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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79권 / 묘갈명(墓碣銘)
윤길보(尹吉甫) 묘갈명 병서(幷序)
숭정(崇禎) 기유년(1669, 현종 10) 4월 18일에 자(字)가 길보(吉甫)인 미촌선생(美村先生) 파평 윤공(坡平尹公) 휘(諱) 선거(宣擧)가 이산(尼山: 논산의 옛 지명)의 거제(居第)에서 졸하였는데, 원근의 선비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조상하였고 곡(哭)하면서 제물을 올리거나 부의를 하는 이들이 길에 끊이지 않았다.
행실 높은 진신(搢紳)들도 차탄을 마지않았고, 성상(聖上)은 연신(筵臣)의 말을 받아들여 벼슬을 추증하고 상수(喪需)를 내렸다. 장례 때는 뒤따르는 자가 거의 수백 명이었으며, 장례를 마친 뒤에는 그가 살던 고장이나 지나갔던 곳에서 모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려 하니, 군자(君子)들은 ‘성덕(盛德)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와 같구나.’ 하였다.
공은 팔송공(八松公) 휘(諱) 황(煌)의 막내아들이며 어머니 성씨(成氏)는 우계 선생(牛溪先生) 문간공(文簡公) 휘 혼(渾)의 딸이다. 선대의 덕을 이어받아 만력(萬曆) 경술년(1610, 광해군 2) 5월 28(임신)에 태어나 숭정(崇禎) 계유년(1633, 인조 11)에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두 시험에 합격한 후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을 출입하였는데 의논(議論)이 항상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제생(諸生)을 이끌고 상소하여 추숭(追崇)하는 것이 예가 아님을 논했다. 병자년에 오랑캐 금(金) 나라가 참호(僭號)하고 두 사신을 보내왔을 때 공이 의논을 주창(主倡)하여 오랑캐 사신을 목 베어 대의(大義)를 밝힐 것을 상소했다. 그해 겨울 오랑캐들이 몰려오자, 공은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들어가고 팔송공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공이 동지들과 강을 건너 샛길로 남한산성까지 도달할 것을 꾀하고 또 임사(任事)한 사람들의 안일한 잘못에 대해서도 논하고자 했으나 되지 않자 성 지키는 일을 함께 도울 것을 자청하였다. 처음 본에는 이 밑에 “명년 정축 정월에 성이 함락되었다.[明年丁丑正月城陷]”라는 8자가 더 있다.
난리가 끝난 후 팔송공이 영동현(永同縣)으로 귀양 갔는데, 그것는 지난번 척화(斥和)를 주장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해 풀려나와 금산(錦山)으로 옮겨 살았는데 공은 그때마다 모시고 따라다니면서 과거 보는 일을 일체 포기하고 성리서(性理書)에만 전념하였다.
팔송공이 세상을 뜨니 공은 형제들과 함께 이산(尼山)에서 수상(守喪)하면서 정문(情文)을 다하였다. 복을 마치고는 다시 금산으로 돌아와 시남(市南) 유계(兪棨)와 집을 지어 ‘산천(山泉)’이라는 현판을 달고는 서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토론에 열중하였다. 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김 선생 문하에 출입하면서 학문을 닦고 질의(質疑)도 하며 드디어 사생(師生)의 의(義)를 정하였다.
무자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효종대왕(孝宗大王) 신묘년에 잇달아 전설별검(典設別檢)ㆍ왕자사부(王子師傅)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 다음해에 정신(廷臣)들이 잇달아 천거하여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로 불렀으나 상소하여 사퇴하였다.
그때 공은 이미 이산(尼山)으로 돌아와서 공문(公門) 고족(高族)들과 함께 규약(規約)을 크게 정하고 자신이 솔선하여 지켜 나갔으며, 또 고을 사람들과도 음사례(飮射禮)ㆍ향약(鄕約)ㆍ사창(社倉) 등의 옛 법을 실시하였으므로 노소(老少) 없이 공을 믿고 따랐다.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승진시키고 다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불렀으나 공은 죽을죄를 지은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서울 근교(近郊)에 이르러 강도(江都)에서 일을 낱낱이 아뢰면서 사퇴하였고, 또 장령(掌令)ㆍ진선(進善)으로 불렀을 때도 모두 상소하여 사퇴하자, 상이 비답하기를, “그대가 초지를 지켜 바꾸지 않는 것은 가상한 일이나 사양하지 말고 올라오라.”하였으나 그때도 두 번씩 상소하여 끝내 사퇴하였다.
