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국내에서 동티모르 관련 여행안내서는 더더욱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동티모르에 가보시고 싶다면,
혹은 최소한의 간접경험을 워하신다면 다음 글은 훌륭한 안내글이 될것입니다.
다음 글은 동티모르를 다녀온 어느 청년이 월간조선 2003년 8월호에 올린 글인데
내용이 유익하고 재미도 상당합니다. 뭐, 월간조선에 오른 글이니 확실한 검증이 된 글이라
보시면 되겠죠?
내용이 길어 프린트 하여 보시면 좋을듯 합니다.
동티모르를 다녀와서...
글 권순도
약력 · 1978년 서울 출생
· St. Peter's Lutheran 고등학교 졸업 (호주, 브리스번)
· Griffith University 영화제작학과 졸업 (호주, 브리스번)
· 저서 '남태평양을 건넌 상록수의 혼' (2003년 5월 출판 )
군대에 입대한 날이 엊그제 같은데, 군복무 중 동티모르 파병을 다녀온 지 벌써 1년이 그리고 전역을 한 지 1개월이 넘었다.
대한민국 성인 남자들이 모이면 주로 정치이야기와 군대생활 이야기 밖에 할 것이 없다고 하는데, 나에게도 군생활은 특별한 추억거리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나는 동티모르 파병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껴 군생활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군생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이를 회피하려는 청년들이 간혹 있는데, 군이라는 사회가 극단적으로 제한적이고 통제적 이라는게 사실이라면, 역설적으로 그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발견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다면 그런 청년은 어디에서나 건설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어 건국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사변이 일어나 전 국토가 전쟁의 참화 속에 있었듯이 21세기의 첫 신생국 동티모르는 오늘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다. 비록 사병의 눈으로 제한된 시각으로 본 모습이지만 동티모르 파병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을 위해 나의 경험을 짧게나마 이야기하려 고 펜을 들었다.
- 출국
동티모르 참사 직후인 1999년 10월 UN기를 휘날리며 동티모르에 도착한 상록수부대는 지난 3여 년 동안 주민들로부터 '달라이 무띤'(다국적군의 왕), '코레아 빠구스'(한국 최고)라고 불리며 한국이 그들의 '친구 국가'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이러한 한국군의 파병이 처음부터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상록수부대의 파병결정이 있기 전, 인도네시아 현지교민들은, 한국군의 동티모르 파병 때문에 인도네시아 정부와 국민들로부터 받을 불이익을 예상해 한국신문에 파병 반대광고를 싣는 등 적극적으로 파병을 반대했다. 또한 야당은 현지 민병대와의 교전 가능성과 인도네시아와의 외교문제 및 교민 안전문제 등을 우려하여 전투병 대신 공병이나 의무부대를 파병하자는 대체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뜨거운 논쟁 속에 결국 전투부대의 파병이 결정되어 '육군 제 522평화유지단'의 파병이 결정되었다. 세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 보면 그것이 얼마나 옳은 판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평화유지 활동은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국위선양을 할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재건을 위해 세계은행 등 많은 단체로부터 자본이 유입되기 때문에 직접적인 국익을 창출할 수 있고, 평화유지활동에 소요된 비용은 유엔경비 지급절차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 또한 활동에 참여한 병사들한테는 값진 해외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
흔히들 상록수부대라고 하면 동티모르에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고 오해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상록수부대는 대한민국 육군 특전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동티모르 담당지역의 치안을 주임무로 하는 전투부대이다. 봉사활동은 부여된 임무가 아닌 상록수부대가 자체적으로 실시한 순수한 봉사활동이다. 부대원의 구성은 특전사가 주류를 이루고 사병의 경우 전육군에서 지원자를 받아 분야별 시험·면접을 통해 적합한 인원들을 선발한다. 나의 경우 제 5진(단장: 남인우 대령) 사진병으로 파병되어 사진·비디오 촬영 및 영어통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부대활동을 기록할 기회가 많았다. 제5진의 출국조는 인원을 반으로 나누어 제1제대와 2제대로 편성되었다. 제1제대는 파병 신고식이 끝난 2001년 10월 17일 저녁 동티모르를 향해 출국하였고, 내가 속해있던 제2제대는 그로부터 12일 뒤인 10월 29일, 동티모르를 향해 출발하기로 되었다. 파병전 특수교육을 마치고 출국날이 되어 버스를 타고 교육장을 나서는 길목에는 동원된 특전사 병사들이 줄지어 서서 박수를 치며 우리의 무사복귀를 기원해 주었다. 특전사 병사들의 박수소리에 우리 모두는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공항까지 가는 동안에는 반년동안 보지 못할 고국의 아름다운 야경을 눈에 한껏 담았다. 공항에 도착하자 늦가을의 추운 밤바람을 맞고 우리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있는 육군 군악대의 모습이 보였는데 같은 군인의 입장에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군악대의 대열 끝으로 활주로에 대기하고 있는 캄보디아 국적 '캄푸치아' 항공기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 대열을 갖추자 추운 찰나에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이 군악대의 연주가 시작되었고 이는 달밤의 정적을 순식간에 깨어 버렸다. 우리는 마중 나온 간부들과 악수를 나누며 차례대로 비행기 탑승대에 올랐다. 멀리서 볼 땐 멀쩡해 보이던 비행기는 가까이 다가와 보니 꼬리날개에 직경 약3m 되는 타원형 구멍을 알루미늄 용접으로 '땜빵'해 놓은 모습이 보였다. 캄보디아 국적의 구 소련제 비행기라는데 대해 안 그래도 불안해하고 있던 상태인데 꼬리날개에 붙은 살벌한 흉터를 보는 순간 '아, 드디어 고생길이 열렸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절로 들었다.
나는 애써 설레이는 기분을 증폭시켜 불길한 예감을 떨치려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해외파병이 막 시작되려는 그 순간에도 출국을 한다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병사 신분으로 군복무를 하는 중에 그렇게 출국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일이었다. 항공기 속에서 우리는 설레임반 불안함 반으로 눈을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인도네시아 셀레베스 섬의 우중판당(Ujupandan)에서 1시간 30여분 재급유를 한 뒤 아침 6시 30분, 드디어 동티모르의 바우카우(Baucau) 군용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 주둔지 도착
우리는 바우카우 비행장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모두 내린 뒤 비행장에서 잠시 대기 하였다. 이윽고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소련제 MI-26 헬기가 병력들을 나누어 태우고 어디론가 바쁘게 날아갔고, 약 한 시간 대기 후에 내 차례가 되었다. 우리 부대원 100여명을 태운 거대한 맘모스 헬기는 굉음을 내며 수직상승을 하였는데 마치 거대한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헬기 조종석에는 3명의 러시아 조종사들이 타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았다. 눈치를 챈 나와 전우 몇 명은 그것이 제발 보드카 때문이 아닌 기후 때문이기를 바랬다. 조종사들의 술기운 때문인지 기류 때문인지 헬기는 공중에서 기우뚱거리며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며 날아다녔다. 기내에는 긴장감이 돌았고 부대원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들도 모르게 각자의 총을 움켜쥐었다. 하긴 이런 경우를 대비해 우리는 특수훈련을 받지 않았었던가! 다만 낙법을 적용하기엔 고도가 너무 높았던게 고민이었다. 20분간 시끄러운 프로펠러 엔진의 소리를 들으며 헬기를 타고 내려간 곳은 주둔지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에 있는 라우템(Lautem) 지역의 푸일로로(Fuiloro) 평원이었다.
왜 헬기가 주둔지 가까이에 내리지 않을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MI-26 헬기의 프로펠러 바람이 너무 세어 근처 집들의 지붕이 날아가기 때문에 부대에서 제일 근접한 평원에 내린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헬기의 8개의 주익 중 한짝만 값으로 쳐도 2억원이 넘는다고 했다.
부대로 향하는 길에서 지나치는 현지인들은 하나같이 우리를 향해 '꼬레아 빠구스!'(인도네시아어로 '한국 좋다!'는 의미)를 외쳤다. 그곳에 도착하기 전 한국군을 보는 현지인들 마다 환영인사를 외치며 일제히 반긴다는 말을 들었을 때 좀 과장된 말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달리는 길에 계속 파괴된 집과 건물들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상록수부대 연병장이 보였다.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 동안 어느새 상록수부대 주둔지 안으로 접어들었고, 위병소에서 근무를 서던 장병들의 힘찬 경례소리가 들렸다. 안그래도 더운날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는 장병들의 목에는 굵은 핏줄이 섰다. 달리는 차량 안에서는 그리 못 느꼈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땅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제1제대로 먼저 도착한 병사들의 안내로 우리가 생활할 막사로 들어섰다.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한숨부터 나왔다. 목조구조에 검은 군용텐트 천막을 지붕으로 한 건물 안에는 4진 병사들이 버리고 간 물품이며 먹다 남은 UN 부식, 군용 야전침대, 그 위에 깔려 있는 합판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관물대로 쓸만한 가구(?)는 먼저 1제대로 도착한 병사들이 맡아 놓아서 나는 그때부터 로스팔로스를 떠나는 날까지 합판 쪼가리로 만든 어설픈 벤치를 서랍장으로, 종이 박스를 서랍 삼아 사용하였다.
