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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현(金載顯)
[생졸년] 1627년(인조 5)~1700년(숙종 26) / 壽 73歲
[경력] 경기도관찰사, 개성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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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회백(晦伯). 할아버지는 김원립(金元立)이며, 아버지는 정랑 김민교(金敏敎)이다. 1662년(현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20세 전에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이 되고 1662년(현종 3) 예빈시(禮賓寺)에 전임, 이해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자(正字)·지평(持平)·집의(執義) 등을 거쳐 1689년 승지로서 숙종이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한 것을 반대하다가 파직당하고, 같은 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출사건에 대하여 반대의 소를 올리고 두문불출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서인이 등용되자 호조참의로 기용된 뒤 좌승지·한성부우윤·호조참판·도승지·공조참판·형조참지·동지중추부사·경기도관찰사·개성부유수 등을 두루 지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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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서지 국조인물고 속고3 경재(卿宰)]
관찰사 김재현 신도비명(觀察使金載顯神道碑銘) - 권상하(權尙夏)
지난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 간교한 무리들이 국정을 쥐고 흔들 적에 한 무리의 선한 사람들을 모두 내몰고 재앙은 마침내 곤궁(坤宮, 인현 왕후(仁顯王后))에까지 미쳤는데, 이때에 김재현(金載顯) 공은 먼저 죄를 얻어 파직되어 집에 있다가 분연히 일어나서 이르기를, “사람의 신하되는 자 이런 변고를 만나 죽지 않으면 의롭지 못하다.”고 하였다.
마침내 오두인(吳斗寅) 공 등 여러 사람들과 상소하여 힘써 논쟁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앞선 자 세 사람(오두인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이 대궐 뜰에서 국문을 받았는데, 공은 날마다 의금부 문밖에서 왕명을 기다리다가 세 사람이 모두 출옥하자 드디어 용인(龍仁)의 시골집으로 물러나와 지내면서 문을 닫고 병만을 다스렸다.
6년이 지난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임금이 지난 일을 크게 뉘우쳐 간교한 무리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곤위(坤位, 인현 왕후)를 복위시킨 다음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공을 불러 조정으로 돌아와서 곧바로 좌승지(左承旨)에 옮겼다가 품계가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이어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호조 참판(戶曹參判), 병조 참판(兵曹參判), 도승지(都承旨)에 제수되었다가 품계가 가의 대부(嘉義大夫)에 올라 공조 참판(工曹參判), 형조 참판(刑曹參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쳤으며, 그 사이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나가기도 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700년 숙종 26년) 12월 12일 경오일(庚午日)에 정침(正寢)에서 졸(卒)하였다. 공은 병이 났을 적에도 신기(神氣)가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집안사람들이 약을 올리면 공은 웃으면서 물리치며 이르기를, “내 나이 일흔 넷이니 죽어도 유감이 없다. 약은 써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조상하여 제사지내고 부의(賻儀)하는 것을 예(禮)에 맞게 하였다. 다음 해 2월 충주(忠州) 봉황천(鳳凰川) 선영 곁에 가매장하였다가 정해년(丁亥年, 1707년 숙종 33년) 10월 25일에 축좌(丑坐)의 묘원으로 개장(改葬)하였다.
공의 자(字)는 회백(晦伯)이고 그 선조는 경주인(慶州人)이며 숭정(崇禎)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은 참되고 순박하였으며 국량은 침중하고 두터웠다. 키가 크고 생김새가 뛰어나 사람들은 바라보고 그가 후덕(厚德)한 장자(長者)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워 과정의 독려를 기다리지 않고도 스스로 배움에 힘을 쏟아 20세 이전에 과장(科場)에 나가 명성이 무성할 정도였다. 신축년(辛丑年, 1661년 현종 2년)에 선원전 참봉(璿源殿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임인년(壬寅年, 1662년 현종 3년)에 바꾸어 예빈시(禮賓寺)에 제수되었는데, 이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대과(大科)에도 뽑혔다.
계묘년(癸卯年, 1663년 현종 4년)에 승문원[槐院]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율봉 찰방(栗峯察訪)이 되었는데 임소(任所)에 이르러서는 법을 엄하게 지켜 사신들의 행차에서 기마(騎馬)를 규정에 넘치게 제공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해 겨울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3년상을 마치자 황산 찰방(黃山察訪)에 제수되었는데, 법을 지킴이 율봉(栗峯)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으므로, 비록 방백(方伯)이라 해도 또한 그를 꺼려하였다. 이어서 전적(典籍)에 올랐다가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옮겼다.
