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판 증영의정 홍공(우전)신도비神道碑'가 아직도 강건한 홍술해 역사가 담긴 소룡골 선산에 가다.
이 엄청난 신도비가 왜 여기에 세워졌을까?
아버지는 소룡골에 갈때마다 홍수래가 이 엄청난 신도비를 축지법으로 나르고 그 부인이 갓을 짊어 날랐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마다 나는 홍술해와 부인이 이 비석을 축지법으로 날라온 게 아니라 그 권세가 힘 없는 민중들로하여금 이 비석을 세우게 했다며 고통받았던 민중의 아픔을 되새겼다.
그러면서 판서 홍계희의 아들 홍술해, 홍술해 조부는 홍우전, 증조는 홍수진(洪受晉)인데 홍수진이 바로 고산 구치중(具致中:大佑 손자) 사위이기에 위의 홍술해, 홍지해는 모두 구씨 외손이라고 말씀하셨다.
참고로 위대한 독립군 홍범도(洪範圖)장군도 본관은 남양(南陽) 홍씨. 남양은 지금의 수원과 화성 일대의 옛지명이다.
영조 치세 이조판서 홍계희(洪啓禧) 그 아들 홍술해(洪述海), 손자 홍삼범의 살아있는 아픔의 역사가
고스란히...
신도비 앞면의 여러 상흔은 한국전쟁 당시 총탄의 흔적이라신다.
영조 아들로 뒤주 속에 갇혔다 죽은 사도세자와 남양홍씨《한중록》은 슬픈 이야기.
사도세자는 정조 아버지이고 홍씨는 어머니이다. 정조는 왕위에 올라 1777년9월24일 역적토죄를 반교(頒敎)했다. 홍술해를 비롯하여 홍씨 여러 사람이 들어있다.
여기 홍술해 처는 효임(孝任), 아들은 상범이다. 홍술해의 4형제는 필해, 지해, 찬해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계희(洪啓禧),
할아버지는 홍우전(洪禹傳), 증조는 홍수진(洪受晉)이다.
홍상범(洪相範), 홍상길(洪相吉),홍상격(洪相格),홍지해(洪趾海), 홍술해(洪述海), 홍찬해(洪纘海), 홍상간(洪相簡)] 홍술해(洪述海) 아들 홍상범은 그 아버지가 황해도 관찰사 때 범행을 숨긴 죄로 유배를 당하자 불만을 품고 아버지 홍술해, 숙부 홍필해(洪弼海)·홍지해(洪趾海)·홍찬해(洪纘海) 등과 더불어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을 추대하는 역변을 일으키려다 실패 홍상범은 주살되고, 이듬해 은전군 이찬 역시 추대 대상 인물이란 이유로 왕명에 따라 자결했다. 효임(孝任)은 홍술해 아내 곧 상범 어머니이다. 봉동 귀미리-용진면 간중리-봉개-소양 일림리는 홍술해 집안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이제부터 정확한 기록을 찾아야 한다. 한편 남양홍씨와 고산 능성구씨는 어떤 관계인가?
홍술해 조부는 홍우전, 증조는 홍수진(洪受晉)인데 홍수진이 바로 고산 구치중(具致中:大佑 손자) 사위이기에 위의 홍술해, 홍지해는 모두 구씨 외손이다
할아버지 구연봉 할머니 구삼례 묘소 뒷편 오르막
증조부모 묘소가 자리하고 더 위쪽으로 남양홍씨 두분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홍술해(洪述海)>
출생 : 경종2년(1722) 사망 : 정조1년(1777)
할아버지는 대사간(大司諫) 홍우전(洪禹傳)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홍계희(洪啓禧)이며 어머니는 청풍김씨(淸風金氏) 호조판서 취로(取魯)의 딸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字)는 중선(仲善)으로 큰아버지 홍계손(洪啓孫)에게 입양되었다.
영조26년(1750)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영조35년(1759)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상시봉원도감(上諡封園都監)의 감조관(監造官)이 된 다음 정언·지평·수찬 등을 거쳐 1761년 사간이 되었다.
1763년 북도감진어사(北道監賑御史)로 다녀와 병사 이방좌(李邦佐)의 탐학상을 보고하고 엄벌할 것을 건의해 양양(襄陽)에 10년 간 유배를 보냈다. 이어서 부응교·응교 등을 거쳐 1764년 교리가 되었다.
그 뒤 승지를 거쳐 장연현 안핵어사(按覈御史)가 되어 민전(民田)을 강탈하고 이에 항의하는 민간인을 살해한 현감 이경춘(李景春)의 죄상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그 뒤 집의·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1774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어 대사성을 지내고 이듬해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외지로부터 미곡(米穀)을 사들여오면서 1만 4,000냥(兩)을 몰래 빼돌린 사실이 해서찰민은어사(海西察民隱御史) 임희우(任希雨)에게 적발되어 파직되었다.
이어서 정조즉위년(1776)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 장전(臟錢) 4만냥, 조(租) 2,500석, 송목(松木) 260주(株)를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듬해 아들 홍상범(洪相範)이 아버지의 치죄에 불만을 품고 홍인한 · 정후겸 등 벽파(僻派)와 제휴, 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 찬(恩全君禶)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발각되어 아우 홍필해·홍지해·홍찬해 및 조카 홍상간(洪相簡) 등과 주살(誅殺) 당하였다.
산과 산기슭에는 비석이 흔하다. 그 비가 그 비석 같지만 고산면 서봉리 소농골 입구의 서편 너른 골짝이 산자락에 우뚝한 “참판 증영의정 홍공 우전(禹傳) 신도비”는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뒤를 따른다. 잘 알려진 이야기는 빼고 문헌에 근거하여 새로운 사실을 소개한다.
홍우전(1663~1728)은 ‘홍수진(洪受晉)’의 계자(系子)이다. 홍수진은 이 고장 능성구具씨 치중(致中)의 사위이므로 ‘우전’은 치중의 외손자이다. 홍우전 아들이 ‘홍계희’ 계희 아들은 ‘홍술해’다. 그러므로 홍술해 할아버지가 바로 ‘홍우전’. 홍술해는 황해도 관찰사 때 쌀값 1만 4천량을 도적질했다가 발각되어[任希雨] 파직 당했는데, 마침 돈 4만 냥과 곡식 2천 5백석, 소나무 260주를 사취한 사실이 또 들통 나 흑산도에 위리안치 되자 그 이들 ‘홍상범’이 아버지 귀양에 불만을 품고 ‘홍인한’ 등 ‘벽파(노론계)’와 모의 은전군(정조의 서제)을 새 임금으로 세우려다가 발각 나 결국 아버지 형제(필해, 지해, 찬해)와 함께 역모로 주살됐다. 홍술해 처 이효임(李孝任)은 남편이 귀양 갈 때 부적을 베개 속에 넣어 보낼 정도로 무속을 신봉했다. 효임은 용하다는 무녀 ‘점방(占房)’의 신통력을 사 정조를 제거하려 했다. ‘점방’은 오방(五方)우물물과 홍국영 집 우물물을 구해 홍술해 집 우물에 부었다. ‘점방’은 붉은 물감으로 홍국영과 ‘모성양반(某姓兩班)’의 화상을 그렸는데 모성양반이란 ‘정조’를 뜻한다. 쑥대 화살에 두 화상을 얽어매어 공중에 쏘면서 “둘은 반드시 죽는다.”고 저주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이런 방법이 통할 리 없어 ‘궁중 난입사건’ 수사 과중에 ‘주술사건’도 발각돼 멸문지화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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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막살나무 열매 협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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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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