맥이 탁 빠져 버렸다. 열악 그 자체였다. 막사 밖에는 현지 고용인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4진 병사들이 버린 쓰레기를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를 정리하다가 필요 없는 물건이 나와 밖으로 던지면 그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첫날부터 '내가 여기 왜 왔나?' 싶었고 '어떻게 6개월이란 긴 세월을 버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 동료 병사들도 나와 같은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후에 오쿠시로 이동해서 극단적인 열악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UN의 독일 아가씨
다음날이 되어 전날의 쇼크에서 조금 벗어 난 나는 공보과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공보과에 들어서니 현지 직원이 보였다. 현지어 통역을 담당한다고 했으며 나와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였다. 인사를 나누고 조금 있으니 공보과장님이 나를 찾아 촬영 장비 챙겨 앞에 보이는 차량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였다.
장비를 챙겨 차량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뒤에 주차된 흰색 UN 차에 어떤 금발 미녀가 타는 것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어서 공보과장님이 내가 탄 차의 앞자리에 타시고 민사과장님이 운전석에 앉으셨다. 우리 차가 출발하고 우리 차 뒤를 그 금발 여자가 따랐다. 순간, 전날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솟구쳤다.
민사과장님이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간 곳은 로스팔로스 상록수부대 주둔지 바로 옆의 Home(호메)마을 이란 곳이었다. 그곳은 상록수부대 4진 때부터 민사 활동의 일원으로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의 성공사례를 본보기로 한 마을 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마을 주민 주거지를 다니며 우리 부대원 들이 마을 곳곳에 우물설치, 밭을 일구어 급수차로 물을 공급하는 모습, 옥수수, 상추 등의 농작물 재배를 돕는 모습을 직접 보고, 마을 초등학교에 고국에서 지원해 준 칠판 설치 등의 부대 활동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당시 나는 왜 그 여자가 그런 것들을 보러 온 지 몰랐다. 영어 발음을 들으니 영어권 나라에서 온 것 같지 않고 스칸디나비아 쪽에서 온 것 같았다. 민사과장님한테 물어 보니 독일 여자라고 했다. 그녀는 UN 공보과에서 일했는데 우리 부대 활동을 홍보 하고자 호메 마을을 순시했던 것이었다.
그녀한테 말 좀 걸어 보려해도 장교들 앞에서 실례가 될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기념사진 촬영시 그녀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로도 촬영 해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나중에 부대로 돌아와 헤어질 무렵 산만한 분위기의 틈을 타서 그녀한테 기껏 한다고 했던 말이 'Excuse me Miss, I'm not sure whether I got those shots right with your camera' (아가씨 실례하지만 제가 당신 카메라로 제대로 촬영했는지 확실치 않네요) 였다.
그녀의 대답, 'Yes, you've got them right' (제대로 찍었어요)
이것이 나와 그녀의 첫 대화였다. 간부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알아낸 그녀의 이름은 '안젤리카'였다. 그녀는 UN 공보과 라우템 지역 담당으로 일했고 나는 상록수부대 공보과에서 일했던 관계로 나와 그녀의 만남은 잦아졌다. 그녀가 우리 공보과에 볼 일이 있어서 오면 나 밖에 통역할 사람이 없어 서서히 그렇게 만나다가 블루엔젤(Blue Angel) 작전과 같은 영외 촬영에서 그녀를 만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가졌다. 우리는 서서히 친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기무반장한테 가벼운 주의를 받기에 이르렀다.
군대와서 꿈에도 예상 못했던 출국을 하고 또 금발 미녀와 사귀게 될 줄이야. 하지만 전투복에 달린 태극기와 병사라는 신분이 내 청춘의 연애 사업 확장에 많은 제약을 주었다. 하긴 그녀가 나보다 4살 연상이라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 상록수 봉사활동
도착하기가 무섭게 나는 다음날부터 사진 촬영임무에 투입되었다. 내가 소속되었던 공보과(Public Information Office)에서 단골메뉴로 대외 부대활동을 홍보할 때 쓴 것이 블루엔젤 작전, 태권도 교육, 교회와 성당 건축, '꼬레아 $1 장학회' 그리고 '호메'마을 사업이었다. 이는 국내 언론을 통해 단편적으로 소개되었다. 블루엔젤 작전은 지역 곳곳을 마을 단위로 순회하거나, 때로는 흙먼지를 마시며 정글을 지나고 격오지에 가서 주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치는 작전인데, 주요활동은 의료지원, 영화상영, 이발지원, 농기구 정비, 구호품 전달 등이 있다. 상록수 2진 때까지는 지원이 필요할 때만 했던 분야별 봉사활동을 3진 때부터 통합하여 정기적으로 실시하면서 이를 블루엔젤 작전이라 명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일의 편의를 위해 보통 학교와 같은 건물에서 하게된다. 전기공급이 되지 않는 지역이 대부분이므로 부대에서 발전기 한 대를 트럭에 싣고 간다. 잠시 후 발전기에 시동이 걸리고 발전기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블루엔젤 작전은 시작된다.
특히 의료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주민들에게 상록수 의료 지원팀은 천사와 같은 존재였다. 교실 안이나 적당한 나무 그늘에 자리잡은 의료 지원팀은 분주히 의료장비와 약이 든 상자를 차량에서 꺼내어 환자 진찰 준비를 완료한다. 그리고 진찰을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주민들은 다소 초조한 눈빛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영화상영은 보통 빔 프로젝터를 이용해 교실과 같은 밀실에서 실시하거나 적당한 밀실이 없을 경우 야외에서 TV를 이용해 실시하는데 그 영화 한두 편을 보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다 모인다.
야외에서 상영시엔 모르나 교실 같은 밀실에서 영화상영을 하면 창문을 군용 우비나 검은 천으로 막아야 하기 때문에 담당 병사들이 꽤나 고생을 한다. 빔 프로젝트 화면 설치하랴, 꽉 막힌 더운 방에서 현지인들 특유의 암내와 땀내 맡으랴.... 나도 촬영 관계로 몇 번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노고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고 이는 두시간 동안 참아야 하는 것만 빼면 훈련소 시절의 화생방 훈련을 연상시켰다.
이발지원은 말 그대로 주민들의 머리를 이발해 주는 활동인데, 보통 2∼3명의 부대원들이 주민들을 상대로 하루에 많으면 한 사람마다 60∼80명의 머리를 손질해 준다. 주민들 위생상태가 말이 아니므로 이 또한 대단한 노고이다. 주민들 거의가 머리에 이를 품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어린 자식을 앉혀 놓고, 또는 어린아이들이 원숭이처럼 줄지어 앉아 서로 이를 잡아주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러한 광경은 다른 태평양 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런 모습을 촬영하려고 자세를 잡으면 어린아이라도 이 잡기를 중단한다. 말은 안 해도 창피한가 보다.
위생상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동티모르 수도인 딜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 가축들이 제멋대로 다니는데 그 종류는 주로 물소, 소, 말, 개, 돼지, 닭 등이다. 그런 가축들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이 물소, 소, 말과 같은 큰 동물들의 배설물이다.
수도를 제외한 곳의 현지인들은 거의 맨발로 다니는데 배설물을 밟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어린아이들은 심지어 그것들을 집어다가 자기 친구들한테 던지고 논다. 그런 모습을 보고 현지 아이들과 악수는 되도록 삼가하게 되었다. 차를 타고 지나거나 멀리서 다가 오는게 보이면 현지아이들이 보통 악수를 하려고 하거나 손뼉을 치자고 손 올리는데 나의 경우 그전에 먼저 반갑고 적당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손을 내렸다. 대부분 그러면 인사가 되는데 짖꿎은 녀석들은 내 팔을 잡아 끝까지 인사를 적극적으로 마무리한다.
농기구 정비는 전기 그라인더로 현지인들의 정글도나 도끼 같은 농기구의 날을 갈아주는 것을 주로 한다. 한 지역에 블루엔젤 작전을 나가면 그곳에서 하루종일 있으니 주민들은 농기구들을 쭉 늘어놓고 느긋이 기다린다.