기유년(己酉年, 1669년 현종 10년)에는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서 임금을 온천으로 호위하였다. 이해 여름에 순천 현감(順天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순천현(順天縣)은 지역이 커서 다스리기 어려웠으므로, 공이 질서를 정돈하여 간사하고 강한 자들을 엄하게 단속하자 묵은 병폐들이 씻은 듯이 없어져 풍속이 당장에 바뀌어졌다.
경술년(庚戌年, 1670년 현종 11년)에 기이한 병을 얻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였다가 감사(監司) 오시수(吳始壽)가 원망으로 무함하였으므로, 당시 좌의정(左議政) 허적(許積)이 형옥(刑獄)을 맡은 관리에게 국문하게 할 것을 청하여 순창(淳昌)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가 임자년(壬子年, 1672년 현종 13년)에 사면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계축년(癸丑年, 1673년 현종 14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정랑(正郞)에 승진하여 관서(關西)에서 시사(試士)하고 돌아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당파 사람들이 조정을 꽉 메우고는 오로지 옛 원한을 보복하기만 일삼고 있었는데, 공과 같은 해에 급제한 자들은 정조(政曹)에 있으면서 공이 지난날 높이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자신들을 따를 것이라 여기며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공은 도리를 지켜 구차하게 같이하지 않았으며, 바로 사직하여 체차되었다가 다시 그 자리에 제수되어 모화관(慕華館)에서 무관의 시험을 감독하였다.
그때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선생의 추삭(追削, 죽은 사람의 관직을 삭탈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한림(翰林) 조지겸(趙持謙) 공이 상소하여 그 잘못을 극구 논하자 당파 사람들은 삭출(削黜)로 논의를 크게 시끄럽게 하였다. 승지(承旨) 이세화(李世華) 공이 조지겸을 변호하다가 또 탄핵을 당하였다.
공은 시험을 마치고 바로 대궐에 이르러 아뢰기를, “조지겸과 이세화는 몸이 주상의 측근에 있으면서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말하여 스스로 숨김이 없어야 되는 의리를 좇았는데, 무엇을 죄줄 만한 일이 있어서 대단히 탄핵하는 논의를 주워 모아 구차히 비위를 맞추어 아첨함을 취하니, 신은 사사로이 부끄럽게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무리들을 크게 거슬리게 되자, 간원(諫院)에서 곧바로 공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청하였는데, 당시 의논은 오히려 간원에서 대간의 체통을 잃고 있음을 허물하였으나 단지 공만을 파직시켰다.
병진년(丙辰年, 1676년 숙종 2년)에 서용하여 능주 목사(綾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무오년(戊午年, 1678년 숙종 4년)에 복심관(覆審官) 권흠(權歆)에게 중상(中傷)을 당하고 파직되어 돌아가자, 능주 백성들 3백여 명이 궐문을 지키고 상서(上書)하여 3백 섬의 쌀을 나라에 바치는 것으로 공을 다시 유임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이것을 묵살하고 임금에게 아뢰지도 않았다.
기미년(己未年, 1679년 숙종 5년)에 서용하여 우통례(右通禮)에 다시 복직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풍덕 부사(豊德府使)가 되었으나 하찮은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봉상시 정(奉常寺正)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옮겼는데, 당시 조정은 다시 정리되어 ‘공은 외직(外職)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하여 부임하기 전에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다.
이해 가을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었는데, 1년이 안 되어서 정사가 이미 이루어지자 고을 백성들이 크게 평온하였으니, 앞뒤의 치적은 모두 이런 것들이다. 임술년(壬戌年, 1682년 숙종 8년)에 사간(司諫)으로 소환되었다. 이때부터 항상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세 번이나 사간(司諫)을 지냈고, 한 번의 장령(掌令), 집의(執義)를 지냈는데, 버티는 이론이 언제나 공평하고 관대하기를 주장하여 대체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그 사이 태상시 정(太常寺正), 태복시 정(太僕寺正),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지냈다.
계해년(癸亥年, 1683년 숙종 9년) 봄에 선유 어사(宣諭御史)로 영남 지방에 나갔다. 같은 때에 명을 받은 자들은 조정의 뜻에 맞지 않게 함이 많아서 심지어 견책을 당하기까지 하였지만 공이 유독 적합하게 할 수 있었으며, 돌아와서 사간(司諫)에 제수되었다가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뽑혀서 제수되어 품계가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였는데, 반년을 있는 동안에 체포당하였다가 풀려났으니, 이는 공의 잘못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었고 차례에 따라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면서 3년 동안에 대부분 정원(政院)에 있었으며, 그 사이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거친 것이 두 번이고,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거친 것이 한 번이다. 병인년(丙寅年, 1686년 숙종 12년)에는 외직을 청원하여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는데, 수의(繡衣, 암행어사)가 군기(軍器)를 돌아보다 ‘깃발의 색깔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으로써 주청하여 파직을 당하였다.