이로부터 계속 소명(召命)이 그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대궐에 나아가 진정하였다. 상이 즉시 입대(入對)할 것을 명하니 감당 못할 일이라는 뜻으로 다시 사양하였다.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재촉하여, 부를 때 권공 시(權公諰)와 송공 준길(宋公 浚吉)이 이미 조정에 들어와 있었는데, 송공은 공에게 이르기를, “만약 승명(承命)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면 성상의 뜻만 번거롭게 할 것 없이 빨리 떠나 버리시오.”하였고, 권공은 상소하여 사복(士服) 그대로 들어와 아뢰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으나, 공은 소(疏)를 남겨 둔 채 그길로 돌아왔다.
처음 본에는 “조정에 들어와 있었는데” 그 아래에 “권공이 상소하여 사복(士服) 그대로 들어가 아뢰도록 할 것을 청하여 상이 허락하였는데, 공이 다시 사양하자 송공이 공에게 이르기를 ‘만약 승명(承命)할 생각이 없으면 빨리 떠나고 무단히 성상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여 소(疏)만 남겨 둔 채 그길로 돌아왔다.” 하였다.
잇달아 장령(掌令)ㆍ진선(進善)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기해년 5월 효종대왕이 승하하고, 금상(今上)이 특별히 유시(諭示)하여 부르니 곧 들어와 임시로 집의(執義)를 받았다가 곧 사퇴하였다. 또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제수하고 식물(食物)을 하사하며 입대(入對)하게 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므로 어의(御醫)를 보내 병을 보게 하였다. 그래서 예궐(詣闕)하여 진사(陳謝)하고는 근교(近郊)로 나가 있었다.
또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ㆍ상의원 정(尙衣院正)을 제수하고 입대할 것을 다시 명했는데, 그때는 인산(因山)이 겨우 끝난 때여서 사명(辭命)하고 남으로 돌아갔다. 그후 여러 번 집의를 제수하고 또 원자강학관(元子講學官)으로 불렀으며 도신(道臣)을 시켜 안부를 묻고 어려움을 돌보아 주었다.
또 재이(災異)가 있을 때면 불러 재변을 소멸시키는 대책을 물으려 하였다. 양조(兩朝)의 은례(恩禮)가 갈수록 융숭하였지만 공은 먹을 것과 서책의 하사만 받을 뿐이었다. 공이 죽자 상은 끝내 만나 보지 못한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공의 학문 연원(淵源)과 처음부터 끝까지의 거취(去就)에 대하여는 사람들이 다 보고 아는 바이지만 그의 조예(造詣)의 천심(淺深)과 의리(義理)의 정조(精粗)는 사람마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외람되게도 그와 40여 년을 종유하는 동안 그와 서로 의리를 강마하고 잘못을 일깨우는 데 있어 피차 간격이 없었고, 또 가끔 서로 헐뜯기도 하고 농지거리도 하여 공을 자세히 알고 또 공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이 나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지만 처음 본에는 “사람마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아래 “더구나 나는 공에 비하면 황곡(黃鵠)과 양충(壤蟲)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어서 비록 공과 오래 종유하였고 깊은 감명도 받았지만 그의 깊은 쌓임을 엿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하였다. 돌아보건대 처음 본에는 ‘우(又)’ 자로 되어 있다. 늙고 병들어 죽을 때가 되었는지 그의 덕(德)을 나타내는 글을 지음에 있어 더욱 아득하기만 하여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할 지 알 수 없다.
그동안 여러 현인들이 서술한 글월을 볼 때 많기도 하고 또 훌륭하기도 하였지만 그중에서도 현석(玄石) 박화숙(朴和叔)이 쓴 행장이 공의 모든 것을 유감없이 표현하였다고 하겠는데, 거기에 의거하여 서술하면 아마 참솔(僭率)하다는 죄는 면하리라 생각된다.
화숙이 쓴 행장에 이르기를, “처음에 우계 선생이 정암(靜菴) 조 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시호)의 학문을 자기 아버지 청송공(聽松公)에게서 받은 후,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 이이(李珥)의 시호』과 함께 더욱 갈고 닦았으므로 그들 문로(門路)의 바름과 천리(踐履)의 독실함이 우리나라 제유(諸儒)들 중 누구도 그에 앞섰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팔송공(八松公)이 일찍이 그의 문하에서 놀았고 또 뒤에 시론과 맞서 대의(大義)를 바로잡기도 하였으니, 선생도 아마 그 줄거리를 이미 들어 알았으리라. 급기야 신독재 선생(愼獨齋先生)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원공(文元公)의 가전(家傳)을 이어받아 율곡 선생의 정통이 되자, 이에 선생은 어진 부사(父師)가 있음을 좋아하여 서론(緖論)들을 살펴 합치고 청력을 다하여 연구한 끝에 순수한 학문이 충적(充積)되었다.