그런데 한번은 한 노인이 자기 것을 먼저 다듬고 빨리 가서 영화를 보려고 새치기하여 그 지역 아주머니나 할머니들한테 호되게 욕먹는 모습도 보았다. 또 한번은,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모르나, 한 할아버지가 두툼한 도끼 날을 가져와 그것을 갈아서 칼로 만들어 달라고 하여 매우 황당해했던 적도 있다.
국내 기업들의 지원을 받아 가져간 옷, 치약, 칫솔, 비누 등의 생필품들을 나누어주는 구호품 전달활동을 하는 날은 동네 잔칫날로 주민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 넘친다.
태권도 교육은 상록수 태권도 교관들에 의해 상주 막사에서 실시되었는데 주민들의 높은 관심과 호응으로 참여 인원의 수가 날로 늘어만 갔다. 최근까지 많은 학살을 경험해서인지 주민들의 태권도에 대한 열의는 상당했다.
주민들의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부대는 담당 지역내의 레우로(Leuro) 지역과 세뻬라따(Sepalate)지역에 각각 교회와 성당 공소 건물을 지어 주었다. 상록수 공병들이 이 공사를 위하여 땀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 밖에도 공병들은 도로 복구 작업이나 물이나 도랑에 빠진 차량 구난 등의 활동을 하였다.
라우템 지역 상주작전 중대에서 부대원들이 약간의 돈을 기부해 지역 학생들을 지원한 일도 있었다. 어느 날 블루엔젤 작전 중 현지교사 2명이 활동순시를 하고 있던 단장을 찾아 부대가 오쿠시로 이동한 후에도 학생들을 위한 이런 지원이 계속될 수 있도록 부탁을 해왔다. 이에 부대는 '꼬레아 $1 장학회'를 발족하여 모금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장병들의 적극적 참여와 주민들의 높은 호응도 때문에 이는 당시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알려져 우리나라 국민들의 많은 참여로 이어졌다.
'호메'마을 사업은 상록수 4진부터 시작되었다.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를 본보기로 부대 옆 '호메'마을 주민들의 '자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마을에 우물 설치를 지원하고 밭에서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마을 초등학교에 국내에서 지원 받은 칠판을 설치하는 등의 일을 해 주었다. 또한 매주 토요일을 '환경의 날'로 정해 부대원들이 호메마을 거리로 나가 쓰레기를 치워 주기도 하였다.
- 건아들의 투쟁
남태평양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동티모르에도 말라리아의 위험이 있다. 파병 전 말라리아 예방교육이 있었고 동티모르에 도착해서도 예방교육이 몇 차례 더 있었다. 상록수 5진 장병들은 매주 월요일 '라리암'이라는 말라리아 예방약을 복용해야만 했다. 위에 아무 탈 없는 나도 가끔 그 약을 복용하면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으니, 소문대로 그 약이 독하긴 독했던 것 같다. 그런 예방조치에도 불구하고 모기들은 쉴새 없이 달려들어 몇 명의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했다. 본격적인 우기에 들어서면서 모기가 급증한 것이다. 신기한 것은 건강해 보이고 아무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의 혈액을 검사해도 말라리아 양성반응을 보인 경우가 많았다. 말라리아균에는 감염되어도 건강한 사람들한테는 증상이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동티모르에서 생활한지 약 2개월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멀쩡히 앉았다가 갑자기 급히 휴지를 챙겨 어디론가 뛰어가는 장병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은 늘 비워질 기미가 안 보였고 속옷 빨래 수도 급증했다. 말라리아는 파병 전 국내에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장염'이란 게 우리를 괴롭힐 줄이야! 바로 옆에 있는 전우가 장염을 앓을 때까지도 나만큼은 안 걸릴 자신이 있었다. 착각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더니, 뒤에서 무엇인가 낼름낼름거려 가스를 분출하고 속은 것을 깨달아 화장실을 자주 다니기 시작했다. 밤에 자는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반응이 왔다.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변을 봐도 내용물이 거의 액체였다. 휴지로 자꾸 닦다 보니 뒤가 따끔거렸다.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조금만 참으면 낫겠지 하고 버티다가 결국은 의무대 신세를 졌다. 그런데 드디어 다른 고문이 시작되었다. 링거를 맞으며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옆에 다른 이유로 온 환자들이 '짜파게티'라도 끓여먹을 때면 그 배고픔과 먹지 못하는 고통을 어떻게 달래야 할 지 몰랐다. 그럴 때면 남들은 아직 덜 아파서 정신을 못 차려 그렇다며 놀려댔다. 링거만 맞고 있자니 소변만 엄청 마려워 링거 들고 화장실 다니는 것이 하루 가운데 최고의 운동이었다. 정말 그 당시 치유 불가능한 만성장염에 걸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한의 건아는 질병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얼마 후 완전히 회복하였다.
장염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위생상태가 나쁜 현지 아이들과 악수를 한 상태에서 손을 씻지 않고 과자를 집어먹는다던가 하면서 균이 침투하지 않았나 또는 식기를 세척할 때 쓰는 강물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 나의 짐작이다. 부대원들 사이에서 이런 고생을 치르며 이런 이상한 말이 생겨났다. '말라리아 5단에 장염 3단'
풀이하면 말라리아 5번 걸리고 장염 3번 걸렸다는 것이다.
주병력이 특전사이다 보니 도합이 꽤 많이 나와 달인(?)의 경지까지 오른 경우도 보았는데 소문에 의하면 도합 22단이나 되는 최고수도 탄생했다고 한다.
- 주말의 명화
블루엔젤 작전의 영화상영 외에 상록수부대는 지난 2진 때부터 로스팔로스 주둔지 연병장에서 주민들을 위해 매주 금요일 영화 상영을 하였다.
영화상영 전 한국 영상홍보물이나 한국 가요프로를 틀어 주민들의 주의를 사로잡는다. 주민들은 약 1,500명에서 2,000명 가량 모이는데, 입장이 허락되는 시간까지 위병소 밖에서 기다린다. 보통 저녁 6시 반쯤 되어 입장이 허가되는데, 들어올 때에 부대원들로부터 한국 군용건빵을 받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히히덕 거리며 건빵을 받은 그들은 연병장에 설치된 프로젝터 화면 앞으로 하나둘씩 모인다. 마치 잔치라도 벌이는 듯 시끌벅적한 분위기로 모인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나 놀이시설이 없으면 이렇게 좋아할까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주민들은 성룡이 주연한 영화를 선호하는데, 성룡의 과장된 몸짓과 코믹한 연기는 대사를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이 즐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봐온 가운데 주민들이 가장 반응을 많이 보인 장면은 성룡의 영화 '엑시덴탈 스파이'에서 성룡이 옷을 벗고 도망가는 장면이었다. 웃음, 갈채와 휘파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단순한 사회에서만 살아온 사람들 이어서인지, 예술영화, SF 또는 법률 등을 소재로 다루는 복잡한 문명사회의 영화를 이해하기보다는 누구나 알기 쉬운 슬랩스틱 코메디영화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쉬운 예로, 한번은 '스타워즈'를 보여 주었는데, 주민들은 등장하는 우주선과 외계인들을 보고 '깡통 날아다닌다', '가짜 사람 나온다'고 하면서 자리를 뜨더란다. 일부는 불만의 표시로 돌멩이까지 집어던졌다고 한다.
- 딜리 출장
우리나라의 UN에서의 책임이 증가할수록 국익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부분을 통해 독자들이 이해했으리라 생각된다. 상록수활동의 대외홍보를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한국군의 신뢰도를 높여 더 많은 국익 창출을 유도하기 위해 공보과에서는 상록수부대의 활동을 대외적으로 알리는데 많이 노력하였고 2001년 11월 13일, 수도인 딜리에 있는 UN 및 국제적인 언론매체 기관을 방문해서 부대활동을 홍보하기 위한 출장이 이루어졌다. 당시 동티모르 언론매체들은 한국군의 모범적인 임무수행에 대해 많은 호평을 하고 있었지만, 현지 언론매체 기관의 분위기도 파악하고 우리 공보과의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겸사겸사 출장을 가게된 것이다.
로스팔로스에서 딜리까지의 거리는 약 200Km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비포장도로가 많고 길이 꼬불꼬불하여 차를 타고 약 5시간 걸렸다.
오전 7시 50분, 상록수부대의 주요 차종인 군용 짚차 '레토나'에 공보과장, 공보장교, 운전병 그리고 내가 탔고, 딜리로 가는 길에 태국군 주둔지에 파견된 한국 연락단, 매티네로(Mettinaro) 동티모르 방위군 사령부에 파견된 상록수 태권도 교관들 그리고 딜리 연락반에 전해줄 물품과 우리 개인 짐들을 싣고 우리는 딜리로 향해 떠났다.