무진년(戊辰年, 1688년 숙종 14년) 서용되어 승지(承旨)에 제수되었지만 병이 나서 교체되었으며,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 정월에 다시 승지가 되었다. 당시에 원자(元子, 뒤의 경종(景宗))에게 세자의 호칭을 정하는 일이 있었는데, 임금은 소인들의 말을 받아들이어 조정 신하들을 의심하므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상소하여 이것을 풀려고 하자 임금은 진노하여 ‘나라의 뿌리를 흔든다’고 하면서 송 선생에 대하여 관직을 삭탈하여 내쫓을 것을 명하였다.
(승지) 윤빈(尹彬) 공이 홀로 정원(政院)에 숙직하면서 이 명을 도로 올려 시정하려 하자 임금은 더욱더 분노하여 윤공을 옥에 가두었다가 귀양 보낼 것을 명하므로, 공이 여러 승선(承宣)들과 함께 승정원으로 들어가 바야흐로 고집해 아뢸 것을 논의하였는데, 주달이 올라가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모두 파직할 것을 명하였다.
공은 대궐에서 파직되어 돌아가고, 조정은 크게 변하여 바로 곤궁(坤宮)을 폐출하는 거사가 있자, 공은 상소하여 이것을 다투다가 마침내 조정을 떠났으니, 이것이 공이 벼슬길에 오른 후 처음부터 끝까지이다. 공의 아버지는 김민효(金敏斅)로 벼슬은 정랑(正郞)을 지냈는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조부 김원립(金元立)은 유생(儒生)으로서 광해군 때에 항론(抗論)하여 어미와 자식의 도리를 밝혔고, 훗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서 부사(府使, 종성 부사)를 지내다 관직에서 죽었는데,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증조부 김성진(金聲振)은 진사(進士)로서 벼슬은 찰방(察訪)이었는데,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전주 이씨(全州李氏) 충의위(忠義衛) 이극광(李克匡)의 딸이다.
공은 먼저 삭녕 최씨(朔寧崔氏) 집의(執義) 최유(崔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이 없고, 다음에 청송 심씨(靑松沈氏)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심진(沈搢)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집안에서 여러 종족의 관리들을 잘 대하여 공의 청렴한 지조를 지키도록 내조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 부덕(婦德)을 높이 일컬었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윤호(金胤豪)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차남 김성호(金性豪)는 참봉(參奉)을 지냈다.
첫째 딸은 현감(縣監) 조정의(趙正誼)에게 시집을 갔고, 둘째 딸은 이사량(李思良)에게 시집을 갔으며, 셋째 딸은 일찍 죽었다. 손자 김여(金礪)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냈고, 손녀는 봉사(奉事) 이현상(李顯相)에게 시집을 갔는데, 장남 김윤호의 소생이고, 손자 김정(金碇)과 손녀 참봉(參奉) 이현윤(李顯允)에게 시집간 이는 차남 김성호의 소생이다.
외손자 진사(進士) 조명적(趙明迪)과 조명우(趙明遇), 외손녀로 정랑(正郞) 이병연(李秉淵)에게, 청능군(靑陵君) 이모(李模)에게, 진사(進士) 홍우기(洪遇箕)에게, 생원(生員) 김성택(金聖澤)에게 시집간 이는 조정의의 소생이고, 외손녀로 신택하(申宅夏)에게 시집간 이와 양자로 나간 아들 이명협(李命協)은 이사량의 소생이다.
아! 공이야말로 집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이 있었고, 관직에 있을 때는 빙벽(氷蘗, 얼음을 마시고 황벽나무를 먹는다는 뜻으로, 청빈함을 이르는 말)의 일컬음이 있었다. 조정에 나아간 지 40년 동안 물러나 양보하여 스스로를 지켰고 나아가 취함에 급급(汲汲)하지 않았으니, 모두 기록할 만하다.
