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히말라야
'무엇을 하러 이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가면서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는 것일까'
고소증(고산병)에 시달리면서 한 걸음씩 엉금엉금 힘들게 올라가다 혼자서 몇 번이나 되뇌던 생각이다. 정말 힘들었다.
히말라야에 간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물론이려니와 주위 사람들도 한결같이 그 나이에 왜 그런 힘든 일을 하려 하느냐고 죄다 만류를 했는데도 한귀로 흘려듣고 결국 내 고집대로 온 것 아닌가
'히말라야에 가면 밤하늘의 별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그곳에는 시리도록 장엄한 만년설의 자연만 있단다. 정치인도 없고, 매연도, 시끄러운 자동차의 소음도 없고 단지 희고 차디찬 자연만 존재하고 있단다.' 라는 말이 유혹을 하였을까?
아니면 '어떤 고통이든 간에 만약 그것이 당신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 고통은 항상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말에 이끌렸을까
나는 항상 목표를 새워가며 그것을 꼭 달성해 보려고 노력해 왔다. 고생을 더 하더라도 일도 더 잘 해 보고 싶었고 무엇이든 많이 가져보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돈도 좀 많이 벌어보고 싶었다.
높은 산도 죄다 한 번씩 올라가 봤으면 한다.
히말라야도 안 가보았으므로 가보고 싶었던 것 아닌가
그곳에 가면 더 넓은 세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런 고민을 안 해본 사람이 없겠지만 난 좀 그 강도가 더 찐하지 안했던가 싶다. 여행이라는 충전기간을 거치면 삶의 질도 좀 더 높일 수 있으리라.
살다보면 정말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힘든 선택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종종 느끼게 되지 않는가.
네팔
‘히말라야’하면 모두들 세계의 지붕이란 말이 먼저 연상이 될 것이다
히말라야는 네팔, 파키스탄, 인도, 부탄과 중국(티베트)의 5개국에 걸쳐있다. 네팔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10대 산중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 8586미터의 칸첸중가, 8091미터의 안나푸르나를 필두로 하여 8개의 거봉이 네팔 영토 내에 있거나 네팔의 국경에 위치해 있다
네팔의 정식국호는 네팔연방민주공화국이며 인구가 약 3천만 정도에 면적은 남한보다 조금 더 큰 14만 평방킬로미터 정도이다
언어는 90% 정도가 네팔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인도 국경부근에서는 인도의 힌디어를 많이 사용한다.
또한 약 700만 정도가 영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현지 가이드는 영어로의 소통에 큰 불편이 없을 정도이다
인구 90% 정도가 힌두교를 종교로 갖고 있으며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비가 네팔이 속해있다
카트만두
인천을 출발해서 6시간 정도의 비행 끝에 도착 한 곳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평균고도 1400미터에 5개의 큰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의 100만 인구 도시이다.
네팔에서는 어떤 지역의 트레킹이던 모든 트레킹이 이 카트만두에서 시작되고 카트만두에서 끝이 난다
배낭 여행자 역시 인도나 티베트 트레킹을 가기 위해서는 이 카트만두를 경유해야 한다고 한다.
카트만두에 대한 인상은 별로 크게 남아있지 않다
네팔에 입국 할 때에 아침 일찍 ‘포카라’란 도시로 출발하면서 카트만두시내를 잠시 스쳐갔고, 출국 할 때에 비로소 사원 한 곳과 ‘타멜’이란 쇼핑가를 잠시 둘러 볼만큼 짧은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에 도시의 극히 일부분만 보았을 뿐이므로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다만 많은 사람들, 질주하는 자동차의 행렬과 소음과 먼지가 많았다. 특히 도로변마다 세워져 있는 전신주에는 수많은 전선과 통신선을 일부러라도 헝클어놓은 듯이 무질서하게 엉켜져 있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도로에는 중앙차선이 있는지 없는지 차선이 거의 안보였는데도 차량이나 오토바이들은 서로 부딪치지 않고 잽싸게 잘들 달려가고 있는 것이 신기해 보일 뿐이었다. 거기에 형형색색의 간판들이 상하로 난립해 있는 좁은 거리는 인도 뭄바이의 어느 뒷골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많은 행인들 사이로 집채만 한 배낭을 멘 여행객 트레커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등산켐프의 돌무더기위에서나 나부끼는 줄 알았던 오색의 롱다 깃발도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카트만두에 도착을 하더라도 안나푸르나 베이스 켐프 Annapurna Base Camp-ABC 의 트레킹을 위해서는 '포카라'란 제2의 도시까지 국내선으로 3,40분 이동을 한 후에 그곳에서 또 소형버스로 한 두 시간을 가면 '칸데'란 곳이 나오는데 정작 트레킹은 이 ‘칸데’에서부터 시작 한다. ‘포카라’로 국내선을 타고 들어 갈 때에는 구름이 끼어 있어서 고산들을 볼 수 없었지만 나올 때에는 하늘이 매우 청명해서 마차푸차레(6997)나 마나슬루(8156)와 같은 연봉들이 만년설을 이고 있는 모습을 마치 바로 옆에 있는 듯이 잘 볼 수 있었다. 마차푸차레란 산은 다른 높은 산에 비하면 그렇게 높은 축에 들지 못하는 산이지만 세계 3대 미봉중 하나로서 성산으로 숭배하고 있어 입산이 금지돼 있다고 한다. 네팔어로 마차푸가 물고기이고 차레란 꼬리를 뜻한다고 한다. 결국 물고기 꼬리란 뜻이지만 실물은 물꼬기 꼬리보다는 훨씬 더 근사해 보였다. 트레킹을 하는 동안 가끔씩 여러 위치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돌아 올 때에는 물론 비행기가 작아서 이기도 하겠지만(30인승) 비행 도중에 마나슬루 봉이 잘 보이는 곳에 와서는 비행기를 한 바퀴 빙 돌려서 객실 양쪽의 승객들이 설산들을 고루 다 잘 볼 수 있도록 하는 배려도 있었다.