그러나 그의 박문약례(博文約禮)한 공정(工程)은 대체적으로 파산(坡山 성수침(成守琛)을 말함)의 법문(法門)을 연원으로 하여 거슬러 절차를 밟아 올라가자면 고정(考亭 송대(宋代) 주희학파(朱熹學派)를 말함)에 뿌리를 둔 것이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선생은 덕성(德性)이 인서(仁恕)하고,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규모가 근엄하고 용모가 의젓하여 털끝만큼도 태만한 빛이 없이 한번 바라보면 곧 높고 높은 교악(喬嶽)의 기상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의리(義理)가 무궁하고 곡절(曲折)이 천 갈래 만 갈래이지만 그 모두를 한결같이 성현(聖賢)의 유훈을 기준하여 찾아내고 고증하면서 그것이 제대로 찾아지지 않을 때는 잠자는 것을 잊고 연구하였다. 평상시에도 새벽이면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은 다음 무릎을 꿇고 앉아 똑바른 자세로 글을 읽었다.
그 마음가짐은 언제나 충(忠)과 신(信)을 바탕으로 삼고 경(敬)과 외(畏)를 주축으로 하여 근엄하기가 마치 상제(上帝)를 대한 듯하였고 마음 조이기를 마치 두려움이 있는 것처럼 하였다. 한가히 홀로 있을 때에도 정밀한 성찰(省察)과 극치(克治)를 가하여 옥루(屋漏)에 부끄러움이 없었고, 잠시 주선(周旋)하는 동안에도 위의(威儀)와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저절로 법도(法度)에 맞아 발자국 하나에도 허물됨이 없었다.
그 밖에도 덕(德)에 나아가는 용기는 미치지 못할 듯이 서둘렀고 도(道)를 구하는 마음은 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듯 부지런하였으며, 지행(知行)이 서로 따르고 겉과 속이 일치되도록 마음을 쓰지 않음이 없었다.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받드는 예절에 있어서도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기 때문에 안에는 화순(和順)이 쌓이고 휘광(輝光)이 겉으로 나타나 곤제(昆弟)는 그의 행실을 믿었고 종척(宗戚)은 그의 덕을 생각하였으며, 붕우(朋友)는 그의 신의에 감복하고 향당(鄕黨)에서는 그의 인(仁)에 감화되어 그의 풍도를 우러러 흥기(興起)한 사방 선비들의 수를 거의 셀 수가 없었다.
병정(丙丁 병자년ㆍ정축년)의 화를 당하고 나서는 세상과 인연을 끊었으므로 효종대왕의 권우(眷遇)를 입어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고 붙잡아도 머물지 않았으며,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조신(朝臣), 그리고 평소 공을 알고 있는 친우들까지도 공이 잠시 굽히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선생은 확고한 자세로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아마 이른바 세상을 멀리하여 홀로 서서 상경(常經)을 지키고 대의(大義)를 책임져서 죽을 때까지 원망이나 뉘우침이 없었던 이들도 일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만은 조금도 늦출 수가 없어 자신이 강론하는 내용이 혹 대체(大體)에 관계된 것이면 제공(諸公)들에게 거듭 되풀이 하였다.
처음 본에는 이 다음에 “만약 나라 형세가 떨치지 못하거나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좌우한다는 말을 들으면 매양 서글픈 표정으로 긴 한숨을 쉬었고 또 일찍이 말하기를 ‘오늘의 급무는 사사로운 뜻을 배격함으로써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고, 문구(文具)를 없앰으로써 실속 있는 일을 하고, 사치스러운 풍습을 단속함으로써 쇠잔한 백성을 살려야 하며, 예법을 밝힘으로써 모든 폐단을 개혁해야 되는데, 그것이 되는 요건은 다 한 사람에게 있다.’ 하였다.”는 내용의 57자가 더 있다. 그와 같은 뛰어난 바탕과 독실한 공부로 이론을 세워 교훈하기로는 근래 인물에서 찾아보아도 짝할 만한 이가 드물 것이다.”하였다.