이번에도 역시 다른 남태평양 나라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기저기 구멍이 패인 도로 위를 달렸다. 거기다가 도로 중앙으로 웬 개, 돼지, 닭, 물소는 그렇게 많이 등장하던지!? 보통 동물들은 도로에 느긋이 엎드려 있으며 차량이 와도 비킬 생각을 하지 않는데, 웃기는 것은 간혹 동물들이 도망간다고 뛰면 계속 길 따라 앞으로만 뛰는 것이다. 아마 동티모르 사태 당시 주민들과 같이 길에서 도주했던 충격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었나 싶다.
길은 구멍난 포장길과 흙먼지를 일으키는 비포장길의 연속이었다. 차가 제 속력을 못 내니 차 안은 도로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푹푹 쪘다. 에어콘이 없는 군용 자동차라서 할 수 없이 창문을 열고 달렸는데 흙먼지를 뒤집어쓰느라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해안도로를 끼고 달릴 때는 태평양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장관이 펼쳐지기도 했다. 가끔 내려 사진촬영도 하고 머리도 턴 후 약 4시간 정도 달렸더니 매티네로 동티모르 방위군 사령부가 나왔다. 그곳은 우리나라 육군 사관학교와 같이 동티모르 방위군을 길러 내는 곳이기도 해서 상록수 태권도 교관들이 태권도 교육차 파견을 나가 있었다. 점심 식사 때가 되어 우리는 그곳 태권도 교관들과 같이 식사를 했다. 여러 나라 군인들이 보였다. 한국군과 같이 그들 나름대로 동티모르 주민에게 도움을 준다는 명목으로 그곳에 파견되어 생활하는 군인들이었다. 식사는 뷔페식으로 무제한 먹을 수 있었다. 스테이크, 냉동 감자튀김, 샐러드, 과일 주스, 아이스크림 등 모든 식품을 호주에서 들여 온 것이었다. 호주는 동티모르에 주둔하는 각국 UN 평화유지군의 부식을 공급했다.
상록수부대에도 예외 없이 호주산 부식이 공급되었다. 동티모르 때문에 호주가 이래저래 돈을 많이 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딜리를 향해 달렸다. 약 40분을 달려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해안선 끝으로 책에서만 보았던 예수상이 보였다. 그 언덕을 끝으로 평지에 내려와서야 비로소 딜리에 도착했다.
한때는 아름다움을 자랑했을 법한 이 도시에도 파괴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수도인 만큼 주민들 콧대가 좀 높은 듯 했다. 라우템 지역에서는 차를 타고 달리면 주민들이 모두 상록수 부대원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환영하던데 반해 딜리에서는 좀 푸대접(?)을 받는 듯 한 느낌을 주었다. 간혹 '꼬레아 빠구스!'를 외치며 환영하는 주민들도 있었으나 그 수가 라우템 지역과 비교했을 때는 극히 적었다.
손을 먼저 흔들어도 못 본척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로에는 제대로 작동되는 신호등이 거의 없었고 번호판 없이 달리는 차들도 많았다. 로스팔로스에 비해 신형차들이 많았는데, 거의가 일본제였다. 호주군을 비롯한 타국 평화유지군이나 UN 직원들이 일제차량을 사용하는데 비해 상록수 부대는 순 국산차량을 이용해 가슴이 뿌듯했다.
딜리 시내의 UN 직원 숙소인 '크로커다일 엘리'(Crocodile alley)라는 곳에 있는 컨테이너를 개조하여 사용하는 숙소건물에 짐을 풀었다. '크로커다일 엘리'의 컨테이너 숙소들은 일명 '고베 하우스'라고 불렸다.
일본 고베 지진 당시 급히 만들어 사용했던 컨테이너 임시숙소를 지진복구 후에 동티모르에 기증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들 불렀다. UN 평화유지군 사령부 건물은 맞은켠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파병 전 책에서 본 그대로 건물의 일부가 타서 파괴된 채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의 식사는 점심식사를 했던 메티네로에서와 비슷하게 나왔다. 여러 나라 군인들이 모였는데, 다들 끼리끼리 먹는 분위기였다. 호주 군들은 그들의 규율상 개인화기를 식당에서도 휴대했다. 다른 호주 군들은 소총을 다 메고 있는데 어느 호주 여군이 총이 없는 것 같아 물어보니 허리에 찬 권총을 보여주었다. 여군장교 였던 것이다. 식당까지 실탄 장전한 총을 들고 오는 그들을 보니 약간의 거부감이 생겼다.
다음 날 나는 공보장교와 함께 그곳 언론기관들을 돌아다니며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부대활동을 홍보할 것인가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일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많은 현지신문사들과 라디오, TV 방송국 등으로부터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내었다.
평화유지군 사령부 공보과에 볼 일이 있어 갔는데, 우리가 만나려던 장교가 없어 도로 나왔다. 그러다가 길이 헷갈려 물어보려고 귀퉁이를 지나는데, 한 태국군 대위가 컴퓨터로 에로영화를 보고 있었다. 뭐 장교라고 그런 거 못 보란 법은 없지만, 명색이 UN 평화유지군 사령부에서 일하는 장교인데 일과시간에 그런 '탄생의 신비'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다니 보기가 좋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동티모르가 안정을 찾아 할 일이 적어진 좋은 징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해외에서는 각 개인의 행동이 그 개인이 속한 국가의 이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계속 연구에 몰두하였다.
- 학살현장
딜리의 항구 부두 근처에 동티모르에서 가장 오래된 모타엘(Motael) 성당이 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이 성당은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91년 11월 12일, 동티모르에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산타쿠르즈 학살사건의 발발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991년 11월, 포르투갈 국회의원단이 동티모르를 방문할 예정이어서 동티모르인들은 이를 그동안 인도네시아의 잔혹한 행위를 국제사회에 고발할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그들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국회 의원단의 동티모르 방문은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중지, 거부되었고 이에 동티모르인들, 특히 젊은이들은 극도로 분노하여 동티모르 전역에는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이 무렵 인도네시아 경찰의 단속은 강화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28일 인도네시아 경찰의 급습을 우려한 동티모르 청년 '세바스찬 고메스'(Sebastian Gomez)가 모타엘 성당에 피신해 있다가 인도네시아 비밀경찰로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2주 뒤인 11월 12일, 희생자를 애도하는 뜻에서 모타엘 성당에서는 추모식이 거행되었고, 식 후 참석자들은 산타크루즈 공동묘지까지 행진하였다.
성당을 나설 때 얼마 되지 않던 무리에 도로에 있던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수천 명으로 그 수가 늘었다. 묘지에 도착한 이들은 현수막을 설치한 후 동티모르의 독립을 부르짖었다. 이들의 행사가 끝날 무렵 구멍이 뚫린 벽돌로 만들어진 묘지 울타리 너머로 군용트럭이 한두 대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 트럭에서 내린 완전무장한 200여 명의 인도네시아 군인들은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였다. 순간 묘지는 도망가는 군중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묘지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총알은 계속 군중을 향해 끊임없이 날아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300명의 시위자들을 체포한 인도네시아군은 도망간 시위자들을 잡기 위해 딜리 시내의 집들을 하나하나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동티모르 측에서 추정하여 발표한 이 사건으로 희생된 동티모르인의 희생자는 사망 273명, 행방불명 255명, 부상자 376명으로, 희생자의 대부분이 20세 이하의 젊은이들이었다. 사망자들은 신원확인이나 가족에게 통보도 없이 모두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매장되었다. 이 산타크루즈 학살사건은 당시 동티모르에 있던 여러 외국인들에게 목격되었다. 외국인들 가운데 80년대에 동티모르에서 발생한 두 건의 대량학살 사건과 포르투갈 의원단의 방문을 보도하기 위해 현지에 와있던 외국기자들은 인도네시아군의 검색 망을 피해 이 내용을 외부세계에 알렸다. 이 사건은 비무장 학생들에게 발포한 중국의 '천안문 사태'와 비교되어 '제 2의 천안문 사태'라고 언론들이 발표해 충격을 주었고, 외부 세계 사람들은 비로소 동티모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이 사건이 서방 언론인들과 인권단체에 의해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게 되자, 인도네시아군은 묘지에 있었던 군중들이 폭도로 변하여 사태수습을 위해 정당방위로 발포했다고 주장하였고, 희생자는 사망 19명, 부상자는 91명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이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전 세계의 언론과 인권단체에 의해 계속 거론되어 점점 사건의 진상이 파헤쳐졌다. 미국, 호주, 캐나다, 영국, 독일, 포르투갈 등의 나라에서 인도네시아 정부를 비난하고 경제, 군사 원조, 무기 수출을 중지하겠다고 발표한데 이어 1992년 3월에는 인도네시아의 구 종주국이었던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대한 원조를 중지하겠다고 발표하였다.