나마스떼!
트레킹은 1720미터의 '칸데'에서부터 시작했다
우리 일행 일곱 명이 ‘칸데’에 도착하니'카트만두'에서부터 조인한 가이드와 함께 셀파(포터)4명과 보조가이드 1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짐(카고백)을 접수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출발을 했다.
트레킹 첫날과 둘째 날은 비가 수시로 내렸고 좀 높은 곳에서는 포도송이만한 우박도 떨어졌다. 셋째 날부터는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어서 좋은 시정 하에서 주변 경치를 마음껏 감상하면서 올라갈 수 있었다.
주위에는 아열대 기후의 식물들이 넓은 잎을 자랑하며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천 길이나 될 만큼 아득한 저 아래의 계곡에는 주위의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폭포수와 빙하수가 합쳐져서 수량을 자랑하면서 요란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우윳빛인데 아래쪽에 만들어진 작은 호수의 색깔은 진한 초록색으로 된다.
산의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지는 폭포가 자주 눈에 뛴다.
협곡사이로는 가끔씩 설산의 고봉들이 반갑게 인사라도 하는 듯이 얼굴을 내보였다가 이내 구름으로 아니면 산봉우리에 가려서 안보이곤 한다.
설산은 저 멀리에서 배경으로 있는듯하다가 멀어지고 그러다 입구를 지키던 골짜기 들이 문을 열어주면 또 다른 설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윽고 6993미터의 마챠푸차레와 7219미터의 안나푸르나 남봉 산봉우리가 골짜기 사이로 보이자 모두들 흥분의 도가니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나마스떼!'로부터 시작해서 '나마스떼!'로 끝이 난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나만 오고 싶어 한 것이 아니고 만국민이 다 좋아하는 모양이다
여러 피부색의 트레커들이 계속해서 오고간다.
거기에 가이드들, 셀파들, 현지주민들, 짐을 운반하는 마소들까지 해서 어쩔 때는 좁은 등산로가 비좁을 정도로 왕래가 많다. 그런데 모두들 지나가면서 하나같이 '나마스떼!'를 외치고 간다. 마치 히말라야에 가면 꼭 '나마스떼'를 해야 한다고 초등학교에서 교육이나 받은 것처럼, 젊은 여성들은 부드럽고 작은 소리로, 우락부락한 서양인들은 계곡 물소리처럼 우렁우렁한 큰소리로 '나마스떼!'를 외친다. 계곡이 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에서는 '나마스떼!'라고 하는지 '안녕하세요!' 라고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물 흐르는 소리도 컸고 꼬레아노들도 많았다
돌계단
모두들 경남의 '남해'하면 '다랭이 논'이 떠오를 것이다
단체 카톡방 같은 곳에서는 중국의 어딘가에 가 볼만 하다고 하면서 남해 다랭이 논보다 몇 배나 큰 다랭이 논 집산지 같은 곳의 사진도 받아 본 적이 있다
이곳에도 이 다랭이 논이 또 지천으로 많다.
아니, 대부분이 산으로 되어있는 이곳의 지형으로 봐서 논이 있다면 그것은 다랭이 또래의 논밖에 안되겠지만. 그런데 이곳은 남해처럼 바로 바다 인근의 표고가 낮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곳은 3000미터가 넘을 것 같은 고산지인데도 다랭이 논이 보였다. 나는 빈 몸으로 이렇게 일생에 단 한번 올라가는 것도 어렵기만 한데 저 높은 곳을 어떻게 수시로 올라 다니면서 농사를 짓고 지은 농산물을 갖고 내려올까 하고 생각하니 아찔한 생각부터 든다. 건기철(10월-5월)에는 비도 거의 안 온다는데 저수지도 둘 수 없는 지형에서 논에 물은 어떻게 조달하는 것일까.
