그의 조사를 바탕으로 독일 광부들은 광물채굴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얼 했다는 말인가? 세자르 다르콩은
확실히 무엇이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제련을 했을 수도 있고, 무엇을 녹여 내렸을지도
모르며, 금속으로 무엇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고, 어떤 땅굴을 파내어 일종의 저장고를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 무엇이든, 줄잡아 12세기 중엽 이후 렌느 르 샤토 인근에는
성당기사단이 있었다. 1285년이 되자, 베쥐에서 몇 마일 떨어진 캉파뉴 쉴 오드에 중요한
지부 하나가 생겼다. 그런데 13세기 말에 가까이 오면서, 베쥐와 렌느 르 샤토의 영주
피에르 드 봐쟁이 독자적으로 성당기사단의 분견대, 아라공주의 루시용에서 온 특별 파견단을
이 지역에 맞아들였다. 이 새로 온 파견단이 베쥐 산꼭대기에 자리를 잡고 감시초소와
작은 성당을 세웠다.
겉보기에는 루시용 기사단이 이 지역의 안전을 유지하고 이 골짜기를 지나 스페인의
산티아고 드 콤파스텔라에 이르는 순례자의 길을 지키려는 듯했다. 그러나 왜 특별히
이 기사들이 추가로 와야 했던가는 밝혀지지 않았다. 먼저 이들은 숫자가 아주 많을 수가
없었으므로, 있든 말든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둘째 그 부근에는 이미 성당기사들이 있었다.
끝으로 피에르 드 봐쟁은 이미 독자적인 군대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 곳에 있던 성당기사들과
합쳐서 주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루시용 기사단원들이 베쥐로 왔는가?
지방의 전승을 빌리면 그들은 정찰을 하러 왔었다. 어떤 보물을 반출 또는 매장 또는 경비하기
위해서.
그들의 비밀 임무가 무엇이건, 그들이 일종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프랑스
내의 모든 성당기사단 가운데서, 그들만은 1307년 10월 13일 필립 단려왕의 신하들에게
곤욕을 치르지 않았다. 그 운명의 날에 베쥐에 주둔한 성당기사단 지휘자는 귀족 드 고트였다.
그리고 보르도 대주교-필립왕의 변전무쌍한 졸(卒)-은 베르트랑 드 고트, 뒷날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된 인물이었다. 더구나 새 교황의 어머니는 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와 한 가문인
이다 드 블랑슈포르였다. 그러면 교황은 자기 가문에 위탁된 비밀 - 렌느 르 샤토의 사제이며
마리 드 블랑슈포르의 고해사인 앙토완느 신부가 소니에르에 의해 발견된 양피지 문서를 작성
했던 18세기까지 블랑슈포르 가문에 남아 있던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사정이 이러했다면, 교황은 베쥐의 성당기사단을 지휘하던 자기 친척에게 면책 특권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렌느 르 샤토 부근에 있던 성당기사단의 역사는 성당기사단의 전체 역사에 못지않게
혼란스러운 수수께끼가 가득 차 있는 게 분명하다. 거기에는 숱한 요인들 -
예컨대 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의 역할 - 이 있으며, 이것들이 일반적인 수수께끼와
보다 국부적인 수수께끼 사이를 가름하는 고리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 우리들은 어마어마한 일련의 우연 또는 우연의 일치 - 그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사실상 우연의 일치랄 수 없는 - 에 부딪쳤다.
실상 우리들은 계산된 패턴을 다루고 있었던가? 그렇다면 분명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러한
패턴이란 저절로 생겨날 리가 없을 터이니까, 누가 그것을 설계했느냐? 우리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모든 증거가 한결같이 정교한 계획과 치밀한 조직을 말해주고 있었으며,
우리는 점차적으로 특수한 개인의 집단이 있을 것이고, 아마도 배후에서 끈덕지게 활동하는
일종의 교단이 있지 않을까하는 추리를 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그러한 교단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저절로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밀문서들
제 3교단 - 성당기사단과 시토교단의 배후에 있는 교단 - 이 밝혀져서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너무 신빙성이 없고, 너무 막연하고
불투명한 출처에서 나왔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출처의 정확성을 확인할 때까지 우리들은
그 주장을 믿을 수 없었다.
1956년 일련의 저서. 기사. 팜플렛과 그 밖의 문서들, 베랑제르 소니에르와 렌느 르 샤토의
수수께끼를 둘러 싼 자료가 프랑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자료는 꾸준히 확산되어, 지금은
방대한 양에 이르고 있다. 이제 이러한 사업이 당당한 '기업' 또는 '산업'의 바탕을 이룰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작하고 배포하는 데 드는 노력과 자원과 더불어 그 양만으로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으나 굉장한 의미를 지닌 무엇을 증거한다는 암시를 받게 되었다.