1994년 5월에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제1회 동티모르 문제 아시아 태평양 회의'가 열려 아시아 국가들도 동티모르에 대해 동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을 표시하였다.
1996년 12월에는 노르웨이의 노벨상 위원회가 동티모르 천주교 지도자 '카를로스 벨로'(Carlos Belo) 신부와 동티모르 해외 특별대표인 '호세 라모스 홀다'(Jose Ramos Horta)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다. 이 두 명은 동티모르에 국제적인 관심이 없었던 기간에 동티모르의 불행을 외부에 호소하고 동티모르의 자주권을 주장했다.
내가 그 역사적인 공동묘지를 방문했을 때는 마치 지난 상처를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듯 인적이 드물고 고요했다. 생전에 미소를 머금고 찍은 사진들이 묘비에 있는 묘소도 많이 보였고, 시들지 않은 꽃들이 많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을 애도하는 동티모르인들이 다녀갔음을 알 수 있었다. 구스마오 동티모르 대통령이 2002년 4월 16일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처음의 방문지로 선정해 방문하기도 한 산타쿠르스 묘지는 이제 길거리에 옷을 늘어놓고 느긋이 손님을 기다리는 상인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아이들만이 조용히 지킬 뿐이다. 오늘날 11월 12일은 이 나라에서 국가 공휴일(산타크루즈 대학살 추모일)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산티크루즈 묘지에서 해안으로 가는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담벽에 중남미의 공산혁명가인 체게바라(Che Guevara)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을 몇 곳 보게된다. 이것은 프레틸린이 초기에 가졌던 사회주의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24년간 통치하는 동안 동티모르인 25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현재 동티모르 인구가 80만명인 것을 고려하면 전체인구당 사망자 비율로서는 20세기에서 가장 큰 비극이 이 조그만 섬에서 일어난 것이다.
- 중국인들의 상권장악
1999년 주민투표로 독립이 결정된 이후 인도네시아군과 친인도네시아계 민병대들이 폭동을 일으켜 딜리 시내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이들은 폭탄과 휘발유를 사용해 시내의 80%가 넘는 건물과 집을 철저하게 부수고 불을 질렀다. 포르투갈이 1524년부터 1975년까지 451년 동안 통치하면서 동티모르 지역에 딜리를 중심으로 21km의 포장도로를 만든 데 비해 인도네시아는 1975년부터 1999년까지 24년간 통치하면서 300km가 넘는 도로를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섬의 어디에도 탱크와 군용 트럭이 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는 학교와 병원을 여러 곳에 지어 놓았다. 그러므로 인도네시아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이 침략하여 점령한 지역이지만 자기들 나름대로 도로도 건설하고 좋은 건물도 많이 지어 놓았는데 주민들이 자기들에 대해 끝없이 독립투쟁을 하여 이를 괘씸히 여기어 이렇게 극한 행동을 했는지도 모른다. 요즈음도 시내도로 연변에 있는 집 속을 자세히 보면 지붕이 부서져 내린 집 속에 보잘것없는 천막을 쳐 놓고 사는 주민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유엔 평화유지군이 들어오면서 평화가 찾아와 이제 시내를 걸어가다 보면 여기저기서 집을 고치고 새로 짓는 현장에서 망치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동티모르 임시정부는 산에서 함부로 나무를 자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재목을 톱과 도끼를 사용하여 산에서 자른 뒤 시내로 운반해 와 집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주민은 국경에서 서티모르에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 주민들로부터 제재목을 구입해 와서 시내창고에 쌓아놓고 팔고 있는데, 그 값이 아주 비싸다. 시내 몇 곳에 있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건재상에 가보면 시멘트, 합판, 제재목, 망치, 못, 페인트 등등을 팔고 있는데, 뜻밖에 소형 발전기가 많다. 딜리 시내에는 아직도 전력 발전이 충분하지 않아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집이 많다. 그러므로 호텔과 외국인 집에서는 이들 소형 발전기를 구입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현지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있으나, 1999년 주민투표이후 재빠르게 싱가폴이나 인도네시아에서 들어와 상점을 차려놓거나 방에 창문도 없는 간단한 호텔과 식당을 지어 놓고 돈 많은 유엔직원들이나 외국 공관원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재빠른 장사방법을 보면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러므로 전화(戰禍)를 입어 파괴된 도시에서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중국인 젊은이를 보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민들은 가난하지만 유엔직원들과 평화유지군 그리고 외국 공관원 인원이 많으므로 중국인들은 호주의 다아윈과 싱가폴에서 식품과 생활필수품을 배편으로 수입하여 장사를 한다. 이렇게 불편한 환경이므로 외국인들은 중국인들이 부르는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필요한 물건을 살 수밖에 없고 묵을만한 호텔도 없으니, 할 수 없이 형편없는 건물이지만 비싼 방 값을 지불하고 중국인이 소유한 호텔에 묵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남보다 먼저 들어왔다. 위험이 높은 곳에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은 맞는 말인가 보다.
- 부대이동
동티모르가 안정을 찾아가면서, UN 평화유지군의 대대적인 인원감축이 시작되었다. 2001년 11월과 12월에 케냐 부대와 필리핀 부대가 완전 철수하고 상록수부대는 안정을 찾은 라우템 지역을 떠나 서티모르(인도네시아령) 안의 오쿠시 지역으로 부대를 옮겨 계속 임무수행을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이는 상록수부대의 완벽한 치안유지 활동과 모범적인 봉사활동을 높이 평가한 UN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는데, 이를테면 우수부대로 인정받아 최후방에서 최전방으로 투입된 셈이었다. 그리하여 2001년 12월 17일 라우템 지역에서의 임무를 종료하고 선발대와 후발대로 인원을 나누어 대대적인 부대이동을 감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였다. 그 무렵 장병들은 부대 여기저기서 분주히 물자를 포장하고 나르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모두 이삿짐센터 아저씨들로 변한 것이었다. 공보과에는 특히 다른 처부에 비해 짐이 많았다. 컴퓨터, 영상기기를 비롯한 행정용품 그리고 국내에서 망한 비디오·만화가게에서 싸게 구입한 도서 2000여권과 비디오 테잎 2000여개를 챙기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이 무렵 시설물과 장비를 이동하는데 호주군의 지원을 받게 되어 부대로 작업하러 온 호주군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포장된 부대장비와 물자는 컨테이너에 실어 트레일러 차량으로 항구에 옮긴 후 해상로를 통해 오쿠시로 보냈다. 차량과 같은 기동 장비는 직접 테뉴(Tenu) 항으로 옮겨 거기서 선적하였다.
12월 중순경, 이미 공병들의 사전작업으로 준비된 테뉴항 접안시설에 상록수 기동장비들을 실으러 (배 앞부분을 여닫을 수 있는)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촬영을 지시받아 가서 보니 호주 다윈(Darwin)의 퍼킨스 쉽핑(Perkins shipping)이라는 민간 해상 수송 업체의 배였다. 그 배의 승무원 모두가 호주 백인들이었다.