하지만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에 공이 세운 공적이야말로 사람들은 이미 그 우아한 지조에 감복하였고,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의 한결같았던 절개 또한 대의(大義)를 나타내어 바루었고 이륜(彛倫)을 붙들어 세울 수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먼 후세에까지 영구히 전해질 것이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19년째에 장차 묘석(墓石)을 세우려고 참봉군(參奉君, 김성호)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비명(碑銘)을 청하기로 삼가 행장의 글을 추려 그 개괄을 대략 서술하고 잇달아 다음과 같이 비명을 쓴다. 대개 선비들이 평안할 적엔 강개(慷慨)하여 소리 높여 말하다가도 지극히 어려운 시절을 만나면, 입에 나무 막대를 물린 듯하네. 참으로 김공께서는 세한(歲寒)에 곧은 소나무로다.
그 옛날 궁기1)(窮奇)는 세력을 믿고 하늘의 기둥 들이받아, 부주산(不周山)이 꺾이고 나니 땅을 얽은 것[坤維, 곤궁(坤宮), 즉 인현 왕후를 가리킴]도 따라서 기울어졌네. 공은 충렬(忠烈)로 분개하여 왕의 비위를 거슬렸는데, 일을 같이한 어진 세 분 먼저 참형(慘刑)을 당하였네. 공은 석고 대죄하여 살려고 하지 않았으나, 죽지 않는 건 천명이라 세운 절의는 우뚝하도다.
하늘의 상도(常道) 길이 힘입어 간사하고 아첨 떤 무리들 넋을 빼앗겼네. 공의 의리 해와 달처럼 빛나고 이름은 청사에 높도다. 효도하고 우애하며 염정(恬靜)함과 청렴 결백함은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바였지만 공한테는 대단찮은 행위였다. 하늘이 그 충정을 돌보아 후손들 번창하게 하였네. 봉황천(鳳凰川)의 언덕에 우뚝한 공의 무덤 있는데, 효성스러운 아들 공손히 높다란 비석을 세우도다. 내가 부끄럽지 않은 말 써서 영원한 후세에까지 밝게 보이노라. <끝>
[각주]
1) 궁기(窮奇)는 상고 시대(上古時代) 공공씨(工共氏)의 다른 이름.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공공씨가 전욱씨(顓頊氏)와 왕
위를 놓고 싸우다가 화가 나서 서북쪽의 극(極)에 있는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는데, 하늘을 괴고 있는 기둥이 부러져 땅을 얽어매고
있는 동아줄이 끊어졌으므로 하늘이 서북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고사(故事)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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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觀察使金載顯神道碑銘。
往在己巳, 奸兇當國, 盡逐一隊善類, 禍仍及坤宮。 時金公載顯先得罪罷官家居, 奮然起曰 “爲人臣子遇此變故, 不死不義也。” 遂與吳公斗寅諸人上書力爭。 疏入, 居前者三人被鞫殿庭, 公日待命于金吾門外。 三人旣出獄, 遂退居于龍仁田舍, 杜門養疴。 越六年甲戌, 上大悔前事, 殛黜奸黨, 復正坤位, 以戶曹參議召公。 還旋移左承旨, 進秩嘉善, 連拜漢城右尹、同知義禁府事、戶・兵曹參判、都承旨, 陞嘉義階, 歷工・刑曹參判、同知中樞府事, 間出爲京畿觀察使、開城留守。 以庚辰十二月十二日庚午, 卒于正寢。 疾病神氣不亂。 家人進藥, 公笑却之曰 “吾年七十四, 死無所憾。 何事於藥” 訃聞, 弔祭致賻如儀。 翌年二月, 權窆于忠州鳳凰川先塋側。 