우리들처럼 독자적으로 연구하는 수많은 인간의 구미를 돋우고, 이미 손에 들어온 방대한
자료에 자료를 더하게 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 원자료는 단 하나 특수한
출처에서 나왔던 것 같았다. 누군가가 렌느 르 샤토를 '선전하고', 그 이야기에 대중의 관심을
끌며, 공개하고 조사를 부추기는 데서 기득이권을 얻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 기득이권이란 경제적인 성질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오히려 그보다는 선전 - 무엇인가에 신뢰를 굳히는 선전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선전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 누구든간에, 그들은 스스로 그늘에 숨어 있을 만큼
신중하면서도 일정한 문제들에 조명의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었다.
1956년 이후, 상관되는 자료를 대량으로 체계적이고도 고의적으로 조금씩 한 조각 한 조각
'새게'했다. 이러한 단편들의 대다수는 암시적으로나 명시적으로 어떤 '특권적' 또는 '내부'의
소식통으로부터 나오게 되어 있었다. 그 대부분이 추가 정보를 담고 있어서, 전에 알려진 것을
보완하고, 조각 전체를 꿰어 맞추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꿰어맞추기 수수께끼의
함축 또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정보의 작은 조각이 나올 때마다,
미스터리를 씻어내기보다는 오히려 미스터리를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유혹적인 인유(引喩), 도발적인 암시, 시사적인 전후대조와 연결의 그물이 계속
확대되어 왔다. 지금 우리 손에 들어온 혼란스러운 자료를 앞에 놓고, 독자들은 코 앞에
끊임없이 당근을 댕그렁 매달아 놓고 재치있고 교묘하게 이 결론 저 결론으로 끌려다니며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끊임없이 비밀 -
거대하고 충격적인 비밀 - 이 도사리고 있다는 낌새가 가는 곳마다 고개를 든다.
1956년 이후에 배포된 자료는 여러 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중 일부는 대중적인 저서,
심지어 베스트셀러에 다소 센세이셔널하게, 그리고 감질나게 비밀을 암시하면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제라르 드 세드는 외관상 대단히 다양한 소재 - 카타리파, 성당기사단,
메로빙 왕조, 장미십자가, 소니에르와 렌느 르 샤토 등을 다룬 일련의 저서를 내놓았다.
이들 저서에서 드 세드는 때로 교활하고, 수줍어하며, 고의적으로 미스터리의 냄새를 풍기고,
요염하게 살짝 피하기도 한다. 그의 어조는 항상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넌지시 비치고 있다. - 그가 아는 체하는 것보다는 밑천이 짧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장치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책들에는 개별적인 주제들을 서로 이어주기에 충분한
자료가 있다. 그 외에 드 세드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자기가 다루고 있는 다양한 소재들이
서로 중복되고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반면에 우리들은 드 세드의 저서가 어느 소식통이 제공하는 정보에 크게 의존하고 있지
않느냐 - 그리고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드 세드 자신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을 금할 수 없었다. 우연히 우리들도 이 정보제공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1871년 우리들이 렌느 르 샤토의 제 1차 BBC 필름을 착수했을 때였다. 우리들은 드 세드의
저서를 낸 파리의 출판사에 어떤 사진자료를 달라고 편지를 썼다. 우리들이 요구한 사진은
그에 따라 우리들에게 우송되어 왔다. 그 사진의 뒷쪽에는 빠짐없이 '플랄타르(Plantard)'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당시 그 이름은 우리에게 아무런 뜻도 없었다. 그런데 드 세드의 저서
가운데 한 권의 부록에 피에르 플랑타르라는 사람과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피에르 플랑타르가 드 세드의 어느 저서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결국 피에르 플랑타르가 우리들의 조사과정에 지배적인 인물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1956년 이후에 뿌린 정보는 반드시 드 세드의 저서와 같이 접근하기 쉽고 대중적인 형태로
나오지는 않았다. 일부는 무게 있고, 위압적이며 현학적이기까지 한 저서, 드 세드의 저널리즘
적인 접근 방법과는 정반대되는 책에 나오기도 했다. 그러한 실례가 카르카손느 시립도서관의
관장을 지낸 바 있는 르네 데카데일라의 저서다.
데카데일라의 책은 전혀 선정적인 구석이 없고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이다. 렌느 르
샤토와 그 주변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여, 미세한 사회. 경제적 현상 - 이를테면 출생. 사망.