그리고 다랭이 논이라는 게 워낙 규모가 작아서 어떤 것은 폭이 1미터나 2미터밖에 안 되어 보였고 길이도 정말 일천했다
돌계단도 또한 많았다.
얼마나 많냐면, 어떤 곳은 한 언덕에 계속해서 2230여개의 돌계단의 연속도 있을 정도였다
언뜻 봐서는 주위에는 그렇게 많은 돌들이 안 보였는데 대부분의 트레킹 루트가 돌이 위주가 되는 길이거나 아예 돌계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돌계단에 사용된 돌들도 울퉁불퉁하니 제멋대로의 형상을 갖은 것이 아니고 마치 우리 집 욕실 바닥에 깔면 좋을 것 같이 평편하고 넓은 검은색의 타일형상이었다
어디에서 이 많은 돌들을 가져와서 이렇게 잘들 쌓아놓았을까
그리고 사람들이 이제까지 많이 밟고 지나가서 잘 다져진 탓도 있겠지만 돌계단을 밟았을 때 어느 것 하나 기우뚱거리거나 어느 한쪽이 들려진 곳이 없을 정도로 잘 재단되고 안정적으로 설치가 되어있었다. 이만하면 카트만두나 포카라 도시의 제멋대로 지어진 건축물들보다도 한 수 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 불편사항이 있었다.
이 길들은 인간들도 사용하지만 자동차나 기차가 못 다니는 좁은 산길이다 보니 주민들이 생필품이나 건축자재의 운반용으로 말이나 노새를 많이 사용하고 소도 많이 있는 듯, 그 평편하고 넓은 돌계단들 군데군데에 말똥 소똥이 지천이었다. 자동차 매연대신에 말똥이 공해를 대신하고 있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에는 비가 자주 와서인지 하루 종일을 말똥 냄새에 취해서 걸었던 것 같다. 다른 곳에서는 비가 온 직후에 숲속을 걸으면 나무냄새 풀냄새가 얼마나 향기로운가. 그 향기로운 숲 냄새 대신에 아닌 밤중에 홍두께 같은 말똥 냄새라니!
그런데 이 말들이 다닐 때도 우리나라의 관광버스가 대열을 이뤄서 가는 것처럼 예닐곱 마리가 대열을 이뤄서 가는데 여기에도 가이드가 앞에 한 사람, 뒤에 한사람이 붙어서 가이드를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중간에 있는 어느 말이 지정된 코스를 이탈 하려고 한다거나 안 가려고 하면 앞이나 뒤의 가이드가 돌멩이를 던져서 조정을 하곤 했다.
한번은 이 말들의 행렬이 뒤에서 빨리 다가오고 있는 소리가 들려서 급히 돌계단 옆의 갓길로 비켜서서 말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말들이 내가 서 있는 갓길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혼비백산해서 얼른 나무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서 간발의 차이로 말을 피하기는 했지만 간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가이드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말들도 돌계단을 싫어해서 돌이 없고 풀들로 이루어진 갓길이 있으면 돌계단을 피한다고 한다. 결국 사람도 동물이고 말도 동물인 것이다
처음 2일 동안은 계속해서 깊은 협곡을 따라서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높여간다. 주위의 산들의 규모가 압도적이다. 7000, 8000미터의 거봉들은 아직까지는 좀 많이 떨어져 있어서 도대체 주변의 산의 높이가 몇 미터나 될지 감이 안 잡히지만 계곡 양쪽으로 쭉쭉 뻗어 올라간 산들은 정말 높아 보인다. 울산 등억단지에서 쳐다보는 신불산이나 가지산보다도 한참 더 높은 것 같다. 산이 높으니 계곡도 깊고 높다.
하나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또 하나의 언덕이 나타나다가 그러다가 어쩔 때는 계속해서 내리막이다. 속이 상한다. 얼마나 어렵게 올라온 언덕인데 이렇게나 쉽게 까먹어 버리다니! 그러다가 3일째와 4일째에는 하루에 1000미터씩 고도를 높여야하는데 이게 나에게는 고산병을 안겨준 원인인 것 같다.