아, 이 말은 화숙(和叔)이 마음으로 좋아하고 실지 감복을 받은 데서 나온 말로 누구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여 아유(阿諛)했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또 공의 종형인 용서(龍西) 윤백분(尹伯奮 윤원거(尹元擧))이 쓴 묘표(墓表)는 문장은 비록 짧지만 뜻은 더욱 구체적이어서 공의 일생을 정온(精蘊)하기 이를 데 없이 나타냈으므로 다시 덧붙일 것이 없다.
공이 《주역(周易)》을 읽고 처음 본에는 이 아래 “스스로 말하기를[自謂]이라는 2자가 더 있다.”후천설(後天說)에 깊은 이해가 있어 첩천도(疊天圖)를 만들었고, 또 시남(市南 유계(兪棨))과 함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저술하였으며, 또 문집(文集) 15권(卷)이 집에 간직되어 있다.
부인은 공보다 먼저 죽어 경기(京畿)의 교하현(交河縣 지금의 파주(坡州))에 부장(祔葬)되었는데, 내가 일찍이 그의 행적에 대하여 처음 본에는 “지를 지어[作誌]”라 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 이공 장백(李公長白)의 묘비에다 기록한 일이 있다.
처음 본에는 “그의 아버지 이공 장백의 묘비에다 [于其考李公長白之墓後]”라는 10자가 없다. 맏아들 증(拯)이 공의 훌륭한 점을 이어받아 나라에서는 그를 징사(徵士)로 대우하고 있으며, 다음인 추(推)는 교관(敎官)을 지냈으며, 딸은 사인(士人) 박세후(朴世垕)의 아내가 되었다. 서출(庶出) 아들로 발(撥)ㆍ졸(拙)ㆍ읍(挹)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세상을 등지고도 후회가 없는 / 遯世不悔
여기 다분히 그 운치가 있네 / 蓋多有玆
성인이 말하기를 / 聖人而曰
성인만이 할 수 있다 하였는데 / 惟聖能之
그 성인이 말한 것은 / 伊聖所稱
중용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 依乎中庸
그래서 예부터 능한 이가 적었다는 것이네 / 故民鮮久
그 공부를 어떻게 하는가 / 何以用功
지와 인과 용으로서 / 惟知仁勇
그것이 삼덕이라는 것인데 / 是曰三德
그 길이 아니고서는 / 苟不由此
들어갈 수가 전혀 없다네 / 其何能入
박학 심문 신사 명현 / 學問思辨
그것이 지라는 것이고 / 是之謂知
쉬지 않고 독행하는 것 / 篤行不措
그것은 인이요 용이라네 / 仁勇是耳
거기에 종사하면 / 從事於斯
절제가 있고 치우치지 않는다는데 / 不流不倚
그 공부에 뜻 둔 공을 / 公志于此
하늘이 수한을 주지 않아 / 天閼其年
사문의 기가 꺾였고 / 斯文氣喪
사림은 눈물 흘렸네 / 士林涕漣
옛날 이 문순공이 / 昔李文純
청송 선생 명을 쓰면서 / 銘頌聽松
기와 설 장저와 걸익이 / 夔卨沮溺
행동은 달라도 도는 같다더니 / 稱停異同
공이야말로 그 전통인데 / 公實其傳
흠모하고 존숭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 曷不欽崇
지금 와서 어느 분이 / 今世何人
그를 세상에 드러냈던가 / 以褒以彰
진실하신 현석이 / 允矣玄石
더할 수 없이 표현했기에 처음 본에는 ‘摹狀’이 ‘揄揚(드날렸기에)’으로 되어 있다. / 極其摹狀
나는 그의 말을 따라 / 我述不作
이 비명을 쓰는 것이네 / 揭此銘章
<끝>
[각주]
[주01] 추숭(追崇) : 죽은 뒤에 추존하는 일로, 여기서는 인조(仁祖)가 자기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했던 일을 말한
다.
[주02] 정문(情文) :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이다. 부모상을 당하여 자식으로서 부모 잃은 슬픔과 초상을 치르는 데 있어 정해진 예도를
말한다.
[주03] 음사례(飮射禮) :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말한다.