결혼. 재정. 세금과 공공사업 등 1730 ~1820년의 자료들 -을 방대하게 수집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드 세드의 대량 판매용 서적과 그렇게 다를 수가 없으리만큼 철저하게
대조적이었다. 데카데일라는 어디선가 드 세드의 저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개인이 출판한 것들을 포함하여 단행본으로 나온 것 이외에도, 수많은 신문과 잡지 기사들이
있다. 이 미스터리의 어느 측면에 정통하다고 주장하는 여러 사람들과의 인터뷰에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정보는 대체로 '책의' 형태로 나왔다. 그 대부분은 다른 곳 -
일반용이 아닌 문서와 팜플렛 - 에 발표되었다. 이러한 문서와 소책자들은 그 상당수가
한정판, 비매본으로 나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었다. 그들은 매우 값싸게 제작했던
것 같은 외관을 하고 있다. 어떤 것은 타자로 쳤거나 복사나 등사를 한 것에 지나진 않는다.
시장에 나온 저서들보다는 오히려, 이같은 자료가 똑같은 출처에서 나온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소니에르. 렌느 르 샤토. 푸생. 메로빙 왕조와 기타 주제에 연관되는 암시적인 방주(傍註)
와 각주를 통해서, 자료 하나하나가 서로 보완하고 부연하며, 확인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하루살이 자료들은 대부분 저자가 밝혀지지 않고 빤히 들여다뵈는, 심지어 '깜찍한'
익명 - 예컨대 마들렌느 블랑카살, 니콜라 보세앙, 쟝 들로드와 앙토완느 레르미트 - 아래
나왔다. 물론 '마들렌느'는 마리 마들렌느, 즉 막달라 마리아를 가리키며, 렌느 르 샤토는
그녀에게 헌당했었고, 소니에르가 그의 탑, 막달라탑을 그네에게 바쳤던 것이다.
'블랑카살'은 렌느 레 뱅 마을 부근에서 합치는 두 개의 작은 강물 이름 - 블랑크와 살에서
나왔다. '보세앙'은 성당기사단의 공식 전투구호요 전기(戰旗)인 '보제앙'의 변형이다. '쟝 들로드
'는 렌느 르 샤토가 자리잡고 있는 구역인 '쟝 드 로드'이다. 그리고 '앙토완느 레르미트'는
그 조상(彫像)이 렌느 르 샤토의 성당을 장식하고 있으며, 그의 축일이 1월 17일 - 마리 드
블랑슈포르의 비석에 있는 날짜, 그리고 소니에르가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일으킨 바로
그 날짜 - 인 성자이다.
마들렌느 블랑카살이 썼다는 책은 <메로빙가의 후손들과 라제의 비지고트들의 수수께끼
(Les Descendants merovingiens et l'enigme du Razes wisigoth)>이며, 라제( Razes)는
소니에르가 살던 이 고장의 옛이름이다. 그 속표지에 따르면, 이 저서는 원래 독일어로 발간
되었으나 발터 셀스 나제르 - 렌느 레 뱅의 성당을 바친 성자 셀스와 나제르에서 꾸며낸 익명
- 가 프랑스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그리고 속표지에 따르면 이 저서의 출판인은 스위스의
프리메이슨 최고지부인 그랑드 로지 알피나 - 영국의 그랜드 로지나 프랑스의 그랑 오리앙과
같다 - 였다.
그런데 현대의 프리메이슨 지부가 이름없는 19세기 프랑스 신부와 1500년 전 그의 교구
역사를 둘러싼 미스터리에 왜 그와 같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 일체 밝히지 않고 있다.
우리 동료이며 독자적인 연구를 하던 한 사람이 알피나의 간부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그 저서를 출판했다거나 그것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그런데 그 조사자는 알피나지부의 책꽂이에 그 책이 있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뒤이어 알피나의 간기(刊記)기 다른 두 권의 소책자에도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적(私的)으로 발견하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문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류를 모아 편찬한 <비밀문서 (Dossiers secrets)>이다. 카탈로그 번호 4'1m 249인 이 자료집
은 현재 마이크로필름 카트로 정리해 두었다. 그러나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은 얇고 특징이
없는 책으로, 뻣뻣한 서류철과 같은 표지에 외관상 연관이 없는 항목 - 신문조각, 판지에 붙인
편지들, 팜플렛, 수많은 계통수(系統樹)와 다른 저서에서 발췌한 기이한 책장들 - 을 헐렁하게
모아 놓은 것이었다. 정기적으로 그 낱장의 일부를 제거했다. 또 다른 때에는 새로 몇 페이지
가 끼어 있기도 했다. 어떤 페이지에는 때때로 잘다란 글씨로 자료를 추가하기도 하고 수정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날짜가 훨씬 지나면, 이런 페이지들은 전에 추가했던 모든 자료가
종합 인쇄된 새 페이지로 대체되곤 했다.