4일째에 3230미터에 위치한 ‘데우왈리’ 롯지에서는 4시에 기상을 해서 새벽 5시도 못되어 출발을 했는데 드디어 우리 일행 중 한명이 고산병 증세가 심해서 더 이상 올라가는 것을 포기를 하고 보조가이드와 함께 하산을 하였다. 60대 초반의 아주머니인데 평소에 등산을 매우 좋아 한다고 하면서도 고산병이 걱정되어서 준비도 많이 한 모양인데 기다리고 있는 고산병에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꼭두새벽에 출발을 하는 이유는 ABC에 정오 이전에 도착을 하지 않으면 구름이 몰려와서 영봉들을 재대로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4000미터정도 부터가 수목 한계선이다. 이때까지의 아열대 환경이 없어지고 황량한 언덕에 작은 관목과 야생화로 이룬 초지나 암벽들이 계속된다.
롯지와 식사
롯지란(Lodge) 여러 날에 걸쳐서 트레킹을 할 경우에 밤에 야영을 하는 대신에 돈을 내고 잠을 잘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나그네가 묵을 수 있는 주막 같은 곳, 혹은 깊은 산속에 있는 여관과도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잠도 재워주지만 식사도 할 수가 있고 음료수도 팔며 맥주와 럼주도 판다. 신라면도 판다. 이 롯지들은 걸어서 1, 2시간 정도의 거리마다 위치하고 있어서 트레커들의 체력에 따라 골라서 들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설비가 말씀이 아니다.
롯지 숫자도 저 고도에는 제법 작은 촌락을 구성할 정도로 여러 집이 있지만 높은 곳에는 숫자가 제한적이다. 트레킹 내내 주의 깊게 살펴보았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도 밖에다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사람은 안보였다. 이유는 그나마 이런 정도의 롯지라도 어디에서나 쉽게 이용 가능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문제가 우리가 잔 곳은 저고도에 있는 롯지들은 제한적으로나마 Hot shower가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롯지가 샤워꼭지를 틀면 찬물만 나온다. 나도 첫째 날과 둘째 날 Hot shower가 가능하다고해서 머리감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가 찬물만 쏟아져서 혼이 나곤했다.
워낙 전기가 귀하고 태양광 혹은 태양열의 규모가 작아서 앞의 몇 사람이 따뜻한 물을 먼저 빼 써버리면 뒷사람에게는 차례가 안 돌아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고도에 있는 롯지들은 아예 Hot shower와는 거리가 멀다.
보다 더 큰 문제는 숙소 내에 난방장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기온은 통상 1000미터를 올라가면 대략 6.5도C씩 하강한다고 한다. 따라서 11월 초에 1500미터의 ‘카트만두’의 기온이 15도라면 4000미터에서는 대략 영하의 기온이 된다. 온도계가 없어서 그날 기온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MBC를 출발해서 ABC로 올라가는 주변의 물들이 제법 두껍게 얼어 있는 것으로 봐서 밤이나 새벽의 기온은 필경 영하로 떨어졌음이 분명했다.
이렇게 난방시설이 전혀 안되어 있으므로 롯지 내에서는 자기 몸으로 발전을 해야 한다. 우리가 트레킹을 했던 시기가 11월 초여서 아직은 가을로 분류되는지 롯지의 식당에도 난방장치가 전혀 없었다. 한 겨울에는 식당 한가운데에만 난로를 준비해 준단다. 그나마 이 난방도 식사를 한 후 3시간 정도만 지나면 꺼진단다. 낮에 트레킹을 할 때는 운동 열로 인해 추위보다는 오히려 더운 쪽에 속했지만 밤이나 해가 뜨기 전인 아침에는 매우 추웠다. 따라서 춥지 않게 자려면 가능한 한 옷을 여러 벌 껴입은 후에 핫팩도 서너 개쯤 호주머니에 넣고 털모자도 쓰고 발싸개까지 한 채 보온이 잘되는 오리털 침랑 속에서 자야 하는 것이 필수다. 또한 보온 물통에 식당에서 파는 뜨거운 물을 담아서 안고 자면 도움이 된다.