[주04] 향약(鄕約) : 지방 자치 단체로 덕화(德化)와 상호 협조를 위하여 만든 규약으로 중국 송대(宋代) 여씨향약(呂氏鄕約)의 덕업상권
(德業相勸)ㆍ과실상규(過失相規)ㆍ예속상교(禮俗相交)ㆍ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는 4개 조항을 우리의 민정(民情)과 풍속(風
俗)에 맞게 고쳐 실시하여, 조선 사회의 풍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05] 사창(社倉) : 송(宋)의 주희(朱熹)가 제창한 제도를 조선조(朝鮮朝)에 도입한 것으로, 각 지방 촌락에 설치했던 일종의 곡물 대여
기관이다. 즉, 춘궁기(春窮期)에 곡물을 빌려 주고 가을에 원곡을 일정한 이식과 함께 받아들이는 것과, 구곡(舊穀)을 대여하고 무
이식(無利息)으로 신곡(新穀)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곡물을 대여한 후 일정 기간 이식만 받아들이는 것 등이 있었다.
[주06] 옥루(屋漏) : 방의 서북 모퉁이. 집 안에서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으로, 전하여 남이 보지 않는 곳을 말한다.
[주07] 후천설(後天說) : 하늘에 뒤진다는 뜻으로 천지조화(天地造化)의 기운(氣運)이 나타나기 이전에 만들어진 어떠한 학설이 천지조
화의 이치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것을 가리켜 선천설(先天說)이라 한다면, 이 후천설은 천지조화가 발동된 이후에 비로소 거기에
응하여 그에 맞게 꾸며진 학설을 말한다. 세상에는 복희팔괘(伏羲八卦)를 선천설, 문왕팔괘(文王八卦)를 후천설이라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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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尹吉甫墓碣銘 幷序
崇禎己酉四月十八日。美村先生坡平尹公諱宣擧字吉甫。卒于尼山之居第。遠近章甫。無不涕泣相弔。來哭奠賻者。不絶于道。搢紳之高其行者。亦爲之歎息齎咨。聖上亟用筵臣言。贈官給喪需。及葬。送者殆數百人。旣葬。其所居之鄕及所經過之地。皆將立祠以享之。君子曰。盛德之感人也如是夫。公八松公諱煌之季子。妣成氏。牛溪先生文簡公諱渾之女。胚胎前光。以萬曆庚戌之五月壬申生焉。崇禎癸酉。中生進兩試。出入泮宮。議論常出等夷。嘗率諸生上疏論追崇非禮。丙子。金虜僭號。遣二使至。公又倡論再疏。請斬虜使。以明大義。冬。虜大入。公奉母夫人入江都。八松公從難于漢城。公與同志欲渡江。冀間道達南漢。又論任事人偸安之失。旣不得行。則自請分隷城守。初本。此下有明年丁丑正月城陷八字。 難已。八松公編配于永同縣。以嘗斥和也。明年。蒙宥移居錦山。公一隨侍。自是抛棄擧業。專心于性理之書。八松公捐館。公與兄弟守喪于尼山。盡其情文。服闋。復歸錦山。與市南兪公棨築室。扁以山泉。相對討論。窮晝夜不倦。又出入愼齋金先生之門。講服質疑。遂定師生之義。戊子。丁內艱。孝宗大王辛卯。連除典設別檢,王子師傅。不就。明年。廷臣相繼論薦。遂以侍講院諮議召。上疏辭。時公已歸尼山。公門高族大。爲設規約。以身遵率。又與鄕人行飮射鄕約社倉等古法。老少信從。陞刑曹佐郞。再以司憲府持平召。公自稱死罪臣。詣畿輔。力陳江都事以辭遞。陞掌令,進善。又上疏辭。批曰。嘉爾守志不變。勿辭上來。再疏力辭。自是承 召不已。遂赴闕陳情。