이 <비밀문서>의 대부분은 계통수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앙리 로비노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앙리 로비노는 속표지에 그 이름이 나온다. 이 서류철에 추가된 두 가지 항목을 보면
앙리 로비노 역시 익명이며 - 파리의 생 쉴피스 바깥에 있는 로비노 거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계통수는 사실 오스트리아 역사가이며, 의도적으로 스위스에서 살다가 1966년에
죽은 고물수집가 레오 쉬들로프라는 사람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우리들은 레오 쉬들로프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게 되었다.
1978년에 우리들은 간신히 레오 쉬들로프의 딸을 찾아냈는데, 그녀는 영국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그녀의 아버지는 실제로 오스트리아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학자(譜學者),
역사가나 고물수집가가 아니라 세밀화의 전문가이며 중개상인이고, 그에 관한 책도 2권 썼다.
1948년 그는 런던에 정착했으며, 주소를 런던에 둔 채 1966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해와 장소는 <비밀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쉬들로프의 딸은 그녀의 아버지가 보학, 메로빙 왕조나 프랑스 남부의 기이한 사태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격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이 그랬다고 믿고
있노라고 말을 이었다. 가령 1960년대에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정체를 밝히지 않은 사람들로
부터 무수한 편지와 전화를 받았는데, 만나서 자기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문제를 토론하자는
제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1966년 그가 사망하자, 다시 편지와 전화가 쏟아져 들어 왔는데,
이번에는 그의 서류에 관한 질문이었다.
레오 쉬들로프가 자기도 모르게 어떤 문제에 휘말렸건, 미국정부는 이에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다. 1946년 - <비밀문서>가 편찬되었다는 해보다 10년 전 - 에 레오 쉬들로프는 미국
입국 비자를 신청했다. 간첩혐의 또는 모종의 비밀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비자는 기각되었다.
결국 그 문제는 해결되고 비자가 발급되어 레오 쉬들로프는 미국에 들어갔다. 이 모두가 전형
적인 관료의 업무착오였다고 할 수도 있었으리라. 한데 쉬들로프의 딸은 아버지에게 그처럼
난처하게 따라다니던 비밀스런 선입관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느냐고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스 쉬들로프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들은 멈칫했다. 미국 정부가 비자를 거부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비밀문서>에 들어 있는 서류 가운데에는 레오 쉬들로프라는 이름을
국제 간첩 행위와 연관시킨 대목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한편 새로운 팜플렛이 파리에
나타났다. - 그 뒤 몇 달 사이에 다른 소식통에 의해서 그 근거가 확인되었다.
이 팜플렛에 의하면 잘 잡히지 않는 앙리 로비노는 레오 쉬들로프가 아니라, 쟁쟁한 혈통을
타고 난 프랑스 귀족 앙리 드 레농쿠르 백작이었다.
로비노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비밀문서>에 관련한 수수께끼로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 [레오 쉬들로프의 가죽 가방]을 거론한 항목이 있었다. 이 가방에는 1600 ~ 1800년
사이 렌느 르 샤토에 관계되는 숱한 비밀문서들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고 있었다. 쉬들로프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가방은 파크하르 울 이슬람이라는 전령의 손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1967년 2월 동독에서 [제네바가 위임한 첩자]와 접선하여 그것을
그에게 맡기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거래가 이루어지기 전에, 파크하르 울 이슬람은
동독에서 축출되었다는 보도가 있었고, 파리로 돌아와 [추가명령을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
1967년 2월 20일 그의 시체가 파리 제네바 특급열차로부터 내던져져 멀랭의 철로변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그 가방도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가능한 한 철저하게 조사하기로 했다. 2월 21일의 프랑스
신문 기사들을 모두 정리해 본 결과 그 사실은 대체로 확인되었다. 목이 잘린 시체 한 구가
실제로 멀랭의 철도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그 시체는 파크하르 울 이슬람이라는 파키스탄 청년
으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명백하지 않았으나, 죽은 사람은 동독으로부터 추방되어 파리에서
제네바로 여행중이었으며 - 어떤 첩보활동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당국에서는 부당한 행위가 있었다고 보고, 그 사건을 DST(방첩대)가 조사중이었다.