고고도에서는 외벽이나 옆방과의 차단설비가 허술해서 단열이나 방음도 취약했다. 내부 페인트도 안 되어 있는 곳이 많고 가구라고는 좁은 목침대 위에 얇은 매트리스와 베게가 전부다. 아니 그 옛날 우리 여인숙에서 보았던 저광도의 꼬마전구가 옷도 안 입고 하나씩 더 걸려있다. 다행히 매트리스위에는 흰색 침대보는 씌워져있다
고고도에서는 좁은 방안에 많은 침대를 너무 다닥다닥 붙여놓아서 프라이버시는 커녕 출입마저 매우 불편할 정도이다
화장실은 쎄미 수세식으로 당연히 방안에는 없고 복도 끝이나 다른 층에 위치하며 심한 경우에는 건물 밖에 위치해있기도 한다. 고산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물을 많이 먹기도 했지만 이뇨제인 다이나막스라도 먹은 날이면 소변을 자주 보러 가야하는데, 많은 옷을 껴입고 침랑 속에서 보온을 유지하면서 자다가 추위가 도사리고 있는 방밖으로 자주 나가야 하는 일은 고역이다. 저녁에는 그나마 제한적으로 제공되는 라이팅을 전기를 아끼기 위해서 초저녁에 전부 소등을 해 버리니 그야말로 밖에는 어둠과 별빛과 추위밖에 없다. 아니 자연만 남아 있는 것인가
고고도의 롯지에서는 얼음장처럼 찬 물밖에 없기 때문에 샤워는커녕 발을 씻을 수도 세수를 할 수도 없다. 옷도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 낮에 입던 옷이나 양말을 그대로 입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양치질을 하고 물수건으로 눈곱 정도를 정리 하면 출발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그 깊은 골짜기에도 전기란 게 들어는 오고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동네마다 아주 소규모의 수력발전설비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워낙 주위의 산들이 높은 대다가 기후가 아열대라서 비가 많아 수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산꼭대기로부터 떨어지는 폭포수에 직경 6인치 정도 되는 파이프를 연결해서 그 낙차로 발전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워낙 소규모여서 난방은 생각도 못하고 낮은 광도의 라이팅이나 제한적인 휴대폰충전 용도 정도로만 사용을 하는 것 같았다. 모두들 롯지에 도착하면 휴대폰을 충전하기 위해서 하나나 둘 정도밖에 없는 전기 콘셋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 줄을 서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셀파와 식사팀
서두에 얘기한대로 우리들 7명 한 팀을 위해서 셀파(Porter의 현지어) 4명에 식사팀 4명이 배정되었다
셀파는 트레커 2명당 1명의 셀파가 두 트레커의 카고백을 운반해주고 식사팀은 전원(트레커 7명, 가이드 2명, 셀파 4명, 식사팀 4명 계17명)이 6일 동안 소요되는 식재료와 작은 식기들을 이고 지고 트레커들을 선행해서 이동을 한다. 따라서 트레커들은 자기의 소형 배낭에 가벼운 물통, 과일, 간식 등 그날 필요한 소량의 물품들만 넣어서 지고 가면 된다.
물론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통상 1명의 셀파가 30kg 내외의 짐을 지고 간단다. 그런데 나는 울산 집에서 출발할 때, 등산가서는 잘 먹어야 한다면서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너무 많이 챙겨 줬고 또 추우면 못쓴다고 여벌옷도 너무 많이 넣어 주어서 현지에서 무게를 재어보니 22.5kg나 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래 간식은 내가 먹을 것만 조금 남겨두고 셀파들에게 대부분 미리 나누어주어 버리고 팁도 내 셀파에게는 1, 2일 동안은 특별히 더 쥐어주곤 했다. 셀파란 게 정말로 어려운 직업처럼 비춰졌다. 건장한 사람들이 지 한 몸을 버거워하면서 끙끙대면서 올라가는데 이들은 특별한 도구도 없이 거의 40kg에 육박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그 험한 언덕배기를 매일 올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 여자 셀파도 간혹 눈에 띈다.
일당이 8$ 정도라고 하던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대도회지의 일상과 이곳 사람들의 일상이 대비가 되어 보인다. 괜스레 내가 미안함 마음까지 든다. 나에게 만약 후생이 있다면 최소한 셀파의 직업은 안 갖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라고 우스개 같은 다짐을 해 본다
어쨌든 이들은 우리와 거의 동시에 출발을 하든지 아니면 조금 먼저 출발을 해서 다음 중식장소와 석식장소에는 우리보다 항상 먼저 도착해서 우리가 도착하면 카고백을 우리들 방에 갖다 준다던가 따뜻한 차를 준비했다가 갖다 주고 연이어서 식사도 준비해 준다.
메뉴는 다양했다. 김치와 된장 마늘은 물론이려니와 김치찌개, 된장찌개, 돼지고기 수육에 심지어는 닭백숙도 나와서 트레킹 내내 먹는 것에 관해서는 불평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잘 먹고 왔다.
만약 이 식사팀을 대동하지 않는다면, 트레커들은 롯지에서 매번 음식을 사먹어야 한다.