上卽命入對。復辭以非所當。優批趣召。權公諰,宋公浚吉先己入朝。宋公謂公曰。如不欲承命則亟去。無徒勤聖意也。權公上疏請令以士服入謁。許之。遂留疏徑歸。初本。入朝下云權公上疏請令以士服入謁許之。復請免。宋公謂公曰。如不欲承命則亟去。毋徒勤聖意也。遂留疏徑歸。 連以掌令,進善召。皆辭遞。己亥五月。孝宗大王上賓。今 上別諭召之。卽入臨。道拜執義。旋以辭遞。除掌樂院正。賜食物。使入對。辭以疾。遣御醫看病。詣闕陳謝。出寓近郊。除司業,尙衣正。又命入對。時因山甫訖。辭命南歸。自是屢有執義之命。又以元子講學官召。使道臣存問周貧。又以災異召。欲詢消弭之策。蓋兩朝恩禮。愈往愈隆。公只受食物書冊之賜而已。旣沒。上嗟惜其終不見也。蓋公學問之淵源。去就之終始。人皆見而知之。至其造詣之淺深。義理之精粗。固非人人之所可知者。然余猥從遊從之後。餘四十年。切磨規箴。無有不盡。間以訾謷諧笑相加。則知公詳而服公深者。宜莫如余也。初本。所可知者下云而況余於公不啻黃鵠壤蟲之相懸。雖從公久而服公深。不足以窺闖其閫奧。 顧 初本作又 以老病將死。其於狀德之文。益復茫然。不知所以措辭也。竊觀諸賢敍述之文。多且盛矣。而惟玄石朴和叔之狀。該貫遍包。據以爲說。則庶免僭率之咎矣。其語曰。初牛溪先生得靜菴趙文正公之學於其考聽松公。仍與栗谷李文成公麗澤益至。蓋其門路之正。踐履之篤。自我東諸儒未之或先也。八松公早遊其門。後能抗正大義。則先生固已聞知其梗槩矣。及愼齋先生得沙溪文元公之家傳。而爲栗谷世嫡。先生於是樂有賢父師。考合緖論。精專刻厲。矯變充積。其博約工程。大抵溯坡山法門而上之。以節次根柢於考亭矣。又曰。先生德性仁恕。宇量宏深。規模謹嚴。容貌莊毅。無一毫惰慢之色。望之輒知其爲巖巖喬嶽底氣象。雖義理無窮。曲折萬殊。而一以聖賢遺訓。紬繹印證。未得之。發憤而忘寢。平居晨起盥櫛。危坐讀書。無少倚側。其存心。以忠信爲主而敬畏爲要。儼然常若有臨也。惕然常若有懼也。燕閒幽獨之中。省察克治者。愈加精密而無愧屋漏。造次周旋之際。威儀動止者。自底恭謹而無愆尺步。以至進德之勇。汲汲如不及。求道之勤。縮縮如不能。其於知行相隨。表裏一致。無所不用其心。事親奉兄之禮。必極其誠。繇此和順內積。輝光外徹。昆弟信其行。宗戚懷其德。朋友服其義。鄕黨化其仁。四方之士嚮風興起者。幾不可勝數矣。遭値丙丁之禍。遂乃絶意於世道。及被孝廟眷禮。召之而不至。援之而不留也。上自當宁。下逮朝著。與夫親友之素號知公者。無不欲其暫屈。而先生確然一定而無變。所以遯世獨立。守常經而任大義。終身無有怨悔者。固不外是矣。然而憂國之誠。不敢少懈。苟或所講關係大體者。輒爲諸公反復不置。初本。此下有而如聞國勢不競。匪人當塗。每惕然太息。嘗曰。今之急務。必黜私意以振頹綱。除文具以做實功。禁侈習以蘇殘民。明舊章以革弊瘼。大要皆在一人五十七字。 其卓絶之姿。篤實之功。立言敎訓。求之挽近。儔匹鮮矣。嗚呼。此和叔心悅誠服之語。而人不以爲阿所好者也。至其從兄龍西尹伯奮所敍墓表。則文雖約而意愈隆。其於公之始卒精蘊。至矣盡矣。更無容贅焉。公讀易。初本。此下有自謂二字。 有默契於後天說。作疊天圖。又與市南共著家禮源流。又有文集十五卷藏于家。夫人先沒而祔葬于京畿之交河縣。余嘗著 初本。著作誌。 其行于其考李公長白之墓石 初本無于其以下十字 矣。長子拯克趾公美。朝廷待以徵士。次推曾爲敎官。女爲士人朴世垕妻。庶出男撥,拙,挹也。銘曰。
遯世不悔。蓋多有茲。聖人而曰。惟聖能之。伊聖所稱。依乎中庸。故民鮮久。何以用功。惟知仁勇。是曰三德。苟不由此。其何能入。學問思辨。是之謂知。篤行不措。仁勇是耳。從事於斯。不流不倚。公志于此。天閼其年。斯文氣喪。士林涕漣。昔李文純。銘頌聽松。夔卨沮溺。稱停異同。公實其傳。曷不欽崇。今世何人。以褒以彰。允矣玄石。極其摹狀。初本。摹狀作揄揚。 我述不作。揭此銘章。<끝>
宋子大全卷一百七十九 / 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