반면, 신문에서는 레오 쉬들로프, 가죽가방 또는 렌느 르 샤토의 미스터리와 연관됨직한
어느 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들은 여러 가지 의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느
면으로 본다면 파크하르 울 이슬람의 죽음은 렌느 르 샤토와 연관될 수도 있었고 -
사실 <비밀문서>의 그 항목은 신문이 접근하지 못하는 [내부정보]를 바탕으로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와는 달리 <비밀문서>의 그 항목은 의도적으로 위조 미스터리를 뿌렸을 수도
있었다. 누구든 의심스러운 죽음을 끌어다가, 그 사실을 제 구미에 맞게 아무데나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장난의 목적이 무엇일까?
누가 렌느 르 샤토 주변에 흉칙한 음모의 분위기를 자아내려고 기를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한 분위기를 꾸며서 얻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누가 이득을 보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은 우리를 한층 당황하게 했다. 파크하르 울 이슬람의 죽음은 분명 고립된
현상이었다.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국립도서관에 개인이 출판한 책이 또 한 권 들어왔다.
그것은 <붉은 뱀(Le Serpent rouge)>라는 제목이 붙었고, 상징직이고도 의미심장하게
출판일은 1월 17일이었다. 속표지에는 3명의 저자 - 피에르 푀제르, 루이 생 막상과
가스통 드 코커가 나와 있었다.
<붉은 뱀>은 특이한 저서이다. 거기에는 메로빙왕조의 왕세계 하나와, 메로빙시대의 프랑스
지도 2장이 엉성한 논평과 함께 실려 있다. 거기에는 또한 파리의 생 쉴피스의 평면도가 들어
있으며, 성당 안에 있는 여러 성자들의 소예배당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분문의 상당
부분은 높은 문학수준에 도달한 13편의 짧은 산문시이고, 그 중 많은 작품이 랭보의 시풍을
연상시킨다. 이들 산문시 한 편은 길이가 한 절을 넘지 않고, 각기 수대(獸帶) 13궁 - 제 13궁
오피우쿠스, 즉 뱀잡이를 천갈궁과 인마궁 사이에 집어 넣었다 - 에 하나씩 맞추었다.
1인칭으로 서술한 이 13편의 산문시는 보병궁(寶甁宮)에서 시작하여 마갈궁(魔갈宮)에서 끝이
나는 상징직 우화적인 순례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 그 문장이 명시하듯 1월 17일을
다스린다. 어떻게 보면 비밀스런 이 시편에 익숙한 구절 - 블랑슈포르 가문, 렌느 르 샤토
성당의 장식들, 소니에르의 비문의 일부, 푸생과 그의 그림 <아르카디아의 양치기들>,
비명(碑銘) <Etvin Arcadia Ego>를 언급하고 있는 - 도 있다. 한 곳에서 [양피지 문서에
인용된] 붉은 뱀이 몇 세기에 걸쳐 몸을 뻗는다 - 혈통 또는 가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인유(引喩) - 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레오(사자궁)의 점성술적인 징조에 대해서 수수께끼아
같은 구절이 있는데, 여기 전문을 인용해 둘 만한 가치가 있다.
내가 해방시키고자 하는 그 여자로부터 바위굴 무덤을 가득 채운 향수의 향내가 나에 게는
물결쳐 온다. 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그녀를 모든 자애로운 원의 여왕 이시스라고 이름지었다.
병들고 괴로와하는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는
병 고치는 유향이 가득찬 저 이름난 병에서 나온 막달라이다. 입회자들은 그녀의 참된 이름을
알고 있다. 노트르담 데 크로스(NOTREAME DES CROSS)
이 절에 담긴 뜻은 대단히 흥미롭다. 이시스는 물론 미스터리의 수호신 '이집트의 어머니' 여신
이다 - 자애로운 측면을 보일 때는 '흰 여왕'이고 악의에 찬 모습을 나타낼 때는 '검은 여왕'이
다. 신화. 인류학. 심리학. 신학을 주제로 한 무수한 저술가들이 지금까지 이교 시대로부터
기독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머니 여신 숭배의 자취를 추적해왔다.
그리고 이들 필자에 따르면, 이 여신은 동정녀 마리아 - 성 베르나르가 그녀를 불렀듯이,
[하늘의 여왕]이며, 이 명칭은 구약성서에서 페니키아의 이시스라고 할 어머니 여신
아스타르테에 적용되고 있다 - 의 위장 아래 기독교 세계에서도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붉은 뱀>의 본문을 보면, 기독교의 어머니 여신은 동정녀로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도리어 그녀는 막달라 마리아 - 렌느 르 샤토의 성당을 바쳤고, 소니에르가 그의 탑을 드린 -
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아가서 이 책의 문맥에 비추어 볼 때, [노트르담(Notre Dame] 곧
성모는 동정녀 마리아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 우렁찬 명칭 - 프랑스의 대성당에는 빠짐없이
붙여진 - 역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적용되는 것 같다. 하지만 막달라를 '성모'로 - 더구나
어머니 여신으로 숭배할 까닭이 무엇인가? 대체로 막달라에게 있어서는, 모성이란 그녀와는
가장 거리가 먼 속성이다.
