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산의 일출
김태범
어둑 새벽
능선길 오르면
아직 잠 덜 깬
저 편 어두운 숲 속에
지난 밤 요정들 향연의
타다 남은 잔불처럼
보일 듯 말 듯
까아만 불씨가 있다
불씨는
어스름 새벽을 밀어내는
가쁜 숨들을 만나
어둠을 사르며
타오른다
야단났다 싶어
허겁지겁 산 끝에 오르니
아차산 붉은 함성 사이로
온달의 뜨거운 심장같은
시뻘건 불덩어리가
빌딩 숲 파고 들며
도시의 곤한 잠을 깨운다
※초안산:도봉구 창동과 노원구 월계동에 걸쳐 있는 해발 114m 산
닭들의 연극
김 태 범
햇볕 등 진
한 평 남짓 닭장 안에는
예닐곱 토종 닭이
어두운 감방 안 죄수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양지녁 한 켠에는
검은 수탉 한 마리가
좁은 닭장을 탈출한 듯
자유롭게 먹이를 쪼며
활보한다
닭장 안 닭들은
탈출한 검은 수탉이 부러운 듯
날갯짓 아우성이다
막이 내렸다
탐욕의 서열 싸움으로
무너진 닭장 안 평화를 위해
검은 수탉 한 마리를 추방했다는
에필로그
닭들의 명연기에 나는 속았다
아이 고(苦)
김 태 범
보안관만 깨우는 종소리
바람에 날려 흩어지다가
침묵의 교실 속으로 빨려든다
한낮이 되어서야
일제히 풀려 난 아이들 함성은
이내 침묵으로 잦아들고
힘없는 발길들은 아파트 숲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바꿔 멘 가방 속 창살에 갇혀서
간간이 비추는 틈새 햇살로
겨우 겨우 버티다가
풀려 난 땅거미 함성으로
지쳐만 간다
집에 오면
곶감보다 더 무서운
층간 소음에
꽁꽁 묶여 버린채
하루가 또 저문다
중생(衆生)
김 태 범
비우라고 버리라고
그래야 한다고
비우면 비워질 듯
버리면 버려질 듯
하지만
눈 앞에 신호등조차도
비우고 버리지 못한다
비우려고 버리려고
억지로 애쓰지 말고
비울 때 비우고
버릴 때 버릴 줄 아는
저 나무처럼만 살고 싶다
천사의 나팔
김 태 범
10여년 전 하늘로 돌아 가신
칠순 지난 강원도 원통 할머니는
빵빠레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데
그 이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골목길 구멍가게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무조건 들어갔다
"나팔 주세요!"
계수나무
김 태 범
아침부터
교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매일 달고나 파는 할머니
새까만 국자는 할머니의 마술
앞다투어 모여 앉은 아이들은
마술의 달콤함에 넋을 잃고
학교를 버렸다
할머니는 달콤한 맛을 파셨다
반 백년이 훨씬 지나
뒷산 둘레길에서
날마다 할머니의 마술을 만난다
할머니의 마술 국자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달달한 향기를 베풀고 있다
계수나무 한그루!
함께
김 태 범
오늘도 이른 아침에
뒷산을 오른다
아내와 함께
맑은 숲 사이로
파란 하늘 길게 마시며
가쁜 숨으로 능선을 오른다
잠에서 깨어난 숲의 정령들도
아침 햇살 따라 함께 걷는다
솔 향기 사이를 지나
팥배나무 숲 길 오르며
붉게 익어가는 팥배를 만난다
땀 흘리며 오르는 아침 산에서
아내와 나도 함께 익어 간다
나는 오늘도
아내와 함께
아침 산을 오를 수 있어서
또 하루를 기껍게 시작한다
밤의 수묵화
김 태 범
시골 작은 집
텃밭 속 휴식인데
종일 지친 몸은
검붉은 노을빛에야
간신히 풀려난다
길게 누운 어스름 산 그림자 너머
도심 하늘은 술렁대는 대낮
가끔씩 질주하는 굉음 소리가
밤의 정적을 할퀴고 사라진다
밤하늘 쏟아지는 별빛
교태 섞인 소쩍새 울음
텃밭 지새우는 풀벌레 소리
남새들의 푸른 숨소리
밤이 그려내는 수묵화에
스멀스멀 깃털 돋는 곤한 몸은
꿈의 정수리로 날아간다
가을 오는 날
김 태 범
음력 칠월 열 나흗 날
내 생일 언저리엔
아침 저녁 어김없이
여름은 가을을 만난다
땀내 젖은 열대야 매미소리
깨어질 듯 청랑해지고
서늘 바람에 들녘은
오색 꿈으로 설레인다
맑은 햇살 스며
툭 투둑 가을 여무는 소리
늘어져 지친 내 여름 날은
주섬주섬 가을을 준비한다
가을 오는 날
가을걷이 일손 걱정에
농부의 시름은 깊어가지만
조석(朝夕) 서늘바람으로
일할 맛이 저절로 나겠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김 태 범
지구 둘레의 사분의 일
아홉 번이나 바뀌는 시차
기차 타고 유럽 가는 출발점
네 사람씩 묶은 열차는
설레임을 싣고 길을 재촉한다
광활한 시베리아의 지평선은
이내 어둠에 묻히고
설레임도 삼켜 버렸다
기차는 시베리아의 어둠을 달린다
덜컹대는 레일 소리
엎치락 뒤치락 빠르게 느리게
밤이 흘러 간다
꿈결인가 싶은데 어느새 차창 밖은
숲의 바다가 다가선다
지난 밤 어둠이 삼켜버린
시베리아의 파노라마를
새벽이 빗방울로 토해 내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차창 밖 자작나무 숲으로 숨어 들고
시베리아 횡단열차 속 나는
비에 젖어 하바로프스크로 숨는다
이상 10편 입니다
사진과 약력.hwp
카페 게시글
詩수필낙서글
2019 갈대 동인시집 수록 작품-10편
김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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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8
19.11.05 18:4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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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시인님 좋은 시 감사합니다
김태범선생님의 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