모래사장에 차량이 모래에 빠지지 않도록 깔판을 깔아 그 위로 차량을 지나게 하여 선적을 하였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때 호주군 수송 책임자로 키가 190cm 안팎인 한명의 중위와 상사가 왔는데 많은 서양인들이 그렇듯 한국인들을 대단히 깔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선적을 기다리는 국산 덤프트럭을 보더니 '음 꼴에 제법인데'라고 하듯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작업지원 나온 두 호주군들은 들어온 배의 승무원들과 무전으로 한국군을 놀리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차가 고물이라느니 쇠사슬 감는 방법이 독특해서 이상하다는 둥 별의 별 것에 트집을 잡아 비아냥거리며 낄낄댔다. 열 받았지만 아직 내가 끼어들어 화낼 만한 상황이 아니라 판단되어 참고 있으면서 따끔하게 말할 기회를 노렸다. 한국군의 6륜 덤프트럭이 빠져 허우적대자 운전병은 4륜구동기어를 넣었다. 바퀴가 6개인데 4륜구동이니 앞바퀴 둘은 힘을 내지 못 하였다. 옆에 있던 배의 한 승무원이 나보고 '한국 덤프 트럭 제조업체에 전륜 구동으로 만들라고 해야겠다'라고 하길래 내가 '한국에서 쓰던 장비를 그냥 가져 온 것인데 한국에서는 도로가 좋아 트럭을 전륜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빈정거리며 대꾸했더니 그 직원이 쭈뼛거리며 '말되네요(fair enough)'라고 했다. 사실 나는 그 덤프 트럭이 왜 4륜구동만 되는지 몰랐다. 조금 있으니 그 덤프트럭이 후진하여 선적하려 했다. 호주군 중위가 입에 껌을 짝짝 씹으며 차가 모래에 빠지니까 도중에 멈추지 말고 빠르게 후진하라고 지시했다. 운전병이 빠른 속도로 후진한다고 했는데 실패하여 도중에 잠깐 차를 정차하는 바람에 트럭이 또 모래에 빠져 허우적댔다. 그러자 그 호주군 중위는 욕을 하기 시작했다. 목을 손으로 긋는 시늉을 하며 "ㅆX 멈추지 마! (Don't fucking stop!)"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사무적인 자리에서 그런 욕을 하면 수준 낮은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또 이를 들은 상대방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귀는 정상이었다. 그 중위는 완전히 맛이 가서 극단적으로 무례한 단어들을 섞어서 쓰기 시작했다. 작업을 하던 전우들이 영어를 못한다 해도 외국영화를 통해 귀에 익어 그 정도 욕설은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더욱 괘씸한 것은 상록수 부대 대위, 소령이 있는 자리에서 욕설을 마구 했다는 데 있다. 국적은 서로 달라도 같은 평화유지군으로서 상호존중이 되어져야 하는데, 한국군을 얼마나 깔봤으면...!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나는 도저히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어 그 중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당신이 우리 장교들 있는 데서 좀 더 예의를 갖춰 줬으면 고맙겠습니다. (It would be very much appreciated if you could show a little more respect in presence of our officers)"라고 했다.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O.K" 라고 했다. 그 후로 그날 작업이 끝날 때까지 그는 두 번 다시 욕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본 상록수부대의 소령 한 분이 매우 흐뭇해하였다.
동티모르 사태를 통해 호주는 여러 가지 경제적인 이익을 보게되었다. 그런데 호주인들은 그들의 경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동양인들을 마냥 '봉'으로 보고 멸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많이 느꼈다. 이에 대해 동양인들, 최소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 앞에서 주눅들지 말고 당당히 할 말은 하여야 그들이 얕보지 못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 보았다.
- 결실과 배신
상록수부대의 라우템 지역에서의 임무는 12월 중순을 전후하여 종료되었지만 우리는 그곳에서의 활동을 마무리지으며 또 다른 결실들을 보았다.
2001년 12월 18일 가진 레우로 교회준공식에 이어 다음 날인 12월 19일에는 선발대로 편성된 병사들이 헬기를 타고 오쿠시 지역으로 먼저 이동하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에는 한국기업들의 지원을 받아 구한 구호품들을 로스팔로스의 임마뉴엘(Immanuel) 교회, 돈 보스코(Don Bosco) 성당, 바우로(Bauro) 성당, 인도네시아 수녀원 등에 전달하였다.
12월 31일, 종무식을 끝으로 이국땅에서 새해를 맞았고 2002년 1월 2일과 1월 4일에는 상록수 공병들이 그동안 땀을 흘린 결실인 세뻬라따 성당공소의 준공미사와 준공식을 각각 거행하였다.
1월 4일 밤에는 유관기관 초청만찬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부대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결성된 '꼬레아 $1 장학회'를 통해 모은 장학금을 라우템 지역행정관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1월 8일에는 국내 합동참모 측에서 보내온 호메마을 개발기금을 전달하였다.
위와 같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는 촬영을 나가서 여러 가지를 보고 동티모르 주민들의 다른 면을 보고 느낀 점이 있다.
이 가운데 몇 가지를 국제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파병전 국내 보도를 통해 동티모르인들이 처해있는 불행한 현실과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동정심이 생겼다. 그들은 외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고 그들이 받은 도움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이러한 보도를 통해 생긴 선입견 때문에 맹목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우선 2002년 1월 4일 있었던 세뻬라따 성당 공소 준공식에서 있었던 일이다. 준공 기념식에 단장의 축하 연설 한 마디에 이어 공소를 담당하는 필리핀 출신 신부의 감사답사가 있었다. 분위기는 잔치 분위기로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 마을 아저씨가 정중하게 단장께 고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고 한다는 말이 공소를 지어줘서 고맙긴 한데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가 현지말로 하면 필리핀 신부가 영어로 통역하여 숨죽이고 무슨 말이 나올까 들어 보았다. 들어보니 문손잡이, 창문, 지붕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쳐달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았다.
때는 준공식 중이었다. 아무리 건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공짜로 땡볕 아래서 노동력까지 제공하며 지어준 공소였다!
설사 불만이 있더라도 그런 불만은 단장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오랜 기간동안 식민지 통치를 받은 다른 태평양 섬나라들을 다니며 그들이 노예근성이 있음은 일찍부터 알았으나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공적인 자리에서의 노골적인 발언은 처음 보았다. 순간 놀랐으나 곧 배신감이 느껴지면서 열이 올랐다. 말을 알아들은 전우들의 눈치도 그렇게 편해 보이지 않았다. 단장은 훌륭한 지휘관답게 평정을 잃지 않고 묵묵히 끝까지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당시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그때 그 자리는 마치 주민들이 단장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려고 준비한 자리 같았다. 그 아저씨의 트집 잡기가 끝나고 주민들이 준비했다는 축하 공연이 이어졌는데 하도 열이 받은 상태인지라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장난 같았다.
1월 8일 호메마을 개발기금 전달식 때의 일이다. 호메마을 회관에 마을 사람들이 모였고 그날 따라 어느 호주군의관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의 계급은 대령이었다. 단장이 개발기금이 든 봉투를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진을 촬영 후 회관을 나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자 해산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조금 있으니 그 호주군의관이 나오길래 무슨 일이냐고 내가 물어보니 마을 사람들이 우리 부대가 하지도 않은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고 따지더란다. 세뻬라따 공소에서의 그 아저씨가 실수로 그런 무례한 발언을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 호주군의관은 단장 옆에 있다가 주민들이 말도 안 되는 것으로 항의하자 오히려 자기가 그 자리에 계속 있기 무안해 먼저 나왔다고 했다. 또 덧붙여 자기가 우리 지휘관이었다면 상당히 당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도 주민들의 비난은 끝없이 이어져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모임이 되었다. 개발기금을 받으려고 모인 자리인지 상록수부대를 비난하려고 모인 것인지 분간이 안 갔다. 아무튼 받을 돈은 다 받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와 같은 사실 외에도 여러 가지 황당한 상황들이 많았다. 우리가 전달 해 준 구호품들 가운데 의류도 있었는데 좋다고 히히덕 거리며 가지고 갈 때는 언제고 얼마 후 옷 사이즈가 맞지 않다고 도로 가져와 항의를 하는가 하면 상주 중대 철수 때는 주민들이 돌을 던지며 철수하더라도 TV와 비디오는 놓고 가라고 했단다. 이러한 실정은 오쿠시에서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주민들이 얼마나 살기가 힘이 들면 이런 행동을 할까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물론 내가 만난 동티모르인 가운데에는 성실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그러한 문화적(?) 충격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 또 다른 시작
라우템 지역에서의 임무를 종료하고 선발대와 후발대로 편성된 부대 인원들은 오쿠시까지의 육로가 없는 관계로 헬기를 타고 새로운 담당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나는 후발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2001년 1월 10일, 단장을 비롯한 후발대 인원들은 푸일로로 평원에서 MI-26 헬기를 타고 약 2시간 후 오쿠시에 도착하였다. 우리의 부대 이동은 한국군 동티모르 파병 이후 최초로 실행된 것이라 상당히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고지대인 로스팔로스에 비해 기온이 높아 40도를 웃돈다고 하더니 내리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땅으로부터 올라왔다.
먼저 나는 촬영을 위해, 순시하시는 단장을 따라 넓은 평지의 지원대 시설로 이동하였다. 높고 푸르른 멋진 산을 뒤로 한 지원대에서 우리는 공병들이 짓고 있는 목조집들을 보고 감탄을 하였다. 불과 후발대보다 20여일 먼저 와서 공사에 투입되었지만, 엄청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도 갈길은 멀어 보였다. 그들은 쉴 새 없이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공병은 우리 공병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원대로 들어서면 좌측에는 병사들의 임시숙소인 군용 검은텐트들이 보였고, 우측에는 목조로 만든 집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목조집들이 다 완성되면 텐트는 걷고 그리로 입주할 예정이었다. 지원대 가운데에는 후발대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다녀간 한국 해군의 보급선이 가져온 보급품들이 쌓여 있었다.