기독교의 민중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예수에게 사사함으로써 속죄를 구한 창녀이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를 누구보다 먼저 보았다는 제 4복음서에서 그녀는 가장 눈에 띄게 돋보인다.
따라서 그녀는 성자로 높임을 받으며, 특히 중세의 전설에 그녀가 성배를 가져왔다고 전하는
프랑스에서 두드러진다. 그리고 [병 고치는 유향이 가득찬 병]은 사실상 성배를 시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를 통상적으로 동정녀 마리아를 위해 마련해 둔
자리에 모신다는 것은 아무리 에누리를 하더라도 이단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들의 주장이 무엇이건, <붉은 뱀>의 작가 - 또는 차라리 작가로 자처하는 사람들 - 는
파크하르 울 이슬람의 그것처럼 처참한 운명을 맞았다. 그러니까 1967년 3월 6일, 루이 생
막상과 가스통 드 코커는 목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피에를 푀제르 역시
목이 매인 채 죽어 있었다
누구든 즉각 이들의 죽음은 <붉은 뱀>의 저작과 발간에 어떤 길로든 연관이 있다고 측정할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파크하르 울 이슬람의 경우처럼 그러나, 그와는 다른 해석도 뿌리칠
수 없다. 누군가가 흉악한 미스터리의 달무리를 지어내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의심스러운 죽음을 찾으려면 신문만 훑어도아도 충분하다 - 그런데 이 경우에는 3명이나
의혹의 변시체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 사실이 있고 또 다음, 죽은 자들의 이름을 스스로
조작한 팜플렛에 추가하고, 그 팜플렛 - 속표지에 그보다 이른 날짜(1월 17일)를 박아 - 을
파리 국립도서관에 납본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기행위를 들추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고, 여기서 그가 노리던 악랄한 행위가
있었다는 암시를 던져주게 된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기행위를 도대체 왜 끌어가느냐?
어떤 사람이 폭력. 살인. 음모의 달무리를 지어내려 하느냐? 그러한 책략은 조사자들을
물리치기 힘들다. 그와는 반대로 도리어 그들을 한층 더 끌어당길 뿐이다.
반대로 우리들이 사기에 걸려들지 않았더라도, 몇 가지 곤혹스러운 의문이 제기된다. 가령
목 매 죽은 세 사람이 자살을 했는가, 아니면 살인사건의 희생자들인가? 환경으로 미루어
자살이란 거의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살인사건이 더 타당성이 있을 듯싶지도 않았다.
그들이 충격적인 정보를 공개할까 봐 처치해 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데 이 경우
에는 문제되는 정보란 이마 공개되어 국립도서관에 납본이 되어 있다. 살인행위 - 그게 사실이
라면 - 가 일종의 형벌 또는 보복이었을까? 혹은 뒤에 올 경거망동을 예방하는 수단이었을까?
그 어느 쪽으로 설명하더라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어떤 정보를 폭로하여 화를 냈다거나, 뒤에
있을 비밀의 폭로를 미리 막고자 한다면, 치열한 수사가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지 않는 한
흉칙하고 선정적인 3인 연속 살인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키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조사하는 과정에 겪은 모험이란 고맙게도 그다지 극적이 아니었지만, 변함없이 깊은
의혹을 자아냈다. 예를 들어, 조사를 하면서 앙토완느 레르미트의 저서 <렌느 르 샤토에 있는
메로빙 왕조의 보물(UnTresor merovigien a Remmes le Chateau)>을 언급하는 대목을 되풀이
해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 책을 찾으려고 했는데, 국립도서관 목록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손에 넣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 주일 동안 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도서신청서를 냈다. 그때마다 도서 신청카드에는 [열람중]이라는 표시가 되어 돌아왔다.
누군가가 그 자료를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만 가지고서는 유달리 이상하달 것은
없었다. 하지만 보름이 지나자 사정은 달라지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고, 우리들은
안달을 했다. 우리는 그 이상 파리에 머물러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우리들은 도서관 사서를
찾았다. 그는 이 책은 3개월 동안 계속 [열람] - 극히 이상한 상태 - 하게 되어 있으며,
책이 돌아오기 전에 열람 예약을 할 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영국에서 한 친구가 휴가차 파리에 가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미꾸라지 같은 그 앙토완느 레르미트의 책을 열람하여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눈여겨
보라고 부탁했다. 국립도서관에서 열람 신청을 했으나, 신청카드마저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다시 해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음 기회에에 우리가 파리에 갔을 때는 약 4개월 뒤였다. 우리는 다시 시도해 보았다.