이 사람들은 직업 정신도 투철해서 항상 우리보다 더 먼저 롯지에 도착하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았고, 추운 아침에 트레커들 방문 두드려서 모닝콜도 해주고 뜨거운 차도 배달 해준다. 심지어는 트레커들이 식사하는 내내 1명이 식탁 바로 앞에 열중쉬어 자세로 대기하고 있다가 누가 김치! 하면 김치를, 마늘! 하면 마늘을 총알처럼 빨리 갖다 주고 식사를 다 한 것 같으면 알아서 숭늉까지 가져온다. 열중쉬어! 하고 대기하던 이 친구가 너무 인상이 깊어서 나중에 팁을 더블로 주기도 했다
비수기 때에는 숙박비(롯지비용-1명당 1일 숙박비는 5-6$ 내외라고 함)는 할인을 해주지만 음식 값은 깎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메뉴판에는 여러 가지의 음식종류가 기재되어 있었다. 이 나라의 주식은 감자와 전통음식인 달밭(국 + 흰쌀밥 + 야채 + 감자 + 카레소스)이 주 메뉴이다. 그러나 피자도 있고 우리나라의 신라면도 포장 그대로 팔고 있었다. 맥주나 럼주도 있었다. 값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비싸진다고 한다. MBC에서 1인분 정도의 피자 한판에 10$정도 했고 로컬 맥주 4홉들이 한 병에 8$ 정도로 팔고 있었다. 롯지에서 식사를 매번 사 먹는다면 한 끼에 10-15$ 내외면 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서너 명의 소그룹 트레커들이라면 식사팀의 대동 없이 국내에서 밑반찬을 조금 가져와서 롯지에서 현지 식을 사먹어도 식사는 해결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가이드는 이름이 '슈리아'란 친구로 안산에서 12년 정도를 살았기 때문에 한국어도 잘했고 영어도 잘 한다고 한다. 사람이 천성이 재밌고 술도 좋아하고 얘기도 잘해서 모두들 좋아라했다. 왜 한국에서 계속 살지 귀국을 했냐고 물었더니 농담조로 한국의 '나쁜 사장님' 때문이란다.
가이드의 임무는 롯지를 정하는 것을 포함해서 전체 트레킹일정을 짜고 관리를 한다. 낙오자가 안 생기도록하고 그날그날의 루트나 난이도에 대해서 미리미리 설명도 해 주고 고산병 예방을 위해서 조언도 하고 리드도 해 준다. 히말라야 트레킹에는 가이드는 필수적인 것 같다
만약 어느 한 부부만 트레킹을 간다면 셀파를 겸하는 가이드 1명만을 대동하면 된다고 한다. 비용은 하루에 30$ 정도라고 한다.
고산병
우리나라에서 등산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라면 6,7일정도의 이런 트레킹은 신체적으로는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 단 고산병에 안 걸린다면 말이다. 인체란 참 신비해서 하루의 고된 트레킹이 끝나서 롯지에 다다를 즈음해서는 아무래도 내일 계속해서 트레킹을 하는 것은 어렵겠구나! 할 정도로 녹초가 되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할 만해진다. 그 사이에 몸에 새 에너지가 충전이 되어서 등산화 끈을 다시 조여 맬 수가 있게 된다.
2900미터 정도부터 고산병 증세가 나타났다
아니다. 트레킹 1일차부터 증세가 시작된 것 아닌가싶다. 왜냐면 이때부터 이상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2일차에는 잠을 좀 자보기위해서 독한 럼주를 마시기도 했다. 3일차부터는 머리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기침도 해댔다
3900미터를 넘어서 부터는 걷는 것이 힘들었다. 언덕을 도대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경사가 심한 오르막이 아닌데도 1-2초에 한 걸음을 떼다시피 매우 매우 느린 속도로 걸어도 겨우 열 걸음 정도를 걸으면 숨은 턱에 차서 더 이상 앞으로 진행이 불가능하고 가슴은 망치로 때리는 것 같은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두 다리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스틱이라도 없었으면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전문 등산가들이 고봉의 정상을 불과 100미터도 안 남겨둔 상태에서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을 할 수 밖에 없는 심정을 이제는 이해 할만 했다.
머리가 아픈 것이나 배가 아픈 것은 2차 문제였다. 숨이 너무 차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열 걸음 정도를 올라가면 더 올라갈 수가 없어서 멈춰서 두 다리와 두개의 스틱에 의지해서 2-30초 정도 숨을 몰아쉬며 쉰다.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 하나로 이렇게 해서 남은 200, 300미터를 올라 간 것 같다. 감기도 안 걸린 것 같은데 밤에 기침은 왜 또 그렇게 많이 나는지
이 트레킹을 가기 위해서 지난 석 달 정도를 15층 아파트 계단을 걸어서 오르면서 체력단련을 한다고 했는데 그 훈련은 도대체 어느 짝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고산병은 체력이 좋다고 해서 반드시 안 걸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예전에 배를 탈 때에도 남들보다는 뱃멀미를 덜 했었고 무엇보다도 평소에 꾸준히 운동을 해 왔기 때문에 '고산병? 한번 겪어보지' 하는 정도의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출발을 했는데 이번에 7명의 일행 중에 두 번째로 심하게 고산병을 겪어 고생을 한 것이다. 7명중 한명은 고소증세 때문에 4일째에 중간에 하산을 했고 또 다른 두 명은 두통을 호소했던 것 같다
4일째 낮에 4130의 ABC를 올라갔다 내려온 다음에 3700미터의 마챠푸차레 롯지(MBC)에서 한숨이라도 잠을 좀 자보기 위해서 초저녁, 정말 초저녁인 6시 반 경부터 침랑 속에 들어갔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은 구만리만큼 달아나 버리고 어께는 결리고 머리와 배는 아파온다. 보호대를 찬 무릎부위에는 물집이 생기고 항상 말썽이던 두 번째 발톱은 등산화의 압박에 의해 벌써 까매졌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밝게 빛나는 설산에 걸쳐있는 달빛이 차라리 원망스러웠다. 구름한 점 없는 시리도록 맑은 밤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찬란한 별들이 쏟아질듯이 총총하다
그 긴긴 밤을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면서 내일 아침에는 헬기라고 타고가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다가 1시간이나 2시간 정도 눈을 붙였을까.