丁亥十月廿五日, 改葬以丑坐之原。 公字晦伯, 其先慶州人。 生於崇禎□月□日。 天資眞醇, 器度沈厚, 長身豐貌, 人望之知其爲厚德長者。 自幼勤愨, 不待課督, 自能力學。 未冠, 遊場屋, 聲稱藹蔚。 辛丑, 除璿源殿參奉。 壬寅, 換授禮賓寺。 是年, 中司馬, 連擢大科。 癸卯, 由槐院出爲栗峯察訪, 至官, 執三尺不撓, 使星之行不許濫騎。 冬, 丁內艱。 服闋, 除黃山察訪。 守法如栗峯時, 雖方伯亦憚之。 陞典籍, 遷刑曹佐郞。 己酉, 以兵曹佐郞陪駕溫泉。 夏, 除順天縣監。 縣地大難治, 公整頓綱維, 嚴束奸强, 宿瘼如洗, 風采立變。 庚戌, 得奇疾, 呈狀請遞, 監司吳始壽搆以怨望, 時相許積請廷尉問, 編配淳昌。 壬子, 宥還。 癸丑, 丁外艱。 乙卯, 爲兵曹佐郞, 俄陞正郞, 試士關西, 還拜司憲府掌令。 時黨人充朝, 專事修郄, 而與公同年科者居政曹, 以公不顯用於曩時, 意或從己而引之。 公義不苟合, 卽辭遞。 俄復還除, 監武試于慕華館。 時有同春宋先生追削之論, 翰林趙公持謙上疏極論其非, 黨人大譁, 論以削黜。 承旨李公世華救趙公, 又被劾。 公罷試, 卽詣闕啓曰 “趙持謙、李世華身居近密, 有懷必陳, 自附無隱之義。 有何可罪之事, 掇拾深劾之論? 苟容取媚, 臣竊恥之。” 以此大忤時輩, 諫院直請削職。 時議猶咎諫院失臺體, 只罷公職。 丙辰, 敍拜綾州牧使。 戊午, 爲覆審官權歆所中傷, 罷歸。 綾民三百餘人守闕上書, 請以三百石米納官還公任, 政院却不以聞。 己未, 敍復右通禮, 出爲豐德府使, 坐微事罷。 庚申, 除奉常寺正, 尋移延安府使。 時朝著復淸, 以公不可出外, 未赴而除掌令。 秋, 拜安東府使。 未期年政已成, 邑民大和。 前後治績, 皆此類也。 壬戌, 以司諫召還。 自是常在臺閣, 三爲司諫, 一爲掌令、執義, 持論每主平恕, 非關大體, 不屑也。 間爲太常・太僕正、成均司成。 癸亥春, 以宣諭御史往嶺南, 同時受命者多不稱朝廷意, 或至被譴, 公獨以能稱。 還拜司諫, 擢授義州府尹, 陞通政階。 居半年, 被逮免, 非其罪也。 未幾, 拜承政院同副承旨, 敍歷左承旨。 三歲之間, 多在政院, 間爲兵曹參知者再, 刑曹參議者一。 丙寅, 乞外得安邊府使, 繡衣巡閱軍器, 以旗色不精啓罷。 戊辰, 敍拜承旨, 病遞。 己巳正月, 復爲承旨。 時有元子定號事, 上入宵人之言, 疑廷臣。 尤菴宋先生上疏解之, 上震怒, 以爲動撓國本, 命削黜宋先生。 尹公彬獨在直覆逆, 上益怒, 命囚尹公而竄之。 公與諸承宣入院方議執奏, 奏未上, 上遽命盡罷。 公自闕罷歸, 朝著仍大變, 旋有坤宮廢黜之擧, 而公上疏爭之, 遂去國。 此公立朝本末也。 公之考曰敏斆, 官正郞、贈參判。 祖元立, 以章甫抗論昏朝, 明母子義, 後以文科進, 卒官通政、府使、贈禮曹判書。 曾祖聲振, 進士, 官察訪、贈戶曹參判。 妣贈貞夫人全州李氏, 忠義衛克匡之女。 公先娶朔寧崔氏, 執義攸之女, 無子。 後娶靑松沈氏, 同知中樞府事搢之女。 在室善遇群族, 之官助公廉操, 人稱婦德。 擧二男三女 男長胤豪, 縣監 次性豪, 參奉。 女長趙正誼, 縣監; 次李思良; 次夭。 孫男礪, 正言; 女奉事李顯相: 長房出也。 男碇, 女參奉李顯允, 季房出也。 外孫男明迪, 進士; 明遇。 女正郞李秉淵、靑陵君模、進士洪遇箕、生員金聖澤, 趙出也。 女申宅夏, 所後子命協, 李出也。
嗚呼! 公居家有孝友之行, 莅官有氷蘗之稱。 立朝四十年, 退讓自守, 不汲汲於進取, 皆可書也。 然乙卯樹立, 人已服其雅操, 己巳一節, 又能表正大義, 扶植彝倫, 斯可以不朽千載矣。 公沒之十九歲, 將樹墓石, 參奉君以狀來乞銘, 謹摭狀文, 略敍其槪, 系之以銘。 銘曰。
士於安平, 慷慨高談。 逮遇至難, 口若枚銜。 允矣金公, 貞松歲暮! 往者窮奇, 憑凌觸柱。 不周旣摧, 坤維隨傾。 公奮忠烈, 尺鱗敢攖。
同事三賢, 首被慘刑。 公時席藁, 如不欲生。 不死天也, 卓乎樹立! 天常永賴, 奸諛褫魄。 義炳日月, 名高竹帛。 孝友恬靜, 與天淸白。
人所難及, 於公疎節。 天眷忠貞, 祚胤其昌。 鳳凰之阡, 睪如玄堂。 孝子翼翼, 載樹穹石。 我筆不愧, 昭視千億。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