로스팔로스에서와는 달리 오쿠시에서는 지원대와 단본부가 분리되어 있었다. 차를 타고 약 5분 떨어진 단본부에 들어서자, 그곳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아직 철수하지 않은 요르단 군들도 보였다. 로스팔로스에 있을 때부터 요르단 군들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들을 많이 들었다. 그들이 오쿠시 여인들을 자주 성추행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선입감이 있어서인지 그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음흉해 보였다.
군복을 착용하지 않고 휴식 중인 요르단 군인들은 마치 여성복 같은 원피스로 된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이슬람 문화권의 그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정한 시간을 간격으로 갑자기 일어나 돗자리를 깔고 동쪽으로 엎드려 몇 차례 절을 하곤 하였다. 아무것도 깔지 않은 시멘트 바닥 위에 빵을 그냥 놓고 먹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요르단군이 사용한 건물은 폭격을 받은 듯한 인상을 주었다. 막사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고, 그들의 주방은 쓰레기장을 연상시켰다. 샤워장의 시퍼런 이끼는 그렇다 하더라도 풀이 50cm 이상씩 자라 있는 것은 이해가 안 갔다. 어쩌면 그들은 자연과 더불어 샤워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물을 틀어보니 물이 나오지를 않았다. 오쿠시는 물이 부족하여 먼 수원지에서 급수차를 이용해 운반해온 물을 제한급수한다고 했다. 가장 놀란 것은 그들이 사용했던 화장실을 보았을 때이다. 딜리 시내의 컨테이너를 개조한 고베하우스와 같이 단본부에도 고베하우스 몇 동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화장실로 제작된 것들도 있었다. 요르단 군들은 좌변기 위에 올라가 변을 보아서 그들의 변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2차 대전당시 폭격 받은 진주만을 보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들어간다는 자체가 불결하게 느껴지는 정도를 넘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변기 옆에는 보라색의 플라스틱 주전자가 보였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몰랐다. 하루는 어느 요르단군이 그것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보여준다고 친절하게도(?) 문을 열고 변을 보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우리처럼 휴지를 사용 않고 볼일을 본 후 물을 왼손에 따라 뒤를 닦았다. 물론 그가 일부러 보여 준 것은 아니고 어느날 화장실에 들어가 우연히 목격했는데 그때 졸도하는 줄 알았다. 그 후로는 가끔 요르단군이 악수를 청하려고 오는 눈치면 미소를 띤 얼굴로 크게 인사하고 바쁜 척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우리들은 누군가 그 화장실을 청소하라고 지시할 것 같아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그 화장실 청소에 투입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고문이자 극기훈련이었는데, 우리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수습되지 않았다. 우리는 'UN에 이 화장실 반납하자!'라고 절규에 가까운 소리로 투덜거렸다. 아무리 해도 사태가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청소를 그만 하라는 지시가 새로 내려왔다. 그때 그 기분은 마치 적진에 포위 당했다가 구출하러 온 우군 헬기를 보는 것 같았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을 가진 우리로서도 요르단군의 뒤처리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요르단군이 무섭다(?)는 것도 느꼈다.
내무실과 사무실을 보수하느라 쉴 새 없이 들리는 전기톱과 드릴 소리, 망치질 소리, 포크레인의 소음, 분주히 다니는 트럭, 또 이에 따라 발생하는 흙먼지.... 난리 그 자체였다. 거기에다가 '엎친 데 덥친' 격으로 많은 고베하우스 사무실 가운데 하필이면 우리 처부 사무실만 에어콘이 작동되지 않았다. 정말 '악몽' 그 자체였다. 부대원들은 주둔지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당분간 모두 공병이 되어 버렸다. 오쿠시라는 '열악 동산'에서 보내는 첫날부터 벌써 로스팔로스가 그리웠다.
식당은 아직 단본부 지역에 설치되지 않아 우리는 매 끼마다 지원대 시설로 가서 식사를 해야했다. 식사 때마다 병사들은 서둘러 각자의 식판과 숟가락을 들고 나와 트럭에 올라타고 지원대로 갔다.
당시 우리 모두는 공병이 되어 제각기 다른 작업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식사 때 데리러 온 트럭을 놓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럴 때면 무리를 지어 줄줄이 식판을 들고 걸어서 지원대 시설까지 이동해야 했다. 차로는 5분이면 될 거리를 그 작열하는 태양 아래 걸어서 20분을 가야했다. 한번은 20여 명이 무리를 지어 걸어가다가 지나가는 군용 짚 레토나 한대를 발견, 그 안에 모두 끼여 타기로 했다. 소형차에 사람들을 최대로 많이 태우는 '기네스북'의 실험을 우리는 땀으로 끈적거리는 몸에도 아랑곳 않고 몸소 실천한 것이다. 최대한 끼여타 모두 탑승하는데 성공했다. 그 작은 짚차에 장정 20여 명을 태울 수 있다니 우리들 자신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로에서 이를 목격한 주민들도 신기해하면서 우리를 지켜보았다. 왜 국산차가 이제 해외무대에서도 당당히 어깨를 겨룰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도로 사정이 나쁘기는 오쿠시도 만만치 않았는데 겹겹이 무릎 위에 앉아 더러는 발까지 차창 밖으로 내밀어야 했던 우리에게 도로에 뚫린 구멍을 지나는 것만큼 괴로운 것은 없었다. 구멍을 지나 차가 꿀렁거릴 때면 밑에 깔린 병사들은 괴로운 신음소리를 연발하였고 죄 없는 운전병은 엄청 욕을 얻어먹었다. 이러한 가운데 누군가 '우리는 지금 세계기록을 세우고 있으니 아파도 좀 참자'고 하여 우리는 신음과 낄낄거리는 소리를 섞어 내면서 목적지로 향했다. 밥 먹는 것 자체가 일종의 '행사'였고 그때의 삶 자체가 '유격 훈련'이었다.
물이 부족하여 식기를 세척하는 것도 문제였다. 급수차가 오면 장병들이 벌때같이 급수차에 달라붙었는데, 그나마 짬(서열)에 밀려 뒤로 가야 해서 닦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급수차는 일단 도착하면 샤워장에도 동시에 물을 공급했으므로 샤워장도 매우 붐볐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물이 바닥나는 바람에 식기세척이고 샤워고 아무것도 없었다. 이 때문에 식기를 세척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었는데, 이런 경우 다음 끼니 때 식판에 적당히 눌어붙은 음식물을 반찬과 함께 나온 국으로 헹궈 먹었다. 더러는 UN에서 부식으로 나온 호주산 쥬스로 헹구는 때도 있었고, 더 운이 좋아 UN에서 보급되는 생수가 남아도는 날에는 그 물로 식기를 헹구었다.
샤워를 할 때면 이미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이었다. 급수차 옆에 위치한 샤워실에는 여러 명이 한 샤워기를 공유하여 사용했는데, 시끄러운 사람들의 말소리도 그렇지만 우선 급수차의 모터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또 한쪽 구석에는 철제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의무대의 방역 차량이 흰 연기를 뿌리며 지나간다. 이 모든 것들이 영화에서처럼 실제 전쟁을 방불케 하는 특수효과로 쓰여 야전 경험의 확실한 추억을 남겼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물만 찍어 바르고 마는 샤워라도 어렵게 하면 그 개운함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육군 최정예 요원들답게 우리는 그렇게 '열악 동산'에 빨리 적응하고 있었다. 오쿠시에 도착한지 두달만에 우리는 훌륭한 주둔지를 완성하였다.
- 새로운 임무
상록수부대의 주요임무인 치안유지활동은 오쿠시로 부대이동 후 더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상록수부대가 오쿠시 지역으로 들어오기 전 주둔하고 있던 요르단군은 주민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던 터라 주민들은 상록수부대의 오쿠시 주둔을 매우 환영하였다. 라우템에서는 인도네시아와 맞대고 있던 국경이 없었지만 오쿠시는 사방이 인도네시아 영토에 둘러 쌓여있어 국경통제라는 전혀 새로운 과제를 맡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사이의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제한된 병력으로 상주작전과 5개의 국경통제소(JP; Junction Point)를 운영하는 것은 부대 임무수행 가운데 가장 필수적인 것이었다. 상록수부대는 국경선을 경계로 인도네시아군 641대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도네시아군과 서로 경계하여 긴장감이 돌았으나 양국군의 노력으로 이를 우호적인 분위기로 바꾸어 나갔다. 작전시 차량과 UN 헬기를 이용해 부대원들의 작전 투입과 복귀, 물자 재보급 등을 실시하였다. JP 및 상주작전중대에서는 도보 및 기동순찰, 태권도 교육, 영화상영, 한국어 교육, 의료지원, 축구교실을 열어 지역주민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다.