우리들의 신청카드에는 여전히 [열람중]이라는 표시가 찍혀 돌아왔다. 이 때 우리들은 이 따위
장난을 너무 오래 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우리들도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서고]
- 물론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다 - 에 붙어 있는 카드실을 죽 따라 내려갔다. 나이 지긋하고
친절해 보이는 도서관 직원을 찾아내고, 우리들은 원시적인 불어밖에 모르는 어설픈 영국
관광객 시늉을 했다. 그의 도움을 청하면서 특별한 책을 찾고 싶은데, 도서관의 절차를
잘 모르니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노라고 주워 섬겼다.
곱살스러운 노신사가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우리들은 그이에게 카드번호를 알려주었고,
그는 [서고]로 사라졌다. 그가 나와서, 할 도리가 없노라 - 그 책은 분실되었다 - 고 사과를
했다. 더구나 그 책을 훔쳐간 사람은 분명히 우리나라 사람 - 영국여인이라고 덧붙였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그는 그 여자의 이름을 알려주기로 응낙했다. 바로 우리 친구의 이름이었다!
영국으로 다시 돌아오자, 런던의 도서관 관계자에게 협조를 구했고, 그들은 이 요괴스러운
사건을 조사해 보기로 동의했다. 우리를 대신하여 국립중앙도서관이 파리 국립도서관에 서신을
보내어 합법적인 조사를 고의로 방해한 이유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아무런 해명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 뒤에 앙토완느 레르미트의 저서를 제록스로 찍은 사본이 마침내 우리에게 왔다 -
그리고 거기에는 즉시 되돌라 달라는 요구가 붙어 있었다. 이것 또한 지극히 괴이한 일이었다.
도서관에서는 일반적으로 제록스 사본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본은
의례 휴지로 취급하고 처분해 버리기 때문이다.
드디어 우리 손에 들어온 그 저서는 그러나 우리에게 매우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 복잡한
절차를 거쳐 입수할 만한 값어치가 없었다. 마들렌느 블랑카살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스위스의
프리메이슨 총지부 그랑드 로즈 알피나의 간기(刊記)가 찍혀 있었다.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새로운 것은 전혀 없었다. 아주 짧게 라제(렌느 르 샤토의 옛 이름) 백작, 렌느 르 샤토와
베랑제르 소니에르의 유래를 되풀이 하고 있었다. 요컨대 우리들은 오랫동안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재탕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누가 그걸 1주일 동안 [열람중]이라고 붙들어 두고
있을 만한 이유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개중에도 가장 궁금한 것은 이 책이 창작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여기저기 바꾸어 놓은 몇 개 낱말을 제외하고는 대중적인 문고본 - 불과
몇 프랑이면 거리의 신문 판매대에서도 살 수 있는 싸구려 베스트셀러이고 세계전역에 널려
있는 잃어버린 보물 이야기 - 의 한 개 장(章)을 고스란히 옮겨 재판한 것이었다.
앙토완느 레르미트가 이미 출판된 책을 뻔뻔하게 표절했거나, 출판된 서적이 앙토완느
레르미트를 표절했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그러한 현상이 1956년 이후 프랑스에서 조각조각 나타난 자료를 에워싸고 미스터리 수법을
쓰는 전형이었다. 다른 연구가들도 비슷한 수수께끼에 부딪쳤다. 외관상 그럴 듯하게 보이는
이름들도 알고 보면 익명이었다. 출판했다는 집과 단체의 주소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주소들은
있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참고 문헌을 적어 놓았지만,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본 사람조차
없는 책들이었다. 문서는 사라지기도 하고 변조되기도 했으며, 국립도서관에 까닭 모르게
카드가 잘못 비치되어 있기도 했다. 때로는 모두 장난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장난 치고는 어마 어마한 장난이고 경제력이라든가 기타 여러모로 굉장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배후가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누가 그런 장난을 그렇게도
끈덕지게 치든, 아주 심각하게 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한편, 새로운 자료가 마치 음악의 주제처럼 반복되는 친숙한 소재들 - 소니에르, 렌느 르 샤토,
푸생, <아르카디아의 양치기들>. 성당기사단, 다고베르 2세와 메로빙 왕조 - 을 담고 쉬지
않고 나타났다. 포도재배 - 포도나무 접붙이기 - 의 비유가 두드러지게 나오고, 그것이 우화적
인 의미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 그와 아울러 점점 많은 정보가 추가되었다. 앙리 로비노를
레농쿠르 백작과 동일 인물이라고 확인하는 것이 그 한 가지 실례이다. 또 다른 사례로는
막달라 마리아의 중요성을 갈수록 강조하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사실을 들 수 있다.