고산병이란 고지대에 올라갔을 때 기압차이로 혈액의 점성이 높아져서 산소가 신체 각 부위에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며 보통 2800미터 이상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이것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소가 희박하고 기압이 낮고 기온이 떨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하나의 신체적인 증상이지 병은 아니다. 불면증, 두통과 멀미, 배앓이, 식욕부진 등이 이어지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서 가슴이 아프고 다리에 맥이 풀려서 보행이 불가능하게 되는 상태까지 간다. 이 상태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무리를 하면 뇌나 폐에 물이 차는 뇌수종과 폐수종이 생겨 사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4130m에 올라갔을 때 발견한 것이 있는데 호주머니에 든 믹스커피봉지와 과자봉지를 보니 기압차이 때문에 마치 풍선을 힘껏 불어놓은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행님, 평소에는 행님 배가 그렇게 많이 안 불러 보이더니 오늘은 왜 그렇게 배가 많이 나왔어요?' 함께 간 맹요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대체나 지금 와서 그 때 사진을 보니 내 배가 평소보다 더 많이 나온 것처럼 보인다. 얼굴도 많이 부어 보였던 것 같다
반대로 고고도에서 물을 채워온 페트병이 저고도에 내려왔을 때는 푹 찌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훈련을 충분히 안 하거나 적절한 고소적응기간을 안 가지면 일반인들은 2, 30%에서 약 50%정도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고고도에 올라가기 전에 무엇보다도 충분한 적응기간을 가져야 한다. 쉬면서 천천히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 동안에 500-600미터 이상 올라가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켐프를 가는 트레킹이라면 14일 정도를 잡아야 하고 우리가 가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켐프는 7일이 아닌 10일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뜻한 물을 많이 마셔야 하며 아주 천천히 걷고, 자주 쉬며, 체력보충을 위해서 잘 먹어야 한다. 머리를 따뜻하게 해야 한단다.
이 고소증에 걸려 버리면 백약이 무효하므로 빨리 저고도로 하산을 하든지 고생이 되더라도 몸이 고고도에 적응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며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한국에 귀국한 후에도 4,5일간을 더 배앓이를 계속했고 기침은 한 2주 정도를 더 한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서는 다이나목스란 이뇨제나 비아그라를 미리 복용하면 경증에는 효과가 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숙영지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 갔다 내려와서 수면을 취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안나푸르나(8,091m)
고생 고생 끝에 트레킹 시작 4일째 정오경에 마침내 오색 깃발의 롱다가 겹겹이 펄럭이는 해발 4,130미터의 안나푸르나 베이스 켐프(ABC)에 도착하였다.
‘칸데’를 출발한지 만 4일만이다
롱다는 마치 최후의 승리자를 축하라도 해 주는 듯이 맹렬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처음에는 너무 힘이 들어서 주위를 살펴볼 엄두도 못 내고 주저앉아서 그저 가쁜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 풍광을 돌아본다. 왼쪽에는 파란색이 감도는 흰색의 만년설을 머리에 인 7219미터의 안나푸르나 남봉이, 그 오른쪽으로는 7647미터의 바르하츌리가 또 그 옆으로는 8091미터의 안나푸르나 제1봉과 6248미터의 간다르바츌리, 6993미터의 마챠푸차레를 비롯한 수많은 고산들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그 웅장한 위용을 떨치면서 한 눈에 들어와 가슴에 안긴다.
한마디로 웅장하고 아름답다. 장엄하다.
지금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인 8000미터 높이의 산들을 그 바로 아래인 4130미터 높이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구름들이 우리 머리위에 있지 않고 저 만큼 아래에서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또 다른 무리들은 고봉의 만년설 사이에서 연기처럼 천천히 퍼져 오른다. 산들이 구름보다 더 높이 위치해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계곡을 따라 올라오고 있는 헬기도 우리 발아래에서 논다.