매일 평균 200여 명의 주민들이 수시로 왕래하는 국경통제소에는 그 당시에도 긴장감이 돌았다. 민병대로 여겨지는 이들과 작은 교전도 몇차례 있었으나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주민들 중에는 마치 한국의 이산가족을 보듯 가족들의 일부는 오쿠시에 일부는 서티모르에 사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며, JP에서 이 떨어져 사는 가족들의 안타까운 만남을 볼 때면 우리의 이산가족들이 생각나곤 하였다. 상록수부대는 국경선에서의 완벽한 치안유지로 주민들의 불안을 말끔히 해소해 주었다.
- UN 메달수여식
상록수부대가 동티모르에서 활동한지 5개월이 되어 어느덧 귀국할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2002년 3월 18일 상록수부대 연병장에서 '위나이 파티야쿨'(Winai Phattiyakul) 평화유지군 사령관 주관으로 UN 메달수여식이 있었다. UN 메달이란 1966년 UN 특별규정에 의해 제정되어 UN의 일원으로 세계평화유지에 참여한 군인 및 경찰에게 수여되는 메달인데, UN과의 활동기간이 3개월 이상이면 동메달을 수여하고 9개월 이상이면 은메달을 수여한다. 이날은 상록수 5진 장병들의 UN과의 평화유지활동이 3개월 이상 되는 것을 기념하여 동메달을 수여하는 날이었다.
이날 행사에는 동티모르 평화유지군 각급 지휘관, 동티모르 방위군, 유관기관 대표, 동티모르 한국대표부 공사, 오쿠시 지역 행정관, 그리고 지역주민 약 500여 명이 참석해, 메달이 수여 되는 장병들을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PKF 사령관의 메달 수여식 훈시가 있었다. 사령관은 상록수부대 5진 전 장병의 UN 메달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그동안 완벽한 치안유지 활동과 민사작전으로 지역 주민들로부터 높은 신뢰를 얻고 있다고 지난 상록수부대 활동을 평가했다. 또한 귀국하는 날까지 남은 기간에도 변함 없이 임무수행에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메달 수여식에 이어 사물놀이 한마당, 동티모르 전통춤인 떼베떼베 공연이 열렸고, 약 150여 명의 오쿠시 현지 태권도 교육생 태권도 시범과 하이라이트인 특공무술 시범이 진행되어, 행사의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어 갔다.
상록수부대가 오쿠시에 주둔한 기간이 길지 않아, 사물놀이 공연은 현지 주민들에게 꽤 낯설고 이색적인 것이었다. 이날의 공연은 주민들에게 신선한 문화체험이 되었다.
떼베뻬베는 상당히 단조로운 리듬이 계속 반복되는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으로, 지역에 따라 특색이 있어 오쿠시의 것은 로스팔로스와 사뭇 달랐다. 공연시간은 대체로 10분에서 20분 정도이고, 공연단은 보통 18명으로 이루어진다. 공연복장은 '라린라우'(Larin Lau)라는 전통의상이고, 여성들은 '빠야'(Paya)라는 목걸이나 '오쪼히'(Ocohi)라는 팔찌, '레수'(Lesu)라는 손수건을 양손에 잡고 공연을 한다.
태권도 시범에는 한국 태권도 교관으로부터 수련받은 500여 명의 오쿠시 태권도 수련생들 가운데 150여 명이 참가하였다. 배운 기간이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서 태권도만 연습하는지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그들이 입은 태권도복은 국내 여기저기에서 기부받아 나누어 준 것들이어서 앞에서 보면 한결같았으나, 그들이 뒤로 돌아서면 등에 전국 태권도장들 이름이 가지각색으로 적혀 있었다.
특공무술 시범은 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 특전사들이 웃통을 벗어 단련된 몸을 과시하며 단전호흡을 한 후, 대검을 가지고 전원이 일관된 동작으로 공격 시범을 보여 주었다. 이어지는 순서는 온몸을 이용한 차력 시범과 벽돌, 합판, 맥주병 격파였는데, 마지막 격파는 온몸을 날려 머리로 기왓장을 격파하는 미사일 격파로 이는 보는 이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힘찬 기합과 함께 전력질주를 한 특전사들은 온몸을 날려 공중에서 일자로 유지하고는 그대로 머리를 기왓장에 들이받았다. 아니 꽂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기왓장은 박살났고, 기왓장을 받치고 있던 3명의 특전사들은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가 잠시 후 한 무더기로 땅에 떨어졌다.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고 나는 그 장면을 바로 앞에서 촬영하다가 온몸에서 전율을 느꼈다. 정말 멋졌다. 그리고 이로써 행사는 종료되었다.
나중에 이 행사를 관람한 주민들이 말하기를 미사일 격파를 보기 전까지는 한국군이 마냥 따뜻하고 친절한 줄 알았다가, 이렇게 무서운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UN 메달수여식이 끝나고 얼마동안 우리는 의무대에서 파스를 구할 수가 없었다.
- 내일을 향하여
상록수부대 5진은 6개월이란 동티모르에서의 파병생활을 마치고 2002년 4월 24일 전원 귀국하였다. 그리고 특별휴가를 받아 여유롭게 쉬고 있는 동안 동티모르의 독립소식을 접했다.
2002년 5월 20일, 지난 32개월 동안 동티모르를 대신 관리해 주던 UN과도행정부의 상징인 UN기가 내려오고 고난을 상징하는 검은색, 피와 투쟁을 상징하는 붉은색, 번영을 상징하는 황색 그리고 영광과 희망을 상징하는 흰색별이 그려진 동티모르기가 올려졌다. 동티모르가 근 500년 동안의 외세의 점령과 통치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 드디어 독립국가로 등록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24년간 동티모르를 강제 지배하였던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대통령도 초대를 받아 이 독립선포식에 참가해 새로운 독립국의 구스마오 초대 대통령에게 축하인사를 하였다. 구스마오 대통령은 이날 인도네시아 영토로 남아있기를 주장하며 동족을 살해하고 서티모르로 도망가있는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의 행위를 국민의 화합을 위해 용서하고 사면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독립을 위해 큰 희생을 치룬 프레틸린의 일부회원과 지지자들은 동족을 학살한 자들을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 된다고 주장했다. 독립국이 된 동티모르의 앞길에는 풀어야할 과제가 많다.
첫째, 우선 아직도 치안이 불안하다. 2001년에 국군과 경찰이 창설되긴 했지만, 아직까지 자력으로 치안을 맡기엔 역부족이다. 이에 UN은 당분간 평화유지군 소속 군병력 5,000여 명과 경찰 1,250여 명을 주둔시켜 동티모르 국경수비와 치안유지를 지원할 계획이지만, 마냥 UN에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치안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국가건설에 필요한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데도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둘째, 세계 최빈민국의 자리에서 고생하고 있는 국민들을 살리는 것도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이다. 현재 동티모르에는 커피농사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산업이 전혀 없어 실업률은 70%에 이르고 있다. 다행히 티모르섬과 호주 대륙 사이에서 거대한 해저 유전이 이미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동티모르 육지에서도 유전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나온 기름은 동티모르의 경제를 가까운 장래에 발전시켜 줄 것이다. 구스마오 대통령은 2002년 5월말 서울을 방문하여 월드컵 개막식에도 참석하였고 우리나라 인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동티모르의 경제발전 계획에 우리나라 기업의 참여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셋째, 인도네시아 통치기간을 통해 형성된 높은 문맹률을 낮추는데는 오랜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독립되면서 포르투갈어를 국어로 채택한 것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지구촌에서 여러나라와 함께 교류하며 살아가는데 지장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포르투갈어는 포르투갈 본국과 브라질 그리고 아프리카의 몇 안되는 옛날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가난한 나라들에서 사용하고 있다. 현재 동티모르 국민 가운데 포르투갈어를 이해할 수 있는 인구는 10% 정도의 소수이다. 인도네시아 통치기간 중 사용되던 인도네시아어를 버릴 바에야 차라리 영어를 국어로 삼았더라면 옆에 있는 호주와도 국민적인 교류를 하면서 더 빠르게 발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동티모르의 독립을 도와준 우리로서는 이나라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하루빨리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군생활을 통해 여러가지 경험을 하였는데 나는 이런 기회를 준 대한민국의 군대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한순간의 꿈처럼 지난 상록수부대 5진의 동티모르 파병!
나는 대한민국 육군 일반 병사의 신분으로 세계평화 유지군의 일원으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던 기회를 준 조국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