더하여 다른 두 개의 장소, 거듭하여 이제는 렌느 르 샤토와 같은 지위로까지 끌어올렸다.
그 중 하나가 지조르(Gisors)이며 십자군 전쟁의 전성기에는 전략. 정치적으로 중요한 노르망디
의 요새였다. 다른 하나는 스테내 (Stenay)인데. 한때 사타니쿰(Satanicum)이라 불렀고
아르덴느 – 메로빙 왕조의 옛 수도였으며, 그 부근에서 다고베르 2세가 679년에 암살되었다 –
변두리에 있다.
지금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료들을 모두 여기서 적절히 검토할 수는 없다. 너무 내용이 깊고,
혼란스러우며, 지리멸렬해 있고, 분량이 지나치게 많다. 하지만 끊임없이 확산되는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정한 핵심이 나타나 후속되는 연구의 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논란의 여지없는 역사적 사실로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성당기사단의 배후에는 비밀교단이 있어서, 성당기사들을 그들의 군사. 행정적 수단으로
만들어냈다. 이 교단은 여러가지 이름을 내걸고 활동해 왔으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시온의 수도회(Prieure de Sion)]이다.
2) 시온의 수도회는 일련의 대사, 즉 단장이 지휘감독해 왔으며, 그들은 서양역사와 문화권에서
가장 찬연한 인물이다.
3) 성당기사단은 1307년과 1314년 사이에 붕괴 해체되었으나, 시온의 수도회는 다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비록 주기적으로 내부의 상쟁과 파벌투쟁으로 분열을 일으켰지만 몇 세기 동안
쉬지않고 기능을 발휘해 왔었다. 그늘에서, 또는 막후에서 활동하면서, 이 조직은 서양역사상
중대한 사태를 배후 조종했었다.
4) 시온의 수도회는 오늘날도 존재하며 아직도 활약하고 있다. 영향력이 크고, 고차적인 국제
문제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을 뿐더러, 유럽 일부 국가들의 내정에도 개입하고 있다. 1956년
이래로 배포되어 온 정보자료에 어느 정도 관여하고 있다.
5) 시온의 수도회가 표방 선언한 목표는 메로빙 왕조와 혈통을 복원 – 프랑스의 왕좌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의 정상에도 – 하는 것이다
6) 메로빙 왕조의 복원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을 허용이 되고 정당하다. 8세기에 왕좌에서 물러
났으나, 메로빙의 혈통을 끊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다고베르 2세와 그의 아들 시지스베르 4세
에서 바로 흘러 나와 계속되고 있다. 왕조간의 동맹과 왕실간의 결혼으로, 이 핏줄은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고드프라 드 부용을 비롯하여 과거와 현재의 귀족과 왕족 – 블랑슈포르,
지조르, 생클레르(영국에서는 싱클레어), 몽테스큐, 몽페자, 포에르, 뤼지냥, 플랑타르와
합스부르크, 로렌느 – 이 들게 되었다. 현재도 메로빙 왕조의 혈통은 그 정당한 유산을 합법적
으로 주장하고 있다.
여기 이른바 시온의 수도회라는 말에서 베랑제르 소니에르가 발견한 양피지 문서의 [시온]을
설명할 근거를 찾았다. 또한 여기서 양피지 문서 한 쪽에 적혀 있었고, 마리 드 블랑슈포르의
비석에 나오는 이상한 서명 [P.S.]를 설명할 근거를 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우리들은 [역사의 음모이론(conspiracy
theories of history)]에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게다가 위에서 거론한 주장의 대다수가 우리들
에게는 무관하고 가능성이 없거나 황당무계하게 들렸다. 한데 어떤 사람들이 그러한 주장을
퍼뜨리고 있으며,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아주 진지할
뿐더러, 상당한 권력이 있는 지위에서 행동하고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장들의 진실이 무엇이든간에, 그들은 분명히 어떤 길로든 소니에르와 렌느 르
샤토를 에워싼 미스터리와 연관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멋대로 [소수도원 문서(Prieure docurments)]라고 부르기 시작한 자료와,
그 자료에 담겨 있는 주장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이들 주장을 치밀하게
비판하고 검증하여 어느 면으로 실질적인 내용이 있느냐를 결정하기로 했다. 우리들의 자세는
냉소적이고 거의 조소 섞인 회의에 젖어 있었으며, 건성으로 조사를 하더라도 그 엉뚱한 주장
들은 스러져 버리리라 굳게 믿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들은 모르고 있었으나, 우리들도
뒷날 크게 놀라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