구름은 쉼 없이 몰려왔다가 이내 홀연히 사라지곤 한다. 사진 촬영을 위해서 휴대폰을 꺼내들고 구도 잡고 포커싱 하는 사이에 설산은 구름에 그만 가려버리기도 하고 이내 또 구름사이로 영롱하게 빛나기도 한다. 순간포착을 필요로 한다.
푸른 하늘 아래에 펼쳐지는 설산들의 웅장함에 심장이 멈출 것만 같다
이곳이야말로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고 자연이 주인공인 것이다. 인간은 없고 자연만 존재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카메라렌즈를 통해서가 아닌 인간의 눈으로 직접 저 웅장한 광경을 보지 않는 한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으리라. 어떻게 해야 이토록 멋진 광경을 오래도록 머리에 간직할 수 있을 것인지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1시 방향에서 굉음과 함께 눈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공기가 맑아서 워낙 시정이 좋기 때문에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마치 뭉쳐있는 거대한 구름덩이위에서 바람이라도 불어서 그 구름이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 떨어지는 거리(높이)도 꽤나 먼 듯 제법 1,2분간은 진행이 되었다.
저녁 무렵 만년설을 머리에 인 설산들이 황금색으로 점차 물들어가다 해가 지자 다시 본래의 흰 빛으로 되돌아오는 아름다운 광경은 설명이 불가하다. 저녁에 보는 히말라야의 일몰, 석양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변하는 히말라야의 연봉들을 어디 다른 곳에서 볼 수가 있을까
하산을 할 때에도 오르막 언덕길은 역시 힘들었다. 이제 하산을 하는 길인데도 오르막길은 왜 이렇게나 많은지. 고소증의 여파로 울렁거림은 계속되어서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저고도로 내려와서 아열대의 무성한 온갖 나뭇잎과 풀들을 보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문명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저녁에는 그나마 형편 좋은 롯지에 들어갈 수 있어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사막에서 오아시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비로소 사람냄새가 나는 것이다
‘촘롱‘(2170)에서는 건너편의 올라온 길과 이쪽편의 내려갈 길을 동시에 바라본다. 지나온 길은 이미 과거가 되었고 가야할 길은 미래의 시간이다. 과거・현재・미래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어느 시간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이름 할 수 없고 구분할 수 없고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 지나온 나의 자취는 어디에 있는가. 가야할 저 길에 나는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눈 맞추는 설산, 여전히 흰 빛이다.
인생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므로 뭔가 새로운 것이 내 인생에 등장한다면 그것을 아끼고 열심히 사용한 후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 한다고 한다.
뭔가를 소유한다고 해서 그것을 영원히 간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물건들이 우리의 인생을 스쳐가고, 우리는 단지 그것들을 한 때 사용하는 관리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체도 모두 사용한 후에 태어나기 이전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언제 또 다시 이곳에 와 볼 것인가.
햇볕에 반사된 만년설의 찬란함은 여전히 뒤에 그렇게 남아있었다.
<팁>
-트레킹코스-
히말라야에는 무수히 많은 트레킹코스가 있다고 한다
GHT(Great Himalaya Trail)는 케슈미르-인도-네팔-부탄-티벳 까지의 히말라야 산맥을 횡단하는코스로 4500km나 된다고 하며 네팔국의 전체 횡단만 해도 1700km에 달해 150일 이상이 소요된다고 한다
내가 이번에 다녀온 코스는 카투만두에 도착해서 포카라란 도시로 이동후에 포카라의 칸데(1720)란 곳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켐프(4130)까지 약 80km를 4일간 올라가서 3일간 내려오는 단 코스였다. 이 코스도 고산병을 안 겪으려면 10일은 잡아야 한단다.
또 많이 찾는 코스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약 5300미터)인데 이 코스는 좀 더 고고도이기 때문에 고소적응기간을 더 가져서 올라가고 내려오는데 총 14일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더 천천히 올라간다는 의미이다
-의복-
위와 같이 칸데에서 ABC를 11월초에 가는 일정이라면 기내용 1벌, 춘추복 2벌, 동복 1벌 정도면 될 것이다
-가이드, 현지 게스트하우스-
여행사의 상품인 package tour를 이용할 수도 있고, 아니면 국제선만 본인이 예약을 하고 카트만두-포카라 국내선을 포함해서 현지 호텔숙박, 가이드, 롯지예약 따위를 한국인이 운영하는 여행싸이트나 현지 게스트하우스를 통해서 해도 될 것이다( '야크존' '네팔에서' '네팔짱' '우리집')
-내가 안 가져간 것으로 꼭 필요했던 물품들-
시간.고도.기압이 표시되는 시계-김병만시계
저녁에 품고 잘 수 있는 보온이 되는 1리터짜리 물통
판쵸우의(우기 때)
롯지에서 등산화를 벗고 사용할 수 있는 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